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b-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b-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절기라 하는 것은 왜 남자들이 세 차례 모여야 되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그 죽었던 양이 있잖아요. 양이 바로 그 장자를 대신해서 했던 겁니다. 그리고 양 때문에 살았던 그 장자는 가정의 소유로 돌아가지 않아요. 한 가족이 살겠지만. 뭐냐 하면, 전부다 그리스도에게 바친바 되는 겁니다. 그러면 출애굽 당시에 양이 바쳐졌지요. 양의 운명을 누가 담당해야 된다? 그 집에 대신 살았던 장자가 그걸 담당을 해야 돼요. 그러면 장자는 장자이어야 되지 다른 사람은 안돼요. 장자는 1년에 3번씩 양의 죽음을 크게 확대시킨 성전이 있는 곳, 1년에 3차례씩 방문해서 세미나를 받아야 돼요. 누구한테? 제사장한테.
거기서 제사장은 죽음과 관련된 일을 하지요. 백성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면 안수해가지고 죽음의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곳으로 밀어 넣습니다. 제단이죠. 그 제단의 불에 의해서 타버리고 타버리면서 몸체는 타고 그 다음에 뭐는 남고? 피와 기름은 남고. 이 피와 기름은 어디에 뿌려집니까? 그 뒤에 제단에서 더 들어가면 있는 천막 쳐 있는 그 성막에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는 그 앞에 뿌립니다. 특히 1년에 한차례씩 수송아지를 가지고 언약궤라는 황금으로 입힌 그 상자, 천사조각으로 되어 있는 그 상자에 그것도 서쪽이 아니고 동쪽에다가 피를 뿌리게 되어있어요. 7번 뿌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나중에 물체만 뿌리는 게 아니에요. 제사장 자기 몸에도 기름과 피를 뿌립니다. 오른 귀 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 거기다가 뿌리게 되어있어요. 그럼 만약 오른발 엄지가락이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신체에 흠 있는 사람 안 됩니다. 탈락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물체든지 사람이든지 성소라는 지역에 있는 것은 기름과 피로 범벅이 되지 아니하면 도무지 하나님과 동행해서 살 수 없음을 언급합니다. 거기에 있던 제사제도는 무엇에 집중하는가 하면, 율법에 집중해요. 율법을 전부다 압축을 시켜놓으면 제사가 나옵니다. 한마디로 피가 나와요. 피가.
모든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지요. 예수님의 피 입니다. 그걸 신약에서는 히브리서에는 피언약이라고 해요. 피 언약(히9:20). 피언약이니까 피 언약으로 해서 모든 율법이 거기에다가 집중돼 있지요. 그러면 반대로 말해서 피를 펼쳐버리면 거기서 뭐가 다 나옵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가 다나오지요. 그러면 성경해석 어떻게 해야 돼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마감되어서 피가 나와야 되겠지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마감되는 설교 그게 복음입니다. 그걸 언약의 완성이라 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부활이라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본격화하기 위해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영역 환경을 조성한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만약에 저는 술집에 안 가봤지만, 술집에 보면 안주가 나온대요. 안주에 보면 이만한 쟁반에 과일도 몇 개 해놓고 3만원 받고 5만원 받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안주를 가지고 왔는데 안주는 하나도 없고 쟁반만 나오면 안 되지요. 쟁반은 뭘 담아내잖아요. 쟁반이 부활이고 담아내는 내용이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나 십자가나 공통점이 뭐냐, 시간이 정지되어있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안에 시간이라는 게 없습니다. 뭉쳐져 있어요. 시간이 멈춰져 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3장1절에 보면,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할 때 그 십자가가 도대체 시력이 얼마인데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봅니까? 십자가 사건은 이미 25년 전에 지나간 사건인데. 십자가가 보인다니? 안개 낄 때는 안 보이다가 안개 안 낄 때는 멀리 보이는 것이 십자가입니까? 그것 때문에 십자가 마구 심어놨어요? 공간적으로 십자가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시간적으로 십자가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 십자가 어디 보인단 말입니까?
아까 이야기했어요. 주께서 길을 만들어놓으면 그 길은 어떤 길이다? 무엇의 내부를 갈라놓는 길이라 했습니까? 사탄의 세계에 영적 세계를 갈아놓는 길이지요. 그 길을 가는 성도는 뭐가 보입니까? 십자가만이 사탄에서 불순종에 의해서 이겨난다는 사실이 보이지요. 그래서 누가 너희를 꾀이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해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있던 그 공생애를 지금 현재화시켜 버립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게 시간이 멈춰져있어요.
바깥 세계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도 안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래서 영생은 시간이 끝난 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생은 시간 안에 있어요. 시간 안에 영생은 거기서 분투하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요. 공간 안에 그리스도가 있어요. 그리스도 세계가 있어요. 공간인 듯 공간 아닌 공간 같은 공간, 하늘나라 그 안에 있어요. 천국이 그 안에 있습니다.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말하지 않고 인격으로 말했지요. 뭐냐, 예수 안에서.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사도바울의 모든 표현은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나니,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었나니(롬5:21), 하늘나라는 뭐라고요? 성령 안에. 하늘나라는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묻지 마세요. 성령 안이 시간과 공간을 대변해주고 있어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가 지금 신비주의를 말한 게 아니에요. 로마서 14장17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러니까 이걸 듣고서도 어딘데요? 예루살렘입니까? 지금 저기 비행기 타고 가야 돼요? 주님 거기 오십니까? 이리 묻는 게 아니에요.
구약에 나온 절기가 신약에 완성을 언급할 때는 그러한 시간과 공간도 겸하여서 언급이 되면서 이게 완성이 되어야 돼요. 구약에 있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약에 절기를 예수님 안에서 완성했다하는 것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예수 안으로 달려들었어요.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졌다 했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이게 죽음입니다. 그렇잖아요? 죽음. 예수님의 죽음이고 또 성도의 죽음이고. 예수와 성도가 함께 죽는 죽음이 십자가지요. 주님과 함께 죽을 때, 주와 함께 산다. 로마서6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계시고 인간이 자기가 여기서 죽음에 들어갈 때 뭐도 들어가겠어요? 시간과 공간 개념도 같이 들어가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서 죽게 되는데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죄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이 아는 시간과 공간개념이 뭐다? 이게 죄의 일종이 되는 겁니다. 이것도 죄의 양태가 돼요. “언제 오십니까?” 이것은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잖아요. “주여, 그 때가 언제니이까?” “언제 오십니까?” 주께서 대박 타박을 하지요.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오!” “그래도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성령이.” “성령이 올 때가 그 때입니까?” “그 때가 그 때가 아니라니까.” 성령이 올 그 때가 그 때가 아니에요. 인간이 대기하고 있던, 인간이 생각하고 있던 그 때하고 성령 때가 달라요.
성령이 오게 되면, 기존의 때는 무의미하게 돼버려요. 내가 성령 받을 때와 구원받을 때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원받지 성령 받을 때가 구원받는 시점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유 병언한테 물어요. 유 병언은 죽었잖아요. “당신은 구원 언제 받았습니까?” 이건 묻는 게 아니에요. 시간과 공간을 따지면 안 되고 누가 구원시켜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누가 구원시켜 주던가요?” “그래도 누가 구원시켜 주거든 때와 장소가 있을 게 아닙니까?” “커피숍에서 구원받습니까? 설거지하다가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오후7시에 구원 받았어요?” 이건 사주보는 것도 아니고. “애 언제 태어났습니까?” 사주 보려고. 그게 아니고 성령의 때가 오게 되면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것.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때를 차버리고 밀어내고 시간도 공간도 없이 그냥 온 것을 가지고 디모데후서(1:9)에 보면 창세전에 아버지가 나를 선택했다, 나오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자기 뜻과 영원한 때, 그 다음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했지요. 그러면 예수 안에는 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창세전부터도 예수 안이고 지금도 예수 안이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꼭 캡슐 같아요. 시간과 공간이 정지돼 있는 캡슐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타락해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타락도 이미 구원받은 일부에요. 우리가 죄 짓는 것도 우리가 이미 구원되었음을 증거 하는 증거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죄 짓는 것도, 우리가 막 사는 것도, 강도가 강도된 것도, 창녀가 창녀된 것도, 구원의 물결입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확인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내가 수용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구원된 사실을 그제 사 이제는 자기가 인식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언제 구원 받았느냐고 하거든 바꿔서 답변하세요. “예수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그러면 반드시 “그것 말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건 나도 아는데, 언제? 언제? 작년? 언제? 언제? 몇 월 몇인 날 언제?” “당신은 지금 내가 하는 답변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 당신은 구원 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언제 구원받느냐고 자꾸 원하느냐, 지금 그 언제라는 말이 오늘 본문과 관련됐기 계속 이야기합니다마는 왜, 언제라는 것을 자꾸 강조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할 때 이미 자기가 구원에 대해서 미리 자기가 그 상황을 조작을 해놔요. 성경을 보고 미리 자기가 꾸며놓는다고요. 구원을 누가 만들어놓는가 하면, 주님이 만드는 게 아니고 자기가 다 만들어놓고 주님한테 결재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온갖 아이디어를 다해요.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특히 유대교가 무엇을 중요시하는가 하면, 바로 절기를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그 다음에 시킨 대로 해놓고 그 다음에 몫으로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참 잘했어요! 이렇게 하고 거기다가 빨간 도장, 파란 도장만 찍어가지고 숙제 잘했다고 도장 찍듯이 그것만 하게 되면 우리는 구원된다, 라는 그런 아이디어를 사람들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납득이 되니까. 어떻게 납득이 됩니까? 하라, 하지 마라, 그 명령도 살리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도 다 살릴 수 있는, 그러한 설명이 가능한 상당히 빠진 게 없이 이해가 전체적으로 통하는, 성경 전체가 통하면서도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방식이에요. 바로 율법으로 준비해 놓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이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오시기 전에 마귀가 계속했던 그런 아이디어였습니다. 마귀의 아이디어.
유대인은 바로 그 역할에 충실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보고 너희 애비는 마귀다. 너희 애비는 마귀다, 라는 말이 같은 말인데 문장을 바꿔보면, 너희는 누구 새끼다? 뱀 새끼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말이 맞잖아요. 세례요한이 이렇게 했어요. 독사의 새끼들아!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너희들이 피할 것 같으면 돌들이 피한다. 너희들이 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돌멩이를 지금이라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 수 있다. 너희들은 무조건 아니야. 바리새인보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세례요한이 욕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을까요? 그들이 세례요한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평가 내리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그 평가를 내린다는 말은 그들에게 뭐가 있다? 평가의 기준이 이미 확정돼 있고 확립돼 있다는 겁니다. 그 확립된 기준은 단순히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대대로 역사적으로 내려온 것들이에요. 정통이고, 역사고, 관례고, 관행이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교회사라고 합니다.
교회사하면 사탄의 역사라고 보시면 딱 맞아요. 그 교회사에서 만들어진 게 삼위일체 이론입니다. 그 삼위일체 이론이 마귀 적 이론이에요. 예수님의 두 속성이 하나님일까, 인간일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하나님은 하나님도 아니에요. 인간도 아니에요. 인자에요.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표현할 때 존재로 표현한 게 아니고 기능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인자라고 해요.
“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성경에 뻔히 나오잖아요. 왜 인자라는 말을 두고 왜 인간이냐, 신이냐, 왜 그걸 따졌을까요? 마귀의 세력들이 사람들을 납득시켜가지고 구원받기 위해서 “여러분, 연약한 인간이지요. 여러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하나님 여기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시고, 인간이신 분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두 속성이 나온 거예요. 에베소 공회에 그걸 확정했고. 신학생은 그걸 다 외우고. 야, 이거 써먹으면 되겠다. 이거 사람들 설득하기에 이 깊은 성경을 설명하기에 멋지다는 거죠. 왜? 사람은 신이 못돼서 환장했으니까.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이유가 뭡니까? 마귀가 선악과 따먹을 때 제안이 뭐였어요? 니가 따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서 뭐처럼 된다? 눈이 밝아서 그냥 돋보기 안 써도 된다,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에요. 눈이 밝아 2.0된다. 이거 아니라니까요. 눈이 밝은 정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니 고양이 된다. 아니요, 부엉이 된다, 아니에요. 독립할 수 있다는 거예요. 독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생각하지 말고 니만 생각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게 진리라는 겁니다.
제가 영화<샌 안드레아스>편 마지막 평한 거 있지요. 이 땅에 유일한 진리는 뭐밖에 없다? 살고 보자. 사는데 이유도 없고 그리고 묻지도 말라. 늙은 몸이지만, 무조건 살아야 돼! 이것만 인간이 통하는 유일한 진리에요. 무조건 살고보자! 에요. 내가 왜 육신이 있나? 그런 거 물어서는 안돼요. 그래서 제가 마지막에 성경구절 갈라디아서6장 8절 이야기했지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 육신을 위해서 심는 자는 망하지요. 성령을 위해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고.
보세요.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비로소 단층이 생기잖아요. 단층이 생긴다고요. 갈라졌잖아요. 그 갈라진 틈을 뭐라고 했습니까? 길. 길이에요. 우리는 길을 만들 수도 없고 내가 가는 길이, 길이 아니거든요. 길은 없어요. 길은 주님에 의해서 움푹 파여진 그것만이 길이에요. 그런데 그 파일 때, 마귀의 지평을 파야 되잖아요. 그 마귀의 지평이 어디쯤 되는 줄 알아요? 여기 있잖아요. 우리 자신들이 바로 마귀의 정신에 스폰지처럼 푹 젖어있는 곳이잖아요. 여기를 갈라지게 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 두 번째 강의는 쉽습니다. 절기의 성취와 완성은 뭐다? 나를 분열시키는 것. 나를 깨는 것.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중간에 뭔가 많이 새겨진 느낌이 들지요. 절기라 하는 것은 딱 절기 드리는 시점이 있어요. 히브리 달력으로 유월절은 1월 달, 오순절은 3월 달, 나팔 절, 대 속죄일은 7월 달 이리되거든요. 그 지정된 날만 돼요. 지정된 날만. 지정한 날에 절기를 지낸다는 말은 시간이 밑에 받쳐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 시간과 공간은 이미 누가 지배했다? 사탄이 지배한 거예요.
그 유대인들이 안식일 지켰어요? 안 지켰어요?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안식일 주인은 뭐라고 하는데. 희한한 일이지요. 안식을 왜 지키는가 하면 주인을 알아보려고 지킨 거예요. 그들이. 안식일 지키라고 하신 분이 온다면 우리는 안식일 잘 지키기 때문에 아마 머리 쓰다듬으면서 칭찬할 거야. “아이고, 내가 시킨 대로 잘 했어요.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이렇게 할 줄 알았지요.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지켰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하루 전날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안식이 뭐하는 날이 됐느냐, 사람 죽이는 날이에요. 안식일 만드신 분을 죽이는 날이 됐어요.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 해서 모든 율법이 무빙, 율법이 움직이는 식으로 성취의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지요. 왜? 그들이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으니까.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으면 인간으로서는 쉽지요. 왜, 하면 되니까. 그 장소에 가서 그 방법대로 고 날짜 시간 맞춰서 드리면 손 털고 율법 숙제 끝! 굉장히 쉬워요. 목사가 돼서 교인들이 요구하는 게 뭐라는 것은 목사가 되면 알아요. 교인들은 행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면 참 좋아해요. 심방가시거든 그냥 봉투 하얀 봉투, 노란 봉투 말고 하얀 봉투에요. “차비 넣어주시면 강상에 올려가지고 제가 감사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한 목사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일요일 날 11시에 오지 마시고 10시30분부터 와서 찬양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거든요. 10시 30분까지 나오면 참 잘했어요. 하고 이마에 마구 찍는 것 같아. 이게 목사의 인이지 그리스도의 인은 아니지만 하여튼 도장이 막 찍을 것 같아. 하라 하는 대로 하면 돼요. 성가대는 가운입고 30분 전에 미리 와서 연습하시면 나중에 연말 때 파티 열어줍니다. 앞으로 잘하라고, 이런 거. 굉장히 쉬워요. 불고기 먹어주면 되니까.
그런데 목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버릴 때 미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막 사세요.” “죄 지으세요.”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당신이 현재진행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할 필요 없습니다.” 왜? 하고 있으니까. 간단한 이야기에요. 당신들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교회 와서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예배드리면 마치 죄가 상쇄되는 것처럼 여기는데 그거 주님 안 통합니다. 죄 짓고 있잖아요. 죄 지으세요. 차라리 그게 주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괜히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충성하고 열시 반에 찬양 준비하고 그런 짓하지 마시고 하시는 대로 하세요. 다 뭘 해도 죄가 됩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모든 걸 죄로 바꾸어놓는 이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죄 짓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죄 지은 것을 아는 게 축복입니다. 이리 되어야 됩니다.
절기를 예수님은 나로 아예 절단하게 하시는데 그 중간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나타납니다. 이러면 좀 감이 들지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절기는 모세언약에 속한 것이다. 모세언약을 누가 받는가, 다윗언약이 인수받아요. 다윗언약을 인수받은 것을 누가 받는가, 예수님이 새 언약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다윗언약과 새 언약 이전에 중간에 예고편 언약이 들어갑니다. 그게 뭐냐, 예레미야31장33절에 나오는 새 언약 예고 부분이 나와요.
새 언약은 뭐냐 하면, 옛 언약은 어떤 지시나 명령이 내 앞에 와서 스톱이 돼요. 그러면 이게 뭐냐 하면, 내 앞의 율법이 되겠지요. 내 앞의 율법을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내 안의 율법으로 바꿔주십니다. 내 안의 율법으로. 그런데 내 안의 율법은 내가 있어야 되는데 내 안의 율법 이전에 먼저 절차가 있어야 돼요. 주 안의 율법이 돼가고 주 안의 율법에서 내 안의 율법이 만들어져요. 새로운 피조물로 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아담은 흙에서 만들었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흙에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로켓 올라 갈 때에 캡슐 올리고 난 뒤에 밑의 추진 로켓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버려야 되겠지요. 버리지 않으면 무거워서 못 올라가요. 예수님의 피 부분이 캡슐로서 지금 주님이 하늘나라를 선회하고 있거든요. 인공위성으로. 그리고 우주 정거장이 천국이니까.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는 벗겨져야 되겠지요. 그럼 가장 성도가 되어서 가장 기분 좋을 때가 뭐냐 하면, 우리의 육신이 벗을 때입니다. 곧 숨 끊어질 때. 손꼽아 기다리십니까. 제대날짜 표시합니까? 언제인지 알아야 제대날짜를 꼽지. 그 제대날짜 모르지요.
그런데 조금씩 우리에게 매일같이 그걸 경험합니다. 뭐냐 하면 잠 들 때. 마지막 TV끄고 잠들 때. 죽어갑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못 일어납니다. 왜냐, 잠에 들어버리면 자율신경계가 작동해요. 자율신경계는 그야말로 자율입니다. 몸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내 의지를 말을 듣지를 않아요. 꿈을 지가 지어낸 대로 꿈을 꿉니까? 꿈은 전혀 내 예상대로 못 꿉니다. 자율신경계가 있기 때문에. 자율신경계는 교감과 부교감 신경이 있어가지고 내장기관에 분포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밤에 엔진 안 돌아가면 죽잖아요. 엔진 자체적인 에너지가지고 자율신경계가 돌아가야 되니까. 그 자율신경이 뭐냐 하면,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거예요. 심지어 사람만 잠자는 게 아니거든요. 참새도 잠자잖아요. 부엉이도.
그런데 참새는 아침에 나와서 짹짹거리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데 왜 인간은 잘 잤다!~ 해놓고는 아이고, 지난밤에 술을 먹었더니 머리가 아프네. 맨 날 자기가 알아서 깨는 것처럼. 스마트폰의 모닝콜이 깨우는 것처럼. 지가 준비성이 많아서 아침에 눈 뜬 것처럼.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삽니다. 고린도전서15장31절처럼. 발걸음? 물론이고. 머리카락? 물론이고. 우리의 하루, 하루 목숨도 하루살이 목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내일 일을 니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이렇게 해라.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니.(야4:15)
절기에서 우리 자신이 길이 된다는 것을 전환시키기까지 요한복음7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절기를 의식하고 절기를 겨냥하면서 절기 날에 올라갑니다. 올라가면 되는데 또 때가 안됐데. 때가 안됐다고 빼시는 거예요. 또 빼셔요. 동생들이 하는 말이 “주여, 지금 때를 나타내면 됩니까?” 하니까 그 말 때문에 안 올라가는 거예요. 그 말 때문에.
때가 안됐다 하니, 5~7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보세요. 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사적인 것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전체에 통할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한 세상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런데 그 규정하는 동기가 뭐냐 어디서 나오느냐, 예수님 쪽에서 먼저 세상을 건드려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정답은 예수님께서 먼저 건드렸기 때문에. 어떻게 건드렸습니까? 세상이 악하다고 했잖아요. 자, 그러면 질문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세상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봅니까? 악하다고 봅니까? 선하게 봅니까? 어떻게 봅니까?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있다는 그 평가는 선하고. 그렇죠? 그렇게 되지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고 그런데 이 평가는 악하고. 요것은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빨리 했습니다. 다시 해봅시다. 세상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는데 요런 평가를 내리는 요 평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진리다. 참이다. 라는 것을 세상이 내리고. 성도가 세상 보기에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악한 것도 있고 선한 것도 있는데 이렇게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살해하게 만든 사탄의 생각입니다. 이게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돼 있지요? 세상에 포함돼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늘 아픈 것도 아니고 늘 생생한 것도 아니고 어떤 때는 선한 생각을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망상해가지고 나쁜 생각 할 때도 있지만, 하지만 나는 무슨 선한 생각을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죄인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주께서 당장 나를 이 세상에 없앤다 할지라도 저는 흔쾌히 수용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지요. 이런 때 두려움이 생겨버리면 모순돼요. “나는 흔쾌히 죽겠습니다. 아휴~ 그런데 내년에 딸이 결혼하는데. 안되는데.” 이건 뭐예요? 이건 뭐가 문제에요? “흔쾌히 죽겠습니다. 그런데 딸의 결혼식은 보고 죽어야 됩니다. 아니면 딸 손잡고 갈 남정네가 없기 때문에.” 이건 이상한 거예요.
“저는 평소에 주의 예배를 기다렸습니다. 빨리 주님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드라마는 마지막 장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고 가겠습니다.” “오후예배 2시인데 2시에 빨리 참석해야 될 텐데 한일 야구전이 8회 말 투아웃의 말루에 이승엽인데, 지금 카운트가 2스트라이크 3볼 그것보고 가겠습니다.” 주께서 이것까지 다 아시고 구원하신다니까요. 이런 것까지 이미 구원의 절차 속에 시나리오에 포함이 돼있어요.
그것은 바로 주께서 관심사가 우리의 구원의 관심사가 1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 길 만들기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길 만들기. 이 길 만들기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누가 길이에요? 예수님 본인을 길이라고 했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만들어줘야 우리가 내 생각이 마귀생각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지를 하게 되어있습니다. 마귀 생각 같으면 마귀 생각 가운데 착한 마귀 생각 있습니까? 없습니까? 착한 마귀 생각. 무슨 착한 마귀 생각이 있어요? 선한 마귀 생각 있습니까? 하얀 거짓말 있어요? 회색 거짓말 있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그 말은 하나님이 용납하는 분은 인물은 딱 한분뿐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안 받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받아줍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만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다른 영광은 안 되기 때문에. 영광요? 예수 안에서 영광 돌려야 돼요. 예수 안에서 뭘 부인할 때? 자기를 부인할 때. 내가 헌금하고 내가 기도한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입니다. 라고 할 때, 영광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도 자체를 하게 하신 것이 주님이라는 걸 믿는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응답이 된다 이 말입니다. 주님은 어디를 방문하느냐, 초막절에 방문합니다. 초막절을 깨버리죠. 초막절을 폭파시키면서 폭파된 초막절 안에서 초막절의 주인이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자, 초막절 미리 당겨봅시다. 7장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뭘 마시라는 말입니까? 마신다니까 액체종류겠지요. 38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생수의 강은 성전에서 있는 언약궤에서만 나오도록 에스겔47장에 있지요. 성전에서 물이 나올 때 그것이 마지막에 완성될 성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진짜 성전이냐, 아니냐는 무엇으로 결정 나느냐, 물이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로 결정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전에다가 뭘 붓습니까? 실로암에다가 물을 갔다가 붓는 거예요. 물을 갔다가 부어요. 그 말은 스스로 뭘 인정하는 겁니까? 헤롯성전은 온전한 성전 아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왜? 이걸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교육용으로도 적절하고 또 이런 식으로 우리가 열심히 새 성전을 고대했습니다, 를 티내는 성의 표현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1시에 예배드리는 것이 신령한 진정한 예배가 됩니까? 안 됩니까? 형식은 신령한 진정한 예배에 넘어설 수가 없어요.
성령의 세계는 앞에 길을 타넘어야 돼요. 길을 통해서 와야 되는데 길은 우리가 모른다 했지요. 길을 우리가 알고 가는 것이 아니고 길을 주께서 만들어내시면서 가는 거예요. 만들어내시면서. 지금 이해를 더 쉽게 합시다. 어린 애가 지휘봉으로 지휘를 한다고 합시다. 뭘 알겠어요? 대곡 운명 교향곡을 알겠습니까? 정명훈 지휘자가 뒤에서 어린애가 작으니까 팔을 잡고 지휘를 해준다고 봅시다. 그러면 지휘가 되잖아요. 왜?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길을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나를 가지고 길을 만들지요. 길을 만들 때 어떻게 한다? 내 마음에 길을 내는 거예요. 내 마음이 찌부러지면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아는 순간,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지지요. 죄인이니까. 죄인이니까 당장 죽여도 저는 고맙습니다. 이리 나옵니다. 그 자체가 남한테 증거 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길이 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를 도 닦으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너를 데리고 남에게 전도시키겠다는 이 말이에요. 목회는 주님이 하시고 전도도 주님이 하시는데 사용하기는 죄 많은 우리를 사용하시면서 하시는 거예요.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 들었던 동요가 나오는데 어떤 정이 돈독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가 장날에 가가지고 말도 안 되는 식으로 물건을 교환해 온 거예요. 같이 갔던 청년이 이제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죽었다. 저렇게 손해보고 물건을 바꿨으니까 혼나겠다. 해가지고 얼마나 혼나는지 딱 들어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자기가 장날에 가서 바꾼 걸 이야기하는데, 바꿀 때마다 이것은 속아서 터무니없이 나쁜 물건으로 바꿨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 입에서 하는 말이 “잘했어요. 잘했어.” 그래서 나온 노래가 <잘했군. 잘했어>에요. “아휴, 잘했어요. 잘했어요.” 그렇다면 결국 할머니가 할아버지보고 잘했다는 말은 이미 할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의미이고 딴 의미 아니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뭘 해도 “잘했군. 잘했어.” 가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주님은 우리를 그런 안목으로 보시는 거예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잖아요. 아가서에 나오듯이.
그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바쁘다 보니까 우리가 너무 세상에 살다보니까 그걸 자꾸 빠트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길이 되고 주님의 <잘했군. 잘했어> 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잘했군. 잘했어>가 남한테 나타날 거죠. 나타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뭘 느낍니까? 주님이 함께 있음을 보일 때, 그게 바로 복음이 되는 거예요. <잘했군. 잘했어요.>
그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농심이야기. 밤중에 몰래 형은 동생한테 주고 동생은 형한테 주고. 형은 식구가 많기 때문에, 동생은 신혼살림에 보탤까 싶어서 볏 짚단 바꾸다가 그만 둘 다 마주쳐서 들켰어요. 그럴 때 찰칵 찍어서 농심라면 붙인 거예요. 우리가 바로 보름달에 들켜버린 십자가 지고 가는 우리 모습이 들킨 거예요. 찰칵하고. 갑자기 누가 와서 조명탄 터트려서 사진 찍은 거예요. 십자가 지고 가는데 들켜버렸어요. 십자가 심. 내가 죄인인 걸 들켰어요. 그게 복음의 전파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아이고, 목사님 훌륭하십니다.” 하는데 목사가 설교자체가 죄인인 것을 들켜버릴 때 그 교인들은 목사를 통해서 복음을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지 자랑해버리면 이건 완전히 고린도후서11장의 사탄의 일군이 설교하는 중이에요. “이 교회가 25명 이었는데 10년 만에 2500명 됐다.” 이게 전부다 사탄이에요. 자랑하는 거 이렇게 하세요. “25명 왔었는데 2명 남았다. 그래도 나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다. 믿습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성령의 세계는 못 갑니다. 길이 나와야 되고 길을 통해서 갈 수 있는데, 그 길은 우리 힘으로 못 만들지요. 그러면 길이 나오는 재료는 뭐냐, 재료는 사탄에 속한 우리가 되는 거예요. 맨 날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세상 부귀영화, 돈, 자존심, 이것밖에 모르는 이것이 놀랍게도 강도보다, 세리보다 더 흉악한 우리가 꿈에 온갖 생각 다하고 성질나면 온갖 성질 다 터트리는 우리가 주님의 길이 된다니까요. 길의 재료가 된다니까요. 재료가.
“마귀 여기 있었네.” 하고 그걸 훅! 쪼가리 낼 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 내부의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두 층으로 되어있구나! 하나는 마귀 층, 그 밑에 주님의 성령 층, 성령 안에 있으니까 내가 죄인인 걸 알지요. 성령 밖에 있으면 착한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는데 이런 평가는 옳았다. 이렇게 돼버려요. “이 근호 목사는 매일 죄, 죄, 죄. 왜 죄만 있어. 착한 일도 있지.” “그 평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 평가가 내 평가니까 옳을 걸.” “그러니까 마귀네. 딱 마귀지.”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를 그렇게 내는 겁니다.
그래서 좀 뭐 복음 안다하고 복음 전하는 교회 다녔다 하고 이야기 죽 들어보면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복음 아니까 나는 의롭잖아.” 하는 그거에요. 아직까지 그 강을 건너지 않았어요. 아직까지 그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았어요. 성령의 강을 못 건넜어요. 복음 전하는 교회 다녔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생수가 나오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생수가. 생수 나온다고 맨 날 호수 꼽아가지고 닝겔에 머리 잊고 침 나오고 튀기고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니가 아는 시간과 공간식이고 주님의 방식은 따로 있어요.
그것은 십자가 이후에 우리에게 그대로 이 말씀을 그대로 우리에게 생수가 나오도록 조치할 겁니다. 생수가 나오려면 십자가에 우리가 죽는 순간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생수가. 그래야 그리스도의 은혜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만약에 성령이 안 오고 나와 버리면 내 자랑이 나와 버려요. 성령 들으러 왔다가 사탄의 침만 디닥 쳐 바르고, 사탄의 신전에 가서 사탄의 이벤트 구경하다가 나온 거예요.
자,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절기인데 어떻게 절기에 예수님 한 분 개입한 것 때문에 어떻게 우리 속에서 생수가 나오는가, 돌변적인 사태가 어떻게 해서 벌어질 수 있는가, 그 메카니즘 그 절차, 과정을 우리가 살펴보는 겁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서 요한복음7장에서 계속 이어서 나가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8~10절에 보면,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올라갔습니다. 그럼 분위기는 뭡니까? 집단적으로 이미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지요. 그 분위기는 완전히 종교분위기죠.
자, 물어봅시다. 종교분위기는 기쁠까요? 슬플까요? 대단히 즐겁지요. 유대인들의 초막절의 절기를 보세요. 이것은 미치듯이 춤춥니다. 마치 김정은 앞에서 북한 아줌마들이 춤추는 것과 똑같아요. 이것은 자발적으로 미치듯이 너무 좋아서 춤을 춰요. 그걸 누가 보고 슬프다 할 사람 없어요. 왜? 성경에 보니까, 시편에 보니까, 그 날에 기뻐하라, 하는 거예요. 성전에 올라갈 때 기쁨의 노래를 불러라.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해요. 나중에 해보면 이게 버릇이 돼가지고 기뻐져요. 기뻐진다고요. 그거 기뻐서 구원받았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기뻐서 구원받았을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지 않고 이랬을 거예요. 춤추면서 올라갔을 거예요. 성전에. 나처럼 해봐라, 요렇게! 주께서 춤이 모델이 돼가지고 춤추고 올라갔을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 갈 때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쫓겨나서 갔지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만에 올라가셨잖아요. 그 방식이 길이라면 우리를 그 방식대로 따라오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뭘 지어야 돼요? 주님 가신 방식이라면 뭘 해야 됩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십자가를 질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의 육신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흠집 내고 자기 자존심, 자기 싫은 소리, 내 가치, 의미, 모독하는 것은 우리는 용서가 안 됩니다. 막 보복 운전하고 난리 나요. 보복운전 안 한 사람 없어요. 다 해본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욱질 해본 사람들이에요. 전부다. 다 자기 사수하는 게 인간이에요. 다 나빠서가 아니라 육신의 본성이에요. 우리의 본성은 내 인력으로 안 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주님께서 명령한 것은 인력으로 될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니에요. 안 되니까 이야기하시고 안 되니까 주님 올라가신 거예요. 우리는 주님 하신 걸 통해서 왜 내 힘으로 안 되는가를 새삼스럽게 알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께 몽땅 다 감사하는 겁니다. 이 은혜에 대해서.
안 되니까, 안되는데 자꾸 하라하니까 내가 막 살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안 되는데, 자꾸 하니까 이게 위선자가 될 뿐이지요.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막 살아버려라. 명절날 분위기 자체가 기뻐요. 기쁜데, 주께서 초를 치러 가신 겁니다.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초치는데.
아까 요한복음7장 다시 봅시다. 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나, 누구는 미워해요? 나는 미워하지요. 왜? 내가 세상의 행사를 뭐하다? 악하다 하기 때문에. 그 행사가 뭐냐, 그 행사 중에 하나가 초막절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지금 지적질 하려고 올라가신 거예요. 아예 욕을 유발해. 의도적으로. 욕을 유발한다고요.
우리는 세상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요. 우리는 안 믿는 가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하지만, 성령이 임해버리면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게 되면 이것은 터무니없이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남한테 욕을 얻어먹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목을 ‘길’로 할게요. 길. 길로 하겠는데, 우리가 우리 인생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 하지 마시고 도리어 내 힘으로 나를 움직였던 그 자체를 용서해 달라고 이렇게 늘 회개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맘대로 안 되는 인생, 내 뜻대로 되지도 않는 인생, 지금껏 주님께서 밀어붙인 인생, 하지만 또 돌아서면 또 내 식대로 고집을 부리는 내 인생, 주께서 익히 아시오니 내 식대로 고집부리더라도 그것마저 주의 뜻에 활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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