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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20강, 121강) 허무, 종말의 의미 150702강의[신학]

유튜브(120강, 121강) 허무, 종말의 의미 150702

이름 : 이근호(IP:117.55.131.135)

120강

121강

이미아(IP:180.♡.90.76)

15-07-05 00:51

120강-YouTube강의(허무)150702-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20강, 제목은 ‘허무’입니다. 보통 허무라고 할 때는, 자기 인생 자체가 자기 원대로, 자기 기대대로 안 될 때, 허무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이 허무하다, 내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면서, 그 허무가 어디서 출발했는가, 어디서 나왔는가는 사람들이 잊고 있어요. 우리 자신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사람들은 잘 안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 자체가 허무하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허무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내 인생도 당연히 거기서 허무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내 인생은 허무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고,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야 마땅하지만,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나는 괜찮지만 세상은 허무하다는, 이런 식으로 허무의 범주에 자기 자신을 넣지 않으려는 반칙들을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전도서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나오는 것은 그 헛됨 속에서 우리 자신을 따로 빼놓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시켜서 헛되다고 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 우리 자신이 헛된지,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만들었을 때는 분명히 헛되지 않게 만들었을 텐데. 왜 우리가 헛되냐? 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일쑤인데, 우리가 발상을 한 번 바꿔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헛되게 생각하라고 만들었다고 한 번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모든 해답이 다 풀려요. 내 자신을 헛되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하나밖에 없어요. “너도 헛되고, 나도 헛되고, 우리 가족도 헛되고, 그러면 헛되지 않은 게 뭡니까?” 라는 질문이 필히 나오게 마련인데, 그 분이 바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노아 때 생각해봅시다. 노아 때 사람들이 각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각기 자기 자신이 헛되지 않다고 자기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죠. 판정 누가 내립니까? 큰 소리 친다고 그 사람이 판정 내릴 사람은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홍수 사건을 일으켜버리니까 노아 빼놓고 다 헛된 것이 들통 났죠.

그러면 노아 본인이 잘나서 헛되지 않은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언약이 노아에게 임하니까 노아는 방주 안에서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방주가 없는 노아, 언약이 없는 노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시 헛되죠.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노아마저 헛되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고 방주가 임하니까 노아마저도, 헛된 노아는 구원을 받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원리가.

그걸 신약으로 넘겨봅시다. 신약에 와서, 신약 자체가 새로운 언약인데요. 새로운 언약 시대에 헛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새 언약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언약이라고 하는데. 내 살과 내 피로 말미암아 언약을 새로 세우겠다는 그것만이 헛되지 않죠. 그렇다면 이 땅에 너 나 할 것 없이 다 헛된데, 헛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바로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 십자가 능력 안에 있는 사람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지금 신약에서 주께서는 그것을 증거 하려고 해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 자체는 헛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몰아세우십니다. 너 자체로는. 이래 사나 헛되고 저래 사나 헛되고. 그런데 왜 그렇게 몰아세우느냐 하면은 예수그리스도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헛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주께서 사용하신 겁니다. 강제로 그리스도 안으로 잡아당긴 거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 언약 속에 집어넣게 되면 우리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마저도 헛된데 헛되지 않는 것은 주님밖에 없다는 고백이 나오죠. 바로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라는 구절 나오죠.

야고보서 2장 20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아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되다는 거죠. 사람들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되니까 ‘그래, 믿음에다 행함을 보태자.’ 이런 식으로 너무 성급하게 정리를 하는데, 이 대목을 조금만 생각해봅시다.

왜, 우리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될 수밖에 없는가? 그 점을, 다시 말해서 왜 우리 믿음은 헛된 믿음이라고 지적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입장에 놓여있는가? 그 이유가 우리 속에 있는데, 왜 우리는 그것까지 생각을 잘 안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지.

말을 쉽게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이 헛되다는 것을, 왜, 우리 자신은 곰곰이 생각할 줄을 모르느냐고 제가 지금 닦달하는 거예요. 왜, 우리 자신은 헛되다고 생각을 못하느냐 말이죠. 분명히 예수님만이 헛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주여, 그럼 우리 자신으로서는 헛되네요.” 라는 고백이 같이 따라 나와 줘야 하는데, 왜, 우리는 주님만 헛되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왜 놓칩니까?

야고보서 2장에서 하신 말씀이 야고보서 4장에서 아주 간편하게 정리가 됩니다. 우리 자신이 헛되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헛되는가 하면은,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소위 우리가, 내가 여기 있음으로부터 출발을 해서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로 시도하는 모든 것은 헛된 겁니다. 왜?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이 헛되다는 것을 인정 안 하기 때문에 어떤 객기를 부리느냐 하면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면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겠다는 그러한 장담을 해요. 이게 야고보서 4장 13절에 나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자,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니가 그런 소리하는 것 보니까 니가 아직도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구나? 니가 누군 줄도 모르면서 감히 예수를 믿어? 니가 누군 줄도 모르면서 하나님 믿는 행함이 있다고 자랑질을 해? 우선 니 자신부터 헛되다는 것을 니가 인정을 하지 않는구나? 라고 우리 보고 닦달내시는 겁니다.

이렇게 됩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너희여!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주제에 불과하다. 그걸 니가 평소에 내 모습이라고 니가 언제 받아들였느냐?” 라고 우리를 추궁하고 있어요. 평소에 생각하라. 어떻게? “저요? 내일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안개로서 마감해도 저희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받아들였느냐고 그렇게 묻고 있는 거예요.

야고보서 2장에서 귀신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은 한 분 계시다고 하는데, 그런 쪽의 믿음은 누구나 떠들 수가 있어요. 그런 식으로 떠든 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헛되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큰 소리 치면서 “나는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어떤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소리 하면서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나는 괜찮은 존재지?’ 하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분간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큰 소리들이 나오는 거예요. 야고보서 4장에 넘어가면 이렇습니다. “너희는 잠간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은 헛된 존재다.” 야고보서 4장 그 다음의 주의 말씀을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고 치면 14절에서 우리는 안개니라. 여기에서 끝난다면, 안개니라, 그 다음에 또 안개니라. 안개니라, 헛되고 헛되니 안개니라. 뭐? 뭐? 그 다음에 뭐? 없어요.

그럼 그걸로 고만 ‘그래. 안개 같은 인생, 이래 살다가 없어지지.’ 이게 마치 우리를 헛되다고 한 주의 뜻의 사명인 것처럼 그렇게 자포자기하는 경향들이 또 있습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끝.’ 그게 성도의 본분일까요? 15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삽니다.” 아! 우리가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요? “내가 열심히 살면 삽니다.”로 자꾸 바꾸려고 해요. 얼마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센지....., 자존심 때문에 우리가 헛된 줄도 모르고.

“주의 뜻이기 때문에 오늘도 살았습니다.” 왜, 은혜에 감사할 줄 모릅니까? 내가 어느 도시에 갈 수 있어요. 장사해서 이익을 남길 수가 있습니다. 그것마저 우리 공로로 돌리면 안 됩니다. 주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헛된 과정을 거쳐서, 결국 주님만 영광 돌리는 삶,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이미아(IP:180.♡.90.76)

15-07-05 00:54

121강-YouTube강의(종말의 의미)150702-이 근호 목사

자, 이제는 121강, 제목은 ‘종말의 의미’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은 ‘끝’이라는 뜻이죠. 근데 끝을 우리가 이야기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 다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끝이라는 것은 우리 어감에 낭떠러지, 또는 절벽 같은 것, 또는 폭포 그런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하거든요. 가봤자 떨어질 걸, 차라리 먹고 마시고 실컷 즐기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 끝 날이 있습니다. 그러면 끝 날이 오면 술 먹 못 먹으니까 끝 날 오기 전에 진탕 술 먹고 난 뒤에 원 없이 끝을 맞이하자. 이렇게 생각합니다.

방금 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종말을 맞이하자.” 라고 하고 있는데,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채고 대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가정이 있는데, 식구끼리, 네 식구가 있다고 합시다. 근데 만약에 손님이 온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우리가 대비를 해요. 네 식구 있는데 저녁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게 되면, 그 사람 오게 되면 다섯 명이 되죠. 그럼 커피를 대접한다면 잔을 다섯 잔 준비하면 되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전혀 어렵지 않죠?

그런데, 제가 말을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어떤 손님이 온다고 해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손님이 저녁이 되도록 오지를 않아요. 근데 네 식구인데, 네 식구가 그동안 함께 살았는데, 그 중에 막내아들이 “엄마! 내가 손님이야.” 하고 나온다면 우리는 기절초풍을 할 겁니다. 분명히 네 식구는 일단 우리 편이고 그 다음에 손님 오게 되면 플러스해서 다섯 명을 생각하게 되는데, 네 명 가운데 이질적인 손님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하죠. 아! 이거는 정말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그럴 것입니다.

나는 내게 속한 막내아들로 생각했는데, 그 막내아들이 낯선 외계인이라고 누가 그렇게 생각을 하겠습니까? 익숙한 얼굴인데. 그래서 성경에서 마지막이라는 이 단어가 그렇게 어려워요. 예수님이 왔을 때, 세례요한은 그걸 구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왔다고 하니까 목수의 아들이 그냥 우리 속에 같이 섞여 있는 줄 알았죠. 근데 세례요한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늘나라가 왔다고 본 겁니다. 종말이 왔다고 한 겁니다. 사람들은 천지개벽을 생각한 거예요.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고, 구름타고 메시아가 나타나고, 다니엘 7장에 나온 이야기니까. 하늘에 징조를 보고 “야, 오신단다. 오신단다.” 근데 너무 조용해요. 근데 누가 오버하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늘나라가 왔다.” 바리새인이 조사에 나섰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당신이 메시아가 왔다는데, 메시아가 온 증거를 대라. 니 누구야? 왔다는 증거가 어딨어?”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나는 하나의 광야의 소리에 불과하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뭔가 획기적인 일이 있는가 싶어서 와놓고 실망을 했죠. “에이, 구라다. 거짓말 쳤구나. 가자 가!” 그런데 세례요한은 그들을 향하여 이상한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난데없이 다른 시대에 오는, 마지막 때에 활용되는 문장들을 막 구사합니다. “회개하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 구원받으려고 나한테 왔느냐? 너희들을 구원하는 천국이 아니야. 너희들은 저주받아야 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회개하는데 너희들은 왜 회개하지 않아?”

그들이 세례요한을 보고 이런 말을 했거든요. “아이구, 저건 기껏 물세례 주네.” 조롱을 했거든요. “너희들이 지금 물세례 주는 것으로 조롱을 해? 이 물세례는 아무것도 아니야. 진짜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불세례를 주실 거야. 성령으로 오실 거야. 그것이 마지막 타작마당이 될 거야. 알곡은 따로 모으고 죽정이도 따로 모으고. 끝났어. 세상 끝난 거야. 이게 종말이야. 그 주인공이 오신 거야. 그 담당자가 오시는 거야.”

그러나 그 이야기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조사관들은, 이거는 아무리 봐도 객기로만 생각합니다. “아, 오버한다. 미쳤다. 자기가 뭐 예언하는 것처럼 뭔가 착각하고 있다. 그 종교적인 열정으로 도가 넘쳐서 미쳤구나.” 근데 사실은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그러한 심사평은요, 이것은 세례요한을 포함해서 그 당시 많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는 의구심으로 퍼졌어요.

그래서 이 세례요한마저도 도대체 자기 뒤에 오실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례요한이 뭘 기다렸느냐 하면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기다린 겁니다.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기를 기다렸어요. 하늘나라 멀쩡합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성령세례 일어날 낌새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세례요한 본인이 흔들릴 판이에요. 자기는 자기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말은 내뱉어놨는데, 그 말과 그 당시 현실과 일치가 되어야 되는데, 일치되지 않으니까 누가 흔들립니까? 세례요한마저 흔들립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고 난 뒤에 자기 종을 보내서 예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혹시 당신이 딴 분 아니에요? 내가 이야기한 다른 분이 따로 계신 게 아닙니까? 오실 분이 당신 맞아요?” 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이 종말에 대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다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은 어떻게 오느냐. 이야기하다보니까 너무 어렵게 되었는데, 그 어려울 줄을 제가 알고 먼저 식구이야기, 네 식구 이야기를 끄집어낸 겁니다. 네 식구 가운데서, 외부에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했는데, 네 식구 가운데서 그 중의 하나가 낯선 사람으로, 마치 편하게 생각했던 그 중의 하나가 독특하게 외계인으로 등장했을 때, 우리는 기겁을 하죠. 바로 이 방법을 예수님이 세례요한 종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종말, 이미 메시아가 왔다.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걷게 되며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거든 이미 하나님 나라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알아라.” 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눈이 있어도 사실은 소경이며, 내가 귀가 있어도 사실은 귀머거리며, 내가 멀쩡하게 몸무게 얼마, 키 얼마, 밥 세끼 먹고 탱탱하게 살아도 사실은 내가 죽은 자입니다.” 라는 고백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못 알아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못 알아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지금 이 시대가 이미 종말이 개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못 알아보는 거죠. 내 자신이 사실은 지금 살아있지만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메시아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평범한, 그렇고 그런, 늘 있었던 일상적인 일로 왜곡되게 생각해버리죠.

우리는 그 대신에 획기적인 일,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메시야가 구름타고 오고, 그런 것만 기다리는데, 그런 것들은 그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세례요한이 기대했던 획기적인 거죠. 사실은 그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사람 손에 누가 돌아가셨다는 요나의 기적입니다.

요나가 물에 던져질 때, 물속에 빠졌을 때, 그 뱃사람들은 그걸 기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이고, 선지자 하나 까불다가 자기가 믿는 하나님한테 당했구나! 그 사람 안 됐다. 야! 우리는 그냥 배타고 빨리 가자.” 이것만 생각했지, 그 요나 선지자가 물에 빠지는 것이 바로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켰다는 것과 그걸 연결시키는 안목적인 눈들이 없었어요.

지금 분명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는데, 그게 종말인데, 그 십자가 죽은 그 분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라는 것을,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라는 것을, 십자가 안에서 현재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과, 이 살아가는 것이 죽은 자의 모습이라고 그걸 연결을 시켜야 되는데, 연결은 성령이 와야 연결되지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인간의 힘으로서 그게 연결되는 고리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았다 하는 것은 실은 죽은 것이고 진짜 살아계신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다. 그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진짜 살아계신 분이신 주님께서,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우기지만 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 죽으시고, 새로운 세계를 펼치면서 부활의 세계를 마련하셨구나! 이것을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감 잡아야 됩니다. 우리가 눈 떠야 됩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내가 살았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죽은 자이고, 살았다 하는 것은 날마다 성령 안에서만 우리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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