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18강, 119강) 투쟁, 거짓 150618
유튜브(118강, 119강) 투쟁, 거짓 150618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118강
119강
이미아(IP:119.♡.72.239)
15-06-19 14:56
118강-YouTube강의(투쟁)150618-이 근호 목사
제 118강, 제목은 ‘투쟁’입니다. 보통 ‘투쟁’이라 하면 중간과정을 생각하죠. 사람들은 투쟁 너머 마지막에 종결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투쟁은 과정이고 투쟁이 끝나고 난 뒤에 모든 것이 정리되면 승리자와 패배자가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투쟁의 시기는 빨리 지나 가서, 빨리 뛰어넘든지 그냥 가고 평화의 안식의 그 나라에 도달되기를 그렇게 학수고대합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거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 하면은 우리가 그 투쟁 너머에 오는 평화의, 평정의 시기를 바라볼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세계를 넘보고 있어요.
‘이 고해 같은 세상을 지나면 평화의 천국이 오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 그거 사탄이 심어준 환상입니다. 이 고해가 끝나고 천국 오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이 고해의 한 가운데서 예상치도 못한 틈이 갈라지면서 거기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천국과 영생의 나라가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앉아서, 이 투쟁의 고개를 넘어서,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고 있다면 그냥 그거는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투쟁 속에서, 하나님이 성도를 투쟁 속에 집어넣는 이유는 바로 그 꿈을 깨기 위해서 투쟁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래 조금만 참으리라 언젠간 내가 이렇게 고생한 보답은 있겠지.’ 뭔가 고행하면서도 고생 뒤에 낙이 온다는 그 낙의 세계를 고생을 견디는 동기, 힘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실수하는 겁니다.
투쟁을 하면서 투쟁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투쟁하면서 점점 더 자기 애착과 미련에 집요하게, 강하게 굳히게 되어 있어요. 문제가 심각하게 된 겁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투쟁하게 하신 것은 투쟁 뒤에 낙이 온다고 그렇게 희망을 주기 위함이 아니고, 투쟁 속에서 니가 꿈꾸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개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서, 부인하기 위해서 고생스런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신 겁니다. ‘비록 지금은 고생하지만 고생에 대한 보상은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니가 미처 알지 못한 근원적인 죄가 된다는 겁니다. 그게 오해라는 겁니다.
정말 투쟁을 하면 할수록, “이 보다 더한 심한 고생이 와도 저는 마땅합니다.” 그러한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해요. 고생 뒤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고 “그 낙은 제가 가질 몫이 아니고, 그거는 주님 혼자 누릴 수밖에 없는, 그 이상적인 세계를 감히 제가 어떻게....., 넘본 자체가 잘못이었습니다.” 라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비추어보기 위해서 이런 고생과 투쟁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미처 이러한 하나님의 진정한 투쟁의 의미를 모를 때는, ‘그래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으면 이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편히 살날이 올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누가 그렇게 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본인이, 본인이 마치 그런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 인양 생각해서 꿈을 꾸거든요. 근데 그러한 자격 있습니까? 내가 천국가고 내가 지옥 안 갈 그러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우리한테 있습니까? 있다고 여기는 것이 누구의 수작인데요? 마귀가 우리한테 그러한 헛된 희망을 집어넣은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내친 것, 너가 이 땅에서 고생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실수야. 너는 이런 고생을 받을 만큼 그렇게 나쁜 짓 한 것 없어. 너는 여전히 가치 있어. 너는 여전히 고귀한 존재야. 너를 구박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수일 걸? 니가 한 번 생각해봐. 니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고생해야해? 니는 아무 잘못 없어. 근데 이렇게 힘들 게 한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의 가치를 몰라서 그래.” 자꾸 이렇게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가짜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인양 위장하게 하는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들어 살아가면서 우리의 모든 탓을 외부의 남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은 남 탓으로 돌린 그 탓을 바로 우리 내부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내 안의 문제점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을, 내 안의 문제인 것으로 방향을 바꾸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남 탓이요. 남 탓입니다. 남이 다 문제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가족이 문제고, 나는 괜찮은데 주변의 환경이 문제고, 나는 괜찮은데 이 세상이 악해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고, 또 바르게 못 사는 것도 다 남들이 나를 바쁘게 살게 하고, 주의 말씀 못 보게 하고, 주님께 영광 못 돌리고, 감사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작 나는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 주변 환경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하고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리죠.
그런데 그렇게 돌릴 만큼 우리의 존재가 잘하고 훌륭합니까? 우리의 출신지가 어딘데요? 아담 속인데.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그 성경 말씀에 우리가 선뜻 동의한 적이 있습니까? ‘괜찮은 내가 참 불행하게도 죄 많은 세상에 산다.’ 이렇게 자기를 미화하지, ‘세상 악한데 내가 항복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을 돌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속한 물이 구정물인데 그것은 바로 내가 속해 있기 때문에, 내 때문에 더러워졌다는 것을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 세상 더러운데 원인 제공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애초부터 세상 살기 위해서 싸웠다는데, 사실은 우리는 싸운 적이 없습니다. 그럼 뭐했느냐? 평생 타협하고 협상했습니다. 누구하고? 마귀하고. 누구하고 싸워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싸우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왔을 때, 우리는 그때부터 제대로 싸우게 됩니다. 나같이 괜찮고 훌륭한 사람이,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식으로 구원받아야지. “니라는 인간은 내 피가 아니면 니는 희망 없어.”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시면 내가 평생에 열심히 살아온, 자식 키우면서 애쓰면서 이렇게 살아온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가 졸지에, 한 순간에 완전히 구겨지면 나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 힘들게 살아온 보람을, 의미를 도대체 깡그리 나를 무시하게 되면, 나를 궁지로 몰아넣게 되면 나는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숨통은 터줘야지. 이렇게 내 멱살을 쥐고 막다른 길로 몰아넣으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삽니까? 라는 고백. 그 고백이 우리의 목숨 끊어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내 가치가 끊어지는 그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투쟁을 하실 때 예수님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실 때 예수님 한 분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원수에다가 분류를 시켜놨어요. 로마서 5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원수 된 자인데, 그 다음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가 피를 받으니까 비로소 예전에 몰랐는데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내 자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리를 내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이제는 주님의 안목으로, 내 쪽에서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쪽에서 나를 보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나를 이렇게 덮쳐주니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피의 사죄와 속죄의 능력으로 다 똑같은 원수인 사람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은 거예요. 구출 된 거예요.
구출되면서, 뭔가 모형을 뜬, 포를 뜨듯이 뜬 곳을 돌아보니까 내가 누웠던 그 자리가 주님의 원수의 자리에요. 석고 본 뜨듯이 떠서 되돌아보니까, 내가 누웠던 그 자리가 주의 원수의 자리인데 그동안 잘났다고 하면서, 고생 뒤에 낙이 있겠지, 이런 소리하면서 그동안 버티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되돌아보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떼 내주지 아니하면 지금도 그 자리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가치 있는 자리라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십자가에 죽어 있었고, 죽은 입장에서 다시 나를 바라보니까 나만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살던 이 세상 자체가 원수로서, 저주받아 마땅한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투쟁은, 나의 투쟁 없습니다. 주님과 사탄의 투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혈과 육을 위해서 싸우지 말고 공중권세 잡은 자와 싸워야 될, 그 참여된 자가 바로 성도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아(IP:180.♡.90.76)
15-06-19 22:04
119강-YouTube강의(거짓)150618-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119강, 제목은 ‘거짓’입니다. 제가 제목을 거짓이라고 이렇게 했는데요. 좀 더 자세하게 다른 표현을 한다면 ‘위선적이다’는 것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거짓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거짓이라 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어요. 보통 거짓말 하지 말라는 십계명 말씀대로 거짓은, 거짓의 앞잡이는 마귀라는 성경 구절이 나오듯이 거짓말 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거짓말 했다고 하신다면 믿겠습니까? 우리는, 유대인들은 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메시아 입에서 추호도 거짓을 말함이 없고 참 진리만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린 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거짓말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이 거짓말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대장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봤고, 사울이라는 사람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그야말로 율법에 대해서 정통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다멕섹으로 내려가면서, 또 어떤 권한을 받아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또 족치고 체포해서 죽이기 위해서 내려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전에 예수님을 육으로 알 때,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데, 전에 내가 예수님을 육체로 알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육으로 알 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전부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의 말을 거짓말로 여기게 했던 바로 자기 자신이 거짓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럼 여기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알던 메시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말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거는 아직도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 밖에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았던 사람,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 베드로 이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몰랐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다 거짓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보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예수님이 진짜인 동시에 내가 위선적으로, 거짓말로, 일생을 일관되게 거짓된 존재로 살아왔습니다.”를 고백한 거예요. 맞지요. 이제부터 더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 것이 거짓이냐, 아니면 참된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와요.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내가 진실이었고 예수님이 거짓이었는데, 예수님이 진실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내가 하는 모든 것 속에 예수님 믿는 나의 믿음과 사랑, 소망도 거기 포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면 그것도 거짓입니까? 그것도 거짓이겠네요?
참, 이게 따지고 보면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봉착한 거예요. 거짓이 한 부류만 있으면 거짓이나 참이라 하는 것은 첫 번째 현실과 대비해서 현실과 안 맞으면 거짓이고 현실과 맞으면 참이 되고 아주 간단해요. 근데 다른 부류에 속한 분, 예수님이죠. 인간과 다른, 인간이 속한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 속한 분이 와버리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나는 거짓이야.’ 라는 능력을 자생적으로 끄집어낼 수 없게 됐어요.
따라서 제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예수 믿습니다.”는 말도 이게 거짓말에서 나온 거짓말의 일부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그 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는 욥인데요. 욥이 난데없이 몸이 아프고 난 뒤에, 고난 받고 난 뒤에, 아무리 봐도 자기는 거짓이 아니에요. 고난 받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왔어요. 그래서 욥은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저를 죽이시지 왜 저를 태어나게 해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의인인 것이 분명한데, 왜 의인이게 왜 고난이 왔습니까?” 이래 돼요.
의인이 고난 받는 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아요. 왜냐 하면 고난이라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 값을 벌 받는 식으로 고난이 와야지 의인이라는 것은 이미 벌이 없어진, 벌 없는 상태가 의인이거든요. 벌 안 받는 상태가 의인이라면, 의인된 상태에서 벌이 왔다면 도대체 앞뒤가 안 맞아요. 그럴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럴 리가 없다 이 말이죠.
그렇게 했던 욥이 나중에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냐 하면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유구무언입니다.” 하고 재를 뒤집어썼다 이 말이죠. 재를 뒤집어썼다는 말은 잘못은 저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잘못은 저한테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내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잘못 없는 나를 잘못되게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반성조차도 우리가 거짓이라 이 말입니다. 반성, 회개조차도 우리가 거짓말이라 이 말입니다. 회개해서 그걸 대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또 한 가지 예가 나봇의 포도원 비유인데요. 나봇 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포도원은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했어요. 이건 바른 소리에요. 그 바른 소리를 끝까지 고집했어요. 고집하다 보니까 아합 왕한테 죽었잖아요. 그럼 이 세상에는 참 말을 하는 사람은 죽이는 세계에요.
근데 그 죽이는 세계에서 누가 태어나느냐, 우리 본인들이 태어났거든요. 본인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내가 지금 복 받았는지, 아니면 벌 받았는지를, 내가 그리워하는, 내가 얻고자 하는 이 세상의 복 가지고 그걸 측정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측정을.
근데 제가 분명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그렇게 내가 잘못이냐, 잘못 아니냐를 측정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몰라요. ‘내가 잘만하면 착해질 수 있어. 잘만하면 구원받을 수 있어.’ 라는, 아직도 자기가 구원과 영생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그것이 바로 죄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게 잘못된 짓이에요. 그게 아주 거짓된 짓입니다.
참으로,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죄인 만들게 해서, 주께서 나를 의인 만들게 했습니다.” 모든 시작과 과정과 결말을 다 예수님 몫으로 돌리는데, 그 사람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거짓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된 것을 회개하니 구원해주세요.” 이런 구원 없습니다. 그거는 지가 주님하고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을 속이고 위선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의 예를 들겠습니다.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속임수죠. 속이는 자죠. 야곱 이름 자체가. 그렇다면 야곱의 한평생은 누구를 속여야 돼요. 왜? 타고난 운명이기 때문에. 근데 그 야곱은 형을 속여서 무엇과 관련짓느냐 하면, 형을 속여서 하나님이 주시고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곱과 그 엄마가 한패가 되어가지고 아버지를 속여서 그 축복권을 따내었습니다.
그리고 축복권을 따낸 것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이미 자기는 수단과 방법과 관계없이 성공한 걸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맞아요. 하나님이 그 축복권을 따내는데 성공하게 했습니다. 근데 성공한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죽이십니다. 죽이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야곱이라고 어겼던, “나는 야곱이야. 야곱이 바로 나고 언약의 백성이 바로 나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언약 주셨어.” 라는, 그 나를 죽이는 거예요.
무엇으로 바뀌느냐, “이스라엘을 위해서 나라는 야곱이 만들어진 거야.” 라는 식으로 바꾸어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신약으로 보면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식으로 바꾸어지는 것과 똑같은 법칙입니다. 성령 받으셨습니까? 이러면 우리가 이제는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자격조차도 없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말만 있으면 돼요. 강도가 되었습니까? 창기가 되었습니까? 주의 은혜입니다. 기생이 되었습니까? 다 주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 밖에 할 게 없어요.
괜히 지금 와서 요건 잘했다, 못했다 따진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옛날에, 구원받기 전에 내가 있었던, 내가 포 뜨듯이 뜨고 난 뒤 석고에 묻어 있던 석고상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그 모습이 나는 잘했을까? 이 정도로 훌륭했을까? 아, 저건 나쁜 짓이야? 아, 이건 옳은 짓이야? 아직도 선악적인 체계에서 따진다는 것이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거예요. 이거는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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