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a-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7장1절(길)150604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께서 서서히 이제 행동에 나서십니다. 절기 초막절에 자신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집단적으로 활동이 파급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핍박 같은 게 오지를 않지요. 그러나 정치적 집단과 만나게 되면 거기서부터 그쪽에서 숨겨진 힘이 노출이 돼요. 예수님이 개인을 만나면 개인의 숨어있는 죄 성이 나오지만, 집단이 만나면 집단을 아우르게 그렇게 배후에서 세력을 발휘했던 숨겨진 조정세력들이 예수님 앞에 발작을 일으키듯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주께서 만들어지는 게 뭐냐 하면 길입니다.
요 길이라는 말을 제가 썼는데요, 좁은 길이지요. 예수님이 길을 만드시는데 길을 만든다는 말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말은 “길이 있다. 어느 길로 가면 되지?” 이게 우리한테는 편해요. 왜냐 하면, 어차피 평지가 있으면 길이 생기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만든 길은 분명히 땅은 있는데 길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면 길은 어떻게 만들지요? 주님의 몸짓이 길이 되는 양식으로 이제 개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뭐 이 명박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그냥 불도저로 앞장세우느냐, 아니에요. 길은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사탄과 마주치는 그 틈새가 길이 되는 겁니다.
<샌 안드레아스>라 하는 영화를 개봉 날 조조보고 내가 올렸던 글이거든요. 샌 안드레아스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더니 그 영화를 보니까 그게 단층,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로 이어지는 지진의 약한 취약 된 단층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안 오시면 이 세상은 그냥 세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면 단층이 생겨요. 단층이 생기면, 지진이 일어나면 땅과 땅이, 영화에 보면 오렌지 밭이에요. 오렌지 밭인데 지진이 일어나니까 이 지진이 오렌지 밭 같은 거 고려합니까? 안 합니까? “아이고, 이 오렌지 밭에 내가 관통하면 안 되지. 농사지은 사람에게 미안하게.” 피해가고 그런 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완전히 밭 한 가운데를 협곡을 만들어놔요. 쫙 갈라져버립니다. 균열이 생겨버리는 거예요. 균열이.
예수님과 마귀의 이야기는 사실 영적인 영역이지요. 그것이 바탕이 되어있어요. 바탕위에 살포시 얹어놓은 것처럼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구축한 사회가, 공동체, 이런 게 얹어져있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 위 사회에서의 힘은 구성원들끼리 모이는 결집력과 단결력으로 되겠지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교회가 단결하고 결집하고 그러잖아요. 교회끼리 축구대회, 배구대회하면 결집이 잘되잖아요. 체육대회, 단합대회 하게 되면 잘되잖아요. 놀러간다 하면 잘 하잖아요. 그런데 놀러갔는데 눈치코치 없는 사람이 와가지고 복음이야기 해버리면 이 놀러간 교회가 둘로 단층을 이루겠지요. 여기까지 와서 영적이야기 해야 되겠나, 이리 되지요.
영적 이야기가 이 안에 인간들의 결성으로 다져진 이 지평을 지진을 일으켰다면 이것은 밑에 뭐가 있다? 영적인 단층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지역에 평범한 오렌지 밭이 갑자기 둘로 나누어졌다면 이것은 눈에 보이는 지형과 땅과 그 위에 사는 인간이 현실의 전부 이겠어요? 아니겠어요? 전부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어디 석가모니처럼, 공자처럼 좋은 말 했습니까? 아니면 귀신을 쫓아내는 거예요. 귀신을 쫓아냈잖아요.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은 언어로 집결된 인간이 좋은 말만 하면 결합이 되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아는 인간 현실 그 바닥에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귀신이라는 것이 상주하고 있다는 것이 폭로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마태복음12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미 하늘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왔다는 뜻이거든요.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귀신을 심판한다는 뜻이에요.
귀신은 악마 이외에는 지시, 명령을 받지를 않아요. 귀신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악마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귀신은 누구의 힘에 의해서 삽니까? 악마의 힘에 의해 사는데, 악마 외에 다른 힘으로 귀신이 꼼짝 못하고 쫓겨났다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보다도 세다는 뜻이에요? 악마보다 힘이 더 세잖아요. 누가 주를 이기겠는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히 이런 뜻입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게 다 날아가도 허허 주님 잘하셨네요. 그게 예수 믿는 거잖아요. 왜? 내가 쥐는 것은 내가 너무나 꼭 쥐고 있기 때문에 안 놓치는 법인데, 나보다 누가 더 셉니까? 주님이 더 세지요. 예를 들게 되면, 열심히 새벽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애가 몸이 아프니까 건강케해주세요.” 열심히 기도한다 말이죠. 그러면 병 낫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는 말은 그 아줌마는 어디에 매여 있느냐 하면, 병들면 나는 겁낼 거야, 라는 두려움 속에 있지요. 애가 병이 안 낫고 계속 아프면 나는 어떻게 살지, 라는 두려움이 늘 있지요. 그러니까 그 아줌마는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믿어요? 안 믿어요? 전혀 안 믿고 있지요.
제가 어제 수요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내입으로 기도시작해서 마지막에 예수님이름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무슨 뜻이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자체가 기도 응답이에요. 따로 기도 응답이 필요 없다니까요. 처음 할 때만 기도응답 있겠지요. 우리 애가 건강한 모습으로 오는 것을 상상해가지고 그게 기도 응답이라고 내가 챙겨야지. 이런 게 있겠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해서 덮쳐버리면 이 기도 응답이 되던 안 되던 애가 죽던 말든 그것은 내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고 주님께서 유발시킨 일이라는 것을 믿어진다면 이미 그 사람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응답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아프게도 하시고 건강하게도 하시고 특히 사람들이 기대하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직장 되게 하시고 쫓겨나게 하시고 아직도 못 들어가게 하시고 이력서 내도 소용없게 만드시고 믿는 믿음이 그렇게 티가 나는 거예요. 환란과 핍박이 이렇게 티가 나는 거예요.
하여튼 예수님의 믿음은 내가 기대한 믿음을 손 털 때까지 계속 작용합니다. 멀쩡한 산이 빠져서 바다에 옮긴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뭐를 잘못되게 상상하느냐, 주의 믿음의 능력이 임하면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질 것이라고 상상하거든요. 그게 믿음 좋은 게 아니에요. 산이여, 바다여, 들으라, 바다에 빠져라, 이거 성사했다고 믿음 좋은 게 아니에요.
“산들어서 바다에 빠지는 게 내 소관 아니지.” 이게 믿음이라니까.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든 산이 그대로 있던 어쨌든 거기서 손 떼는 게 믿음이에요. 손 떼는 게 믿음이고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하면 주께서 그렇다 하면 그런 거예요. 뭐 사람이 어떻게 마십니까? 그거 따지지 마.
현정화가 라면 먹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땄다. 라고 넘버3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 부하가 뭐라고 합니까? “형님, 현정화가 아니고 임춘애인데요.” 하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 말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아. 어딜 니가 따져. 송 강호 나오는 <초록 물고기> 유명한 대사 아닙니까. 말을 더듬으면서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예요.
성경 끝났어요. 성경 해석 모든 해석이 끝나버린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누가 하신다? 누구 일이다? 주님의 일이지, 내 일은 아닌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 보면서 원하는 게 있으니까 주제넘게 거기에 끼어드는 거예요. 믿음으로 끼어들어가지고 요걸 내 것으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거예요. 이게 주님을 가리는 짓이 되는 겁니다. 비가 오든 안개가 끼든 다 누구의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지요. 오늘 숨 쉬고 내일되면 숨이 멈춰도 누구 소관이에요? 주님 소관. 죽이든지 살리든지 주의 뜻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바깥에 있는 이 사회라는 것, 이것 말고 그 밑에 뭐가 있는가 하면 인간이 겁이 나서, 두려워서 못 이기는 게 있어요. 그게 바로 사탄의 힘입니다. 죽는 게 무섭고, 실패하는 게 무섭고, 성공 못하는 게 무섭고, 남들이 나보고 욕할까 싶어서 무섭고, 궁시렁 궁시렁 나한테 뒷말 할까봐 뒷다마 할까봐 무섭고, 아이고, 인간아, 왜 저래 사나, 욕할까봐 무서워하지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대시하는 것은 거지 나사로보고 욕해라. 돌 맞아 죽은 스데반보고 욕해라. 12제자보고 다 욕해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욕을 얻어먹거든 차라리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선지자들도 다 이와 같이 해서 천국에 갔거든요. 모세, 엘리야 변화 산에 나타났잖아요. 모세, 엘리야 변화 산에 천국과 함께 있는 건 부럽지요? 그건 부러우면서 그들이 어떻게 갔는지는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그들은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간 거예요. 주님주신 믿음으로.
주님 주신 믿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믿음이에요. 내가 만든 믿음은 믿는 나에게 도로 찾아오는 믿음이에요. 요건 신념이라 합니다. “아이고, 나 믿음 왜 이리 좋아.” 이런 거. 자기 주인을 찾아 도로 돌아오는 것. 그런데 주님이 주신 믿음은 주님이 누구십니까? 믿음을 주신 분을 찾아가도록 이끄시는 믿음, 능력, 이게 믿음이죠. 그걸 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해요. 은사. 선물이라 해요. 선물.
애들 가지고 노는 요요 있지요. 던지면 다시 돌아오는 요요 있지요. 그것처럼 던지면 다시 나한테 돌아오게 되어 있잖아요. 주님이 던진 은사로 믿음, 소망, 사랑은 다시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제자들에게 성도에게 주기 전에 먼저 되돌아오는 길을 닦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길을 몸짓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의 길을 가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7장부터 시작이 됩니다. 7장부터 길을 가시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가는 그것이 곧 길이 돼요. 그러면 주님이 움직이기 전에는 길이 있었다? 없었다? 없어요. 뭐 여호와 믿고 이렇게 하면 천국 간다. 그런 사람들은 많았는데 길은 없어요. 길은. 그냥 아이디어만 있을 뿐이지. 이리하면 갈걸, 저리하면 갈걸. 그냥 길은 예수님의 하신 그 일로 길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가는 길은 요 윗부분에 사회적으로 또는 지형적으로 어떤 지명이나 또는 행동, 방법, 이런 것을 제시하는 게 길이라면, 주님의 길은 어디를 홈을 냅니까? 이 밑에 바닥에 있는 영적 세계 그러니까 사탄과의 관계위에 길이 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가는 길에는 뭐냐, 나와 타인이 보이지만 나와 타인이 구분되지만, 주님 가신 길에는 예수님과 마귀로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쉬운 예가 있지요. 홍해 같은 거. 홍해 같은 경우에 히브리인들이 갔을 때 지형적으로 물은 절벽이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는 길은 물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길을 텄으니까. 물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되겠지요. 이건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궤 들고 중간에 들어가니까 홍수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톱이 됐지요. 물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되겠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길이 이상해요. 마귀가 있는 곳과 주님 가신 길로 길이 나와져있습니다.
성도가 가는 길에는 성도가 기대하는 어떤 일이 잘 풀리는 게 아니에요. 다만, 마귀가 자기 정체를 폭로하는 그런 절벽길이 나올 뿐이에요. 성도가 가는 길이 건강하고 잘되고 사업 잘되고 그런 길이 아니고 숨어있던 마귀가 톡 튀어나와서 얼굴을 내미는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고 길이 주께서 이끄시는 좁은 길이 되는 겁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예지만, 쉽게 말씀드리면 낮에 공동묘지로 가는 길은 그냥 억새풀이 있고 가끔가다 장미도 피어있고 시원한 버드나무 그늘이 있고 고 가는 길에 끝에는 공동묘지가 볼록, 볼록한 묘들에 참한 잔디가 있고 그게 낮에는 공동묘지가 그 길이에요. 그런데 비가 부슬, 부슬 오는데 밤12시 넘어서 오는 그 길은 누가 나옵니까? 죽은 귀신이 나오는 길이에요. 말도 안 되는 예지만, 쉬운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억새풀 안 보여요. 개인택시 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게 비오는 날 공동묘지 데려가 달라는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휙 뒤돌아보면 하얀 소복입고 있어요. 머리는 길어가지고. 차에 탔는데 비는 다 젖어가지고. 흰옷 입은 긴 머리는 분명히 차비 안 낼 거예요. 그거보고 2만원 나왔습니다. 하면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는 게 요한복음7장인데, 마귀가 정체를 드러내는 시작입니다. 영적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영적 세계에 들어가는데, 개인적으로 귀신 쫓아내는 경우는 앞에서 많이 있었고 마태복음에 많이 있거든요. 그러면 7장부터는 뭐냐, 집단적으로 본격적으로 귀신 말고 악마의 아지트로 출교를 해요. 그 아지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지트에서 축제가 벌어집니다. 절기 가운데서 제일 마감하는 하이라이트 절기를 가지고 초막절이라 합니다. 초막절.
여기1~2절 봅시다.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지 않고 베들레헴에 돌다가 드디어 초막절로 개시를 해가지고 예루살렘에 드디어 이제 등장하십니다. 초막절과 이 악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각이 들겠지요.
자,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장마치고 7장에 와서 길 만든다 했지요. 그 길은 평지에 나와 있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이런 길이 아니고 인간들이 미처 모르는 영적세계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온다고 방금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 가신 곳에 마귀의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악마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악마의 본색이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도대체 악마는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악마의 존재가 이유가 있는데요, 악마의 존재가 이유가 뭐냐, 욥기에 있어서의 악마가 등장하면서 했던 역할이 있어요. 하나님 편에 서있는 욥을 비난하기. 지적질 하기가 이게 마귀가 해야 될 역할입니다. 성도를 고소하는 일을 해야 돼요. 여러분 자신이나 혹시 남들이 여러분을 비난할 때는 마귀가 한다, 이리 보면 돼요. 마귀는 우리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뭘 비난하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를 비난해요. 그래서 예수 안 믿으면 마귀한테 비난 받을 일이 없어요. 왜?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바쁜 존재가 뭐 때문에 자기 편인데 비난하겠어요? 베드로기 때문에 매일 달라고 하는 거예요. 우는 사자같이 헤매는 이유가 뭡니까?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 낚아채려고 그렇게 계속해서 여러 가지 시험하잖아요.
마귀가 우리가 겁나고 우리가 무서워서 달려드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시비 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요,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을 겨냥해서 내게 달려드는 겁니다. 뭐하기 위해서? 청구하기 위해서. “내놓으세요.” 청구가 뭐냐 하면, 내놔라, 라는 거죠. 주님 품안에 있는 인간이지만, 내가 가지고 가야겠습니다. 내놓으세요. 그 역할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마귀는 성심 성의껏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돼요.
왜 그런 노력을 하여야 하는가 하면, 그래야 주님과 붙어있는 것이 내 힘으로 붙어있지 않다는 것을 성도로 하여금 되새겨서 깨닫게 하는 그러한 보조적인 역할을 마귀가 해줘야 됩니다. 내가 믿음 좋아서 붙어있고, 내가 신앙 좋아서 붙어있고, 믿음이나 신앙이나 같은 거지만, 소망과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열심내서 복음 잘 전해서 붙어있고, 내가 착해서 붙어있고 이러한 코딱지 같은 거 다 떼어내기 위해서. 다 떼어내야 돼요.
부산에 부둣가에 가면 옛날 고물 배를 페인트 칠해가지고 다시 새 배 만드는 수선하는 공장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그 아르바이트가 굉장히 힘들데요. 녹슨 그 벽을 다 벗겨내야 된답니다. 마귀가 보세요. 얼마나 고생합니까? 천국 가지도 못하면서 교회 붙어있는 인간들, 주님한테 붙어있는 인간을 녹을 떼어내는데 마귀가 와서 떼 내어 주지 않으면 우리가 나가라고 해도 안돼요. 제발 좀 교회 떠나주세요. 해도 안 떠나요. 복음만 전해보세요. 24명 가운데 몇 명 남는지 몰라. 복음만 전하면 돼요. 알아서 다 떨어져요. 자석이 그렇잖아요. S극하고 N극이 밀듯이 주님이 등장하게 되면 이것은 집단적으로 주님을 공격합니다.
바라바를 원하느냐, 아니면 예수를 원하느냐, 의외의 투표 결과가 나왔지요. 만약에 예를 들어보세요.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면 우리는 어느 쪽에 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예라고 할 때 나 혼자 노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못하지요. 눈치 보는데. 아이고, 나 혼자 아니요 라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투표가 이미 과반수 넘어갔는데. 가만히 있자. 내 몸만 살자. 이리 나오지. “아닙니다. 예수는 그럴 분 아닙니다.” 손 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도대체 어느 안전에서 누구 앞에서 함부로 손을 들어요. 죽을라고.
아예 베드로 같이 자진해서 나 저 사람 모른다고 아주 미리 당겨서 지가 알아서 긴사람 있잖아요. 귀순한 사람 있잖아요. 예수님 쪽에서는 배신이지만, 저쪽에서는 뭡니까? 귀순용사지요. 마귀가 셉니다. 아담의 족속은 누구도 못 이겨요. 불순종의 영들의 지배 앞에서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목회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이 게임은 애초부터 안 되는 게임입니다. 이 게임은 백발백중 실패할 게임이에요. 멀쩡한 홍해바다 갈라진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모세 빼놓고 전부다 반대했어요.
모세가 홍해 가까이 딱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가지고 공동묘지, 집단 자살하는 곳이 기껏 여기구나!” 그들의 아이디어는 그들이 평소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억만 들어있어요. 기억은 재탕입니다. 기억은 새로운 게 없어요. 기억은 창조가 아니에요.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도 홍해가 갈라질 생각도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지시를 할 때, 지시하는 그 순간까지 바닷물이 갈라질 줄은 몰랐지요. 지팡이를 대니까 지퍼도 그런 지퍼가 없어요. ykk지퍼 같아요. 쫙 열렸어요. 모세가 지팡이 끝을 봤는가. 뭐 이런 게 다 있어. 지팡이에 뭐 있겠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뿐만이 아니고 모든 일, 모든 기적이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 없습니다. 인간의 지금껏 경력과 한계 속에는 없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자기 힘을 보탤 수가 없게 돼있어요. 내가 힘을 보탠다는 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내 소유의 힘을 보태는 건데 그것 보태면 천국이 얼룩이 생겨서 안돼요. 때가 묻어서 안돼요. 차라리 세리나 창녀나 강도처럼 차라리 뻔뻔스러워야 돼요. “저 창기인데 주여 되지요?” “되고말고.” 그리 가면 돼요. “저 강도인데 오늘 밤에 응?” “뭐?” “에이, 아시면서.” “그래, 니 오늘밤에 낙원에 있어.” 이거 아주 간단하게 끝났어요. 세상에 바위하고 협상해도 그런 협상이 없어요. 너무 수월하게 계약돼 버렸어요. 왜? 그 뻔뻔스러움 때문에 구원하신 거예요.
강도가 내 것 없이 간다는 걸 알았어요. 강도의 믿음 대단하지 않습니까? 내 것은 쓰잘데기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평생 동안 살았던 나의 착함, 선행 심지어 악함, 선행도 포함 안 되고 악했다는 것이 구원에 전혀 구원에 방해 안 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나의 죄가 나의 구원에 전혀 지장되는 요소가 아니고 장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가 받아들이겠어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믿겠어요? 그걸.
그러니 이게 기쁜 소식이지요. 희년은 기쁨의 해가 되겠지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했잖아요. 기쁨의 해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심지어 도박하다가 재산 날린 사람들. 그 다음의 해가 희년이라, 날린 재산 그대로 들어와요. 다 돌려받아요.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습니까?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게 공짜가 아니에요. 우리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다 이루신 거예요. 문제는 이겁니다. 예수님이 왜 육신이 필요했던가, 하는 그 문제거든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에요. 예수님이 왜 육신이 필요합니까? 육신은 죄 있는 아담의 계통인데. 로마서8장에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거든요. 육신이 왜 필요할까요?
예수님의 본인 개인 구원 문제가 아니지요. 예수님은 개인이 혼자가 주가 될 수가 없어요. 만인의 자기 백성들의 주가 되어야 돼요. 자기백성들의 주가 되려면 자기 백성을 자기가 생산해야 돼요. 생산하려면 그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와야 됩니다. 그들이 있는 곳까지만이 아니고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지역에 있는 게 아니에요. 마귀 권세 아래에 있어요. 에베소서2장2절에 의하면 불순종이 작렬하는 그 아래에 있어요. 쉽게 말해서 지옥 아래에 있어요. 주님은 시원한 천국에 사신 분이 지옥의 뜨거운 것을 맛볼 하등의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마는 죄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죄 속에 들어오게 되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봐주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죄 속에 들어온 이상은 죄 값을 똑같이 주님한테 묻게 되어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만나고 난 뒤에 마귀가 노리는 건 이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사람처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기를 유혹했지요. 악마가. 기존에 인간들이 살았던 방식을 원했던 겁니다.
기존의 인간이 사는 방식은 인간에 방식이 아니고 마귀가 이미 정신적으로 심어 넣어준 방식이에요. 사람은 떡 없이는 못산다. 사람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 세 번째는 인간이 결국 노리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다. 인간은 여기서 못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고 벗어날 마음을 아예 먹지를 않지요.
아침에 눈을 떴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갑자기 부귀영화가 방안에 있다. “에이 씨, 오늘도 재수 더럽게 없네.” 이렇게 이야기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 정말 왜 이러지. 나 정말 이런 식으로 살기 싫은데. 아이고, 지겹다 다이아몬드 지겨워. 5캐럿 정말 지겹다. 정말. 차고 무겁기만 하고.” 이런 거 없어요. 그것도 사람이 떡으로 산다. 아침에 문을 여니까 짬뽕, 자장면, 탕수육, 요기요를 했는지 배달통을 했는지 줄줄이 족발부터 있는데, 대부분 밥하기 싫은데 잘됐다. 설거지도 안하고 알아서 가지고 가고. 이렇게 생각하지. ‘아, 언제까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문을 여니까 웬 소녀 팬들은 많은지. 엑소 하면서, 오빠 하는 인기가 감당을 못할 정도로.
두 번째 시험이 그거잖아요. 당신이 뛰어내리면 인기 있을 거고 메시아 기능을 수월하게 된다고. 당신이 그거 하려고 왔잖아. 한 번 딱 뛰어내려봐라, 천사가 딱 받쳐봐라, 당신은 완전히 당신의 업무는 막 되는 거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3절에.
3절 읽어보세요.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보세요. 배 다른 형제지만 형제들이 그렇게 조언하잖아요. 아, 이런 인재가 촌에서 숨어있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갈릴리라는 하는 곳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 지형이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여기가 지중해이고 밑에서부터 올라옵니다. 요단강이 여리고성하고 마주하는 게 예루살렘이에요. 산지가 있고 중간을 계곡이라 하고 구릉지고 해안평야고 이렇게 돼요. 요 산지에서 죽 올라가면 화살표 모양의 이스라엘의 평지가 나와요. 갈릴리 호수가 있고 데가볼리가 있고. 이스라엘, 사마리아 이렇게 있어요. 있는데 이 갈릴 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평지가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말이 맞아요. 평지에서 올라가니까.
예루살렘은 850m에요. 높이가. 예루살렘에 맞은편에 감람산이 있다고 아까 말했지요. 주께서 기도하신 곳. 예루살렘에서 일하고 쉬기는 감람산에서 쉬고. 그리고 또 예루살렘에서 일하고 감람산에서 또 쉬고 이렇게 했어요. 체포되기는 감람산에서 체포됐지요. 기도 끝나고 난 뒤에 체포되어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야바하고 이렇게 그 당시에 제사장이 두 명이었는데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이고. 그렇다면 이곳은 시골이다 말이죠. 시골. 흑암이 거한 땅이고.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절기 때 어디로 와야 돼요? 갈릴리에 안 갑니다. 어디에 와야 돼요?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지요. 성전에서 나와야 된다는 것은 이것은 이미 그들의 정신세계는 예루살렘이 중심이고 갈릴리 이곳은 별 볼일 없는 거예요. 시편의 모든 내용이 뭐냐, 메시아가 어디에 옵니까? 시온 산에 오거든요.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시온 산이 있어요. 모든 예언이 초점이 예루살렘 시온산 여기에 초점이 있는데 갈릴리가 어디서 티를 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빛은 움직인다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이 성경의 모든 시온 산이 예루살렘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지정돼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내가 예루살렘이니까 내가 성전이니까 움직이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경을 어깨에 메고 가신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성경 전체를.
성경을 문자로 보면 어떤 특정지역이 있지만, 성경의 실내용은 누가 짊어지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지금 실천에 옮기고 있는 하나, 하나가 뿜어내는 모든 것이 성경의 완성입니다. 모든 개념의 완료가 되지요. 그것이 신약의 사도바울이 오게 되면 뭐냐 하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 안에 있어요. 천국은 어느 하늘에 있는가? 공간으로 묻는 게 아니에요. 공간으로 묻는 게 아니고 인격으로 물어야 돼요. 말이 참 어렵지요. 인격으로.
예를 들어서 “아버지, 내가 행복하려면 어느 집에 가야 됩니까?” 하면 아버지가 “니가 독립했다고 나가있지 말고 어서 내 집으로 들어오라.” 아침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잖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천한 출신의 여자하고 살지 말고 재벌 된 아버지 집에 오면 행복 한다. 아버지 집에 오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우리는 알아듣는데 촌에 있다가 평창동이나 압구정동 아버지가 오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나랑 같이 살자.” 비슷한 말 같은데 차이가 나지요. “아버지, 집 몇 평인데?” “나, 집 없다. 같이 살자. 그러면 행복하다.” 이런 식이다 말이죠.
그래서 마귀가 이야기하는 세상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주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뭘 포기해야 돼요? 우리 인간이 꿈꿔온 것이 세상에서 내 눈에 경험했던 것의 조립한 거잖아요. 아, 저 집이 좋아 보인다. 주여, 저 집주세요. 아, 저 사람은 너무 잘났다. 저 사람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저 여자는 너무 예쁘다. 저 사람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모든 게 이미 눈에 들어왔던 기억들을 중요한 것을 뽑아가지고 지 맘에 드는 거 뽑아서 이거 달라 하잖아요. 그렇게 모아놓은 게 잡동사니가 되고 쓰레기장이 되지요.
행복의 조건을 누가 만드는 겁니까? 행복의 조건을 자기가 만드는 거니까 복을 받는 게 아니고 복을 지어낸 셈이 되지요. 복을 창작한 셈이 되지요. 조각가가 지가 재료가지고 조각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지가 깎아가지고 지가 자기 얼굴 깎는 거예요. 이게 인생인데. 인생은 누구나 자기를 모델로 한 우상숭배자입니다. 왜? 모든 하는 짓거리 보면 자기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듬어놓은 하나의 가정도 그렇고 모든 대외적인 사업도 그렇고 전부다 자기 자존심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흡족하도록 그렇게 만든 거지요.
주께서 그거 치워버리고 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아라, 그 집이 어디입니까? 그게 성령이 인도하는 예수님의 집이지요. 예수님의 집의 특징이 뭐냐, 예수님의 자존심만 있어요. 우리 자존심은 챙겨주지를 않습니다. 주님의 자존심이죠. 대표적인 것이 뭐냐, 바로 어떤 임금이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하지요. 임금이 자기 아들 혼인잔치 있다고 청첩장을 보냈거든요. 오지를 않는 거예요. 종들을 보내니까. 그 중에 아주 특이한 경우가 뭐냐 하면, 그 날짜가 하필이면 본인 장가가는 날이라. 아니 지 장가 놔두고 남의 장가 참석한다고 말도 안 되는 거죠.
그 사람들이 밭을 샀습니다. 소를 샀습니다. 장가를 가야됩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그들이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못 갈 수밖에 없는 사항이 딱 맞아서 그런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임금님의 아들 잔치보다도 이게 급선무라고 생각들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면 바빠서 못 오면 양보를 하던지 임금 쪽에서 날짜를 미루면 되잖아요. 임금이 왜 임금입니까? 아량이 넓어서 임금이지. 좀생이하고 똑같은 마음이 무슨 임금이에요. 그게 무슨 대자 대비한 겁니까.
그런데 보세요. 이 임금의 자존심 보세요. 안 왔다고 해가지고 군대를 풀어서 죽여 버렸어요. 거기다 웃기는 것은 놀고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모았잖아요. 임금이 지 자존심 기어이 세우려고. 아, 놀고 있는 사람을 모았으면 그냥 밥이나 주고 보내면 될 텐데 예복 안 입었다고 군대를 보내서 또 진멸하네요. 이건 조폭도 아니고 임금이 이상한 성질이에요. 예복을 안 입었다고. 그러면 사전에 놀고 있는 사람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지. “이 중에서 예복 입지 않은 사람 들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하던지. 예복 입기 전에 미리 주의사항을 하던지. 예복 안 입으면 혼날 수가 있습니다. 미리 알려줘야 하는데. 미리 알아서 예복 입을 사람, 안 입을 사람 결정해 놓고 예복 안 입었다고 조저 버리면 도대체 임금 아들 결혼식인지 아니면 살육장인지 분간이 안 돼. 사람을 심판하는 장소인지, 임금의 축하장소인지. 변 사또 생일하고 춘향이 조지는 거하고 똑같아요.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도저히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적들이 인간으로서는 납득 정도가 아니고 거부하고 싶은 일들이에요. 그걸 전하세요. 녹슨 거 다 떨어지도록. 이것은 도저히 뭔가 잘해보려는데 그것마저 차버리는 거예요. 주님한테 잘해가지고 점수 따려하는 것까지 차갑게 밀어내잖아요. 강도되기 전에 오지마라. 창녀되기 전에는 오지 마. 탕자되기 전에는 오지 마!
예수님께서 하던 그 정치적인 집단, 그것은 바로 귀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귀신대장은 이슬에 맞듯이 우리의 현실에 장악하는 우리는 그의 일부 화된 그 상태 자체가 사탄의 세계입니다. 사탄의 세계에서 사탄을 찾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거기에 푹 젖어있어요. 수박에서 물 빼고 주세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수박의 95%가 물이에요. 오이하고. 물 빼고 주면 수박도 아니고 오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귀신 빼내면 껍데기만 남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 먹을 것, 입을 것, 인기와 세상의 부귀영화 이것은 우리 자체가 완전히 수박이 물로 되어있듯이 우리는 아예 매일같이 하루 온종일 마귀 생각으로 우리는 완전히 푹 젖어있습니다. 짜면 마귀 생각만 주욱 짜여 나와요.
그걸 대신 짜주는 쪽이 있어요. 그 짜주는 일을 하는 쪽이 있어요. 그게 미디어 쪽이에요. 드라마, 프로야구, 프로축구, FIFA, 주식시장, 사회, 경제, 문화, 모든 총괄해서 죽 짜면 다 귀신 나옵니다. 마귀 나와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푹 젖어 살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는 생각도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사는 거예요. 우리 한국 축구가 일본보다 인기가 앞서야 되고, 만약에 지가 응원하는 야구팀이 졌다. 하루 종일 이것도 결재야! 집어던져버려. 이번에는 분명히 두산이 졌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막 두산이 또 이겼어. 두산 베어들을 응원하는 상사라면. 우리의 모든 울음과 웃음, 행복, 기쁨, 슬픔, 이건 마귀가 던져준 미끼에 따라 조종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불순종의 역사하는 영들 속에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살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그것 말고 다른 세계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지금껏.
공부하는 것, 사는 것, 모든 것이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을 현실화되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한 가운데 그 집단화된 마귀의 왕국에 주님께서는 나올 수 없는 길을 만들어요. 길을 만들려면 마귀의 세력이 흠집이 나야 되잖아요. 그러면 유대나라라는 이름의 사탄의 왕국에서 사탄이 인간에게 심어준 종교가 허울 진 가치관입니다. 그 궁극적으로 심어놓은 그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2절에 나옵니다. 유월절의 명절인 그 다음에 무슨 절이 되지요? 초막절.
자, 초막절은 모든 유대 가족들을 집결하는 그러한 정신적인 중심 절기로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일 끝 절기거든요. 제일 첫 번째 절기가 뭐냐 하면, 유월절이지요. 마지막 절기가 뭐냐 하면, 초막절이에요. 이스라엘의 가장은 3번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유월절 한번 올라가고, 맥추절 한 번 올라가고, 그 다음에 초막절에 올라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약간의 세분화되면 요 3개가 5개가 돼요. 유교절 다음에 무교절, 초실절, 맥추절, 오순절, 7월1일 나팔절, 7월10일 속죄일, 그 다음에 하는 초막절이 7일 동안 시작돼요. 맥추절과 오순절과 수장절은 같이 보면 됩니다. 초실 절이라 하는 것은 유월절하고 무교절하고 같이 보면 돼요.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어쨌든 절기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죄를 위해서 희생물이 희생하는 장소를 들여다봐라. 그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10분 쉬고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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