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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6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자유게시판레위기

201506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

이름 : 한윤범(IP:14.39.134.87)

201506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

(강의:이근호 목사)

신학교에서 할 수 없는 이유가, 가르치는 교수가 여기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는 것. 포이에르바흐에 대해서 반박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포이에르바흐 봤잖아요. 자기 실력까지만 가르쳐요. 눈에 보이는 그것까지만 이야기해요.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데 포이에르바흐가 성육신을 언급해요. [신이 인간으로 격하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으로 고양한다는 것의 전제일 뿐이다. 신이 인간되기 전에 즉 자신을 인간으로 나타내기 전에 인간이 이미 신 안에 있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흐는 그게 왜 감사할 일이냐고 되묻는 겁니다. 뭔가 네가 노림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 인간이 아니라 바퀴벌레 됐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바퀴벌레 된 것을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본인이 바퀴벌레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에게만 가능하죠. 분명히 바퀴벌레가 다가 아닐 거야. 바퀴벌레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다시 하나님 되실 거야. 그러면 내가 하나님 되는 방법은 이 바퀴벌레를 믿고 바퀴벌레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 그렇게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은근히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앞서 있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육신이 안 됐으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 갈 수 있을꼬. 못 가지. 그런데 고맙게도 말씀이 육신이 되서 가게 해주시니 세상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라고 말한다는 것은 은근히 신되고 싶어서 노렸다고 다그치는 거예요. 다그치면서 포이에르바흐가 더 얄미운 것은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고 그게 바로 종교의 이유가 그거야. 마음껏 해. 이렇게 나오는 게 더 미운 거예요. 실상을 이야기해놓고 너도 어쩔 수 없었지. 그래 이해해. 이게 더 밉다니까.

[신은 사랑이란 명제에 있어서 잠시 주어 자리를 놓긴 했지만 신이 자기의 신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신의 신성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술어인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맞지요. 하나님의 사람의 육신을 입은 것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지요. 우린 아닌가? 기존 교회에서 교리가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을 베푼 증거가 뭡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이 된 거잖아요.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십자가 졌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잖아요.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했다면, 포이에르바흐가 시비를 걸기를, 신은 사랑이라는 게 틀렸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이라는 주어에서 사랑이란 술어가 됐다면 그 사랑이란 술어를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랑이 신이라 말이 맞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학원에 얘들이 와서 “선생님, 훌륭해요?” 물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훌륭하다기보다도 실력이 좋아.” 제가 묻는 것은 훌륭하시냐는 겁니다. 학원에 와서 실력을 물어야지 훌륭하냐고 묻느냐고 하잖아요. 나는 수학 선생님이야. 그러면 수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있다고 학생에게 이야기하잖아요.

술어가 주어를 지배하게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신은 사랑이라고 말들 하지만 너희들 논리에 의하면 신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으니까 모든 종교는 똑같잖아요. 이게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입니다. 사랑이란 진리가 있는데 가는 길이 다르지만 올라가보면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리교, 장신, 기장 측, 전부 다 이 말에 동의하지요. 천주교와 대화해야 된다, 원불교와 대화해야 된다, 티벳 불교와 대화해야 된다, 부처와 대화해야 된다. 종교협의회 이런 것 만들고. 포이에르바흐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지요. 생각이 같으니까.

포이에르바흐는 더 따집니다. 사람 미치게 만들어요. [만일 신이 참으로 사랑한다면 신 자신이 사랑하는 것 같이 신을 사랑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없어야 된다.] 인간이 납득 못할 사랑을 신이 제시하게 되면 인간은, 악마다, 저리 가라고 할 거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납득이 되는 사랑을 신은 제시해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이 납득할 사랑을 제시하려면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랑에 의해서 신이 만들어져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사랑으로 신을 만든 게 맞잖아요. 맞으니까 믿잖아요. 납득이 되니까 믿잖아요. 믿는다는 말은, 신의 본성과 내 본성이 같네.

더 따져봅시다. 포이에르바흐는 사람 미치게 만들어요. [악마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랑을 한다. 맞지요.] 악마가 남을 위해 희생했습니까? 아니지요. 기독교 교리에 보면 악마는 자기만을 위해 있지요. 그렇다면 사랑은 두 종류가 발생됩니다. 악마가 자기를 위한 사랑도 사랑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희생한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의 두 종류가 발생되지요. 그러면 사랑은 과연 복수형이냐? 아니지요. 사랑은 하나뿐이어야 하는 겁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왔다. 사랑은 단수이다. 인간의 사랑은 구별되지 않는 근본적인 유한한 사랑이다. 따라서 성육신 사건이 있건 없건 인간이 자기를 초월한 애정을 바치는 모든 일을 사랑의 단일 의미에 합치된다. 따라서 진리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 다 담겨있다. 모든 종교가 다 인간을 위한 종교기 때문에.] 이 말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의미할 때 사랑이란 말 자체에 눈물 흘려요. 사랑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이에르바흐가 알기로는 기독교는 악마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 신자에게 왜 당신들은 당신과 하나님만 생각하고 악마의 입장은 생각 못합니까? 악마가 자기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잖아요. 그러면 사랑에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개의 사랑이 생겼지요. 인간들은 두 개의 사랑을 언급해야 되는데 악마의 사랑은 제쳐두고 하나의 사랑만 고집해서 그 사랑은 기대했다는 말은 결국은 의도적으로 뭘 거부했느냐 하면, 악마가 세운 세상을 거부했다는 것은 세상 전체를 보기를 겁내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그런 마음의 표현밖에 안 된다는 거죠.

방금 이야기한 포이에르바흐가 얼마 전에 있었던 재판 걸린 이석기의 논리가 뭡니까? 민주주의는 인간을 위해서 있지요. 북한 주민은 인간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지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민주주의가 있다면 어디까지 손을 뻗혀야 돼요? 북한의 주민들까지 민주주의에 포섭해야 되겠지요. 민주주의가 뭡니까? 하나만 남겨놓고 다 쳐내는 겁니까? 다른 소수의 의견도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에요? 소수 의견도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죠. 그런데 자기 뜻과 다르다고 해서 쳐내면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고 전체주의입니다.

남자와 남자끼리 사랑하고 여자와 여자끼리 사랑하는 걸 동성애라고 하지요. 현재는 민주주의 사회지요. 그러면 개인에게 사랑할 자유가 있지요. 그렇다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해서 둘이 결혼하겠다는데 왜 민주주의 사회가 반대합니까? 그게 전제주의 사회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민주주의 사회가 스스로 위반하느냐 이 말입니다.

인권문제에 대해서 서울시장이 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취소했어요. 왜 취소했는가? 인권선언서에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해야 된다는 게 포함된다면 남자끼리 결혼해도 주택보조금이 나가야 돼요. 가족증명서에 남자끼리 결혼해도 부부가 돼야 된다고. 박원순 시장은 차마 사인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옷 입고 얼마 전에 집회를 연 거예요.

지금 포이에르바흐는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사랑을 그들이 아예 단적으로, 악마 좋아할 사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악마가 자기 사랑하는 그 사랑을 왜 이쪽에서는 그걸 정당한 사랑으로 수용 안 하느냐. 악마 사랑은 아예 사랑이 아니라고 제쳐놓고 사랑을 단일 사랑으로 만들어버리면 인간은 자기 한계에서 초월할 수 없고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할 뿐이다.

그래놓고 악마 없다고 하면 앞뒤가 맞는데 분명히 뭐라고 합니까? 악마는 나쁘다고 하면 그게 무슨 일방적인 전체주의적 종교지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냐.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도 사탄을 사랑한다고 돼야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사탄을 없어야 되니까 천국만 있어야 되고, 지옥도 없어야 된다는 그런 종교를 용납하라는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입니다.

그 다음에 그 밑에 포이에르바흐의 성찬식, 세례식 봅시다. [첫째, 효력 없는 물로 세례를 하고 효력 없는 떡과 포도주로 의식을 행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모든 의식이 물다운가.] 이 말은 뭐냐 하면, 왜 물을 물로 보느냐. 기분 나쁘다 이 말입니다. 정말 물의 가치와 포도주의 가치가 따로 있는데 물이 있으니까 지 마음대로 가져다가 떡이 네 눈에는 떡으로 보이느냐? 떡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예수의 살이라고 안기면 사전에 떡에게 물어봤느냐 이 말입니다. 포도주를 물로 보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가 있느냐 하면, 떡과 포도주에 신성한 게 있다는 말을 아예 하지 말아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흐가 머리 좋지요. 지금 천주교에서 떡과 포도주에 신성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 순간에만. 신성이 그 순간에만 신성하면 안 되고 평소에 길바닥의 떡도 신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필이면 행사, 의식행할 때만 신성하면 원래 떡과 포도주의 가치를 모독하게 되고, 원래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하나님의 신성을 인간들이 갖고 논 셈이 된다 말이죠. 성찬식 할 때만 신성하다는 자체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 모순된다 이 말입니다.

[신성하게 보이려는 자체가 일반적인 물질에 대한 평범성을 부인하는 인간들의 속성에 대한 무뢰함이고 위선이다.] 반박해보세요. 반박됩니까?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 때 예수님이 물을 시시하게 봤습니까? 주님은 그 물이 포도주보다 못하다고 봤습니까? 그러면 하늘에서 비를 내리지 말든지. 신성한 물로 신성한 포도주를 만들었지요. 예수님 자신이 신성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물이 신성하지 않다면 물 먹는 우리는 신성하지 않겠네요. 그러면 이 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 없어요. 왜? 하나님이 더러운 걸 줬으니까. 이해하는지 분간이 안 되네. 이해되십니까?

지금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신성하게 만들었잖아요. 물도 신성하지요. 우리가 먹는 떡도 신성하잖아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그런데 신성한 물로 의식 행할 때 물을 물이라 하면 될 걸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왜 포도주보다 못한 것으로 저질로 만드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흐는. 천주교에서 하잖아요. 루터교도 그렇게 해요.

삼위일체 해봅시다. 삼위일체는 아주 가관입니다.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구별 짓기 위해서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고독은 사상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죠. 신성한 사람이 친구 많은 것 봤습니까? 친구들 세 명과 있으면 무리지어서 신성하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면 본인이 신성하지 않아요. 친구들과 빠이빠이해야 돼요.

유명한 스타들 친구가 없어요. 세시봉? 그 사람들 친구 아닙니다. 콘서트할 때만 하는 것이지. 송창식, 윤형주, 다 독자적으로 잘 났어. 다만 팬들 위해서 웃으면서 모이는 척하는 거예요. 아이유? 혼자 잘났어요. 모든 스타는 혼자 살아요. 그게 스타니까 그래요. 스타 앞에서 다른 스타 칭찬하면 미칩니다. 참을 수가 없어.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십니다. 죽은 김성수 목사, 설교 잘합니다. 이러면 화가 난다니까. 왜 날 비교하느냐 말이죠. 스타는 둘을 용납하지 않아요.

고독은 자족이며 자기만족입니다. 최후에 내가 될 때까지는 만족함이 없어요. 진정한 신성은. 이 욕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제2의, 제3의 인격인 신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은 일단 떼냐 돼. 신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들 노는 곳에 떼놔야 돼요. 떼놓기 위해서는 신은 고독해야 돼요. 어느 정도 고독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논리와 사상을 총 집결해도 풀어지지 않는 납득이 되지 않는 다른 능력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1은 3이고 3은 1이라는 숫자놀음, 그게 삼위일체입니다.

어떻게 3이 1이고 1이 3입니까. 3이 1된다면 이단이에요. 삼위일체 이론에 의하면. 1이 3되면 이단 돼요. 조심해야 돼요. 하나님은 3으로 계시고 하나이다. 된다, 하면 이단이에요. 양태론이 어떻고 해서 이단 된다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만든 사람은 말합니다. 이건 믿음의 대상이지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그걸 포이에르바흐는 노리는 겁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지. 이게 절대적으로 떼놓기 위한 수작이다.

세 번째 기도에 대해서. 기도는 아주 재미나게 이야기합니다. [기도는 예술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통을 귀로 기울이면서 그걸 대상화하고 대상화한 걸로 인하여 자신을 치유한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선생은 고통 가운데 가르치고 얘들이 선생이 가르친 걸 깨달을 선생님이 스스로 치유가 되죠. “난 너 때문에 산다.”

자가 치유 프로그램이 기도에요. 기도에는 고통이 재료로 들어갑니다. 수월하게 기도하면 기도한 것 같지 않아요. 미안해요. 그래서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도는 고통스러울수록 응답에 가까워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이걸 기도하는 사람은 예술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종교적 예술가다. 자신의 심정을 붙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허공으로 전달하면 자신의 고통을 일반적인 본질로 만들면서 그 짐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자연은 무정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되돌아온다. 남모르게 숨어서 자기에게로 무섭고 무거운 억압된 비밀을 자기에게 털어놓는다. 신이란 이런 탄식이 있는 곳에서 해소하는 배출구로 출현한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계와 같은 구성원처럼 간주된다.] 무엇을 도와줄꼬? 같은 회원이거든요.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사무엘을 누가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불렀지요. 사무엘이 잘 때 자기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적 없지요. 나중에 포이에르바흐에 대해서 평가할 때 지금 포이에르바흐는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 당시 교회가 성경을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왜 못 가르쳤는가? 성경에 대해서 몰라요. 성경을 문자적으로는 알아요. 성경 사건을 잘 풀이해줘요. 사무엘이 어떠니, 한나가 어떠니, 다윗이 어떠니, 창세기가 어떠니 하지만 성경의 복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포이에르바흐의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모르고 있는 그 당시 교회를 대변해주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 당시 교회는 기도를 가르쳤지요. 그리고 성만찬을 행사했습니다. 성육신을 가르쳤어요.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교리를 가르쳤어요. 짜 맞추는 식으로. 그런데 포이에르바흐라는 용감한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어요. 그 당시 교회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포이에르바흐가 이야기하는 것 보세요. 신은 우리와 구성원이란 말은 뭔 뜻입니까?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니까 한 거예요. 포이에르바흐가 들어보니까 구성원이네. 공동체 운동하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 관계없어요. 함께 있으니까 교인들이 좋아하니까 그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가정과 함께 하십니다. 이게 듣기 좋아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구성원은 자연을 이기는 기적을 행사하는 위력자라고 욕구는 일방적으로 믿고 싶어 한다.] 구성원인데 다른 구성원들은 변변치 못한 인간들이고 그 구성원 가운데 대단한 전지전능한 분이 계시니까 이참에 나의 억눌린 한을 구성원의 이름으로 성취할 것을 희망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 구성원이 자연의 운행까지 경영할 수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했잖아요. 그분이 구성원이라면 기도하면 듣는 거예요. 산더러 바다 빠지라면 빠지고,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할 수 없다고 하니까 그 말 믿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제한 없는 소망이 춤추고 있는 바로 그곳, 그곳이 인간 본인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기도하면서 자기로 인하여 즐겁고. 자아도취지요. 기도하는 본인이 흐뭇한 거예요. 그리고 자랑질하고. 너, 기도 안 했지. 난 기도했다. 자식들 잘 되는 것, 기도 덕분에 잘 된 것이다.

네 번째 봅시다. 하다보니 재밌네요. 불멸과 영생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이 있고 자꾸 죽어서 천당 가는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인간은 자기 불쾌함을 그냥 못 넘어가요. 반드시 빼내야 돼. 현실에서 불쾌함을 피안의 세계에서 해결하고자 불멸의 세계를 만든 겁니다.

[해소된 즐거움을 자기 쪽에서 귀환시킨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인간들이 신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실은 자기 육체에서 분열된 자기 혼을 중요시 여겨서 그렇다. 하나님 좋은 게 아니에요. 내 영혼이 예뻐서 하나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영혼을 왜 좋아하느냐 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잔존을 버릴 수 없다. 따라서 사체로 죽은 시체로 영혼과 결합시켜서 영원히 천국에서 자아라는 존재로 살고 싶어서 불멸의 세계를 만든 거라는 거죠. 아니라고?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해보란 겁니다.

만약에 포이에르바흐의 시대에 어떤 목사가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고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목사 당신이 교회에서 이런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 이것 믿고 교회 온 것 아니지요? 성경말씀 믿고 오셨지요?”라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 거예요. 목사가 일부러 어렵게 온 교인에게 이렇게 물어서 쫓아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미쳤어요, 쫓아내게. 다 돈인데 안 쫓아내지요. “여러분, 여러분 영혼 걱정되지요. 예수 믿으시면 주께서 친히 만든 부활의 세계가 있습니다.” 다 그렇게 하지 여러분들이 영혼 사랑해서 예수 믿지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 나가세요. 그래서 진짜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교회 안 되는데.

다섯 번째, 고난 받는 신에 대해서. 신을 존중해주기보다는 신을 더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의 발로로 고난 받는 그리스도 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보다 더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내가 만약에 더 힘들면 내가 교주되니까.

말이 먼저에요, 마차가 먼저에요? 말이 마차를 끌지요. 지금 하나님이 나를 끌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나를 끌고 가는 주님보다 더 고생하면 안 되지요. 예의에 어긋나잖아요. 따라서 주님은 나보다 분명히 더 고생했을 것이라고 해서 생긴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내가 인생의 힘든 고난을 스스로 그리스도 생각만 해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힘든 것을 언제 잊느냐 하면, 지금 힘든 것보다 난데없이 더 큰 고난이 왔을 때 지금 힘든 것은 게임도 안 되는구나. 이럴 때 위로가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위로가 된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내가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예수님이 나보다 더 고생했겠지.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았잖아. 나보다 더 고생한 분을 내 앞에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지금 스스로 자기의 고생담을 신념으로 마음 정돈해서 이겨낼 수 있도록 고난 받는 그리스도로 내 앞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언급했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살고 얻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도 좋단 말인가?] 내가 공짜로 살았는데 그만한 고난을 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지 얻어먹기만 하고 고생도 안 해. 이 염치없는 놈아. 자기가 자기에게 자책하는 거예요. 그만큼 은혜를 받았으면 고생하는 것도 감사해야지. 지금 고생한다고 하나님께 따지냐, 그게 믿음이야, 이 나쁜 놈아. 나는 나쁜 놈이야. 이런 고생은 앞으로 고생도 아니라고 이야기해야지. 감사해야지.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면서 마음을 조종하기 위한 그 환경 조성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이란 말이 우리 앞에 있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머리 좋지요.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감수해야 된다는 가상한 마음으로 지옥 갈 불신자와 자신을 차별화 두고자 하는 그러한 심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심보라는 거죠. 끝.

자, 포이에르바흐가 여기서 강의했습니다. 손들고 반박할 사람? 반박해봅시다. 복음적인 평. 포이에르바흐는 성경 모른다고 했지요. 어떻게 모른지 봅시다. 노아 방주 지을 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일단은 노아 아이디어는 아니지요. 그 방주는 언약이라고 했어요. 포이에르바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신이라는 것을 기존의 교회 목사들이 하는 신을 자꾸 끄집어내는데 성경에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건 언약 성사시키기죠. 하나님이 언약을 앞장 세워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오셨어요. 아브라함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네가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잖아요. 아브라함한테 물어봤습니까? 그냥 떠나야 돼요. 안 떠나고 버틸 수 없습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그러면 포이에르바흐가 앞에 있다고 하면 대번 손들고 이야기해요. 그 언약을 인간이 지어냈잖아. 그럼 이렇게 해야 돼요. 언약을 지어냈으면 언약된 주님을 죽일 리가 없지요. 납득이 되는데 왜 죽여요.

하나님 언약의 본질이 십자가에서 다 드러나잖아요. 마지막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러면 십자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진짜 네 말대로 인간이 만들었으면 여기에 어떤 타협책이라든지 뭔가 소통되는 게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누가 나를 믿었으리요? 했지요.

사도 바울이 똑똑한 사람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지요. 포이에르바흐 만큼이나 알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내린 결론이 뭐냐? 다메섹에 내려가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전부 다 잡아 죽여야 되고 그리고 그게 하나님 영광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니까 포이에르바흐 말대로라면 양심의 가책이 되서 예수 믿어야 돼요? 그런데 양심이 가책이 되어 예수 믿었습니까, 난데없이 믿었어요? 지금 사울이란 사람은 신났어요. 하나님 영광 돌리는 일한다고 신났다고.

그런데 어떻게 사울이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갑자기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상 했어요? 포이에르바흐는 이걸 몰라요.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그 다음에 뭡니까? 안 믿는 자가 아니라니까. 핍박을 했어요. 지금 사울은 뭘 건드렸어요. 007 영화나 스파이 영화 보면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적외선이 깔려 있잖아요. 그걸 특수 안경을 쓰면 보이잖아요. 지금 포이에르바흐의 눈에는 안 보여요.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이 깔려있는 걸. 사울도 안 보였던 거예요.

지는 포이에르바흐 말대로 열심히 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왜 나를 건드리느냐? 핍박했느냐고 했지요. 그러면 시작부터 나는 존재했거든.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주님은 존재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가해자, 핍박자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핍박을 받은 자로 등장하는 그것이 노아 때는 방주였고, 신약 때는 십자가에요.

포이에르바흐가 뭘 모릅니까? 십자가 영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포이에르바흐가 비판하는 모든 사람도 동일하게 십자가 영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판에 대해서 그들이 반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통속, 같은 편인데 무슨 반박이 돼요.

그래서 여기 보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특수성, 주 되심을 알지 못하지요. 그러면 그동안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주 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하나님이란 존재와 인간 존재를 집어넣은 거예요. 인간이 구원 못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존재가 되셔서 인간 존재가 신이 된다. 그걸 이야기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에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포이에르바흐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인간’이라고 봤습니까? ‘인자’로 봤지요. 인자는 어디서 나온 개념이에요? 언약 개념에서 나온 거예요.

여러분, 언약 개념을 다시 봅시다. 언약 개념이 인간과 할 때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핍박이죠. 아벨과 가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아벨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고, 가인은 인정하지 않고 존재론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가인은 아벨을 핍박했고 아벨은 형한테 핍박을 받았지요. 핍박이란 틈새에서 진짜 하나님이 나왔잖아요.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진짜 하나님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제사 드려서 나온 게 아니고. 이게 존재의 찢어짐이라고 하는데 뭔가 현실 자체가 틈이 없는 곳에 틈이 생기면서 핍박받은 주님이 튀어나온 거예요.

지난 오후설교인가 다니엘 세 친구 어디 있습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잖아요. 그 번지수가 어떻게 됩니까? 지정학적으로 어디 있지요? 없지요. 없는데 있지요. 그렇잖아요. 그 장소가 있습니까? 가면 불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는데 진짜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의 세계는 이 땅에 없이 존재하는 것이에요. 없듯이 있어요. 표현하는 내가 나쁘다.

바울과 사울이 옥에 갇혔을 때 옥문이 부서졌어요. 그때 간수가 어찌할꼬? 할 때 사도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간수가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믿었지요. 그런데 주 예수가 어디 있는데 믿어요. 믿는 게 이상하네. 뭘 보고 믿어. 아, 사도 바울이 말을 잘 했구나. 아닌데요. 사도 바울의 말이 우선이 아니고 성령이 먼저고 말이 나온 거예요. 그걸 고린도전서에 보면, 내가 전한 것은 인간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게 나오네. 성령의 나타남이죠. 사울에게 핍박받은 주님의 나타남이죠.

나타남이란 없다고 말하면 안 되죠. 분명히 우리가 찾으면 없는 게 맞는데 믿으려고 하면 없는 게 맞는데 나타날 경우에는 이건 어쩔 수 없단 말이죠. 나타날 때 우리가 저항할 수 있어요? 없는 거예요.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나타남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고넬료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천사가 왔지요. 베드로와 고넬료가 어떻게 연결됐습니까? 보자기가 왔지요. 그것도 나타남이죠. 빌립 집사가 에티오피아 내시를 어떻게 전도했습니까? 지가 알아서 갔습니까, 성령이 갑자기 보냈습니까? 그것도 사막 가운데.

그러면 묻습니다. 나타남이 몇 시 몇 분에 나타납니까? 나타남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걸 묵시라 합니다. 묵시적 사건. 그러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했지요. 나타남이죠. 그러면 정말 성도는 나타남에 종속돼야 돼요, 내가 여기 있음에 종속돼야 됩니까? 나타남에 종속돼야 되죠. 그걸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포이에르바흐가 성령 받으면 좋아요. 성령 받고 이 글 쓸 수 있어요. 책을 쓰세요. 마지막에 자기 글에 하나만 토만 달면 됐어요.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이 바로 주님 앞에 죄입니다. 이 한 마디만 하면 됐어요. 고대근동학, 공부해도 좋아요. 의사, 판사 다 좋습니다. 단 한 마디만 하면 돼요. 내가 판사된 것이 죕니다. 목사도 괜찮아요. 목회해도 괜찮고 다 좋은데 내가 복음 전한 이것이 죄입니다. 주님을 핍박한 핍박거리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아니요 십자가의 은혜가 지금도 작열했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 한 마디가 왜 안 나올까요?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내내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어렵습니다, 어렵습니다, 라고 하지요. 그런데 이 강의를 듣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 있어요. 미국에 있는 사람인데 제 강의가 굉장히 쉽다는 거예요. 논리가 엄청 어려운데 쉽다는 거예요. 분명히 어려웠는데 왜 쉽지요? 내가 약이 올라 더 어렵게 해버릴까. 뭘 어렵게 해요, 다 쉬워요. 전제가 뭡니까? 무슨 소리해도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기쁨으로 익히 알기 때문에.

5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영적 전쟁터로 봤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요. 벌써 단서를 혈과 육이 아니라는 말은 평소에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의 모든 싸움은 결국 누굴 위한 싸움은 자존심과 가치와 의미, 지금 포이에르바흐의 말이 다 맞아요. 여기서 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 가치거든요. 신을 믿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기 위해 믿는 게 아니고 잘 되기 위해서 믿잖아요. 그 싸움을 인간들이 하고 있어요.

학자들이 박사학위 받으려 하고 받고 난 뒤에 교수되려고 모든, 제가 전에 칼국수 먹던 시장에 아침에 가보세요. 얼마나 싸운다고. 왜 싸웁니까? 그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는 혈과 육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어두운 공중 권세 잡은 것과의 싸움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어떻게 생겼는데, 존재론적이에요. 언제 나타나는데 어디에 그런 것들이 많은데?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과 내가 평소에 살아가는 구조 안에서 이 말씀을 담으려고 하니까 그들은 성경을 봐도 아는 바가 없고 아무것도 몰라요. 자기만 알고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사랑 빼놓고는 할 짓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사랑 외에 할 게 뭐 있어요. 사울도 그랬고, 노아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실 때 언약을 가지고 찾아왔어요. 특히 모세한테 찾아올 때는 어떻게 나타난 줄 알아요. 손 빼고 나타나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 집어넣고 빼니까 문둥병 걸렸잖아요. 네 싸움은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싸움이 아니고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것과의 싸움이란 말이죠.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바로와 모세가 싸웠으면 벌을 누구한데 내려야 돼요? 바로에게만 내려야 될 걸 애굽 나라 전체에 벌을 내리죠. 왜 그렇습니까? 모세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대표했고 바로는 모든 인간 세계를 대표해서 붙은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사적인 삶이 아닙니다. 누굴 대표해요?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싸움이고 그러면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사람은 사탄을 대표하는 사람과 마주치는 겁니다. 영적 싸움이에요.

이게 성경 내용이란 말이죠. 한 마디로 해서 언약입니다. 언약을 신학교 교수들이 몰라요. 왜 모르는가? 십자가 영을 안 받아서 그래요. 성령 안 받아서 그래요. 성령 알면 개척교회하지 유학 안 갑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이 코앞에 있는데 뭐하려고 미국, 독일까지 왜 갑니까?

구원받을 수도 있어요. 갑자기 꼬리 내린다. 꼬리 내리는 게 아니고 교수하고 박사 받을 수 있는데 토만 달면 돼요. 내가 미국 가서 독일 가서 박사 받았는데 그것도 죄다. 그것 붙이면 돼요. 그런데 그것 붙이면 신학교에서 축출당합니다. 왜? 너만 믿음 좋나? 그러면 교회사 가르치는 나는 믿음 없나? 네가 그런 소리하려면 우리 신학교에서 나가라.

목사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말이 이상하지만. 그런데 이 한 마디만 하면 돼요. 목회하고 목사 하는 것도 죕니다. 그런데 그 한 마디 하는 순간 그 교단에서 쫓겨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설교해도 얼마나 겸손한지 설교해도 죄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 갑니까? 다른 교회, 시찰, 노회에 들어가면 종용히 불러서 내보냅니다. 그러면 당신이 설교한 것도 죄라면,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예요? 돈이지요. 헌금한 것도 죄고, 기도한 것도 죄 되지요. 그러면 다른 목사들은 뭐로 밥 먹고 삽니까? 그따위 소리하면 안 되잖아요.

십자가마을에서 무슨 소리했습니까? 헌금도 죄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교회하는 것도 죄라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감당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한두 번은 복음적이라고 해놓고 계속 이야기하니까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처음 한두 번 할 때는 저 정도로 복음적이구나. 저 정도가 아니고 계속 이야기하네. 그러면 어떻게 교인들에게 헌금하라, 기도하라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풀이하는데? 본인이 해석이 안 돼. 본인이 해석이 안 되면 나가야지, 뭐. 포이에르바흐한테 걸리면 다 걸려요.

그래서 마지막에 봅시다. [그저 행복하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도로 자처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본색은 민망한 것을 감추지 않는 동지의식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끼리만. 에이, 민망하잖아. 그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나. 동지의식이죠. 포이에르바흐는 아마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위대한 분입니다. 다만 끝에 본인이 이것도 죄라는 그걸 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뭘 해도 죄고 십자가 믿는 것도 죄고 예수 이름 부르는 것도 죄고 다 죄인데 구원받는 것이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간단한 사실을 간단하게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50616b 부산강의.hwp (51.5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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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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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