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5. 22) 1강
광주 강의(2015. 5. 22)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40.185)
광주 강의(2015. 5. 22) 15-1
누가복음 5장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이렇게 시작되지요.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귀신이 떠나간 상태가 어떻겠습니까? 1)덜 피곤하다. 2)허전하다. 몇 번이겠습니까? 허전하겠지요. 왜? 친하게 지냈으니까. 담배를 끊을 때도 허전하겠지요. 귀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단짝이 되어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인간을 둘로 분리시킨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이 등장해서 아무 설명 없이 사람들에게 ‘당신을 둘로 쪼갠다’고 하면 신체를 둘로 쪼개는 줄 알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신체는 그냥 두고 정신 층을 둘로 쪼갭니다.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그렇다면 인간의 정신 층은 처음부터 단일 층이 아니고 두 개의 층으로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 오실 때 광야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에 세움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축소판으로 광야를 설정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했어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허송세월을 보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는 달리 언약으로 규정된 세상입니다.
광야가 세상의 축소판인 이유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에 거할 때 하나님의 언약이 등장했어요. 그러니 광야는 약속의 무대라고 할 수 있어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적들이 패배했지요. 아말렉이 물러갈 때 이스라엘이 계명을 잘 지켜 그들이 물러간 것입니까? 계명 지켜서 물러간 게 아닙니다. 지팡이 때문이었지요.
지팡이가 대표 계명입니다. 대표 계명을 중계인을 세워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되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을 보여주는 장치가 광야가 됩니다. 광야가 있어야 인간들이 원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광야의 특징은 황량함이죠.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언약은 원망의 절차가 있어야 바위에서 물이 나오는 희한한 표징들이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래 창조 때 없는 데서 말씀으로 있게 했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안다는 것은 창조 이전 상태로 그들이 초대받은 것입니다. 창조 이전 상태에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피조물은 없고 언약만 있지요. 왜? 언약대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언약만 있고 아무것도 없을 때 그들이 언약이 있던 자리에 가게 되면 이건 창조 이전의 상태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여기에서 출발한다면 그들은 언약 백성이 됩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요소는 창조했던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창조 이전 없었던 것에서 출발한 요소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자이길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언약)으로 살 것이라”고. 떡으로 사는 방식은 이미 인간이 만들어지고 난 뒤에 인간의 안목과 인간의 세상살이 수완으로 농사짓고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광야가 세상의 축소판이 되려면 그곳에 등장한 예수님도 창조 이전 언약으로 계신 분으로 자신의 생명을 보여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현실화 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창조가 됩니다. 그러니까 신약 때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앞세워 새로운 창조에 나서시는 겁니다. 새로운 창조에 나서시면 광야가 세상의 축소판이니까 그동안 세상을 세상 되게 유지했던 배후의 인물(사단)이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같이 등장하지요.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사단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는 순간 사단도 같이 등장합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시장에서 콩나물을 사고, 시금치를 살 때는 전혀 사단을 의식 못합니다. 그런데 콩나물 파는 아줌마가 “혹시 교회 다니는 분입니까?” 이렇게 나오면 그 때는 이단인 것이 들통 나지요. 나는 콩나물 사러 갔는데 주님은 그 만남을 복음 전파의 현장으로 만드신 겁니다.
전도할 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해야 전도지 상대가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전도가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상대에게 소개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는데 상대가 믿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주께서 일을 벌이신 겁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처럼.
이것을 제가 ‘소외를 통한 참여’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를 소외시키는 방법으로 주님은 나를 복음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는 일이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아니고 창조 이전 언약의 내용대로 내가 언약의 사람으로 새 창조에 참여된 자임을 알게 되지요. 물론 그 과장에서 우리는 핍박을 받지만 어쨌든 우리는 창조 이전 언약에 참여된 자로써 일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지요. 종이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달란트가 종을 예속시켜 버립니다. 달란트는 주님이 주셨기에 주님께 속하고, 주인은 멀리 타국에 갔지만 그 주인의 징후로 남아있는 것이 달란트이기에 우리는 주인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주인이 없다고 제 마음대로 달란트를 처리해 버리지요. 능력이 없다 할지라도 주인이 타국에 가지 않고 현장에 있었다면 “주인님, 저는 능력이 없어요. 그냥 은행에 저축해서 이자나 받을게요.” 이 정도로는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것도 안 했고 달란트를 흙에 묻었지요. 주인이 없다고.
주인이 없고 나만 있으면 그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나는 왜 사는지?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이 문제가 밝혀지지 않아요. 꼭 청소년들처럼. 이들은 자기만 있어요.
주님은 귀신들린 자와 만남으로 ‘왜 인간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무엇 하는 존재인가?’를 보여주십니다. 내가 왜 있는가? 무엇 때문에 있는가? 누구를 위해 있는가? 이런 것은 전혀 생각 못할 때 그는 귀신 들린 자입니다.
귀신과 만난 예수님이 현장에서 하신 일은 이 세상 창조 이전의 목적과 이유가 연결된 체 언약의 성취자로 활동하십니다. 그럼 귀신 들린 자가 거라사에 있는 이 사람 뿐이겠습니까? 아니죠.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귀신 들린 자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
인간은 자기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 몰라요. 왜냐? 궁극적 원천지와 선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마치 어릴 때 타국에 양자로 팔려가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너희 아버지 뭐하는 분이냐?”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현대인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귀신 들린 자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추방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두 층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 속에 있는 귀신이 추방되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의 느낌은 허전합니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가볍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 질문에 아이들이 난처해합니다. 분명히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솔직히 말 못하는 것은 내가 아빠를 좋아한다고 하면 나 몰래 엄마를 제거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에요. 내가 엄마를 좋아한다고 하면 내가 말을 잘못해서 경찰이 와서 아빠를 잡아가면 어쩌나 불안해서 함부로 대답을 못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 현실 사회가 없애버린다는 식으로 아이들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모래로 두꺼비 집을 만들어 놓고 나중에는 심술을 부리면서 자기가 만든 두꺼비 집을 발로 밟아 부셔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9. 11 테러로 미국의 110층 빌딩이 무너졌어요.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내가 난폭한 짓을 해서 높은 빌딩이 무너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 순진한 생각인데 옳은 마음은 아닙니다. 옳아야 천국 가지 순진하다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것은 아이들에게는 참 난처한 질문인데, 이제 어른들에게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남에게 보이는 내가 좋습니까, 나만 아는 내가 좋습니까?” 이 둘을 주님이 분리시키고, 나만 아는 나를 아담의 죄와 연결된 상태로 보십니다. 아담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요.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왜냐? 과거의 것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내 안의 내가 좋았는데 10년이 지나도 내 안의 내가 좋습니다. 10년이란 세월은 흘러가지 않았어요. 그냥 내 감각이에요. 내 속에 시간 의식이 10년이 흘렀다고 느껴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전혀 바뀐 것이 없어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주님은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공격합니다.
이것을 공격하기 전에 두 층으로 분리시켜 진짜 중요시 하는 내 안의 나에 십자가로 침범해 옵니다. 그러면 누가 상처를 받습니까? 내가 귀하게 여기는 내 자존심이 상처를 받지요. 상처 받으면 그것이 바로 예수 믿는 흔적이 됩니다. 상처가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이것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요. 예수님이 안 찾아오시면 상처가 아닌데 찾아오셨지요. 그러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잊을 수가 없지요. 잊을 수 없는 그곳이 바로 십자가가 늘 작용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 질문에 세 번씩이나 고사하잖아요. “주님, 왜 이러십니까?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시네요. 뻔히 아시면서 왜 자꾸 묻습니까?”
성도는 이질적인 것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 신앙생활은 뭔가? 낯선 것을 찾는 것입니다. 뭔가 특이한 것을 찾으세요. 그것이 내 속에 있는 묵시입니다. 그런데 그 낯선 것은 남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계속 자기를 포장해 왔다는 거죠. 포장했다는 것은 진짜는 따로 숨겨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 가치, 내 자존심, 내 존재의 의미는 따로 챙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십자가마을에서 봉사도 많이 하는 분인데 가끔 대화를 나눠보면 아직도 자기 자존심을 고수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자기 자존심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 평소 자기 방어 자체가 주님을 힘들게 했던 트라우마가 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키려는 것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런데 내가 또 나를 방어하면 주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나를 의롭게 하신 것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순간 주께서 치워버린 일곱 귀신을 다시 불러들이는 꼴이 됩니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능력으로 구원 받습니까?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나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사수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5년 전에 예수 믿은 것을 사수하려면 ‘나’가 두 개 있어야 합니다. 믿었던 ‘나’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보초서는 ‘나’가 또 있어야 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런 자를 향해 주님은 십자가로 그들의 지키려는 자아를 찌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마태복음 10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구절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먼저 언급하지요. 그러면 우리의 겉 사람은 누구를 의식합니까?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의식하지요. 우리의 내부에 또 다른 나가 있는데 그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네가 장애자가 되더라도 나머지 신체로 지옥 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와 관련 됩니까? 남에게 보여주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 내가 따로 챙겨놓은 그것으로 인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그 결정을 내가 하기 전에 먼저 침입해 오셨잖아요. 침노하는 자가 하늘나라를 빼앗으니까. 주님이 내 허락도 없이 십자가 영으로 나에게 쳐들어오셔서 나의 의미를 주님 일에 참여된 자의 의미로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자랑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 자랑하는 나를 자랑하려고 내 내부에 들어와 보니까 주님께서 “어디 곁눈질 해. 정신 차려. 이미 너는 내가 접수했어. 이제 너의 것은 더 이상 없어.” 이럴 때 바울은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는 겁니다.
귀신들린 자는 존재의 이유나 천지 창조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뭔가를 행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 같아요. 그냥 행해요. 동대구터미널에서 광주행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중학교 여학생 7명이 백지영의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요. 그들은 왜 노래를 부르는지도 몰라요. 그냥 기분에 따라 흥해 취해 노래를 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40, 50, 60이 되어도 이 아이들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냥 뭘 할 뿐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 앞에 서면 그 안에 귀신이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어떤 특정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귀신들린 자에게 꾸중하면 “잘못했습니다.”라고 합니다.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맞으면 아프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한 거예요. 아담이 범죄한 후 인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내부에 나 외에 다른 세력이 장악하고 있기에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잘난 척 할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지요? “베드로야, 네 눈에는 안 보이지? 사단이 너를 삼키려고 내게 요청했는데 내가 거절했다. 사단이 너를 삼키기 전에 내가 기도해서 너를 기어이 구원해 낸다.”고 했지요. 그리고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도 했고.
그러면, 닭 울기 전의 베드로와 닭 울고 난 뒤의 베드로가 다른 사람입니까? 동일 인물이죠. 그런데 동일 인물 되게 한 것이 베드로의 능력입니까, 주님의 능력입니까? 당연히 주님 능력이죠. 그것을 묻는 거예요. 성도는 내가 동일 인물로 유지하는 것이 내 힘이 아니고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동일 인물을 죽은데서 살려내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나오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지요. 그러면 나는 이미 죽었잖아요. 죽은 자가 걸어 나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척 한 것이지요. 제가 틀린 소리 했습니까? 죽은 자의 뺨을 때렸는데 아프다고 반응한다면 그는 죽은 자가 아닙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나는 죽었다고 간주하고 그냥 갑시다.”라고 하는데 이건 아닙니다. 이미 죽었고, 그 다음에는 모든 권한이 주의 이름으로 넘어가 버렸어요.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살아요. 먼 산에 부엉이가 있지요? 그 부엉이의 잠을 누가 재웁니까? 주님이 재우고, 주님이 깨웁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마6:16-30)”고 하셨지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님 은혜로 사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서는 ‘너희 생명은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고 했어요. 그냥 내가 살면 안 돼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동일함을 보증해 주는 분이 따로 있어야 해요. 그분이 누구냐? 주님이지요.
주님은 인간을 둘로 분리해 버립니다. 좀 전에 예를 들었는데,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한 것은 진짜 잘못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자기 아지트로 도망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있는 귀신 들린 자가 고랑과 쇠사슬에 묶어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어요.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요.
만두 피가 얇으면 만두 속이 투명하게 비쳐 나오지요. 잘못하면 만두 피가 찢어져 만두 속이 밖으로 나옵니다. 지금 이런 상태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통제가 되는데, 이 말은 자기 안에 숨어 피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라사 지방에 귀신 들린 자는 자기 안에 귀신이 너무 많아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입니다.
만약 교회 성찬식을 하면서 우연히 목사가 포도주를 과하게 마셔 취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이, 김장로. 내가 평소에는 말을 안 했는데--” 하면서 그동안 억눌렀던 것이 다 나옵니다. 자기 속에 감추어 둔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가 내린 교회 정의에 의하면, 성도와 성도 사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 매개가 되어 서로 교제하지요. 이것이 우리가 아는 이론이잖아요.
그런데 술에 취해서 “김장로, 당신은 나와 동갑인데 헌금 많이 한다고 목사인 나를 무시하나?” 이렇게 나오는 것은 평소 술 안 취했을 때의 매개가 무엇이었습니까? ‘김장로 너는 진짜 나와 교제한 것이 아니고 내가 대타로 내세운 나의 마네킹과 그동안 상대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만두 피가 얼마나 얇은 지, 얼마나 귀신이 많이 들어가 있는지 쇠고랑으로 묶어도 소용이 없어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귀신을 예수님이 추방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색을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으로 구원하는 절차를 밟게 하시는 분입니다.
구원 받을 자는 제자들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는 아니지만. 구원 받을 자는 12명인데 구원 작업은 오직 예수님 혼자 하십니다. 왜냐? 내 속에 있는 나로부터의 구원, 즉 사단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없어요. 이 작업은 주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하셔도 누가 마중을 나옵니까?
평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대외용 내가 마중을 나가서 다른 사람 사귀듯이 주님을 마중 나갑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제가 영접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님 영접할 때 그 당사자가 누굽니까? 다른 사람(손님) 영접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도 영접해요. 그런 식으로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니까요.
이런 것은 연극으로 하면 실감이 날 텐데. 아파트 문을 열고 누가 들어왔는데, 이 집사님이 늦게 왔다고 합시다. “집사님, 이제 오십니까?”하고 인사를 했는데, 뒤따라 형사가 들이 닥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물으니까, “내가 숨겨놓은 보물을 이 사람이 가져갔다.” 이게 바로 도적같이 오신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는 영접할 때 어떻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나쁜 분으로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좋은 분으로 영접합니다. 왜냐? 주님을 좋은 분으로 영접할 정도로 나는 훌륭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오실 메시아만큼이나 우리가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영접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우라고 본 것입니다.
‘영접’이란 말은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거든요. 그 방식을 오늘날 교회에서 똑같이 사용합니다. 교회 올 때는 정장을 입고 오고, 꼭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대하듯이 주님을 대합니다. 왜? 다른 사람 앞에서 자랑할 수 있도록 내 안에 있는 내가 부추긴 것입니다. 하여튼 교회가 희한한 곳입니다. 자기 자랑하는 곳이 되었어요.
자기 자랑정도는 귀신이 적게 들은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술 취한 것 이상으로 자기 본색을 노출합니다. 고함을 치고 돌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난동을 부릅니다.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고 했어요. 귀신이 한 마리가 들어오나 열 마리가 들어오나 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암이 일곱군데 걸리나 한군데 걸리나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잖아요? 이처럼 율법 중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이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축약하면 ‘구원은 없다.’ 더 줄이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언약만 있고 우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것은 언약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귀도 천사도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가라지도 있고 알곡도 있고.
우리는 방금 이런 성경 말씀을 들었지요. 듣는데 어디까지 듣는가 하면 우리의 겉사람에서 멈춰요. ‘나는 오늘도 새로운 지식 하나 배웠다.’ 그런데 이걸 듣고 난 뒤에는 내 속에 있는 귀신이 이야기합니다. “너 오늘 새로운 것 들었나? 그것 가져와.” “왜요?” 내가 더 좋은 말씀을 하나 더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더 우수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성경공부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하면 점점 더 지혜로운 뱀이 되어가지요. 요령이 더 늘어난 뱀. 가식하고 포장하는 지혜. ‘나는 부족합니다.’ 이런 소리를 하지요. 요령만 늘었지 전혀 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성도는 언약만 있고 나는 없어요. 그러면 내가 있는 것은 날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작업장으로 있습니다. 언약 사건이 유발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리니까 예수님이 언약 완성자고, 그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만났다는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언약이 오늘날 우리에게 덮여서 일생 반복적으로 나오지요.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귀신이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들락거립니다. 들어오면 성령께서 쫓아내고, 그리면 또 덜어오고 또 쫓아내고.
우리는 잠들면 없어집니다. 잠들기 전에는 있어요. 그러나 잠이 들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할 주체가 없어요. 그런데 다시 잠에서 깨면 ‘아, 잘 잤다.’고 하면서 나를 인식하게 되지요. 그런데 뭔가 상실되었어요. 무엇이? 잠들고 난 후부터 잠에서 깰 때까지의 내 역사는 끊어져 있어요.
그러면 꿈은 뭔가? 잠에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 부분만 기억나요. 그게 꿈입니다. 제가 운동하거나 산책하면서 전할 말씀을 위해 예화 1, 2, 3을 생각했는데 집에 돌아오면 마지막 것만 기억에 남고 앞의 것은 다 사라집니다. 어떤 분은 휴대폰에 메모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메모하려는 순간 잊어버려요. 그래서 설교하는 것이 어려워요. 그야말로 설교는 다 털리는(빼앗기는) 겁니다. 털릴 때 허전하면서도 존재는 가볍습니다.
10분 쉽시다.
(2015. 6. 5. 08:5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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