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여름 수련회 교재
2015 여름 수련회 교재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2015년 여름 수련회 교재
의심의 시절
- 사시기 속의 그리스도 -
Ⅰ 서론
말이란 공허하다. 그리고 사용하면서 표현된 단어도 궁극적으로 계속 따져 들어가면 무의미하다. 이것은 말이나 글이 소통의 수단이기 이전에 인간의 주체 자체가 공허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주체가 아무런 실질적인 내용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죽음과 함께 모든 인생이 종결된다면 그 전에 내뱉은 모든 말과 글들은 주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존재는 공허를 이겨내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지 않음으로 행세하기 위해 인간들은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것도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으로 시행한다. 그것이 ‘민족의식’이다.
민족은 민족 특유의 만족이 일단의 사회적 관행들 속에서 계속해서 구현되고 또한 이 관행들을 구조화해서 민족적 신화들을 내놓고 되고, 그것을 후대에 전수한다. 그 내용은 자신의 민족을 존재론 위에서 당연함을 유지하기 위한 ‘일관성 갖추기’이다. 여기서 집단적인 의미가 발생된다. 특권화된 영역을 마련한다. 이 구조 안에서 일상생활은 의미를 획득한다.
그런데 이 의미가 두 개의 층으로 구분 지어진다. 하나는 사법적 영역(사사)과 일상적 영역의 구분이 그것이다. 사법적 영역은 초월적 영역으로 점차 드높여진다. 사법적 영역이 더 높이 올라가면서 왕을 요청하게 되고, 그 왕은 보다 더 높은 영역인 하나님 나라의 접촉이 가능한 경로로 여긴다.
따라서 왕이 곧 우상의 자리를 점유하게 되는 것이다. 사사기는 우상숭배의 조짐이 그들이 왕을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왕이 없는 현실에서 그들의 삶의 의미가 자체적으로 불안하며 따라서 자연스레 초월적 의미영역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와중에 이스라엘 왕을 허락하는 공허한 자리가 발생하게 된다. 왕이란 이름의 우상이 그들의 내부 균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의미체제를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이라는 기호가 자신들의 일상적 의미에 충족시켜 주지 못함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왕 제도를 통해서 일상의 의미체제가 완결한 모습이 되고자 기대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삼상 8:7-9)
사사기는, 하나님의 압박에 의해서 인간 내부에 우상적 기운이 왕의 체제로 구체성을 띠고 떠오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들의 장(場)이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삿 9:8)
Ⅱ. 본론
1. 전체적인 흐름
세겜에서 거행된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 다짐은 여호수아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는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인도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하나님이 곧 인도자요 지도자임을 여호수아는 천명했기 때문이다.(수 24:12-13) 광야언약에 대하여 여호수아가 확인한 것이 바로 이점에 관한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그 확인을 가나안 땅에서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붙이시매 이기는 전쟁이었다.(수 24:8) 비로소 우리는 사사기의 주제가 여기에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여호수아가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여러 번 백성들에게 다짐을 한 바는 약속의 땅이 갖는 특수한 속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 특수한 속성은 기존의 가나안 민족들이 알고 있는 우상과는 어떠한 접촉점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수 24:15-20)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이 언약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과 도저히 타협될 수 없는 神이시기에 여호와를 섬긴다는 말은 이방신을 이미 제거했음을 전제로 한 행동에서 나와야 한다.(수 24:23) 선조들에게 약속한 바를 기어이 지키신 약속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의 정신에 복종하는 것뿐이다.
정복이란 곧 여호와의 정신에로의 귀속을 의미한다. 또한 가나안 땅에서 이방인들을 몰아내는 행위는 비언약적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이 그 언약의 이름으로 친히 통치를 수행하는 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전히 그 언약적인 차원에서 정복하지 않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언약적 통치를 고수하겠다고 재확인한다. 이는 불순종 했을 때 저주 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두고 말한다. 그 저주의 방식은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치는 가시 노릇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일관성에 낙심하여 목 놓아 울게 된다.( 삿 2:1-5) 이방나라의 미 철수는 군사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 세대 이후,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이방민족의 존속을 신앙적 이유로 해석하지 않았다. 상호 우호적인 문화교류가 곧 자기들에게 평화를 제공하리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이방민족도 역시 여호와의 손이 놓여 있다. 이방 민족을 통한 괴로움이 이스라엘에 도달 되었다.(삿 2:15)
여기에 사사가 등장하는데 사사의 등장은 모세언약 어디에도 약속된 바가 없는 특별 조치이다.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도 구원자로 등장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삿2:17) 사사의 임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신앙공동체가 정상으로 유지되는데 동원된다. 그 수행에는 전쟁과 그 전쟁에서의 사사의 위치를 조상의 타락에 대하여 무지한 후대사람들에게 재현시킴으로서 완수된다.( 삿 3:1-2) 결국 사사란 인간의 타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존속되어 지는가를 통해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그들에게 교육시켜 주는데 있다. 언약대로라면 이스라엘은 범죄 즉시 그 땅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거기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마다 다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세언약이 지닌 또 다른 면을 발견케 해준다. 도대체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제기한 그 언약이라는 것이 어떤 의식을 지닌 언약일까?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사자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새로운 사명을 확인하는 경우에 등장하곤 했다.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결코 자신의 일일수가 없고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종으로서 임무수행에 차질이 없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즉 여호와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이다.(출 3:1-5, 수 5:13-15, 삿 2:1-5, 13:3-20) 따라서 여호와의 사사가 방문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스라엘이 제대로 구원받을 수 없느냐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서 해야 될 여호와의 종의 노릇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즉 종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종 된 이스라엘이 표현하는 사항은 구원이라는 것은 과연 인간의 도움이나 노력의 결실과 무관함을 보이는 것이며 구원이 가장 잘 표현되는 경우는 구원의 대상인 이스라엘이 완전히 자신에게 기대하지 않고 전적으로 여호와께 매달릴 때이다. 그런 와중에도 등장된 사사의 위상은 그 자체가 부르짖음에 대한 표상의 차원에서만 설명된다.
부르짖음이 갖는 언약적인 가치성을 통해 언약이 갖는 이미지를 파악할 수 가 있다. 이런 면에서 백성들이 사사를 볼 때마다 의지하는 생각을 포기해야 되고 또 사사는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전쟁의 특성, 즉 붙이시매 비로소 이기게 되는 전쟁을 치러 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전쟁이란 여호와에서 친히 싸우시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삿 3:28/ 4:7,14 / 7:9,15 / 18:10/ 20:28, 참조: 출 14:14, 신 1:30, 수 10:14, 삿 20:35)
언약은 사사의 등장으로도 유효하게 이어져 내려간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의 개인 하나 하나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이 다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여호와의 신이 어떤 관점에서 언약 수행에 동참하고 있느냐를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즉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은 결코 여호와의 신이 남다르게 일할 수밖에 없는 어떤 비범한 재질이나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사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모든 구원의 결실은 그 사사 개인의 공로로 돌릴 수 없었다는 데서 모세언약을 그 시대에 구현하고 있다. 오직 거룩한 분에 의한 열매로 돌려지는 것이다. 만약 그 열매를 인간의 공로로 돌리려는 시도가 일어나면 그 잘못된 시도 때문에 억울한 죽음이 그 주변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삿 11:34-4에 나타난 입다의 무남독녀의 억울한 죽음 같은 예) 자신의 무절제와 방탕으로 사사의 일이 방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사의 기능에 대한 오해다.
삼손의 경우 그가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그가 죽을 때 죽인 사람이 많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삿 16:30) 사사 개인의 자질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사기에 흐르는 정신은 비단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전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베냐민 지파의 반(反)-윤리성을 책벌 하는 과정에서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이 처음 두 번은 오히려 무지무지한 참패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연합군 생각에는 그들은 자동적으로 正義의 편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승리가 무조건 우리에게 보장되리라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의 땅이 갖는 특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연합군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지 여호와 전쟁의 속성을 이해 못하면 멸절 당해야 마땅한 것이다. 연합군의 승리는 그들이 세 번째 올리는 기도 가운데서 전적으로 자신의 정의로움을 의지하지 않음을 확인하고 난 뒤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비로소 승리할 수가 있었다.(삿 20:28) 이는 진정 이 땅의 왕은 사사나 또는 다른 연합군이 될 수 없고 여호와만이 왕임을 천명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대가 끊겨 멸절하는 상황을 또 염려해야 했다. 이것은 힘에 의한 정복만이 언약의 완성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자유 하게 한 그 정신의 구현만이 진정 여호와의 왕의 정신에 부합됨을 보이는 것이다.
사사기 9장에서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사사를 보내면서 까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그 여호와의 사랑만이 언약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한 인간에 의해 다른 인간을 통치 지배 하는 것은 희년 사상에도 어긋날 뿐더러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실체에도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드온이 분명히 밝히기를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기드온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소명 받을 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와 가진 경험 때문이다. 삿 6:20-24 에서 그는 여호와의 사자와의 만남에도 자신의 생명이 보존되었음을 통해 (여호와 샬롬) 이스라엘의 구원도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이 보존된 것과 동일하게 구원받게 됨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왕이 되심이 이방민족에게는 심판의 왕이지만 언약의 민족에게는 은혜의 왕이 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왕이 가지는 은혜의 면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있다.
2. 사건들의 나열
사사들의 등장 순서는 이러하다.
옷니엘(유다)-에훗(베냐민)-삼갈(유다 혹은 납달리)-드보라(에브라임) -기드온(므낫세)-돌라(잇사갈)-야일(길르앗)-입다(길르앗)-입산(유다)-엘론(스불론)-압돈(에브라임)-삼손(단)-엘리(레위)-사무엘(에브라임)
지역적으로 볼 때, 사사는 의병처럼 일어난 것이다. 특별히 왕이 없기에 자기가 살던 지역의 생존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땅 위에서 나는 인생으로서 생존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압박과 압력을 가하시는 방식으로 똑같이 생존에 몰입하는 이방민족과 마주치게 하시는 것이다.
“살려 달라”는 그 외침은 생존문제를 해결된다는 조건 안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인간들의 의지가 실려 있다. 그런데 ‘약속의 땅’과 ‘땅’이 다르다. ‘땅’에서 ‘약속의 땅’이 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요구된다. 생존조차 포기한 희생이다. 반대로 ‘약속의 땅’에서 ‘땅’이 되는 과정에서는 ‘약속’을 포기한 대가로 언약적 희생물이 품고 있는 저주를 밖으로 쏟아지게 되어 있다.
사사는 바로 이 양쪽의 속성을 모두 포함한 채 중간 위치에 놓여 있으면 그 반대편으로 향하는 양 경로를 다 보여 주는 자이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결과다. 이로서 ‘하나님이 신’은 구약 때부터 이미 중보자의 작용과 관련 있음이 밝혀진다.
사사들의 중요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여자 사사 드보라의 전쟁(4장-5장)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 후손들은 자신들이 딛고 있는 그 땅의 속성을 알지 못했다. 알려주는 방법은 전쟁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삿 3:2-3)
약속의 땅의 전쟁의 본질은 우상과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과 비교시키는데 있다. 어느 것이 실질적인 현실이냐를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백성에게 알리고자 하신다. 전쟁의 방식도 약속을 드러내는 계기로 활용된다. 왕 제도를, 곧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을 해체하는 방식이다. 드보라에서는 ‘연약한 여인의 손’으로도 강한 남성 장수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삿 4:9)
여자 사사 드보라는 무능자(無能者)의 표상으로서 이 세상의 유능자(有能者)를 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준다. 바락이나 이방장수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을 지키는 방식을 동원하다가 무능자로 전락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생존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자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상(象)을 유지하시는 곳이 곧 ‘약속의 땅’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2) 기드온 전쟁(6장-7장)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전쟁을 부추기고 도발케 한다. 기드온으로 하여금 성읍에 있는 바알의 단을 파괴토록 하신 것이다. 이로서 바알신을 신봉하는 이방민족들이 연합해서 기드온이 있는 곳을 공격한다. 기드온은 난처해한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일으킨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임을 알 수 있는 증표를 원한다. 그것은 바로 새벽에 밖에 내놓은 양털에서 이슬이 내리는 여부를 가지고 테스트하는 방식이다.
기드온 쪽에서 손 쓸 수도 없는 처지에서 기드온이 보여줄 것은 이번 전쟁이 ‘양털 기적’처럼 인간 경험치 못할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것이다. 압박하는 미디안 종족의 생존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정치적 해방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 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싶어한다. 어느 민족으로부터 압박이 오더라도 참을 때까지 참으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분란을 일으키는 쪽은 인간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 쪽이다. 왜냐하면 그 땅은 인간들이 생존을 위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구현되어야 될 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드온이 사용하는 무기 또한 이런 취지를 보여준다. 미디안 종족이 이스라엘에게 패배시키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미디안 종족과 이스라엘 모두다 하나님에게 패배시키는 무기가 동원된다.
그것은 ‘꿈’이었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삿 7:13) 기드온 300명 군사는 꿈속의 내용대로 움직이는 군사들이다.
꿈이 꿈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 전환된다. 꿈이 곧 현실임을 알리는 신호가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들은 나름대로 ‘현실’이라고 여기는 꿈속에 잠겨 살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 현실은 약속 밖에서 꿈같이 허망하다. 이 허망한 꿈은 약속 안에 있는 참된 현실로 이전하면서 약속의 일부로 전환된다.
(3) 기드온 자식들 사이의 정치적 싸움 (9장)
전쟁에서 승리가 있고 난 뒤에 기드온의 공과를 탐내는 정치적 분위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므낫세 사람인 기드온이 전쟁 승리의 영광을 다 차지하는 것에 질투하여 자신들을 전쟁에 넣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터뜨린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의 정치적 성향은 나중에 입다 사사에 의해서 처참하여 저주받는다. (삿 12장) 이러한 성향이 기드온 가정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첩의 자식인 아비멜렉이 다른 형제들 70명을 죽이고 스스로 왕으로 행세한다. 기드온 정실부인의 마지막 아들인 요담이 구사일생을 피하여 아비멜렉에게 대항한다. 아비멜렉이 3년 세겜 지역을 통치하는데 자기네들 끼리 알력이 생겨 양쪽 다 망하게 하신다. 이는 요담의 저주의 실현이다.
전쟁 영웅을 왕으로 등극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이 약속의 땅에서 전쟁을 인간 대 인간의 전쟁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되는데 이 오해가 이방종교에 대한 친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드온이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삿 8:27)
(4) 입다 (11장)
암몬 종족이 이스라엘이 침공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임시적으로 채용하려고 한다. 거기에 대해서 입다는 승리하고 난 뒤 왕이 되는 조건으로 전쟁에 임하겠다고 나선다. 입다는 전쟁의 승리가 곧 자신이 이스라엘을 신앙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급에 해당된 자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이번 전쟁을 ‘신에게 속한 전쟁’이라는 티를 낸다. 즉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면 누구든지 자기 집에서 자기를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막상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니 아직 시집도 아니 간 무남독녀 자신의 딸이 춤추며 반긴다. 입다 는 경악한다. 이 암몬간의 전쟁에서 신앙적 지도자로 나서는 당위성이 도리어 입다 자신의 가정의 전부를 징벌의 대상이 되게 한 전쟁임을 알게 된다. 즉 암몬 민족은 하나의 미끼였고 정작 하나님의 적은 입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자체였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속죄를 이스라엘 죄로 인해 희생당하는 바로 그 존재로 지정토록 암몬과의 전쟁이 유도된 것이다. 입다의 딸이 진정한 신앙을 보여준다. 곧 이스라엘의 보편적 죄를 위해 희생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이 승리로 이끌게 된 요인 전쟁 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5) 삼손 (13장-16장)
나실인으로 태어나야 했던 사사, 삼손의 존재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죄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내부에서 파악될 문제임을 드러나게 되었다.
삼손을 낳게 된 마노아 가정은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불임의 가정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강제 개입이다. 이 강제 개입으로 인해 삼손은 부모는 삼손이 하는 일에 관여할 수 없도록 단절되어 있다. 이로서 삼손에게는 부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삼손에게는 정체성 정립에 혼란이 일어난다. 이 정체성의 혼란은 ‘수수께끼’로 나타난다. 본인조차도 그 시점에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며 앞으로 삼손이 살다 가야하는 인생의 끝자락에 비로소 밝혀질 수수께끼다. 이 수수께끼 같은 인생이 풀리면서 삼손 내부에 자리 잡은 진정한 나실인의 면모가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머리카락에 솟아오르는 힘을 사용하게 된다. 출신 종적을 따지지 않고 마음에 드는 여성을 사귀하고 싶어 하는 사적인 욕망과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한다는 나실인으로서 사명 사이에서 혼선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여인을 가까이하고 싶은 근원적 욕망을 기반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해방하려는 사명도 아울러 달성하고자 한다.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오소서 하니 이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관할한고로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서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3-4/ 삿 15:7-8)
이러한 삼손의 정체성 혼선은 곧 그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적 혼선을 대변한다. 블레셋이 강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기 정체성을 놓쳐버려서 블레셋에 의해서 통치 받았다. 이 이스라엘의 정체성 부재는 ‘희생’ 보다는 이방민족들처럼 ‘힘’을 사모한 게 원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온 몸으로 보여주면서 등장한 나실인인 삼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다시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도, 희생을 모토로 한 나실인의 사명은 저지될 수 없고 오히려 그의 사명을 방해하는 외부적 조건들로 인해 사명을 키우게 만들었다.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6) 미가 가정에서 일어난 일 (17장-18장)
신앙적 중심이 없는 곳에서는 각 개인이나 집단은 힘의 질서에 따라서 요동쳐야 했다. 레위지파도 살 궁리를 찾아 떠돌아 다녀야 했고, 단지파도 집단적으로 살 땅을 얻기 위해 무기를 장착하며 강탈에 나서야 했다. 신앙적 중심은 개인의 힘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로 변해있었다.
돈을 잃어버렸다고 성급하게 화를 낸 미가의 어머니는 자식에게 저주가 돌아 갈까봐 후속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 종교의 형식을 빌려서 자기 집안의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 여호와 종교의 형식이란 다름 아닌 레위인을 자기 집안의 액운을 사전에 차단하는 사설 무당으로 세운 것이다. 레위인은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 형식이 사사로운 개인 가정에 국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파에게는 집단적으로 통할 수 있는 우상적 발상이었다. 미가 가정을 들렀던 단지파의 600명 군인들은 무기를 앞장 세워 레위인 뿐만 아니라 제단에 차려놓은 우상물 세트까지 일괄해서 탈취한다. 즉 힘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축복 장치’도 포함될 수 있다는 발상을 발휘한 것이다.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삿 18:26)
희생이 아닌 힘에 의해 생존을 시도하겠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세계가 되고 말았다. 이로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다 는 비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이 이스라엘이 정상적인 언약으로 돌아오려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한다. 그것은 레위인의 첩 죽음과 관련되어서 번진 베냐민 지파의 소멸 사태다.
(7) 레위인 첩 죽음과 베냐민 지파의 소멸 (19장-21장)
레위인의 첩이 행음을 하고 친정인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가버렸다. 개인 가정사 문제이었다. 그런데 자기 첩을 찾으러 갔던 레위인이 베냐민 지역에 있는 기브아에서 묶게 되면서 자기 첩을 비류들의 폭력에 잃게 된다. 레위인들은 이 사실을 이스라엘 전 지역 문제로 확대시키기 위해 시신을 12토막으로 나뉘어 12지파 모두에게 보내버린다. 즉 축복받을 일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아니라 저주받을 일이 현 이스라엘이 중심으로 자리 잡다 는 뜻을 품고 전 지파와 관련 있는 살인사건으로 간주하려 한다.
만약 이러한 악행에 무감각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지파가 있다면, 그 지파는 스스로 자기네들 중심이 악이 장악하고 있음을 시인하는 셈이 되기에 적극적으로 범인 징벌에 나서게 된다. 본인들이 참으로 정의로운 지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저주스러운 일에 강하게 부정하므로서 스스로 축복의 범주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부적 압박에 대해서 베냐민 지파의 결정은 단순했다. 최후의 정의는 곧 자기 지파의 존재함이다 는 것이다. 즉 어떤 명분으로도 베냐민 지파의 존재함을 위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 정의로움 기반은 따로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를 빙자한 자신의 생존이었다. 생존함이 곧 정의인지 아니면 악행을 징벌하는 것이 곧 정의인지를 놓고 이스라엘에서 내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양편 중, 어느 하나는 정의롭다는 판정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을 줄 알았던 것이다. 악의 발생으로 인한 처리 조치에서 정의로움이 인간 세계에서 얼마나 기이하게 발생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알지 못한 것이었다. 즉 정의를 앞장세우는 자들의 내부에 이미 자신의 악을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내부를 살필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계기가 정의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되는 바로 그 점이 ‘약속의 땅’을 언약대로 경영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베냐민 지파가 악을 감싸주고 보호하기에 그 지파 자체를 제거해버리면 악도 같이 제거될 것 같았지만 결국 제거된 것은 12공동체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체제였다. 인간들의 정의로움이 하나님이 만드신 체제를 무너뜨리는 원인이 된 것이다.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이 없는 시절의 경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원한 사사’, ‘세습제가 성립하는 영웅적인 가계(家系)’를 요청하게 만들었다. 악의 재발을 왕의 통치로 방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는 그들의 내부적 우상성이 ‘왕 제도 요청’으로 이어진 것이다.(삼상 8장)
하지만 왕제도로 인하여 우상은 본격화되고 이스라엘에서 제도로 정착화 되는 계기가 된다. 형식화된 체제가 악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을 위장하는 보다 더 궁극적 악으로 권세를 발휘하게 된다.
이처럼 악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건드리게 된 모든 손길에서 같이 뿜어져 나오도록 유도되는 식으로 악은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수습은 인간이 요청한 그 우상적인 왕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살해 대상으로 전락된 숨겨진 왕에 의해서 완성된다.
악은 뭔가? 악은 본인의 생존과 존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약속을 거론하고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포장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종으로 사는 것이 악이 될 줄이야!
악은, ‘하나님은 내 편이다’는 의식을 말한다. 이게 바로 숨겨진 우상이었다. 하나님의 편은 따로 계시다. 그 분은 악한 인간의 내부에 악이라고 취급받는 바로 그분이시다.
Ⅲ. 결 론
인간이 일을 잘못해서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세상은 인간과 더불어 잘못 돌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근원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근원을 경유하지 아니하면 진리를 나올 수 없다. 근원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망해야 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인간들은 매사를 통해서 의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심해야만 하고 자기 정체를 의심해야 한다. 실수 해야만 하고 실패 해야만 한다.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인생 자체가 ‘의심의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인간은 결코 근원자가 아니라 따로 계시다.
사사기를 비롯해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내용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십자가 앞에서 성도는 ‘나의 구원’을 따로 챙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늘 살아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따라서 ‘나의 구원’을 내가 따로 걱정하게 한 것은 애초에 내 속에 있는 악이 제시한 유혹물인 것이다.
구원이란 창세 전 부터 예수님의 업무였다. 성도는 그 열매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첨부파일 : 2015년 여름수련회 교재.hwp (55.5K), Down: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