안양20150612b-히10장20절(속죄의 순환) - 이 근호 목사
안양20150612b-히10장20절(속죄의 순환) -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59.26.32.51)
안양20150612b-히10장20절(속죄의 순환) - 이 근호 목사
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성도라는 인생에다 이 성경 말씀을 그대로 카피(copy)를 한다는 뜻 이예요. 이 성경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 성경 말씀이 허락도 없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우리 내장을 갈라놓는다 하잖아요. 이 내부를 해체를 해버리고 이 내부에다 말씀을 거기에다 담아 놓아버린 거예요. 우리는 만두피고 안의 속에 있는 알맹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성취성이고, 예수님의 공생애! 이것이 우리에게 들어와 버립니다.
그러면 그 만두피에 대해서 우리가 거기서 뭐를 표현하느냐 하면 예수님 공생애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 대표적인 사람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죠. 이런 사람들의 모양새가 우리 인생을 통해서 마구, 마구 표출이 돼요. 바리새인이 누구냐? 우리에요. 서기관이 누구냐? 우리에요. 사두개인이 누구냐? 우리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찔러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살해한 적 없다고 우기는 우리에요. 그리고 나는 바람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간통한 적 없다고 우기는 우리에요. 증서를 써주면 이혼이 합법화 된다고 우기는 우리에요. 그리고 멋있게 맹세한 것을 지키면 주의 뜻을 이룬 걸로 여기던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해서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린데 주께서는 그런 거 기도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바리새인은 우리의 대표자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누굴 핍박했습니까? 예수님을 핍박했잖아요. 오빠 죽었다고 예수님 만나서 울고불고 했던 마르다 마리아가 우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공생애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속에 다 들어오니까 다 같은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똑같이 아담의 자손들 이예요. 네가 생각했던 네가 그 상황에서 표출했던 네 육신적인 본성이 내 속에 잠복돼 있고 잠재돼 있는 거예요. 우리도 똑같은 상황 오게 되면 똑같은 그러한 원망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 신약만 그런 게 아니에요.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원망했던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에요. 물 없어 원망하고 양식 없어 원망한 것이 당연한 거죠. 적군 아말렉 군대 왔을 때 자기 몸 하나 건사 못하는데 적들이 왔을 때 어떻게 합니까? 원망할 수밖에 없죠.
모세가 지팡이 들고 올라갈 때 승리했습니까? 홍해 왔을 때 우리는 죽었다 하고 낙심한 게 우리죠. 그런데 홍해가 갈라질 줄 상상도 못했죠. 그러니까 항상 전에도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이 기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거예요. 설명이 되는 기적은 이건 가짜입니다. 이건 기적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기도 열심히 하라든지, 금식하면 된다든지, 이런 것은 전부 다 기적이 아니에요. 이건 노림수에요. 사람들은 그걸 기적으로 알아버리면 기적이 안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기적이 온 것처럼 행세 꽤나 해요. 빨리 자기도 간증 집회 하고 싶어서.
주의 진정한 기적은 요나의 기적입니다. 이건 뭐냐 하면 죄인인데 뭐 됐다? 의인 됐다, 이거거든요. 죄인 됐는데 의인 됐다. 이걸 증거 해야 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암 걸렸다 나았다. 이걸 자꾸 증거해 버려요. 가난했는데 부자 됐다. 이걸 증거한다고요. 죄인 되었는데 의인 되었다를 간증하려면 우리는 깊숙하게 어디에 빠져야 됩니까? 뭘 해도 죄인이었다가 나와야 돼요. 이게 바로 설교자의 설교가 돼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가 나와 줄 때 바로 이러한 이 인간이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고백이 나온 거 자체가 이미 의인 됐죠. 고백되었기 때문에 이런 의인이기 때문에 무슨 우사스럽다는 욕설이 들어왔다 할지라도 나의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증거 할 수 있는 거, 이게 정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무슨 배짱인지 무슨 자존감이고 이런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느냐 말이죠. 도대체.
사도바울이 말했잖아요. “내게 어떠한 환경이 온다 할지라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어떤 일을 했는데? 지금 하고 있잖아요? 지금 하고 있는 일 이예요. 그걸 잘못 해석해서 ‘아이고, 교회 어려움이 있고 가정에 어려움이 있으면 열심히 하세요. 다 능력 주시니 할 수 있습니다.’이건 목표 따내기지, 실적 올리기지, 그거는 이거하고 전혀 성경적이 아니에요.
성경은 의인이 주는 이 땅의 혜택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유입니다. 자유라 하는 것은 이건 자율이 아니에요. 자율은 철학에서 말하는 자율을 자유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먹은 대로 하는 그러한 정당성이 있다. 이거는 철학에서 말하는 자율을 말하거든요. 이 자유, 자율의 요구를 신학에 집어넣어 보면 신학이 엉망이 돼 버리죠. 뭐냐 하면 자유 의지가 있다는 거.
의지 앞에서는 자유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이게 개념상. 의지면 의지지, 자유 의지가 뭡니까? 자유 없는 의지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유 없는 의지가 어디 있어요? 모든 의지는 다 자유에요. 철학적 개념에서. 사람들이 지금 말장난 시키고 있어요. 누가 옆에 나무라면 ‘그래서 되겠어요? ’ 앞에서는 ‘예’ 하지만 속으로는 ‘되게 틱틱 거리네.’ 이게 의지잖아요. ‘짐에게 복종하라.’ 하면 ‘예에~’해놓고는 ‘지가 왕이라’이게 자유란 말이죠. ‘아직도 지구는 돈다.’혼자 중얼거리는 거, 이게 자유잖아요. 틱틱 거리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 자체가 의지인데 무슨 여기서 자유를 붙인다는 게 이상스럽잖아요. 자유 떼면 그럼 이 의자가 어떤 의지인데? 안 자유로워요?
인간이 인격이 있다는 자체가 지 정 의, 의지가 있다는 말인데 이 자유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에서 하는 자유는 이런 뜻이 아니고요. 이거는 뭐냐 하면 소속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속하지 아니했다. 특별히 달리 다룬다.
휘장이라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성소 안에 있어요. 여러분 다 아시지만 이 본문에 나왔으니까 성소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성막이 있는데 여기 50미터, 25미터에요. 동쪽인데 동쪽에 문이 있고 요 앞에 제단이 있어요. 네모난 제단, 놋 제단인데 요 앞에 동그라미로 대서 받치고 있는데 이걸 물두멍이라 해서 손 씻는 데에요. 그 다음에 여기에 텐트가 있는데 텐트가 나눠졌고요. 입구가 여기 동쪽으로 있어요.
성경에서 동쪽이라는 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거든요. 12지파 가운데 이동 방향이 동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여기 성소에 앞이 딱딱한 향로가 있어요. 그리고 이쪽에 북쪽으로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떡을 12개 놓는 테이블이 있어요. 요 앞에 조명시설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조명시설이 있는데 요게 가지가 여섯 개 나오는 합쳐서 7개 되는 가지, 총 합해서 살구꽃이 피는데 23개 살구꽃, 요게 조명시설로 해서 비치게 돼 있어요. 불똥 튀니까 아침, 저녁마다 여기 와서 제사장이 여기서 불똥, 기름 이런 거 관리하게 돼 있습니다. 요게 성소에요. 이 전체를 성소라 해도 되고 요게 성소에요.
그 다음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는 아카시아 나무에다 금박을 입혀서 뚜껑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이중으로 돼 있다 하는데 이중은 성지에는 없고 한쪽으로 돼 있고, 왜 이중으로 돼 있느냐 하면 처음에 제일 밑에는 깨어진 돌 판에서 대신 다듬은 모세가 두 번째 산에서 하나님이 글씨 쓰신 그 돌판 있고 그 위에 깨진 돌판 있다. 이래서 이 중에 하나인데 이중은 유대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이중이 아니고 그냥 돌 판 들어있는 상자에다 천사가 얼굴을 마주보면서 날개를 펼치고 있어요. 여기 테피리스트라 해서 편물로 짠 천사들이 있어요. 그러면 이쪽에 들어올 때는 세상이죠. 여기는 물질세계. 마지막 도착지점이 어디입니까? 이게 바로 천사가 있는 묵시세계로 가는 거예요. 갈 때 그냥 못 가고 반드시 여기는 있어야 되느냐, 피를 발라야 돼요. 피를 바르고 피를 들든지 해야 돼요.
피라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죽음인데 우리는 자살해서는 안 돼요. 이 피는 어느 피냐 요기 희생 제물의 피입니다. 희생 제물의 피만 되느냐, 아닙니다. 희생 제물은 여기 제단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놋 제단에서 불로 타버려야 돼요. 그러니까 진노로 홀라당 타고 진노의 불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희생의 피로 인하여 육신이, 세속이 영을 만날 수 있는 거예요.
이거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으로 와서 육신이라는 그 만두피, 만두 껍데기 안에서 본인의 여정을 밟아서 드려 묵시 세계에 이르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 끝난 건 안 돼요. 하늘로 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끝나고 난 뒤에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요 피를 지상 밑에 담아둬 버리죠. 담아둬 버리면 이 땅 전체가 요것만 거룩이 되고 이쪽은 속세가 되면서 이 속세가 거룩에서 나온 거룩의 능력에 의해서 여기는 장차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불바다 됩니다. 노아 홍수 때 물바다 된 것처럼. 노아 홍수 때 방주 빼놓고 다 물바다 됐잖아요. 참 재밌죠. 방주가 이게 물에 뜨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물은 방주 안에 못 들어오고 분명히 물이라는 것은 심판의 물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심판 속에서 뜨게 돼 있어요. 심판이 스며들지 않는 거예요.
노아 방주에 심판이 스며들지 않는 이유는 노아 안에 있는 정결한 희생 제물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희생 제물을 나중에 홍수 끝나고 요 두 마리 희생 제물을 잡아요. 그 피로 말미암아 그 방주는 심판을 이길 수 있었던 겁니다. 노아는 이것을 믿음으로 알았다 하죠. 히브리서 11장에서.
거룩이 이 안에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이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거룩 빼놓고 전부 다 나는 삭제가 돼요. 불로써 제거되고 삭제가 되고 남는 것은 이 거룩이 있는 천국과 이걸 지배했던 영적 세계가 지옥으로 나중에 분화가 되는 겁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금은 예수님 십자가 졌고 이 세상의 지옥의 일부로서 남아있다는 그거까지만 돼 있고 불 심판 아직 오지 않고 있어요. 안 와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우린 뻔히 아니까. 십자가에 있는 사람은 뻔히 알아요. 이 세상이 지옥이란 사실을. 귀신이, 불순종이 역사하는 영들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거, 에베소서 2장 2절에 나오잖아요. 너희들이 옛날에는 불순종의 영들에게 지혜를 받았지만 지금은 하늘에 앉히시니, 아까 봤죠. 에베소서 2장 6절, 하늘에 앉힐 정도로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 제가 이 거룩을 위에 두지 않고 안에 두는 것은 바로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그 근거는 바로 갈라디아서 3장 1절입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우리 같으면 우리 보통 신학자 같으면 이렇게 안 해요. 주님이 지금 하늘나라 보이죠? 자꾸 하늘나라 보라 하는데 사도바울은 뭘 보라 합니까? 십자가를 보라 해요. 십자가 사건!
지난 낮 설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이 만난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고 예수님이 몰고 온 십자가 사건이라 했죠. 예수님만 만나버리면 예수님은 한번 만나고 없어져 버려요. 부활했기 때문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부활했던 그날 오후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 나타나셨죠? 저녁까지 있었잖아요. 동행해서 이야기하고 저녁 되고 난 뒤에 어떻게 됐습니까? 사라져 버렸죠.
그럼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은 사라져도 무슨 사건이 남았다? 예수님이 몰고 온 십자가 사건 안에 놓여있죠. 그래서 '예수님을 보라'가 아니고 뭘 보라? 십자가 사건을 보라. 십자가 사건의 현재화에요. 십자가 안에 예수님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바깥을 정죄할 수 있어요. 십자가 바깥의 세상은 죽었고 세상에서 보면 이쪽은 죽은 자가 돼요. 죽어서 천국 맨션아파트 간다.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지금 이 땅에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 지금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하늘나라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다니엘 세 친구 어디 있느냐, 물었잖아요. 다니엘 세 친구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고 불안에 있어요. 불안에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사람 못 들어와요. 들어오면 죽으니까. '아, 불에 나도 들어갈래.' 하면 타죽죠. 네 번째 사나이가 호출한 사람만, 그 세 사람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갔는데 다니엘이 안 죽었어요. 사자 굴에 들어갔는데 이 사자가 잠을 잤는지 배가 안 고픈지 그냥 있어요. 정말 사자가 식욕이 없었을까요? 다니엘 빼놓고 다른 사람 집어넣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다 뜯어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서.
그 다니엘 세 친구를 잡아넣을 때 불이 너무 약했을까요? 다니엘 세 친구를 잡아넣는 사람들이 자기 딴아 완전무장 했는데도 다 타죽었어요. 불 온도를 높여놨든지. 그런데 같은 세포로 돼 있는데 같은 물질로, 인간은 단백질로 돼 있기 때문에 500도 이상이면 다 타버립니다. 단백질로 돼 있기 때문에 세포 구성이. 과학자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이게 안타는데 어떻게 해요? 그럼 과학자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됩니까? 안타는데? 뭐 코오롱에서 새로운 섬유를 만들었는가? 안타는데?
바로 그 세계에 그 불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요. 뭐 뜨겁지 않습니까? 여러분?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지금 불속에서 안 죽는 게 아니고 죽어도 상관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요. 죽어도 상관없는 세계!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었잖아요? 잘 살고 있는데 누이동생 잘못 만나서 도로 군대생활 또 하고, 힘들어요. 아참. 그래봤자 또 살다 또 죽어버리는데. 그러면 누이동생이 또 불러 댔는가? 이 껍데기, 돌무덤이라는 껍데기, 우리 육신이란 껍데기, 늙어가는 이 껍데기, 껍데기가 필요해요. 왜, 껍데기를 통해서 낯선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방식으로 반복해서 십자가의 사건 언약이 우리를 통해서 발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다 가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립잖아요? 하지만 그 그리운 예수님의 그 모습이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성령을 통해서 신자에서 계속 나와요. 그것을 뭐라 하느냐, 소자라 합니다.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목말랐을 때 물을 주셨고 배고팠을 때 목을 걸 주셨고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지옥 갈 인간들아.” ‘제가 언제 주님한테 섭섭하게 했습니까?’ “뭐 내가 안 보인다고? 나 믿는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너희들은 예수 믿는 소자, 예수 믿는 그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지옥 가야 돼.” 그래서 양과 염소, 오른쪽 왼쪽은 그렇게 갈라지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와서는 총괄적으로 말하죠. 소자를 보라, 소자를 대접하라 말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렇게 이야기해요. 상당히 어렵죠? 마태복음에서는 소자한테 하라 하니까 ‘저 사람이 소자일까?’ 저 사람이 예수 믿는 거 같은데, 5년 전까지는 예수 믿는 거 같았는데 6년 전부터 이상하다 하는데 그럼 소자 아니었나? 그 다음에 2년 후에 또 예수 복음 믿는데? 소자 였었어?
사람을 개인을 개체로 평가한다는 것은 곤란해요. 자기도 바뀌니까. 상대만 바뀌는 게 아니고.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냐 “십자가가 보이거늘”십자가 사건으로 일원화시키고 말았어요. 십자가 사건으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럼 십자가를 어떻게 합니까? 간단한 방법은 십자가의 원수가 뭔지를 알면 되잖아요. 십자가의 원수 빼놓으면 나머지가 십자가에요.
그럼 십자가의 원수가 뭡니까? 그건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야기하면서 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구나.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가 뭐냐,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니까 바로 예수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령을 전했던 그들이 사도라 하는 자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뭐라 합니까? 가짜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들이 걸려들었어. 너가 바로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구의 조정 받는가? 사탄의 조정을 받는 자가 고린도 교회 당회장으로, 사도로 있는 거예요. 담임 목사로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교인들 보고 나무라는 거예요. ‘잘도 순종한다. 아이고, 꼬라지, 아이고, 순종도 저렇게 잘해. 마귀한테 순종을 어떻게 잘하지?’그렇게 순종 잘하고 진짜 사도인 나한테는 그렇게 섭섭하게 하고. 그동안 내가 복음 전했던 것이 다 헛되게 하는구나. 하고 그 다음부터 세 번째 편지는 없어요. 끝났어요. 잘 먹고 잘 살아라. 언제 교회가 교회로 유지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는 하나만 있으면 되지, 고린도 교회, 빌립보 교회 있을 필요가 없어요. 생겨나는 것은 말릴 필요가 없죠. 뭐 복음 교회, 밝은 빛 교회, 우리교회, 생겨난 건 어쩔 수 없지만 꼭 유지될 필요는 없습니다. 믿습니까? 우리교회, 유지될 필요는 없어요. 교회가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면 됐지, 뭐 내 교회 따로 있을 이유가 뭐 있습니까?
미국에서 그럼 메일이 와요. ‘목사님, 언제 괜찮은 교회 미국에 혹시 아시면 소개 해 달라고.’ 한국도 없는데요. 뭐. 제가 답변할게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했잖아요.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신령과 진정한 예배란 말은 바로 원수, 십자가의 원수가 뭘 고집하는가? 바로 장소와 시간과 이런 걸 고집을 하는 거예요. 또 우리가 그러면 우리가 심정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게 바로 그런 걸 고집하는 게 그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바로 그걸 고집을 한 거예요. 어딜 여기서 성전이다. 여기가 기도하는 집이다. 주께서는 완전히 이걸 엎어버렸잖아요. 나 있는 곳이 하늘나라다.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성전이 아니고 나 있는 곳이, 내가 움직이는 그곳이 성전이다. 성소란 그런 겁니다. 성소 안에서 뭐가 나왔다? 휘장이 있다.
오늘 본문 봅시다. 성소 안에서 휘장이 있는데 휘장 가운데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새로운 길을. 그러니까 그것이 주의 육체죠. 주님의 육체라면 그 주님의 육체에게 말씀이 이어졌다면 그 언약의 말씀이 그대로 주어지게 되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우리가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산 길, 하나님의 휘장 노릇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휘장이 되고 우리가 지성소가 되고 우리가 언약궤가 되고 그런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22절에 나오죠.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가 우리 안에 육신이 있고 성령이 계시죠. 성령은 육신에게 성령이 왔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경유해서 성령이 오는 이 과정을 로테이션, 늘 순환시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를 ,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할게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뭐가 있다? 씻을 수 있는 말씀과 피가 있다 했죠. 피가 항상 우리를 지적하기 때문에. 그러면 한번 씻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 무엇을 해도 의됩니까? 돌아서면 또 죄짓죠. 요 순환되는 거, 순환을 가지고 이걸 단번에! 순환을 단번에. 단번에 되었기 때문에 순환이 되는 거예요. 단번에 되었기 때문에 순환이 계속 되는 겁니다.
이걸 제가 보통 설교할 때 쉬운 예로 뭐를 드느냐 하면 집에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아버지가 계실 때 ‘아버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해놓고는 ‘아버지 맞기는 맞습니까?’ 이러면 아버지한테 쥐 박혀요.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식사 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란 증거를 검사한테 가서 유전자 검사 한번 받아볼까요?‘ 그럼 아버지가 ’얘가 미쳤구나‘ 해서 정신이 이상하다 해서 검사하니까 99% 일치합니다. ’봤지?‘ 사흘 후에 다시 ’아버지 맞습니까?‘ 또 물어요. 그러면 또 검사한 걸 또 내놓겠죠. 검사한 게 몇 장입니까? 몇 장이 필요해요? 1장만 필요하죠. ’내가 이렇게 죄 짓는데 신자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복음 알고 이런 죄를 짓다니. 주여 신자 맞습니까? ‘
주께서 내놓은 게 뭡니까? 단번에 이루었던 십자가를 내놓잖아요? 아하,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죄를 느끼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감사하죠. ‘이런 죄도 주여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서고 7분 후에 그런데 내가 이렇게 은혜 받고 또 죄를 짓게 되어 또 오는 거예요. 단번에 또 주신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나오는 단번에 거룩함으로 또 내 죄로… ‘아하 그렇구나.‘ 돌아서고.
그러니까 우리는 늘 우리 내부에서 순환하는 겁니다. 양심의 피를 뿌려서 양심이 깨끗해졌죠. 돌아서면 또 말씀이 역사하게 되면 말씀이 우리 지적하게 되면 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가 또 드러나게 되는 또 순환, 또 순환되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노아가 방주에 올라탔잖아요. 방주 안에서 죄 안 졌습니까? 방주 안에서 생각하는 게 항상 고상한 생각만 하고 나쁜 생각 안 했어요? 노아가 방주 안에서 음흉한 생각하게 되면 방주 안에서 나쁜 생각, 슬픈 생각,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자제하겠습니까? 중들처럼. 중들은 이렇게 음흉한 생각하게 되면 갑자기 엎드려서 슬픈 생각, 슬픈 생각, 한다는 겁니다. 슬픈 생각을 억지로 자기 음란한 마음을 조정하려고.
그게 불교 이야기했지만 중 이야기했지만 이게 기독교는 안 그런지 알아요? 성화론이 바로 그게 성화 론이잖아요. 나쁜 생각, 슬픈 생각, 그게 바로 고난 주일을 지켰던 바리새인들이 한 짓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자기 죄를 아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자기 죄를 회개하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자기 죄를 회개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은 칸트에 의하면 반성하는 기능이 있어서 사람이 갑자기 반성을 해놓으면 되게 착해 보여요. 자기 자신이. 착해도 너무 착해. 게다가 길거리에 있는 노숙자에게 동량하게 되면 착해도 너무 착하고, 갑자기 또 기부 얼마 좀 하고 나게 되면 또 착하고 헌금하고 나게 되면 그거야 업 되죠. 업. 사이다가 뚜껑 열면 탄산가스가 터지는 것 같아. 업. 세븐 업. 7번이나 퍽퍽 터지는 것 같아. 교회 청소하고 나면 뿌듯한 그 마음, 꽃꽂이하고 나면 뿌듯한 마음 가지고 다음날 주일 날 얼마나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 가는데 4살 먹은 유치부가 와서 꽃 다 꺾어놓고, 그것도 내가 제일 미운 집사 김 집사 딸이 와서 내 꽃꽂이 집어던져 놓으면 딸이 무언가, 김 집사 두 번 다시 못해요.
모든 만남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우리가 무려 기억지도 못했던 우리가 잠재돼 있던 죄를 죄가 다 터뜨려서 또 다시 깨끗한 피로 물로 양심의 피로 씻음과, 니가 소속이 어디냐? 니 자체가 성전, 우리 자체가 성전 이예요. 옛날에 계속해서 양 투입해서 제사 드리고 또 빠져나오면 제사 드리듯이 단번에 드린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 제사를 대신 하는 겁니다. 그 성전의 처소가 바로 우리의 마음, 곧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전 이예요.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작업을 두고 이야기해요.
23절 봅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 자, 이것도 설명이 필요해요. 무슨, 무슨 이, 무슨 ,무슨 자, 놈 자자 써서 무엇,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면 앞에 붙어 있는 이것이 이 서술이 주체 내용을 채우죠. 이발하는 사람은 이발사, 그리고 운동하는 사람은 스포츠맨, 이렇게 되잖아요. 뭐, 뭐 하는 이, 앞에 무엇이 붙죠? 빨갛게 뭐가 붙습니까? 약속하는 이죠. 약속 성취는 누가 하느냐 하면 약속을 먼저 제시한 분이 성취하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약속 안에 그게 포함이 돼 있어요. 내용이. 약속하신 분에 의해서 약속이 성취되는 겁니다.
약속은 누가 했느냐? 하나님이 약속해 놓고 약속은 누가 성취했습니까? 같은 동네 사시는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했죠. 성부께서 약속하시고 성자께서 성령의 도움으로 약속을 성취해버린 겁니다. 약속하신 분이란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너의 직업을 묻고 몸무게, 결혼여부를 묻는 게 아니고 니 속에 내 약속 들어있는가? 장착돼 있는가, 탑재돼 있는가를 보는 거예요. 약속이 심어져 있는 것. 약속이 심어져 있다면 약속이 스스로 발화되겠죠.
그것을 베드로전서에서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씨앗이라고 합니다. 뭣이 뿌려졌다? 약속이 뿌려졌고 그럼 열매가 나온다면 그 열매는 무슨 열매냐? 약속에 해당되는 열매가 나오겠죠. 그러면 우리가 기대하는 열매는 나오게요? 안 나오게요? 그거는 가라지죠. 거기에 엉겁결에 붙어있으면 그걸 다 녹 제거하듯이 다 떼 내는 거예요.
그 약속이 아닌 것을 떼 내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니까 우리가 성도란 이름으로 맨날 울고불고 힘들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 암세포 떼 낸다. 그게 아파요. 천국에 같이 들어가지 않아야 될 것이 들러붙어 있으니까 . 시기와 질투와 탐욕과 육신의 열매가 붙어 있으니까 이게 계속 떼 내야 되거든요. 이거 엔진 오일을 갈아야 되냐, 이거 어떻게 해요? 이걸 날마다 녹을 떼 내야 되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같은 거.
또는 예수님 광야 같으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 사람은 인기 많은 재미로 사는 보람이 있다는 거, 세 번째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럽다는 것, 이게 욕망의 하나의 자극, 동기가 되거든요. 보니까 탐나잖아요. 보니까 탐이 나는 거예요. 안 봤으면 탐이 안 나는 거예요.
사춘기에서 청춘으로 이전하면서 CF에 이런 CF가 있어요. 어떤 사춘기 소녀가 드디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 어른이 돼요. 사회인이 되는데 그 애가 무엇을 기가 막히게 좋아하느냐 하면 마술같이 변하는 내 얼굴, 다시 말해서 화장하는 기술을 배워서 그렇게 좋아하는, 소녀가 그렇게 좋아해요. 마술 같은 화장술을 좋아하다가 CF가 뭐냐 하면 마술 같은 화장술을 좋아하지 말고 이제는 돈을 버는 고생을 해야 된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회인이 된다는 건 처음에 화장을 잘해야 되고 또 한 가지는 중요한 게 남아있다는 겁니다. 뭐냐 남의 주머니에서 돈 빼내는 것. 돈 버는 것, 요건 힘들어요. 돈이 있어서 화장하는 건 쉬워서 재미가 나는데, 요 재미나는 화장을 내 맘에 들기 위해서는 해야 될 필요한 돈 버는 데서는 화장발 다 날라 갑니다. 열심히 했던 화장,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이게 땀 뒤범벅이 되죠.
제가 언젠가 몇 년 전 광복절에 뉴스 시간에 더울 때에 여자 경찰관이 광화문에서 행사 많이 하잖아요. tv를 본 게 아니고 실제로 봤어요. 실제로 여자 경찰관이 인파를 횡단보도 정리한다고 땀에 젖어버렸어요. 그러니 땀 냄새도 나고 화장도 다 지워져 버렸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경찰되려고 얼마나 공부를 했겠습니까? 땀난다고 퇴직할거예요?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예요?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물론 그렇겠죠. 그보다도 더 우선되는 것은 돈 주기 때문에. 월급 하나도 안 주면 안 합니다. 돈 주기 때문에. 경찰 월급 만만치 않아요. 본봉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여튼 수당도 많고 괜찮게 벌어요. 경위로 해서 4년 됐는데 한 달 월급 440만원입니다. 경찰대학 나와서 대구 영신 고등학교 1등해서 경찰대학 들어갔거든요. 우리 앞집에 살아요. 우리 맞은편에 사는 아들인데 경찰대학 나와서 경위된 지 4년 됐는데 월급이 448만원인데 꼬박꼬박 다 모아서 1억 모았답니다.
그런데 그 경찰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얼마나 힘든 직업입니까? 전부 다 깡패들 이런 사람 상대해야 되고, 정상인은 상대 안하잖아요. 정상인을 상대하는 사람 누구밖에 없냐 하면 목사들밖에 없어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아주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는데, 의사는 보세요. 전부 다 아픈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 몸 아픈 사람들, 특히 치과는 덜해요. 내과 같으면 그 동네 엄살쟁이 노인네들 다 와요. 아침이 되면 죽 앉아 다 있어요. 아이구, 의료보험들, 의료보험들, 의료보험들, 의료보험 때문에 받아주는 거예요. 달래줘야 되고, 자식들 다 있죠. 다 챙겨줘야 돼요. 그 래야 손님들 오지 안 그러면 딴 데로 가죠.
그리고 뉴욕 백화점 물건 파는 사람들, 전부 다 갑 질하는 인간들, 옷이 맞니, 안 맞니, 돌아보고 오겠다고 해놓고 오는 사람 없어요. 더러워서 못하죠. 전부 돈 번다는 자체가 왜 그리 고달프고 힘든지. 제일 팔자 좋은 게 좋은 남편 만나서 집에 살림만 하는 사람들, 또 살림 살다 보면 자식 걱정.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죄는 필요 악 이예요. 이거는 죄 짓고, 안 짓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야 살 수 있는 게 육신입니다. 죄 안 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요.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그 말고 다른, 성도에게는 뭐가 있다? 육신이 있고 그 다음에 영적 세계 있죠. 영적 세계에서 육신은 이게 약속이 되어서 약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육신은 아무리 애써도 안 돼요. 육신에서 영이 됐다는 말은 이미 약속의 하나님이 이미 여기 개입했다는 거죠.
그러면 이 성전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거하는 거주지가 되고 성전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적인 모습은 성령이 와서 계속 육적인 모습을 노출시키죠. 노출시키게 되면 우리는 그 노출시켰다는 그 원인이 바로 약속에 있음을 늘 같이 깨닫게 되는 겁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죠. 죄 지면 감사하고 죄 지면 또 감사하고 죄 지면 또 감사하고. 그것을 가지고 뭐냐, 선한 양심이라고 합니다. 맑은 양심이라 합니다. 맑지도 안 해요.
베드로가 사도되고 난 뒤에 맑았어요? 맑았으면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 안 합니다. "베드로야, 니 육신 맑으냐?" '맑습니다.' "그러면 니가 원대로 해라" 이렇게 되는데 어떻게 됩니까? 주께서 "니가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간다"는 말은 주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면 사도 베드로도 사도가 된 성령 받은 베드로도 결코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서 뭘 알 수 있는가? 2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열 자만 읽어보세요.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자, 미쁘다, 됐습니다. 그곳까지.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미쁘다는 말이 뭔 뜻 이예요? 미쁘다는 말은 믿음직스럽다. 믿을만하다. 우리보고 믿으라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인생 자체를 놓고 볼 때에 '주님은 미쁘신 게 맞구나.'라는 고백이 나와야 된다는 거죠. 그만큼 우리 자신은 믿을 만 하다? 안 하다? 절대로 우리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 하지만 믿을 만 못한 것을 약속 때문에 나 말고 다른 분을 믿음직하게 믿게 하셨다는 고백이 계속 나오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설명을 이렇게 억지로 하려 하니까 자꾸 뭐는 아니요, 아니요,란 말을 둘러서 이야기해야 되지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믿는 사람들은 딱 보면 알아요. 딱 보면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안다니까. 그걸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말이죠. 집에 있는 내 아버지가 아버지인 걸 증명해 봐라. 그걸 왜 증명을 해야 돼? 아버지 있으매 내가 있는데 왜 증명을 해야 돼?
아버지가 미쁘시기 때문에 내 인생도 믿음직하다는 것을 왜 증명을 해야 됩니까? 내가 증명한다고 믿음직한 인간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내 믿음은 믿을 게 못 돼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처음에 뭐라 했느냐 하면 나의 믿음에 실패해야 된다고 했죠. 후딱 지나갔는데 녹취는 놓치지 않습니다. 녹취 다시 한 번 보면 나와요. 우리는 자기 믿음에 실패했을 때 야호! 하고 우리는 환호성을 내질러야 돼요. 그동안 내 믿음 쥐고 있어서 얼마나 우리는 마귀한테 휘둘렸습니까? 온갖 사기꾼한테 다 걸려서 돈 바치고 십일조 바치고 주일 지킨다고 얼마나 사기를 당했어요?
그런데 성령한테 매달려 있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내 믿음이 휘둘릴 이유가 없죠. '내가 지금 믿나, 안 믿나.' 라는 사단한테 더 이상 꼬임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땡 잡은 겁니다. 믿음 생활 안 하는 게 믿음 생활이란 사실을 이거 누가 알려줬어요? 주님이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죠. 이거 누가 알려주겠어요? 믿음 생활 실패하고 안 하는 게 믿음 생활이란 사실을!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믿음 생활 안 하겠어요? 탈북자라 하잖아요? 어떻게 힘드십니까? 남조선이 얼마나 좋으면 남들 보기 힘든 것도 나는 전혀 힘들지 않을 정도 같으면, 얼마나 남조선이 좋으면 '야, 내가 이 땅에 잘 왔다.' 싶으면 남들 보기에 고생스러운 것도 고생 안 스러워요.
참, 딸이 시집 안 가서 고생스럽습니까? 건강하면 감사하세요. 요번 주도 설교도 결혼에 관한 건데 한번 들어보세요. 계속 들어보면 참 주께서 결혼 안 하게 해주시는 축복을 주시는데 그 축복이 개인 맘에 안 드시면 결혼 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죠. 뭐 고생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거든 결혼 해보면 돼요. 제가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결혼 안 해야 되겠다.'가 아니라 이왕 실패자, 결혼해보고 실패자인 걸 확인하는 것도 괜찮아요.
그 다음에 23절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아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제가 백날 강의해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는 게 강의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걸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제가 분명히 못 지킨다 했죠? 메르스 들끓는데 전부 다 마스크하고 모일 일 있습니까? 물론 여기는 안양이니까 괜찮지만 평택에 만약에 모였다. '새 신자 모입니다.' 안 모입니다. 평택인데. 안 되죠.
니가 만약에 교회 모였거든 주께서 이 말씀대로 실천하신 결과라고 믿어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희들이 모이기를 힘쓰는 믿음을 믿지 말고. '아, 모여야지. 모여야지. ' 믿지 마세요. 어떻게 세상이 어디 호락호락 하지 않아요. 모인다고 다 모이고 가고 싶어 다 가는 게 아니에요. 가다가 차 펑크 나면 못 가는 거예요. 주께서 이끌어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걸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 놓고 니가 모였거든 믿음 좋아서 모인 게 아니고 '주께서 요 말씀대로 모이게 하셨구나. 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사용했구나.'라고 믿고 교회 참석하고 하면 돼요.
또 교회 왔는데 전화가 와서 '네, 알겠습니다. 갈게요.'하는 것도 주의 뜻이고, 목사님 '미안합니다.' 미안할 필요 없어요. 한 두 명이 그럽니까? 개척 교회 목사는 섭섭하죠. 그런 경우 생기면 자기는 설교 준비 내내 했는데, 하필 설교 시작하는데 애 하나 엎어져서 으앙, 울어서 '걔 달래세요.' 엄마는 '목사님 미안합니다.' 하다 보니까 흐름이 다 깨졌어요. 분명히 준비는 했는데 지금 논리가 어느 계곡으로 빠졌는지 몰라 계곡을 못 찾겠어요. 그래서 급하게 하다 보니까 분명히 40분 설교인데 하다 보니까 25분 밖에 안 됐어요. 15분이 남아돌아요.
두 가지 방법은 남은 시간 객소리해서 때우는 경우와 '끝냅시다.'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애가 엎어지게 한 것도 주의 뜻이고, 설교 시간에 휴대폰 울리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고, 그분이 일부러 한 게 아니고, 잊어버리고 한 거예요. 잊어버리게 하신 것도 주의 뜻이고 "모든 일이 만사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뜻이 그 뜻 이예요. '아이고, 상황이 안 좋아서 못했습니다.' 이런 말 아예 토를 달 필요조차 없다니까요. 상황 좋아서 했던 것은 그건 내 믿음이지 주의 믿음 아닙니다. 내 믿음을 허락지 않기 위해서 주께서는 내 믿음이 틈타지 못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내 뜻대로 내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하나님 놀라운 사랑의 인생입니다. 여러분 인생이지만 여러분 뜻대로 되던가요? 안 되잖아요. '이것이 내 역사입니다.'를 못 하도록. '내가 열심히 했더니만 이런 괜찮은 인생 살았습니다.'라는 그런 말을 떼지 못하도록 주께서 지금도 이끄시는 거예요. 그걸 소급해 보니까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렇게 왔었어요. 그때는 철이 없어서 모르고 '아! 조금만 열심히 했더라면. '니가 없으면 내 인생 달라졌을 텐데.' 이건 남편 보고 맨날 하는 소리. '아이쿠, 내인생에서 니 같은 자식이 태어났나? 다른 형들 봐라. 니가 왜 태어나서 너 때문에 속을 썩이느냐' 이런 식으로. '아이고, 같이 약 먹고 죽자.' 끌어안고 죽는 척하고. 지는 소화제 먹어가면서 협박하고.
모든 날은 그날이 가까울수록, 가까이 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카페트를 잡아당기는 거예요.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게 아니고 시간이란 카페트는 원래 돌돌 말게 돼 있습니다. 말려 들어가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꼼짝 못하고 딸려가듯이 주한테 당겨져 가는 거예요. 지남철에 쇠붙이가 당겨가는 것처럼. 날마다 가까워요. 그날이. 우리가 가까이 가서? 우리는 맨 날 세상만 좋아하지, 가까이 안 가요. 세상만 좋아하는 우리를 양탄자에 실어서 나르는 양탄자처럼 우리를 돌돌 말아버려요. 이쪽에서 말아 들어가면 우리는 자꾸 당기는 거예요. 우리를 잡아당기거든요. 어떤 때 너무 심하게 잡아당기면 우리는 엎어지고 자빠지고 중력의 작용에 의해서 자빠지면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보니까 벌써 당겼어요. '니가 그 자리 있으면 안 되지.' 잡아당기는 거예요.
동창생 모임이 있다. 동창 모임이 한 10년 간 했다. 계돈 모아서 스페인에 여행 간다. 그런데 주께서 갑자기 여행갈 때 못 가게 만들고 잡아당겨버려요. 주께서 내 인생을 쟤들하고 따로 이끄신다는 것을 그 순간 느끼게 만들어요. 물론 계돈은 받아내야죠. 여행 안 갔으니까. 어쨌든 뭔가 자꾸 친구들과 같이 못 놀게 만드는 그런 상황이 자꾸 오죠. 그러면 우리도 만만치 않거든요. 우리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억지로 친구하고 만나려고 하다 보면 친구한테 걸려들어서 돈 뺏기고 500만원만 빌려 달라 해서 못 받고, 억지로 떼이게 하는 일들이 또 벌어지게 하고 해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26절 봅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자, 여기 보세요. 죄를 짓고 난 뒤에 속죄하는 제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럼 죄 지면 우리가 구원 못 받아요? 받아요? 죄 지면 구원 못 받죠. 분명히 합시다. 어떤 사람들은 제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죄 짓고 난 뒤에 용서 받는다 하는데 그 말 아니에요. 죄 지면 구원 못 받아요. 끝 이예요. 죄 안 짓게 하는 작용이 있잖아요? 죄인은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죄인을 의인 만들어서 구원하죠.
그런데 죄인을 의인 만드는 작업조차 없다? 그러면 지옥 가야죠. 그럼 내가 말린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 말은 뭐냐 하면 26절 이 말씀 있잖아요. 이 말씀이 늘 살아있어 버리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한테 이게 의미가 없이 돼 버려요. 단번이라는 것이 단번 앞에서 순환되죠. 순환되는 단번이 없으면 그 사람 구원 못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다. 그리고 저 피는 순전히 믿었다 칩시다. 그거 누구 믿음 이예요? 자기 믿음이죠. 자기 믿음인데 그 뒤에 죄 졌다. 어떻게 됩니까? 그거 소용없어요. 그거 믿은 거 소용없어요. 지옥 가야 돼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뭡니까? 네 믿음 가지고 믿는 것은 이건 애초부터 믿음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11장에 나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믿음은 뭐냐, 예수님을 말합니다. 믿음은 예수님 이예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까.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우리의 믿음의 실상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잖아요. 믿음은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현존에서 믿음이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고. 이런 뜻 이예요.
"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예수를 믿을래? 예수 믿는 너를 믿을래? 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너가 만약 예수 믿고 죄 졌잖아요? 그러면 끝났어요. 예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해도 그런 모독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은 내가 죄 져도 용서해 줄 거죠?' "미쳤나" 한번 단 회라 하는 것은 주님이 덮칠 때 단 회지, 우리가 빼먹을 단 회는 아니에요.
히브리서 6장에 그런 거 나오죠? 한 번 죄 짓고 난 뒤에 한번 성령의 비췸을 얻고 죄 지면 안 된다는 것. 요거 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속죄를 알고 난 뒤에 죄를 지어버리면 이거는 용서가 안 돼요. 이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복음에서 이거는 양보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가치라는 게 나의 구원의 가치가 없어요. 속죄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죄를 구원하는 법은 없습니다. 속죄 해준 사람은 속죄 안에서만 다뤄야지 속죄 바깥에 또 끄집어내는 그런 건 없어요. 속죄 안에서만 통합니다. 속죄 안에서만 통한다는 말은 속죄 안에서 누구만 작용한다? 예수님의 속죄 능력만 작용해요. 따라서 그 안에서 우리는 늘상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는 거예요.
죄를 새로 짓는 게 아니고 있는 죄가 노출된다니까요. 전에는 죄가 아니었던 것이 '이런 죄도 다 있었어?' 새로운 죄가 계속해서 발견되는 겁니다. 왜 발견돼야 돼요? 속죄함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인생 살면서 이런 죄들이 계속 나와야 돼요.
그러면 이 마음 판은 누구 판입니까? 내 판이 아니고 내가 관리하는 관리 판이 아니고 주님의 다루시는 관리가 됩니다. 그러면 이 자체가 이미 속죄가 이루어졌기에 의인이 된 성전이 우리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것을 따로 챙겨서 요 마음을 따로이 나라는 걸 붙여서 요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해서 나라는 것을 따로 설정하고 거기다 아까 이야기한 성경말씀을 붙여버리면 이안에서 뭐가 생기냐 하면 이 자체는 주님 안에서 바깥에 벗어났기 때문에 이건 이미 용서가 안 되죠. 이거는 믿음의 탈락입니다. 그리스도의 탈락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아들로 이야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인하여 약속을 인하여 새 언약을 인하여 히브리서 10장 이야깁니다. 새 언약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우리를 언약이 장악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찾아내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속 죄가 발굴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마저도 죄가 되고 저것마저도 죄가 되는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단번에 이루어졌으니 어떻게 놀라운 기적으로 믿어지게 된 것인지 믿게 된 그 은혜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50612b-히10장20절(속죄의 순환) -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