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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a-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14절, 초막절 날인데, 초막절은 3대 절기 속에 또는 5대 절기 속에 하나입니다. 절기가 뭐냐, 절기라 하는 것은 순환되는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순환구조 속에 집어넣어서 하나님이 항상 이스라엘의 시간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축제절기입니다. 쉽게 말해서 절기 자체가 시간에 새겨진 계시라, 이게 절기라는 거예요. 시간에 새겨진 계시.

이걸 지금 서양 유럽에서도 이것 비슷하게 하고 있어요. 유럽들이 지금 공휴일들이 있잖아요. 공휴일이 뭐냐 하면, 전통적으로 소위 유명한 성자들의 생일이라든지 축일, 기본적으로 베이스로 깔려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했던 부활절, 오순절, 고난주일 거기다가 유명한 성자들 이렇게 해서 시간 속에다가 이스라엘의 문화적인 흔적을 남기고 공간적으로서는 뭐냐 하면, 그들의 명성 지, 유적지는 전부다 성자들이 고난 받았던 그 길, 올레길이라 하지요.

거기다가 게스트하우스 지어가지고 게스트하우스가 하는 게 뭐냐 하면 성체, 성 관리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거든요. 게스트하우스처럼 활용해가지고 성지순례 자체 내에서 성지순례를 해요. 그래서 자손들에게 설교를 할 수 없고 부모들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놀러 가는 셈치고 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옛날에 죽었던 그 신앙선조들이 했던 것을 안 볼래야 안볼 수가 없잖아요. 물론 유적지니까 보긴 하지만, 어릴 때는 28세까지는 인간의 두뇌는 유동성이 있어요. 가소성이 있어가지고 한 번 싹 들어가면 당장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게 밑에 층에 딱 남아있어요. 그래서 예수는 안 믿지만, 기독교신자로서는 평생 유지되는 겁니다. 마치 유대교 같아요.

유대교는 여호와를 안 믿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믿거든요. 희한한 사람이에요. 여호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결집력 이거 하나는 아주 단단합니다. 그걸 소속감이라 하는데. 자기의 신체에 대한 소속감이 있다는 말은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너무 힘들어요. 조금 실수해버리면 지옥 가니까. 그렇잖아요. 완벽! 완벽! 하다가 아이쿠 실수해 버리면 이것 때문에 내가 벌 받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할 때는 다른 대체 방법이 뭐냐 하면, 소속이 되어버리면 일종의 보험이죠.

소속이 되어버리면 소속에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도 많고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 생각해 주는 분도 많이 있으면 어지간히 실수해도 그 한 국물 속에 들어가 버리면 이것이 내가 못하지만 잘한 사람이 들어가 버리면 그 사람 덕을 내가 볼 수 있으니까. 하나의 팥인데, 팥이 팥죽에 들어가면 같이 부글부글 끓잖아요. 그러면 한 통속으로 구원받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지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일종의 해병대 기질이지요. 아쉬우면 “우리는 해병대 몇 기입니다.” 하면 충성! 이래가지고 돈을 주든지 같은 해병대끼리. 그 소속감, 연대감 그것이 현대인들이 아직도 종교를 버리지 못하는 대표적인 이유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 안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기본적인 단체가 없는데 어떻게 니가 믿는 것이 니가 실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게 겁도 없이 내가 하는 믿음은 실수가 아니라는 그런 확정을 니가 어떻게 자신만만하게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느냐, 보통 자신감이 아니면 소속 없이 예수 믿는 사람되어버려요. 보통 자신감 아니면.

그런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서신에 보면 바로 소속감을 떼어버리라는 거예요. 그건 예수님의 뜻과 마찬가지지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 그리 나오니까. 소속감 없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진짜 모험도 이런 모험이 아닙니다. 이건 도박보다도 글쎄 도박은 돈만 날리지요. 이런 영적 도박은 영원히 영혼이 날아갈 수 있는데 이건 위험한 도박이에요. 보통 도박이 아니잖아요.

따라서 이것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외로운 길을 가게 하시면 거기서 발을 뺄 자가 없다는 사실이죠. 숫한 교회에 가서 숫한 실망을 했을 때, 그래도 실망하지 않을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다가오지요. 목사가 되어서 교단에 속했다. 그러면 소속감은 교단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는 그 교단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는 계기가 생겨버리면 그래서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질 것이냐, 같은 신학교 동기동창? 아니지. 교인들? 아니지. 돈 많은 장로? 아니지요. 그러면 위로하는 아내? 가족들? 아니지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신앙 생활하는 거예요. 제대로. 주 예수보다 귀한 건 없다. 제대로 신앙 활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러한 신앙 생활하는 절기에 방금 절기 이야기하면서 절기의 진수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절기의 진수에요. 같이 절기를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같이 절기를 지키는 동시에 무엇도 알려주느냐 하면 실망감을 하는데 타인에게 실망감이 되다가 시작은 타인이지요. 조금 있으면 어디까지 실망감이 미치는가 하면 본인한테 실망감을 갖게 될 거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 영을 받은 증거입니다. 자기 자신한테 실망할 때. 그러니 자기 자신의 믿음에 우리가 실패해야 돼요. 믿음에 실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믿음에 성공해버리면 그 사람은 자기 믿음을 믿는 우상숭배자가 돼요. 주님을 자랑하라고 분명히 되어있는데 자기 믿음을 예수 믿는 믿음을 남들한테 자랑하는 또 하나의 교주처럼 그렇게 행세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신 모든 시간적 요소, 공간적 요소 이 모든 이 세상의 삶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잔뜩 걸었던 내가 내 자신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라고 주신 멋진 기회입니다. 축복의 기회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안 돼!” “내 인생 내가 꾸려가는 것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의 책임자는 분명히 나 있기 전에 나부터 먼저 만드신 그 분에 의해서 책임져주실 거야. 그리고 미래까지.” 왜? 주님 안에는 비 지속. 비 지속이 된다. 비 지속이라는 게 뭐냐, 지속이라 하는 것은 시간이 계속 가는 것을 지속이라 하거든요. 비 지속이라는 말은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는 것. 어떤 시간의 변화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되려면 시간의 끝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시간 속에 집어넣어지는 형식으로 이미 와있어야 돼요. 아이고, 오늘 처음부터 어렵게 해서 미안합니다. 시간이 끝에 와서 비로소 드러나는 완성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미리 당겨서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시간 앞에 변화가 됐느냐, 시간의 변화에서 내가 달라질 것이냐, 아니면 달라지지 않는 요소가 내 안에 장악하고 있느냐에 그 내 안에 투쟁의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안의 투쟁의 싸움이.

그러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시간의 저촉을 받지요. 예를 들어서 뭐냐 하면, ‘아! 나는 지난번에 말을 그렇게 했을까? 똑바로 했어야 되는데. 아! 지난번에 내가 착해도 너무 착했지.’ 과거의 어떤 지점을 나의 대표라고 여기고 그걸 자꾸 붙드는 것. 붙들다가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져버리면 ‘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어?’ 이리되면 이것은 도대체 하루에도 몇 번 바꿔져요. 나라는 것에 대해서. 기대를 했다가 실망을 했다가 다시 용기를 냈다가 수치스럽게 됐다가 또는 자랑스러워졌다가 이게 변화에요. 인간은 자기만 챙기기 때문에. 이게 늘 변화거든요.

그런데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쁜 일을 했을 때나 착한 일을 했을 때나 달라지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모든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만날 그 분이 시간이전에 우리한테 이미 집어넣어준 그 무엇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은 지키는 게 아니고 약속은 칩처럼 새겨지는 것이지요. 약속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20%지켰다. 30%지켰다. 어디 뭐 스마트폰 충전합니까? 저도 얼마 전에 스마트폰 구입해보니까 충전할 때 보니까 이만큼 올라와있어요. 데이터 몇 %남았다. 그거 없거든요. 그거 없는데 이상하게 오늘날 교회에서는 데이터 가지고 몇 %남았느냐 그것가지고 목사들이 설교를 해댄다 말이죠. 당신은 요 20%만마저 채우면 좋겠는데…, 이런 식으로. 당신은 교회 몇 번 빠졌더니만 데이터가 쭈욱 내려가 가지고 바닥을 헤매네. 빨리 채워. 기도원에 가든지. 이런 식으로.

절기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영원한 게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절기를 지켜버려요. 그게 사단이 난 거죠. 절기는 지키는 게 아닌데, 절기는 지키는 분이 따로 있는데, 이건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가지고 절기를 지켜버려요. 마치 오늘날 주일 지키듯이. 예배 드렸다. 예배는 드리는 게 아니에요. 예배는 참여되는 것이지 드리는 게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에 참여 되는 거예요. 참여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예배가 되게 하시지요. 예배 안 되는 걸 되게 하신다니까요.

나사못 작은 거 있잖아요. 카메라에도 나사못이 여러 군데 있는데. 나사 못 작은 것을 이 카메라 만드신 분이 나사못을 집어다가 이렇게 집어넣고 드라이버로 돌려버리잖아요. 그러면 나사못 입장에서는 이 카메라 하나 만드는데 참여했지요. 나사못이 나는 언제까지 나사못이 되기 싫어. 나는 카메라 되어볼까. 이렇게 해서 친구들아, 우리 카메라 해체해서 밴드조직해서 카메라 만들었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가만히 있는데, 너는 나사못이야. 해놓고는 여기다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인데 거기다가 집어넣어가지고 드라이버로 돌려버렸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나사못이 아니고 카메라 안에 있는 나사못이지요. 그럼 나는 나사못이라 하면 안돼요. 나는 카메라 몸체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지 내가 아니라니까요. 나 맞아요. 나 맞는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된 나가 되는 거예요.

절기라 하는 것은 구약의 율법이 주어집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인간들의 속내, 자기 본성이 얼마나 율법의 본정신과 위배된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시험코자 한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동안. 그들은 온갖 것 다 해봤습니다. 성전도 지어봤고, 십일조도 해봤고, 십계명 지켜봤고, 온갖 것 다해봤는데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뭐였습니까? 실패한 정도가 아니고 메시야를 살해했잖아요. 예수님이 유대인보고 하는 말이 너희 애비는 악마다 했지요. 악마의 그 모양새를 사전에 품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만 그런가요? 그렇지 않지요. 유대인도 아담의 후손이니까 다 그렇지요.

오늘 본문 절기이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게 있어요. 7절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이리되어있지요. 자, 이제부터 난해한 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난 뒤에 11절에 보면,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님이 명절에 올라가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절기는 우리가 지키지 않는 거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절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된 것, 구체화된 것.’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딱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미움입니다. 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미워했지요.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사랑했지요. 속성이 딱 2가지밖에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뭐는 놓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미움이다, 라는 것을 깜빡 자꾸 빠뜨리는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은 미움이시다. 하나님은 뭐를 미워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째, 죄를 미워하지요. 사탄을 미워하지요. 그리고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미워하지요. 에서를 미워했으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 미움 받아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 무엇을 제거하려는가 하면 이 미움을 제거하게 되면 내가 내 마음 속에 있는 신적인 형상이 회복되리라는 그런 잘못된 기대를 자꾸 하는 버릇이 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불교잖아요. 불교는 모든 자와 원수를 맺지 말고, 공자도 이야기했지만, 대자대비해요. 성철스님이라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석가탄신일 특별한 법언을 남기면서 “오, 사탄이시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어느 정도로 불교는 대자대비 해야 하느냐 하면 악마마저도 용서하는 것. 그 정도 급 돼야 진짜 신다움 같다는 거예요. 신의 속성에 합당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정작 뭘 하는 분이다? 적어도 미워할 줄 알아야 니가 신의 속성을 닮았다는 거예요. 얼마나 우리한테 반가운 소리입니까? 우리는 지금 속성이 미워하고 싶어도 신자라고 티내면서 참고 있는 중인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주님께서 먼저 미움을 해버렸으니까 우리는 이제는 마음 놓고 미워해야 돼요. 마음 놓고 마음대로 미워해야 돼요. 복음의 신발짝이 두 짝인데 한 쪽을 내던져버리고 한 쪽만 사가지고 신발 신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미움, 미움과 사랑, 이게 같이 가줘야 주님의 형상을 입은 게 돼요. 주의 마음을 닮는 게 된다 말이죠.

주님 미워하는 걸 같이 미워해야 되고, 주님 사랑하는 걸 같이 사랑해야 되지 주님 미워하는 것은 “주님은 미워하세요. 저는 너무 마음이 착해서 저는 안 미워할 거예요.” 이리 되어버리면 그것은 부처마음이지 예수님 마음 아니거든요. 부처가 창조했습니까? 부처가 부활했어요? 부처가 부활했으면 우리는 부처 믿읍시다. 부활하지도 못한 게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정말 중 만나면 정말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지요?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머리카락은 왜 깎습니까? 부처는 안 깎는데 왜 머리카락은 깎아요? 이유는 그게 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권력이 되기 때문에. 영적 권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꾸며서라도 권위를 갖춰야 된다는 겁니다.

신부들이 로만칼라를 왜 합니까? 이거 왜 해요? 심지어 장신목사들까지 감리교 목사들까지 이거 왜 해요? 로만칼라를. 주님이 하는 목회를 본인이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자기가 목회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성도는 라디오에요. 방송국 없으면 음악 안 나옵니다. 라디오가 무슨 방송을 해요? 기가 막힐 짓이에요. 저는 어릴 때 라디오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줄 알았어요. 자그만 라디오 안에 어떻게 사람이 들어있는지. 라디오 안에 아무것도 없거든요. 라디오 안에 DJ 안 들어있어요. 방송국이 따로 있다 말이죠. 주파수 맞춰서 소리 나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라디오 공로로 돌립니까? 방송국 섭섭하게.

본 방송국에서 사랑과 미움이 다 들어오면 라디오도 사랑과 미움이 다 나와야 돼요. 사랑만 나오면 안돼요. 사랑만 나와야 된다는 사고방식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주께서 하신 마태복음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니 원수를 사랑하라. 드디어 사랑의 딜레마가 생겨버렸어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강의한 책이 있거든요. 책에 보면 설명을 해놨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대목을 설명한 게 있어요. 원수를 사랑해 버리면 원수가 없어집니다. 그렇잖아요? 원수가 없어진다면 그 다음에 원수를 사랑할 원수가 또 생겨나야 돼요. 생겨나지 않으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기회조차 부여받지를 못하거든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내놓으라가 실제로 나한테 체험이 되려면 누군가 내 오른뺨을 때려줘야 돼요.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가 된다는 것을 실제 체험이 되려면 뭐 시시하고 똑똑하고 못생긴 그런 것도 어른거리지 말고 진짜 이쁜 사람이 그것도 내 스타일에 맞는 사람이 와야 돼요. 와서 예수고 뭐고 간에 그 여자한테 푹 빠져야 돼요. 그런데 그 푹 빠지는 순간 이미 빠져버린 순간 그 사람은 본인은 뭘 느끼겠습니까? ‘드디어 내가 이 여자 하나 때문에 드디어 내가 예수를 버렸구나. 나는 믿음이고 뭐고 개뿔이고 뭐고 나는 믿음도 없어.’ 라는 적이 오겠지요. 그게 바로 주님의 원수가 된다니까요. 주님의 작전이 멋있지요.

지금 유대인들이 뭐냐 하면,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편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버리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씀이 더 이상 추가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어버리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말씀이 더 이상 추가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합격해버렸는데. 이미 서울대 합격했는데 수능시험 왜 하는데요? 서울대학 합격해 놓고 EBS 수능 강좌 듣는 사람 봤습니까? 합격했는데. 운전면허 합격하고 난 뒤에 운전면허 교습서 안 보잖아요. 몰라도 안 봐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합격한 사람들이에요. 합격했는데 합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합격한 거예요. 말씀대로 지켰기 때문에.

아무리 말씀을 봐도 전부 다 자기가 지금 지키고 있는 거라니까요. 왜? 말씀이 문제입니까? 그들의 해석이 문제이겠습니까? 어느 쪽이 문제겠습니까? 자기들이 지킬 만한 수준에서만 해석을 한 거예요. 지금 교회에서 교인들이 와서 뭐냐 하면, “목사님, 말씀만 하옵소서.” 이게 무슨 뜻이 들어있는 줄 알아요? 내가 그걸 해내서 “나, 신자 맞지요? 라고 좀 이렇게 합리화, 정당화 시켜 주세요.” 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거기다가 만약에 목사님이 그들이 못 지키는 정말 못 지키는 이야기를 했다고 칩시다. 그 교회에 안 나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인이 와서 “목사님, 제가 성경말씀대로 남을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한 일곱 번쯤 용서하게 되면 아마 용서했음의 레벨에 경지에 올라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했는데 그 목사가 하는 말이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하세요.” 하면 490번하고 또 찾아옵니까? 두 번 다시 안 찾아와요. 왜? 490번 해서 찾아가면 “목사님, 제가 490번 용서하면.” 목사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일흔 번에 일흔 번에 일곱 번 하세요.”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킬 분이 따로 있어요. 주께서 율법을 위해서 한 몸을 예비했다 하잖아요. 폼으로 예비했겠습니까? 말씀을 지키는 전문가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키는 전문가인데, 우리는 못 지키고 예수님은 지키는 이유가 뭐냐,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의 말씀을 내가 지키는 양으로 해석을 해버리고.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어떤 말씀을 볼 때,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나는 이래서 남은 지옥가도 나는 천국 가는 사람 맞지요?” 라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해석을 했고, 주님은 그 해석을 나 빼놓고 아무도 못 지키는 쪽으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주님만 지키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설교했는데 참 어렵습니다. 어려운데,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제사 드려가지고 그들이 멸망 안 당한 게 아니고 제사 드렸는데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잖아요. 성전 있고 제사 드렸는데. 1년에 3번씩 큰 절기했어요. 5절기 다했습니다. 그런데 망했거든요. 그 망한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 망한 이유가. 제사 드리고 제사장 있고 다 했는데. 왜 망했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제시한 성전은 뭐냐, 성전에서 물이 나와야 돼요. 백날 제사 드려봐야 뭐가 안 나와요? 물이 안 나와요. 그래서 어제 그런 소리했거든요. 아마 성전 밑에 수도공사 하다가 수도파이프 건드려서 물이 나오는 외에는 물이 안 나오지요. 이 말은 너희들이 물 나오는 성전을 너희들은 성취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해석을 잘못한 거예요.

어떤 해석이 잘못됐는가, 해석을 왜 예수님처럼 못하고 인간들이 자기가 지킬만한 해석을 왜 했는가, 어제 수요설교의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자기네들이 사람인 줄 알았던 거예요. 자기들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이게 문제에요. 인간이 만든 신은요,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사람이니까 나를 만든 어떤 분이 계실 것이다. 나 같은 동일한 존재, 이게 존재론적 실루엣이라 하는데. 인간은 존재하니까. 존재한다는 속성이 인간에게 있잖아요.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의사다.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뭔가 있듯이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존재 한다, 에도 나는 무엇, 무엇이다, 에 여러 가지 붙어있는 그러한 조항 중에 하나에요. 그냥 붙어있는 속성 중에 하나가 존재하는 속성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속성이 있듯이 하물며 신에게는 존재하는 속성이 없겠느냐,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이렇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예요. 그렇게 증명하려면 이리 해야 돼요. 내가 머리카락이 빠져서 대머리가 되었다. 인간도 머리카락이 빠져서 대머리됐는데 신이야 하물며 머리카락 빠지겠지. 그러니 하나님은 대머리다. 똑같은 논리다 말이죠. 이건 인간이 지어낸 거거든요. 인간이 지어낸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뭐냐 하면, 인간은 그냥 흙이에요. 흙은 어떤 속성이 있느냐 하면, 쫓겨나야 마땅함이 속성으로 갖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살면 안돼요. 에덴동산 사람은 흙이 아니지요. 에덴동산에서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속성을 마음껏 품고 있는 존재 그게 흙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마라는 것을 했던 것이 나의 운명을 결정했던 그런 존재가 흙이에요. 따라서 너는 흙이다, 라는 말은 너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해서 죽어 마땅해! 라는 속성을 영원토록 니 살 동안에 유지해! 그걸 아주 간출하게 말해서 너는 흙이라고 한 겁니다. “죄인 주제에 어디를 넘봐!” 이거거든요. 생명나무? 천국? 주제 파악도 못한 죄인 주제에 어디를 천국? 니가 아예 그렇게 천국이 필요한 것 같으면 내가 애초부터 너를 쫓아내지도 않았다. 쫓아냈다는 말은 넘보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 말은.

에덴의 동쪽을 넘보지 말라는 거예요.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길이 생명의 길이니까 그걸 넘보지 말라는 거예요. 구원받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천국 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신이시여, 저 인간입니다. 주께서 만들어줬잖아요. 만들었으면 책임져야 되지 않습니까?” 다 책임지라 하니까 미안하니까 “시켜만 주시면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 그런 쪽으로 나갑시다. 그냥 쉐마, 쉐마, 많이 들었지요? 쉐마. 많이 못 들었어요? 맨 날 하는 건데. 쉐마. 쉐마.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쉐마 뜻이에요. 들으라. 그러면 이쪽에서 해야 될 응대는 뭡니까? 종이 듣겠나이다. 요게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쉐마하고 종이 듣겠나이다. 그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망한 정도가 아니라 했지요. 애비가 누구다? 애비는 마귀였다.

마귀가 에덴동산도 겁내지 않고 들어온 마귀가 이스라엘이 무서워서 안 들어왔을까요? 들어옵니다. 예배당 무서워서? 어이구, 이 강대상 무섭다. 마귀가 못 들어옵니까? 에덴동산에 들어와서 인간을 휘젓고 인간을 장악했던 정신을 장악했던 그 마귀가 지금도 우리 정신 장악 못 할 것 같아요? 일곱 귀신 안 들어올 줄 압니까? 주님께서 기도해주니까 우리로 하여금 마귀한테 안 팔려가는 것이지, 주님의 기도가 없으면 우리는 벌써 베드로처럼 말려들어갔습니다. 팔렸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님 생각나거든 그 공로가 주님한테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한테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빡세게, 야무지게 믿었더니만 믿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뭐가 야무져요? 우리한테 뭐가 야무진 게 있어요? 야무지게 사랑해보세요. 주께서 우리를 미워하게 만드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인간 내 눈앞에 돈 빌려줘! 하고 나타날 건데. 돈이고 뭐고 니 나한테 죽었다. 갑자기 은혜고 나발이고 없어요. 다 날려 보내고 니 나한테 죽었다. 니. 그렇게 새벽기도 가서 은혜 받아가지고 운전하는데 앞에서 보복운전 들어와 보세요. 니 내한테 죽었다. 오늘 니 내 성질 잘못 건드렸다. 내려가지고 니 한 번 보자. 벌금내도 좋다. 니 오늘 죽인다. 이게 한 성질 하는 거고요.

목사 되어가지고 직분 받아가지고 주여! 하고 간절히 기도하더라도 나중에 아파트가가지고 층간소음 나보세요. 몽둥이 들고 가가지고 내가 조용하라 했지. 아들, 딸들. 예고 없이 난데없이 우리의 속내를 완전히 발칵 뒤집어놓는 주님. 진짜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미처 몰라요. 성질이 이 정도로 더러운지는 몰랐는데 고마우신 주님께서 성질을 뒤집어놓으니까 쟁기로 밭 갈듯이 바깥에 있는 위장술은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 있는 위장술은 곱게 숨겨놓은 것이 바깥에 나오니까 자기가 보기에도 자기가 실망스러워요.

늘 이렇게 실망에 떨어질 때, 가장 주님 보시기에 신자다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게 주님께 영광이 돼요. 영광 되는 공식은 딱 이미 창세부터 영원까지 딱 하나로 확정 났습니다. 오직 예수 중보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에요. 그리스도 빠지는 영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접 나와 영광 돌리는 법은 없어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걸쳐서 영광돼요. 주님을 걸치려면 주님은 죄를 용서하신 분이거든요.

따라서 주님 앞에서 우리는 뭡니까? 스스로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야 되고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을 못하는 인간이 되어야 되고 내 죄 문제를 내가 허겁지겁 손도 어떻게 못 대가지고 내 몰라라하고 나자뻐질 그런 존재가 있어줘야 돼요. 죄인인체 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는 떠벌이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거든요. 그냥 죄인을 부르러왔어요. 따라서 이 2가지 속성이 절기를 통해서 나타나는데요, 예수님께서 사랑과 미움을 2가지를 다한다고요. 그동안 하도 한국교회에서 사랑만 이야기했지 미움을 이야기 안하니까 제가 특별히 미움을 강조하고 싶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그 대목을 다시 해보겠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은 바로 그 당시 유대인 바리새인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너희들이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이방인도 한다. 그 말 맞지요? 니가 남한테 대접 받을 때, 그 사람이 대접받고 난 뒤에 다시 도로 “아이고, 제가 대접받았으니 제가 대접하는 게 도리이지요.” 라고 하는 사람을 대접하지 말라. 그럼 어떤 사람을 대접해야 되느냐 하면, 나한테 대접을 받아놓고 “제가 보답하려하니 돈이 없네요.” 라는 사람에게 대접을 해야 니가 하늘나라 상이 있을 것이다. 이게 누가복음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주님 안에 다 들어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 같으면 애초부터 주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그 취지가 살지를 않아요. “니가 선악과 따먹었느냐?” “예, 따먹었습니다.” “아이고, 사람이 한 번 실수할 수 있는데 니가 니 잘못을 아느냐?” “알고 말고요.” “그런 짓 하지 마라!” “예” “앞으로 똑바로 해야 돼. 마귀가 와서 꾀더라도 유혹되지 마라.” “예, 두 번 다시 꾀어 넘어가면 저는 인간도 아닙니다.” “그렇지, 그리 나와야지. 그래, 같이 살자.” 이렇게 어떤 기회를 주시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굉장히 하나님답잖아요.

그러나 아예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요.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고 인간을 그야말로 흙으로 만들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흙이 스스로 구원 못 받는 지경까지 밀어 넣음으로서 모든 천국가고 구원받는 모든 공로를 인간 말고 다른 한 분,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주되기 위한 하나님의 고도의 작전이고 전략입니다. 사람은 들러리였어요. 누구 들러리?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들러리였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못 나야 되고 마땅히 말씀을 못 지켜야 돼요. 지켰다하면 그건 분명히 백발백중 100%오해입니다. 내가 지킬만한 해석을 해놓고 지켰다고 우기는 거예요. 모든 말씀은 예수님만 지키도록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는 어떤 말씀이라도 우리는 못 지키게 되어있습니다. 끝났어요. 컴퓨터 켜시고 어떤 말씀이라도 성경 펴놓으시고 자기가 지킬만한 걸 다 지키는지 찾아보세요. 성령이 오셔보면 어떤 구절도 못 지켜요. 어떤 구절도. 그러면 컴퓨터를 끄세요. 끄면 무슨 소리 나지요. 드리릴링~~ 소리 나지요. 그겁니다. 컴퓨터 끌 때 효과음나지요. 그거에요. 그걸 가지고 에스겔37장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한 자. ‘뼈’에요. 뼈.

뼈도 그냥 뼈가 아니고 어떤 뼈? 바짝 마른 뼈지요. 어제 수요일 날 이 설교했잖아요. 바짝 마른 뼈로 우리는 있으면 뒤에 다른 분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했지요. 인자되신 분하고 여호와 하나님 이야기하고, 우리는 뼈로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아요. 두 분끼리 이야기해요. 두 분끼리. “저, 뼈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주의 말씀으로 살겠지요.” 인자되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이야기하시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어떤 모양새로 쭈그리고 있어야 돼요? 뼈라니까요. 주님 하는 일에 도운다고 문방구에 가서 본드 사가지고 살도 붙이고 옷도 번쩍 번쩍 발라놓고 선크림 바르고, “나름대로 뭔가 보답을 해야지.” 이러지 마세요. 은혜받기 위해서 앞자리 나온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마세요. 뒤 자리 가도 은혜 올 자는 은혜오고 앞자리와도 은혜 안 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기분이에요. 기분. 기분은 오늘도 실패다.

그냥 기분이라니까요. 왜 그런 기분을 갖고 싶냐, 기어이 실패 안 되기 위해서. 스스로 꾸민 일이 자기한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요 일만큼은, 요것마저 실패를 한다면 진짜 자기 가치는 없기 때문에 마지막 최후에 나오는 마지막 자존심, 그런 류의 일을 뭔가 해보는 거예요. 그거 냄새 맡고 일곱 귀신 파리처럼 날아옵니다.

“이번 일 성사된 것은 니가 앞자리 와서 된 거야. 그러니까 다음에도 앞자리에 앉아.” 마귀가 와서 나불됩니다. “갑자기 니가 요번에 큰 재앙을 면한 것은 지난번에 니가 십일조해서 그런 거야. 요번 십일조 듬뿍 내라. 아끼지 말고.” 마귀가 또 시험을 해대요. “지난번에 한 것은 기도해서 된 것이고 성경 열심히 해서 된 거야. 니 부모한테 효도해 봐라. 모든 자식이 잘된다. 니 자식이 잘된 것은 니가 부모한테 잘해서 그런 거야. 이건 하나님의 약속 있는 계명이야.” 십계명에 나오지요. 약속 있는 계명. 어버이날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약속 있는 계명이라고. 딴 건 약속 없는데 이건 약속 있다고. 부모한테 잘하면 자식 잘된다고. 이건 불교도 아니고 유교도 아니고 기독교인지 복음인지.

우리가 잘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앞당겨 죽는 게 잘되는 거예요. 메르스 걸려가지고 이게 잘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잘되는 것은 뭐냐, 맞는 즉시 주님만나서 편안하게 제대해서 사는 게 이게 잘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 잘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매일 일상을 만나지요. 일상. 매일 하루 일과 자식 키우는 것. 네 명이나 키운다 하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자식 네 명 키우는 게. 이게 뭐냐 하면 우리를 죽이는 방법이라니까요. 자식 키워서 호강하세요, 가 아니라 내가 니 키우다가 골병 나겠다. 골병 들으라고 자식 낳고 키우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 니는 내 덕분에 오래살고 나는 니 키우다가 죽어서 천당 갈란다.” 이런 식으로 계산 이런 식으로 하란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그 미움이 나의 적들에게 꽂히면 안 되고 그 미움이 누구한테 와야 되는가 하면,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 미움이 누구한테 와야 되는가, 나에게 와야 돼요. 마태복음10장에 나오지요. 누구든지 너를 미워하라. 주님의 미움이 너한테 꽂히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했지요. 그 버림받아야 될 그 분이 버림받아야 될 분이에요? 죄도 없는데. 그럼 그 분이 버림받는다는 분이 죄 때문에 주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거든요. 그 분이 죄를 갖고 있으니까 미움 받았는데. 그 죄가 본인 죄 아니에요. 그럼 누구 죄에요? 바로 나의 죄잖아요.

그러니까 실존을 여기서 찾지 말고 실존을 어디서 찾는가, 십자가 달린 채 찾아야 돼요. 진짜 내 자리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나의 고향은 십자가다. 나의 장래 직장도 십자가고, 나의 고향도 십자가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럼 우리가 기도하고, 목사님이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드리고, 설교하고, 또 강의하러 다니고 이거 왜 합니까? 이거 왜 해야 됩니까? 오늘도 실패다.

그럼 은혜 받는 건 뭡니까? 그건 기분이지요. 기분입니다. 진짜 은혜는 뒤돌아보면서 소급해서 느껴지는 게 은혜에요. 한 가지 예인데요, 여자 축구 캐나다 가가지고 월드컵 할 때, 기대 안합니다. 그거 뭐 축구 몇 년 찼다고 월드컵 나간거만 자랑하지 빨리 끝내고 집에 오지 숙소비만 아깝다 빨리 와. 라고 했는데 하니까 중계방송 보자 했는데 전반전도 밀리기 시작하다가 한 꼴 또 먹었네. 스페인한테. 끝! 끝! 다 껐는데, 제 이야기 아닙니다. 대부분 그럴 거라 하는 거예요. 껐는데 후반전에 1골 넣었다고 하니까 아이고, 또 스페인이 또 봐 줬구나! 봐 줬어. 스페인이 화나가지고 1골 주고 또 4골 먹을 거야. 한 5:1로 질 거야. 했는데 2:1 되니까 인터넷 들어가니까 기적 중에 기적이다. 킹 오브 킹. 기적 중에 기적. 무슨 뜻입니까? 기대를 안했지요.

왜 우리는 우리 자신한테 기대를 합니까? 문제가 여기 있어요. 지금 우리 구원을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해요. 왜? 나는 구원받을 거야. 이게 구원을 방해하는 거예요. 이게. 제발 너 자신을 뭐라고 합니까? 너 자신을 이제부터는 월드컵나간 여자 축구팀으로 간주하라는 말이지요. 아무도 기대 안 해요. 차비도 아깝다. 빨리 빨리 와. 그거에요. 너 같은 게 천당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내가 나한테 늘 그렇게 세뇌를 주세요. 아이고, 미치겠네. 나 같은 게 천국 가면 천국이 흔해 빠졌다. 나 같은 게 천국 가다니. 꼭 이런 사람이 안 다쳐요. 홈런치고. 9회 말에 역전시키고. 우리 자신의 이름을 바꾸세요. 변 반전, 이 반전, 최 반전, 김 반전. 이제는 반전의 사람이에요. 이걸 변전법이라 하는데. 헤겔의 철학은 바로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지 않고 인간들이 기대하는 하늘에 있지 않고 인간들 속에 섞여 있다는 거예요. 하늘의 나라는 그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게 성육신이라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을 주여! 저는 개입니다. 주여 떠나소서.”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죄인, 떠나소서. 떠나소서가 무슨 뜻이냐 하면, 니가 니 인생 평가는 그걸로 끝난 거죠. “주여, 떠나소서!” “자, 드디어 니 인생에서 손 뗐지? 손 뗀 니 인생 내가 그러면 가져가도 니 할 말 없지.”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이제부터 고기 잡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그것은 성령이 와야 됩니다. 왜냐, 성령은 십자가사건을 우리한테 재현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이거든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게 성령의 일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안 됩니다.” 하는 것이 “안 되는 가운데서도 되게 하시는구나!” 이게 성령의 일이거든요.

“로마 못 갑니다. 오! 폭풍 칩니다. 안됩니다. 폭풍 쳐서 로마도 뭐고 지금 집에도 못 갑니다. 끝났습니다.” 했는데 폭풍 가운데서 살게 만드는 것. 모든 것이 반전이에요. 죽었다 했는데 살고, 살았다 하면 다시 죽게 만들어버리고. 우리 인생은 롤러코스터 같아요. 늘 좀 섰다하는 자는 교만하고 엎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그것은 바로 미움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주님의 속성이 우리를 장악하고 우리를 그렇게 인생을 이끌고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그래서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고칩시다. 미움의 하나님. 미움이 나를 미워하시는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러면 왜 그냥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미움을 왜 집어넣는가,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지막에 우리가 사랑하는 자는 우리밖에 없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사랑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할 줄을 몰라요. 내 사랑하는 거 외에 할 줄을 모른다고요. 이웃사랑? 그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웃사랑을 할 줄을 모른다니까요. 내 사랑하는 거 외에는 그 노선에서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우리는. 왜? 마귀가 그렇게 강렬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노선이 KTX가 기차가 철도노선하면 그건 탈선하잖아요. 우리는 탈선할 수가 없어요. 내 사랑하는 철도노선에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 그럴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럼 어떻게 하느냐, 기차타고 그 노선을 가는데 거기다가 뭔가 뒤에 뭔가 붙었어요. 붙어서 이걸 속에서 균열 잘라버려요. 그러면 우리 속에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 주님을 영화롭게 못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인, 죄가 나와요. 그 죄를 주님께서 직접 처리해버리면 우리가 죄를 늘 승리하듯이 이 기차는 나중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려요. 활주로에서 비행기 뜨듯이 날아가 버려요. 어떻게? 나 있는데 붙어가지고 예수 안에서 죄인을 건져내시면서 요거 전체를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5장21절 봅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다시 말해서 우리하고는 상대 안하지요. 우리는 뼈다귀니까 상대 안합니다. 우리는 감자탕이에요. 그냥 뼈에요. 상대 안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셔요. 누구와 일합니까? 우리하고 일 안해요. 말씀 지킨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보고 아예 일을 안 한다는데 무슨 말씀을 지켜요. 우리가 말씀 지키는 것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해석해가지고 나는 지켰다. 자기 기분일 뿐이에요. 우리는 어떤 말씀도 사도바울의 어떤 말씀도 못 지켜요.

니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하리라, 도시에 일하는 것도 악이라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어떤 희망을 품고 있지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벌리라. 그것조차 악이 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못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과 우리를 대신으로 하셔서 일을 벌리셔가지고 거기서 뭘 생산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빠진 게 뭐냐 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이미 죄를 처리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대신했던 그 인간을 찾아오는 일이 아직 남아있어요. 그래서 찾아왔잖아요. 누가요? 주님이 자신의 영을 통해서 찾아왔잖아요. 됐잖아요. 끝났잖아요. 끝났네. 뭘 할 게 남아있어요? 없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재림도 주님이 하실 일이지, 마귀에게 시험 들고, 걸리고 주께서 하실 일로 우리 일은 없어요. 우리는 다만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일에 말려들어 가도록 그 태풍과 허리케인 속에 말려들어가서 지금 살아가는 중입니다.

없는 자를 택하사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똑똑한 자를 버리시고 무식한 우리를 택하사 똑똑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시고, 고린도전서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뭡니까? 남보다 더욱 더 똑똑하게,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주께 영광이고 복 받은 티낸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을수록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게 아니고 못난 인간 되면 될수록 주님만 영광이 더욱 올라가고 우리가 무식하면 무식할수록 주님께 더 영광이 돌아가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무식할까요? 그럼 어떻게 없는 사람이 될까요? 성질 급하게 하지 말고 가만히 기다려 봐요. 기다려 보시면, 보이스피싱 당하게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무식했던가. 당했답니다.

그러니까 이게 똑똑해서 안 당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게 되면 졸지에 똑똑한 인간이 무식한 인간이 되고, 좀 자랑질하다가 자랑할 게 없게 만들어주실 때에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지고 장난치시는구나! 이렇게 믿으시고 감사하시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7장14절(미움의 하나님)1506018a-이 근호 목사.hwp (35.0K), Dow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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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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