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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3 - 사회적 여건강의잠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3 - 사회적 여건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33 - 사회적 여건

15,06,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부르디외' 라는 사회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비투스' 라고 해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결정되는가?'를 연구한 사람인데, 사회주의 주창자인 마르크스에 반대되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부르디외 -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부르디외' 라고 하는 프랑스 사회학자가 무슨 말을 했는고 하니,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라고 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결정' 이라는 말을 함으로서, 그는 "어차피 이 세상은 인간보다도 구조가 더 우선이다" 라는 것을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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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투스가 무슨 말인가요?
먼저 아비투스란 'Habit(습관)'에서 유래된 말이구요. 'Habot' 이란 단어에 'us'가 붙어 형성된 것으로서 '해비투스' 라고도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H를 뺀 아비투스라 불리웁니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 이론의 핵심이기도 하는데요, 부르디외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사회의 객관적 구조와 아비투스(habitus)라는 내재화된 구조의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나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아비투스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내면화된 성향의 체계로서, 인간행동의 생산자이며 인지와 평가와 행동의 일반적 모습을 말합니다. 위의 아비투스는 '사회화된 주관성'으로 행위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도록 허락해주는 '행동의 연결원칙'입니다. 여기서 다양한 상황이라는 것은 사회공간의 하위공간인 '장(champ)'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장이란 기존 행위자들간의 관계를 변형하거나 유지하려는 갈등이 일어나는 힘의 '상징적 투쟁' 공간을 말합니다. 답변이 마음이 드셨나요? - 네이버의 질문과 답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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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 프랑스 남부 딩겐에서 태어났다.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철학교수 자격을 취득하여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958년 알제리 전쟁에 징집되었으며, 전후에는 알지에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하였다. 그 뒤 파리대학에서 레이몽 아롱의 조교생활을 했고, 릴대학 강사를 거쳐 1964년 30대 초반에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교수이자 연구주임으로 취임한 뒤 교육문화사회센터(1969년에 유럽사회학센터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름)를 창설해 소장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를 추진했다. 1975년 학술연구 잡지인 [사회과학연구학보]를 창간, 편집장으로 재직하면서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예술, 문학, 민족, 언어, 취향, 스포츠에 이르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1981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강좌교수에 임명되었다. 2000년 9월 서울에서 열린 '2000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도 한 부르디외는, 2002년 세상을 떠났다. - 해외저자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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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인간보다 구조가 더 우선이라고 하는 예가 여기 교재 106페이지와 107페이지에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106페이지에 보면, 지하철에서 냄새가 나는 아저씨 옆에 앉았을 때는 내릴 때까지는 그 냄새를 맡아야 한다고 했고, 이런 것이 구조적인 문제인데 말이다.

◈ 하필이면 왜 여기서 감자탕 식당을 하세요?

그리고 107페이지에 보면, 식당을 하는데 길 건너편에 같은 업종이 들어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긴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찾아서 "당신은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저와 같은 업종인 감자탕을 개업을 합니까?"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저도 다른 곳에서 하다가 여기로 밀려서 왔어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데 말이다.

그러니 '구조'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밀려서 다른 사람을 또 밀게 되는 것인데, 그냥 있을 수는 없고, 자기도 밀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민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사회학이나 법학에서는 인간의 이 모든 사회를 물리적으로 계산하는데, 즉 "저쪽에서 얼마나 미는가?" 라고 말이다.

그것은 경제도 마찬가지인데, 주식이 얼마나 떨어지면 그 여유자금이 부동산으로 얼마나 몰려서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성형외과나 패션업계에는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 그런 것까지도 물리적으로 계산을 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만 밀리게 되는데, 길 건너에서 감자탕을 개업하게 되면 기존의 감자탕 가게는 밀리게 되는 경우가 생기듯이 말이다.

◈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 !!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인간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고 쉬게 대면 상대방은 저만치 앞서가게 되는데, 자기는 그만 뒤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나게 뛰어서 겨우 따라붙으면, 그만 자기 심장은 터질 것만 같이 헥헥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다는 것이 적당한 것이 아니라 버틴다는 것이 적당한 것이 오늘날 사회라는 것이다. 그냥 버틴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구조와 담판을 짓고 싶은데, 그런데 문제는 자기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구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에 붙어있는지 말이다. 이것은 꼭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과도 닮아있는데, 즉 분명히 계시는데 어디에 계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교제하시고, 동행하신다고 하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함께 하시는 분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기존의 방식대로 눈에 띄는 사람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감자탕 가게를 하고 있는데 길 건너에서 누군가가 다시 감자탕 가게를 열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저는 감자탕에 감자가 들어있어서 그렇게 부른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돼지의 척추 부위를 감자뼈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만든다고 해서 감자탕이라고 한다는데 말이다.

아무튼 자기가 하고 있는데도 길 건너서 감자탕 식당을 열었다고 하면, 그리고 그 사람도 다른 곳에서 하다가 그만 밀려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그 다른 곳이 가게 따지려고 한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구조가 실체가 없음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 그런 객기를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구조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실체가 없는 것에 의해서 실체가 어떻게 되고 있다는 말인가? 그 실체가 곧 '나' 인데, 그리고 '너'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체가 통제를 받고 있고 지시와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참으로 이상한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학이나 법학이나 철학이 그만 신비주의가 되고 마는데, 이런 신비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꾸만 사람을 갈구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 그게 정신적인 문제이니 말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려고 하니, 그것은 마치 도깨비를 상대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자체가 되지 않으니까, 그만 보이는 인간을 갈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가 바로 국무총리의 경우인데, 후보로 갔다고 하면 떨어지고, 또 갔다하면 떨어진다는 것이다. 후보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로서 그렇게 되는데, 나름대로의 구조를 유발하는 것 같은데서 적당한 사람을 뽑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가서 "당신이 국무총리를 좀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 구조를 탓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국무총리 후보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실체를 말이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의 경우에, 자기들을 그렇게 힘들게 하면 김일성이나 김정은에게 대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 장군님 만세!"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북한체제는 보이는 인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귀신이 통치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탓을 하려고 하면 죽은 귀신에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나 나나 김일성 수령님의 은덕으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서 생존경쟁이 이렇게 치열한 이 지구상에서 그나마 버티고 있으니, 굳이 따지려고 한다면 그 귀신에게 가서 하라"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김정은이나 모두가 다 죽은 김일성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 저 목사를 누가 소개했어?

목사가 교회에서 아무리 개판을 쳐도 교인들이 함부로 따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결국 예수님에게 따지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천국에 가지 못하니, 그러니 미우나 고우나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말도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주의 종으로, 주님이 세웠으니 주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괜히 나서서 건드렸다가는 자기만 깨지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유행했던 말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의 종을 건드리면 교통사고가 나던지 해서 박살이 난다" 라고 하는 이야기가 유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사를 건드리는 대신 그 목사를 소개한 집사에게 시비를 거는데, "저 목사를 왜 소개했어?" 라고 말이다(ㅋㅋ).

어제 오후에 어떤 장로님을 만나서 3시간 동안이나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를 겨우 내보내놓고는 그 목사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자체를 본격적으로 치리하는 내용을 말이다. 대구 MBC 방송국 근처에 있는 교회인데, 소위 대형교회라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구조를 건드리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시비를 거는고 하니,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자기 자신이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구조의 일부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구조는 자기 바깥에 따로 독립이 되어있고, 자기만이 구조에서 벗어나서 선택권을 쥔다고 하는, 그렇게 자기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버티고 있다는 말이다. 바보처럼 말이다.

"다른 곳에서 감자탕을 하다가 밀려서 여기에 왔습니다" 라고 할 때, "그러면 새로 인테리어서 해서 들어오면 내가 밀리니, 내가 떠나야지" 라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떠난다고, 그렇게 남들에게 허풍을 떤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는 떠날 마음이 없는데 밀려서 떠나면서 말이다.

그렇게 밀려서 떠나면 마음을 겸손하게 가져야 하는데,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나는 이 세상의 종이다" 라고 하면서 마음을 낮추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 세상은 악해도 나는 건전하게 버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버틸 것을 버텨야지, 우리는 그런 것을 버티지 말자는 것이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끝내도 되지 싶은데, 즉 "이 세상 일에 대해서 버티지 말자" 라는 것이다. 그래도 버틴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을 챙기겠다는 것인데, 하지만 버티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지하철에 뛰어내린 배창호 감독의 꼴이 나고 마는데, 현실을 버티고 버티면 결국에는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 자살은, 장렬한 최후의 자기 선택 !!

그러니 자살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버티는 장렬한 자기 선택인데, 즉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가치를 놓지 못하는 말이다. 즉 "이 더러운 세상아, 이제는 작별이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자기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더러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를 누가 했는가? 자기가 했는데, 그런데 모든 탓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는 고상을 떨면서 그만 빠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하면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는 거기서 빠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거기에 일조를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비겁하게 구원은 받으려고 하는데, 그냥 간단하게 "제가 원인 제공자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주일 오후에 잘린 장로님과 3시간이나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그 장로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렇게 단순한 문제를 가지고, 성경내용이 이렇게 단순한데,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동안 교회놀이를 한다고 말이다.

대형교회에서 교회놀이를 하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르는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를 주목할 때, 완전히 자기는 난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에 자주 오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토사구팽' 이라고, 사냥을 할 때는 실컷 이용을 하다가 나중에 끝나고 나면 그 사냥개마저도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쓸모가 없을 때는 잘라버리는 것이 구조인데, 자기도 과거에 그렇게 했었다는 것이다.

◈ 가난은 구조적인 문제 !!

"왜 가난한가?" 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잠언서에서는 구조로 다 나오는데, 즉 "구조적으로 가난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어디와 비교해서 말인가? 에덴동산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잠언서의 내용은 반드시 그 이전에 비교대상이 있는데, 그게 에덴동산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에덴동산이라고 하면 그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그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돌아가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주님이 잠시 맛보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에 나오는데, 우리는 에덴동산은 이미 끝난 것으로 아는데, 하지만 주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맛보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잠시 에덴동산을 !!

에덴이 그립고 보고 싶다고 하면, 그 에덴은 바로 홍해 가운데서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홍해를 건널 때는 서로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다. 지금 바닷물이 양쪽에서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그런데 그 물을 댐으로 어떻게 막아놓았는가? 건너가려고 하면 흐르는 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그러니 우리의 상식은 무엇인고 하니, 에덴이후에 나온 잘못된 사고방식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물이 흐른다고 하면 그것을 막아야 흐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가 보기에 그것이 진리인 것 같은데, 그래서 수력발전소가 세워지고 한다는 것이다. 댐을 만들어서 물을 가두어두어야 하는데, 그런 댐이 없으면 수력발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을 가두어서 그 물을 아래도 흘려가면서 터빈을 돌리고 해서 전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 실효성이 과연 진리인가?

그렇게 실효성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 진리는 어떤 진리인고 하니, 에덴동산 이후에 인간들끼리만 통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통하겠는가? "주님,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맞지요?" 라고 하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니가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겠는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진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내용은 정말 간단한데,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면 머리가 아무리 비상해도, 설령 수능을 만점 먹었다고 해도, 그것은 빵점이라는 것이다. 청문회를 통과해서 국무총리가 되던 말던 간에 빵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빵점짜리 인간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예 이마에 달고 다닌다는 것이다. '빵점' 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인가? 이마에 '만점' 이라고 달고 있는데, 이왕이면 만점자리를 좋아해야지 빵점짜리 인간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만점짜리를 좋아하지 않는데,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디 우리 족쇄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느냐는 것인데, 마치 조폭과도 같다는 것이다. 배신을 하면 조져버린다는 말이다.

◈ 교회가 곧 지옥의 축소판 !!

그러한 조폭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인데, 그래서 교회에서 복음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절에서 더 좋아하는데, 중들이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직분을 반납하라고 하면서 치리를 해서 그만 쫓아내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곧 지옥의 축소판이라는 말이다.

에덴동산에 이왕 가지 못하는 것, 거기에 가까이 간 축소판을 인위적으로 구조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잠언서에 의하면, 이 세상은 반드시 가난한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전에 제가 '얼룩' 이라고 했는데,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물론 우리교회에서는 어렵다고 해도 별로 어려운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해서 말이다(ㅋㅋ).

◈ 예수님 자신이 곧 장애물 !!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곧 장애물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 장애물이 창자국과 못자국으로 이어졌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를 죄인으로서 수용을 해야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수용해서 그 죄와 자기가 싸워야 하는데, 그러니 얼마나 모순이냐는 것이다. 예수님 자체 내에서 수용하고 또한 싸워야하니 말이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상처도 없이 구원받은 사람은 없어 !!

예수님 본인이 원하지 않는 죄를 수용해놓고는, 또한 그 죄와 의로운 본인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이기셨는데, 하지만 그 죄가 있음으로 인해서 예수님 신체에 얼룩이, 즉 상처가 생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상처가 없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사도바울도 자기가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다는 것이다.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러면 그 상처가 무엇인가? 주님의 상처는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이기 위해서 받은 상처라고 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하는 상처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상처는 우리가 직접 내면 안 되고, 주님의 상처를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주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에 대해서 "주님, 그것은 제가 받아야하는 상처입니다" 라고 하면서 가지고 와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야하는 사람은 당연히 우리 자신인데,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것을 받습니까? 정말이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마워서 미치게 되면, 따로 자기가 살고자 하는 자기 삶의 터전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도 충분히 밤낮으로 쉼을 얻는다는 말이다.

◈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구나 !!

그래서 자기가 요리집에 취직을 한다거나 교사로서 취직이 된다고 하면, 그것이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자리인가보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살 자리가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한 직장에서 퇴직할 때까지 30년 이상 있다고 하는 것은 보통 인내가 아닌데, 물론 연금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잘 알지만(ㅋㅋ), 아무튼 존경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존경스러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죽으려고 하는데 죽지 못해서 버티는 것과, 그저 살아야겠다고 하면서 버티는 것은 좀 다르다는 말이다. "젊은 후배들을 생각해서 이 몸을 바쳐야지" 라고 하다가 결국 바치지도 못하고 30년을 버틴 것과, "이것을 이용해서 어떻게 월급을 받을까?" 라고 하면서 30년을 버티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어떻게 하든 간에 버텼다고 하는 것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살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사는 것인데, 즉 "니가 살았느냐? - 예, 살았습니다. - 그렇다고 해서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어서 빨리 죽어라. 잘 알겠지? - 예, 알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삶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가져다 바치라고 살게 하신다는 말이다.

◈ 에덴동산과 사회적 여건 !!

그러니 여기에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에덴동산에 돌아갈 길은 막혔다는 사실인데, 그러면 우리의 운명은 과연 결정이 났느냐는 문제가 남는데 말이다. 에덴동산은 자연에 속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러한데, 자연의 반대말을 인공, 혹은 인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저는 그것을 '사회적 여건' 이라고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지금 이 여기서는 '자연적 여건'의 반대말로서 사용이 되는데, 방금 제가 이 자연적 여건에는 무엇이 포함된다고 했는가? 더 쉽게 말해서 천국은 자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자연은 글자 그대로는 자연(自然), 즉 '스스로 있다' 라는 것이지만, 하지만 성경에서는 없는 것에서 누가 만들어낸 것인데,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데, 그런 자연적 여건에 얼룩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 여건이 말이다.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최초의 도시가 말이다. 그 도시는 가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라고 만들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어야 물과 불로서 심판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창 4: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 사회적 여건을 넘어서서 !!

그러니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여건을 넘어서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사회적 여건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순수한 자연적 여건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 그 관계를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탈출, 혹은 구원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서, 애굽에 있어서 이 애굽은 도시국가인데, 물론 애굽을 도시국가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아무튼 거대한 국가인 제국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또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서, 즉 또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서 탈출을 했는가? 그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는고 하니, 모세가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가졌던 생각인데, 우리나라의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처럼 말이다.

그들은 테러를 통해서라도 자기 조국에 대한 애증을 표시하는데, 자기 한 몸을 바쳐서라도 국가를 살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테러라고 하면 광복회와 같은 단체에서 또 싫어하지 싶은데, 아무튼 "우리는 이 땅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어야 하는 사명을 뛰고 태어났다. 그러니 지금 기로에 선 조국을 위해서 우리의 한 몸을 바치는 것이 이 나라에 태어난 자로서의 태어난 당연한 일이다" 라는 것이다. 지금도 그 손바닥 도장을 자기 차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그냥 한국인도 아니고 '대한국인' 이라고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세였는데, 압제를 받는 구조 속에서 그것을 다시 회복하려고 하면, 압제를 받는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권력을 위해서 모세는 은밀하게 활동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영화에도 나오는데, 제가 얼마 전에 평을 해서 올렸는데 말이다. 거기에 보면 모세가 비밀 조직을 만들어서 바로 왕의 정권을 뒤엎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얼룩은, 얼룩으로 지울 수 없어 !!

그렇다면 그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추인을 해주셨는가? 거절을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적 여건 자체가 얼룩인데, 그 얼룩을 똑같은 질의 얼룩으로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왔을 때 제시한 것이 무엇인가? "나는 여호와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즉 약속을 제시하셨다는 것이다. 즉 "모세야, 니가 약속을 잊었구나" 라는 것이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무슨 말인고 하니, 애굽나라에 7년 대흉년과 대기근에 들었을 때, 그 애굽나라를 살리는 자가 누구였는가? 요셉이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앞장세워서 전달하신 것이 무엇인가? 사회적인 결속력이었는가? 아니면 난데없는 우발적인 언약의 성취였는가? 그것은 바로 야곱언약의 성취였고, 야곱언약은 이삭언약의 성취였고, 그것은 또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였다는 것이다.

◈ 심히 좋았더라 !!

축복과 저주라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에 보면 무엇으로 표현되는고 하니, 자연적 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공중에 새가 번창하는 것도 복이고, 또한 물 속에서 물고기가 번창하는 것도 역시 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다스리고 정복하고 번창하는 것도 복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자연적 여건에 의해서 자연적 여건이 마저 채워지게 되는데, 그렇게 채워지는 모습을 보고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고, 그 날을 특정한 시간으로 정해놓은 것이 '안식일'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주님의 세계와 인간세계의 중간에서, 인간세계에 저촉을 받지 않는 독특한 시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이 그런 개념이라는 말이다.

(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그리고 그 안식일을 기념하는 그 제물에 맞추어서, 그 이후에 나오는 제물은 모두가 안식일을 기념하는 제물에 맞추어서 접근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에스겔서에 나오는 제물의 분류방법이라는 말이다. 제물을 설치하는 취지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가지고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면, 물론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궁금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름은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즉 이름보다는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이름이 추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 약속은 사회적 여건을 용납하지 않아 !!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사회적 여건을 용납하는가? 용납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연적인 여건은 사회적인 여건으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적 여건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서 마치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처럼 이 사회를 정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여리고 성 작전' 이라고 하는데, 자기 교회 주위의 아파트를 돌아다니면서 "이 아파트는 무너진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굳이 동신교회라고 하지 않겠는데, 아무튼 그런 교회들이 있다는 말이다(ㅋㅋ).

그 동네의 아파트를 지을 때 모두가 부실공사를 했는가? 물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무너지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돈다고 해서 무너지겠는가? 교회가 무슨 부동산에 대해서 그렇게 욕심을 내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했는데, 그 땅이 과연 그 땅이냐는 말이다.

◈ 온유한 자와 땅 !!

모든 성경의 개념은 인물중심으로 새롭게 재편성이 되어야하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그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려는 새로운 땅과 새로운 개념들이 뒤에 붙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팽이가 돌아가면 뒤에서 회오리가 생기듯이, 모든 것을 예수님 중심으로 재편성을 하고 재편집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땅은 무엇인가?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 라고 했는데, 그 온유한 자가 누구인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복을 받은 자이니 말이다. 최초로 복을 받은 자가 곧 예수님인데, 복을 부신 분도 복을 받은 자이고 말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렇게 복을 받은 자가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게 되면 무엇도 따라가게 되는가? 땅도 같이 동반해서 올라가는데, 그렇다면 그 땅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것이다. 무엇을 아니까 말이다. 그래서 위를 쳐다보라는 것인데, 하지만 위를 쳐다보려고 하면 자연적 여건의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사회적 여건의 안목에서 그치게 되면 위를 쳐다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여건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자연적 여건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죄를 지은 아담이 대체물로서 만든 것인데,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자연을 정복하라고 하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연은 이미 저주를 받아서 어떻다는 말인가? 저주가 여기 저기에서 마구 솟아오르는, 그래서 가는 곳마다 저주라는 말이다.

◈ 사방을 둘러봐라. 모두가 적, 이제 심판이다 !!

스가랴서에 보면 여러 가지 환상이 나오는데, 7가지인가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환상은 하나로 요약되는데, 즉 "니가 사방을 둘러봐라. 둘러봐도 적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가 가서 동서남북으로 둘러보는데, 4마리의 말이 나와서 끝까지 간다는 말이다. 측량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 왜 측량을 하는가? 심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 천사a : 주여, 어디까지 가면 됩니까?
* 주 님 : 너는 동쪽 끝까지 가봐라.
* 천사b : 저는 어디까지 가면 됩니까?
* 주 님 : 너는 서쪽 끝까지 가봐라.
* 천사c : 저는 어디까지 가면 됩니까?
* 주 님 : 너는 남쪽 끝까지 가봐라.
* 천사d : 저는 어디까지 가면 됩니까?
* 주 님 : 너는 북쪽 끝까지 가봐라.

그렇게 4마리의 말이 동서남북으로 끝까지 가는데, 그게 모두 측량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그렇게 심판이 미치는 범주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어제 낮 시간에 거기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왜 나왔다고 했는가? 먼지를 털 듯이 그렇게 털어 낸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여기서 왜 빌붙어?" 라고 하면서 털어 내면, 그것을 누가 좋다고 하면서 주워먹는고 하니, 기존의 멸망을 당해야하는 짐승들이 "이런, 내 친구들이 오는구나" 라고 하면서 받아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방법이 바로 마귀에 속해있는 것을 출애굽을 시킨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리바다를 건너는 것이 나오는데, 왜 그런 출애굽의 원리를 적용시키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언약의 반복되는 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반복적 원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야곱의 12지파에서 나왔는데, 야곱의 12지파에서 '천' 이라는 것이 완성이 되면 144,000이 된다는 것이다.

◈ 계속적인 언약의 반복 !!

출애굽을 반복시킨다는 것은 언약의 반복이고, 그렇게 언약이 반복되면서 야곱의 언약에 소속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즉 언약에 의해서 확정이 된 144,000명을 뽑아내는 장면인데, 그렇게 뽑아낼 때마다 일곱 인이 진전을 보인다는 것이다. 다섯 번 인에서 여섯 번 째 인으로, 넷째 나팔이 다섯 째 나팔이 되고 말이다. 그 말은 천사에 의해서 누구 하나가 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러니 바쁜데, 누구 하나를 건져내고, 그 자리에는 저주를 받은 자로 채우고 말이다.

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두 증인을 건져내고, 그러면 그 두 증인들을 핍박한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렇게 핍박을 했다고 해서 천사를 보내서 그들을 때린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권사님을 건지면, 복음을 안다고 권사님을 미워했던 자들을 야단을 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복과 저주는 하나의 세트가 되어서, 복을 받은 만큼 그 자리에는 저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 주님은, 성도들을 미끼로 사용해서 !!

예를 들어서, 어디에 놀러가서 자리를 펴놓고 노는데, "전에는 여기에 개미가 많았는데 개미들이 다 어디로 갔지?" 라고 하면서 잘 놀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시간이 되어서 자리를 접어서 떠나려고 하는데, 그 접었던 자리 밑에 보니 개미들이 바글바글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군가가 저주를 받으려고 하면 거기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성도를 만들어내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다 쓸모가 있는데, 성도가 아닌 자들은 반드시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그들을 약올리기 위해서 성도가 있다는 말이다.

왜 사탕을 빨다가 땅에 놓게 되면 보이지 않던 개미들이 달려드는데, 그러니 그런 개미들에게 저주를 하려고 하면, 먼저 사탕을 사서 입에서 빨다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사탕을 빼내고 "그러면 그렇지. 개미들이 가는 어디로 간단 말인가? 본성이 모두 드러나게 되어있어" 라고 하면서, 그 개미들을 내리치신다는 것이다. 물론 언약에서는 개미를 땅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 참으로 스릴이 넘치는 성도의 위상 !!

그 두 개를 합쳐서 언약이라고 하는데, 언약이 참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절차와 과정은 어떠한가? 성도는 그런 언약적 구조 속에 포함이 되어있으니, 성도가 된 자들은 주님이 내민 미끼로 사용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스릴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적들과 싸우는데 있어서, 성도들을 제일 앞자리에 내세우면서 마스크를 하게 하고 그리고 꼼짝도 못하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마구 공격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은 것은 분명히 맞지만, 하지만 불화살이 마구 자기 옆으로 지나가고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고 무시무시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최근에 나온 '매드맥스' 라는 영화에 보면 나오는데, 주인공이 남의 전쟁에 껴들어서 자기가 미끼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매달려서 아슬아슬하게 가는 장면이 초반에 나오는데, 무려 30분 동안이나 계속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주인공은 아무런 소리도 못하는데, 그게 바로 성도의 위상이라는 것이다.

◈ 성령에 묶인 채로 막 사는 성도 !!

일은 주님이 다 벌리셨는데, 성도는 아무런 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묶인 채로 살아가는데, 그게 바로 막 사는 것으로서, 성령에 묶인 채로 말이다. 적들은 묶여있다고 얕보고는 마구 공격하고 말이다. 이게 무슨 팔자인지, 변명도 허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데, 돌은 마구 날아오고, 하지만 자기는 주님과 연결된 끈이 있어서 복음만 전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 돌을 주님에게 던져야 하는데, 그런데 사회적 구조가 어떠한고 하니까, 사람들은 자연적 여건을 만든 실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그 화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돌에 맞아죽었는데, 그렇게 죽고 나니까 주님께서 회수를 하신다는 것이다. "수고했다. 아벨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마치 아벨과 같이 다루신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아벨이 죽고 난 뒤에 거두어서 영원히 살게 하시는 주님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 성도는, 상처와 상처 사이에서 !!

그러니 직장이란 것이 무엇인가? 오늘도 우리는 두 개의 날선 대립된 구조의 틈바구니에 서게 되는데, 그게 성도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고 있는 이상, 거기에서 피할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는 이 사회가 남기고 유발시킨 상처, 그리고 주님에 의해서 의도된 상처, 아무튼 간에 상처로서 우리는 껴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나는 십자가 안에 있는데, 이 세상은 나를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로 간주하고, 그리고 주님은 산 자로 간주하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은 나를 죽이고, 주님은 나를 죽이시고 살리신다" 라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니 우리가 꿈꾸던, 자기가 백설공주가 되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인데, 우리는 세상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고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현실을 꿈꾸면서 자라왔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이 저주를 받기 위한 미끼로, 즉 낚시의 바늘에 걸려있는 지렁이로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그것이 섭섭함이 아니라 횡재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를 독자적이지 않게 하신 것에 대해서 찬양합니다. 나를 홀로 두지 않은 것에 대해서 찬양합니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홀로 두게 되면 우리는 저쪽 구조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기에 말이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주님께서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현재 이 세상의 왕권을 쥐고 있는 마귀에게 팔려갈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베드로가 주님의 기도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그와 똑같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그것을 느끼게 하는 것은 성령의 몫인데,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전쟁통에서 미끼로서 사용된 소년 다윗 !!

자기가 원하지 않는 전쟁통에서 주님의 미끼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러한 미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그냥 다윗이 아니라 소년 다윗이라는 것이다. 아마 다시 골리앗과 붙을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윗은 고개를 흔들었지 싶은데, 그때는 이상하게(?) 이겼지만, 하지만 다음에는 골리앗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3중 구조로 된 특수투구를 머리에 쓰고 나오지 싶은데 말이다.

다윗이 어떻게 이겼는가? 우연인데, 즉 사회적 여건에서 어떤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실수를 했는데, 자기가 저 애굽 사람을 시범적으로 때려줌으로 말미암아서, 자기편에 서있는 동족들이 한 사람씩 같이 그런 일을 함으로서, 애굽을 물리치고 자기들의 권한을 회복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방식, 그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 !!

만약에 그런 방식이 통용된다고 하면 그것은 마귀가 지배하는 현장인데, 용을 쓰고 애를 써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구원은 달음박질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인간이라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 바로 그것으로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말이다.

(롬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긍휼하심이 빛을 발하게 되는데, 즉 아무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가? 로마서 5장에서 '죄의 왕노릇' 이라고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그러한 죄 속에서 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죄 속에서 의가 나오기에 !!

무슨 말인가? 죄에서 빠져 나와서 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 깊숙이 있을 때, 마치 동방박사들이 보았던 별처럼, 그렇게 성도는 죄의 깊숙한 곳에서 의의 별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가운데서 동방 박사들의 관심사가 무엇이겠는가?

자기들의 잠자리가 얼마나 편하고, 또한 맛집은 어디에 있고, 그런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별만 따라서, 그 별만을 찾아서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별을 찾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별과 동일한 운명을 겪게 되는데, 즉 헤롯에 의해서 표적이 되고, 살해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죽어도 할말이 없지만 말이다.

◈ '다른 길'로 가라 !!

그런데 천사가 와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다른 길로 가라" 라고 하는데, 표현이 참으로 의미가 있는데, '다른 길' 이라는 것이다. 모든 길은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데, 따라서 성도가 가는 길은 어떠한가? 자기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모두 아는 길이 아니라, 샛길을 마련하셔서 주님은 그것을 '좁은 길' 이라는 명칭이 붙여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게 영생의 길이고 말이다.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 2: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그러니 막살면 되는데, 샛길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막살아도 샛길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작살난 인생이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자기가 좁은 길로 여긴다고 하면, 그것은 익히 아는 길이기 때문에, 주님이 제시하신 좁은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보고 "니가 원하지 않는 길로 띠 띠우고 간다" 라고 하셨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말이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나는 막 살아요 ♪

그러니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라는 말도 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은근히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서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의 업무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것이 꽤 괜찮은 찬송가인데, 이렇게 따지고 보니 또 별로라는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나는 막 살아요 ♬" 라고 찬송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맡기는 것이지 다른 길을 또 찾으려고 나서게 되면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인데, 그렇게 오바하지 말라는 것이다.

◈ 가인의 후예들에게 사회적 여건을 허락하심으로 !!

주님은 가인의 후예들에게 사회적 여건을 허락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사회적 여건의 위세는, 그 어떤 인간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권한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적 여건이 이미 사회적 여건으로 바뀌었는데, 모든 눈에 보이는 자연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아는 하나의 재료로서 활용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적 여건이 모두 사라지고 사회적 여건이 되는데, 그러면 거기서 '나' 라는 것을 자연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가? 아니면 사회적 여건을 통해서 '나' 라는 정체성이 형성이 되는가? 그러니 "내가 누구이지?" 라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그 사회가 나를 어떻게 보지?" 라는 것이 근거가 되어서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는 말이다.

◈ 요셉의 경우에 !!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사회가 결정하는데, 그런 예가 바로 요셉이라는 것이다. 요셉을 꿈을 꾸는데 해와 달과 열 한 개의 별들이 다 자기에게 절을 하는데, 물론 그런 해와 달과 별들은 다 자연적인 형상이지만, 하지만 절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에서나 절을 하는 것이지, 자연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창 37: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런데 요셉의 위치도 역시 사회적 여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는데, 그런데 요셉이 꿈을 꾸고 나서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나' 라는 자연적 조건, 즉 자기 신체라는 조건에다가 무엇이 추가된 것인가? 자기는 사람들에게 절을 받는 높은 자리가 앉을 것이라고 하는 사회적 조건이 이미 가미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이 자기 꿈과 자기 일생을 확인시키는 것을 늘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상하게도 자기는 사회적 여건이 낮은 자리가 아니 높은 자리인데, 그런데 자꾸만 낮은 자리로 간다는 것이다. 똑같이 사회적 의미가, 그렇게 구조적 의미가 갖추어진 상태에서 자기는 꿈대로 높은 자리를 기대했는데, 그런데 자꾸만 낮은 자리로 가게 될 때, 요셉은 그것을 '환란'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환란' 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 이미 기존의 사회적 의미체제가 갖추어진 상태에서, 쉽게 말해서 "아이쿠, 요즘 정말 속상해서 못살겠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사회적 여건이라고 고상하게 말했지만, 뭔가를 잔뜩 기대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밥을 먹지 못하는가? 아니면 손톱이 자라지 않는가? 그게 아니라, 다 자라게 해주셔도 요셉은 속상하다는 것이다.

◈ 인간은, 사회적 여건 안에서 움직이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 !!

따라서 우리가 "나는 이 정도가 되어야해" 라고 하고, 또 감정적으로 "이 정도는 되어야 기분이 좋아" 라는 모든 것들이, 이미 사회적 여건 안에서 움직이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즉 "혼자서 울고불고, 혼자서 TV를 보고, 혼자서 책을 보고" 라는 것인데, 그런 노래를 시스터가 불렀는데 말이다.

그러면 그 '혼자' 라는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가? 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나왔다는 것이다. '외롭다' 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뜻인가? 누군가가 자기를 위로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러분' 이라는 노래를 부른 윤복희를 찾아가라는 말이다(ㅋㅋ).

그 노래의 가사처럼 "여러분이 나를 위로할 수 있다" 라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절대로 스스로 이 사회를 벗어날 용의가 없다" 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 하는고 하니, "출애굽을 신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는 것이다.

◈ 우리의 구원은, 사회적 여건에서의 구원 !!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사회적 여건이 조성된 가운데 주어진 하나의 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지,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우리 머리 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아이디어는 말이다. 따라서 구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머리 속에는 없는데, 그래서 주님께서 없는데서 창조하시는데,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사회적 의미인데, 그러니 진정은 구원은 무엇인가? "아니, 이런 구원도 다 있구나" 라고 하면서 놀아서 자빠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사회적 여건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구원인데, 즉 평소의 자기의 자존심과 가치를 유지하면서 멋들어지게 사는 것인데, 사회적으로 잘사는 말이다.

◈ 의사(義士) 모세 !!

그러니 그런 의미로부터 탈출해야 하는데, 그래서 모세가 안중근 의사는 될지 몰라도, 언약의 백성은 건드릴 자격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앞장세우시고 모세에게 무엇을 알려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게 되면, 다른 모든 이름들은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연적 여건에서 이름이 출몰하게 되면, 사회적 여건의 그 모든 이름들은 그 빛을 잃는다는 것이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그래서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단독적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중간에 어떤 특정 이름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그게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은 하나의 확정된 공식인데,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대체하는 이름이 그 중간에 들어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이름은 그 이름을 위한 하나의 미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사는 인생, 그것은 단독적 인생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기 인생이라고 고집을 부리면 반칙인데,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이름은 사라져야하는 이름으로, 그렇게 주의 이름에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큰 그림으로 보게 되면 결국 사회적 여건에서의 탈출인데,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을 달고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름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이 불러주는 것인데, 그러면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름을 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영광스러운 상처 !!

그것은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두 사람이 되니 사회가 되는 셈인데, 그렇게 사회에는 없는 그분이 이 사회 속에 들어왔으니, 결국 예수님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본인의 구원과 자기 백성의 구원을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아픔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냥 "너, 너, 너, 이리 나와!" 라고 하면, 우리는 피부의 손상도 전혀 없이 나올 수가 있는데, 그런데 왜 이 세상에서 주님은 창자국과 못자국이 있는 채로 나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만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이전에 놓여있는 이 사회의 여건 자체가 어떠하다는 말인가? 너무나 대단히 저주스럽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 자체가 곧 죄악의 산물인데, 그러니 구원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 그런 상처가 있다고 해서 굳이 성형외과에 가서 레이저로 지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에게 그런 상처가 있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언약의 무늬 !!

어느 강의에선가 제가 '언약의 무늬' 라고 표현을 했는데, 광주가 아니면 울산강의이지 싶은데 말이다. 그 무늬라는 말을 하면서 나이테를 생각했는데, 겹겹이 쌓인 그 나이테가 곧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무는 나이테의 집합인데, 즉 나무 안에 나이테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나이테가 모이면 곧 나무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시켜보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없고 사건의 나이테만 있다는 것이다. 즉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생긴 그 증거물들의 누적이라는 말이다. 노인들의 이마에 보면 주름살이 있는데, 그런데 요즘 노인들은 그런 주름살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젊었을 때는 있다가, 나이가 들면 점점 없어지는데, 물론 목선은 숨길 수 없지만 말이다(ㅋㅋ).

◈ 아버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제가 생각하기에는 노인네들이 잘 먹어서 그런 것 같은데, 젊은 사람들은 고생을 많이 하고 말이다. 그 이마의 주름살이 바로 연륜(年輪)인데, 즉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라는 것의 증거인데, 그러면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나' 라는 것이 무엇인가? '나' 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륜이 압축된 것이 곧 '나' 라는 것이다. 겹겹이 쌓여있는데, 그래서 뜯어보면 하나 하나가 다 영화 '국제시장' 인데 말이다.

물론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지 싶은데 말이다. "아버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저는 정말 힘들었거든예" 라고 하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말이다. 바다가 보이는 산 동네의 자기 집 안방에 앉아서 울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저쪽 방에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고, 여기 안방에서는 자기 혼자 과거를 회상하면서 말이다.

◈ 그래, 내가 다 안다 !!

그렇게 겹겹이 쌓여있는데, 바로 그러한 말을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이다. 즉 "충성된 종아, 니가 고생을 많이 했지? 그러니 하늘나라에서 많이 먹어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사건을 주님께서 일으켰기에 말이다.

그런 사건으로 인해서 팔다리가 마치 두 증인과 같이 묶인 우리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즉 "니희들도 이 세상에서 행복해야하지 않는가?" 라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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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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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