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14강, 115강) 죄와 욕망, 국가와 사단 150521
유튜브(114강, 115강) 죄와 욕망, 국가와 사단 150521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114강
115강
이미아(IP:180.♡.90.76)
15-05-22 19:30
114강-YouTube강의(죄와 욕망)150521-이 근호 목사
오늘은 114강, 제목은 ‘죄와 욕망’이라는 강의를 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라는 것은, 이거는 교회가지 않더라도 들은풍월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구원의 방식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못하고, 거기에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구원되었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덕분으로 구원되었음, 그 결과에 눈독들이게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저 쨌거나 내가 구원받으면 됐지 않느냐, 그렇게 성급하게 절차와 과정을 무너트리려고 하는데, 막상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 방식에 대해서 아마 듣게 되게 되면 의외로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가 도리어 외면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예수 입에서 쏟아내고 계시는 겁니다.
그 한 예를 들게 되면, 예수님 오실 때에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구원의 방식은 모든 율법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유대인 말고 다른 이방 민족들의 구원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서 감정적으로 열심히 춤을 춘다든지 아니면 자기네들이 성의껏 드리는 어떤 예배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든지 또는 의지적으로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면서 구원받는다는 여러 가지의 아이디어들이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거기에 대해서 자기들이 구원받는 방식에 대해서 차별화를 둔 겁니다.
그 차별화가 뭐냐 하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철칙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일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율법을 지키려면 율법에 담겨있는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되고, 아는 내용만큼 행동에 일치성을 보일 때, 그것을 순종이라고 하는데, 말씀 안에 있는 내용과 자신의 행동이 일치성을 보일 때 자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서 구원받는 참 백성이라고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 보면 18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룬다는 이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예수님과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하죠.
19절에 보면 더욱더 유대인들에게 동의할 만한 내용을 이야기하죠.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이것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이 작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까지도 마저 완벽하게 지킬 때에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이 된다.” 라고 그걸 가르칠 뿐만 아니고 가르치는 본인도 그걸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들어보니 어떻습니까? 목표도 생긴 동시에 그 목표에 미흡했을 때 구원도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도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작은 것 하나라도, 큰 것 98퍼센트 지켰다 할지라도, 작은 것 하나 빼먹었으면 이것은 구원에서 탈락되는 겁니다. 완벽하게 다 해야죠. 20절에 보면 이미 그러한, 예수님이 언급한 식으로 시도를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20절에 이렇게 이야기하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 의할 것 같으면 만약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마저도 천국에 못 간다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일점일획이라도 말씀을 다 지키려고 시도하는 선두그룹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완벽한 의를 행해야한다는 거예요.
지금 선두그룹이 뭐냐, 서기관과 바리새인인데, 그러면 다른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추월해야 돼요. 그들보다 더 완벽해야 돼요. 문제는 뭐냐 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많은 의를 행하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지금까지 해왔던 그 방식을 거쳐서 추월해야 하는데,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했던 그 방식을 인간의 힘으로 과연 추월이 가능할까요? 거북이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토끼보다 앞설 수 있겠습니까? 물론 토끼가 도중에 잠을 잔다면 모르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잠도 안 잡니다. 그렇다면 이거는 달리기 대회에서 아무리 거북이가 애를 써도 토끼보다 앞서지 못하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지금 선두그룹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챙겼던 의입니다. 근데 그 의가지고는 천국에 모자란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점일획이라도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걸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려면 그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월등해야 되는데, 어느 누구도 월등할 수는 없고.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옛사람과 그리고 예수님 본인을 비교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율법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율법을 해석한 그것에 맞추어서, 그 기준에 맞춰서 행동을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천국 못가는 의를 생산해낼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천국을 못간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해석의 범위가 옛사람이 해석하는 범위 안에 그대로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 몰라도 됩니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알고 있는 제대로 된 율법 해석을 제시해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의 입법자이기 때문에. 법이라는 것은 반드시 법을 만든 분이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법을 만드셨습니다. 법을 만드신 분이 율법의 내용을 다 이야기해주십니다. 율법의 내용을 다 이야기해주신다는 말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들었던 내용대로 그대로 일치해서 순종할 경우에만 일점일획이라도 율법을 다 이룬 셈이 돼버리죠.
근데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은 옛사람이라고 규정한, 그들이 아는 율법의 해석 범위 안에만, 그게 한계 안에 가두어져있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그 율법 해석 말고 그 바깥에 있는 진짜 율법의 내용을 따로 가지고 계신 분이 예수님, 본인뿐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율법 해석 외에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선포를 하고 알려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는 해석과 그 외에 해석. 외에 해석이 뭐냐 하면 옛사람이 알고 있는 율법 해석이라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사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사적인 견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 다 옛사람이 알고 있는 견해의 일부일 뿐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해석이냐, 예수님의 해석이냐 단 둘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누구든지 살인하지 말라 했는데 내가 이 계명을 만들 때는, 너희들이 아는, 그냥 옛사람이 아는 식으로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것이 살인의 전부가 아니라, 그건 옛사람의 해석이고, 이 예수님의 해석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살인죄다. 이것이 바로 입법자, 율법을 만든 내가 제대로 된 살인하지 말라에 대한 해석이다. 자, 지켜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될 때 예수님에 해석에 입각해보게 되면 인간은 본의 아니게 옛사람의 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이거는 율법의 계명을 몰랐다는 그 이유 자체만으로 이미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인 주제에 죄 된 방식으로 율법의 해석을 알아놓고 그 방식대로 실천에 옮기면 구원받겠다고 내놓은 그것도 욕심이고 욕망이 되는 겁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고(약1:15). 그 사슬에 그냥 매여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계명을 새롭게 해석을 내주시고, 인간들의 모든 계명을 옛사람에 해당되는 갇혀있는 해석이라고 하시는 이유는, 바로 죄가 일어나는 그곳이 본래의 너의 주체의 자리라는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미 예수님한테 들었고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수긍이 된다는 말은 구원 문제가 이제는 내 문제에서 떠나서 주님의 고유권한의 문제로 구원 문제가 넘겨졌다는 사실을 덩달아 아는 겁니다.
죄인인 자를 의롭다 하는 그 수순은, 방식은 이제는 예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옛사람의 율법 해석에서 이미 벗어난 주체자입니다.
이미아(IP:180.♡.90.76)
15-05-22 19:32
115강-YouTube강의(국가와 사단)150521-이 근호 목사
제 115강, 제목은 ‘국가와 사단’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로 갔습니다. 40일이라는 숫자는 의미 있는 숫자인데, 그것은 뭐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즉 40일 동안, 하나님의 시간 계산으로는 40일 동안, 인간 시간 개념으로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를 헤맸습니다. 광야를 헤매면서 그들은 무엇을 체험하게 되느냐 하면 애굽에서 알지도 못했던 새로운 양식을 받게 됩니다. 그 광야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위에서도 물이 나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적들과 전쟁할 때에 아무 무기 없이 지팡이 가지고 승리를 꿰찰 수 있다는 희한한 사실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이전에 광야부터 먼저 방문해서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려서 시험을 받으신 이유는 인간 세상의 원형을 광야에서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인간이 보는 세상이라는 것은 그저 자기 위주의 현실이고 자기 위주의 세상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아는 시선을 비켜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광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맞이한 광야가 인간 세상을 축약한 거고 응축한 거예요. 집대성 한 겁니다. 니가 세상을 알고 싶어? 니가 현실을 알아? 그러면 주님께서 가셨던 광야에 가봐라. 그것이 너희들이 사탄에 의해서 가려져버린 너의 시선이 벗겨지고 진짜 현실은 광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광야도 기존 세계의 자연의 일부가 아니겠느냐? 하고 반박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이 세상은 광야도 있고, 초목지도 있고, 바다도 있고, 들도 있는데 왜 광야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응축된 참된 모델로 규명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예수님께서 가신 광야는 거기서 인간에게 들키지 않았던 인간의 배후 세력을 만나게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게 누구냐? 사탄이에요. 쉽게 말해서 사탄이 발견될 때 제대로 세상과 현실을 안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그냥 세상이 아니고 사탄이 지배하고 있음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 신이 장악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4장 4절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모르는 이유는 본인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의지가 둔해서가 아니라,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본인의 설득력이 모자라든지, 본인의 성경 지식이 모자라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루시는 사탄이 못 믿도록 그렇게 사탄을 가지고 호령하시는 겁니다.
너무 자신을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는 것도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겁니다. 집안 식구들, 남편, 아내가 안 믿는다.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이, 공중권세 잡은 신이 복음을 못 믿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못 믿게 조치를 하셨기 때문에 못 믿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도 본인이 기도를 많이 해서, 어디 영빨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순간 사탄으로 하여금 복음을 가리지 못하도록 허용을 했기 때문에 성령의 눈이 열려서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겁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있어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너무 똑똑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손대지 마라! 그는 내 백성이다.” 해서 문이 열려서 복음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러한 양면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을 가지고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탄이 지배하는 것을 못 느끼느냐. 다른 것으로 지배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것이 뭐냐, 바로 국가입니다. 정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광야에서 세 번째 시험에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를 방문하기 전에 사탄은 이미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자기 손아귀에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공중권세 잡은 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상을 이미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통치하면서 통치자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들은 뭔가 의식을 하게 돼요. 뭔가 의식하게 되는데, 어딘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무리 현명하고 똑똑하다고 자부해도 뭔가 주눅 들면서 살아갑니다.
알 수 없는데, 도대체 누가 나를 수시로 움츠리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느끼게 만들고 불안감을 조성하는가? 그 대상에 대해서는 인간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우리는 왕 노릇한다는 말은, 왕의 통치를 받는 자는 왕의 본질을, 전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어요. 논리로도 그렇습니다. 통치 받는 자가 통치자의 전부를 알게 되면 그거는 안 되죠. 통치자의 일부는 알지만 통치자의 전부는 통치자의 또 따른 안목에 있기 때문에, 통치 받는 것은 그냥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저 숨통만 터주면 고맙다는 그 소리 할 것 밖에 없어요.
근데 인간들은 뭔가 이상하게도 지배를 받고 있어요. 그 지배받는 뭔가 추상적인 관념을 인간들은 통치라고 하고 그 통치의 가현체, 눈에 보이는 통치가 국가입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고 하죠. 근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그런 사적인 고백은 통하지를 않습니다. 니가 이러한 재산과 이러한 지식과 이러한 모든 것은 그 전에 어디서부터 있던 거냐? 라고 보세요. 그거는 자기가 속해 있는 국가에 있는 겁니다. 따라서 국가에 있는 것을 이것저것 모아서 자기 사유화 시켰다는 것은 곧 국가 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 가지 지배에서 사탄은 모든 식으로 그렇게 통치를 해왔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도 동일하게 유혹을 합니다. 근데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시험 방식이 예수님뿐만 아니고 모든 다른 인간들에게 기존에 써먹었던 통치방법을 썼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 빼놓고 이걸 이겨낼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톡 까놓고 말해서 사람은 당장 코앞에 느껴지는 감정은 이겁니다. 살고 보자입니다.
뭐, 국가가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그런 것은 여유 있을 때나 따지고. 지금 내가 새누리당이냐, 민주당이냐, 그것 따지는 것도 그게 그거고. 내가 기독교 신자냐, 불자냐 따지는 것도 사실은 다 추상적인 것이고. 만약에 조계종에서 한 이천 만원 월급 줄 테니까 오라고 하면 밥해주러 갈 수도 있겠죠. 왜? 가정이 갑자기 부도나고 파탄 나게 되면 거기서 돈 준다고 하면 이거는 종교 따지지 않고 우선 받아 챙기는 것이 우선인데.
떡으로 산다는 것, 지금 여유만만 하니까 사탄이 주는 돈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에 지금 가진 돈 마저 다 날렸을 때,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못 되었을 때, 돈 준다는데 마다할 인간 있습니까? 저는 그런 인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두 번째 시험입니다. 인기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추앙하는데. 신의 능력이 있다고 추앙할 때 그것을 마다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특출한 영웅으로 대접해주는데. “당신은 다른 사람하고 달라.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졌어. 우리의 지도자가 돼 달라.” 이렇게 요청할 때, “아이구, 저 안 합니다.” 이렇게 한두 번 뺄 수는 있지만 그걸 마다합니까?
어떤 사람이 돈 오 천원을 뇌물로 주면서 봐달라고 하면 그거 안 봐줍니다. 이 만 원을 뇌물로 주면서 봐달라고 하면 그거 안 봐줍니다. 이십억을 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백억을 준다면 “예”하고 기회 놓치기 전에 얼른 챙기죠.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돈이 있으면 돈으로는 허무한 것을 알아요. 하지만 인기만큼은, 사랑받는 것, 이거는 마다할 인간 없습니다. 어떤 부교역자가 당회장 목사에게 설움 받을 때, 어떤 다른 교회에서 단독 목회하라고, 또는 어떤 선교지에서 선교하러 오라 할 때, 후딱 가버립니다. 왜? 거기는 모든 교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니까.
사랑보다도 더 깊은 욕망의 요구는 바로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게 두 번째 시험이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욕망의 끝을 이야기합니다. 다 가져라 이 말이죠.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라. 이 마귀의 자리 너한테 줄게. 이거 마다할 사람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을 때, 남자로 태어났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하는데, 그 자리에서 욕망이 멈출 것 같아요. 나의 갖고 있는 욕망은 그 최고의 자리에 갈 때까지 질주와 질주를 반복합니다.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이런 사람 없습니다.
사람이 국가의 통치를 받는 이유는 바로 국가가 나의 욕망의 염원이기 때문에. 사탄의 속성이 어디에 있느냐 바로 우리 자신들이 사탄의 속성을 분배받고 있습니다. 이런 죄인을, 주께서는 이런 사탄에 속한 하나님의 원수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인간을, 사탄에 속한 인간을 자기 천국 백성으로 예수님의 피로써 건져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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