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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6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자유게시판[신학]

201506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

이름 : 한윤범(IP:14.39.134.87)

201506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보세요. 교재 따라 하겠습니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1804~1872), 19세기 독일 철학자인데 이 사람이 이야기한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서 기독교에서 나온 모든 교리는 처음부터 신의 계시가 아니고 인간 속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뭔가 신기한 것이 있는가 싶어 교회 나왔는데 별 것 없다는 거거든요.

이런 포이에르바흐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30~40년 교회 믿으면 교회에서 나올 것 없고 별 것 없으면 교회를 떠나야 돼요. 그런데 별 것 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 교회 다닌다는 말은 뭔 뜻이겠어요? 진리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실망하기 싫은 거예요. 진리 없는 건 맞는데 그러나 그동안 내가 그 교회 다녔던 청춘이 세월이 아깝잖아요. 진리가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천국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천국이 있고 내가 그걸 믿는 듯이 그렇게 장로로써 목사로써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장로님, 대표기도도 잘 하시던데 천국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면, “그건 나처럼 오래 다닌 사람에게 묻는 게 아니고 그런 시시한 것에 답하기 싫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속으로는 30~40년 다녔는데 천국이고 진리고 없더라 이 말이에요. 그냥 뒤늦게 발 빼면 자기 인생이 허접해지잖아요. 평생 동안 실패한 인생으로 남는다는 것이 자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없는데 있는 것처럼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그것이 본인의 위신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자기 아들, 손자들에게 계속해서 전수가 되면 그 전체가 교회사가 돼요.

교회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 교회 몇 년 됐습니다. 예배당 지은 지 몇 년 됐습니다. 그거잖아요. 진리가 무엇인지는 말 안 해요. 우리 교회 역사에 처음 오신 목사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고, 그 다음 목사가 이런 일했고, 그 다음 목사는 300명 교인이 500명으로 늘어났고, 교육관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지을 때 부흥사가 왔는데 헌금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교회 어느 권사가 시집가서 아들 낳았는데 이번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뭘 믿습니까? 그런 기본적인 건 묻지 마시고. 사실은 그 기본적인 것이 전부 없는 거예요. 쉬쉬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이런 것들은 인간들이 지어낸 건데, 인간들 마음속에 이미 있는 건데 누가 용감하게 터뜨릴 수 있는 모두가 ‘예스’할 때 혼자 ‘아니오’ 할 수 있는 좀 그런 사람 나와서

동화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있지요. 누가 봐도 벌거벗었는데 신하들이 전부 다 좋은 옷 입었습니다. 임금님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부한다고 그렇게 된 거예요. 벌거벗은 임금님에선 신하가 아부하지만 인간은 누구한테 아부하겠어요? 인간은 본인의 역사로 본인 자신에게 아부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겁니다. 자기가 실수한 걸 뻔히 알면서도 실수한 자신이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럽기 때문에 실수 아닌 것처럼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용감하게 나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입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기독교의 뿌리부터 뒤엎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책을 누가 보느냐 하면, 신학자들이 많이 보지요. 목사들은 목회에 도움이 안 되니까 안 보고. 신학자들은 유식한 체하기 위해서 봐요. 그러나 보고 난 뒤에 말문을 닫아버려요. 감추고 있었던 본인의 신앙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까버리면 뭔가 반박이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흐가 신학을 한 사람이거든요. 신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하지 않아요.

마지막 평부터 먼저 봅시다. 이 내용들이 우리의 내부를 후비기 때문에 이 사람 주장을 따라가면 미쳐버립니다. 욕하고 싶은데 반박은 안 되고 욕은 나오고. 아는 사람끼리 너무 한 것 아니냐. 우리만 생각하지 말고 민중들을 생각해야지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 입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이런 식으로 화내지요. 진리 때문에 화내는 게 아니고 들켰다는 것 때문에 화내는 거죠.

[포이에르바흐가 종교적 사회적 가치를 부정한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더 미워. 무슨 뜻이냐 하면, 종교란 진리가 있어서가 아니고 진리란 게 있어줘야 사회가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끼리 보통 살 때는 되도 않는 아버지라는 걸 다 알아요. 돈만 버는 기계지 남자답지 못하고 다 알아요. 그런데 막상 이사 간다든지 할 때는 바보 같고 좀 어설픈 아버지지만 그때만큼은 집 팔고 이사 갈까요, 그냥 이 집에 살까요? 그 바보 같은 아버지의 입에서 마지막 멘트가 나오기를 다른 식구들이 요청한다니까요. 하지만 누군가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게 그 가족의 사회적인 운영체제입니다. 박근혜 욕하고 하는데 대통령 없으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은 없으면 북한은 어떻게 되겠어요? 괴로운 것은 민중들, 북한주민들이 힘들지요. 궁예 보세요. 완전히 미친 인간이잖아요. 하지만 궁예가 없으면 후삼국시대에 혼란을 누가 잡습니까? 못 잡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란 뭐냐?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이야기, 하나님이야기 다 필요한데 그건 다들 하나님을 원하고 있고 메시아를 원하고 있는 입장에서 메시아를 인간의 품속에 있는 것으로 그럴싸하게 만들어냈고, 하나님을 만들어낸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포이에르바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더 나쁜 거예요.

종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학이나 종교는 인간학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지 그동안 교회에서 가르쳤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인간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이 그렇게 거룩하다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한 거예요.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다. 말하는 게 종교 자체입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고 부족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옳다고 교회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해주자는 겁니다. 그런 소리하는 게 더 미운 거예요.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 내가 아니고 종교다. 쉽게 말해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니 인간아, 너는 그저 인간에 불과한줄 알라. 종교를 가졌다고 인간 위상이 변모하는 그 위선이 싫어서 이렇게 기독교 까발리는 책을 썼다.] 뻔한 데 신의 이름으로 폭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낮춰보고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 삼는 그게 미워서 다시 말해서 거창한 명분 아래서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면서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했다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까발렸다는 게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이란 말이죠.

기독교 뭐 있는데. 뻔한데 뭐 없는데 없는 걸 마치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 말자는 거예요.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교회에 뭔가 있는가 싶어서 와봤는데 뭐 없어. 그래서 자기는 교회 안 다녀. 이 가게에 혹시 내가 필요한 것 있습니까? 쇼윈도는 멋진데 내가 찾는 물건은 없어. 그러면 나가버려요. 그 가게를 나왔는데 그 가게가 또 구라를 치기를 우리 가게는 없는 게 없고 모든 것을 구비해놨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돌아서서 화가 난 포이에르바흐가, “내가 가보니 전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야.”라고 고발한 겁니다. 추적60분이에요.

신학 하겠다고 기독교의 본질이 유명하다고 이것 봐야 석사, 박사학위 받는다고 해서 외국에 유학 가서 이 책을 본 사람들, 신학박사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한 사람들이 이 책 보고 난 뒤에는 신학 해서 취직해야지. 그렇게 돌아서게 만든 책입니다. 어차피 혹시 하나님 있는지 해서 했는데 다 인간이 지어낸 건데 없네. 없다고 하면 취직이 안 되니까 이건 우리끼리만 알고 밥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처신하게 만든 것에 공헌한 책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이 있기에 이토록 겁나는 책이냐. 무슨 내용을 담았기에 겁나는지 봅시다. [짐승에 있어서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을 합일돼있지만 인간은 내적 생활, 외적 생활 둘로 가지고 있다.] 이게 칸트 철학에서 나온 건데 짐승은 음흉한 게 없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내놓는 생각 따로 있고 속에 숨겨놓은 생각 따로 있지요. 이렇게 된 것은 반성이지요.

개가 반성합니까? 반성 안 하지요. 반성 안 하는 개가 착합니까,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착해요?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거죠. 하는 행동이 시간만 약간 지나서 뒤돌아보니까 아쉽다고 하지요. 그게 반성이잖아요. 반성했다는 것은 항상 후회할 소지가 있는 속성을 내가 품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반성한다는 말은 따라 잡은 거예요.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반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세기 1장 28절에 의해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렇게 교회에서 철학에서 이야기해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합니다. 만물의 영장에 지배받는 개나 코스모스는 반성이 없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반성을 하게 되니까 그러면 인간이 만물을 지배할 때 그 지배가 온전한 지배겠어요, 미흡한 지배겠어요? 미흡한 지배지요. 그러면 지배를 받게 되면 어설픈, 미흡한 지배 때문에 손해보고 고통당하고 상처받는 쪽은 누굽니까? 지배받는 쪽이 상처받겠지요.

쉽게 말해서 이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게 돼있지요. 창세기에 의해서. 그러면 남자는 반성 안 해도 돼요? 늘 반성하잖아요. 본인은 늘 반성하면 그만이겠지만 반성해야 될 부실한 처신 때문에 피해보는 쪽은 누굽니까? 아내지요. 아내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기는 해놓고 미안하다고 반성하면 끝나지만 미안한 짓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의 피해는 누가 갚아줘야 돼요? 갚아줄 사람이 없는데. 그래놓고 남자는 남자니까 또 지배하고 달려들고.

그게 바로 칸트가 이해한 것은, 인간은 유한하지요. 칸트 말과 포이에르바흐 말 듣고 누가 맞는지 비교해보세요. 칸트는 인간은 왜 유한하냐? 무한의 의식에 비춰볼 때 유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우주는 무한하고 하나님도 무한하다는 생각이 유한에게서는 나올 수 없지요. 왜냐하면 유한한 것은 유한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칸트의 말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내가 반성하는 재미로 살아야지. 이러면 인간이 무한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청소년들이 얼굴 잘 생긴 연예인들을 왜 좋아합니까? 나도 저처럼 되었으면 하지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내가 있기 전에 이미 잘 생긴 배우가 먼저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촌에서 예쁜 순이가, 하여튼 우리 동네에서는 순이가 제일 예뻐. 교회에서 반주하는 순이가 제일 예뻐. 하던 청년이 서울 강남 학원에 다닌 다음에는 오랜만에 만난 순이는 촌스러워 짝이 없어요. 순이가 말 걸까 무서워. 튕길 가치도 없어.

왜 그렇습니까? 이게 칸트 이야기에요. 사람이 반성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무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무한을 칸트는 신이라고 한 거예요. 칸트는 인간이 신을 만들 수 없다는 거예요. 왜? 반성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후회라는 것이 아쉽지만 재미있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나로 하여금 유한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시는데 그게 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흐를 보세요. [인간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종교란 이름의 무한자 의식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하나의 존재자라면 존재자가 갖고 있는 한계 또한 존재자가 가지는 의식의 한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예를 들면 이성의 목적은 이성이고 사랑의 목적은 그냥 사랑이다.

예를 든 것도 어렵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에 학원에서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랑의 목적은 여학생이겠지요. 이해되지요. 그런데 선생이, “학생, 물이 다 됐네.” 이러면 학생이 말하기를, “선생님. 거기에 신경 안 씁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목마를 때는 물이지만 지금 정신이 사랑에 팔려있지요. 사랑의 목적은 사랑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언제 하나님을 믿어요?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왜 난 이것밖에 안 되지. 왜 나는 이번 일에 실패했지.” 자기 유한성을 느낄 때 뭘 끄집어냅니까? 내가 원했던 것은 이만큼인데, 9를 원하는데 현실은 6밖에 안 됐을 때 3이 빠졌지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9 정도 올라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수입이 200만원 돼야 되는데 100만원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뭐 하시나. 나한테 수입 100만원 주지.

그러니까 유한할 때 하나님 찾으니까 내가 유한을 안 느끼면 하나님 안 찾지요. 지금 여학생이 좋은데 목사가, “여러분, 오늘 밤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면” 그 소리 안 들리지요. 지금 오면 안 되지. 결혼하고 난 뒤에 재림해야지. 포이에르바하가 종교 분야, 과학 분야, 예술 분야, 그 모든 분야는 중심에 누가 있단 말입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관심 두느냐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따라서 일요일에 교회도 가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직업고 갖고.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사회가 각자 이발사는 이발사가 최고다, 미장원은 미용사가 최고다, 축구선수는 축구선수가 최고다. 왜 축구장에 안 옵니까? 이렇게 주장하면 사회가 안 되잖아요.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신 개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유통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사회 질서 차원에서 그리고 정서적인 안정 차원에서 이해될 만 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어야 믿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가 만들어놓고 그걸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은 꼭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신을 욕보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정말 신 없이는 못 산다는 겁니다. 굉장히 마음씨 고운 아저씨에요. 어떤 겁니까.

그 다음에 봅시다. 이렇게 해도 어려워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지요. [쉬운 예가 있다. 태양은 여러 행성의 공통적인 객체이다. 수성, 금성, 토성, 천왕성에 나름대로의 태양이다.] 제가 설명할테니까 이 예를 들으면 포이에르바흐 말에 전적으로 찬동하게 될 거예요. 태양은 하나인데 행성들이 태양계를 돌고 있지요. 수성에 살고 있는 태양의 모습과 지구에 살고 있는 태양의 모습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왜냐하면 거리가 다르고 태양은 실제로 지구상의 태양과 다른 태양이다. 크기와 빛의 강도와 성질이 다르다. 지구에서는 크게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작게 보이잖아요.

또 예가 나와요. 중간에 보면, [하루살이에서 짧은 생명도 다른 동물에서의 수 년 생명만큼 긴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분명히 16일 지냈는데 거기 갇힌 사람은 며칠 지났다고 합니까? 24시간, 한 30시간 됐습니까? 그런데 16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산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를 둘러싼 현실을 누가 규명하고 누가 결정한 겁니까? 현실 속에 있는 내가 그 현실에 대해서 새롭게 내게 맞도록 규정한 거예요.

그렇다면 백 사람이 있다면 백 사람이 보는 신은 다 다르겠지요. 태양계에 행성은 아홉 개지만 태양은 하나의 태양인 것처럼 신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모습의 신, 그 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신은 누가 만들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신을 생각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되겠지요. 신이 먼저 있고 신이 인간에게 각자 신의 품성을 나눠주는 것이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각자의 신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아야지요. 이 분필을 학생들에게 나눠준다면 이 분필은 똑같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 신이란 분필은 다 달라요. 그러니까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게 맞잖아요. 신학자들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 논리에. 벌써 신학자들 깨졌어요.

그 다음에 그 밑에,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갖고 있어서 완전하고 만족케 하는 것이다.] 완전하고 만족하다는 말은, 개에게 사료를 주잖아요. 여러분, 혹시 사료 먹어봤습니까? 그게 맛있어요? 또 먹고 싶어요?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런데 개한테 짜장면이 낫습니까, 사료가 낫습니까? 사료가 낫지요. 개는 사료에 되게 만족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라는 것은 그 배경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정말 신이시여 저를 만족케 하시니 제가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찬양하잖아요. 그럼 찬양은 결국 인간의 자기만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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