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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무엘상 3강(제물), 마태복음 65강(자기 축하) 150630강의마태복음

사무엘상 3강(제물), 마태복음 65강(자기 축하) 150630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주향(IP:222.♡.177.93)

15-07-28 11:18

제물 (사무엘상 1:19-25) 대전강의-(사무엘3강)

이근호

2015년 6월30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19-25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 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1: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 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1: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떼거든 내가 그를 데 리고가서 여호와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1: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 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 갈쌔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 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니가 어리더라

(1: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1장 19절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한나가 기도한 것 이 대목이 굉장히 유명하지요! 새벽기도 하면서 울면서 기도하는 한나는 되는데 나도 될꺼야! 라는 기대감. 한나도 아들을 얻었는데 나도 아들을 얻을꺼야! 자기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자기도 하나님 믿고 나도 하나님 믿는데 한나의 기도는 들어 주고 내 기도는 거부할 하나님은 아니시니깐 희망을 갖자!

한나가 기도 했는데 빡세게 했다! 그럼 나도 빡세게 하면 된다! 어느 정도로 빡세게 하면 되느냐! 이게 우는 건지 기도하는 건지 분간도 안되게 빡세게 하게되면 아마 응답이 될것이다라고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듯이 한나의 기도는 빼앗기기 위한 기도입니다.

소유의 기도가 아니고, 자기 개인의 기도가 아니고 이스라엘 현상이 돌아가는 이 전체를, 전체의 내막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밝혀 달라는 기도거든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금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하나의 원리원칙이 어떻게 실제로 실현되고 있는지를 다같이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일은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늘 이 말을 반복해도 좋아요.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중보자를 통해서만 일하십니다. 그 중보자가 이 세상에 나타난 방식은 뭐냐 하면 ‘대리희생’이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냥 하나님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배한다면 그건 우상이 되지요. 그런 것은 보통신이고

중보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중보자는 뭐를 갖고 있냐하면 언약을 갖고 일하시는데 한나의 기도는 뭐냐하면 언약의 실제성을 나타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브닌나가 저렇게 설치는 것은이 분명히 언약이 아닌데 자기는 아들있다고 자랑질하는 것이 언약이 아닌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러지 않는다면 반드시 언약대로 하실것이고 그 언약이 실제로 나타나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데 언약은 반드시 땅에서는 대리희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월절날 어린 양이 대신 죽잖아요! 죽음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만약 교회 나온다고 하는 것은 기꺼이 죽겠다는겁니다. 죽을 인간 아낌 없이 까짓것 죽지!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와야 돼요! 죽을 인간이 교회 와서 살자? 이건 안되고 이왕 죽을거 주님께 자치고 죽자! 이런식으로

왜냐하면 대리희생이기 때문에 그것이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안에 예수안에라는 말을 다른 말로하면 예수안이 곧 언약안입니다. 구약은 언약안이고 신약은 예수안인데 예수안에서 구원받거든요. 그러면 언약안에서 구원 받는다를 다른 말로 하면 대리 희생안에서 구원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대리 희생안에 뛰어 들어가야지요. 주께서 저를 대리 희생자로 삼으신다면 OK! 이런 마음이 되야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라는 인간이 단독으로 산다는 것, 이건 하나님 보시기에 별 의미 없는 겁니다. 그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을 스쿠버 다이버라 하지요? 해녀처럼 바닷물 속에서 하루 종일 있으면서 해삼도 따고 성게도 따는 사람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성게, 해삼따고 있는 동안 뉴스를 보니까 어떤 등산가가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했다는 뉴스가 나와도 그 사람들에겐 별 의미 없어요! 그 사람들은 등산엔 관심이 별로 없는데요.

그렇듯 하나님! 저는 살았습니다. 별 의미 없어요. “네가 대리 희생 속에 뛰어 들었느냐? 한나처럼?” 이게 의미 있는 거예요. 언약을 부각시키고 난 안 부각시키는 것, 이것이 의미 있는 것이지! 나는 잘되고 언약은 뒷전이고 이거는 하나님 보시기에 엉터리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교회가 참으로 위험한 곳이에요. ‘가짜’ 전부다 가짜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진짜라고 우기는 단체, 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교회에 와 놓고서 감히 언약을 이야기하고 주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것은 아주 주님에 대한 극단적인 모독이 되는 거예요.

그럼 한나의 기도가 그렇다면 이건 특수한 기도이지요! 한나의 기도에 응답이 나타난 모습이 중보자가 나타나는 거지요! 왜? 한나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격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찬송이 나중에 누가복음1장에 보면 그것이 마리아의 찬송으로 그대로 카피를 해놓았어요. 마리아가 외운 게 아니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카피를 해 놓으신 거고요.

성령께서 한나의 찬송을 하게 했다. 그 찬송의 내용대로 나중에 마리아의 찬송이 되게 했지요. 그러면 마리아의 몸에서 누가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한나에게서 태어난 사무엘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다 이렇게 통하는 겁니다. 이게 해석이에요. 해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의미를 찾아내는 게 해석입니다.

그리스도 그리고 사무엘의 움직임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몸의 모든 모양의 부분으로 보여지지요. 부분으로 또는 모양으로 그게 히브리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모양으로 부분으로 보였는데 마지막엔 아들을 통해 보여주지요 그 선지자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가? 이 사무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낳았다고 보시지 마시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낳았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자기가 데려가는 것 뿐이에요.

그거 어렵지 않습니다. 내 아들, 내 새끼 내가 데려다는 거 내가 낳아 놓고 내가 데려가는 거에요. 그러면 한나는 뭐냐 라디오죠. 수신전파 한것에 불과한것이지 한나가 빡세게한 기도가 뭐 사무엘을 낳는데 기여한건 전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오히려 한나를 애기 못낳게 해서 답답증나게 해 놓고 거기에 브닌나에게 심하게 멸시 당하게 만들어서 열 불나게 해서 기도 빡세게 하는 과정까지 하나님이 다 손대신 거지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지만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헤아리시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께서 하시잖아요. 어떤 분이 집 계약을 했다. 그러면 누가 하게 한거에요. 하나님이 하게 하신거예요. 그런데 부도가 났다 그럼 누가 부도나게 하신 겁니까 하나님이 하신 거에요. 실수하신 게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계약서 쓸때 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뺏앗기도록 하신거에요.

어머님 날 낳으시고 아버지 날 기르시니도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그 인간 늙어 죽었다 누가 하게 하신 겁니까 하나님이 도로 가져 가신 거에요. 해석 어렵지 않지요! 문제는 이 해석이 상당히 거북하다는 사실이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에 기쁨을 못줘서 그게 좀 문제지 해석은 간단한거에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가져가는 것. 해석, 간단한 해석입니다. 모든 해석은 간단한거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모르면 되고 죄지으면 되고 마지막 하나는 뭡니까? 죽으면 되잖아요. 모르면 되고 죄지으면 되고 죽으면 되는데 신앙의 3종 세트, 살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 고민이 되고 살려고 하니까

지난 낮 설교를 보니까 근심 한다는 것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뭔가 이단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감당 못한다고 했지요! 살려고 하니까 문제고 죄인 주제에 바르게 살려 하니까 이것이 더 큰 문제이고 뭘 알아야 복 받는다고 설치면서 모르면서도 아는 듯 설치는 것이 더 화근이 되고요 무식하면 되고 죄 지으면 되고 그냥 살다가 죽으면 되고 오뉴월 개 팔자 처럼 뭐 할 것 없네요! 간단하지요!

그래서 날 때부터 문둥병자나 소경 된 자, 강도,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주께서 만들어 냈으니 주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그 배짱이 진짜 프로페셔널 하지요! 주께서 그렇게 해 주셨는데 내가 강도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거든요! 조실부모하고 전부다 하나님이 알아서 한것 이거든요! 발걸음 세시듯이 그래서 이것을 종합적으로 이야기해서 뭐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 입니다. 왜 인간은 못하는가? 인간은 남의 일에 영향력을 줄 수 없어요. 내가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해도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상대방은 내 좋은 소리를 내 심정을 이해 못합니다. 각자 개별자이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엄마가 아무리 아들에게 이야기해도 아들은 아들의 마음이 따로 있는 거에요. 들어 주는 척하고 있지만 전달 안됩니다. 배달사고 나요. 전달안됩니다.

그래서 설교나 복음 전해서 아들 구원하겠다. 그것 애초부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거에요. 구원은 사람이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걱정 하덜덜덜 마세요! 자식이라도 구원 걱정하지 마세요.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내가 걱정할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식 걱정하게 되면 자식은 부모로 인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뭐 예수 믿는다 해놓고선 걱정은 되게 하네! 엄마가 예수 안 믿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고요. 어떤 엄마가요 자식을 교육 시키는데요 그 엄마가 참 휼륭한 사람이에요. 밥을 먹이는데 애가 “밥 먹기 싫어! 과자줘!” 어린 아이니까 그럴수 있잖아요 “밥 먹을 거야 안 먹을거야? 안 먹을 거야! 먹지마!” 하고 엄마가 딱 두끼를 과자고 뭐고 안 줍답니다.

딱 두끼가 지나고 난 뒤에 애가 자진해서 항복하고 “밥 주세요!” 그러면 과자는 언제 주느냐 그 아이가 과자 달라고 할 땐 절대로 안 줘요! 과자 생각 없을 때 과자를 줘요. 그래야 과자 먹는 것을 스스로 조절 할 수 있게 되요. 과자를 원할 때 줘 버리면 이건 한도 끝도 없이 밥이고 뭐고 과자만 찾게 되니까 그렇게 하면서 애는 생각하기를 “ 내 인생은 내가 챙겨야지! 엄마 믿다가는 큰일 나겠다! 굶어죽겠다! 가 되는 겁니다.

구원해 주세요! 구원 안해 줍니다. “아이고! 난 구원 못 받을 인간이구나!”라고 하면 구원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 됩니다. 그럼 강도나 세리와 창녀 같은 경우에는 지금껏 내 인생을 그렇게 살도록 하신 것도 우리 주님께서 구원의 일환으로라는 것이 이상하게 믿어지는 거에요.

보통은 원망을 하면서 “그래! 너 잘 났다!”하고 “나! 지옥 갈래!” 이렇게 나올건 데 이상하게 그게 아니고 택한 백성은 달라요. 이건 설명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마저 주께서 주신 마음이기 때문에 설명 할 수 없는데 내가 지금껏 예수도 안 믿고 마음껏 농땡이 부린 것도 구원의 절차 속에 이미 하나의 깔아 놓은 과정이다 하는 것이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급해서 “이제야 돌아 왔습니다! 제가 탕자이네요!” 이렇게 돌아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보탬이 스며들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인데 이 곳, 이 땅에서 어떻게 일 하시는가? 아까 분명히 시작 할 때 이야기 했는데 그새 잊어 버렸죠? 하나님이 일 할 때는 어떻게 하신다? 중보자로 일하십니다! 잊지 마세요! 중보자로 일합니다.

중보자가 나타난 것은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대신희생이라 했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뭐라 나오냐 하면 두자로 ‘제물’입니다. 그래서 오늘 첫째 시간에 강의 제목은 제물이고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드리는 제물이 있어요. 서원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번 보겠습니다.

(1: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1: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떼거든 내가 그를 데 리고가서 여호와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1: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 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1: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 갈쌔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 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니가 어리더라

그러니까 여기서 한나가 자기의 아들을 데리고 간 것은 하나님 앞에 바치기 위해서, 서원하기 위해서 간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수소 세 마리가 나오지요! 수소 세 마리와 서원제인데 자! 신에게 나올 때 그냥 “신이시여!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지요. 뭔가 바쳐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치라고 지시 한 적이 없지요!

율법 이전의 옛날에는 어떻게 했는가?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도시를 만든다 쭉 보면 그 이후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미 그때부터 그들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면서 신에게 드린 적이 있어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서 세겜에 도착 했을 때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거든요! 하나님이 양 몇 마리 잡아라! 그렇게 지시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알아서 드린 거에요.

그래서 그 알아서 드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양과 소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가 성경에 나옵니다. 욥기서를 한번 보겠습니다. 욥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42장인데요 8절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소와 양이라고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의 사람들이 평소에 키웠던 가축 중에서 7마리와 7마리를 잡아서 드립니다.

그런데 이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과 같은 숫자에 제물을 드린 것이 민수기에 보면 나와요. 민수기 23:1절에 보면 지금‘제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겁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 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제단이 몇 개 입니까? 일곱개이니까 한 단 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송아지 한마리와 수양 한마리씩 드리겠지요!

그러니까 이걸 보고 이게 발람이 선지자이잖아요! 선지자거든요! 그럼 발람을 누가 지배합니까? 최종적으로 하나님이 지배하지요! 그리고 발람이 사이비입니까? 진짜 선지자입니까? 사이비 아니고 진짜 선지자에요. 진짜 계시 받는 선지자에요. 마치 하나님이 마귀를 사용 하듯이 영적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뇌물 받고 저주해서 문제가 되지만 그 전에 보면 “가만 있어봐! 내가 신에게 계시 받고..!” 계시 받는 게 계속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 쓰는 하나의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선지자 발람이 요청하는 것은 다 합하여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받쳤다 그런데 이 발람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자가 아니잖아요! 욥도 마찬가지고 모세의 율법하고 관계없이 율법 이전의 사람들이에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뭐냐하면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7일 만에 하지요! 6일은 창조하고 제 7일에 안식 했는데 7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창조했음을 대대로 하나님이 창조 했다는 사실을 계시로 만들어서 계속 전달하는데 필요한 숫자로써 7을 계속 하나님께서 활용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욥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일곱 송아지 수양 일곱을 바쳐라! 그렇다면 하나임이 여기 계시고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서 일하시고 중보자가 이 땅에서 일하시는 방식은 바로 제물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제물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 창조한 피조물과 대화를 시도할 때 천지 창조안에 소가 있을 것이고 양이 있을 것이라 이거죠.

그러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어떻게 연결 되느냐? 다른 말로 하면 장차 오실 중보자께서 아직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 천지창조의 사이에 어떤 식으로 중보자를 표현하느냐? 같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7이라는 숫자를 집어넣습니다. 그럼 7이라는 숫자를 집어넣을 때 이것이 천지창조 하시고 계속해서 세상 끝날까지 반복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창조한 분이 계시다라는 것을 숫자로 표현하면 7을 통해서 계속 전달된다고 보면 되지요.

특히 안식일 같은 경우 7일만에 반복해서 되잖아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율법을 줘서 제사에 양이 몇 마리이다라고 구체화 하기 전에 이미 모든 인간에게는 소나 양을 바치라는 사실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신에게 드린 다는 것 이것은 보편화 되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 구체적으로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계시할 때에

특별히 욥이나 발람 한테는 7이라는 숫자를 제공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 너에게 이야기하고 있다라고 관계 짓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민수기에 나오는 28장과 에스겔에 나오는 모드든 제사법에 양과 소의 숫자, 이런 숫자들과 모든 숫자가 결국은 어디로? 제 이론이 맞다면 어디로 마지막에 종착될까요?

일곱 마리의 수양과 일곱 마리의 수소로 마감 되겠지요! 방금 제가 말한 이론이 맞다면 하나님께 제사 드릴때 모든 다양한 제사 방법과 제물을 드리는 방식이 있더라도 마지막 마감은 수소와 수양 일곱으로 마감될때에 이러한 이방 민족이나 율법 이전의 제사법 이전에 제시 한 것이나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제사법이나 맞아 떨어진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뭘 봤냐하면 민수기28장에 나오는 제사법에 제물이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느냐 하면은 쭉 나오지요 복잡하지요! 사람들이 이걸 읽을 때 짜증이 나지요 뭐~드리고 뭐~드리고 거기에 29장은 더 골치 아파요. 이거는 뭐냐하면 마지막 절기가 초막절인데 초막절에 드리는 절기가 왜그리 복잡한지 칠월 초일에는 이렇게 하고 칠월 십일에는 이렇게 하고 칠월 십 오일날 12절부터 초막절인데요.

초막절날 성회로 모일 것이고 라고 해놓고 (민 29:13절)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열셋과 수양 둘과 일 년된 수양 열 넷을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 쭉 있잖아요. 여기 보니까 수송아지 열셋과 수양 둘과 일 년된 수양 열 넷이 나오지요. (수송아지) 13부터 출발해가지고 하나하나 숫자가 줄어들어요. 줄어들어서 어디까지 줄어드냐 하면 제일 마지막,

초막절 마지막 날이 32절인데 일곱 째 날에 수송아지 몇 마리입니까? 일곱 마리죠. 그래서 마지막 날 일곱 째 날에 수송아지 일곱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여덟 째 날에는 대회로 모이는데 그 대회에 36절 보면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되고 흠 없는 수양 몇 마리를 드리죠? 일곱을 드리죠! 이게 끝입니다. 뭔가 이 제물들이 그냥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고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그 방향성에 대해서 (욥 42:8)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와 욥중 누가 옳았다는 거예요? 욥이 옳았고 욥의 세 친구들이 잘못됐지요! 그러면 제물을 누가 마련합니까? 욥의 세 친구들이 제물을 마련하는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마련해서 제물을 드리면 누가 기도 해준다? 욥이 그들의 죄를 위해서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고난 받는 욥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단하고 내기를 해서 욥으로 하여금 고난 받게 한 이유가 결국 욥을 중보자로 만들겠다는거에요. 그 시대에 욥을 중보자로 만들어 버리면 욥은 나중에 늙어 죽잖아요. 욥은 늙어 죽지만 욥과 연관이 되는 제물은 어떻게 되요? 살아 있겠죠!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수양은 어차피 인간은 그냥 자기 인생 살다가 자기 인생 끝나면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 율법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인간이 제물이 아니라 인간을 대신하는 대신희생이니까 대신하는 그 소와 양들은 계속 많다 이말이죠. 가나안 땅이 목축을 하는 땅이기 때문에 그 소와 양이 계속해서 반복반복 되다가 마지막 때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써 예수님이 와 버리면 전에는 모형과 부분으로 이야기 했던 것을 마지막에는 아들로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게 맞아 떨어지잖아요!

저는 이것을 세상의 터널이라고 표현합니다. 얼마 전에 수서에서 터널 뚫었죠?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율현)터널 50.3Km를 뚫었다는 거에요. 진짜 깁니다. 제일 긴 터널이 어디냐 하면 전에도 제가 이야기 했는데 스위스 알프스와 이태리를 연결되는 터널이에요. 옛날에는 나폴레옹이 고생하고 갔던 곳, 무려 56.9Km 힘든 알프스 산을 밑으로 뚫는 것, 그렇게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터널을 뚫자! 이 말이죠!

그런데 터널은 이미 뚫렸죠! 사람들은 터널은 안보고 메르스 이런 거만 보고 있는 거에요. 터널은 안보고 인천 유니버시아대회 그런 거 보고 있다는 말이죠! 연평해전 이런 것, 그러면 성전은 어떻게 해야 되요? 터널과 연평 해전과 연관 시키고 터널과 메르스를 연관시켜야지요. 메르스 지나가고 해전 승리된다고 천국가는 건 아니잖아요! 천국은 주어진 어려움들을 금방금방 해결한다고 천국이 아니에요.

아이고! 큰일날 뻔 했네! 기분은 좋지만 그게 천국입니까? 지옥 같은 세상을 하루 더 사는셈이지!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야 되요? 안 맞아야 되요? 돌에 맞아야 되지요. 왜 터널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것이 아까 이야기 한 대리 죽음이죠. 대신 죽음, 이게 현실로 다가 옵니까? 현실은 무엇이다? 터널

한나가 왜 애가 없어야 되요? 터널 역할을 하는 거에요. 없던 애가 기도해서 생겼고 생긴 애가 바로 이 땅의 터널, 이 땅에서 주께서 대신 희생으로 분명 일하고 있다는 거에요. 아들이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고 정작 주께서는 지금 중보자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브닌나는 아들 있다고 자랑하다 그걸 놓쳐버린 거에요. 한나는 너처럼 아들을 얻었다 하지만 너는 못한 게 있어!

무엇이야 하면 어린 아들을 도로 줌으로 말마암아 이것이 중심이다. 이것이 세상을 뚫는 중심이다 말이죠. 이것이 마지막때까지 뚫는 터널 결국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왜 있느냐 터널을 뚫기 위한 터널을 감싸기 위한 외벽이라고 보면 되지요. 시장에 가면 참 순박한 아줌마들 할머니들 많지요! 교회나 복음은 모르고 젊어선 절에 가서 비는 것만 알고 그냥 살아가는데 만나보면 순박하고 소박하지요!

세계 평화 이런 거 생각 안해요. 그저 반찬 장사해가며 우리 애만 잘 되기를 바라고 애가 무슨 짓을 해도 “엄마! 돈 좀줘!” 해도 “얘야! 아껴써!” 하면서 힘들게 번돈 주면서 엄마로써 자식 잘 키웠다는 그 자긍심만 간직하는 거에요. 왜 부모가 애한테 휘둘리냐 하면 자식 잘 키웠다는 자긍심에 본인이 속아 넘어 갔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 자식은 주님이 키우시는 것이지 자기가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공로를 자기가 뺏고 싶어요. 가로 막고 싶어요. 자식 잘 키웠다는 자랑 질 하고 싶어요. “부모한테 효도 해야지! 너는 내가 키웠잖아! ” 하지만 부모가 자식 키울 때는 재미있기나 하지 나중에 치매 걸린 부모는 재미 하나도 없어요. 해준 것도 없고 계산해 보면 자식이 고생이 더 심해요.

도대체 그 사람들의 문제점이 뭡니까? 시장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오로지 자식, 자식 찬바람 불어도 마다안고 그런데 그 사람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자식 하나 잘 키우겠다고 공부시킨다는데 뭐가 문제에요. 이게 바로 브닌나에요. 하나님의 원수, 터널을 몰라요. 터널을, 중보자를 모른다니까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 거에요. 교회 가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누가 나를 지금까지 나의 발걸음을 누가 세셨는지 그걸 모르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거에요. 제가 유별나게 대중가요를 설교 시간에 얘기해서 누구한테 천박하게 굴지 말라고 압력을 받고 있어요. 대중가요, 이 사람들이 뭔가 감은 잡았는데 뭐가 없어요? 해답이 없어요! 헛되고 헛된 것은 아는데 사랑도 알고 뭐 손에 잡히지가 안아요! 그냥 마음 상하면 술집에 가서 술 퍼먹고 집에 가서 자는 것 그거 외에는 아는 게 없어요.

드라마 폭풍의 여자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고생 고생했다 그래서 복수했다 나중에 재벌하고 결혼했다! 그 다음에 뭐? 뭐? 어째서 그랬어! 그러면 안 죽나? 터널하고 연관성이 없어요. 이브의 사랑이나 폭풍의 여자도 마찬가지고 아무상관 없어요. 가면이고 뭐고...그런 걸 보게 되면 터널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이고! 해답도 모르는 것들이!”

제물이라 하는 것이 제물은 여기까지 해놓고 결론내리자면 천지 창조는 중보자가 했다 그런데 중보자가 천지창조 속에 들어오는 표현은 희생하는 희생 제물의 표현이다. 그러면 산이나 들에 소나 양이 있는데 그것이 다 제물이냐?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와 결부된 제물, 다른 말로 하면 숫자로서는 제물이지만 날짜로서는 안식일, 7일과 관련된 제물, 왜냐하면 모든 절기는 모두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절기의 시작도 안식일이고 절기의 마지막도 안식일에 끝나고 안식일을 요리조리 모았다가 흩어지면 절기가 되는 거지요. 안식일의 특징이 뭐냐하면 노동하지 마라! 노동 하지 말라는 이 세상을 네가 만든 게 아니다. 네가 만든 게 아니라면 관리도 누가 못한다? 인간이 못 하지요! 주님이 관리 하시는데 어떻게 관리하는가 안식일의 원리로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의 원리로 또 다른 말로 하면 대리희생을 뽑아내는, 대리 희생, 터널을 감싸는 외벽처럼 이 세상의 중심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달리고 있고 KTX 터널 속에서 달리고 있고 그 역사라 하는 것은 그 달리는 것을 받쳐주기 위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중심이 있고 왜 파이프의 단면을 보게 되면 이렇잖아요.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고 피 또는 제물, 안식일의 원리가 흐르고 있고

창조 원리가 흐르고 있고 여기에 외벽이 뭐냐하면 바깥 외벽이 이스라엘이고 더 바깥 외벽이 이방나라,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 하나님과 가깝지요. 다름 민족이 우상 섬겨도 하나님이 안 때리시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섬겼는데도 우상 섬겼다고 간주해서 이스라엘을 폭파시켜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폭파되고 난 뒤 이스라엘을 어디에 흡수하는가? 바벨론에서 데려 가지요!

그 바벨론 제국 안에 이스라엘이 흡수 될 때에 이스라엘이 강할까요? 바벨론이 강할까요?역사로 보면 정복한 나라가 더 강해 보이는데 다니엘서에 보면 정복당한 다니엘이 바벨론 보다 더 세내! 나중에는 이 다니엘이 다니엘의 이름이 뭡니까? 인자지요! 인자의 나라를 겁도 없이 비벨론 제국이 품고 있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나라는 돌멩이처럼 보이지만 밀알처럼 보이지만 나중에 바깥에 있는 모든 바벨론의 총책, 바벨론 이후의 모든 나라는 전부 바벨론이 되거든요!

바벨론 제국으로 한 나라가 되어버려요. 왜 우상이 금 신상이 한 개이니까! 금, 은, 동, 철 이렇게 있어도 어쨌든 한 개이니까 요한 계시록 17장에서 세상을 한 제국 즉, 바벨론 제국이에요. 이 바벨론 제국의 짐승의 나라가 티가 나는 것은 그 안에 인자의 나라에 속한 성도가 있기 때문에 짐승의 나라가 티가 나는 겁니다.

베리칩이라는 것 아세요? 손목에다가 숫자 세기는 것, 베리칩이라 하는데 어떤 교회서는 베리칩을 받으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666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으면 지옥 간다고 그러는데 지옥이나 천국 가는 것은 백날 문신해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받습니다. 이런 것 안 받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베리칩이라는 것 정보가 말이 안되는 것이 인간 자체가 정보에요.

인간 자체가 DNA라는 정보에서 나온 거에요. DNA가 뭐냐 하면 마치 네가지 색의 블럭, 레고 있지요. 장난감, 네가지 색의 블럭이라고 보면 되요. 블럭을 조립해서 인간 되는 겁니다. 인간의 구성 요소는 단백질과 세포 단백질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단백질은 그 정보가 바로 DNA에서 나온거에요. DNA정보를 복사해서 그것이 단백질과 붙어서 세포를 구성해서 그게 인간이 되거든요.

인간 자체가 정보인데 이미 정보가 있는데 정보를 새겨 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인간 자체가 정보인데 우리 인간 자체가 마귀의 자식이라면 이걸 받으나 안 받으나 지옥 가는 데 정보라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이 정보를 확대시켜야 되요. 세상 모든 것이 정보의 바다에요. 정보를 정보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재료, 물질이라는 것이 재료 또는 질료로 포함되는 겁니다.

머리카락을 범죄가 일어났을 때 머리카락이 나왔다. 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머리카락의 주인을 어떻게 찾습니까? 머리카락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DNA가들어 있잖아요! 머리카락에만 들어 있습니까? 사람의 몸에도 들어 있지요. 그 사람이 범인의 심장의 DNA나 머리카락의 DNA나 똑같아요. 동일한 세포니까 참 그런걸 보면 희안해요.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자기것 밖에 모르거든요.

세포 중에 DHC라는 세포가 있는데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해서 내것, 우리편 아닌 것을 찾아내는 그런 세포가 있어요. T세포라고 하는데 그 세포를 조사해서 T세포는 킬러 세포, 죽이는 세포, 그 세포가 탐색해 놀고 죽이는 것은 T세포가 죽이는데 그 탐색을 뭐라하냐 하면 면역 세포라 해요. 면역 세포가 뭡니까? 너 우리 편 아니지! 그거거든요! 면역 세포가 너무 열심히 해 버리면 알레르기 피부가 되지요.

적군과 아군도 구분 못해 가지고 마구 죽이기 때문에 이건 나를 지키는 게 아니고 힘들게 너무 지켜서 너무 충성을 가해서 그게 알레르기를 일으키고 면역 체제를 깨뜨리는 거에요. 아군을 적으로 간주해서 죽게 하는 여기서 질문이 뭐냐하면 어떻게 아군과 적군을 구분 하느냐! 내 안에 귀신 들어 있어요?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이것을 과학자들이 밝혀내질 못해요.

제가 아까 말했지요! 인간은 터널을 모르고 중심을 모르고 바깥 만 돌아다닌다고 모르겠다는 거에요. 도대체 캐묻고 캐묻고 캐물어도 모르겠다는 거에요. 인간의 두뇌는 왜 자아를 생각 하는가? 자아란 것이 어디 있느냐? 분석하고 두뇌를 연구하고 온갖 증거를 꼽는데 뭔가 정보를, 순서대로 할 때 그것이 자아가 되더라! 그런데 순서적으로 하는 것도 “순서 맞춰! 제대로 순서 맞춰야 조화롭지!” 라고 지시하는 괴물은 누구냐 말이죠.

내가 나를 아무리 분석해도 나라고 분석 당하는 것도 나이지만 분석 당하는 나를 분석하는 것은 뱀이 자기 꼬리를 물어버린 격이 되고 나중에 물은 몸도, 물린 놈도 다 날라가고 없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뱀이 입을 벌리고 누굴 물어요? 자기를 물어요. 물면 맛있지요? 나중에 보면 다 사라지고 없네! +-0대고 없는데요. 지금 아무리 과학자들이 제 말에 반대 못해요. 과학자들에겐 해답이 없습니다. 진리 몰라요.

해답이 없기 때문에 맨날 일하고 공부하고 대학가고 해답이 없어요. 그냥 살치는 거에요. 누가 시키는 대로? DNA 정보가 설치는 데로 언제까지? 힘 빠질 때까지 치매 안 걸릴 때 까지, 도박 같아요. 마치 도박에 탐욕 부리듯 똑같아요. 인생이라는 것이.. 목사가 개척해서 목회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목회 왜 합니까? 이유도 없어요! 할 게 없어서.. 그런데 왜 할게 없지? 그런데 왜 할 게 없는 것도 몰라요.

그러면 해답 알려 드려요? 궁금해요? 성경에 해답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약적 관계에 있습니다. 모든 창조물은 언약적 관계에 있습니다. 그 언약적 관계를 성경에서는 뭐냐하면 영적 관계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분석 할줄 몰라요! 분석하는 분이 따로 오셔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가 언약적 관계인데 언약적 관계를 뭐라고 하냐하면 이걸 ‘말씀’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거예요. 말씀이 온 세계에 퍼졌다. 로마서에 나오는 노아 홍수가 난 뒤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었지요.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버티게 만드는 것. 지탱하게 만드는 원리가 무엇일까요? 이게 노아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이라고 합니다.

모든 게 언약입니다.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받게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내려갔다가 세겜으로 갔다가 나중에 이집트로 내려갔는데 이집트로 내려갈 때 이집트의 바로 왕이 사라를 탐내고 동침을 했지요! 그런데 동침했다다 혼쭐났잖아요. 왜 혼났을까요? 그 시대의 터널이 누굽니까? 아브라함이죠!

그 아브라함의 아내를 왕이 건드린 거에요. 난리가 났어요. 애굽이.. 과학적으로 국립 수사 연구소에가도 안 바뀌어 집니다. DNA는 조사 할 줄은 알지만 언약과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받게 한다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요. 처음에 아브라함도 몰랐어요.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지 몰랐다니까요!

심지어 아비멜렉인가 하는 사람은 동침도 안했어요. 건드릴 뻔 했다가 그 사람 동네의 여자들이 임신을 다 못하게 되었어요. 검사 아무리 해 봐도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하니까 갑자기 다 불임이에요. 태가 다 닫혀 버렸어요. 이건 아브라함 본인도 놀랄 정도에요. 그래서 제가 설교 시간에 얘기 했잖아요. 신앙이라 하는 것은 기대해선 안 된다고 기대하는 신앙은 자기 자랑거리이지 자기 의이지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은 누가 놀라야 되요. 본인이 놀라야 되요. 주여! 나 같은 인간을 왜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되야 된다니까요. 그게 은혜다운 거에요. 본인이 놀라야 되요. 진짜 주께서 받아 주시네요. 놀랄 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바라 봐야죠! 아! 십자가라는 터널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터널을 증언하기 위해서 십자가 안에 함께 있는 거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얼마 전에 기사가 났는데요. 최나연이라는 사람 골프 선수인데 LPGA 여자 골프 대회에서 루이스라는 세계 랭킹4위인가하고 시합하는데 마지막에 최나연 한국 선수가 원래 선두로 나가다가 역전 당하다가 16홀에서 홀은 18홀까지인데 두홀 만 지나면 저쪽이 우승을 가져가는 거에요. 그런데 16홀에서 최나연 선수가 공을 쳤는데 거의 포기하고 쳤겠지요 우승 가져가라하고 쳤는데 공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아요.

그런데 저쪽 관중석에서 와~하는 거에요. 쳤는데 공이 알아서 홀에 들어가 버렸어요. 이런 걸 이글 이라고 하는데 두타를 줄여서 들어가는 걸 이글이라고 하거든요. 뉴스에서 이글 샷한 장면을 내가 못 봐서 아쉽다 이게 신앙입니다. 기대 한적 없어요. 우승 그거 가져가 하고 포기하다 싶이하고 쳤는데 8번 아이언으로 쳤는데 그게 쏙 들어가 버렸어요. 그래서 들어가고 난 뒤에 본인도 놀라서

그래서 신앙은 기적이고 신앙은 하나님의 택배되는 선물입니다. 주문하지도 않은 선물, 내가 요청하지도 않은 초청, 은혜의 초청이지요. 초대 받았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주신 분임을 알거든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그것은 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지 못하지요! 어떻게 망가지든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그것이 바로 그 모든 것을 기쁘다 끝내지 말고 그 기쁨에는 근거가 있어야 되요.

주신 제물로 인해 그런 기쁨이 온겁니다.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제물을 백날 봐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나를 제물과 연결해서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이 연관 되도록 그래서 기꺼이 한나가 아들을 이 제물을 위해서라면 아들을 바치고 나도 바치고 이것이 한나가 아들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대단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10분 쉽시다.

자기 축하 (마 18:21-22) 대전강의- 65강

이근호

2015년6월30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8장21-22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 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찌니라

18장 21절 하기 전에요 지난 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 한다고 했습니까? 우리 이제 모이자 모이면 주님이 오신다 이런 게 아니고 주께서 모이게 하실 때 비로소 함께 계신다는 뜻이죠!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은 사람이 모이자모이자 해서 모이게 되면 자기 이름을 삭제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질 못합니다.

“야! 오늘 누가 모이라 했어? 내가 모이라 했어! ” 자기 이름이 살아 있어 버려요! 오늘 여기 모임 장소 찾아오느냐고 애먹었어! 그럼 자기 이름이 살아 있지요! 모이게 하신 것이 주께서 강제로 모이게 하셨다는 것을 모인 자들이 다 알 때 총무 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회장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그 모임에서 예수님의 이름 빼놓고 다른 이름을 여기에 거론 할 수 없겠지요! 앞장세워 내세울 가치를 부여 할 수 없겠지요!

그게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야 하잖아요! 총동원 주일?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목사가 기획하고 전도사가 총동원 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자! 총동원 주일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요! 태평양에 고래 살지요? 그렇죠! 태평양에 분명히 고래가 있을 게 어닙니까? 그러면 고래. 총동원 주일 하나 안하나 태평양에 고래가 살잖아요! 살도록 그냥 나두면 되지요! “여기! 고래들 한번 모이세요! 왜 모이는데요? 그냥 살게 놔두지!”

태평양에 살다가 별이나 달에 가서 삽니까? 태평양으로 가서 살아요. 지금 이 세상에 주의 백성이 있잖아요. 그러면 살도록 가만 나두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모이는데요. 살도록 나두면 되는데 하여튼! 정신 나간 부모들이 자꾸 걸핏하면 자식들 보고 모이라해요. 소집한다고요. “야! 야! 보고싶다! ”하고 또 소집하고, 월말에도 너희 안오냐 하고 소집하고 주욱 소집해서 바쁜 애들 또 소집하고 꼭 유산 좀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해요.

안 오면 유산도 없다. 이런식으로 그럼 자식들은 유산 보고 억지로 가고 그 유산을 일찍 나눠주지도 못하고 나눠주면 또 자식들이 천대할 것이고 안 나눠주면 형제들 끼리 싸움할 것이고 아예 안 나눠주면 억지 형태가 되고.. 모이기에 힘쓰라! 하는 명령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모이기에 힘쓰도록 작용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작용하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바쁜데도 모이게 된 것은 주께서 모이기에 힘쓰라는 말씀대로 주께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거기에 내 이름 집어넣을 수 없는 거에요. 하나도 어렵지 않지요! 성령만 받아 버리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이게 안 받아 놓고 받은 척 하니까 골치 아픈 거에요. 주님과 함께 모였다는 말은 그들이 주님만 쳐다보게 되면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나라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안에서 필수이므로 성령안에서 의와 평화와 희락이라 따라서 하늘나라는 성령안에서라고 했기 때문에 지구안에서 우리나라안에서 파키스탄안에서 이런 지역과 어제와 오늘, 시간과 공간 개념은 예수안에서는 날라가 버리고 없어집니다.

한때 천국이었다던지 그런 소리해서는 안되요. 성령안에서는 한 때 라는 건 없어요. 엘리야, 모세가 그때도 그들은 주님 안에 있었고 변화산에서도 주님과 함께 있었고 그때는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장차 주님이 오겠지만 막산 그들이 구원 받고 보니까 처음부터 자기가 있을 때 부터 주님은 거기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모세, 엘리야는 알지요!

지금 만약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엘 가게 되면 천국 가기 전에 있었던 이곳 대전과 오늘 6/30일도 주께서 함께 만들어 주신 6/30이고 주께서 만들어 준 대전 바닥에 있었던 거에요. 대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 있었던 것이고 6/30일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안에 있는 거지요.

시간과 공간은 별 의미 없다고 뺄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의 이름에 효과를 더 깊게 크게 느끼게 되는 것. 그런데 백번 이야기 하는 것이 뭡니까 21절에 베드로가 못알아 듣는데 그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몇 번이나 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숫자가 나오지요! 그럼 숫자 한번 따져 봅시다. 1과 그다음에 2라고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요? 그 다음은 3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계속 나가면 베드로가 몇 번 용서한다 했습니까? 일곱 번이라 하지요! 지금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고 이야기 할 때 베드로는 뭐를 이야기 하냐하면 용서해 주는 주체를 베드로 자신이라고 본겁니다. 그러면 한 번하고 두 번하고 세 번해도 용서는 누구에게서 나온다? 내가 한 번 해주고, 내가 두 번 해주고, 내가 세 번 해주고, 이렇게 해서 내가 일곱 번 해주게 되면 내가 저 사람에게 용서한 게 되겠습니까?라고 한거지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 것이 절대로 남에게 전달 될 수가 없다했지요! 주일 낮에도 언급 했지만 개체의 속성은 다른 개체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이건 뭡니까? 그건 에 생각이고 주일 낮에 예를 들었던 유튜브 영상이요. 다섯 살 여섯 살 된 애들이 “찍지 마라!” 한 거 있잖아요. 한번 찾아보세요. 애들 둘이 서로 언니하고 동생하고 싸우는데 누가 옳은가 논쟁하며 싸우고 있는데 아버지가 카메라로 찍고 있으니까 “찍지 마라” 한 거에요.

자기 둘 만의 공간에서 그 아인 제3의 시선, 응시를 느낀거에요. 그런데 찍어 주세요라고 안하고 찢지마라고 한거에요. 이 논쟁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나’다 라는 거에요. 이 모임의 영광과 모든 의미는 내가 나한테서 나와서 나에게 회수되야 되는데 (카메라)로 찍어 버리면 찍는 저쪽에 내가 신경써야 되잖아요. 그러면 주체가 아버지가 되어 버리는 거에요. 이것을 인간들은 제일 싫어한다니까요!

누가 주인이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어야 되는데 그 누구에게 평가나 심판이나 누구에게 지시를 받아 버리면 타고난 본성은 내가 주인인데 내가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을 못할 때 거북스러운 겁니다. 남자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자기 아내들에게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하면 잔소리하는 거에요. 제일 싫어해요. 그래서 요새 젊은 남자들은 잔소리 빼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여자. 요새 뿐만아니라 예전에도 남자들은 그랬지만 잔소리 빼놓고 내가 하라는 데로 다 움직여 주는 여자.

옛날 남자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옛날 여자들의 덕목 가운데서 최고의 덕목은 절대 투기해서 안되는 것, 여자에게 그것마저 하지 말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에요. 내가 시키는 데로 내 마음대로 하고 내가 무엇을 해도 너는 잔소리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옛날 교회에서는 이걸 무엇이라 하냐 하면 돕는 베필, 남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돕는 자가 남편이 원하는데로 다 해주되 절대로 남자에게 잔소리 하지 않는 여자 이것을 최고의 베필이라는 거죠. 지난 낮 설교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여자가한다고 했지요!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대목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모든 남자들이 그러한 고난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당하면서도 본인이 하는것보다도 저 남자의 영역을 내가 어떻게 침범해서 빼앗는 것 남자가 하나의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남편의 돈은 다 내 것이다. 빨리 죽어라! 남편 노릇을 하고 싶다는 거에요. 언젠가 여자 목사에 대해서 상담을 많이 했거든요. 여자 목사가 성경적입니까? 여자 목사가 성경적이냐를 따지기 전에 왜 여자들이 목사를 하려는 이유가 뭔지 그건 남자가 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도 하고 싶어요. 여자도 축구하고 싶어 하고 레슬링도 하고 싶어 하고 왜 남자가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가 탐내는 것은 똘아이 아니면 변태 아니면 없잖아요. 그렇지요 바다에 성게 따는 것 누가 합니까? 여자가 하지요! 어이는 물에 들어 갈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 가거든요. 그런데 이걸 남자들이 합니까 안 합니까? 그렇게 힘든 걸 왜 하는데요~ 안 하잖아요. 안 한다고요. 옛날에 20C초 과학에서 조수는 누가 했냐하면 여자들이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꼼꼼하게 하기 때문에 꼼꼼하고 일 자체가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한 반응 보고 적고 안 되면 다시 다른 것, 비율을 따져가며 얼마를 넣어야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가 마치 요리집에서 그 맛을 내기 위해 양념 이것 넣어 봤다가 빼보았다가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식당에서야 백번도 하지만 과학은 백번이 아닙니다. 천번이고 만번이고 혼자서 계속해요. 페니실린 같은 경우에는 실험을 수 만번 했어요. 그 지루한 일을 누가 했나 여자 조수, 여자들이 아르바이트로 다 했어요.

가발 공장에선 누가 일했습니까? 한 올 한 올 심는 것. 여자들이 했어요. 봉제 공장에서 박는 일 누가 했습니까? 여자들이 한거에요. 그 짜증스러운 일을 남자들은 결과만 챙기지 귀찮은 일들은 여자들이 했다구요. 그래서 여자들이 이젠 우리가 일하는 것은 싫다. 우리가 다른 일을 하자 다른 게 뭡니까? 남자들이 티내묜서 하는 것. 그동안 남자들이 얼마나 여자들을 짓밟았습니까? 지금 무슨 얘기하다 이래 되버렸는 데, 잔소리

하나님께서 여성을 붙여준 것은요 강자가 약자에게 구원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가 오히려 여자에게 그렇게 구박했던 여자한테 구원 받는 것.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의 강한 힘에 피해를 보게 되고 그 피해를 보는 자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거에요. 이 말은 결국 여자는 돕는 베필이거든요. 주체적입니까? 아니면 주체가 아닙니까? 주체는 아니에요. 누구의 그림자이지요.

누구의 보조가 되고 누구의 여자이지 앞에 누구의가 없는 여자는 없어요. 아담의 여자가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서를 그렇게 만드셨거든요.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그 남자의 여자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체가..우리가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 색시, 예수님의 아내라고 하잖아요 남편은 예수님이고요.

이것이 이사야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신부이고 이스라엘의 남편은 여호와인데 왜 너희는 자기의 남편을 버리고 바알에게 찾아 갔는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지만 바알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빼놓고 다 바알이라고 보면 되요. 바알의 모든 신성이나 내용들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바알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계속 바알을 제조해 내지요.

이스라엘도 그렇게 바알을 좋아했는데 지금 베드로가 뭐냐하면 자신이 용서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용서한 그것도 문제이지만 지금 베드로가 일곱 번을 거론했다는 것.1,2,3,4,5,6,7 왜 베드로가 일곱 번 이라고 했을까요? 베드로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유대인이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몇 일 만에 창조했다는 것. 7일 만에 창조한것을,

그래서 7이라는 숫자, 아까 이야기했지요! 7이라는 숫자안에 하나님의 창조 원리, 원칙이 여기에 실려서 숫자라는 모양새로 이미 기호화해서 하나님의 계시처럼 계시로써 활용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절기도 항상 7이고 그걸 넘어서서 제8일째가 되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그런 숫자에 해당되지요. 여리고성도 일곱 번을 돌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7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의미를 한번 봅시다. 7이 있느냐 하는 거에요.

주님의 안식일은 1,2,3,4,5,6이 7을 위해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안식일을 위하여 1부터 순서대로 밟아오는 중이에요. 인간의 하나의 행위인데 인간은 행위라 한다면 인간은 7이라는게 없어요. 왜냐하면 1,1,1,1,1,1 이렇게 되요. 한번 용서했다가 다시 자기에게로 갔다가 1다음에 2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다시 새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다시 용서 하는 거에요. 일곱 번해도 한번 밖에 안 해 준다니까요!

왜냐하면 인간의 주체가 즉, 베드로의 주체가 주님께서 당기는 7속에 1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갑자기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포함되어 있지요. 발걸음도 세시니까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 7일만의 창조 원리가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예속 되느냐, 복속 되느냐 인간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원리에 원칙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 한나의 찬송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도 태어나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또 전도서에 보면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사랑 할 때가 있으면 미워 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게 때가 있어요. 그 모든 때는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터널을 둘러싼 외벽이거든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때를 위한 보조적인 때들이에요. 타이밍대로라니까요. 모든 게.

지나고 보면 아까울 때가 많지요. 예를 들면 특히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 펀드 투자하는 사람들, “그때 일주일만 먼저 알아서 뺏으면 그렇게 50%안 날아 갔을텐데..그 뺄까 말까 하다가 나두자했다가 중국 펀드 날아가 버리고 브라질 펀드 다 날아가 버리고..” 그런데 날아가기 직전에 이윤 좀 보고 빼자 했다가 그 다음 날 펀드가 폭락해서 “아이고!” 가슴 쓸어 내리며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들이 인간이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 즐거움, 자기 기쁨 중심이지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깔끔하게 간단하게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다 그렇지! 보통 그렇게들 생각 하잖아요! 여러분들이 12살,13살때 여름철에 학교 마치고 시원할 때 창문 열고 턱 괴고 골목을 내다보면 어른들이 지나가는 모습들이 굉장히 아름다와 보이고 평화롭잖아요!

그런 것을 느끼는 게 뭐냐하면 어떤 사람들, 할머니도 있고 아저씨도 있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어떤 사람은 고양이 키우고 어떤 사람은 개 키우고, 그게 바로 세상이다. 세상은 각자각자 다양성 있게 사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 생각 하지요! 지금도 매일 같이 그렇게 생각 할거에요. “너! 나에게 관섭하지마! 나도 너에게 관섭 안 할테니까!” 요정도로 유지하고 서로 관섭 안 하기. 그게 사는 것이고 그게 세상이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 방금 이렇게 사는 것이 틀린 생각이에요? 옳은 생각이에요? 이게 바로 틀린 생각이에요.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면 진리는 뭡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개도 키우게 했고 예수님께서 고양이도 키우게 했고 예수님께서 골목에 어떤 노인이 휴지 줍게 했구나! 어떤 아가씨는 뾰족 구두 신고가게 했다. 지금은 하이힐이라 하지요.

그냥 편하게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의도적으로 뾰족 구두 신게 하신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미친 사람이다 이야기 하겠죠! 이 세상 너무 살아가기 힘들다. 이 세상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세상 살아가기 너무 힘들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편하게 생각해요.

우리가 그냥 제가 이런 이야기 했다고 해서 예수님 중심 생각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구나라고 생각되면 성령이 임했다고라고 보시면 됩니다. 참! 세례 요한 불편하게 살고 엘리야, 아브라함도 참 힘들게 살았어요. 우리는 편하게 살았잖아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데 엘리야, 예레미야 이런 사람들은 그게 허용이 안 됐다니까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예레미야 애가 보세요! 내가 이스라엘 멸망하고 내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어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편하게 하면 되지 왜 가슴이 찢어집니까 그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그런 거에요. 예레미야도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데 우리 주님은 어떻겠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어려서 “ 어디 갔었어? 너를 찾는데 사흘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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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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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