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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언약의 무늬 (사무엘상 1:1-6) 대전-(사무엘2강)자유게시판사무엘상

언약의 무늬 (사무엘상 1:1-6) 대전-(사무엘2강)

이름 : 주향(IP:222.116.177.93)

언약의 무늬 (사무엘상 1:1-6) 대전-(사무엘2강)

이근호

2015년 5월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1-6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 의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께 제사장으로 거기있었더라

(1: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나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 게 하시니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 민케 하더라

(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1장 2절 보겠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인데요 레위지파라 함은 전에 이야기했듯이 각 지파마다 흩어져 있어요. 자기 땅이 아니고 더부살이 한다고 생각지 말고 사실은 그 지역이 하나님의 축복을 유지하는 일종의 책임자이지요.

왜냐하면 레위지파를 통해서 말씀이 전달되어 지니까 레위지파가 그곳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파견하는 근무자가 그 곳에 근무하고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요. 모든 땅은 누구의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땅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땅이 내 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어느 것이 편합니까?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몸이 내 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몸이 되면 편해요. 왜냐하면 사무엘상에 보면 나오지요? 2장에 한나의 기도에 보면 나오잖아요.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 시는 도다

(삼상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것은 뭐냐하면 이 장치가 무슨 장치이냐 하면 영생주시는 장치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겁니다. 영생 주시는 장치. 하나님을 만나서 영생주시면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건 우리 생각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어요.

영생 받을 자격이 안되면 죽습니다. 이 장치는 뭐냐하면 영생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영생 주도록 하는 자격입니다. 비닐하우스라는 것을 보면 쉽지요. 시설 좋은 비닐하우스에 장미를 키운다던지 이런 것을 보면 그 비닐하우스에 연결된 파이프에서 이슬같이 물이 막 나오지요? 시간에 따라 채소나 화훼, 꽃에 물주잖아요?

그 장치처럼 시간에 따라 영생을 준다고 보면 되요. 비닐하우스에서처럼, 그럼 신나지요! 그대신 비닐하우스에 있는 꽃과 채소들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냐하면 내 인생, 내가 키운다는 것을 포기해야 되지요! 이렇게 보시면 되요. 이스라엘의 장치 자체가 영생 주는 장치이다. 이 장치 속에서 하나님의 영생 만들기에 그들이 가담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영생 만들기에 가담이 돼있으면 그러면 영생은 영생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게 문제거든요! 영생을 하는데 있어 생명을 두 종류로 생각하면 되요! 한 종류는 뭐냐하면 신체가 유지되는 것을 사람들은 이것을 생명이라고 하는데 이건 생명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목숨’이라고 합니다. 내 신체가 계속 사는 것, 숨 쉬는 것, 이것은 ‘생명’이 아니고 ‘목숨’이지요.

그럼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살겠어요? 생명이 아니고 자기 목숨을 위해 살겠지요? 이거 하면 살겠습니까? 이거하면 밥 먹고 살겠습니까? 바로 이게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먼저 가셨잖아요! 광야로 먼저 가셨는데 거기엔 누가 대기하고 있었습니까? 사탄이 있었지요? 사탄이 예수님께 첫 번째로 시험한 것이 뭐냐하면 “네가 살아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에요.

네가 살아야 하나님의 일도 하고 네가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냐? 마귀가 예수님에게 밥 먹고 살아야 된다고 얘기한 것은 예수님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에게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이미 압력을 가해 왔던 방법이에요. 네가 큰일을 하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선 밥 먹고 사는 게 그게 근본이고 기본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오직 하나 밖에 없지요! 근본적으로 뭐냐하면 내가 살아있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아니요! 라고 나설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마귀에 속하는 거지요. 마귀가 네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네가 사는 목적이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냐 하면 “사람이 사는 것은 밥 먹고 사는, 떡으로 사는 목숨말고 뭐로 사는 게 따로 있다고 했습니까?

‘말씀’에 의해서 얻는 ‘생명’이 따로 있다“는 거지요!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주려고 왔지 목숨주려고 목숨 유지하라고 오신 분이 아니거든요! 예수님께서는 목숨 끊어진 것을 뭐로 보시냐하면 이것을 ‘쉰다’라고 봐요! 편히 쉬는 것, 또는 편히 잠자는 것, 요즘 현대인들 잠 못자서 난리아닙니까?

잠이 안와요! 잠들 때 까지 양 천마리 세어 봐야 잠이 안와요. 왜 잠이 안와요? 잠 자는 법을 애초부터 인간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잠은 누가 재워줘야 되지 스스로 잠자는 법을 터득한 게 아니에요. 보통은 건강한 사람이 잠을 잘 자잖아요? 본인이 잠을 잘 자서 자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재워줘서 잠자는 거예요. 잠을 자게 되면서 부터 자기 관리로 부터 끊어 집니다. 그야말로 그 순간은 죽은 겁니다. 내가 나에게 조치할 수 없는 상태가 잠자는 동안입니다.

꿈꾸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겁니까? 내 마음대로 꿈 못꿔요! 꿈을 꿀 때 인간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잠자고 꿈 꿀 때만은 자기로부터 자기 것에 손을 뗄 수밖에 없어요. 처지가. 나는 억척같이 내가 쥐고 있다 해도 잠들어 버리면 자기 손을 떠나 버립니다. 어떤 분들은 말해요. 제 설교 들으면 잠이 잘 온다고,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나의 손길에서 주님의 손길로 이동시키는 방법, 주의 손길로 이동되겠지요? 왜 이동시키느냐 그래서 성경에 보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고 하니 마침 ‘낮’이 우리의 주인공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주인공인 ‘밤’이 우리에게 어떤 작용을 하느냐가 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내 관리를 못할 때 내가 나에게 손을 뗄 때 정말 주인공이 따로 계시다라는 것이 들통나지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게 뭐냐? 저녁과 아침사이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냐? 없어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세상은 주님 손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생명을 몰라요! 왜? 생명은 전체적으로 있기 때문에 기껏 인간이 챙기는 것은 생명의 일부인 내 목숨만 유지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체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그저 코앞에 있는 것, 내 배 고플 때 밥 먹는 것, 그것이 현실의 전부라고 알고 있어요.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철없는 형제간들은 방에서 엄마는 피난살이 꾸리고 있는데 애들은 딱지치기 하면서 “엄마! 형 좀 혼내줘! 내 딱지 뺏아 갔어!”라고 하는 것처럼 코앞에 있는 것 밖에 모르는 거예요. 전체적인 사태가 지금 어떻게 흘러가느냐 전혀 감 못잡고 있고 코앞에 있는 자기 이익, 그 이익만 얻기 위해 형제간에 싸우는 것이 엄마 보기에 얼마나 철없습니까?

그게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교회가 주님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복 받아서 여러분의 목숨이 유지됩니다.” 이런 것만 들으려 하고 이런 것만 외치니까 완전! 교회가 매일 석가모니 탄일 같아요! 교회로 자기의 목숨 챙기려 무당 만나러 가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전체가 뭐냐 나를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몰아넣는,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그 분의 진정한 뜻은 무엇이냐 이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목숨이 생명을 가로막고 있다고 언급하는 겁니다. 마귀가 그런 짓을 하지요! 가로 막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로막는 사람이 여기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여기서 브닌나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대적, 원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여기서 한나와 브닌나는 정실과 첩과의 관계지요. 남편 하나에 아내가 둘이니까 그런 관계에요.

그 두 여자가 서로 원수(대적) 관계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남편의 행실이 나쁘다 그런식으로 보시지 말고 이렇게 보세요. 이삭이 아기를 가졌는데 야곱과 에서, 서로 투쟁하는 관계에서 태어났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지요!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 이 두 자식이 있다는 것이 남의 가정의 사소한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두 국민이 나오니까 두 민족으로 나눠진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이삭이라는 사적인 가정에서 나온 그것이 인간 전체 계시를 총괄적으로 압축해서 다 보여주는 거지요. 그 안에 응축해서 다 보여 주는 겁니다. 두 국민이 나오는데 한 국민은 저주받는, 한 국민은 복 받는 그렇게 나오는 원인을 저는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찾는다했지요?

아브라함에게 숨겨져 있던 복과 저주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흘러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지고 숨겨진 축복과 저주가 유일하게 이 지상에서 구체화되는 그런 첫 지점이 뭐냐하면 바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요. 그 아브라함속에 누가 있냐? 이삭이 있고 이삭 속에 야곱과 에서 즉, 축복과 저주가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축복과 저주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아브라함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의 속성이 한 쪽은 저주하고 한 쪽은 축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의 속성과 반대되는 속성이 있는데 그건 저주하는 속성이에요. 결국 마지막에는 저주하는 속성은 지옥을 형성하고 축복하는 속성은 천국을 형성하게 되지요. 그것을 롬9장에서는 진노와 긍휼의 그릇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해서 질적으로 딱! 중성이 없어요. 이거 아니면 저거에요.

사랑의 대접 아니면 저주의 대접, 그릇이 얼마나 예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이 담겨 있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요3장에 보면 예수님이 담겨 있으면 축복, 예수님의 복음이 안 담겨 있으면 저주,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판사, 변호사, 검사, 의사라도 상관없어요. 세상 아무리 소프라노 잘 해도 소용없어요.

저주를 담는 사발이에요. 악령이, 세상 신이 함께 있기 때문에 제가 가락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길 했지만 사람이 복음을 안 받아 들이는 것은 그 사람 잘못이 아니라고요. (고후4:4)에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려 버리니까 가려버리는데 무슨 수로 보여요! 자기가 아는 것만 있지요! 가려진 상태에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목숨이 중요하다!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가려져 있지 않으면 목숨보다 생명, 영생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 땅은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을 보여주는 비닐하우스라고 했지요! 비닐하우스에서 브닌나는 영생의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 받기로 작정된 사람은 하나예요. 그런데 한나에겐 자식이 없습니다. 자! 이제 부터 강의가 어려워져요. 성도가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축복이 있고, 축복이 있다할 것 같으면 인간은 축복을 더 좋아하지 저주를 안 좋아하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우리가 이해하는 축복으로 온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생명을 좋아하고 우리의 목숨보다도 까짓것 생명을 좋아할 수 있는데 어떻게 생명이 오면서 우리가 아는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저주의 형식으로 생명이 (속에는 물론 축복이 담겨져 있지만) 형식과 형태는 저주 형태로써 주어지느냐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게 잘 되게 되면 얼마든지 주님! 사랑하겠습니다라고 자진해서 나올수도 있는데 왜 우리가 보기에 저주 또는 실패가 다시말해 애가 있어야 될 한나에겐 애가 없는 거에요. 이건 누가 봐도 실패로 보이지요? 지금 한나에게 어떤 과제가 주어졌어요. 어떤 과제냐 하면 남들 보기에 실패가 곧 성공으로 바꿔줘야 될 책무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 정말 이건 인간의 힘으론 안되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을 때 사람들은 이것을 전부 실패로 봤잖아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예루살렘의 여자들이 얼마나 동정을 보냈다고요! 막 울었어요 안됐다고 아이고! 참 안됐다! 저 사람 참 안됐다! 죄도 없는데! 많은 착한 일을 했는데! 아저씨! 용기내세요! 힘내세요! 참으세요!라고 우니까

예수님께서 여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구를 위해 울어야 되는지 분간도 못하나?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이 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끝났어! 이제 예루살렘이 네팔에 지진 난 것처럼 다 무너져 버려요. 지금 도대체 누굴 위해서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느냐 측은해야 되는 대상을 분간 못해서 누가 불쌍한건지 분간도 못하고

이 땅에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구원 못받습니다. 장차 올 메시야가 실패의 모습으로, 실패라는 형식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 분이 하나님인데, 우리들이 기대했던 멋들어진 성공적인 하나님은 마귀였지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우리가 기피하는 것, 우리가 그렇게 안됐으면 좋겠는 것,

제가 지난 설교에 말했잖아요! 사람이 아무리 실패해도 아무리 바닥으로 나락으로 떨어져도 첨벙! 십자가로 떨어진다고요 이러다가 내 인생 꼬라박히는 게 아닌가? 꼬라박아도 꼬라박는 그 자리가 십자가 피 있는 자리로 꼬라박아요! 성도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처럼 보이지요! 본인에게 조차도

그래서 이 생명의 비닐하우스는 그냥 비닐하우스가 아니고 생명을 비닐하우스를 통해서 생산해내요! 없는 생명을 여기서 만들어 내는 비닐하우스가 약속의 땅이 되겠지요! 그 과정에 바로 사무엘상이,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실패자를 데리고 실패자속에서 생명을 끄집어 내는, 생산해 내는 작업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실시해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언약의 무늬라고 해요.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 무늬가 나오죠? 언약이 층층이 뭐가 있냐하면 무늬가 있어요. 그 무늬 나이테 한겹 한겹 하나 하나에 실패했던 자국, 증거들이 거기에 누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한 평생을 뒤돌아보게 되면 층층이 실패의 무늬, 나이테가 있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을 톱으로 잘아 보세요. 잘라보면 7살 때에, 20살 때에 실패 층층이 실패했던 무늬의 층이 나와요. 어떤 사람은 삼겹살, 어떤 사람은 오겹살, 칠겹살.. 성도는 매일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전체가 다 실패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 그 당시에도 메시야를 기다렸잖아요? 사람들이 메시야의 모델을 만들어 놓고 메시야가 여기 온다하고 기다렸어요. 그들은 거룩한 행동을 하면서, 거기에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바르세인과 서기관들이 여기에 메시야의 빈자리에 상상을 그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메시야는 여기서 뒤로 차지요 그게 아니라고 밀쳐내는 거예요. 자꾸만 마치 뭐같으냐 하면 장예모 감독, 중국의 유명한 감독이 만든 ‘5일의 마중’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면 그 주인공 여자가 늙어서 치매에 걸렸어요. 남편은 젊을 때 아내를 떠나고 뒤늦게 아내가 치매 걸린 이후에 찾아오니까 이미 못알아 봐요!

여기서 치매증상이 뭐냐하면 5일만 되면 남편이 역으로 온다고 기다려요. 남편 이름을 써서 피켓 들고 기다리는거예요. 그런데 이미 남편은 돌아와 옆에 있어도 치매로 못알아봐요. 그래서 오지 않는 남편을 매번 기다려요. 그런 아내를 위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역으로 나가줘요. 5일만 되면 무조건 역으로 나가서 남편 오기를 기다리는 치매 아내를 위해

꼭! 바르세인이나 사두개인 같아요. 메시야가 왔잖아요! 메시야가 왔는데 내가 기억했던 메시야를 인간은 그 메시야가 본인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기다린 메시야가 실패로 끝나면 영생이 주어지는데 계속 고집을 부리게 되면 계속 마귀적인 메시야만 기다리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힘으로 실패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실패는 실패할 때 실패인지 알수 있지 실패하기 전에 실패라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성공이 되요. 지금 제가 방금 어려운 말을 했는데 예를 들자면 사람이 너무 살기 힘들다 그러면 내가 죽어 버리자 하고 죽고자 해요. 그래서 정말 죽을 뻔 했어요. 이러면 그 사람은 다른 건 다 실패해도 자살은 성공했잖아요! 그게 바로 실패가 아닌 거예요. 그게 자살도 실패를 해야 진짜 실패가 되는 거에요.

실패라 하는 것은 항상 당겨서하는 실패란 개념이 인간에겐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지나고 난 뒤에 실패이다. 오늘도 실패다 이렇게 되는 건데,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실패로 만들어야 될 이유가 인간은 날 때부터 코앞에 있는 자기의 목숨을 쥐기 때문에 목숨이 영생을 가려버리는 칸막이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영생은 따로 있는데 기껏 자기 목숨이 생명이라고 알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것이 주께서 주신 생명인줄 알고 오늘도 교회와서 열심이 새벽기도 하면서 주여! 원상복귀 해주시옵소서! 다른 욕심 안냅니다. 돈 사기 당해서 500만원 이것만 어떻게 해주세요! 십일조 할테니까! 원상복귀 해주옵소서!

거기에 목사가 30배, 60배, 100배라고 하니까 또 계산하기 시작해서 가만있어봐라! 50만원하게 되면30배, 100배 같으면 5,000만원? 주여 ! 100배! 이처럼 추구하는 자체가 실패안하기 위해서 교회를 오기 때문에 사기꾼들이 이러면 성공합니다! 라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그런 마인드를 집어넣으니까 서로 죽이 잘 맞아요.

어떻게 콩쿨에서 우승 할 수 있겠습니까? 우승이 된다? 우승이 안된다? 주여! 제가 매일같이 실패하는 것도 주의 뜻 맞지요? 이것을 알아야 되지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날 이야기 했잖아요. 성경은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고 내가 왜 문제인가를 구성하는 책이라고, 아무 문제 없던 내가 왜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는지를

주님의 입장에서 진짜 주체, 주님 입장에서 언약 적 주체를 다시 만들어 주옵소서! 언약에 의해서 나 라는 인간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를 언약 적 능력으로 다시 만들어 주옵소서!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입니다. 만들어질 때 혼자서는 안 만들어져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남들 때 원수가 있어줘야 되요.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잖아요. 그것은 야곱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자기를 괴롭히는 형 에서가 있어줘야 되요. 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야곱이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원래 복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복을 장자가 받게 되어 있어요. 다 가져가지요.

그럼 동생은 뭐냐 형의 하인이에요. 형이 살림을 살면 저 뒷방에서 사는 게 동생들이에요. 그리고 대기하고 있다가 형이 아들을 못 낳으면 동생이 형수와 관계해서 자식을 계속 낳아줘야 되요. 그게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직 맏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동생들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축복은 맏이를 통해서 오기 때문에

그런데 그 맏이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목숨이라는 차원에서 맏이는,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장땡이에요. 먼저 나면 끝났어요! 육신적으로 끝난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입장에서는 아깝지요? 왜냐하면 진짜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면 덜 억울 할텐데 쌍둥이인데 금을 누가 먼저 넘었느냐 머리가 먼저 나와서, 에서가 먼저 선을 넘은 게 에서가 먼저 넘었고 야곱이 뒷꿈치를 붙잡고 나온거에요. 아까운 거에요.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상식이잖아요. 먼저 난 운명을 바꿀 수가 없는 거에요. 토끼와 거북이에서 누가 이기겠습니까? 토끼가 이기지요! 빠른 걸 어떻게 바꿉니까? 그런데 야곱은 거북이가 토끼를 추원하려고 시도하는 거에요. 참!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야곱은 뭐냐 처음부터 실패자이죠. 처음부터 실패 한거에요.

처음부터 실패 했다는 말은 뭐냐 거기에 플러스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실패한 그것이 본인에겐 실패지만 언약의 성공을 위해서 너는 실패자로 가담되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셨습니까? 그럼 그것은 구원받은 겁니다. 구원에 성공하신 거에요. 십자가 앞에서 본인이 실패자로 인정하십니까? 나는 강도요 창녀인줄을 아시겠습니까? 바로 당신이 이미 벌써 구원에 넉넉하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뭐 대통령이다, 국회의원이다! 라고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그러면 대통령 되도 괜찮아요! 국회의원 되도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국회의원 뺏지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대통령이 어떤 자리인데~ 이렇게 나오면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에서와 야곱의 관계처럼 언약은 반드시 대적관계, 원수관계가 성립이 되면서 언약은 이 지상에서 현실화 되는 겁니다.

(1: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나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1: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5절 다시보면 애도 못 낳으면서 무슨 형님 노릇 하려고 합니까? 라고 했겠지요! 자식을 못 낳는다는 것은 태가 막히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저주의 표상입니다. 축복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하나님나라와 연결될 때 축복이 되거든요! 태가 막혔다는 것은 내 육신이 끊어진다는 것이고 장차 끝에 오시는 메시야 시대에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늙어 죽으면 끝나는 거에요. 자식이 없으니까!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럼 나는 늙어 죽어도 자식은 생생하니까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으면 자식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할아버지가 들어있고 증조할아버지도 제2의 제3의 자아가 자식이라는 연속된 자식을 통해서 이어져 이어져서 나중엔 하늘나라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자식을 낳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지요! 그런데 자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난 너하고 안 놀아!”라는 의사표시로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의 삶이 늙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이젠 난 없어요. 죽어 흙이 되면 끝이에요. 브닌나는 기고만장 한게에요. 난 자식있다! 결국 자식이 있다라는 것은 엘가나라는 레위지파에서 자식은 누가 대표합니까? 브닌나의 자식이 대표하겠지요!

그리고 레위지파라고 하는 것은 누가 지정한거예요? 레위지파가 알아서 회의해서 우리가 레위지파다 한거에요? 누가 지정한거에요? 하나님이 야곱의 언약 즉 12지파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지파 자체가 축복이에요. 그 자리가, 축복의 대를 이을 쪽이 브닌나가 되어 버리고 그러면 자식을 못 낳는 한나가 탈락이 되버립니다. 실패지요.

그러데 실패의 노선에서 메시야가 온다는 사실, 이거는 상상도 못합니다. 구원 받았다는 자에게 구원이 오는 게 아니고 구원 받지 못한자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구원 받아야 할까요? 구원 받지 말아야 할까요? 참 어려운 문제지요? 그래서 오늘 공식을 하나 적어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공식인데요. 뭐냐하면 ‘저주가 모아져야 구원이 된다’ 다른 말로 실패가 주어져야 구원이 된다. 십자가가 뭐냐하면 모든 저주를 다 모은 게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 안에 만 영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저주 받는 우리를 모아서 주께서 영생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저주 받는 우리를 통해서 영생을 만들어 내신다. 그러면 영생을 얻는데도 우리가 한 몫을 합니까? 안합니까? 못해요!! 영생을 받는 것은 우리를 계속 실패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솜씨로 영생을 만들어 내시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게 되는 거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구원이라는 것은 언약의 무늬가 있다.

무슨 무늬겠습니까? 실패와 저주의 무늬, 또 중요한건 그 실패를 어떻게 안다고 했습니까? 뒤돌아봐야 알지, “나 실패해서 구원 받을래!” 이렇게 하는 자체가 본인이 하는 얍삽한 그 자체가 실패를 모아서 성공으로 잇겠다는 것을 자기에게 성공할 힘이, 조건이 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데 그런 건 없습니다!

한나를 통해서 그러면 우리가 얻을게 뭡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영생의 비닐하우스를 우리주변에 설치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요. 그리고 설치된 비닐하우스에 모든 장치, 이슬과 물을 주는 모든 장치는 그때그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알아서 주께 드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살다보면 실패해요. 왜 그것이 성공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뭐냐하면 살다보면 성공하겠지? 이게 문제에요. 살다 보면 좋은 날 오겠지! 아니예요! 살다보면 실패하는 날 옵니다. 감사하세요! 그날을 “아이고! 목사님 그런 말씀마세요! 지금도 실패인데요!” 아니요! 아직 멀었어요! 지금 실패는 나중에 보면 숨 쉴만한 실패지요! 아주 숨도 못쉴 실패가 올 수도 있어요! 아직 배부른 소리 하지 마세요!

아직 멀었어요! 소위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의 제일 큰 실패가 뭐냐하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소리를 제일 듣기 싫어해요! 마지막 카드가 기도인데 믿는 자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 이건데 믿는 자의 기도는 능력 없거든요!! 그러면 (능력) 있다고 해야 된다고 해야 되는데 또 삐져가지고 “내가 기도하나 봐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럼 주께서 “기도하지 마라! 누가 하라고 했냐! ”

그런데 기도 안하면 안될 다급한 일이 또 터지게 되어 있어요. 혹시 (여러분 중에) 네팔에 일가 친척있습니까? 아는 사람 있어요? 없지요! 그런데 만약에 누구의 자녀 하나가 네팔로 베낭 여행을 갔다 그러면 기도가 절로 되지요! “주여! 왜 이러십니까?” 하필 타이밍이 절묘하게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하십니까? 기도를 안 할래야 안할수가 없지요?

기도가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 기도하는 순간이 아니고 주께서 알려주시는 실패의 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신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생 안에 포함된 사람이에요. 영생 주시려고 우리 목숨에 연연하지 않게 하시는 거에요. 비로소 그 동안 내가 살아온 것이 주님 사실은 다 내 목숨을 내가 어떻게 관리를 해볼까하고 교회다닌다 하는 그것이 본색이 들통나는 그 순간이에요.

이런 것 안해도 영생 얻는데 그렇잖아요! 내 목숨, 내가 근사하게 유지해보려고 그냥 얍삽한 짓을 한 그것이 교회다니기, 이런거에요.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이해하는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럼 나 교회 안다니까?” 안 다닐 수 있습니까? 답답한데 집에 있어 보세요! 근지럽지!

제가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냐 하면 한나의 기도를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하나다는 말이죠 하나의 기도를 누가 시키느냐 비닐하우스에 있는 주님이 시켰어요 한나의 기도를 왜냐하면 그 증거가 뭡니까? 브닌나가 “아이고! 형님 애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까? 약 올리지요! 옆에서 약을 올릴 때 브닌나가 약 올릴만 해요 왜 주님이 주신 축복의 증거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본인은 자식이 없으니까 지금 한나가 기도하는 게 무슨 내용입니까? 브닌나 저주받으라고 하는 겁니까? 아니면 남편이 나에게 재산을 갑절이나 주라고 하는 겁니까? 이미 그건 줬어요! 남편의 직업이 제사장이니까 (제물의 분깃) 갑절로 줬어요! 이 부분이 좀 어렵지만 설명을 해야겠네!

지금 한나의 키가 155Cm 몸무게60Kg에 바느질 우수, 김매기는 2등급 이런 요건들이 한나에요. 하나님께서는 키도 작은 것이.. 이런 게 아니라니까요! 한나라는 조건은 자신 스스로 보기에는 좀 이쁘다 남편의 사랑을 더 받는다 이런 조건들을 갖춰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규정짓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위해서 한나에게 없는 것으로 주체를 만들어 버립니다. 한나에겐 뭐가 없습니까? 자식이 없지요! 자식이야기만 꺼내면 한나는 아무리 조건을 갖추고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아도 이건 실패자에요. 실패자지요! 그런데 여기서 자식에 관한 있음에 관해서는 누가 승리자입니까? 브닌나가 승리자지요!

바로 ‘없음’의 자리에 누가 계시냐? 예수님이 계시는 겁니다. 메시야가 계시고 언약의 성공자가 계시는 거에요. 만약에 어떤 교회에 가서 여기서 나이50이상인데 흰머리가 없는 사람만 천국에 갑니다. 헌금 많이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니까 그 교회에선 나는 뭡니까? 지옥가는 겁니다.

왜? 염색해서 흰머리 없는 것이지 염색 안하고 흰머리 없는 사람, 이런 조건을 내세우면 그 교회 교인은 전부 실패자지요! 그 교회가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우리가 내밀 수 있는걸 다 끊어 버립니다. 왜? 다 실패자로 만들어야 되요. 그리고 우리가 다 저주 받아야 되요. 그 저주가 모아져서 우리가 저주라고 칭하는 것들이 모아져서 생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받게 되면 그 안에서 영생이라는 유리 거울을 받게 되면 우리는 뭡니까? 그 앞에서 나는 실패자이고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은 것은 값없이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값없이’라는 말씀, 값없이 영생 받았다라는 그 말이 이것은 평생을 두고 실감나는 거에요.

‘값없이’를 기억하는 게 아니고 ‘값없이’를 정보로, 지식으로, 내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 자체로 ‘값없이’를 보여주는 ‘값없이’를 표현하는 그런 실패의 무늬를 언약적 무늬로 이렇게 우리를 몰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성공이 아니고 주님의 성공이지요. “너 같은 인간도 구원 받았다!” 얼마나 주님이 신나하시는지 몰라요!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 한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그 실패의 자리에서 뭐도 실패에 포함되냐 하면 남편의 애정행위, 사랑, 갑절을 주는 그 사랑도 인간의 성공에 요소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렇습니다. 혈육관계란 죽음의 관계에요. 결국은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관계도 다 떨어지면 죽음으로 갈라서면 평소에 남남이 같이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부부가 서로 정을 나누냐! 그건 상대가 있음으로 나의 외로움이 덜하고 내가 하는데 상대가 보탬이 되기 때문에, 배우자가 보탬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 갈 수 있는 게 없어요. “당신 내 마음 알지?” 그런 건 없어요! 인간이요 나말고 다른 타인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할 수 없어요. 자식이 부모 마음을 알아요? 말도 안되는 소리죠! 부부가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알아요? 몰라요!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무슨 남이 내 마음을 알겠어요! 그게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어떻게 느브갓네살의 꿈을 다니엘이 알 수 있어요? 모르지요! 다니엘도 몰랐어요!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니까 아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 목숨만 충실하게 지키다가 평생을 그냥 자기목숨과 함께 공중분해 하고 마는 겁니다. 내가 남을 알 수 없듯이 내가 주님의 나라에 간다? 못가요! 나는 내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나는 내 안에 살아요. 내 밖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아무리.. 행위 해도 주인공은 ‘나’이지 나를 바깥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항상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이게 피히테의 철학에 보면 나와요. 인간은 자기부터 시작해서 자기로 돌아오는 거에요. 나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다! 나 외에는 다른 현실은 없어요! 일상적으로 왜 부부로 사느냐 헤어지면 외롭잖아요! 같이 있으면 좋잖아요! 싸우더라도 옆에 있는 게 좋잖아요! 덜 외롭고

왜 그동안 준 정이 얼만큼인데! 그래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 아니고 일종의 투자 내지는 자기 영역의 확대를 의미합니다. 만약에 여자가 자기하고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살면 휘발유통 가지고 가서 불질러 버리지요! “내가 너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 너는 속상하다고 나를 한번에 버리고 다른 인간하고 사느냐! 내가 복수하고 말겠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사랑한적 없다는 거에요 없고 나는 너에게 투자했던 거에요.

여기 개 한 마리 있는데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려 봐요 그동안 투자한 돈이 얼만데! 그래서 이게 뭐냐하면 개는 내 영역 안에 내 소유가 돼 버렸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진정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는 없어요! 내 새끼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내 영역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자식이 아빠 엄마 말고 남편만 챙기고 그러면 섭섭하지요! 저게 벌써 결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엄마 생일도 잊어 버리고 자기들 끼리만 놀러 가고.. 타인에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맙시다! 그것을 이렇게 합시다! 표현을 예의 차리는 거에요. 에티켓이에요. 따라서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게 아닙니다. 그저 자기 한풀이 하는 거에요.

속이 다 시원한네! 자기 바깥으로는 못나가서 그래서 얼마나 한풀이를 했으면 술취했지? 라고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너 술먹었지? 어디서 술 주정이야! 술 먹은 게 아닙니다. 분통이 터져서 기도 한 겁니다. 누구에게 기도 했지요? 하나님한테 하는 거예요. 한나는 기도해도 하나님에게 하소연을 할 뿐이지 기도하는 그 순간도 자기영역에서 못 벗어나서 자기영역을 패쇠적으로 품고 있습니다. 이 원통함을 어떻게 좀 해결해 달라고, 기도 실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실패케 했지요! 브닌나 때문에 둘다에게 애가 없으면 괞찮아요 애가 없으면 남편의 사랑을 누가 더 받았나하고 이렇게 끝날건데 둘다 실패한 것이 한쪽은 애를 가졌고 한 쪽은 못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나로 하여금 극도의 자기주의, 자기 밖에 모르는 인간의 모습으로 한나를 변모시킨 겁니다.

원통해서 못살겠다 이런거에요. 애가 죽던지 나에게 하나 주던지 어떤 조치를 취해 주시던지,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언급하시고 수용했다라는 말은 한나의 기도가 어디에 포함되있나 이미 포함된 기도로써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다. 네가 실패한 것은 언약안에서 실패한 것이다라고

예를 들면 강도가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 전에도 이야기 했잖아요 네가 강도짓 한 것도 하나님의 전체 언약 적 그림 안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었다라는 그 전체 그림을 강도가 왜 그런지 모르지만 알게 되었을 때 주여! 오늘 밤에 저를 기억하소서! 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반대편의 강도는 “너 누구 보고 이야기 하고 있냐? 너는 몰라도 돼!” 왜 너는 니 이야기만 해야지 너의 범위를 벗어난 범위까지 니가 왜 알아차리느냐는 거지요! 한나가 기도를 하므로써 기도한 한나가 2장에 보면 한나의 기도 내용이 새로운 찬양으로 바뀝니다. 개인의 기도에서 전체의 기도를 대변해 주는 한나의 찬양이 되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그런거예요. 이런 기도를 나중에 마리아가 합니다. 누가복음1장에서 마리아가 하지요. 그렇게 한나는 성공한 적이 없어요. 실패 속에 하나님의 성공이 담겨 있는 거지요! 한나는 여전히 실패해요. 앞으로 계속 실패 할 거예요. 마리아도 계속 실패할 거예요.

하지만 실패한 것 속에 실패하게 하신분이 실패한 한나와 실패한 마리아를 통해서 실패한 강도를 통해서 계속 성공자로 나오지요! 언약을 영생을 얻는 성공자로 나와 버리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하듯이 한나와 마리아를 대할수 있는 눈이 주변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시하겠지요! “에잇! 조용히 해! 어디 여자가 술 먹고 와서 기도하고 그래!” 엘리가 오해했잖아요

그 오해가 장차 메시야가 오실 때 예수님이 받아야 될 오해를 한나가 미리 당겨서 받은 거에요. 그러니 한나는 철저하게 주님이 미리 당겨서 쓰신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노리개지요! 주님의 노리개. 그런데 그게 어딥니까! 아무나 되는 역할이 아니잖아요! 천국가야 될 사람이지

여러분들이 주님의 노리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항상 매일같이 오늘도 실패다 오늘도 자식에게 100점 맞아 오길 기대 했지만 98점 받아서 전교1등 했지만 100점으로 1등은 아니잖아요 “ 이놈아! 다음엔 100점 맞아 1등 해라 전국1등 석차가 15등, 얘야! 오늘도 실패다 전국 1등 해야 될텐데” 또 다음에 전국1등 하니까 그래도 실패다

왜 1등은 했는데 두드러기가 나서 그래도 실패다. 계속해서 내 위주로 내 한 풀이 위주로 하면서 우리는 실패일수 밖에 없는데 그걸 통해서 내가 원했던 성공은 주시지 않고 전체 안목, 그 실패가 곧 영생을 얻는데 있어 성공의 재료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오늘도 성공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대전2강 사무엘상1장 (2).hwp (115.0K), Dow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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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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