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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정신과 생명 150626강의마가복음

정신과 생명 150626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서경수(IP:14.♡.98.169)

15-07-09 08:34

광주 강의(2015. 6. 26) 16-1

마가복음 5장 6-7절은 예수님이 귀신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사람을 대하듯이 예수님을 대합니다. 그런데 뭔가 빠졌지요? 예수님을 대할 때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인간 대 인간끼리 서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합시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뭔가 뭉텅 빠진 게 있지요. 그게 뭔가? 귀신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는 예수님만 눈에 보이기에 다른 사람을 대하듯 예수님을 대하는데, 자신들이 귀신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빼놓고 예수님을 이해하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청년을 만나서 ‘너희들과 나 사이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온 제자들이 어디에서 큰 실수를 했는가 하면,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각지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기를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귀신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어요.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들은 비록 귀신을 쫓아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고 이해 안 되는 이유가 중간이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놓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을 집어넣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 자질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잘못 된 것이고, 모든 인간은 귀신의 늪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귀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봅시다.

7절에 보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했는데, 여기 까지는 좋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예수와 귀신이 보는 예수가 다르지요. 귀신은 예수님을 제대로 봤지요? 그런데 그 뒤의 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7절 끝에 보면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해요.

이건 결정적인 이야기에요.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높이겠습니다.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주님 나라에 가면 우리 중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이런 질문은 예수님을 제대로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 제자가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할 이유는 없어요.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어떤 소녀가 “베드로 당신은 예수님과 한 편이지요?”라고 말했을 때, 처음부터 예수님을 모르는 사이였다면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나올 이유가 없잖아요.

결국 그 순간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후회냐? ‘내가 괜히 예수님 따라 다녔다.’고 후회를 하는 거지요. 이제 와서 보니까 예수님 때문에 자기 인생이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나는 예수님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극구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발한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으로부터 발을 빼고 ‘당신과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처신을 할 때 이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출발점에 와야 비로소 신앙을 알지 자신이 알아서 주님께 가까이 가면 예수님을 계속 오해할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 가까이 가도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귀신이 물러가지는 않습니다.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가 납치되어 범인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범인을 몰라보고 “아저씨, 혹시 내 여자 친구 못 봤습니까?”라고 물으면, 범인은 미소를 띠면서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벽 뒤에 여자가 묶여 있습니다.

귀신이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님, 되십니까? 믿음 좋으시네요. 천국에 가시면 상급이 많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귀신이 자꾸 유인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귀신 말을 듣고 자기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 빠져나간 것이 아니고 계속 장난을 칩니다.

제발 신앙에 실패하세요. 원래 우리는 신앙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자꾸 신앙에 성공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을 받지 않아요. 우리는 출발점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베드로에게는 출발점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원래 주님이 찾아온 출발점으로 가게 만들어요. 이 자리를 바울은 ‘십자가 안’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찾아오심’이지요. 주님이 찾아오실 때 베드로의 입장이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지요. 잘난 척하고, 말 잘하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아무소리 못하고 주어를 바꾸잖아요. ‘내가 사랑합니다.’ 라고 하지 않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지요.

베드로는 주를 부인하고 떠났지만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셔서 찾아오셨는데, 오히려 질문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데, 사실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가 베드로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베드로에게 덮쳐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가 평소 예수님께 소홀히 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런데 오죽했으면 예수님께 화를 냈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작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 현장에 12제자들이 있지요. 결국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만 고려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사로의 집에 함께 찾아가요.

모든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예수를 믿으면 영생 얻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어서 영생 얻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예수님 자신이 영생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저쪽에 계시는 주님을 믿으면 내가 구원 받는다.’ 다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출발점을 나에게서 시작하는데 이것이 잘못입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그러면 된 거예요. 예수님 살아 계시는데 왜 ‘내가 어떻게 하면 살까?’ 이런 궁리를 합니까? ‘살았다’는 말은 예수님께만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살겠고’는 예수님이 살겠다는 것이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역시 예수님이 영생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마르다, 마리아를 찾아 간 것은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기 위함이지 ‘너희들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살아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면 ‘내가 예수님 때문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삭제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초등학교 아이 둘이 같이 놀다가 한 친구가 “우리 집에 가자!”고 해서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습니다. 따라온 친구가 “이게 너희 집이냐?” “응, 내 집이야.” “얼마 주고 샀는데?” “2억 5천 줬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건 아이들 대화가 아니지요. 얼마 주고 샀냐고 물으면 “이건 내 집이 아니고 우리 아빠 집이야.” 그러기에 “얼마 주고 샀는지는 아빠한테 물어야지 나에게 물을 사항이 아니야.” 이렇게 되어야지요.

제가 방금 아파트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을 영생, 생명으로 바꿔봅시다. “이 생명은 누구의 생명이냐?” 예수님 생명이죠. 그럼 우리는 왜 있습니까?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어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아요.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전하라고 이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그 말씀을 지키면 내가 산다.’ 평소의 노림수, 즉 예수님을 이용해서 우리가 뭔가를 획득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빠가 죽기 전까지는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오빠가 죽고 난 뒤에는 그녀들의 속셈이 드러났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우리는 초인이 못 되어서 분통을 터뜨린다.’고 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초인적인 엄마가 못 되어서 화가 나고, 초인적인 아들이 못 되어서 화가 납니다. 왜 나는 초인이 못 되는가? [죄와 벌]에서 청년이 노파를 죽이는 이유가 뭡니까? 노파는 사회적 악이에요. 노파 때문에 노파 여동생은 노예처럼 살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여동생이 너무 불쌍하고, 노파가 너무 돈을 밝히니까 저런 인간은 이 사회에서 없어지는 것이 사회 정의에 합당하다고 여겨 죽였습니다. 그 순간 청년은 니체가 말한 초인이 되는 겁니다.

청년이 노파를 죽일 때 도끼로 죽이는데, 그 때 불쌍한 동생이 들어와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동생도 죽이고 말았어요. 언니의 압제로부터 동생을 구출해 내려고 언니를 죽였는데, 그러다 동생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내가 원하는 좋은 가정을 이루겠다는 것이 초인사상인데 우리가 초인이 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그냥 있지 않습니다. 안 되면 분통에 충만해서 모든 삶의 역영에서 이 분통이 표출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서히 미쳐가는 거지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쳤어요. 도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오늘 본문에 귀신 들린 자처럼 “예수여, 왜 저를 괴롭게 하십니까?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미리 오십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망할 때를 알지요. 망할 때를 알면 돈을 벌어도 겁나고 잃어도 겁나요. 일이 잘 풀려도 사는 것이 무섭고, 일이 안 풀리면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두렵고. 어쩌면 좋겠어요? 현대인들은 이래도, 저래도 두렵습니다. 그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그럼 마지막 때를 왜 생각합니까? 중들은 욕정이 생길 때 슬픈 생각을 하면서 욕정을 억누른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마지막 때를 생각합니까? 그것은 자기의 마지막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래요. 세상이 왜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근거도 없어요. 그냥 그렇다고 우기는 거예요. 무조건 이 세상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묻지 마. 짜증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예수님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님을 알려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유튜브에서 이런 광경을 봤어요. 할머니가 3살 된 손자를 키우는데, 아이가 할머니와 살다보니까 아이 말투가 할머니처럼 해요. 노래도 할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요. 음식도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도 좋아해요. 이 3세 아이의 특기가 뭔가 하면, 남의 의견에 반대할 때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말을 해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 불만이 있어서 주님께 호소합니다. “세상이 왜 이런 식으로 돌아갑니까?” 주님 답변은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은 예수님이 만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오시면 종말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지 세상도 아닌데 지 세상으로 착각해서 벌벌 떨고 있어요. 일이 잘 되어도 떨고, 못 되어도 떨고. 우리교회 성도님의 젊은 따님이 최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분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제가 요한복음 11장을 그동안 잘못 이해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군요. 왜 나는 내 생각만 했는지--.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사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데.”

나사로는 예수님을 믿었지요. 믿었다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훌륭한 일을 한 것 같지만 나사로나 예수님이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지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당연한 일인데 왜 믿는 것이 특별하고 대단한 일인 것처럼 여기냔 말이지요. 나사로는 살아 있을 때도 예수님이 영생이고 죽어도 예수님이 영생하는 분입니다.

나사로는 주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나사로는 주님의 사람이기에 주님이 깨우면 그가 영생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생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 입장을 이야기하는데 마르다, 마리아는 오해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를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살아있다는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 적용시켜야 돼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의 모든 언어는 예수님 중심의 언어에 합류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어요. 마귀는 신학박사보다 더 똑똑해요. 그런데 끝이 문제입니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몫은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왜 나의 영역까지 당신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뜻이지요.

5장 8절에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 귀신 들려 무덤에서 놀 때 그는 세상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한데, 오늘날 현대인들이 주님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외롭지 않게 살려고 합니다. 사람은 한 평생 자기 자리 확보하는 것이 삶입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는데 개발한다고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섭섭하지요. 왜냐? 자기가 어릴 적에 놀던 시냇가는 메워져 주차장으로 변하고, 제일 친한 친구 집은 철거되고 보상 받아 서울로 이사를 갔고, 친한 친구들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

자신의 추억이 만들어진 동네가 사라질 때 왜 쓸쓸한가 하면, 사람은 보고 느끼는 평생이 자기 자리 확보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확보된 자리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뜯겨나가요. 뜯겨나가면 내 자리가 불안해요. 친하게 지낸 친구가 나에게 욕을 하고 떠나면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이유가 뭡니까? 정든 사람이 떠나가면 외롭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고 확정적인 내 자리를 구축해야 내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청년은 무덤주변을 헤매고 있는데, 저 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키우고 밭을 일구면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 속에 들어있던 귀신을 예수님이 쫓아내시니까 그 귀신이 어디를 덮쳤습니까? 아랫마을 돼지에게로 들어갔지요. 그러니 돼지가 갑자기 미쳐서 발짝을 일으키며 바다로 들어갔어요.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17절에 “저희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는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라고 나옵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뭘 알았습니까? 내 자리 확보 자체가 귀신들린 짓이 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있어야 됩니까? 이건 부질없는 짓입니다. 모든 현대인들이 다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등등 이 모든 것은 내 자리 확보입니다. 그런데 내 자리 확보가 원활치 않으면 사람들은 고독을 느낍니다. 친구가 없어서? 아닙니다.

순수단일성과 우연적 단일성이 있어요. 우연적 단일성은 버스 정류장에 차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옵니다. 이들은 한 때 무리를 이루지요. 이들은 우연히 정류장에서 만났어요. 이것이 우연적 단일성이라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집합’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순수단일성이에요.

우연적 집합은 싫어요. 집합을 조직으로 바꾸면 돼요. 조직은 회원 등록해야 하고 회비도 내야하고 그래서 쉽게 발을 못 빼요. 조직사회에서 문제는 뭔가? 발을 쉽게 못 빼는 것은 좋은데, 조직사회가 내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내 자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굴복해야 겨우 내 자리 하나가 마련돼요. 굴복하더라도 조직사회에 있으면 덜 외로워요.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 혼자 남았다. 그 때 자식 10명이 있어도 그들은 우연적 단일성이라. 소용없어요. 자식들이 아무리 효도를 해도 허전한 마음을 메울 수가 없어요.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무조건 내 자리 확보를 위해 삽니다.

나는 내 자리 확보를 위해 사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지요. 그 때 반응은 “예수여,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귀신 들린 자입니다. 내가 그동안 공들여 간직했던 조직사회에 흠집을 내고 방해하면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도 우리는 가만두지 않고 대항해 싸웁니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한 후에 “나를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떠났어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일찍 오라고 했잖아요. 오빠고 죽고 난 뒤에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리 확보하는 모습입니다. 내 자리가 있을 때 외롭지 않아요.

그런데 그 자리가 불안하거나 사라지면 외로움을 느껴요. 하나 빠졌는데 외로움을 느껴요. 설거지 하다가 숟가락 하나 보이지 않아도 계속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평소 삶입니다. 예수님 생각 안 합니다. 예수를 생각할 경우는 우리의 모든 노림수가 실패로 끝나고, 나를 위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이것이 출발지점입니다. 이 출발선을 누가 유발시킵니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출발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가뭄이 듭니다. 가뭄이 들면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평소에는 하늘을 안 쳐다봐요. 이 말은, 평소에 우리에게 소용되는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 한 방울도 하늘에서 내려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주신 것에 대해서 은혜로 알아야지요. 은혜 없이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평소에 은혜에 대해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모든 것이 하늘에서 출발했으면 평소에 비가 내리고, 공기를 마시면서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지요. 감사치 않는 이유를 인간들은 몰라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비 내리고, 햇볕 주신 주님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평소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햇볕을 주신 그분이 이 땅에 와서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합니다. 왜 사람들은 주님을 곱게 영접하지 않고 죽였습니까? 주님께 문제점이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뭔가 고장이 나서 잘못되어 있어요.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는 몰라요.

그 잘못을 오늘 본문이 알려줍니다. 바로 사단에 속했기 때문에 햇볕과 공기 주시는 분께 감사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은혜는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 사실도 모르고 삽니다. 이방인들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감사하지요. 그런데 진짜 비를 주신 하나님이 오시니까 가짜 신이라고 죽였지요.

신에게 감사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장해 주는 신을 믿어요. 그게 여호와든, 바알이든 모두 거짓 신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한국교회 목사들이 자꾸 생각이 나네요.

오늘도 교회에 헌금한 나는 잘났고, 기도한 나는 잘났고, 찬양한 나는 잘났고--. 본문의 청년은 너무 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어요. 9절을 보면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주님 말씀이 “너희들이 율법으로 깨끗하게 한다고 해도 일곱 귀신이 다시 들어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귀신이 안 들어오는 것이 좋지요. 그런데 귀신은 자기 집 드나들듯이 해요. 돼지에게 들어갈 때 귀신이 마음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가 없어요.

12제자가 예수님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냈지만 자기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는 없어요. 왜냐? 귀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말씀처럼, 우리는 불순종이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사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지요. 불속에 들어가면 죽을 줄 알았는데 그 속에 어떤 분이 계셔서 불속에서도 타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불속에 들어가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 있어요. 뭐냐?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법대로 하니까 불속에 들어가도 살았고, 사자 굴속에 들어가도 살았습니다. 구약은 율법이지만 신약은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영이 찾아오면 됩니다.

그냥 막 사세요. 살다보면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백성에게는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이미 약속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찾아오시면 그곳이 바로 불속이고, 사자 굴속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7. 16. 08:01 녹취 마침)

서경수(IP:14.♡.98.169)

15-07-23 10:46

광주 강의(2015. 6. 26) 16-2

마가복음 5장 13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 들어가니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이 이천 마리의 돼지 떼에게 들어간 귀신이 한 사람 속에 다 들어가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쫓아낸 일곱 귀신이 갈 곳이 없어서 청소가 된 마음속에 다시 들어온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귀신은 아무리 많은 수가 한 사람에게 들어가도 비좁다는 소리를 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뭡니까? 인간은 면적이 얼마고, 몸무게가 얼마고, 수분이 몇 퍼센트고 이것이 인간의 전부입니까? 인간을 설명하려면 2,000의 귀신이 들어와도 있을 곳이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켜야 제대로 인간을 설명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과 만나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이 얼마나 잘못 생각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13절을 보면, 2,000여 마리의 돼지가 다 몰살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보상은 축협에서 합니까, 누가 해야 됩니까? 17절을 보면 “저희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되어 있는데, 15절에는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 청년이 무엇이 온전하다고 했습니까? 정신이 온전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너 취직했니? 월 소득이 얼마야? 부모님은 뭘 하시지?” 이런 질문을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청년을 만나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은 ‘정신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재산, 돼지가 죽은 것에 대해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온전한 정신을 갖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정신을 온전히 바꿔놓기 위함이죠. 그러면 그 이전에는 왜 정신이 온전치 못했습니까?

정신이 온전치 못하기 위해 노력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귀신이 들어있어서 그렇지요. 그러면 예수님이나 귀신이나 결국 인간의 정신을 공략합니다. 그런데 돼지가 왜 떼로 몰려 바다로 들어갔습니까? 귀신이 돼지에게 올라탔지요. 그렇다면 돼지의 신체도 귀신이 관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관심 갖는 것, 직업이 무엇이며 월 소득은 얼마인가를 질문한다는 자체가 정작 중요한 것은 모르고 하는 질문입니다. “취직했다고 들었는데 월급은 얼마나 받아요?” 이런 대화는 주님 보실 때 우리가 맨 정신 아닐 때 그런 질문을 주고받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적 대화가 이런 것 아닌가요?

케이블 TV를 보면 늘 나오는 것이 건강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00 음식은 어떤 영양소가 있고, 00 체질의 사람은 이런 음식이 몸이 좋고 등등. 세상 전체가 마귀들의 세상입니다. 귀신들린 세계에요. TV에 나오는 모든 내용들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학교, 군대, 교회 구분할 것도 없이 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들의 집합입니다. 15절을 다시 봅시다.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때 정신이 온전한 자는 누구뿐입니까? 조금 전까지 2,000의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러면 이 사람은 본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리고 본인이 귀신을 초청한 것도 아니지요. 이 사람은 자리만 내 줬지요. 그렇다면 인간은 뭡니까? 장소다. 영적 전쟁의 장소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터전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장소, 이것을 천사도 부러워해요.

가뭄이 들었다고 난리를 치는데, 하늘에서 수도꼭지를 열면 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우리가 아무리 까불어도 하늘에서 비를 주지 않으면 못 살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까 하나님께 감사치 못하고 자신의 힘만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귀신 들렸고 사단에 메여 있기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과 상대하십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 바리새인은 스스로 금식하면서 하나님 은혜와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 자리에 가지 않고 죄인들에게 가서 그들을 건져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 세상은 인간의 세계가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몸만 내어드리면 됩니다. “쓰시옵소서.”하면서. 통영에 계시는 권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려고 본문(주가 쓰시겠다 하라. 마21:3)을 읽었는데, 눈물이 나와서 잠시 설교를 못했답니다. 나귀는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데, 왜 나는 내 몸을 주님께 못 바치는가 생각이 나서 울컥 했답니다.

이 짧은 순간은, 세상의 억만금보다 더 귀한 것이 주님이고, 세상 그 누구보다 내가 행운아임을 감 잡는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운아는 바로 나라는 사실. 물론 손녀가 태어난 것도 행운이지만 이보다 더 큰 행운은 내가 주님께 쓰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년은 땡잡은 사람입니다. 한 때는 2,000여 귀신이 들어와 살았지만 지금은 정신이 온전합니다. 따라서 주께서 오신 것은 택한 백성에게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것도 모르고 5장 17절에 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잃었다고 짜증을 내면서 자기 동네에서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간구합니다.

18-20절에 “예수님이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구에게 고하라 하신대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과 헤어졌으니까 혼자 따로 사는 겁니까? 예수님과 헤어졌으니까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5년 전에 예수 믿었다. 지금은 예수님 생각도 안 한다. 그러면 지옥 갑니까? 신체는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그러나 정신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젊을 때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치매에 걸렸다. 그러면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주께서 정신을 관여했으면 이 정신은 주님 소관이에요. 정신은 시간을 초월하지요. 시간을 초월한다는 말은, 모든 것이 예정된 코스대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청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청년이 “제가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아니야, 따라올 필요 없어. 너는 어딜 가나 내 증인이 되면 돼.”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 듣고 청년이 섭섭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청년이 고향에 가서 농사짓고 살아도 주님 예언의 말씀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지요. 만약 그 때 닭이 잠이 들어 울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베드로는 멸망당하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부인해도 닭은 주님과 연결되어 때가 되어 세 번 울었어요. 그러니까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의 관계망 속에 이미 들어있고, 모든 일(예수님을 부인하고, 닭이 울고 등등)은 이미 예언된 일입니다.

따라서 뒤돌아보니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은혜였어요. 주를 부인한 것도 그래야만 했던 일이에요. 청년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지요. 신체는 시간의 저촉을 받기에 낮잠 잘 때는 주님 생각 안 납니다. 신체는 정신에 예속되었기에 주님은 우리의 정신에 관여를 합니다. 청년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도 택한 백성이기에 찾아온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성경은 뭐냐? 성경은 주님의 이야기지 우리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 밤 꿈을 꿀 때는 꿈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꿈은 중단이 됩니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직 꿈이 지속된다면 몽유병 환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내 생각에 사로잡혀 살다가 주님이 찾아오시면 내 삶은 끊어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연결됩니다.

그럼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냥 막 살면 됩니다. 막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냥 막 살면 되는데 왜 막 사는 것이 감사가 안 됩니까?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서 “이제부터 시험을 친다. 컨닝 해!” 컨닝 하라는 말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컨닝해도 점수는 선생님이 알아서 주겠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저는 컨닝 안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불러냅니다. “네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는 마귀입니다.” 귀싸대기 맞고 정신이 온전하게 됩니다.

막 살라는 말이 기쁨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겠다는 거지요. 주님은 그냥 힌트만 주시면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타겠다고 하신 나귀가 평소에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해서 예수님이 사용하시겠다고 한 것입니까?

주님이 사용하실 것을 나귀가 미리 알고 스스로 목욕도 하고, 건강관리도 하고 했습니까? 나귀가 스스로 잘 관리해서 주님이 사용하신 것입니까? 우리도 그 나귀와 똑같아요. 그냥 살다보면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그 말 자체로 인하여 우리는 그냥 감지덕지할 뿐이에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 세상은 주님이 마귀와 싸우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귀에게 속아서 ‘내 돼지는 내가 관리한다.’고 하다가 다 빼앗겼지요. 2,000여 마리의 돼지가 다 죽었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하지 않고 “주님, 저희 동네에서 떠나소서.”라고 했지요. 당신과 우리는 상관없다는 말이지요.

21-23절 봅시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제가 대학 다닐 때 처음 교회를 갔는데,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늘 “야이로의 딸”을 언급해요. 그 당시에는 성경을 몰랐기에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몰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회당장 이름이 야이로고 그가 죽어가는 자기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구했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이 내용이 의외로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분명히 지금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면서 25절에 보면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는 말씀이 있어요.

갑자기 왜 이 이야기가 나옵니까? 야이로의 딸에게 가기 전에 덤으로 하나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병 고침에 대해서 제가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대신 짊어지고 담당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의사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진다는 것이 병일까요, 아니면 죄일까요?

인간 A가 있고 인간 B가 있다면, A의 속성이 B로 넘어오지 않습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각자가 개체기 때문에 넘어올 수 없습니다. “너, 내 말 이해되지?” 이해 안 됩니다. 50년을 같이 산 부부라도 각자 생각이 달라요. 둘이 같이 살 뿐 하나가 된 적이 없어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경유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둘이 하나가 되는데 조건이 있어요. 연애할 때 예뻤던 얼굴을 결혼하면 포기해야 돼요. 결혼하기 전의 여자와 결혼 후의 아내는 달라요. 요즘 TV프로 중 [님과 함께]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다 설정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피부를 봅니다.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의 피부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여자가 돈이 많은 경우 남자의 피부를 봅니다. 얼굴 형태는 성형해서 손을 댈 수 있지만 피부는 속일 수가 없어요.

인간은 감정이 우세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동물과 같습니다. 탱탱하고 윤기 나는 젊은이들이 반바지를 입은 것과 나이든 분이 반바지 입은 것은 확실히 다릅니다. 신체는 시간의 저촉을 받아요. 성경에도 나오잖아요.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주님은 정신을 보지 겉은 안 봅니다. 천만다행이지요.

주님의 속성이 될 때 부부가 하나가 되는데, 하나가 되면 하나 된 자신을 보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봐요. 둘에서 하나로 이동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 부부는 행복하다.”고 하다가 주님을 보는 순간 “예수님이 계시네.”라고 하면서 자기 가정은 자연히 뒷전으로 밀립니다. 이것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수면 내시경 할 때, “나는 어떤 경우에도 마취되어 잠들지 않는다. 의사가 어떻게 내시경 검사를 하는지 꼭 볼거야.” 아무리 다짐해도 마취 주사 맞은 후 얼마 있지 않아 잠들고 맙니다. 잠에서 깨어보면 이미 회복실로 옮겨져 있지요. 벌써 내시경 검사가 끝이 난 거예요.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나는 “내가 예수 믿는다.”고 큰소리치다가 나중에 보니까 ‘나는 주님 앞에 막사는 자였습니다.’ 이게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나는 예수 믿은 적도 없는데 이미 구원 되었어요. 진짜 신앙인은 예수 믿은 적이 없어요.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안 믿는데 주님이 믿었다고 하십니다. 이게 믿음 상태입니다.

이런 말하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환장합니다. “믿으라고 하면 믿을 게.”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믿지 마!”라고 하십니다. ‘내가 안 믿는데 어떻게 믿게 되지?’ 내가 아는 예수는 가짜 예수입니다. 진짜 예수는 못 믿어요. 못 믿기 때문에 이미 구원 받았어요. 내가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미 그 사람은 믿는 자가 되었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주체를 누구에게 넘기겠어요? 예수님께 넘기겠지요.

이미 하나 된 부부는 주님 안에서 하나지 하나 된 부부를 자랑할 수 있는 제 3의 하나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뭐라고 요청하는가 하면,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겁니다. 이 회당장이 노리는 것이 뭡니까?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죽어가는 자기 딸이 좋을 뿐입니다. 이게 믿음입니까? 아니지요. 이 사람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내 속에 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너의 죄를 대신 담당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믿음 없는 사람은 어떻게 나오는가? “그래요, 그럼 내 죄를 가져가세요.”라고 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죄가 있는 곳에 자신이 있어요. 그러니 주님이 가져가시면 따라가게 되지요. 주님은 나를 본 것이 아니고 나의 죄를 봤어요. 나도 나를 보면 안 되고 나의 죄를 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죄가 없어져 깨끗하게 된 나를 보지요. 이게 엉터리입니다.

주님이 내 죄를 가져가면 나도 따라가야 돼요. 주님이 주목하시는 곳에 나도 주목해야 돼요. 주님은 우리 껍데기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주목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죄를 주목해야 돼요. 사도 바울이 이것을 알게 된 거예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여러분도 여러분 피부에 관심 두지 말고 죄에 관심을 둬야 합니다.

내 죄를 담당하시는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내 죄를 예수님이 가져가시는데 만약 우리가 “아니 되옵니다. 이것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큰일 날 소리지요. “고장 난 TV, 컴퓨터 삽니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찾습니까? 고장 난 TV나 컴퓨터를 찾는데 돈이 아쉽다고 멀쩡한 TV 가져가면 안 되잖아요.

주님은 멀쩡한 것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고장 난 것을 가져가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 주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가져가는 죄가 무엇인가? 바로 ‘내 딸 살려주세요.’ 이런 요청이 죄가 됩니다.

야이로의 요청은 안 됩니다. 죽다 살아나도 헛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헛일이 되지 않게 무엇을 집어넣습니까? 12년 동안 혈루병 들린 여인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딸이 살아나는 것이 기적입니까, 혈루병이 낫는 것이 기적입니까? 어느 것이 더 큰 기적처럼 보입니까?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이 더 큰 기적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 죄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큰 기적입니까, 그들이 물 없다고 원망한 것이 큰 기적일까요? 어느 것이 약속의 땅에 가깝습니까? 홍해보다 더 가까운 곳은 광야지요. 그러면 어느 쪽이 가까운 기적입니까?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 약속의 땅에서 가까운 기적이고 홍해 사건은 애굽과 가까이 있는 기적입니다.

홍해를 건너올 때 신났지요. 모세의 누나는 노래를 불렀어요. 이 누나가 나중에 문둥병 걸렸어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흑인 여자를 들인단 말이냐?”라고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어요. 모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까 문둥병 든 손이 되었어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나 문둥병자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주님과 마귀가 싸우는 터전이라고 여기고 그냥 내 놓으세요.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그것이 헌금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그것이 기도고, 아무것도 안 하는 그것이 예배가 됩니다.

MBC 아침 드라마 [이브의 사랑]이 있는데, 제가 뱃살 뺀다고 아침 운동을 하면서 시청합니다. TV 시청하는 것이 예배입니까, 아닙니까? 만약 TV에 빠져서 시청하면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적 비판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예배가 됩니다. 복음적 안목으로 윤도현 밴드의 노래 ‘사랑 two’를 들으면 복음송이에요. 그냥 좋아서 들으면 그것은 대중가요가 되고.

주님께 ‘내 죽어가는 딸 살려주세요.’라고 하는데, 자기 딸 맡겨놓았습니까? 이처럼 인간들은 싸가지가 없어요. 수박 맛이 없어도 주님께 원망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말은 안 해도 속으로 “맛있는 수박 만나게 해주시지 왜 하필 맛없는 수박을 주시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만큼 천국에 가까워요. 우리의 죄가.

움직였다 하면 불평과 불만이 나옵니다. 지금 딸이 죽어간다고 살려달라는 회당장과 12년 동안 혈루증 앓은 여자의 차이점이 있어요. 혈루증 여자는 자기 병이 주님의 조치에 의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회당장은 원래 내 딸은 건강해야 하는데 뭔가 잘못되어 죽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 자기 딸을 원래 상태로 돌려달라는 식의 요구를 한 거예요.

주님은 회당장의 간구를 들어주기 위해 길을 가는 도중 혈루증 여자가 끼어듭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제가 강의하고 있는데 병든 자가 와서 “목사님, 잠깐 봅시다.”하면서 나를 불러낸다면 이건 반칙이잖아요. “지금 강의하는 것 안 보입니까?” “급합니다.”하고 빼내는 거예요.

이건 개입이고 난입이고 쳐들어 온 거죠. 예의도 없고 막무가내입니다. 뒤에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만약 이 광경을 회당장이 봤다고 하면 어떻게 나왔겠어요? 예수님은 지금 자기 딸 낫게 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예수님의 신경을 흩뜨려 놓습니다. 그럼 화가 치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화내지 않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실 뿐이었어요. 그 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무리가 애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반문했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부가 있는데 이 둘이 마음이 하나가 되면 좋겠다고 주님께 기도했다면, 주님께 경유하는 순간 ‘하나 되어 둘이 사이좋게 지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집니다. ‘주님만 계신다면 우리 부부가 싸워 이혼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길 때 이게 하나가 된 거예요.

인간은 각자의 개체를 가지고 있기에 상대의 것이 내게로 이동하지 않아요. 주님의 속성만 분배받을 뿐이에요. ‘우리는 한 형제다.’라고 하는데, 형제가 되려면 주님의 속성을 받아 내 자랑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할 때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귀처럼 쓰시려고 죄인인 나를 부르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많은 사람이 밀치고 있는데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니요?” 이 제자들의 말은, 예수님과 혈루증 여인 사이를 가로막는 꼴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방해를 치웁니다. “아니야, 내 몸에서 능력이 나갔어.” 하시면서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 때 여인이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 여인의 병은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생겨야만 하는 병입니다. 여기에는 인생에 대한 보상이라든지 원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망가뜨립니까? 빨리 원상복구해 주세요.”라는 분노가 없어요. “당신이 메시아야! 당신이 내 인생 이렇게 망쳤어. 책임져.” 이런 것이 없어요.

이 여인은 큰소리치지도 않았어요. 몰래 뒤로 와서 주님 옷을 만지면서, 자신의 일을 자신의 일로 보지 않고 주님께 속한 일로 받아들였을 때 주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러면 이 여인이 건강하게 된 것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주님에게서 나왔지요. 그렇다면 여인의 병은 어디로 갔습니까? 담당하신 예수님께 갔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병을 짊어진 예수님’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야이로의 딸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죽어야 될 우리를 살리러 오신 예수님이죠. 그럼 어떻게 살립니까? 예수님이 생명인 것을 받기만 하면 그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속성이 되어서, 우리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다른 게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지어야만 주께서 일하시게 되는 아담의 자손입니다. 우리의 죄를 통해서 주님의 용서하심을 마음껏 드러내소서.’ 이것이 바로 성도의 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가끔은 주님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내 생각 하며 살아가는 저희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찾아오셔서 말씀 주셔서 소급해서, 그것이 우리가 나귀로 사용되는 모양새인 것을,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을 우리의 죄를 보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같이 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7. 23. 08:2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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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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