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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50508b-히10장5절(안과 밖)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50508b-히10장5절(안과 밖)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안양20150508b-히10장5절(안과 밖) - 이 근호 목사

12절에 보면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렇게 되어있지요. 여기서 요 문장 “죄를 위하여 거룩한 제사를 드리시고” 여기까지는 우리가 이해가 되지요.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이해되는데 그 다음 구절이 이해가 상당히 곤란해요. 죄를 씻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이유가 뭐냐, 하나님 우편에 앉아야 그게 죄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그냥 하나님이니까 “너 죄 용서한다.” 하면 끝나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하나님 우편에 앉는 그러한 과정과 우리 죄 용서와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무슨 관련성이 있는가? 질문을 알겠지요?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리가 사적으로 지은 죄는 죄가 아니에요. 내가 살인했다. 내가 강도 짓했다. 이건 죄가 아니에요. 그런 것을 죄라고 한다면 요, 그것은 교도소 몇 번 들락거리고 반성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건 내 쪽에서 죄를 해결하면 돼요. 나쁜 짓 했잖아요. 그러면 착한 일을 양으로 더 많은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빼기하면 되지요. 착한 일 5개, 나쁜 일 3개, 남는 것은 2개, 그럼 2개 남으면 착한 사람 부류에 포함돼서 죽으면 천국 가는 것. 선악적인 사고방식인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다는 말은 뭐냐, 너희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몰라요. 그러면 죄는 어떻게 아느냐? 죄는 우리가 짓는 게 아니고 지을 수밖에 없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우편에서 죄는 하나님 원수에요. 이게 죄에요. 원수, 그럼 그게 어디 나오는가, 시편110편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가 나와요.

부흥회하면서 부흥사가 회개하시오! 라고 하면 나름대로 회개한다고 하니까 자기는 회개할 게 없으니까 회개한 거 또 회개하고 옛날 이미 철지난 죄를 끄집어내가지고 또 회개하고 시간은 안가고 5분밖에 안가고. 그런 쓰잘데기 없는 짓 많이 했지요.

시편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라고 한 겁니다. 이걸 설명해드려야 돼요. 이걸 설명함으로서 왜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에서 못 벗어나며, 따라서 지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가 착함으로서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신세다. 그 말은 우리 힘으로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죄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이라는 말이에요. 착하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 게 아니고, 죄 지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도적으로 만들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에서 말하는 죄를 모르게 되게 되면 이 말을 못 알아들어요. 착한 일 열심히 하면 되지 왜 또 죄를 지어야 되느냐,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고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자, 설명하면서 제가 좀 이렇게 난해하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요 이야기에서 존재가 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존재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있음 또는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딸기 존재하네.” 이 말 되지요. “체리 존재하네.” 아까 존재한 강아지 어디 갔어요? 존재하지요. 이 존재가 우리가 보기에는 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아는데, 끝난 게 아니에요. 둘로 나누어집니다. ‘실존적인 존재’와 ‘의미적 존재’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실존적 존재와 의미적 존재. 실존적 존재라는 말은 뭐냐, 내가 실존에 있는 것처럼 딸기가 있다. 라고 할 때 그 있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까 개나 딸기한테는 해당이 되는데 누구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가 하면, 하나님한테는 해당이 안돼요. 하나님한테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는 “계십니다.” 라는 말은 못 붙여요. 그럼 뭐가 깨져요? 삼위일체가 거짓말이에요. 요즘 삼위일체 때문에 엄청 욕을 얻어먹는 사람이 있어요. 미국에 계신 목사님 욕을 많이 얻어먹어요.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인간들, 내가 보기에는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자체가 이단이에요. 왜냐 하면, 하나님은 그게 바로 사탄적인 발상인 것을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하나님은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정하면 구원받아요. 그런데 그 인간은 뭐로 바꿨습니까? 예수님 자리에다가 뭐로 바꿨어요? 삼위일체로 바꿨어요. 이 말은 뭐냐, 예수 믿기 싫다는 거예요. 합치된 신을 믿겠다는 겁니다. 왜 합치된 신을 믿고 싶냐, 예수가 믿기 싫어서 그래요. 예수님이 믿기 싫어서.

왜 예수가 믿기 싫냐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예수님 본인은 뭐냐, 하나님의 아들로 봤지요. 이것 때문에 그래요. 아들을 믿게 되면 아버지를 놓친 게 되지요. 그래서 아들을 믿음으로서 아버지도 같이 믿고 거기다가 성령까지 믿으니까 한꺼번에 다 믿고 싶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의미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믿음으로서 이걸 영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본인의 믿음이지요.

본인의 믿음을 적용해 버리면 본인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본인은 죄 바깥에 나와 있을 때 가능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의 죄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죄는 빠져나올 수 있다? 없다? 못 빠져나오지요. 그런데 인간은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구원 받겠다는 말은 자기는 어디에 빠져있다? 관찰자, 제3자의 자리에, 중립의 자리에, 죄에 오염되지 않고, 뭔가 죄를 짓고 안 짓고를 결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자리에 본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 그걸 믿고 싶은 거예요.

누가 그렇게 믿고 싶어 했을까요?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본 거예요. “너는 중립이야. 네가 예수 믿느냐? 중립을 믿느냐? 니가 알아서 해.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어. 니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부처를 믿으면 니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거야. 어느 것 할래?” “부처 믿고 지옥갈래? 예수 믿고 천당 갈래? 골라 봐!” 뭐라고 합니까? “나, 예수 선택할래.” “구원 받았어. 합격했어.” 이리되거든요. 그게 사탄의 생각이라니까. 뭐가 빠졌어요? 바로 이 의미적 존재를 가지고 실존적 존재를 자기가 있다는 그 의미에서 실존을 새로 뽑아낸 겁니다. 그러면 이 뽑아내는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오른손’ ‘오른편’이라 해요. 나는 나의 행동이 나의 대표자 행동이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내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선택의 행위, 자유 행위, 나는 골라잡는 행위, 그 행위가 나를 대변해줘요. 나를 대변해 준다고요.

그러면 내가 선택했으면, 그것이 내가 행동으로 나서면, 그게 나의 의지에요. 내 의지를 대변해서 내가 행동에 나선 겁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행동하는 것은 나의 오른쪽의 하는 행동이죠. 쉽게 이야기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손이에요. 우리 몸에는 오른손 있지요. 성경에서는 왼쪽을 장애인으로 보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보통 일을 많이 해요. 그러면 오른손으로 일한다는 말은 오른손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오른손이 대신하는 거예요? 오른손이 대신하는 거죠. 그러면 내 속에서 이미 오른손은 나에게 의미 있는 손이 되겠지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생각하면 안돼요. 행동에 옮겨야 돼. 그럴 때 오른 손이 동원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호칭이라 합니다. 호칭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이름이 아니에요. 누구, 누구의 아들이지 이름은 아니잖아요. 누구, 누구의 아버지는 이름이 아니지요. 호칭은 부르는 분이 있어야 돼요. 여기서 중요해요. 여기서 완전히 전환되는데, 하나님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예수님 말고 누가 압니까? 쉿! 아무도 모르지요. 숨겨진 하나님이죠. 아무도 모르지요. 아무도 모르는데 나타난 하나님은 누굽니까? 주님의 오른손만 나타나요. 오른손만.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이름.

그게 홍해 출애굽 할 때에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용사가 그게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삼위일체는 없어요. 애초부터. 그냥 숨어있는 하나님이 예수님만 드러냈을 뿐입니다. 예수님만. 이 강의가 녹취될 거예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성부, 성자 계시지요.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요한복음17장에 보게 되면, 성부 성자 하나입니다. 분명히 있지요. 하나님은 그런 분이에요.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고, 그리고 세분은 하나에요. 그러나 삼위일체는 없습니다. 왜 삼위일체로 묶으면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그렇게 묶을 수 있는 입장이 못돼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시작해야 돼요. 예수님으로 시작해보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이고,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그 분의 영도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그 분이 하나가 되고 그 분만 하나가 된 게 아니에요. 나중에 보면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 되게 하리라, 분명히 하나가 나오거든요. (요17:21) 삼위일체의 한분이라는 것은 잘못된 거고 하나입니다. 삼위가 하나로 계신, 하나라는 것은 맞아요. 한분이라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아들 모순되니까. 분명히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있는데 그 모든 성경의 중심은 뭐냐 하면, 이걸 삼위일체를 받아들여라가 아니라 니는 여기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통보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삼위일체를 믿어라, 가 아니라 너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오른손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 안에 속 했느니라, 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가 삼위일체 믿는 것도 뭐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삼위일체 끝이에요. 실체입니다. 삼위일체 믿는 게 죄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삼위일체 믿어서 구원 못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믿으면 안 되는가?” 예수님을 하나님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럼, 십자가를 믿으면?” 십자가를 믿어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럼, 성령하나님은?” 그것도 구원 못 받아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우리가 믿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오른손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분간을 못해요. 성령 받은 사람은 분간해요. 성령 받은 사람만.

사람은 뭘 믿게 되면 의미가 발생됩니다. 그 의미의 주인공이 본인이 돼요. “주여, 제가 믿었어요. 주님 안 보입니까? 제가 믿었다니까. 옆 사람이 믿은 게 아니고 내가 믿었다니까.” 이게 바로 마귀의 모습이에요.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적 구원 있다고 했습니까? 사적 구원 없어요. 사적이란 말은 오직 한 분에게만 써야 됩니다. 누굽니까? 예수님만 개인이고 나머지는 개인이 아니에요. 예수님에게 속한 집단이라니까요. 왜 집단이겠어요? 사적인 것을 무효로 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무효가 되어야 예수님만 개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있고, 우리 있고, 이리 되면 안돼요. 예수님 안에 있어야 되지.

만약에 예수님이 있고 내가 있어버리면 내 밖에 예수님이 계신 게 돼요. 그러면 내 밖에 있는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내 속에서 시작을 해야 되는데 그 시작하면서 내 오른손이 작용해요. 내 오른손이 의지가 작용한다고요. 그러면 내 의지로서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셈이 되어버리죠. 그러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추방한 취지가 날아가 버립니다. 그 날아가도록 유도한 게 마귀입니다. 그게 마귀에요.

요한계시록에 666표 받지 말라고 했지요. 사람들은 그걸 보고 뭡니까? 표를 안 받으면 구원되는 줄 아는 겁니다. 그 표는 하나님 앞에 인 치심을 받은 자에게는 그 표를 찍을 수 없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인이라는 것은 소속을 의미하거든요. 어린양의 생명책에 소속된 사람은 이마에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장을 받아요. 맞게 되면, 소속이 되면, 이미 예수님 자체가 마귀를 이겼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소속된 사람은 이미 바깥에 추방된 마귀가 이쪽 안에 있는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인을 새길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왜? 능력으로 커버가 돼요. 이미 십자가에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능력이 인을 못 받도록 커버가 되어있어요. 우리가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에 속한 사람은 그 소리 듣고 우왕좌왕 하는 거예요. 주의해야 된다! 우왕좌왕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이 됐다? 안 됐다? 구원이 안 된 거예요. 사적 구원만 챙기는 겁니다. 자연적으로 이기주의 될 수밖에 없어요. 나라도 구원받아야지. “나라도 구원 받아야지.” 그게 성경에 나오는 거예요? 이건 안돼요. 그런 이기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사적 구원이잖아요. 그러니까 성경해석 전체가 구원론으로 미끄러지게 되잖아요. 전체가. 사탄의 짓이 되는 겁니다.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구원파가 사탄의 짓이라니까요.

삼위일체 다시 이야기합니다. 삼위일체에서 “하나님이 계시다.” 할 때, 계심이 그 용어를 누가 썼느냐 말이죠. 그 용어가. 내가 여기 있다. 딸기 있다. 내가 있다. 그 있음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삼위일체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계신 게 아니고 일하시잖아요. 어떻게? 우리가 알아듣도록. 아니에요. 오른손을 통해서 일하시지요. 그럼 하나님의 오른편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죠. 그 주님은 우리를 납득하게 한다. 아니에요. 우리를 이해시킵니다.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뭐냐 하면, 우리가 왜 납득이 안 되고 우리는 왜 모른가, 우리는 마귀에 속했거든요. 우리하고 상대 안 해요. 마귀하고 상대합니다. 마귀의 힘에서 빼내면 다 이해가 돼요. 소급해서. 뒤돌아보면서. ‘아!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그것이 강도가 되어야 되는구나. 창기가 되어야 되는구나. 그게 구원의 코스구나! 너는 너 식으로 나는 나식으로 따로 따로 주께서 어떤 role, 역할을 맡겼구나.’ 이게 뒤늦게 다 이해가 된다니까요. 뒤늦게.

그게 하나의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게 되면 그 소속이 되고, 그 인 치심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군대에 사단에 보면 사단 깃발이 있어요. 사단의 집단의 소속이 됐다 이 말입니다. 20사단, 54사단 소속이 된 거예요. 출애굽에서 나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 아말렉전쟁을 붙게 했잖아요. 광야에서. 그 때 ‘여호와 닛시’나오지요. 여호와는 나의 뭐죠? 깃발이지요. 깃발. 그게 뭐냐 하면, 너희는 집단을 생각하는 거예요. 개인의 능력 아닙니다. 영웅 필요 없습니다. 집단이에요.

그리고 모세가 구원한 게 아니고 여호수아가 구원한 게 아닙니다. 모세가 든 게 있어요. 지팡이입니다. 그 지팡이는 방향타에요. 어디로 갈 바를 몰라요. 지팡이와 더불어 구름기둥, 불기둥이 일어나면서 길이 계속 그 길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지팡이가 뭐냐, 지팡이의 과거는 바로 홍해를 갈라지게 했던 그 지팡이에요. 그리고 광야에서 물을 내게 했던 그 지팡이고요. 그리고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렸던 그 지팡이에요. 그럼 지팡이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바로 저주, 심판이 들어있지요. 너희들은 전에는 어디 소속이었다? 저주 안에 있었고 심판 안에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저주 가운데서 너희들을 지팡이로 저주하는 가운데서 지팡이로 구원해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는 지팡이 속에서 저주와 구원이 함께 양쪽 다 들어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양쪽 다 있다. 매개 또는 중보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해잖아요. 중보자 특징은 뭐냐 하면, 양쪽 다를 본다는 것. 인간 쪽도 보고 숨어져있는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숨겨진 하나님. 왜 그냥 하나님이 아니냐 하면, 그냥 하나님은 인간이 지어낸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은 자기의 투영입니다. 자기가 거울에 비취지요. 그 모습이 하나님모습이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를 보는 그 상상한 하나님의 확장입니다.

그 하나님은 무조건 나를 이뻐해야 돼요. 왜? 내가 만들었으니까. 인간이 상상이라 하는 것은 기억에서 나왔고 인간의 기억 속에는 온갖 경험 속에서 나왔고 나한테 경험되어지고 건전하고 괜찮은 경건한 것만 골라서 신을 만든 겁니다. 인간의 이미지가. 상상하니까. 그 상상한 하나님을 하나의 파트너로 생각해가지고 동행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했던 하나님 믿는 사람이 누구를 죽였느냐, 하나님을 죽여 버린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누구 이름으로?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죽여 버린 희한한 사건. 내가 믿는 하나님, 우리 집단적으로 동의하는 하나님을 지키기 위해서 그 장애물로 되는 예수님을 죽였는데 죽었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어디 소속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죽이라고 외쳤던 그 소속인 것을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진 거죠. 사도행전2장입니다. 유대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어찌할꼬?” 하지요. 나 어찌할꼬? 사도의 설교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충격이었냐 하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었다. 야~ 처음부터. 처음부터 니는 주의 작전에 말려든 거예요. 처음부터 너는 메시아를 죽여야만 했다. 그 죽여야만 했던 것이 뭐냐, 하나님을 죽인 자는 결국 저주지요. 그 저주를 수용해라, 그러면 저주 속에서 하나님께 부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그게 뭐냐, 십자가와 함께 죽은 자만이 십자가에서 부활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제가 죽였습니다.”라고 외쳐라 이 말이죠. “십자가 죽은 것이 제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내가 성질이 못돼서가 아니라 나는 마귀의 사주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제가 죽였습니다.” 라고 외치는 사람.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죽였습니다, 라는 말은 소급해서 창세전부터 나는 이미 은혜받기로 확정된 사람으로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던 거예요.

십자가를 알아요? 십자가 알면서 십자가 넘어서서 부활까지 다 들어갑니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십자가에 넘어서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영원히 곁에 둡니다. 그래야만 내가 내 자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 바깥에 나가면 안돼요. 안과 밖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정합니까? 예수님께서 정하신 겁니다.

갈라디아서6장14절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왜 자랑하지요? 애가 좋은 대학 갔다고 자랑 좀 하지요. 군에 좋은 데로 빠졌다고 자랑 좀 하지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나왔다고 자랑 좀 하지요. 자랑이 그렇게 많은데 왜 자랑이 없다고 했어요? 자랑할 게 없으니,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살았으면 자랑할 게 있는데 십자가 안에서는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였다가 그리스도가 살려내고 또 죽였다가 살려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그게 존재가 아니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기능이라 하는 거예요.

이왕 이해도 안 되는 거 어렵게 확 갑니다. 분명히 우리가 존재로 하게 되면 실존적 존재하고 의미적 존재 있다고 했지요. 이 존재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했지요. 이 존재를 무엇으로 바꾸느냐 기능으로, 활동으로 바꾸는 거예요. 너가 있음 자체가 활동이 되는 겁니다. 너가 이렇게 구원받게 됐음에 주께서 계시다가 아니라 니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주께서 일하신다고 바꾸라는 겁니다. 내 안에 주께서 활발하게 일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결과물로 아까 떡가래 빠져나오지요. 방앗간에서. 지금도 계속 밀어 넣고 계속 떡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개를 토실, 토실하게 어떻게 키웠노.” 개보고 칭찬하는 겁니까? 누가 애 먹었다는 거예요? 주인이 애 먹었다는 거예요. 개가 “제가 했어요.” 개가 말을 해서 이러면 개 한 대 쥐어박아요. “니는 그냥 존재해!” 일은 활동은 주인이 활동하는 거죠.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내가 존재하는 걸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를 자랑하라. 계속해서 활동하는 십자가 때문에 나라는 떡가래라는 존재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잖아요.

거기다가 삼위일체 믿으면 어떻게 돼요? 안되지요. 삼위일체 자체가 엉터리인데. 존재인데.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계시다가 들어가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세분이시고 하나로 계신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리 되어야 되지요. 활동이 되어야 되지요. 이제 삼위일체 아셨지요?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를 언급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이지요. 예수님 믿으면 되는데, 십자가 자랑하면 되는데 그게 하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 대신 존재를 자랑하고 싶어서 “나, 삼위일체 믿었어. 우리 목사님이 말하는데 삼위일체 안 믿으면 이단 된데. 우리 교회는 삼위일체 공부해가지고 정통, 정통파야. 누가 뭘 해도 삼위일체 확실한 정통파야. 우리는 곧 죽으면 천당 가.” 이게 바로 마귀가 따로 있어요? 그게 바로 마귀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중보자의 오른편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에 턱하니 엉덩이 큰 푸짐한 지가 앉아있는 거예요. 자기가 앉아있는 거예요. 자기 존재가 앉아있는 거예요. 그리고 늘 기도하기를, “주여, 제 존재가 어떻습니까?” 묻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나아지겠습니까? 내 존재가. 존재를 계속 들이대는 거예요. 어떻게 기도하면 내 존재가 우수한 존재, 복 받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자랑 질하는 존재가 되겠습니까? 주께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데, 십자가 말고 십자가 믿는 내가 얼마나 우수하겠습니까? 이걸 자랑하는 거예요. 아무리 기능을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해도 존재가 버티고 있는 한 존재의 소유로 귀환되고 말아요.

그놈의 존재 치매 걸리면 아무도 모르는 존재, 치매 걸려보세요. 나라도 할 일이 아니에요. 치매 걸렸다고 공짜로 노인 보양 공짜로 다 해주고. 15만원으로 다 사게 만들고. 돈 안 내도되고. 그런 게 있어요. 내가 경험해보니까. 변기하고 휠체어 대여하고 다 합해서 100만원 넘는데 그걸 공짜. 그런 기쁜 소식도 있네. 우린 존재가 공짜입니다. 우리 존재는 무효고 우리 기능은 주의 기능입니다. 우리 존재는 기능을 자랑하다보니까 내 자랑할 새가 없어요.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생각되어지는 존재지요.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게 하시고, 헌금 하는 게 아니고 헌금하게 하셨고. “주여, 어떻게 천원으로 헌금합니까?” “내가 하게 했다.” “감사합니다.” 이리 되어야 돼요. 존재가 되어버리면 “천원이 뭐고? 껌 값도 안 되는 거, 나는 만원했어.” 이리 되어버리면 존재와 존재의 싸움이 되면 교회가 뭐가 되느냐 하면, 교회가 자랑 질하는 그야말로 음욕의 목욕탕이 돼요. 음욕의 탕이 돼요. 사우나탕이 돼요. 앉아서 뭐하는데? 탕 속에서? 존재 자랑합니까? 음, 좋다. 존재자랑. 저주의 탕 안에 갇혀가지고.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삼위일체 다 아니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게.

“삼위일체가 뭐예요?” “주께서 존재하십니다.” “그 존재의 개념이 뭔데?” “내가 존재하니까.” 그게 바로 종교지요. 그게 바로 우상 숭배자에요. 말이 나와서 하는데 우상이 뭐냐 하면, 사실은 우상은 없어요. 우상은 성경에서 유대교가 일방적으로 한 것이고 우상이 아니고 사실은 신이에요. 신. “나는 우상을 믿는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내가 믿는 알라는 진짜 신이지요. 다 물어보세요. 전부 다 믿는 신은 신이지요. 진짜 신이지. 우상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 쪽에서 하는 우상이지 인간은 그냥 신을 믿어요.

신은 뭐냐 통합체입니다. 통합체는 뭐가 되느냐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사람은 다양하잖아요. 다양하니까 싸우잖아요. 어떻게 해결하느냐, 우리는 다 같은 신을 믿으면 어떻게 돼요? 갑자기 하나가 되지요. 그게 필요한 게 신이에요. 신은 통합체고 균형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진짜 신, 진짜 하나님은 이런 통합체, 이런 균형 맞추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 죄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이지요. 다르지요. 하나님은 몰라요.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에요. 그럼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호칭이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의 아들이 호칭이죠. 호칭인데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름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지요. 부르면서 우리한테 이름이 있잖아요. 내 존재가 있으니까 이름이 있을 게 아닙니까. 이름은 존재에 붙었으니까. 창세기2장에서 아담이 이름을 붙이지요. 이름이 먼저에요? 존재가 먼저입니까? 존재가 먼저 있고 이름을 붙이잖아요.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필히 이들은 우상 적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부르는 쪽이 뭐냐, 존재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존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거든요. 추방된 존재에서 이름을 부르니까 여호와의 이름에 우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필연적 코스에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자들이 누구를 죽였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우상의 끝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하는 이방인이 아니고 누가 우상의 끝이에요? 여호와 믿는 본인들이 우상의 끝이고 삼위일체 주장하는 그들이 우상의 끝이에요. 우상의 막장이에요. 최고의 우상은 그들이에요. 그 안에 깨보면 누가 들어있어요? 하나님을 부르는 내가 들어있어요. “주여, 내가 믿었잖아요. 내가.” “내가 착한 일 했잖아요.” “내가 이렇게 성실하잖아요.” “내가 순종했잖아요.” “내가 쉐마, 쉐마, 주 앞에 말씀 들었잖아요.” 그러면 격려는 누가 해요? 내가 나한테 격려하는 거예요. 어떻게?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의인은 여덟 번째 일어난다.

매일같이 우리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뭐를 걸고? 그 희망이라는 단어를 걸고. 그 희망이 완성되게 되면 나는 우수한 존재로 거듭난다. 그걸 마슬로우가 이야기했던 인간의 최고의 욕구의 끝은 자아실현의 욕구. 그걸 불교로 하면 두 자로 해탈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그것이 바로 사탄한테 속아서 선악과 따먹은 모든 그 징후가 그 징조가 뭐냐, 나는 신이다. 그걸 기독교로 아무리 포장해도 가짜가 되는 겁니다. 속일 걸 속이세요. 2000년 속였다고 계속 속아 넘어가는 줄 알고 있지.

12절 다시 봅시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자, 설명합니다. 인간의 존재에서 나온 죄는 죄가 아닙니다. 그럼 죄는 누구만 안다? 오른편에 계시는 분만 죄를 안다. 오른편에 계시는 분은 누구하고 싸운다. 마귀하고 싸우지요. 그럼 마귀는 어디 있느냐, 인간을 장악하고 있으니까 인간 속에 있습니다. 그럼 마귀의 대변자가 누구냐, 유대인들이고 이스라엘이지요. 인간이죠. 그 인간이 여호와를 상대하면서 결국은 그 인간의 손에 의해서 누가 살해당합니까? 바로 예수님이 살해당하지요.

살해당할 때, 살해당한 그 사건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그걸 그대로 주의 오른편으로 부활시켜 놓은 거예요. 부활시켜 놓으니까 주님의 부활하신 주님의 못 자국, 창 자국이 있는 거예요. “너희들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걸 영원히 가져갑니다. 그 영원히 가져가는 것을 12절에 뭐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영원한 어린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린양 용어가 계시록에서 딱 붙습니다. 어린양의 보좌, 무슨 뜻입니까? 앞에 붙어요. 일찍 죽으심을 당한 어린양의 보좌. “니들이 나를 죽였잖아. 끝까지 갈 거야. 니들이 나를 죽였잖아.” 책임을 묻는 게 아니에요. 너희들은 내가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징후가.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예수님의 피로 옷을 희어지게 된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은 아까 갈라디아서6장에서 누구를 자랑합니까?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한다.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자랑할 게 있는데 뭐냐, 내가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걸 자랑해요. 그런 미친 사람이 다 있어. 자기 죄를 자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참, 희한하지요. 자기 죄를 자랑한다? 그래, 니 자랑해봐라. 그런데 그 죄를 죄라고 자랑하는 거 보니까 남들 보기에는 기절초풍할 죄네요.

뭐냐 하면, 순종했던 죄, 설교했던 죄, 회개했던 죄, 헌금했던 죄, 전도했던 죄, 목숨 바쳐 순교했던 죄, 이걸 죄라고 내어놓으니 다른 사람들은 기절하지요. 왜? 다른 사람은 그걸 뭐로 분류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 분류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미친 소리 또 듣는 거예요. 도대체 나 알아듣는 소리 좀 해. 알아듣는 소리. 우리가 이해 못하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럼 이쪽에서 성도는 니가 알아듣는 소리는 모든 가치가 도로 너가 잘났다는 쪽으로 니 자랑하기 위해서 회수되는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의미가 추가된 의미로 돌아오거든요.

이게 체계라는 것이 뭐냐 하면 여기서 의미를 생산해내요. 그러면 체계가 중보자의 체계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는 분의 체계가 들어가 버리면 주님이 죽었던 것이 사람의 손에 죽었지요. 그러면 사람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체계 속에 들어가 버리면 우리의 체계와 주님의 체계가 어떻게 돼요? 서로 충돌되겠지요. 그 충돌이 로마서7장입니다. 나는 선함을 원하지만 내 악이 또 나를 선을 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 제 얘기가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얘기니까. 탐내지 하는 순간, ‘탐이 뭐지? 그거 하나 해볼까? 오! 탐 한 번 내봐.’ 라는 생각이 또 다른 내가 그 생각을 유발하게 돼요. 과일을 가지고 엄마가 먹어라, 하면 애는 안 먹어요. 그런데 이걸 숨기고 뒤에다가 선반위에 놓고 “내가 오기까지 절대로 그거 보면 안 돼!” 하면 그 순간 엄마 오면 다 먹고 없어요.

인간은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 금지했으면 반드시 금지선을 넘어가야 속이 편한 사람들이에요. 꼭 금지된 것만 밟아 넘어가요. 유명한 소설 있잖아요.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그 말이 맞아요. 금지해놨다는 말은 그게 나의 소망이 되는 겁니다. 왜? 인간은 자기의 존재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데 확장한 것을 방해하고 넘어오지 마! 하면 못 참아요. 개하고 똑같아요. 침대 올라가지 마! 하면 침대 올라가고. 꼭 넘어서요.

죄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 죄를 우리가 감당 못할 선까지 확장해버려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확장한 그게 작전이었어요. 어떤 작전? 내 힘으로 제사 잘 지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작전. 가만 있어라. 구원은 나의 결정에 달려있다. 그럴 때 그게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4절 봅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온전케 하셨지요. 그렇다면 온전하다. 완전하다. 완전히 거룩하다는 그 근거를 우리의 행동에서 뽑아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행동을 철거해야 되겠습니까? 철거해야 되지요. 그게 하나의 예의입니다.

제가 어제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길에서 노는 자들을 데려다가 혼인잔치를 채웠습니다. 채웠을 때에 거기에 준비한 유니폼이 있어요. 예복을 입지 않으면 그 온 사람도 나중에 저주받습니다. 그런데 그 예복을 입은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파티에 함께 참석이 되는 겁니다. 자,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그 모든 절차를 보면 누가 봐도 임금님의 100% 전적인 은혜로 했는데, 꼭 이런 인간이 있어요. “내가 예복 입어줬잖아.” 그런 인간 있어요. 예복 지가 준비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 인생은 내 인생의 장점을 끼어 넣으면 그건 주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니까요. “예복 내가 입어줬잖아.” 하는 식으로. “십자가 진 걸 내가 믿어줬잖아. 다른 사람은 안 믿는 걸 내가 믿었잖아.” 이러면 예의가 아니라니까요.

그게 15,16절에 나옵니다. 15절,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 하시되, 나오지요. 16절,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언약이 이것이니, 일방적으로 집어넣는다고 생각하세요. 우리를 마치 아담이 잠자고 있을 때, 일방적으로 갈비 대를 빼가지고 여자를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아담만 갈비대가 하나 없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모든 남자가 갈비대가 없는 게 아니고 다 있어요. 오늘도 남자 잠들 게 해서 여자를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갈비 대는 똑같아요. 아담만 그래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언약이 뭐냐, 일방적으로 주신분이 100% 다 실시를 해요. 뭐냐, 내 법을 너희 마음에 두지요. 그러면 마음에 둔다면 우리가 마음에 순종했다, 가 성립이 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 쪽에서 성립이 안 되지요. 왜? 집어넣은 것도 하나님의 언약이 일방적인 밀어붙임에서 오기 때문에.

“믿음은 제가 믿었습니다.” 라는 말을 해서는 된다? 안 된다? 안 되지요.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수동형으로 바뀌어야 되지요. 구약 때는 실패한 것이 이런 신약의 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1:1 대응을 했어요. 왜? 우리는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존재를 생각한 거예요. “주여, 뭘 해드리면 저를 구원하시겠습니까?” 제가 행했기 때문에 저를 구원해 달라, 그렇게 요청한 거예요.

그렇다면 주께서 이거해봐라, 저거 해봐라, 했는데 못 지켰단 말이에요. 그 돌 판이 우리에게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인간은 예수님을 합세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천국을 채울 수 있는 백성은 이제는 주도권이 누구냐 하면, 인간이 주동을 했고 그런 인간을 죄로 규정했던 예수님이 오른편이니까 주의 의지를 보여줄 실행자의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건져버리면, 건져낼 때 주께서는 자신의 영을 그 사람 속에 깊숙이 넣어버려요. 마치 잠 잘 때 칩이 들어온 것처럼. 그걸 그리스도의 인, 도장을 우리의 내부에 찍어버리는 거예요. 이마 정도가 아니고 내부에 찍어버려요.

그런데 왜 이마에 하느냐,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말씀을 이마에 손목에 새기라고 되어있어요. 소속이 그래요. 그걸 가지고 뭐냐, ‘기표’라고 하는데 기표는 기호와 기능으로 둘로 나누어지는데 이 기표란, 표시를 하는 겁니다. 이 표시를 하거든요. 돼지 도살하고 돼지 엉덩이에 찍잖아요. 퍼런 도장. 합격도장 찍듯이. 주께서는 엉덩이에다가 이마에다가 도장을 찍는 거예요. 내 것! 이걸 성령의 도장. 성령의 도장이라는 것은 어떤 권세도 빼앗을 자가 없어요. 성령의 도장을 만나봤으면 참 좋겠다. 하고 그리워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더 이상 드릴 제사가 남아있지 않음을 그것만 알면 안 되고, 남아있지 않음을 십자가에 근거해서, 그리스도 죽은 것 이외에는 알지 않기를 근거로 해야 되지, 나 구원받았다! 이러면 안돼요. “나, 예수 때문에 구원받았다.” 하지 말고 십자가를 근거해서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나를 구원했다.” 이리 되어야 돼요. 구원도 수동형 되어야 돼요. “나, 구원 챙겼다.” 소유로 나가면 안 되고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로 구원되게 하셨다.” 라고 주체를 주님께 돌려야 돼요. 그 사람의 움직임이 새 언약의 움직임입니다.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어떤 결과가 되느냐 로마서8장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앞에 있는 것을 거두절미하고 마지막만 남깁시다.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그걸 뒤에 것을 끊으면 “니는 죽어야 돼!”이겁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절차야. 니 좋아라고 죽는 게 아니고 주님 좋아라고 니는 죽어야 돼! 바이. 바이. 잘 죽어.”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는 것은 잘 죽는 겁니다. 이왕 죽는 거 잘 먹고 죽어야지요. 참외 잡수고 딸기 잡수고 이왕 죽는 거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잘 살고 잘 먹고 죽어야지요. 오늘의 복음입니다.

온 인류 아까 나왔어요. 실존적 의미할 때 아까 온 인류 나왔어요. 인류가 나의 존재를 확장해서 인류를 만들거든요. 인류가 있다, 할 때 있다를 나의 의미에서 나온 실존적 의미로 보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따라서 온 인류는 있구나. 그런데 이 말을 숨 거두고 있는 80살 먹은 노인보고 “할아버지 계시니까 온 인류가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느냐, “그게 죽는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 걱정되는데. 죽고 난 뒤에 지옥 갈까봐 걱정 되는데. 그건 니가 팔팔 살아있을 때 20, 30대 그 걱정 하지. 나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내 존재 의미가 지금 삭제되고 있는데, 온 인류도 같이 삭제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의 존재는 이처럼 허점이 있어요. 지금 아직도 생기 나니까 온 인류가 어떻고 걱정하고 있지요. 본인이 죽어보세요. 본인 죽으면 걱정 안 돼요. 북한의 핵이 어떻고 북한에 식량 떨어졌다. 라고 하는 사람은 여유 있는 사람이고 당장 구조조정 당해서 쫓겨 난 사람 같으면 내 취직도 걱정인데 어디 그걸 걱정해요. 자기 취직도 안 되는데 왜 북한까지 걱정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여러분, 헌혈합시다. 물론 건강하면 좋아요. 저도 많이 해봤기 때문에 하는데. 막상 본인이 아프면 내 몸만 편한 게 최고에요. 인간은 자기 존재가 중심입니다.

(북한이 어떻게 될까, 핵전쟁이 일어날까 : 사담 중) 그건 남한 사람의 핵 존심이에요. 지 자존심이에요. 왜냐 하면, 북한과 남한 쪽을 주의 복음으로 연결해야 되는데 나의 존재로 연결한 거예요. 우리는 한 형제로 연결해버리면 이건 반칙이 되지요. 주께서 기르시나니, 남쪽도 주께서 기르시나니, 그럼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같은 우리의 겨레요, 한 민족이요, 홀로 아리랑 있잖아요. 바다가 하나 됨 같이 언제 우리는 하나가 될까, 노래에 나와요.

결국은 모든 문제는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삼위일체고,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성경에서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그런 걸 아는데 니가 그런 육신을 갖고 있는 걸 아는데 성령께서는 그 니 뜻대로 안하고 아버지 뜻대로 그런 너를 구원했다. 말이 재미있지요. 니 뜻대로 구원 안 시켜주고 주님 뜻대로 구원되는 거죠. “아이고, 이래나 저래나 구원되면 그만이지.” 아니에요. 니 존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를 활용한다니까요. 우리를. 일을 시키고 숙제를 주고 이 땅에 산다는 그러한 고생을 우리에게 시키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19절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에 보게 되면 예수의 피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힘이 나오지요. 힘. 그게 능력이에요.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주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피의 능력은 언약이 되고, 언약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서 우리 몸속에 이미 하나의 인 치심, 우리 속에다가 예수의 피를 장착을 한 거예요. 우리가 잠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예수의 피는 작동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활용되고 있고 하나의 도구로서 쓰여 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말이 뭡니까? 성소에 들어간다. 갑자기 성소라는 말이 왜 튀어나오지요? 구원받으면 되는데. 성소라는 말은 이 용어 자체가 하나의 공간을 의미하지요. 그러면 공간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활용되는가 하면, 인간 존재들 속에서 활용되는 곳이 성소입니다. 성황당, 거룩한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소문난 곳. 이게 성소거든요.

그러면 성소가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성소가 특정지점을 점령하게 되면 성소 안이 생기고 성소 밖이 생기겠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특정 공간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여기 있다면 안에 들어가면 나는 성소 안에 있고 성소 안에 못 들어가면 나는 밖에 있겠지요. 만약에 이 성소가 주님께서 이 성소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체계에 들어가지요. 그러면 기존의 시공간은 깨져버립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고 아니고는 우리 존재의 몸으로는 불가능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버리면 기능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이미 예배당에 안가도 성소 안에 이미 들어온 셈이 되지요. 그것을 가지고 예수의 피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해되시지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성소 어디 있는데? 예루살렘에 있나? 어디 있는데? 큰 교회 예배당이야?” 그게 아니고 이미 주께서 피 이야기할 때 성소 안에 들어간 것도 이미 하나의 컨셉으로 이미 포함이 되어있어요. 옵션이 아니고 이미 확정된 것이라니까요.

예수 믿고 성소 단 가고 싶은데. 성소 체크. 아니오, 필요 없어요. 암은 보장해준다는데 그러면 종기는? 종기는 특약으로 새로 체크하셔야 됩니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암이고 종기고 전부 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장 다 해줍니다. 이 순재 보험. 모든 걸 다 해줘요. 2년마다 갱신하는 것도 없어요. 백세 보장.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못 하는 계약을 주님이 아버지하고 따냈기 때문에.

따냈다는 근거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모든 사람이 죽음의 길로 갔는데, 남들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만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게 진짜네.” “이게 하나의 교리인 줄 알았는데 종교 교리가 아니고 이게 현실이네.” “실제 상황이네.” 이것 안다면 그 사람 속에 바로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과 밖을 생각했습니다. 타고난 죄 성으로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 잘되는 그것조차 죄였고 그것이 죄로 드러났다는 사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상태인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50508b-히10장5절(안과 밖) - 이 근호 목사.hwp (34.5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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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