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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부활신앙의 두 모습 1묻고답하기-

부활의 효과(그림자) 인가? 실체인가?예수님 믿는 효과를 원하는가? 예수님을 원하는가? ( 요 11장 )인간은 부활을 믿는 효과를 원하고 !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 라고 하고?지난 주에 우리 진희 학생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듣고 왜 가입해서 헷갈리게 하는가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솔직하지요. 답변을 이 세상을 법으로 창조 하지 않았고 사랑 곧 은혜로 창조했기에 은혜를 사모함 보다 그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라고 했습니다. 심판을 받느냐? 아니올시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결국 칼자루를 주님(심판주)이 쥐는게 아니라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이 쥐도록 미끼를 던지는 셈이지요. (요 3:13-21) (롬 5:20-21)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인간은 법을 이유없이 지키려 듭니다. 그리고 그 법 지킴을 통해 자기 방어막을 형성합니다. 마치 쫏겨나는 가인이 하나님에게 어떤 법칙을 요구하듯이 말이지요.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그 법칙은 자기를 변호하고 수호천사의 노릇을 하는 규칙이 됩니다. 그 법은 곧 인증서가 되어서 그 법대로 아무도 가인을 못 건드리게 하는 법칙이 되고 만 겁니다. 법에 담긴 사랑 곧 은혜성의 취지를 모르고 법의 껍데기 효과만을 원하는 죄성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어떤가요? 우리의 기도가 다 이런 내용이지 않나요? 가인의 기도?) 사랑이 없기에 두려움과 죽음만이 난무 하기에, 그 죽음이 두려워서 법을 적용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 제가 교회에 충성 봉사 십일조 주일성수 꼬박 할테니, 한 만큼 제발 저주만은 거두어 주시고 축복으로 채워주세요 라는 요구가 가인의 요구, 가인의 기도 인 것처럼 말이죠. 하나님이란 커다란 진리의 법을 수용할테니 그 댓가로 나의 보디가드로 남아 달라는 겁니다. 그것을 사랑으로 여기겠다는 겁니다. 이것으로 끝나느냐? 그 법의 보호막 울타리는(에녹 성) 곧 자기 스스로를 지키는 자기방어를 넘어서 살인으로까지 발전 합니다. 라멕의 찬양은 바로 그 법의 울타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주의 전을 향한 열심히 여전히 주님의 사랑의 취지를 모르고 있으니 주님을 삼키듯 말이죠.(요 2:17)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23,4)낳았더라 족보인 가인의 족보는 법이라는 안전망 울타리 속에서 마음껏 죄악을 퍼트리며 장성하지만, 죽었더라 족보인 아벨의 족보는 죽어도 상관 없는 "대신"에 모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난 죽어도 상관 없어. 왜? "대신" 이 있으니까? 창 4: 25,6 아벨 족보가 자신들의 삶은 손 놓고 오히려 "대신" 주어진 이름의 활동에 졸지에 다 빼앗겨 버리는 셈이 됩니다. 모든 관심사가 "대신"이 펼치는 이름의 활동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아벨의 죽음을 딛고 대신 주어진 그 이름의 활동.(창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살면 절대로 안된다는 교회의 눈치보기 믿음 울타리 속에서, 부자의 믿음을 오히려 교회가 권장하는 그래서 절대로 지옥오지 말라고 안티지옥운동을 펼치고 부활을 외치고, 회개를 외치고 선지자를 요청하는 모습이 가인의 족보 곧 절대로 난 죽으면 안된다는 자기 지킴이 곧 법으로 똘똘 무장화 한 것이 교회(에녹 성 창 4:17)이듯 나사로를 여전히 못알아보기에 우리는 대신 카바하는 아브라함의 변호, 변증를 알아듣지 못하는 겁니다.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대신 카바 하는 분이 누구인가요? 모두다 돌덩어리를 들고 돌 던질 준비태세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신 대신 카바 할려고 나서신 분이 누구인가요? 그 변증자, 변호자, 보호자가 없다면 법을 백날 지켜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법을 자기방어의 수단으로만 이용할 것이 뻔하기에 그 올무에 걸리도록 방치해 둡니다. 법을 철저하게 지키고픈 너무너무 사랑하는 그 모습이, " 대신 " 죽으러 오신, 모든 것을 변호하러 오신, 예수님의 긍휼을 거부하고 모독하고 무시하는 이상한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죄의 심각성입니다. 율법에서 "안지키는 죄"보다, "지킴으로 정작 은혜를 무시하는" 그런 더 깊은 죄, 이상스럽게 지켰는데 그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남보다 우월감에 빠지는 억제할수 없는 알 수 없는 이 모순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로 그런 양쪽 모습을 다 드러내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으로 또 많이들 사기를 쳐서 설교자의 자신의 위대함을 늘 과시하는 쪽으로 서먹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현실에 놓여진 것을 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지난 글들 중 도망치는 천국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임금 살을려는 자들을 피해 도망친다고 배웠습니다. 또 부자의 안티 지옥 운동을 거부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오늘 죽은 나사로의 여동생들인 마리아와 마르다의 모습 속에서 그들의 신앙인 부활을 거부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인데 부활을 거부하다니요. 만약 기독교가 부활을 거부한다면 기존의 교회들의 신앙이 다 엉터리겠죠.왜 거부하시는지 알아보도록 합시다.아브라함은 부자의 부활사상을 거부했습니다. 부자처럼 부활을 제대로 안 자가 있을까요? 그런데 실상은 그 부자의 부활에 대한 생각이 전 유대인, 교회에 다니는 전 교인들의 생각과 다를바 없는 부활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활을 얼마나 우리 식으로 주물딱 쭈물닥 했는지 살펴봅시다.본문 요한복음 11장은 먼저 전제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미리 시비 걸으라는 식으로 이 나사로는 사랑받은 자 임을 강조합니다. 또 그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향유부은 예수님으로부터 한번 인정 받았기에 그런 자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함을 말씀하시고자 일부러 시비 안걸고 뭐하냐 라는 식으로 사랑의 관계였음을 증거합니다 그래놓고 한 번 인정 받은자를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마치 돌삐 던져 빨리 던지란 말이야 라고 우리의 선악적인 사고를 자극합니다. 어서 시비 걸라. 던져봐 던지라니깐?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사람들은 이미 죽음이라는 전제성을 깔고 급히 예수님이 빨리 와서 해결사 노릇을 해 주시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전제성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 희한하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 어디서 많이 봤지요. 소경이 날때부터 부모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예수님 가라사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되었다.(요 9:3) 이거 이거 받아들이는 자 거의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내가 예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하지 마시고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지? 이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나 하나 챙기기 바쁜데 왜 이 예수님이라는 분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자꾸 누구이며 무슨 활동을 했는지 알고픈 생각이 자꾸 나는거지? 나 왜이러지? 왜 자꾸 신경 쓰일까? 라며 애초부터 예수님이랑 전혀 상관 없던 자(특히 단군 자손 이방인)였음을 전제로 하고 낯선 세계를 몰고온 예수님에게 당신 누구냐? 라고 따지듯이 이 본문을 접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이런 자다 라고 대답하시는 예수님이랑 지금 씨름하시길 바랍니다.자 죽을병이다 그러니 시간이 촉박합니다. 그들의 전제성은 죽을병이기에 죽지 않기 위해서 빨리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서 촉박하게 다가온 죽음 문제를 해결키 위해 예수님을 다구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의 심정을 조금도 이해해줄려는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 빨랑 재촉해도 모자라는 위기촉발 상태에 태연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풍랑 속의 잠자는 모습 처럼요. 오히려 애타게 안절부절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속터집니다. 누가 이런 바쁜 세상에 저런 여유를 부리겠습니까?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참 이상하죠 위에 단서가 붙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두 여동생 마르다 마리아를 사랑한다 해놓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이게 사랑 맞나요? 이건 어떤 누가봐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라서 다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이런 예수님을 누가 따라다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기존의 인간이 믿음이라는 것에서 만들어낸 사랑과 일치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사람의 사랑에 참 목이 마릅니다. 그 사랑 한 번 받아 볼려고 처절한 싸움을 날때부터 죽을때까지 손 놓은 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 사랑, 국가 사랑, 교회 사랑, 목사 사랑, 친구 사랑, 가족 사랑, 아내 남편 자식 사랑, 한 번 맛보면 헤어나올수 없는 늘 목마름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에 찌들어 살며 서로 사랑 누가 누가 차지하나의 싸움을 한 시도 손 놓은 적 없이 살아갑니다.(왕따 안당하기의 처절한 인생, 교회에서 왕따 안당하기,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이것이 인생이다. 모든 왕따를 극복한 간증사례. 모든 드라마, 문학 소설, 인간의 역사, 교육의 목적 또한 다 왕따 안 당하기가 목적임. 얼마전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짱 문화를 보고 중학생들 속에서 왕따문화가 오히려 짱<영웅> 문화를, 결국 서로 공생 관계인 셈이지요. 못난 놈이 많아야 잘난 놈이 영웅 되는 그 치열함이 얼마나 심각하든지 일반 학부모들은 상상치 못할 정도입니다. 교회요?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지요. 만만치 않습니다. 누가 누가 축복 받았나? 이것으로 서로 갈구죠.)그런 인간의 사랑 세계에 이상하게 낯선 사랑이 등장 했습니다. 늘 목마름에 찌들어서 사랑받기의 처절한 경쟁 세계에 목마르지 않는 사랑의 등장이라? 그것 있으면 서로 차지 할려고 할 텐데 말이죠. 그러니 어떤 이는 채념하지요. 내게 떨어질 리가 전혀 없잖아요? 지금 사랑받기 위해 몸 부림 치는 것도 감당 못해서 버벅 거리는 인생인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노래 부르며 궁시렁 궁시렁 합니다, 그래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짓을 해야지, 아브라함 따라잡기, 주기철, 조용기 따라잡기, 그것을 사랑인줄 알고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것입니다. 인정받기 위한 자기 채찍질 늘 쉴 틈 없이 해대는 겁니다)낯선 사랑은 낯선 사랑일 뿐,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랑받기의 싸움에는 낯선 사랑에 눈 돌릴 여유가, 틈이 없는 겁니다. 이 사랑받기의 경쟁에서 탈락하면 이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그 낯선 사랑은 뭐가 저렇게 태평인지 일부러 이틀을 더 있습니다. 우리같은 다혈질의 한국인들은 그 꼴 못봅니다. 속터져 죽습니다. 홧병 1위 민족이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 짜짜짝 짝 짝 인데 말이죠. 홧병 이라는 것도 한국에만 있데요. 그것도 초등학생이 홧병 있는 나라는 유일한 자랑스런, 그 만큼 우리 한국인 성격에는 예수님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분입니다. 더군다나 그 분의 사랑은 너무 느려서 속 터져서 못 기다립니다. 우리는 못기다립니다.일부러 이틀을 유하시고 더디게 더디게 나사로에게 가십니다. 만화책에 아주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남의 사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골프치시고, 플레이스테이션2 비디오 게임을 하시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 째려보는 저 눈 빛이 마치 우리 입맛에 안맞으면 얼마든지 저렇게 째려보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자 여기서 제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유익을 따집니다. 한쪽은 다급해서 빨리 안가니 보채고 있고, 제자들은 아까지(조금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러했기에 그곳에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빛으로 말씀하시면서 빛은 사람들의 저마다의 사정을 고려하는 조건적인 모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음을 말씀 하십니다. 오히려 빛에 의해 어둠들의 속성들이 드러나지 어둠에 의해 빛이 좌지우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말이죠. 사랑하던 나사로든 누구의 죽음이던 빛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우리만 맘 조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만의 해석을 다 각자 이 상황을 이해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가지고 자기 방어적으로 갑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빛 되심을 제대로 알고 믿음으로 잠들었으면 낫겠군요 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일이 우리에게 좋게 해결 되겠군요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가신다면야 따라가 줍죠 라는 겁니다. 즉 우리 제자들은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태세가 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우리는 늘 주님에게 노림수를 제시합니다 소경을 놓고 마치 우리 자신들은 소경이 아닌양? 귀신들린자를 놓고 마치 우리는 귀신들린자가 아닌양 노림수로 예수님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노림수에 절대로 넘어가질 않습니다. 제자들의 언제든지 예수님편이라고 예수님의 어떤 결정이든 다 따라할 것이다 라는 믿음(신념)을 예수님은용납지 않습니다. 참 이상하죠.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음 잠들었네 그럼 깨우러 가야지 라고 말씀하니까, 마치 제자들이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생각이 동일하다는냥 훈수를 둡니다. 그럼 깨우러 갑시다. 좀 가기가 살벌한 곳이지만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이런 상황을 코메디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믹연기에 자주 나오는 상황입니다. 제가 표현을 잘 못해서 어떻게 표현하기가 뭐 한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하하. 우리는 피식 웃고 말겠지만 예수님은 내가 농담처럼 말한다고 너도 농담처럼 말하느냐 라는 식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교정을 합니다. 잠든게 아니라 죽었단다 야들이 분위기를 파악 못하네 라고 분명히 죽었음을 밝힙니다.자 여기서 우리는 또 시비 걸지요. 그럼 뭐야 우리를 가지고 노는거야 그런거야? 아까는 잔다고 해 놓고 이제는 죽었다고 교정하고, 저 사람에게는 시간이 급한데 태평을 부리고, 빨리 가주질 않고 이렇게 여유 부리다가 저들 생각대로 진짜로 죽었잖아? 뭐야 지금 이 상황이.가만 가만 정리 좀 해보자 그러니까 이게 이거고 저게 저거고. !! 아니 !! 그렇다면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단 말인가? 우리의 계산기를 후다닥 뚜드리니 연산을 하여 답을 내기를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라는 것입니다.이것 뿐이겠습니까? 선악과 먹는 것 뻔히 알면서 왜 막지 않았냐? 혹시 먹기를 바랬던 것 아니냐? 또 있죠. 에덴 동산에서 어차피 쫏아낼 것 말라고 동산에서 살게 했냐라는 둥, 또 아벨이 죽을 때 도대체 뭐 했냐? 잠잤냐? 라는 거지요.여기에 학생들이 질문을 해오면 땀을 흘리면서 우리는 너무 깊이 알면 안된단다. 억지로 해석하다간 안되요. 가슴으로 믿지 머리로 믿는게 아니거든 이라고 애써 모름을 감추고 마치 예수님 편인냥 학생들에게 그런 의문을 가지지 말고 타이르게 됩니다.(더 묻도록 해야지요)답변을 못해도 부끄러운게 아닙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됩니다. 오히려 그런 의문을 사장시켜버리는 모습이 쓸데없는 우리의 자존심(너 보다 좀 더 살았다는 이유로)을 세우는 모습이고 그것에 속아서 그것이 믿음인줄 알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바로 교정을 합니다. 이 상황이 모르겠으면 모른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믿는척 하는 모습에 길들여졌기에 좀안다는냥 한마디 걸치게 되는 거지요. 사실 이것 제가 좀 심한데 제가 이런데 이런 말을 한다는게 웃끼네요. 다행히 늘 지적을 당하니 돌이켜 볼 수 있는 겁니다. 지적할 자가 없다면 평생 그런 모습에 빠져 살겠죠.(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요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자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해 수고하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역시 늘 예수님의 빛된 말씀을 우리는 우리 이해 밖의 말씀이기에 영 엉뚱한 반응으로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오정의 모습이 우리입니다. 봉창 뚜드리는 말을 합니다. 야호 우리도 즉으러 가자. 도마 너무 솔직하지요? 우리는 사오정인 우리 모습을 늘 감추면서 우리는 속이며 안들킬려고 하는데, 도마는 유감없이 자신의 사오정 됨을 거리낌 없이 다 내비칩니다.자 이렇게 성경 말씀은 그야말로 세상사람들이 공격하기 좋은 약점들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뭐 하나 탄탄하게 보이는게 없습니다. 늘 엉성하고 제자들도 저런 모습이니 누가 성경을 보고 믿겠노라 라고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러나 빛은 전혀 영향력을 받지 않습니다.자 본격적인 사건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앞에 펼쳐진 우리의 모습들은 그야말로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깜깜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과 얼마나 다른지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그럼 우리가 알던 부활은요?그야 뻔하지요. 한마디로 어두움 속에서 짜집기하여 만들어낸 부활 신앙이겠죠. 자 한쪽에게는 병으로 죽어가는 나사로를 들이내미는데, 전혀 죽어가는 자로 나사로를 언급하지 않고 잔다 라고 표현하고,또 다른 한쪽에는 잠들어 쉬고 있다면야 빨리 잠 깨워서 과거 때처럼 밥먹으러 가자 야호 외식이다. 전처럼 마르다와 마리아가 서로 부엌에서 싸우겠지 ㅋㅋㅋ 역시 우리 예수님은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야. 그 인기 덕에 나도 한 인기 해야지. 라고 잠깨우겠다고 한수 거들겠다는데, 예수님은 야야 죽었다. 이미 죽었어. 죽은지 안죽었는지 가봐야 할 것을 하도 제자들 모습이 답답해서 죽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가십니다.자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양쪽 다 시비 걸고 있는 겁니다. 무슨 원수입니까? 지금 바리새인과의 논쟁이나 시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손 수 다 직접 사랑하는 자들 직접 선택한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시비걸 듯 편들어 주는 모습이 전혀 없는 전혀 매치가 안되는 예수님의 매정한 모습입니다. 그냥 스승답게 어리석은 제자들 코믹연기하는거 눈 딱 감고 넘어가면 좋으련만 그거 하나 그냥 못넘어갑니다. 반드시 교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루셔야할 언약 때문입니다. 너무너무 소홀하게 다루는 우리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일일이 교정하시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나사로의 집에 간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에수님 우리는 참으로 어두움입니다. 빛을 어두움이 감 잡을려고 해보나 어두움은 어두운 속성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괴로움이지만 오히려 빛이 빛의 역할을 곰꼼히 놓치지 않고 일하고 있음에 더 기쁨할 수 있는 자 되게 하여 주옵소서. 비록 우리가 도마처럼 늘 사오정 같은 봉창 뚜드리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늘 실수투성이 이지만 우리의 허물을 다 감당하시고 밝히 보여주셔서 아 그것이 그런 의미였구나 라고 무릎을 치며 탄복 할 수 있개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몰고온 부활 세계가 우리 어두움이 믿고 있는 부활세계랑 얼마나 다른지 분명하게 밝혀 주시길 간섭바라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물에 빠드리시는 믿음 : 물 위에서 같이 출발하는 믿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모조리 다 물에 빠드리시고 출발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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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3,735건 중 127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585 묻고답하기 사도와 무당을 듣고..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4-09-23
584 묻고답하기 Re..김세윤교수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22
583 묻고답하기 Re.. 교회 되세요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21
582 묻고답하기 Re.. 언어란,허구인가요?(허상.)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21
581 묻고답하기 Re..간절히 기도합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14
580 묻고답하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 최고관리자 04-09-14
579 묻고답하기 뽕 나무 습격 사건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4-09-13
578 묻고답하기 지옥 속을 뚫고 시편 최고관리자 04-09-11
577 묻고답하기 Re.. "극락이" 글과 "강도야" 글 사이에 이 내용이 있습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10
576 묻고답하기 매정한 복음 이사야 최고관리자 04-09-10
575 묻고답하기 Re..예배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09
574 묻고답하기 부활신앙의 두 모습 2 - 최고관리자 04-09-04
573 묻고답하기 Re..기도의 응답 설교를 듣고..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02
572 묻고답하기 기도의 응답 설교를 듣고..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04-09-02
571 묻고답하기 Re..불의한 청지기 비유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8-31
570 묻고답하기 도대체..그간 믿어온 것에 대한 나의 헛됨이... - 최고관리자 04-08-30
569 묻고답하기 그 이유가 있다면 - 최고관리자 04-08-29
568 묻고답하기 Re..우리들의 일그러진 목자 (초본)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8-29
열람 ➜ 묻고답하기 부활신앙의 두 모습 1 - 최고관리자 04-08-28
566 묻고답하기 고린도전서 3장10~15절에 관한 질문입니다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4-08-26
565 묻고답하기 Re..민규네 잘 있습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8-26
564 묻고답하기 Re..목사님. 소나무입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8-24
563 묻고답하기 목사님. 소나무입니다. - 최고관리자 04-08-24
562 묻고답하기 Re..조규현 장로님? 2주전에 들려준 이야기 다시 한번 더 해주세요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8-24
561 묻고답하기 Re..몇가지 질문 가지고 왔습니다.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8-2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