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6장61절(끈)150507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6장61절(끈)150507a-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6장61절(끈)15050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6장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님께서 말씀을 참으로 어렵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쉽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갈 텐데 왜 어렵게 해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이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에 뒤에 보면 다 가버렸어요. 66절에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많이 물러간 정도가 아니지요. 다 가셨네요.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더라. 주님께서 사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예수님을 모른다면, 같이 있어도 소용없다는 그런 투지요. 주님께서.
천국에 사람이 아쉬워서 모집하는 게 아니잖아요. 천국은 천국다워야 되지 천국 못 올 사람이 가게 되면 천국을 버려버리잖아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을 어렵게 하시는데 제자들이 다 가버렸습니다. 다 가버렸을 때에 그러면 이 어려움이란 장벽을 통과를 해야 주님의 나라에 합류가 된다는 그런 논리가 되겠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버렸는데, 이 12제자들이 주님과 결별할 그 시점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당국에 체포되고 난 뒤에는 12제자가 다 떠나버렸지요. 결국은 이 말이 뭐냐,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요한복음의 특징은 처음에 이 세상은 어둡다고 할 때에, 그 어두움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이미 나는 예수님의 제자기 때문에 어떤 인센티브를 갖고 시작합시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지를 않아요. 제자기 때문에 수월하다는 그런 것을 일체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똑같이 나를 모르는 데는 합치했다. 똑 같았다. 누구도 자기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거나 믿거나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출발점부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그게 창조에요.
창조라 하는 것은, 창조의 특징은 여기 뭐가 생겼다. 생겼다, 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흔히 창조를 뭐라고 하는가 하면, 무에서 유로 창조하잖아요.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없는데서 생겼네. 신기해라.” 여기에 관심이 있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없는데서 생기는 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어떻게 없는 데서?’ 요게 하나님의 관심사에요.
창조 과학 회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창조 과학 회. 진화론 반대해서 이 세상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를 증명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단체가 창조 과학 회에요. 창조과학회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바로 현재 있는 데서 창조주를 끄집어내려는 무리수를 둔 겁니다. 창조 과학 회는 성경적이 아니에요. 일종의 유신론 철학입니다. 전혀 복음의 능력과는 관계없습니다.
왜냐 하면, 돌이나 과학적 사실을 통해서 중보자가 나오지를 않아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어디든 화석에 예수 그리스도 안 나오거든요. 진화론이 아니다, 라는 것만 나오지 예수님이 나오지를 않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오지를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이 하는 것도 긍정하게 되지요. 예수님이 안 나오면 내가 하는 열심, 내가하는 기도와 헌금과 충성과 예배참석과 성경공부, 설교, 찬양, 이 모든 것을 긍정하게 돼요.
‘아마도 하나님의 영광 돌릴 수 있을 걸.’ ‘아마 의미 있을 걸.’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실 걸.’ 이렇게 긍정하게 됩니다. 뭐가 빠졌어요? 중보자가 빠졌어요. 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것을 지키는 것이 왜 죕니까?” 라는 질문이거든요. 같은 맥락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를 지키고 자기 목숨을 지키고 부지하려는 것. 부모가 자식 키우는 게 왜 죄가 되지요?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는 게 왜 죄가 되며, 직장인이 자기 직업에 충실 하는 것, 그게 왜 죄가 되느냐, 정답은 뭐가 빠져있어요. 중보자가 빠져있어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런 이야기는 뭐가 빠졌는가 하면, 창조라는 게 반드시 없는 데서 나와야 되고 시작을 해야 될 텐데 사람들은 없는 데서 시작을 못 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이 중간에 있거든요. 중간에 있으니까 뒤로 돌아가지를 못해요. 이왕 생긴 것,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 더 훌륭한 더 멋있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게 종교지요. 종교라는 게 뭐가 있겠어요? 종교라는 것이 자기 가치를 더욱 더 급성장 시키는 것이잖아요.
아주 간단하게 알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디 있는가 하면, 잃어버린 천국과 그리고 다시 만날 천구, 그 사이에 인간이 있어요. 그렇지요? 잃어버린 천국과 잃어버린 행복이나 기쁨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잃어버린 천국과 그걸 실라국이라 하는데, 잃어버린 천국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천국, 그 사이에 인간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잃어버린 천국을 어디서 찾는가 하면, 지금 고생스럽기 짝이 없는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천국에 증거를 찾지요. 꼭 진화론 같아. 꼭 창조론 같아. 창조 과학 회와 똑 같아요.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프고 이렇게 힘든 것은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거야. 이것은 뭔가 내가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아서 이러니까 빨리 저주나 죄를 풀어서, 그러니까 내가 뭔가 잃어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잃어버린 그 부분만큼 나중에 다시 회복되고 보충하고 채워질 수 있는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그 날을 위해서 입을 꽉 다물고 이빨 꽉 물고 참고 그날을 기다려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여, 제가 오늘도 참습니다. 어서 천국에 가게 하옵소서.” 라는 그런 오기 같은 것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거예요.
교회가 기도해서 복 받는 것도 되지만, 근본적인 것은 뭐냐 다시 올 천국에 내가 입성하는 것, 그게 목표가 돼서 교회가 있지요. 절이 그런 거 못해주고, 청와대가 못 해주니까 삼성그룹이 그걸 못해주잖아요. 교회 아니면 희망이 없으니까 교회에 가는 거예요. 이걸 제가 방금 뭐라고 했던가요? 이걸 가지고 종교라고 했지요. 이 말을 쓰는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쓰고 있는 겁니다. 종교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취미가 되어버려요.
취미, 흥밋거리, 그래서 모인 것은 친목 단체. 계 모임 모여서 재미있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곳. 가서 다시 만나고 싶은 곳, 모이다보니까 사람들이 커지고, 거기서 경제적인 사회적인 어떤 혜택 같은 것도 기대해볼 수 있고, 정수기 하나 더 팔 수 있고, 보험을 한 구찌 더 넣을 수 있는 문제고, 애 피아노 가르치는데 좋은 정보 얻을 수 있고, 정보도 얻고 외롭지 않고, 놀 수도 있고, 돈 모아서 성지순례로 외국에도 갈 수도 있는 문제고, 천국 가는 것은 보너스로 그냥 등록하게 되고.
이 살은 내 살이고 내 피다. 이 살과 피 이거 먹고 마시면 이것은 이미 등록된 사람에게만 주는 혜택이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주는 특혜, 그런 것으로 정보를 모아서 자기를 안심시키는 이 모든 게 하나의 친목단체, 종교라 하는 거죠. 그럼 이 종교에는 바로 뭐가 빠져야 되는가 하면, 바로 중보자가 관여할 수 없어요. 관여할 수 없고 대신 뭐가 있느냐 하면, 종교가 되려면 중보자는 빠지고 제사를 지내야 돼요.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지내잖아요.
예배라는 이름의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종교는 예배당의 특정 장소에 모여서 특정시간 일요일 11시, 늦게 오면 11시 5분 정도. 11시에 모여서 한 시간하고 12시 되면 빨리 가야 돼요. 예식장에 가야 되기 때문에. 또 뒤에 제2부 자기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리면 교회 중심의 생활이 되지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교회 중심으로 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교회 다니면서 마치 최면 거는 거예요. 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복은 교회를 통해서 옵니다.” 여러 가지 간증적인 사례를 쫙 나열을 하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하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보면 교회라는 곳이 없어요. 교회라는 단체는 있는데 교회라는 장소, 시간은 없어요. 이건 뭐냐, 일상 속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일상을 주께서 조성해 내는 식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갑니다. 주께서 일상 속에. 일상 속을 다른 말로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에브리싱(everything)이거든요. 무엇을 하든지. 놀러가든지 아니면 잠을 자든지 목욕탕에 가서 사우나를 하든지 간에. 아니면 조깅을 하던지. 무엇을 하던지. 거기서 영광 돌려라, 가 아니라 그런 일을 조성하신 분을 인정하면 그게 영광이 되는 거예요.
학생이 시험을 치는데 컨닝을 했다. 컨닝을 하면 영광을 가린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잘못이에요. 컨닝을 하게끔 주께서 조성한 것을 믿게 되면 그 아이는 컨닝하면서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제 니 점수는 끝났어. 니는 바닥이다. 그걸 감사한 마음으로 수용해야 돼요. 감사한 마음으로. 왜? 내 자신의 죄와 숨겨진 내 위주의 인생을 찢어버리는 작업을 우리는 늘 당해야 구원받았거든요. 왜냐 하면, 찢는다는 것은 누구 이름으로 찢느냐 하면, 내 이름으로 찢는 거예요.
주의 이름에 방해되는 내 이름을 찢음으로 말미암아 찢어진 그 분이 주체 이름,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을 찢는 그 작업이 우리로 하여금 지식이 아니고 온 몸으로 “제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이름의 활동 안에 놓여서 제가 구원받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하지 말라는 거예요. 에브리싱,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하게 되면 반드시 뭐든지 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내가 뭘 하기 때문에 정작 주께서 하신 것이 자꾸 가려져요. 가려져버립니다. 아침에 눈을 떴다. 내가 손가락가지고 성냥개비로 바쳐서 벌린 게 아니거든요. 주께서 눈을 뜨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자기 전부터 주의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운동하고 식사하고 양치질하고 전부 다 이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마치 참새가 짹짹거리듯이.
참새가 굶어죽을 때까지 주께서는 먹이시나니. 굶어죽을 때까지. 참새가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더라도 하나님한테 원망하면 안돼요. 그동안 키워준 것이 주의 은혜니까. 마태복음6장26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친히 기르신답니다. ‘친히’가 중요해요. 친히 기르시나니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참새가 팔리는 것도 주의 뜻인데 친히 기르신다는 거예요. 친히 기르시는데 인간들은 뭘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고 본 거예요. 그걸 바꾸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는 게 아니고 인자가 친히 기르는 거예요. 바꾸라는 거예요. 인자가.
왜 하나님이 친히 기르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를 믿으면 왜 구원을 못 받는가 하면 왜 그게 구원이 안 되는가 하면, 그 하나님이 나의 확대기 때문에 내 존재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왜 했을까? 신이 만들었겠지. 그러면 신은 있네. 그러면 그 신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 확인하기 위해서 내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따로 설정한 것이 신의 이름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골로새서1장16절에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우리를 만들었어요. 오직 인자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친히 만드셨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 다 알아요. 천국 갑니까? 아니에요. 성령이 임해야 바로 숨어진 하나님이 예수님이란 사실을 알아요. 전에는 이방인들이 신, 신해서 우상화된 신을 믿었지만, 마지막 때에 구체적인 특정 인물로 보냈사오니, 사도행전17장30절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이 설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정하신 자를 마지막 때에 보내사 지금까지 한 모든 신을 믿던 것을 이걸 그냥 용납하시고 이제는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 분이 신이 보냈는지 어떻게 확인하느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마지막 때를 위해서 더 이상 증거를 두지 않았다고 되어있어요.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설교핵심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증거는 내놓을 수 있는 증거는 손 털고 다 내어놨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따라서 그 정하신 사람으로 마지막에 심판을 준비했다. 끝! 사도바울의 설교가 그렇습니다.
전에는 몰랐을 때는 허물치 않았더니만, 마지막 예수를 보냈을 때는 더 이상 봐주는 건 없기! 봐주는 건 없습니다. 오직 숨겨진 너희들이 말하는 헛소리,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그 헛소리가 이제는 실제 인물로 33살 먹은 목수의 아들로 실제로 등장했어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육신으로 오신 그 하나님, 그 성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적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적그리스도.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이 중요해요. 하나님이 그냥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그런 건 안 통해요. 정답이 아니에요. 육신으로 왔다는 것이 중요해요.
육신으로 왔다는 게 왜 중요한가 하면, 육신으로 오신 분이 피와 물과 성령이라는 증거물을 남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그분인 것을 증거 하는 것은 3가지라, 성령과 물과 피다. 요한일서1장8절 보는 사람은 무슨 이야기 때문에 그걸 적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예수 잘 믿는데 이거까지 필요 없는데. 우리가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그 예수가 전에 있던 하나님을 이미지화시킨 그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대단한 예수를 우리가 만들어낸다니까요.
우리가 안 만들어내면 물과 피라는 그런 거 이야기 안 해도 되는데, 항상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어떤 켄터키치킨 할아버지처럼 뭔가 점잖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점잖고 훌륭하고 자비롭고 인자하신 그런 모양새를 우리가 만들어내는 그런 자질들이 있어요.
왜 불교가 우상숭배입니까? 부처를 만들어냈잖아요. 요번에 여름수련회에 사사기하는데 사람들이 기드온의 에봇을 만들었어요. 에봇은 물질이잖아요. 물질에 어떤 능력이 나오는 줄 알고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다고 했어요. 섬길 때 음란하게 섬겼다 했어요. 음란이란 말은 보통 성적용어인데 성적용어를 어디에 쓰느냐 하면 바로 종교용어로 적용을 시켜요. 확대시킨 겁니다. 또 모세가 들었던 놋 뱀 있잖아요. 놋 뱀 그것도 사람들이 놋뱀이니까 그것보고 바라보는 사람은 살았잖아요. 그 소문 듣고 놋뱀이 우상화됐어요.
또 법궤 그것도 우상화됐어요. 천주교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입던 옷 성베도 우상화될뿐더러 예수님의 마지막 잔 성배도 찾아내서 그것도 우상화시키지요. 참 이상하잖아요. 그게 아이콘인데 그런 게 있으면 신앙심이 더 돈독해지잖아요. 왜 그걸 말리지요? 이게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신앙이 돈독해지면 안돼요. 왜냐 하면, 신앙이 돈독해지면 그게 특수영역이 돼버려요. 주님은 일상 속에서 찾는데 화장실에서 찾고 목욕하면서 찾고 했는데 우리는 그 영역 말고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만날 매치할 수 있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특수영역을 따로 만들어요. 마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안방에다가 마리아상해서 특수영역으로 따로 마련하는 것처럼. 예배당에서 강대상은 목사만 올라가고 전도사는 아래 강단에서 이거 쳐야 되듯이 특별한 영역과 특수한 시간 새벽2시45분은 주님 안 계셔. 꼭 11시 예배에 참석해야 주님 만날 수 있는 미팅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처럼 은연중에.
히브리달력으로 하면 1월 15일 유월절, 3월6일 오순절, 맥추절이 두 개인데요. 유월절, 맥추절, 오순절 봄 절기입니다. 히브리달력은 뭐냐 하면, 출애굽기12장에 보면 출애굽 할 때 1월 달로 쳤으니까. 사실은 그 기간이 3개월 더 차이난다 보시면 됩니다. 7월1일 나팔 절, 7월10일 속죄 절, 7월10일부터 일주일동안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 해요. 마지막 절기. 그 절기를 하나님께서 만들어놨거든요. 그런데 갈라디아서4장10절에 보면 뭡니까? 내가 너희 절기를 지키면 내가 전한 복음 다 찢었다고 생각해라.
참, 재미있는 게 절기를 누가 정했어요? 우리가 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정했어요. 안식일 누가 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정했어요. 분명히 사도바울이 안식일 지키지 말라고 했거든요. 안식일 주일 같은 거예요. 주일, 안식을 지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이건 물론이고. 부활절 이것도 마찬가지고. 하여튼 절기 지키지 말라고 하는 뜻이 뭐냐 하면, 주님 뜻은 이거에요. 너희들 일상을 볼게. 일상을. 화려한 드레스 보는 게 아니고 너희 속옷 보겠다, 그 말이에요. 속옷.
주님의 창조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는가, 무에서부터 창조했잖아요. 이 무의 개념이 죄의 개념으로 바뀌어요. 원래 처음에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왜 그 날 안 죽었지요? 그날에 죽으리라 했잖아요. 그런데 그 날에 왜 안 죽었지요? 죽음의 의미가 바뀌어요. 어디서 바뀌느냐 하면 창세기4장에서 바뀌어요.
아벨을 죽인 가인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살았지요. 하나님께서 벌을 주는데 그 벌이 뭡니까? 니도 죽어라, 이러지 않고 너가 다른 곳에서 살아서 살도록 하니까 가인이 하는 말이 “그러면 다른 곳에 가면 죽을 수 있습니다.” 하니까 “표를 해서 안 죽게 해줄게.” 라는 게 그게 벌이래요. 그게 벌이랍니다. 그게 살인죄의 벌이라는 거예요. 죽은 놈만 손해 봤지.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멀쩡하게 대대로 잘 사는데. 큰 성을 짓고.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목숨 끊어져도 죽음을 몰라요. 자살의 바보가 그거에요. 자살해도 안 죽는 게 문제에요. 자살해서 죽으면 나도 자살해요. 자살해도 안 죽어요. 인간들이 죽는 사람을 보니까 그게 죽음인 줄 알아요. 인간들 개념에서 너무 성급하게 개념을 따와서 그래요. 죽음은 저주를 말합니다. 그리고 저주는 인간이 살아있을 때는 못 느껴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그 때 유일하게 저주와 죽음을 같이 경험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을 때, 정녕 죽으리라한 죽음이 있잖아요. 그 죽음의 진짜 정답은 누가 쥐고 있는가, 예수님이 쥐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 안 죽었어요. 거지 나사로의 앞집 사는 부자는 아직도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어요. 지금도 물 달라고 난리에요. 괜히 시원한 물을 경험해가지고 그 경험을 안 했으면 물 달라 소리는 안 하는 건데. 괜히 물 마셔놓으니까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결핍이.
철저하게 고립되고 철저하게 버림받는 것, 영원히 버림받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 버림받는데, 부자고 거지는 다 하나님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 받는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요. 하나님 믿는데 왜 버림받는가, 하나님 뜻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저주를 받는 거예요.
기독교가요, 하나님교회는 안됩니다. 예수교로 바뀌어져야 돼요. 기독교가 하나님 교회로 바뀐 것은 사람들을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 아시지요. 하나님이 모르는 사람 없이 다 아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아시니까 “여러분들에게 잃어버린 천국을 제가 우리 교회에서 다시 천국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나님 잘 믿으세요. 믿던 것처럼.” 그게 엉터리에요. 하나님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어요. 심지어 절의 중들도 하나님 알아요. 귀신도 이미 야고보서2장에서 알고 있지요. 귀신의 종이니까 하나님 다 알고 있어요. 이미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 하나님 다 알고 있어요. 부처도 넘어지면서 “아이고, 하나님 아버지.” 이거 하고 있어요. 중들도. 지금 뭐로 바꾸느냐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뭐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어야 해요. 왜냐, 저주가 예수님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3장35~36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지금 누구보고 하는 겁니까? 여호와 믿는 유대인보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냥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율법을 가지고 체계를 갖추어서 믿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도 버릇처럼 “하나님이 살려주셨구나! 하나님이 살려주셨구나!” 이리 되어버리면 내가 만든 이미지의 신과 나는 좋은 관계라고 자꾸 착각을 하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살려주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살려준 것과 차이가 나요. 뭐냐 하면,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우리 죄 때문에 희생하신 분이 나를 살려줘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네 죄 때문에 희생을 했는데 니가 그 희생을 깜빡 놓쳐버리니까 우리는 헤헤거리면서 또 까불기 시작하는 거예요.
마치 어떤 불효자가 있는데 불효자 엄마가 그 추운 날 시장바닥 차가운데서 콩나물 팔고 있는데, 얼마나 아들이 애를 먹였으면 엄마가 손가락을 끊어서 그 손가락을 하나 잃어버려가지고 다른 손가락은 칭칭 붕대 감아가지고 콩나물 팔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아들은 자기 죄 때문에 날아간 손가락이 꼴 보기 싫어서 엄마한테 근처도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가끔 용돈 얻기 위해서 엄마한테 가다보면 뭐가 보이느냐, 이 손가락이 자기 죄 때문에 날아간 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요새 교인들도 하나님 좋아하지 예수님은 별로 안 좋아해요. 생각하면 예수님은 십자가 피 흘리는 것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십자가 피 흘림을 생각하면서 “주여, 우리 애 성적이 내려갔는데.” 지금 십자가 피 흘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성적 내려간 것이 거기에 매치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주여, 주식을 샀는데 깡통이 되어가지고 백수로 사놨다가 다 날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 순간 성령이 임해서 십자가를 보여줘 버리니까 “야! 백수 그거 깡통 주식 사게 하신 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구나! 돈 날리라고 하신 것이 돈 날리고 감사하라고 하신 주님의 조치였구나!” 라는 것을 차후 적으로 간파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성도 맞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예수님이 뭐냐, 하나님하고 똑같이 이미지를 만들어서 멋있게 생긴 예수, 키 1m86Cm에다가 몸무게70Kg뭔가 도포 입은 사람. 그리고 사랑하노라 그런 것으로 마구 꾸며가지고 자기가 예수라는 인형을 만들었어요. 그것도 3D로. 입체로. 그래서 자기가 만든 예수가 꿈에도 마구 나타나지요. 자기가 만들었으니까. 예수 본 사람들 만나 보세요. 공통점 하나도 없어요. 자기 인상을 조합해가지고 멋있는 것으로 모아가지고 예수 만들어놨으니까 같을 수가 있겠어요? 없지요. 같을 수가 없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지키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그게 왜 죄가 되는가 하면 중보자가 거기서 들어있지 않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열심히 살아서 이만큼 살았습니다. 뭐가 빠졌느냐, 중보자가 빠져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는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그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천국 들어가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다가 장차 행하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거기다가 집어넣고 이야기를 해버려요.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 보리떡 5개 물고기2마리 줬잖아요. 사람들은 그것을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물질화로 본 거예요. 요런 물질을 받으니까 음식을 받으니까 예수님이 좋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뭘 먹었습니까? 떡과 고기를 먹었지요. 그런데 53절에 뭡니까?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했지요. 그런데 그 전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축복해서 주신 떡과 고기를 먹으면 예수님을 경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능력이 둘러있기 때문에 고기와 떡을 먹으면 생명이 막 쏙쏙 들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 예수! 하고 쫓아다녔는데 그 떡과 고기는 뭐냐 말이죠. 먹었던 것은 뭐냐 말이죠.
기도해서 예수님의 응답받아서 병 낫고 하는 이건 뭐냐 말이죠. 사업이 망했는데 기도해서 사업 잘된 것 주의 주신 축복, 이건 뭐냐 이 말입니다. 교인5명밖에 안 되는걸 기도 열심히 해가지고 2000명 됐는데 이 교인 수 2000명 뭐냔 말이죠. 예배당 큰 건 이건 뭐냔 말이죠. 선교사100명이건 뭐냔 말이죠. 그건 바로 예수의 살과 피를 가로막는 요소가 니 안에 그 거대한 요소가 마귀적인 요소가 애초부터 니 안에 들어있었고 그것이 풍선처럼 나에 대한 일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마귀적인 해석을 니가 부푼 거예요. 그렇게 풍선처럼 커지게 만든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여기 계시잖아요. 예수님께서 지금 요한복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마중을 나가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요한복음(17장3절)에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알아서 내가 잃어버린 천국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니까. 아까 강의하면서 후딱 지나간 것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인간은 어디에 있다? 잃어버린 천국과 다시 찾을 천국 그 사이에서 노정에 있지요. 그게 종교라고 했습니다. 복음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종교라고 했습니다. 이건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잃어버린 것 어떻게 한다? 고생하고 있으니까. ‘이건 분명히 신의 뜻이 아니야.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힘들게 하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인간으로 만들었으면 이렇게 힘들게 하지를 않아. 뭔가 분명히 대책이 있어. 그 대책을 다른 사람은 안 찾아도 나는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겠어.’ 강한 집념과 오기로서 교회를 다니는 겁니다.
언젠간 천국에 들어갈 줄 알고. 군데, 군데 기도의 응답 받으면 보너스로 챙기면 되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주의 말씀을 듣고 그걸 믿으라고 했으니까 거기다가 갈라디아서, 로마서에 보니까 뭐라고 되어있어요? 행함이 아니고 믿으라고 했으니까. 행함보다 더 쉽네. 왜? 믿음은 4자만하면 되잖아요. ‘믿씁니다.’ 이건 더 쉬워요. 할렐루야, 믿씁니까? 믿씁니다. 믿씁니까? 하면 아멘하면 되는 거예요.
이건 행함보다 더 쉽네. 세상에 이런 쉬운 데가 어디 있어. 신라시대에 유명한 중이 있잖아요. 원효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도 불교의 교리가 어려우니까 민중들에게 불교신자 만들기 위해서 간단한 것을 줬어요. 나무아비타불만 해라.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이것만 하면 응답이 다 되는 거예요. 참 쉽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그럼 믿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하면 좀 찝찝하니까 회중들 앞에 나와서 믿습니다! 손들고 하면 되는 거죠. 오늘 새로운 친구가 왔는데 믿는답니다. 할렐루야로 화답합시다. 할렐루야! 그러면 구원되는 거죠. 그런데 그 믿습니다가 행함의 일종이에요. 시옷을 4개 5개 붙여도 소용없어요. 백번해도 그건 행함의 일종이에요.
그러면 진짜 믿음은 뭐냐 하면, “나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신 믿음이 내가 얼마나 주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진짜 믿음은 주님만 알고 있거든요. 주님만 알고 있는 믿음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면 나는 나만 사랑하는 철저한 이기주의고 나 빼놓고 모든 타인들 타인 중에 예수도 포함된 나 빼놓고 모든 주변에 있는 타인들은 나의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런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 능력이 니 믿음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이 니 믿음을 완전 포위를 해버려요. 완전히 덮쳐버린 거예요.
이런 컵 가지고 지나가는 개미 덮쳐버린 거예요. 꼼짝 못하지요. 그 안에 놓여있지요. 창고 같은 것이 덮쳐버리면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생각되어지게 되는 거예요. 비로소 최초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피조물이란 뭐냐, 창조주 없이는 못 산다는 뜻이거든요. 처음으로 창조주가 나의 주체로 등장하는 순간이에요. 교회 간다. 주께서 보내게 하셨구나. 30분 늦었다. 주께서 늦게 하신 거예요. 그거 메운다고 돈1000원주고 헌금 더 보태고 하지 마세요.
성가대 하다가 음 하나 틀렸다. 주께서 음 틀리게 하신 거예요. 그 성가대 지휘자에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너무 자기 합리화 되지 않느냐, 그렇게 되면 지 행동하나 어떤 나쁜 짓해도 그런 식으로 뒤처리를 하게 되면 이건 죄를 더 유발하고 더 퍼트리는 그러한 부작용이 생기지 않겠는가, 라고 질문하거든요. 그 부작용마저 주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누가 믿겠어요? 성령 받아야 되지.
그런 부작용마저 주님의 뜻인 것을 누가 감사히 받겠습니까? 이게 부작용이야. 부작용이야. 내가 지금 너무 오버했어. 안 돼. 조심해야 돼. 다시 행함으로 돌아가는 게 인간이죠. 뭔가 겁을 내고 있다는 것은 혼자 지금 나대고 있다는 뜻이에요. 누가 덮쳐주는 사람이 없기에 지금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목자가 없기에 지금 목자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의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얼마나 목자가 없으면 그걸 주문 외우듯이,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하는 것처럼 왜 자꾸 그걸 외웁니까? 절인지 교회인지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믿씁니다, 믿씁니다 반복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서 우리교회는 아멘 좀 하지 말라고 해요. 아멘을 하게 되면 첫째, 아멘을 하면 목사가 지 설교 잘하는 줄 알고 착각해요. 이게 제일 큰 문제에요. 오늘 뭘 주는구나! 하고 이리돼가지고 지가 착각한다니까. 두 번째가 아멘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옆 사람이 믿음 좋은 줄 알고 착각하게 만들어요. 아멘3번 한 사람하고 아멘1번 한 사람하고 믿음이 누가 좋겠어요? 3번 한 사람이 좋지. 세 번째가 문제에요. 아멘을 자주 하게 되면 없는 믿음 생기는 줄 알고 착각하게 돼요. 이 3가지 착각을 해요. 착각의 3종 세트에요. 설교하는 목사 착각하고 옆 사람 착각하고 본인 착각하고. 이건 주변에 다 착각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아멘을 안 하느냐, 하세요. 언제? 내 뜻대로 안 될 때 아멘하세요. 내 뜻대로 안 될 때,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입니다. 그 때는 아멘이 절로 나와요. “주여, 맞습니다. 당해도 쌉니다.” 그 아멘을 잘해도 구원받은 사람이 강도잖아요. 강도되어서 사형 잡혔잖아요. 완전 범죄 깨졌어요. 경찰한테 잡혀서 “주여, 이게 바로 주께서 유발하신 주님의 작품 아멘입니다.” 내가 강도되어야만 구원된다는 게 주의 뜻이라면 제가 기꺼이 강도라는 신분으로 인생 마감하는 것을 감사히 던지겠습니다. 그리 좀 살아봤으면 좋겠어요. 이론만 그러지 마시고. 그걸 저는 번지점프라고 합니다. 번지점프인데 이것도 비겁해요. 발에 묶인 왜 묶어. 강도는 그냥 날려버렸어요. 오늘밤에 니가 낙원에 있으리라. 나와 함께 있으리라. 몸을 그냥 던졌어요.
신앙은 뭐냐, 나보다 주님의 폭이 넓다는 것을 아는 게 신앙이에요. 내가 구축한 이 현실보다 더 넓은 범위로 그걸 포위하고 있는 게 신앙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따라온 사람들에게 물고기와 떡을 줬잖아요. 그들은 영생을 먹었다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당신은 메시아 맞다 하는 거예요. 그 메시아에 주님은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건 니가 지어낸 메시아지. 니가 생각하는 얻어먹은 게 있으니까.
진짜 메시아는요, “저를 구원할 필요도 없는데 왜 구원하십니까?” 이럴 때만 메시아에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 저 주님 3번 부인했습니다. 주께서 저를 내쳐도 제 쪽에서 예수님을 내쳤기 때문에 할 말이 없지요. 빡세게 붙들려고 애썼는데 주님께서 내친 게 아니고 돌아가는 상황이 나, 저사람 모릅니다. 3번씩 부인했잖아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니 숨겨진 본색, 니는 니 자신밖에 생각 못하는 것, 오직 어디에 가도 너는 너만 최종적으로 궁극적으로 너 이외에는 남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게 궁극적으로 드러난 기회가 뭐냐, 바로 노닥 불 펼 때 소녀가 이야기할 때, 베드로는 자기의 주제파악을 한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엮지 마세요. 나는 저 사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엮지 마세요. 아는 체 하지 마세요. 그 때 주님은 돌아봤거든요. 시선이 마주친 모양이라. 그 때 타이밍 맞게 닭은 울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지금도 닭은 울거든요. 양계장 근처에 가면 닭은 웁니다. 닭이 운다고 그 때 그 말씀이 생각날까요? 왜 닭이 우는 것은 수컷이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서 그냥 우는 과학적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지어낸 과학이지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동물에서는 수컷은 암컷을 전제로 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닭 우는 것을 전에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것이 생각이 난다는 것 그게 바로 은혜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생각나는 겁니다. 똑같은 장치해가지고 똑같이 다 울어보세요. 주님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남한테 이야기할 때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못해요. 뭐냐, 그 듣는 사람이 당신의 일방적인 억지 같은 해석을 나한테 펼치지 말라 이렇게 나와요. 그 때 닭 울 때, 니 혼자 생각이지. 변화산에서. 변화산에서도 그것도 니 혼자 착각이지.
그러니까 전도는 설득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말로 하지 않고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으로 전도하잖아요. 그러면 진짜 구원받은 전도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집사가 말 잘해서 구원 받았다고 고백하겠어요? 아니면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까? 성령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고백했다면 본인이 남한테 전도할 때, 은근히 기대하지 마세요. 아이고, 완벽하게 말하고 봉투에 돈까지 넣고 점심까지 먹여놨는데 그래도 교회 안 나온다고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본인이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왜? 본인은 그렇게 구원받아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걸 강요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지요.
전도는요, 말로 하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신학 배워서 성경 전도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살아가는 모든 그 모양새가 다 전도입니다.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다 전도입니다. 성령 받은 부모가 가정에서 생활할 때, 성령 받지 않은 자녀한테 그게 전부 다 전도가 되는 거예요. “엄마는 복음 알아도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그게 다 전도가 돼요. 전도가. 그러니 전도하려고 애쓰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주께서 전도되게 하십니다. 주변에 그런 변화를 유발시켜줍니다.
행동을 나쁘게 하게 되면 전도가 막힐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나쁘다, 좋다, 를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선악적인 판단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반칙입니다. 주님은 생명나무 차원에서 하기 때문에 선악적으로 내가 나쁘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고 내가 선하다고 주께서 선한 게 아니에요. 그냥 주님께서 꼭두각시 인형을, 꼭두각시 인형이 뭐냐 하면, 인형 뒤에 줄이 있어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잖아요. 애들이 축하파티를 열 때 마리아 선생님이 애들을 데리고 오를레이 오를레이호 하면서 하는 거 있지요. 꼭두각시처럼 우리를 줄로 맺어있어요. 그래서 뭘 하던지 간에 우리 역할을 할 뿐이에요. 악하면 악한 역할을 할 뿐이고 선하면 선한 역할을 할 뿐이지, 내가 선하고 내가 악하지는 않아요.
선악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 바깥에 있는 주님과의 어떤 관계성, 끈하고 끈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 끈과 연결되어 있으면 의고 끈이 끊어져 있으면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내 내부에 선과 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착한 일하면 착한 생각, 나쁜 일하면 나쁜 생각. 코메디 프로에 그런 게 있어요. 중이 뭔가 음란한 생각을 할 때는 갑자기 절을 해요.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슬픈 생각…, 그 코메디에 보면 여자 동창생이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중이 됐어요. 그런데 중이 돼가지고 반갑다고 막 껴안고 하니까 갑자기 몸에 반응이 나타난 모양이라. 그게 부끄러워가지고 아버지 돌아가실 때 슬픈 생각, 슬픈 생각해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티를 안 내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걸 보면서 바로 저게 오늘날 교회가 하는 짓이다.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요. 여러분, 죄지을 때마다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착한 생각, 주께 영광, 주께 영광 그런 행동을 시킨다니까요. 그걸 경건의 훈련이라고 이야기해요.
경건의 훈련이 뭔 줄 알아요? 내가 왜 경건치 않은가를 아는 게 경건이에요. 훈련이에요. 로마서4장4절에 보면, 경건치 않은 자를 어떻게 하신다? 의롭다 하신다. 그 끈을 나타내기 위해서 왜 나는 모든 게 경건치 않은 것인가를 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경건치 않은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행동하면 됩니까?” 그건 제가 말할 필요 없어요. 왜? 평소에 하는 것이 전부 다 경건치 않은 거니까. 전부 다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 이기주의적 행동이잖아요. 그렇잖아요? 어느 부모가 자기 아들 시험에 합격했다고 우는 사람 너무 죄를 알아서 우는 사람 누가 있어요? 내 애가 합격하는 바람에 다른 애가 내 애 자리 때문에 탈락했다는 것에 가슴아파하는 부모가 누가 있습니까?
회사 취직하러와 가지고 취직해놓고 너무 슬퍼가지고 나 때문에 엉뚱한 애는 탈락하고 자기는 합격했으니까 애통해하면서 통곡하면서 내가 사는 게 내가 도둑놈이야. 이렇게 하는 사람 봤습니까? 단박에 감사헌금할 건데. 그러니 이 모든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누구를 경유해요? 내가 평소에 원했던 것, 기대했던 것, 소망했던 것, 너무나 고생스러운 이 삶이 예수 이름으로서 행복해질 때 그 행복해지는 것을 사람은 뭐냐, 아까 한 다시 만나는 천국을 앞당겨서 맛봤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천국은 뭐냐,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 그게 맛본 거예요. 그걸 자기 십자가지고 주를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어려운 게 아니고 사실은 불가능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전에 이야기했지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방법을 이야기했잖아요. 돌아서면 다 잊어먹어. 모르지요. 기억 안 나지요. 녹취해도 기억 안 날걸. 기억납니까? 안 나지요.
살과 피를 어떻게 마시는가 하면, 주님이 스스로 찔러서 피다, 살이다, 라고 주신 게 아니고 니가 찔러야 돼요. 죄인이 찌를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살과 피 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야 되고 죄를 지어서 그 죄로 말미암아 주님을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부인하는 그 순간 나오는 것이, 생산되는 것이 살과 피에요.
그래서 주께서는 끝까지 우리의 육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 우리의 육신이 있어줘야 살과 피가 나오기 때문에. “내가 나 된 것은 죄인입니다. 내가 지금 구원받은 것은 주의 은혜지, 저는 제 구원에 제가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 그럴 때만 면류관도 천국에 과감하게 던졌어요. “이건 제가 쓸 게 아니군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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