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b-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b-이 근호 목사
주님의 일은 죄인 되게 하는 일이에요. 거기에 반해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실컷 죄 지으면서도 자기 변명하기 위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는데, 인간은 자기 사랑 외에는 배운 가락이 도둑질밖에 없어 도둑질밖에 못한다고, 배운 가락이 죄짓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죄만 짓게 되어있어요. 그걸 그냥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어디서 인정하는가,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이스라엘은 뭐로 만들어졌는가 하면 언약으로 만들어졌지요. 언약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렇지요? 이스라엘은 어떤 현실이냐 하면, 말씀의 현실입니다. 전체가 말씀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한 이스라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자기 자신을 위한 이스라엘이 됐으면 좋겠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속의 선지자나 모세는 이 이스라엘은 누구를 위한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 되어야 되는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이, 요번에 수련회합니다. 8월2일부터 3일 동안 하는데 사사기해요. 사사기를 보게 되면 그들이 이상해요. 그들이 편할 때, 행복할 때, 만족스러울 때, 누구를 버립니까? 하나님을 버린다고 되어있지요. 사실은 하나님을 안 버렸어요. 사실은 그들이 여호와를 버린 적이 없어요. 여호와를 버린 게 아니고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가졌지요. 바알종교에 관심을 가졌지요.
여러분들이 창세기6장에 보면 노아홍수 직전 나올 때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사 물로 쓸어버린다 하지요. 쓸어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섞이지 말아야 할 게 섞였어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은 섞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순수성이 유지 되어야 돼요. 그걸 싹쓸이 해버리고 언약을 믿는 사람만 따로 뽑아내는데 8명, 그 8명의 후손이 오늘날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보면 옷을 다른 직종으로 짜깁기 하지 마라, 그리로 모종할 때, 씨를 뿌릴 때 다른 작물을 같이 섞지를 마라고 했어요. 섞이는 걸 싫어해요.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지 마라했잖아요. 못 먹는 음식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왜 못 먹느냐 하면, 이게 하늘하면 하늘하든지 땅이면 땅이든지, 물이면 물이 있어야 되는데, 이건 물에 사는 것도 아니고 땅에 사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 사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한 것은 전부 못 먹게 했어요. 초식이면 초식만 하던지 육식이면 육식만 하던지 섞이는 걸 싫어한다고요. 섞이지 않는 걸 가지고 두 자로 ‘거룩’이라 합니다. 거룩. 따라서 인간은 거룩해질 수가 없어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섞여서 태어나니까. 내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나 다른 법이 있으니, 이미 섞여버렸어요.
자, 계속해 봅시다. 지금 언약이 이스라엘보다 뭐가 먼저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먼저 있었지요. 이게 중요하니까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돼요.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만들어졌어요. 없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먼저 있었고, 아브라함아, 니가 4대만에 애굽에서 나오리라, 4대만에 나오려면 그 4대동안 어디가 있어야 됩니까? 후손들이 애굽나라에 가있어야 돼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애굽나라를 알아요. 애굽나라는 어떻게 하고 바로가 어떻게 핍박하는지를 사전에 다 알고 있다니까요.
언약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뭡니까? 말씀이 먼저 있고 교회가 있음을 믿는 자가 교회에요. 교회 생겨놓고 교회 부흥시키기 위해서 잘되기 위해서 말씀 가르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그것은 종교업종이고 업소고, 말씀이 우선이에요. 말씀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니지요.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닌 거예요. 유사품에 속지 마세요. 복음이 아닌 곳은 교회가 아닌 겁니다. 친목단체지요. 계모임이라니까. 2000년 교회역사가 그래요. 천주교 성당이 그래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찾지 말고 거기서 뭘 찾아야 됩니까? 말씀의 현실로 감안해야 돼요. 말씀의 현실로. 그럼 말씀의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007영화에 보면 유명한 도둑이 유물을 훔칠 때, 분명히 박물관가면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특수한 안경 쓰면 여기에 촘촘히 망으로 주변에 선이 쫙 깔려 있잖아요. 그걸 안경으로 쓰고 온 폼 다 잡아가면서 뒤보면서 요 사이를 빠져나가서 무사히 보물을 탈취하잖아요. 이 세상이 지금 말씀의 망으로 꽉 짜져 있는 거예요. 건드리기만 하면 죄인 되는 거예요. 우리는 여기 올 때도 너무 건드려가지고 거미줄이 눈에는 안 보이지만 말씀 어긴 것이 한 꺼풀 있어요.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에 율법이 2번입니다. 하나는 십계명이 있고 또 하나는 제사법이 있어요. 제사법이 먼저 있어요. 제사법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십계명은 나중에 있어요.
그렇게 해야 십계명가지고 죄짓고 죄지은 인간 제사법 통과해서 의롭게 되고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이 입을 막고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 오직 예수님의 제사, 예수님의 몸,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래서 영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화목제물만 경유해야아버지께 영광이 돼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산다고 영광 되는 게 아니에요. 착하게 사는 게 없다니까요. 말 똑바로 합시다. 착하게 사는 게 없어요. 우리는 착하다는 말을 붙이지 마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씀을 준 것은 예수 믿고 선한 일 하게 하심이라, 그 선한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이 선한 말이에요. 그리스도 증거 하는 것. 강도가 천국에 무사히 갔습니다. 왜? 선한 일을 마지막에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해서. 강도가 어떤 선한 일을 했습니까? “주여, 오늘 밤에 저를 생각해주세요.” 얼마나 선한 줄 몰라요. 왜? 자기를 떠났으니까. 자기 운명을 자기가 책임 안 진다고 손들어버렸으니까. 이처럼 선한 일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그런데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나와 가지고 지가 선한 일한다고 지금까지 선한 일 했고 십계명 지켰고 거기다가 플러스 추가해서 예수 믿는 선한 일하려고 왔다가 나중에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되어있어요. 너희는 왜 너희 자신을 미워할 줄 모르느냐, 너 자신을. 주님은 주님을 버리는데 왜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못 버리느냐. 죄 없는 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나를 십자가에 버리는데 죄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죄를 뒤집어쓴 인간이 뭐가 아깝다고 그걸 못 버리느냐 말이죠. 시커먼 연탄재야 좀 뗄 게 있으니까 남겨두겠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 타가지고 허연 재만 남아있는 걸 가지고 왜 못 버립니까. 아까워가지고. 그것도 추억이라고. 죄 지은 것도 추억이라고 못 버리잖아요.
주께서 말씀의 그물망이 안 되지요. 죄만 짓지요. 그것을 의로 전환시키는 것이 이 말씀의 그물망이 해주는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또 용서받았네.” 맨 날 하는 모든 것이 말씀의 완성된 십자가에서 뽑아서 나온 스파이더맨처럼 십자가에서 나온 그 십자가의 용서의 줄에 매일 걸려가지고 또 죄를 지었네. 또 용서 받았네. 또 죄 지었는데 또 용서받았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007이에요. 온 폼을 다 잡아요. 죄에 위반 안하려고, 만약에 좀 위반하다 싶으면 과욕, 오버하듯이 헌금을 해가지고 그걸 대충 때워 넘어가. 요거 죄를 지었지만 이것 헌금 받으시고, 그냥 눈 감아 주시고, 또 넘어갔다 치고, 넘어갔다 치고 또 뭐하고. 그래서 자기가 온전하게 지금 이렇게 복 받은 것도 말씀 잘 지켜서 복 받았다. 이리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는 거예요. 바리새인, 마귀의 종들의 특징이 바로 그런 거예요.
현실은 뭐라 했습니까? 말씀의 망이다. 말씀의 망을 제가 이해되기 쉽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팁인데요. 살림하는 사람이 빨래할 때에 빨래가 상한다 싶으면 그냥 하지 말고 빨래 망에 집어넣어서 빨래하고 같이 섞어 넣는답니다. MBC에 살림의 지혜에 나와요. 빨래를 조금할 때는 세탁기에 넣지 말고 비닐봉지에 비누를 넣어서 활용해가지고 싱크대에서 조물락하면 빨래가 된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의 망 속에 빨려 들어가지고 말씀이 우리를 주무르면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니까요. 우리는 주님의 빨래감이에요. 그냥 살면 돼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살면 돼요. 아무것도 안하는 그것이 최고로 열심히 하는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일은 뭐냐, 주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예를 들면 교회에 갔는데 왠지 보니까 전에는 안 보였는데 피아노에 먼지가 끼었다. 먼지가 끼었으면 아이고, 먼지가 하면서 닦고 있는데 다른 분이 와서 “아이고, 집사님 성화되셨네요. 세상에 남들이 하지 않는 주의 몸의 몸 된 주의 봉사를 하시네요.” 그러면 이렇게 하세요. “그냥 나, 이리 살아요. 나는 먼지 있으면 못 봐요. 성질이 더러워서.” 이게 주의 일이라니까요. 꼭 주의 일은 뭐냐 하면, 나의 한일로 영광 돌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용서가 다시 새록, 새록 생각나서 영광 돌리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애가 못됐다. 그러면 몽둥이로 회초리로 패면서 “엄마는 집사면서 나를 때리나?” 중2가 꼭 티를 달아요. “그래, 나 죄인이다. 나 이리 산다. 손 내! 나 더럽게 산다. 이게 내 성질이야. 이 성질 주께서 용서했어.” 애는 때리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다 전하고. 일거이득 아닙니까. 지는 성질 풀고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이걸 참아야 되나, 때릴 것이냐. 마귀는 때려라, 천사는 참아라. 인내는 인내로. 아휴 골치 아파. 그냥 성질대로 하세요. 이미 빨래 망 속에서 빨래가 됐는데 뭘 걱정해요? 괜히 그걸 참으면 위선이 돼버려요. 위선이 돼버리면 나중에 무슨 말하는지 알아요? “주님, 이럴 것까지 없잖아요. 참았는데 이런 사태는 정말 주님답지 않습니다. 정말 이런 어려움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얼마나 착하려고 노력했는데.” 공연히 누구한테 원망이 돌아가느냐 하면, 주님한테 원망 돌아가요.
지가 착한데 이럴 줄은 몰랐다는 거죠. “니가 어떤 인간인데?” “적어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잖아요.” “니 최선의 노력이라 하는 것은 뭐냐, 니 성질대로 사는 것이 최선의 노력이야.” “참았습니다.” “참은 것도 니 성질이야. 지금까지 니 성질이야. 내가 참는 것이 옳다는 식으로 잘못된 해석을 니가 지금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 거야. 니가 성질대로 살아봐. 성경해석이 다시 되는 거야.” “아, 성경대로 사는 것이 되는구나!” 해석이 다시 된다니까요. 야고보서1장 25절에 뭐로 되어있어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라 했지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면 자유는커녕 왜 갑자기 숨이 막힙니까?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부산에 가니까 부산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설교를 딱 하는데 10분 동안 설교를 안 하고 눈물이 팍 쏟아졌다는 거예요. 그것도 10초가 아니고 10분. 설교시간이 50분인데 10분 동안 눈물만 흘리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어느 대목이냐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주여, 나귀를 어디서 구합니까? 주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면 그 주인이 내줄 것이다. 그 대목에서 막혀가지고 5분도 아니고 10분 동안이나 눈물만 흘리면서 나귀는 이렇게 쓰시는데 나 지금 뭐하고 있느냐, 그게 감격이 돼가지고 아무소리 못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했지요. 아이고, 목사님 좋겠습니다. 그런 혜택도 주시고. 저는 설교시간에 한 1분이나 못 할 때 있는데 휴대폰이 울려가지고 기다렸다가 못한 경우가 있는데. 그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10분 동안 뭐 생각 안하겠어요? 오늘 왜 저 집사 참석 안 해가지고 교인 수 왜 이렇게 부족 하냐, 오늘은 교인들이 헌금 얼마 낼 것이냐, 오늘 이래가지고 내가 이렇게 교회해가지고 애들과 밥 먹고 살겠느냐, 그런 생각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안 나잖아요.
그러니까 고 순간만큼은 누구의 사랑이 날아가 버리겠어요? 내 사랑 날아가 버리지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만 사랑하니까 상대적으로 누구를 미워하게 돼요? 자기 자신을, 이런 말씀대로 못 사는 내가 얼마나 미워지겠어요. 그게 뭐냐, 주님이 주시는 미운 감정이 고 순간 합체가 된 거예요. 그동안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내가 이뻐지게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진짜 주님의 안목으로 미움이 그 순간만큼은 나한테 그냥 장애물 없이 들이닥치니까 내가 너무나 미워서 말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거예요. 미운 놈이 뭘 말을 해. 뻔뻔스럽게 무슨 말을 합니까? 그 앞에서. 내가 죄인인데. 그 목사님은 그 때 돌아가셔야 돼요. 고 때.
그 순간만큼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세상이 천지개벽하고 어떤 어려움이 온다할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생겨버린 그 순간이에요. “나한테 갑자기 온 몸에 암이 걸리고 갑자기 내 앞에 불이 나도 저는 요 말씀 앞에서만 눈물만 똑똑 흘리겠습니다.” 하는 그 순간이에요. 그 행운 자주 찾아오는 거 아닙니다. 가끔 와요. 가끔 옵니다. 길가다가 자전거 박을 때 가끔 와요. “주여, 오늘 무슨 일인데 이렇게 저한테 벌을 주시고 자전거 바쳐서 아프게 하십니까?” ‘아차! 평소에 자전거 안 바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조심해서 안 바친 게 아니구나!’ 다시 한 번 소급해서 은혜를 깨닫게 하는 고 짧은 순간. 그것도 성령 받은 사람한테나 해당되지 성령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안 되고요. 절기에 올라가는데 뭐냐, 세상을 미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올라가십니다. 그 이야기 하려고 1시간 이상 이야기한 겁니다.
요한복음7장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뭐라고 합니까? 악하다고 하지요. 악하다고 하면 세상이 어떻게 합니까? 세상의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겠지요. 본성이 뭡니까? 감히 이 세상이 악해? 그러면 나는 너를 미워해. 벌써부터 예수님과 세상과의 건널 수 없는 강을 지금 건너가고 있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거든요. 제가 4자를 쓸 테니까 요 4자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성립하는 방법을 나한테 알려주세요. 자연물 띄우고 외(자연물 ~외)이게 지금 성립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사실은 성립이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어디에 포함돼요? 자연물 안에 들어있지요. 요 컵이 있는데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요 컵 안에서 살고, 개미보고 니는 컵밖에 나가면 뭐할래? 라는 말의 의미가 있어요? 없어요? 의미가 없지요. 왜, 컵 안의 세계가 전부기 때문에. 지금 기대하는 이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거 보세요. 그들의 세계의 한계가 어디입니까? 그들이 주님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아침에 눈만 뜨면 해질 때까지 꿈속까지 누구만 생각해요? 꿈속까지 눈에 보이는 컵 안의 세계만 생각한다고요. 자연물외에는 없어요. 주님께서는 자연물 자체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걸 악하다 했다고요. 이 세상자체를 악하다 하니까 “그럼 예수님 어떤 분입니까?” 세상바깥에서 오신 분이에요. 악이니까 아까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미움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쫓아내시면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너는 악해서 마땅히 쫓겨 나가야 돼! 라는 통보를 만드신 분이 이제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지금 통보를 해줍니다. 고마운 분이에요. 뭔가 집에 수도가 새는데 어디서 새는지를 모르겠다. 그런데 지나가는 과객처럼 어떤 수도에 전문가가 지나가면서 “계십니까?” “누구십니까?”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그냥 지나가시지요.” “저는 사실은 수도에 대해 아는데 이 집에 어느 대목에 아마 물이 샐 겁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삿갓 쓰고 했다 합시다. 그러면 나는 아무리 봐도 모르는데 찾아가보니까 거기에 물이 새요. 그 삿갓 쓴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럴 때 그 다음부터는 삿갓 쓴 사람을 믿겠지요.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알고 내가 알아서 나의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들어오지 않고 이 세상의 바깥에 계신분의 안목에 전적으로 위임하겠습니다. 내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이 말은 뭡니까? 내가 세상 보는 것에 대해서는 드디어 나는 손 털고 나다움에 포기했습니다. 뜻이에요. 나는 나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내가 남편을 잘해주니까 남편이 오해하기를 “당신이 나를 사랑하네.” 할 때, 제가 뭐라고 했지요?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눈에는 이게 사랑으로 보이나?” 이리 하겠지요. 결혼은 실패하라고 하는 거예요. 결혼이라는 것은 내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내가 믿었던 그 모든 것이 허구에 불구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절차를 한 거예요.
결혼 안 한사람은 그 절차를 다른 방식으로 실패를 느끼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만, 컵 안만 생각한다면 ‘아이구, 이 여자가 왠일이야, 나를 사랑하다니?’ 그 남편은 컵 밖의 안목을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한테 잘해주면 그게 자기가 사랑이라고 느끼는데, 문제는 그걸 사랑이라고 느끼는데서 끝나면 문제가 안 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사랑 받을 만한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는 당연히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 마땅 하니이다.’ 이리 생각한다니까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이 컵 안에 있는 개미는요, 이 세상을 그냥 세상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으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내려버렸어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 다 내 좋아라고 돌아가야 좋은 세상이라는 겁니다.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미울 경우 한 가지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내 집에 안 오고 건너뛰면서 유월절처럼, 저 집에 선물주고 그 다음 집으로 갔을 때, 두 번 다시 크리스마스 지키나 봐라, 이리 나오지요. 모든 집에다가 선물주기 때문에, 울지 않는 조건하에만 주기 때문에 누구한테나 좋은 분이잖아요.
지금 예수님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뭡니까? 건너뛰는 거예요. 구원을. 뭐가 없는 집에는? 피가 없는 집에는 저주고 피가 있는 집은 십자가에 피 발린 자만 구원을 해주기 때문에 그걸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자연물 또는 현실, 세상의 바깥의 분으로 오셔야 되는 겁니다. ~외. 외에요. 굉장히 중요해요.
외 하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생각은 죄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내 중심으로 세상 돌아가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중심으로. 스페인보세요. 얼마나 분통하겠습니까? 랭킹도 낮은 우리가 올라가고 지는 떨어지고. 친구 사이에도, 같이 친구라 하는 것도 다 친구를 왜 만나는가 하면 실패하기 위해서 친구를 만나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실패하느냐, 둘 다 친구라 생각하고 같이 야구장에 가보니까 저쪽은 두타(두산타워)좋아하고 나는 삼성 좋아하고. 친구라 하다가 둘이 야구장에서 싸워가지고 깨졌거든요. 깨지고 난 뒤에 그동안 니한테 투자한 햄버거가 아깝다. 이리 돼가지고. 그럼 투자를 왜 했어요? 투자함으로서 결국 친구도 잃어버렸지요. 자기는 두산 응원한다고. 그러니까 누가 실패해요? 내가 실패잖아요. 맞잖아요.
친구 만난 이유가 뭐다? 내가 실패자인 것을 몰랐는데, 친구를 통해서 비로소 내가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이게 애초부터 말씀의 그물망을 몰랐고, 내 중심의 욕구에 욕망에 그물망으로, 세상을 짜깁기한 일방적인 환상과 착각 속에 살았던 나를 실패로 몰아넣게 한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요한복음7장37절 봅시다. 중간을 건너뛰었는데,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뭐가 나온다? 생수의 강이 나온다 했지요. 이게 세상을 악하다고 욕하시는 미워하시는 방법입니다. 미워! 미워! 미워! 이리 하는 게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말씀의 그물망입니다. 말씀의 그물망에 대해서 이 세상 안에 인간들은 해석을 잘했다? 못했다? 못했지요. 못하면서 그들은 절기를 지켰지요. 그럼 못한 게 뭐냐 하면, 절기 지키면 우리 유대에게 하나님께서 절기 지켰다고 잘했다고 박수치면서 복을 주겠지요. 그 해석이 잘된 해석이다? 못된 해석이다? 그게 잘못된 해석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를 미워할 줄 모르고 자기 유대인을 사랑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도 사랑해 주겠지. 라고 잘못된 해석에 의해서 절기를 지킨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첫 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절기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서 심어준거라 했지요. 사랑과 미움을 심어준 거죠. 그 속성의 심어준 것이 이 세상의 절기라는 이름으로 말씀 망이 됐잖아요. 그 망을 누가 지키느냐, 유대인들은 해석도 제대로 못하면서 지켰다고 우기지만 그 못 지킨 해석을 누가 지킵니까? 예수님이 지켜버리지요. 예수님이 지키니까 지킨 결과가 뭡니까?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내 배에서 뭐가 나온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딱 두 개의 결과가 같이 나란히 되고 말았지요. 그러면 한 쪽이 한 쪽을 미워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미워 죽겠어. 진짜 미워 죽는 거예요. 이게.
왜 밉냐 하면, 그 사람을 포섭해서 내 사람이 될 것 같으면 밉더라도 참고 설득해서 내 사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시한 것은 건너갈 수 없는 그런 차이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사람의 능력으로 못 믿는다 했어요. 누구도 그 십자가 개울가를 건널 수 없어요. 자기를 미워해야 되는데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왜?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리고 평소에 내가 주인공이 됐기 때문에. 주인공 빼놓고 조연만 하는 드라마가 어디 있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이 세상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인데요.
데카르트가 이런 말 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세상 뭐있어? 내가 있음에 세상이 있지. 하나님이 뭐 있어? 내가 있음에 하나님이 의미가 있지. 내가 없는데 무슨 하나님의 의미가 있어. 이거거든요.
하나님이 뭐라 합니까? 니는 있지도 않을 때, 나는 의미 있었다. 이게 요한복음1장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없을 때도 먼저 빛과 생명이 먼저 나타났어요. 말씀이 우리보다 먼저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요. 왜? 우리를 만드신 말씀이 먼저 계시면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어요. 또 만들면 되잖아요. 화가가 그림 그렸다고 조졌다. 그러면 또 그리면 되잖아요. 주님을 믿읍시다. 간단한 문제에요. 나를 믿지 말고 주님을 믿읍시다. 죽으면 또 살려주면 되잖아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오빠 나사로를 봐라. 분명히 증거를 보여줬잖아요.
믿으면 되는데 왜 교회에서 뭘 하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자꾸 기도하려고 하고, 헌금하려고 하고, 전도하려고 하고, 선교하려고 하고, 봉사하려고 하고, 왜 자꾸 하느냐 말이죠.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시키잖아요. 그러면 하세요. 그러면 하면 되는데 이게 무슨 나에게 의미될 게 아닌가. 그렇게 하지 마세요. 원래 우리한테 의미 없습니다.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안하면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영광이 될 거예요. 참, 오래 만에 복음 전한다. 아무것도 안한 것이 영광이 될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서도 혼자 일은 다하더라.” “내가 한 거 아니거든. 주께서 내 안에서 하신 것이지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따라 오너라. 이것은 주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말이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재주는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요한복음7장 다시 봅시다. 오순절 날 유대인들은 실로암에다가 물을 퍼 담아요. 성전이 있는데 물이 안 나옵니다. 에스겔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오지요. 물 나오는 대목은 어제 제가 설교했습니다. 실로암이 여기 있어요. 다윗시대 때 여부스 족속의 성이 다윗성이 되고 모리아산은 따로 있어요. 있는데, 솔로몬시대에 도시가 확장되어서 전부다 예루살렘이 된 거예요.
그 중에 하나 포함된 게 뭐냐, 실로암 못이 포함됐어요. 실로암 못은 기혼 샘이라 해서 기혼 샘에서 히스기야 때 터널을 뚫어놓은 게 있어요. 있는데, 여기서 절기 때 되면 여기서 1Km정도밖에 안돼요. 여기서 물이 안 나오니까 오순절 날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되는데 물이 안 나오니까 여기다가 폼을 잡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벤트 행사를 하는 거예요. 장차 오실 새 성전은 이렇게 물이 나옵니다. 요게 제일 마지막 오순절이 끝나고 요 행사를 해요. 물을 부으면서 장차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 성전에서 물이 나올 겁니다. 지금 메시아가 안 왔으니까. 물이 나올 겁니다. 요 타이밍에 들어가 가지고 “물이 나오거든!” 하고 나선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니 배에서 생수가 나오거든. 이리 된다 말이죠.
그럼 보세요. 에스겔에서는 성전에서 나오지요. 성전을 측량했지요. 그러면 성전은 물질입니까? 정신적이에요? 완전히 물질이지요. 어떤 물체지요. 물체로 벽돌 다듬어서 이렇게 건물 지어서 물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의 망, 말씀의 망의 성취된 예수님의 해석은 뭡니까? 이런 물체가 아니고 이런 벽돌이 아니고 돌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이 돌은 46년 동안 지어도 이건 다 날아가고 이 성전을 몇 일만에 짓겠다고 했습니까?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해석과 주님의 해석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개입이 생긴다 했지요. 한쪽은 모든 것은 물체인데, 물체가 어떻게 정신으로 이게 뛰어갈 수가 있습니까?
아까 제가 자연물 다음에 외라고 했지요. 자연물을 컵이라고 칩시다. 외는 바깥에 있지요. 창조하신 것은 자연물 안에 계시지 않고 바깥에서 바깥 안을 보시면 자연물의 그 실상이 드러난다 했습니다. 요것이 차이지요. 요 차이를 주님께서 미리 이 자연물 속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거예요. 요게 성경 해석입니다. 요게 십자가의 해석이에요.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눈, 코, 심지어 예수님의 손을 만지고 잠자리를 함께해도 예수님과 3년 동안 숙식을 같이해도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하는 고백밖에 없는 베드로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때만 몰랐고 앞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뒤에 몰랐으면 앞에 것도 몰랐어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몰라요. 그래서 46년 동안 성전 헐어라, 사흘 만에 짓겠다, 해도 그들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아하! 그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그래서 성경은 문자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해석해야 된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해석해줘야 된다.
그 복음을 해석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나오면 안 되고 그 차이가 나오면 돼요. 그 차이. 우리는 때려죽여도 이 말씀 못 지킨다. 라고 차이만 제시하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그러니까 십자가 때문이군요.” 하고 십자가만 자랑할 거고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러니까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지.” 최선의 노력이 다 나와 버려요. 그 다음부터는. 그래서 매일 최선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벌써 어른들이 되어가지고 가득 차요. 최선의 노력이 내신 성적들이 95점, 90점 당당합니다. 시험 치면 전부다 좋은 대학 갈 사람들이 많아요. 앞에.
주께서는 그걸 보고 어떤 차이를 내느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또 차이를 하는데, 이 차이가 주님한테는 미움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차이. 왜 미움이 됐느냐 하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열심히 해볼까 되는데,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하늘나라 어떻게 갑니까?” 하니까 다시 태어난다 했지요. 다시 태어난다 하니까 니고데모가 어려워가지고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면 엄마 뱃속에 들어가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해석한, 다시 태어남, 그게 전부였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백번 태어나봤자 못 태어나고, 영에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영이 뭡니까? 성령이 뭡니까?” 이미 차이 났지요.
인간은 답을 모르는 게 아니고 문제 만들조차도 몰라요. 나는 어떤 문제를 만들어야 하는 것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준비 안 되었는데 답이 와버리니까 그 답이 답과 맞출 문제가 없다니까요. 우리한테는. 십자가가 왜 이 땅에 필요한지 모른다니까요. 헌금하라 하면 헌금하면 되고, 찬양하라 하면 찬양하면 되지,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 그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십자가가 꼭 필요할 문제로 본인이 다듬어지지 않아서 그래요.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다른 해석을 자기한테 가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해석이 뭐냐, 남은 죽어라, 나 혼자 살아남겠다. 제가 <매드맥스> 영화 나오기 전에 예를 들었잖아요. 몇 년 전부터. 그 전에. 사나이 하나가 마지막 나타나서 핵폭탄해서 지구는 멸망했다. 그러나 여기에 호주의 사막 한 가운데 사나이 하나가 난닝구 째 진거 입고 들어와 가지고 드디어 기름과 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뭐냐 하면 그 <매드맥스> 개봉이전에 20년 전에 젊을 때 히트 친 영화거든요. 호주에서 촬영했는데. 그게 얼마 전에 개봉해서 히트 쳤잖아요. 자기 자신을 해석해야 되는데 같은 동료들끼리, 같은 죄수들끼리, 같은 컵 속에 있는 개미들끼리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들이 해석하면서 이런 해석합니다. 그냥 해석하면 밉지나 않지, 꼭 이런 해석을 해요. 정통적으로 역사적으로 합법적인 것만 골라서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이 들어있어요.
개혁주의 신학이 뭔데요? 개혁주의 공부하신 목사님. 개혁주의 신학이 뭐예요? 갑자기 질문해서 미안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뭐냐 하면, 오래된 사람이 오래되고 나중에 온 사람은 나중 되고. 이게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게 용납을 못 합니다. 화가 나요. 역사와 전통 자랑합니다. 천주교와 똑같아요. 역사와 전통.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에서 제일 쳐주는 교리가 뭐냐, 삼위일체에요. 무슨 개 뜯어 먹는 엉뚱한 소리를 해도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정통이 돼버려요. 삼위일체 방패 망으로 좋아. 어떤 짓을 해도 “저 삼위일체 믿습니다.” 하면 “예” “삼위일체 목사님을 우리가 치리 못하지요.” 이리 나와요. 무슨 짓을 해도 삼위일체를 믿으면.
그러면 교인들도 “목사님, 삼위일체 믿습니다.” 이러면 목사가 또 가만히 두지를 않아요. “삼위일체를 집사님 믿어요?” “예” “한 번 설명 해봐요.” 설명한다고요. “집에 가면 아버지, 회사가면 회장님, 교회가면 장로님, 삼위일체입니다.” “그건 양태론인데요.” 어떻게 설명해도 삼위일체 위반되게 되어있는 게 삼위일체입니다. “그럼 목사님이 설명해 보시지요.” “이것은 너무 신비롭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지 설명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는 발 빼. 자기는 말 빼고 아마추어들 집사한테 묻는 것은 감히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하나의 간접적인 그런 발언이에요. 절대 그리되면 안돼요.
삼위일체는 없습니다. 삼위일체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예요. 삼위일체는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이 하나님 플러스 인간에게 나왔어요. 그것은 플라톤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더하기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부족했는데 하나님이 아들 보내가지고 인간을 신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신되고 싶어 하는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뭐냐, 예수님은 인자입니다. 인자 안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인간하고 인자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요게 차이에요. 건널 수 없는 차이입니다.
사람들은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복음16장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할 때, 그 때 나온 베드로의 고백이 사람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와요. 그게 뭐냐, 그게 차이에요. 건널 수 없는 개울, 개울 넘어보세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혈육이 아니고 누가 이야기했다? 내 아버지, 네 아버지 말고 내 아버지. 내 아버지가 너에게 그렇게 알려주었다. 누구 증거 하라고? 예수님 증거 하라고. 내 아버지가 너에게 입을 놀려서 그런 고백이 나오도록 했다. 따라서 이것은 니 실력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뭐냐, 그 차이를 계속 그 개울을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절기에 가서 물을 니 생수에서 나온다, 이 말은 바로 너희들이 절기를 지키면서 절기를 위반하고 있다는 겁니다. 모세의 법을 지키면서 모세의 법을 위반하고 있는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세의 법을 어기거든요.
공부했으니까 안다고 치고 복습해 봅시다. 그들이 왜 모세의 법을 유지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지요.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사랑할 것은 자기만 사랑하잖아요. 그러면 자기를 사랑하는 안목을 가지고 뭘 본다? 구약 성경 모세 율법을 봤지요. 보니까 보는 쪽 쪽 뭐가 나왔습니까? “주가 나를 사랑하네.” 이것만 보이겠지요. “내가 뭘 해도 나를 사랑하시네.” 이것만 보이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내가 노골적으로 하기에는 미안해요. 왜냐 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그대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노래도 불러보잖아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러니까 뭐든지 우리는 미움이라는 단어는 아예 빼버렸어요. 주께서 미워하시고, 미워하신 자를 미워하셨기에 죽여 버리고 죽은 우리를 살려냈는데, 미워 죽겠어! 하는 자를 사랑으로 살려내고, 우리보고 살려낸 게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살려냈는데, 우리는 내 이름으로 내 이름이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이름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습니다.
니 말고 주님 때문에 살려냈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 다음에 뭐다?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10장13절. 사도행전2장21절. 요엘서2장.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늘이 캄캄한 별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구원을 얻으리라.
“니 인생 니 거 아니고 내거야.” 고린도전서6장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너희 것이 아니고 이제는 내 것이다. 도대체 여러분들은 성경 구절을 어떤 대목을 봅니까? 나는 그런 대목이 잘 보이던데요. 하라, 하라, 대목보다도 그 대목이 잘 보이던데요.
하라, 하라, 대목이 보인다는 것은 자기한테 가능성을 주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옳지, 말씀대로 살면 예수 믿은 거고, 말씀대로 못 살면 예수 믿은 거 아니니까 내가 말씀대로 사는가를 테스트 해봐? 오! 되네. 온유가 되고 화평이 되네. 야~ 예수 믿는 거 맞구나! 장기 둘 때 몇 명이 둬요? 2명이 두지요. 바둑도 2명이 두지요. 몸 파는 아가씨들 화투 칠 때, 몇 명과 화투 칩니까? 그 사람들 아침에 손님 없을 때 몇 명과 화투를 쳐요? 혼자 쳐요. 영화에서 봤지요. 영화에서. 혼자 친다니까.
사람은 혼자 노는 게임이에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옆 사람이 도와줘도 누가 잘 났어요? 엄마가 도와주고, 아빠가 도와주고, 잘 도와줘도 누가 장해서 이만큼 살아왔습니까? 내가 장해서. 내가 장해서 이만큼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건드리면 화나는 거예요. 내 드라마고 내 삶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뭡니까? 고만해라, 많이 먹었다. 니 혼자 치는 장기, 바둑 많이 쳤잖아. 이제는 나 혼자 할란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름을 바꿔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듯이.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누구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기름과 물과 공기와 햇빛이 전부다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취직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취직했고, 쫓겨난 것도 주의 이름으로 쫓겨났고. 주의이름으로 모든 것이 일거수일투족 머리카락 자라는 것도 발걸음 세는 것도 전부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 메르스(MERS) 걸리는 것도 전부 다 주의 이름으로 다 걸리기도 하고 안 걸리기도 하고 전부 주의 이름으로 와요.
그러니까 평소 돌아보면서 살 게 뭐냐 평생 돌아보면서, 내가 나 산 것은 주의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그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를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말은 짧은데, 왜 그리 2시간 걸렸을까 그것 설명하는데. 내 이름이 없어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우리 붙들고요, 볼때기 쥐고 “너 아버지 뭐하시노?” 물을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요.”이렇게. “우리 아버지 주님이에요.” 이렇게 툭 튀어나와야 돼요.
자, 그렇다면 7장에 건너뛰었는데 건너뛰기 전에 그 이야기 뭡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테스트하는 거예요. 니가 진짜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켰는지, 아니면 모세의 율법을 위반했는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모세의 율법을 들이댈까요? 오늘 성경한 게 공부한 게 다 얽혀져있어요. 유대인들은 자연물 외, 자연물 외를 뭐로 보느냐, 외를 율법 주신 분으로 알아요. 그 말 맞지요? 그렇지요. 율법 여호와가 줬잖아요. 그 말 맞잖아요. 문제가 뭐냐 하면 율법이 뭐냐 차이, 갈라짐이 아니고 율법이 Bridge over troubled...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된다. 율법이.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그러니까 선교단체에서 주로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인간이 여기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가 된다? Bridge over troubled 하나의 다리가 되어 건너갈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거 아니거든요. 이것은 다리가 끊어졌어요. 내가 건너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다리를 걸쳐주고, 걸쳐주기만 하면 안돼요. 아예 걸치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와야 돼요.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무뢰하게 우리의 허락도 없이 내 안에 다 이루었다! 가 내 안에 허락도 없이 침 놓듯이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니까 우리는 우리 내부가 차이가 나요. 나는 내 사랑하고 싶어요. 그런데 가끔은 종종 가끔은 내가 미워져요. 세상에 내가 나를 미워진다는데 이것은 월드컵 16강보다도 더 큰 기적입니다. 내가 왜 갑자기 미워요?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데. 나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는데 내가 왜 미워져요? 주의 속성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미워지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미워해서 죽여 버리고 예수 이름으로 사랑해서 죽은 나를 건져가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기 지킨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여호와께 영광 돌린다는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우리도 그들과 한패인 것을 고백하고 그런 인간을 미워지도록 주신 그 성령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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