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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포이에르바흐 150616강의[신학]

포이에르바흐 150616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한윤범(IP:14.♡.134.87)

15-06-19 17:50

20150616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
(강의:이근호 목사)

교재 보세요. 교재 따라 하겠습니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1804~1872), 19세기 독일 철학자인데 이 사람이 이야기한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서 기독교에서 나온 모든 교리는 처음부터 신의 계시가 아니고 인간 속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뭔가 신기한 것이 있는가 싶어 교회 나왔는데 별 것 없다는 거거든요.

이런 포이에르바흐가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가 30~40년 교회 믿으면 교회에서 나올 것 없고 별 것 없으면 교회를 떠나야 돼요. 그런데 별 것 없는 걸 알면서도 계속 교회 다닌다는 말은 뭔 뜻이겠어요? 진리가 없다는 것을 본인이 실망하기 싫은 거예요. 진리 없는 건 맞는데 그러나 그동안 내가 그 교회 다녔던 청춘이 세월이 아깝잖아요. 진리가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천국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치 천국이 있고 내가 그걸 믿는 듯이 그렇게 장로로써 목사로써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장로님, 대표기도도 잘 하시던데 천국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면, “그건 나처럼 오래 다닌 사람에게 묻는 게 아니고 그런 시시한 것에 답하기 싫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속으로는 30~40년 다녔는데 천국이고 진리고 없더라 이 말이에요. 그냥 뒤늦게 발 빼면 자기 인생이 허접해지잖아요. 평생 동안 실패한 인생으로 남는다는 것이 자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없는데 있는 것처럼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그것이 본인의 위신 때문에 버틸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자기 아들, 손자들에게 계속해서 전수가 되면 그 전체가 교회사가 돼요.

교회사의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 교회 몇 년 됐습니다. 예배당 지은 지 몇 년 됐습니다. 그거잖아요. 진리가 무엇인지는 말 안 해요. 우리 교회 역사에 처음 오신 목사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고, 그 다음 목사가 이런 일했고, 그 다음 목사는 300명 교인이 500명으로 늘어났고, 교육관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지을 때 부흥사가 왔는데 헌금 많이 나왔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교회 어느 권사가 시집가서 아들 낳았는데 이번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뭘 믿습니까? 그런 기본적인 건 묻지 마시고. 사실은 그 기본적인 것이 전부 없는 거예요. 쉬쉬하고 있는 거예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이런 것들은 인간들이 지어낸 건데, 인간들 마음속에 이미 있는 건데 누가 용감하게 터뜨릴 수 있는 모두가 ‘예스’할 때 혼자 ‘아니오’ 할 수 있는 좀 그런 사람 나와서

동화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있지요. 누가 봐도 벌거벗었는데 신하들이 전부 다 좋은 옷 입었습니다. 임금님이 그러길 원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부한다고 그렇게 된 거예요. 벌거벗은 임금님에선 신하가 아부하지만 인간은 누구한테 아부하겠어요? 인간은 본인의 역사로 본인 자신에게 아부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겁니다. 자기가 실수한 걸 뻔히 알면서도 실수한 자신이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럽기 때문에 실수 아닌 것처럼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용감하게 나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입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기독교의 뿌리부터 뒤엎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책을 누가 보느냐 하면, 신학자들이 많이 보지요. 목사들은 목회에 도움이 안 되니까 안 보고. 신학자들은 유식한 체하기 위해서 봐요. 그러나 보고 난 뒤에 말문을 닫아버려요. 감추고 있었던 본인의 신앙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까버리면 뭔가 반박이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흐가 신학을 한 사람이거든요. 신학이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하지 않아요.

마지막 평부터 먼저 봅시다. 이 내용들이 우리의 내부를 후비기 때문에 이 사람 주장을 따라가면 미쳐버립니다. 욕하고 싶은데 반박은 안 되고 욕은 나오고. 아는 사람끼리 너무 한 것 아니냐. 우리만 생각하지 말고 민중들을 생각해야지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 입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이런 식으로 화내지요. 진리 때문에 화내는 게 아니고 들켰다는 것 때문에 화내는 거죠.

[포이에르바흐가 종교적 사회적 가치를 부정한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더 미워. 무슨 뜻이냐 하면, 종교란 진리가 있어서가 아니고 진리란 게 있어줘야 사회가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끼리 보통 살 때는 되도 않는 아버지라는 걸 다 알아요. 돈만 버는 기계지 남자답지 못하고 다 알아요. 그런데 막상 이사 간다든지 할 때는 바보 같고 좀 어설픈 아버지지만 그때만큼은 집 팔고 이사 갈까요, 그냥 이 집에 살까요? 그 바보 같은 아버지의 입에서 마지막 멘트가 나오기를 다른 식구들이 요청한다니까요. 하지만 누군가 이야기해줘야 돼요. 그게 그 가족의 사회적인 운영체제입니다. 박근혜 욕하고 하는데 대통령 없으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은 없으면 북한은 어떻게 되겠어요? 괴로운 것은 민중들, 북한주민들이 힘들지요. 궁예 보세요. 완전히 미친 인간이잖아요. 하지만 궁예가 없으면 후삼국시대에 혼란을 누가 잡습니까? 못 잡지요.

그러니까 기독교란 뭐냐? 교회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이야기, 하나님이야기 다 필요한데 그건 다들 하나님을 원하고 있고 메시아를 원하고 있는 입장에서 메시아를 인간의 품속에 있는 것으로 그럴싸하게 만들어냈고, 하나님을 만들어낸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포이에르바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더 나쁜 거예요.

종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신학이나 종교는 인간학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한지 그동안 교회에서 가르쳤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인간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이 그렇게 거룩하다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에 불과한 거예요. 신은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다. 말하는 게 종교 자체입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우리는 유한하고 부족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옳다고 교회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해주자는 겁니다. 그런 소리하는 게 더 미운 거예요.

[인간을 숭배하는 것이 내가 아니고 종교다. 쉽게 말해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니 인간아, 너는 그저 인간에 불과한줄 알라. 종교를 가졌다고 인간 위상이 변모하는 그 위선이 싫어서 이렇게 기독교 까발리는 책을 썼다.] 뻔한 데 신의 이름으로 폭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낮춰보고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이름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 삼는 그게 미워서 다시 말해서 거창한 명분 아래서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면서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했다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까발렸다는 게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이란 말이죠.

기독교 뭐 있는데. 뻔한데 뭐 없는데 없는 걸 마치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 말자는 거예요.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교회에 뭔가 있는가 싶어서 와봤는데 뭐 없어. 그래서 자기는 교회 안 다녀. 이 가게에 혹시 내가 필요한 것 있습니까? 쇼윈도는 멋진데 내가 찾는 물건은 없어. 그러면 나가버려요. 그 가게를 나왔는데 그 가게가 또 구라를 치기를 우리 가게는 없는 게 없고 모든 것을 구비해놨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돌아서서 화가 난 포이에르바흐가, “내가 가보니 전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야.”라고 고발한 겁니다. 추적60분이에요.

신학 하겠다고 기독교의 본질이 유명하다고 이것 봐야 석사, 박사학위 받는다고 해서 외국에 유학 가서 이 책을 본 사람들, 신학박사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한 사람들이 이 책 보고 난 뒤에는 신학 해서 취직해야지. 그렇게 돌아서게 만든 책입니다. 어차피 혹시 하나님 있는지 해서 했는데 다 인간이 지어낸 건데 없네. 없다고 하면 취직이 안 되니까 이건 우리끼리만 알고 밥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처신하게 만든 것에 공헌한 책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이 있기에 이토록 겁나는 책이냐. 무슨 내용을 담았기에 겁나는지 봅시다. [짐승에 있어서 내적 생활과 외적 생활을 합일돼있지만 인간은 내적 생활, 외적 생활 둘로 가지고 있다.] 이게 칸트 철학에서 나온 건데 짐승은 음흉한 게 없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내놓는 생각 따로 있고 속에 숨겨놓은 생각 따로 있지요. 이렇게 된 것은 반성이지요.

개가 반성합니까? 반성 안 하지요. 반성 안 하는 개가 착합니까,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착해요? 반성한다는 것은 자기한테 문제 있다는 거죠. 하는 행동이 시간만 약간 지나서 뒤돌아보니까 아쉽다고 하지요. 그게 반성이잖아요. 반성했다는 것은 항상 후회할 소지가 있는 속성을 내가 품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반성한다는 말은 따라 잡은 거예요. 인간이 위대한 것은 반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창세기 1장 28절에 의해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렇게 교회에서 철학에서 이야기해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합니다. 만물의 영장에 지배받는 개나 코스모스는 반성이 없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반성을 하게 되니까 그러면 인간이 만물을 지배할 때 그 지배가 온전한 지배겠어요, 미흡한 지배겠어요? 미흡한 지배지요. 그러면 지배를 받게 되면 어설픈, 미흡한 지배 때문에 손해보고 고통당하고 상처받는 쪽은 누굽니까? 지배받는 쪽이 상처받겠지요.

쉽게 말해서 이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게 돼있지요. 창세기에 의해서. 그러면 남자는 반성 안 해도 돼요? 늘 반성하잖아요. 본인은 늘 반성하면 그만이겠지만 반성해야 될 부실한 처신 때문에 피해보는 쪽은 누굽니까? 아내지요. 아내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자기는 해놓고 미안하다고 반성하면 끝나지만 미안한 짓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의 피해는 누가 갚아줘야 돼요? 갚아줄 사람이 없는데. 그래놓고 남자는 남자니까 또 지배하고 달려들고.

그게 바로 칸트가 이해한 것은, 인간은 유한하지요. 칸트 말과 포이에르바흐 말 듣고 누가 맞는지 비교해보세요. 칸트는 인간은 왜 유한하냐? 무한의 의식에 비춰볼 때 유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우주는 무한하고 하나님도 무한하다는 생각이 유한에게서는 나올 수 없지요. 왜냐하면 유한한 것은 유한한 생각만 하기 때문에. 칸트의 말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내가 반성하는 재미로 살아야지. 이러면 인간이 무한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청소년들이 얼굴 잘 생긴 연예인들을 왜 좋아합니까? 나도 저처럼 되었으면 하지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내가 있기 전에 이미 잘 생긴 배우가 먼저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촌에서 예쁜 순이가, 하여튼 우리 동네에서는 순이가 제일 예뻐. 교회에서 반주하는 순이가 제일 예뻐. 하던 청년이 서울 강남 학원에 다닌 다음에는 오랜만에 만난 순이는 촌스러워 짝이 없어요. 순이가 말 걸까 무서워. 튕길 가치도 없어.

왜 그렇습니까? 이게 칸트 이야기에요. 사람이 반성한다는 것은 본의 아니게 무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무한을 칸트는 신이라고 한 거예요. 칸트는 인간이 신을 만들 수 없다는 거예요. 왜? 반성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후회라는 것이 아쉽지만 재미있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나로 하여금 유한을 느끼게 하는 것은 나 말고 다른 분이 계시는데 그게 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흐를 보세요. [인간은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종교란 이름의 무한자 의식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하나의 존재자라면 존재자가 갖고 있는 한계 또한 존재자가 가지는 의식의 한계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예를 들면 이성의 목적은 이성이고 사랑의 목적은 그냥 사랑이다.

예를 든 것도 어렵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에 학원에서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랑의 목적은 여학생이겠지요. 이해되지요. 그런데 선생이, “학생, 물이 다 됐네.” 이러면 학생이 말하기를, “선생님. 거기에 신경 안 씁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목마를 때는 물이지만 지금 정신이 사랑에 팔려있지요. 사랑의 목적은 사랑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언제 하나님을 믿어요?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왜 난 이것밖에 안 되지. 왜 나는 이번 일에 실패했지.” 자기 유한성을 느낄 때 뭘 끄집어냅니까? 내가 원했던 것은 이만큼인데, 9를 원하는데 현실은 6밖에 안 됐을 때 3이 빠졌지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9 정도 올라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수입이 200만원 돼야 되는데 100만원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뭐 하시나. 나한테 수입 100만원 주지.

그러니까 유한할 때 하나님 찾으니까 내가 유한을 안 느끼면 하나님 안 찾지요. 지금 여학생이 좋은데 목사가, “여러분, 오늘 밤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면” 그 소리 안 들리지요. 지금 오면 안 되지. 결혼하고 난 뒤에 재림해야지. 포이에르바하가 종교 분야, 과학 분야, 예술 분야, 그 모든 분야는 중심에 누가 있단 말입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관심 두느냐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따라서 일요일에 교회도 가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직업고 갖고.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사회가 각자 이발사는 이발사가 최고다, 미장원은 미용사가 최고다, 축구선수는 축구선수가 최고다. 왜 축구장에 안 옵니까? 이렇게 주장하면 사회가 안 되잖아요. 모든 것을 총괄하는 신 개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유통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사회 질서 차원에서 그리고 정서적인 안정 차원에서 이해될 만 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어야 믿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가 만들어놓고 그걸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은 꼭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신을 욕보이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정말 신 없이는 못 산다는 겁니다. 굉장히 마음씨 고운 아저씨에요. 어떤 겁니까.

그 다음에 봅시다. 이렇게 해도 어려워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지요. [쉬운 예가 있다. 태양은 여러 행성의 공통적인 객체이다. 수성, 금성, 토성, 천왕성에 나름대로의 태양이다.] 제가 설명할테니까 이 예를 들으면 포이에르바흐 말에 전적으로 찬동하게 될 거예요. 태양은 하나인데 행성들이 태양계를 돌고 있지요. 수성에 살고 있는 태양의 모습과 지구에 살고 있는 태양의 모습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왜냐하면 거리가 다르고 태양은 실제로 지구상의 태양과 다른 태양이다. 크기와 빛의 강도와 성질이 다르다. 지구에서는 크게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작게 보이잖아요.

또 예가 나와요. 중간에 보면, [하루살이에서 짧은 생명도 다른 동물에서의 수 년 생명만큼 긴 것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 분명히 16일 지냈는데 거기 갇힌 사람은 며칠 지났다고 합니까? 24시간, 한 30시간 됐습니까? 그런데 16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고 산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를 둘러싼 현실을 누가 규명하고 누가 결정한 겁니까? 현실 속에 있는 내가 그 현실에 대해서 새롭게 내게 맞도록 규정한 거예요.

그렇다면 백 사람이 있다면 백 사람이 보는 신은 다 다르겠지요. 태양계에 행성은 아홉 개지만 태양은 하나의 태양인 것처럼 신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모습의 신, 그 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신은 누가 만들었다? 인간이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신을 생각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되겠지요. 신이 먼저 있고 신이 인간에게 각자 신의 품성을 나눠주는 것이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각자의 신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아야지요. 이 분필을 학생들에게 나눠준다면 이 분필은 똑같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 신이란 분필은 다 달라요. 그러니까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게 맞잖아요. 신학자들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 논리에. 벌써 신학자들 깨졌어요.

그 다음에 그 밑에, [제한된 본질은 제한된 오성을 갖고 있어서 완전하고 만족케 하는 것이다.] 완전하고 만족하다는 말은, 개에게 사료를 주잖아요. 여러분, 혹시 사료 먹어봤습니까? 그게 맛있어요? 또 먹고 싶어요?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런데 개한테 짜장면이 낫습니까, 사료가 낫습니까? 사료가 낫지요. 개는 사료에 되게 만족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라는 것은 그 배경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정말 신이시여 저를 만족케 하시니 제가 보답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찬양하잖아요. 그럼 찬양은 결국 인간의 자기만족이에요.

남편이 몸이 아픈데 건강해졌다. 물어봅시다. 어려워서 물어야 돼요. 남편이 건강해졌어요. 그래서 아내가 하나님께 찬양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 또 건강해요. 그래도 찬양합니까? 건강 때문에 찬양했는데 다음날도 건강한데 왜 찬양 안 합니까? 그건 뭐냐 하면, 계속 건강해서가 아니라 아프다는 것에 대해서 불만족이 발생한 거예요. 하나님 은혜로 건강해지니까 불만족이 채워져서 찬양이 나온 거죠. 그러면 남편이 아파야 돼. 그리고 그 다음 날 나아야 찬양이 돼요. 그래서 포이에르바흐는 모든 신에 대한 찬양은 자기 내부의 심리적 구조에 의해서 발생된 거다. 그것도 그 사람 내부에. 참 할 말이 없지요. 맞는 소리만 하니까.

그 밑에 봅시다. 하나하나 설명하려니까 내가 무섭다. [당신의 본질은 당신의 눈이 닿는 한 연장된 것으로 역으로 당신의 눈은 당신의 본질이 연장된 것까지만 도달한다.] 이게 뭐냐 하면, 놀러 갔을 때 여러분이 초등학교 선생님입니다. 대충은 소풍 갈 장소를 정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안 정했어요. 지금 2학년 2반 담임을 하는데 2학년 1반부터 4반까지 다 놀러갔어요. 어떤 지역은 대충 잡았는데 그 지역에서 물 많고 잔디 좋은 계곡은 2학년 3반 선생한테 빼앗기면 안 돼요. 이것 빼앗기면 그 다음부터 얘들한테 신임을 못 받아. 이미 다른 얘들과 비교 되잖아요. 제일 먼저 잔디 있고 물 있는 계곡을 봤으면 의리고 뭐고 치우고 얘들 생각해서 여기 짐 풀라고 했을 때 얘들은 좋아하겠지요.

2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 좋은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2학년 3반 선생님이 그 모퉁이를 도니까 더 좋은 곳이 나왔어요. 나중에 2반 아이들은 짜증이 나서 선생님은 돌아보고 하고 뭘 급하게 여기 해서 다른 반 얘들은 다 좋은데 가고. 선생이 하는 말이, 여기 나오지요. 내 눈이 닿는 그곳이 바로 나의 좋음의 전부에요.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 알지요. 나이 칠십 먹은 사람이 갑자기 이십 대 되는. 그 영화 보면서 우는 사람들 많았어요. 남편 독일 광부하고 죽는 이야기거든요. 남들 보기에는 인생 망가졌다고 하지만 그 노인네는 노래만 불러도 행복해요. 하얀 나비 부르면서 울거든요. 노래만 있어도 행복해요. 이게 뭐냐? 인간의 행복은 자기가 만족하는 것까지만 자기의 전부에요. 그게 찬양이고 그게 감사고.

다시 말해서 교회는 사람들이 진리 찾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잃어버린 자기 불만족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스스로 자기를 조작해서 진리가 아니고 자기가 만족하게끔 성경말씀을 편집하고 조작해서 그걸 구성해요. 목사 시킨 대로 하지 않아요. 본인이 만족하기 원했기 때문에 본인이 알아서 은혜를 생산해낸다니까요. 그래놓고 오늘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본인이 다듬어놨기 때문에 스스로 자위하고 만족하는 거예요. 찬양하고.

그 다음에 봅시다. 오늘 다 할지 모르겠지만 다 합시다. [감정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이건 슐라이어마허. 내가 이걸 일부러 안 했어요. 이 사람 주장이 뭐냐 하면, 종교란 교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신의 계시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감정이다. 절대 의존감정이다. 그걸 주장해서 대히트를 쳤어요. 이 말은 절대자에 의존한다면 다른 종교도 진리다. 그 이야기거든요. 신의 본질은 감정의 본질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유명한 신학자에요. 그리고 독일교회에서 높은 자리까지 한 사람이에요. 해석학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이라고 알려졌지요.

[감정은 당신의 신입니다.] 이것 함축된 중요한 말이지요. 우리는 내 감정을 자아가 다스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감정에 당신이 신도입니다. 감정대로 당신은 순복할 뿐입니다. 전체를 합쳐서 당신입니다.

그렇다면 당신 안의 본질로부터 다른 대상자의 본질을 구별하라는 것,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감정을 초월하는가? 여기에서 신학자들은 뿅 가버렸어요. 왜냐하면 초월 자체가 초월 해봤자 초월했던 신비로운 감정도 누구 감정이에요? 내가 미처 몰랐을 뿐이지 새롭게 발굴했을 뿐이지 없던 것을 만들어낸 건 아니거든요.

정읍에 가면 정식에 반찬이 60가지 나온답니다. 먹고 참 맛있다고 했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것 먹어보니까 더 맛있어. 그러면 앞에 감사는 취소. 그런데 그 다음 것은 더 맛있어. 그런 식으로 먹는데 배가 불러서 58가지밖에 못 먹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뭘 유보해야 돼요? 진짜 이 반찬 정말 맛있다는 말은 다음에 와서 안 먹은 것 2가지 먹을 때까지 유보해야 돼요.

그러면 인간에게 초월이 있습니까? 내 속에 있는 것을 새삼 발견했을 뿐이지 초월은 아니에요. 이미 확보된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이지 초월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참 본질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아마도 상상을 매개로 하여 자기보다 더 높은 종류의 개인을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종이나 본성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상상해도 상상한 당사자는 나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2페이지 봅시다. [소위 믿음 있는 사람은 신의 존재 안에서 완전히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에게 있어서 일반인처럼 존재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게서 신과 나에 대한 신을 구별 지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초월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데 하나님은 날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거잖아요. 그러나 포이에르바흐는 말하기를 이 초월은 단지 환상이다. 착각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상이지 실제로 나타난 것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곳에서만 자체적으로 나를 위한 존재와 대상과 구별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감오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그렇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상상 못했던 것을 했을 때 저쪽과 나는 구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익히 이런 분이 신일 것이라고 상상해버리면 나타난 존재가 내가 상상한 존재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이 돼요. 사실은 구분이 안 되지요. 그냥 예상 되었던 존재기 때문에 내 생각의 덩어리가 넓혀지고 확장되었을 뿐이지 낯설지는 않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낯설게 오시면 되잖아요? 낯설게 와버리면 내가 나와 구별된 그분으로 우리가 지칭을 못하지요.

포이에르바흐가 어렵게 하니까 나도 어렵게 되는데 만약에 낯설게 와버리면, 내가 네가 생각한 초월적 신이거든요. 내가 상상 안 했기 때문에 안 믿는 거예요. 하여튼 이러나저러나 내가 스스로 구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구별해봤자 내 상상한 범위 내에서 구별할 뿐이란 말이죠. 내 상상 밖으로 나가면 구별이 아니고 당신 같은 사람은 상상도 안 했다고 밀치게 돼있기 때문에 어차피 구별 안 되는 건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이에르바흐에 의하면 불교 말이 맞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나에서 확장된 거예요. 나에서 퍼져나간 거예요. 신이든 뭐든 내가 생각한 그 범위만큼에서 나타나게 돼있어요.

[그러나 대상이 나의 절대적 척도에서 나타난 모습으로 나에게 나타나고 그 대상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 곳에서는 나는 자체에 있어서 신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나를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을 의심하는 나를 의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자기를 의심 안 해요. 나를 안 믿으면 누굴 믿어요. 신을 의심을 못한다는 말은, 신인데 의심하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신이 아니기에 의심 안 하지요. 신인데 의심하지는 않잖아요. “당신은 신 아닌 것 맞지?” 이렇게 되지 “당신 신 맞는데 의심이 가네?” 이런 이야기는 못하잖아요.

아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왔어요. “당신, 남편 맞아?” 이게 진짜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 맞는 이야기잖아요. “분명히 남편 맞아.” “그런데 안 믿어지네.” 이런 이야기는 못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내가 당신은 이런 분이다, 이런 분이 아니다. 하는 내가 하는 말이 나한테 신빙성이 없습니다. 스스로 바보라는 것밖에 안 돼요. 내가 나를 못 믿는 경우는 없거든요. 모르겠다. 이해되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기독교 공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의 서술어와 인간의 서술어와 동일성을 염두에 두고서 그 동일성을 없앰으로써 신의 초월성을 살리고자 하는 시도를 인간들이 하게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 했지요. 사랑이란 용어가 어디서 통용되는 용어입니까? 인간 세상에 사랑 없습니까? 있지요. 사랑이란 용어를 신에게 사용했을 때는 인간들의 사랑 개념과 신에게 붙은 사랑 개념이 동일해야 돼요, 동일하지 않아야 돼요? 같은 단어니까 동일하지요. 동일하지 않으면 쓰지 말아야 되죠. 같은 단어를 써놓고 신은 무한하다는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이 포이에르바흐가 하는 이야기에요. 같은 단어를 써놓고 인간은 유한하고 신은 무한하냐.

얘들이 자기가 본 만화영화가 재미있다는 개념과 할아버지가 재미있다는 개념이 다르지요. 그런데 어떻게 똑같다고 할 수 있느냐. 신이 정말 무한하다면 무한한 것끼리 노는 개념이 따로 있을 게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쓰는 개념을 거기다 붙여놓고, “신은 사랑 맞지요?” 이렇게 우길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여기 보면 이렇게 돼요. 신이 인간적 본질과 전혀 다른 본질이라고 우기는 것은, 신학자들의 왜곡입니다. 신은 우리와 다릅니다. 전지전능하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우기는 것은 그 외의 술어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묘사된 것뿐이다. 따라서 진실은 미래 즉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는 회개에 의해서 가야 가능한데 피안, 이 세계 바깥으로 가는데 가는 방법이 뭡니까? 이 안의 세계를 몰고 가니까 바깥의 세계는 자꾸 바깥으로 계속 밀리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달을 잡을 수 있습니까? 내가 움직이면 달이 가만있지 않고 계속 가잖아요. 달이 왜 도망가요? 내가 다가가니까 도망가잖아요.

그러니까 교회가 진리를 안다고 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돼요. 여기 나오지요. 현재로서는 모르겠다. 이래야 맞지 않느냐? 이게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입니다. 모르겠다는 말을 왜 못해요? 교인들 이천 명 모였는데 “여러분, 진리에 대해 묻지 마세요.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오겠어요? 안 오지요. 그러니까 사회질서를 위해서 구라를 치는 것에 대해서 포이에르바흐가 이해해주겠다는 말입니다.

2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봅시다. 중간에 넘어갑시다. 내가 2+3=5 된다는 걸 안다. 그리고 개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도 알지요. 이게 칸트에 의하면 오성이에요. 이 오성을 무한대로 확대해봅시다. 확대된 것이 만약에 하자가 있다. 2+3=5, 맞지요. 그리고 개는 사람이 아니고 사람은 개가 아닌 것도 맞지요?

그 다음 것도 맞는다고 했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너희 주장은 틀렸다고 했을 때 하나님까지 가서 틀렸다는 말은, 그 가는 데까지 사다리 역할 한 오성 자체가 문제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동안 교회에서 뭘 이야기해요?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니까 문제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있는 죄를 주께서 씻어주시도록 믿읍시다.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문제 있다면, 2+3=5라는 것도 문제 있다는 말이냐? 그건 문제없지.

그래서 포이에르바흐는 말합니다. 그러면 어디서 어디까지 문제 있고, 없는지 잘라보라고 나온 거예요. 자를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 보기에 미흡하다면 2+3=5라는 것도 틀렸다고 해야 논리에 일관성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래놓고 2+3=5가 맞으면 도대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제시해보라는 거예요. 미치겠지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87)

15-06-19 17:51

20150616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4-포이에르바흐
(강의:이근호 목사)

신학교에서 할 수 없는 이유가, 가르치는 교수가 여기에 대해 답변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는 것. 포이에르바흐에 대해서 반박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포이에르바흐 봤잖아요. 자기 실력까지만 가르쳐요. 눈에 보이는 그것까지만 이야기해요.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데 포이에르바흐가 성육신을 언급해요. [신이 인간으로 격하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으로 고양한다는 것의 전제일 뿐이다. 신이 인간되기 전에 즉 자신을 인간으로 나타내기 전에 인간이 이미 신 안에 있었으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을까.]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포이에르바흐는 그게 왜 감사할 일이냐고 되묻는 겁니다. 뭔가 네가 노림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 인간이 아니라 바퀴벌레 됐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바퀴벌레 된 것을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본인이 바퀴벌레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에게만 가능하죠. 분명히 바퀴벌레가 다가 아닐 거야. 바퀴벌레가 죽고 난 뒤 사흘 만에 다시 하나님 되실 거야. 그러면 내가 하나님 되는 방법은 이 바퀴벌레를 믿고 바퀴벌레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 그렇게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은근히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앞서 있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이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육신이 안 됐으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 갈 수 있을꼬. 못 가지. 그런데 고맙게도 말씀이 육신이 되서 가게 해주시니 세상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라고 말한다는 것은 은근히 신되고 싶어서 노렸다고 다그치는 거예요. 다그치면서 포이에르바흐가 더 얄미운 것은 그걸 나무라는 게 아니고 그게 바로 종교의 이유가 그거야. 마음껏 해. 이렇게 나오는 게 더 미운 거예요. 실상을 이야기해놓고 너도 어쩔 수 없었지. 그래 이해해. 이게 더 밉다니까.

[신은 사랑이란 명제에 있어서 잠시 주어 자리를 놓긴 했지만 신이 자기의 신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신의 신성 자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술어인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맞지요. 하나님의 사람의 육신을 입은 것은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지요. 우린 아닌가? 기존 교회에서 교리가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을 베푼 증거가 뭡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이 된 거잖아요.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십자가 졌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잖아요.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했다면, 포이에르바흐가 시비를 걸기를, 신은 사랑이라는 게 틀렸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이라는 주어에서 사랑이란 술어가 됐다면 그 사랑이란 술어를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랑이 신이라 말이 맞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학원에 얘들이 와서 “선생님, 훌륭해요?” 물어요. 그러면 선생님이, “훌륭하다기보다도 실력이 좋아.” 제가 묻는 것은 훌륭하시냐는 겁니다. 학원에 와서 실력을 물어야지 훌륭하냐고 묻느냐고 하잖아요. 나는 수학 선생님이야. 그러면 수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있다고 학생에게 이야기하잖아요.

술어가 주어를 지배하게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신은 사랑이라고 말들 하지만 너희들 논리에 의하면 신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으니까 모든 종교는 똑같잖아요. 이게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입니다. 사랑이란 진리가 있는데 가는 길이 다르지만 올라가보면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감리교, 장신, 기장 측, 전부 다 이 말에 동의하지요. 천주교와 대화해야 된다, 원불교와 대화해야 된다, 티벳 불교와 대화해야 된다, 부처와 대화해야 된다. 종교협의회 이런 것 만들고. 포이에르바흐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지요. 생각이 같으니까.

포이에르바흐는 더 따집니다. 사람 미치게 만들어요. [만일 신이 참으로 사랑한다면 신 자신이 사랑하는 것 같이 신을 사랑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없어야 된다.] 인간이 납득 못할 사랑을 신이 제시하게 되면 인간은, 악마다, 저리 가라고 할 거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납득이 되는 사랑을 신은 제시해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이 납득할 사랑을 제시하려면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랑에 의해서 신이 만들어져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사랑으로 신을 만든 게 맞잖아요. 맞으니까 믿잖아요. 납득이 되니까 믿잖아요. 믿는다는 말은, 신의 본성과 내 본성이 같네.

더 따져봅시다. 포이에르바흐는 사람 미치게 만들어요. [악마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랑을 한다. 맞지요.] 악마가 남을 위해 희생했습니까? 아니지요. 기독교 교리에 보면 악마는 자기만을 위해 있지요. 그렇다면 사랑은 두 종류가 발생됩니다. 악마가 자기를 위한 사랑도 사랑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희생한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의 두 종류가 발생되지요. 그러면 사랑은 과연 복수형이냐? 아니지요. 사랑은 하나뿐이어야 하는 겁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로 왔다. 사랑은 단수이다. 인간의 사랑은 구별되지 않는 근본적인 유한한 사랑이다. 따라서 성육신 사건이 있건 없건 인간이 자기를 초월한 애정을 바치는 모든 일을 사랑의 단일 의미에 합치된다. 따라서 진리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교에 다 담겨있다. 모든 종교가 다 인간을 위한 종교기 때문에.] 이 말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의미할 때 사랑이란 말 자체에 눈물 흘려요. 사랑 자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포이에르바흐가 알기로는 기독교는 악마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 신자에게 왜 당신들은 당신과 하나님만 생각하고 악마의 입장은 생각 못합니까? 악마가 자기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잖아요. 그러면 사랑에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개의 사랑이 생겼지요. 인간들은 두 개의 사랑을 언급해야 되는데 악마의 사랑은 제쳐두고 하나의 사랑만 고집해서 그 사랑은 기대했다는 말은 결국은 의도적으로 뭘 거부했느냐 하면, 악마가 세운 세상을 거부했다는 것은 세상 전체를 보기를 겁내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그런 마음의 표현밖에 안 된다는 거죠.

방금 이야기한 포이에르바흐가 얼마 전에 있었던 재판 걸린 이석기의 논리가 뭡니까? 민주주의는 인간을 위해서 있지요. 북한 주민은 인간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인간이지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서 민주주의가 있다면 어디까지 손을 뻗혀야 돼요? 북한의 주민들까지 민주주의에 포섭해야 되겠지요. 민주주의가 뭡니까? 하나만 남겨놓고 다 쳐내는 겁니까? 다른 소수의 의견도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에요? 소수 의견도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죠. 그런데 자기 뜻과 다르다고 해서 쳐내면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고 전체주의입니다.

남자와 남자끼리 사랑하고 여자와 여자끼리 사랑하는 걸 동성애라고 하지요. 현재는 민주주의 사회지요. 그러면 개인에게 사랑할 자유가 있지요. 그렇다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해서 둘이 결혼하겠다는데 왜 민주주의 사회가 반대합니까? 그게 전제주의 사회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민주주의 사회가 스스로 위반하느냐 이 말입니다.

인권문제에 대해서 서울시장이 선언을 하려고 했는데 취소했어요. 왜 취소했는가? 인권선언서에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해야 된다는 게 포함된다면 남자끼리 결혼해도 주택보조금이 나가야 돼요. 가족증명서에 남자끼리 결혼해도 부부가 돼야 된다고. 박원순 시장은 차마 사인을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옷 입고 얼마 전에 집회를 연 거예요.

지금 포이에르바흐는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사랑을 그들이 아예 단적으로, 악마 좋아할 사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악마가 자기 사랑하는 그 사랑을 왜 이쪽에서는 그걸 정당한 사랑으로 수용 안 하느냐. 악마 사랑은 아예 사랑이 아니라고 제쳐놓고 사랑을 단일 사랑으로 만들어버리면 인간은 자기 한계에서 초월할 수 없고 일방적인 자기주장만 할 뿐이다.

그래놓고 악마 없다고 하면 앞뒤가 맞는데 분명히 뭐라고 합니까? 악마는 나쁘다고 하면 그게 무슨 일방적인 전체주의적 종교지 전체를 포괄하는 종교냐.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도 사탄을 사랑한다고 돼야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사탄을 없어야 되니까 천국만 있어야 되고, 지옥도 없어야 된다는 그런 종교를 용납하라는 것이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입니다.

그 다음에 그 밑에 포이에르바흐의 성찬식, 세례식 봅시다. [첫째, 효력 없는 물로 세례를 하고 효력 없는 떡과 포도주로 의식을 행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모든 의식이 물다운가.] 이 말은 뭐냐 하면, 왜 물을 물로 보느냐. 기분 나쁘다 이 말입니다. 정말 물의 가치와 포도주의 가치가 따로 있는데 물이 있으니까 지 마음대로 가져다가 떡이 네 눈에는 떡으로 보이느냐? 떡은 아무 소리 안 하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예수의 살이라고 안기면 사전에 떡에게 물어봤느냐 이 말입니다. 포도주를 물로 보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가 있느냐 하면, 떡과 포도주에 신성한 게 있다는 말을 아예 하지 말아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아니냐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흐가 머리 좋지요. 지금 천주교에서 떡과 포도주에 신성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 순간에만. 신성이 그 순간에만 신성하면 안 되고 평소에 길바닥의 떡도 신성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필이면 행사, 의식행할 때만 신성하면 원래 떡과 포도주의 가치를 모독하게 되고, 원래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하나님의 신성을 인간들이 갖고 논 셈이 된다 말이죠. 성찬식 할 때만 신성하다는 자체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 모순된다 이 말입니다.

[신성하게 보이려는 자체가 일반적인 물질에 대한 평범성을 부인하는 인간들의 속성에 대한 무뢰함이고 위선이다.] 반박해보세요. 반박됩니까?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 때 예수님이 물을 시시하게 봤습니까? 주님은 그 물이 포도주보다 못하다고 봤습니까? 그러면 하늘에서 비를 내리지 말든지. 신성한 물로 신성한 포도주를 만들었지요. 예수님 자신이 신성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물이 신성하지 않다면 물 먹는 우리는 신성하지 않겠네요. 그러면 이 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필요 없어요. 왜? 하나님이 더러운 걸 줬으니까. 이해하는지 분간이 안 되네. 이해되십니까?

지금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신성하게 만들었잖아요. 물도 신성하지요. 우리가 먹는 떡도 신성하잖아요.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그런데 신성한 물로 의식 행할 때 물을 물이라 하면 될 걸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왜 포도주보다 못한 것으로 저질로 만드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겁니다. 포이에르바흐는. 천주교에서 하잖아요. 루터교도 그렇게 해요.

삼위일체 해봅시다. 삼위일체는 아주 가관입니다.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구별 짓기 위해서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고독은 사상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죠. 신성한 사람이 친구 많은 것 봤습니까? 친구들 세 명과 있으면 무리지어서 신성하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면 본인이 신성하지 않아요. 친구들과 빠이빠이해야 돼요.

유명한 스타들 친구가 없어요. 세시봉? 그 사람들 친구 아닙니다. 콘서트할 때만 하는 것이지. 송창식, 윤형주, 다 독자적으로 잘 났어. 다만 팬들 위해서 웃으면서 모이는 척하는 거예요. 아이유? 혼자 잘났어요. 모든 스타는 혼자 살아요. 그게 스타니까 그래요. 스타 앞에서 다른 스타 칭찬하면 미칩니다. 참을 수가 없어.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십니다. 죽은 김성수 목사, 설교 잘합니다. 이러면 화가 난다니까. 왜 날 비교하느냐 말이죠. 스타는 둘을 용납하지 않아요.

고독은 자족이며 자기만족입니다. 최후에 내가 될 때까지는 만족함이 없어요. 진정한 신성은. 이 욕구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제2의, 제3의 인격인 신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은 일단 떼냐 돼. 신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들 노는 곳에 떼놔야 돼요. 떼놓기 위해서는 신은 고독해야 돼요. 어느 정도 고독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논리와 사상을 총 집결해도 풀어지지 않는 납득이 되지 않는 다른 능력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1은 3이고 3은 1이라는 숫자놀음, 그게 삼위일체입니다.

어떻게 3이 1이고 1이 3입니까. 3이 1된다면 이단이에요. 삼위일체 이론에 의하면. 1이 3되면 이단 돼요. 조심해야 돼요. 하나님은 3으로 계시고 하나이다. 된다, 하면 이단이에요. 양태론이 어떻고 해서 이단 된다고. 그러니까 삼위일체를 만든 사람은 말합니다. 이건 믿음의 대상이지 설명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그걸 포이에르바흐는 노리는 겁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지. 이게 절대적으로 떼놓기 위한 수작이다.

세 번째 기도에 대해서. 기도는 아주 재미나게 이야기합니다. [기도는 예술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통을 귀로 기울이면서 그걸 대상화하고 대상화한 걸로 인하여 자신을 치유한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선생은 고통 가운데 가르치고 얘들이 선생이 가르친 걸 깨달을 선생님이 스스로 치유가 되죠. “난 너 때문에 산다.”

자가 치유 프로그램이 기도에요. 기도에는 고통이 재료로 들어갑니다. 수월하게 기도하면 기도한 것 같지 않아요. 미안해요. 그래서 기도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도는 고통스러울수록 응답에 가까워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이걸 기도하는 사람은 예술가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종교적 예술가다. 자신의 심정을 붙들고 있는 무거운 짐을 허공으로 전달하면 자신의 고통을 일반적인 본질로 만들면서 그 짐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자연은 무정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되돌아온다. 남모르게 숨어서 자기에게로 무섭고 무거운 억압된 비밀을 자기에게 털어놓는다. 신이란 이런 탄식이 있는 곳에서 해소하는 배출구로 출현한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계와 같은 구성원처럼 간주된다.] 무엇을 도와줄꼬? 같은 회원이거든요.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사무엘을 누가 불렀습니까? 하나님이 불렀지요. 사무엘이 잘 때 자기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적 없지요. 나중에 포이에르바흐에 대해서 평가할 때 지금 포이에르바흐는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 당시 교회가 성경을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왜 못 가르쳤는가? 성경에 대해서 몰라요. 성경을 문자적으로는 알아요. 성경 사건을 잘 풀이해줘요. 사무엘이 어떠니, 한나가 어떠니, 다윗이 어떠니, 창세기가 어떠니 하지만 성경의 복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포이에르바흐의 이러한 내용은 성경을 모르고 있는 그 당시 교회를 대변해주고 있는 모습이에요.

그 당시 교회는 기도를 가르쳤지요. 그리고 성만찬을 행사했습니다. 성육신을 가르쳤어요. 성경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교리를 가르쳤어요. 짜 맞추는 식으로. 그런데 포이에르바흐라는 용감한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어요. 그 당시 교회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포이에르바흐가 이야기하는 것 보세요. 신은 우리와 구성원이란 말은 뭔 뜻입니까?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니까 한 거예요. 포이에르바흐가 들어보니까 구성원이네. 공동체 운동하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 관계없어요. 함께 있으니까 교인들이 좋아하니까 그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가정과 함께 하십니다. 이게 듣기 좋아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구성원은 자연을 이기는 기적을 행사하는 위력자라고 욕구는 일방적으로 믿고 싶어 한다.] 구성원인데 다른 구성원들은 변변치 못한 인간들이고 그 구성원 가운데 대단한 전지전능한 분이 계시니까 이참에 나의 억눌린 한을 구성원의 이름으로 성취할 것을 희망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 구성원이 자연의 운행까지 경영할 수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했잖아요. 그분이 구성원이라면 기도하면 듣는 거예요. 산더러 바다 빠지라면 빠지고, 기도와 금식 외에는 할 수 없다고 하니까 그 말 믿고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제한 없는 소망이 춤추고 있는 바로 그곳, 그곳이 인간 본인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기도하면서 자기로 인하여 즐겁고. 자아도취지요. 기도하는 본인이 흐뭇한 거예요. 그리고 자랑질하고. 너, 기도 안 했지. 난 기도했다. 자식들 잘 되는 것, 기도 덕분에 잘 된 것이다.

네 번째 봅시다. 하다보니 재밌네요. 불멸과 영생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이 있고 자꾸 죽어서 천당 가는 이야기하느냐? 그것은 인간은 자기 불쾌함을 그냥 못 넘어가요. 반드시 빼내야 돼. 현실에서 불쾌함을 피안의 세계에서 해결하고자 불멸의 세계를 만든 겁니다.

[해소된 즐거움을 자기 쪽에서 귀환시킨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인간들이 신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실은 자기 육체에서 분열된 자기 혼을 중요시 여겨서 그렇다. 하나님 좋은 게 아니에요. 내 영혼이 예뻐서 하나님을 좋아하는 거예요. 영혼을 왜 좋아하느냐 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기의 잔존을 버릴 수 없다. 따라서 사체로 죽은 시체로 영혼과 결합시켜서 영원히 천국에서 자아라는 존재로 살고 싶어서 불멸의 세계를 만든 거라는 거죠. 아니라고? 아니면 아니라고 이야기해보란 겁니다.

만약에 포이에르바흐의 시대에 어떤 목사가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고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목사 당신이 교회에서 이런 것은 아니지요. “여러분, 이것 믿고 교회 온 것 아니지요? 성경말씀 믿고 오셨지요?”라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느냐고 되묻고 있는 거예요. 목사가 일부러 어렵게 온 교인에게 이렇게 물어서 쫓아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미쳤어요, 쫓아내게. 다 돈인데 안 쫓아내지요. “여러분, 여러분 영혼 걱정되지요. 예수 믿으시면 주께서 친히 만든 부활의 세계가 있습니다.” 다 그렇게 하지 여러분들이 영혼 사랑해서 예수 믿지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 나가세요. 그래서 진짜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교회 안 되는데.

다섯 번째, 고난 받는 신에 대해서. 신을 존중해주기보다는 신을 더 행복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의 발로로 고난 받는 그리스도 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보다 더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내가 만약에 더 힘들면 내가 교주되니까.

말이 먼저에요, 마차가 먼저에요? 말이 마차를 끌지요. 지금 하나님이 나를 끌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아무리 고생해도 나를 끌고 가는 주님보다 더 고생하면 안 되지요. 예의에 어긋나잖아요. 따라서 주님은 나보다 분명히 더 고생했을 것이라고 해서 생긴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내가 인생의 힘든 고난을 스스로 그리스도 생각만 해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힘든 것을 언제 잊느냐 하면, 지금 힘든 것보다 난데없이 더 큰 고난이 왔을 때 지금 힘든 것은 게임도 안 되는구나. 이럴 때 위로가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위로가 된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내가 이 땅에서 고생했지만 예수님이 나보다 더 고생했겠지.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았잖아. 나보다 더 고생한 분을 내 앞에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지금 스스로 자기의 고생담을 신념으로 마음 정돈해서 이겨낼 수 있도록 고난 받는 그리스도로 내 앞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언급했다고 포이에르바흐는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땅에서 살고 얻기만 하고 비용을 부담하지도 좋단 말인가?] 내가 공짜로 살았는데 그만한 고난을 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지 얻어먹기만 하고 고생도 안 해. 이 염치없는 놈아. 자기가 자기에게 자책하는 거예요. 그만큼 은혜를 받았으면 고생하는 것도 감사해야지. 지금 고생한다고 하나님께 따지냐, 그게 믿음이야, 이 나쁜 놈아. 나는 나쁜 놈이야. 이런 고생은 앞으로 고생도 아니라고 이야기해야지. 감사해야지. 스스로 자기를 격려하면서 마음을 조종하기 위한 그 환경 조성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이란 말이 우리 앞에 있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머리 좋지요.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서 어떤 고난도 감수해야 된다는 가상한 마음으로 지옥 갈 불신자와 자신을 차별화 두고자 하는 그러한 심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심보라는 거죠. 끝.

자, 포이에르바흐가 여기서 강의했습니다. 손들고 반박할 사람? 반박해봅시다. 복음적인 평. 포이에르바흐는 성경 모른다고 했지요. 어떻게 모른지 봅시다. 노아 방주 지을 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일단은 노아 아이디어는 아니지요. 그 방주는 언약이라고 했어요. 포이에르바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신이라는 것을 기존의 교회 목사들이 하는 신을 자꾸 끄집어내는데 성경에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건 언약 성사시키기죠. 하나님이 언약을 앞장 세워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오셨어요. 아브라함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네가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잖아요. 아브라함한테 물어봤습니까? 그냥 떠나야 돼요. 안 떠나고 버틸 수 없습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그러면 포이에르바흐가 앞에 있다고 하면 대번 손들고 이야기해요. 그 언약을 인간이 지어냈잖아. 그럼 이렇게 해야 돼요. 언약을 지어냈으면 언약된 주님을 죽일 리가 없지요. 납득이 되는데 왜 죽여요.

하나님 언약의 본질이 십자가에서 다 드러나잖아요. 마지막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러면 십자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진짜 네 말대로 인간이 만들었으면 여기에 어떤 타협책이라든지 뭔가 소통되는 게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누가 나를 믿었으리요? 했지요.

사도 바울이 똑똑한 사람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지요. 포이에르바흐 만큼이나 알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내린 결론이 뭐냐? 다메섹에 내려가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 전부 다 잡아 죽여야 되고 그리고 그게 하나님 영광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니까 포이에르바흐 말대로라면 양심의 가책이 되서 예수 믿어야 돼요? 그런데 양심이 가책이 되어 예수 믿었습니까, 난데없이 믿었어요? 지금 사울이란 사람은 신났어요. 하나님 영광 돌리는 일한다고 신났다고.

그런데 어떻게 사울이 예수 믿게 되었습니까? 갑자기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상 했어요? 포이에르바흐는 이걸 몰라요.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그 다음에 뭡니까? 안 믿는 자가 아니라니까. 핍박을 했어요. 지금 사울은 뭘 건드렸어요. 007 영화나 스파이 영화 보면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적외선이 깔려 있잖아요. 그걸 특수 안경을 쓰면 보이잖아요. 지금 포이에르바흐의 눈에는 안 보여요.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이 깔려있는 걸. 사울도 안 보였던 거예요.

지는 포이에르바흐 말대로 열심히 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는 왜 나를 건드리느냐? 핍박했느냐고 했지요. 그러면 시작부터 나는 존재했거든.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주님은 존재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가해자, 핍박자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핍박을 받은 자로 등장하는 그것이 노아 때는 방주였고, 신약 때는 십자가에요.

포이에르바흐가 뭘 모릅니까? 십자가 영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포이에르바흐가 비판하는 모든 사람도 동일하게 십자가 영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판에 대해서 그들이 반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같은 통속, 같은 편인데 무슨 반박이 돼요.

그래서 여기 보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특수성, 주 되심을 알지 못하지요. 그러면 그동안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주 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하나님이란 존재와 인간 존재를 집어넣은 거예요. 인간이 구원 못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인간 존재가 되셔서 인간 존재가 신이 된다. 그걸 이야기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해버리면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에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포이에르바흐의 말이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인간’이라고 봤습니까? ‘인자’로 봤지요. 인자는 어디서 나온 개념이에요? 언약 개념에서 나온 거예요.

여러분, 언약 개념을 다시 봅시다. 언약 개념이 인간과 할 때는 어떻게 나타난다고 했습니까? 핍박이죠. 아벨과 가인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아벨은 신의 존재를 인정했고, 가인은 인정하지 않고 존재론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가인은 아벨을 핍박했고 아벨은 형한테 핍박을 받았지요. 핍박이란 틈새에서 진짜 하나님이 나왔잖아요. 가인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진짜 하나님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제사 드려서 나온 게 아니고. 이게 존재의 찢어짐이라고 하는데 뭔가 현실 자체가 틈이 없는 곳에 틈이 생기면서 핍박받은 주님이 튀어나온 거예요.

지난 오후설교인가 다니엘 세 친구 어디 있습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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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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