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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5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자유게시판로마서

201505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이름 : 한윤범(IP:14.39.134.87)

201505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서 화해라는 것에 대해서 기존의 생각과 완전히 정반대로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화해라고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고생 뒤에 낙이 온다고 이것 견디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걸 주실 거야. 왜? 하나님은 화해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서 안 좋은데도 예수님 중간에 오셔서 원수 된 자를 의롭다고 해줄게. 드디어 하나님 앞에 예쁨 받는 사랑받는 사람 되었어. 이걸 화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헤겔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만약에 그걸 화해라고 한다면, 화해가 돼야 될 그 대상이 특수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메시아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너무 많잖아요. 하나님이 내 편들면 사회구조상 반드시 다른 사람 편을 들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다른 것 없이 축구시합, 야구시합 보지요. 한쪽이 승리자 되면 한쪽은 패자가 되죠. 승자 혼자 화해가 되면 패자는 화해가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은 전체 화해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전체 다 죽여 버려야 돼요.

특수자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여기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다면 서로가 만나서 나의 변증법, 아까 정반합이 아니고 나의 발전이나 완성, 화해가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변증법이 되는 거예요. 네가 있음에 내가 깨어지고 내가 있음에 네가 깨어지고. 내가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의 낮아지심에 합류할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여기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서로가.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널 이용해서 내가 잘 되겠다는 칸트적인 것밖에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용해서 자기 잘 되는 것만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혼자서는 신 앞에서 멋지게 복 받았는데 이쪽에선 울고 있잖아요.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그래서 A와 B란 사람이 이걸 상호승인 또는 상호인정이라 하는데 인간세상은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투쟁을 벌인다. 호네트란 사람이 헤겔 제자인데 그 사람이 지은 책에 [인정투쟁]이란 게 있는데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것, 그게 이 세상의 본성이란 겁니다. 적당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타인이 없으면, 만약에 부산바닥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있으면 옷을 잘 차려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벗고 다녀도 괜찮지요. 옷을 왜 입는데? 미쳤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미쳤다고 누가 이야기하는데? 상대가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옷을 입은 만큼 덥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하지만 참아야 되지요. 상호화해를 위해서. 그만큼 나한테 손해지요. 내 욕망이 제한되잖아요. 그럼 이것은 일종에 나의 파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욕망의 파괴.

여기서부터 헤겔은 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신을 어떻게 찾느냐? 아까 이야기한 객체와 주체. 주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주인공이라 했지요. 출발을 여기서부터 해보자 말이죠. 정이니까. 나는 결국 누굴 위해 살아요? 남한테 인정받든 뭘 하든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죠. 나에게 귀환되죠.

그런데 헤겔은 그 방식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본성을 마지막에 자기만 사랑하라고 누가 가르쳐줬어요? 가르치긴 누가 가르쳐 내 본성이지. 그러니까 그 본성을 누가 집어넣어줬어요? 하나님이 집어넣었지.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로부터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로 돌아오죠. 마치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처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걸 그대로 우리가 닮은 거예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신의 존재성으로 본 거예요. 존재성이 왜 봤느냐 하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나란 존재가 나로 말미암아 결국은 나의 영광으로 돌리니까 마지막 남는 것은 나, 여기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죄를 짓든 의를 행하든 치매 걸려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온통 스물네 시간 생각이 내 생각밖에 없어요. 자식이 괴로운지 고민하는지 그건 관심도 없어요. 그냥 지 몸 편하면 그만이어요.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지금 그것 따라가고 있잖아요. 같이 늙어가고 있으니까. 은근히 숨기고 있지요. 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숨긴다고 같이 숨겨지는 건 아니잖아요. 숨긴 것은 우리의 교양과 그동안 학습된 훈련과 상식 때문에 억지로 억압하고 있지만 억압한 게 나중에 꿈속이나 평소에 터뜨리면 역시 나는 나밖에 몰라요. 교회 가서 은혜 받았다고 하잖아요. 집에 가면, “아이고 힘들 어라. 교회 좀 가까웠으면 좋겠다.” 은혜+가까웠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결핍된 것에 대한 보충, 반드시 노리게 돼있습니다.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존재로 해서 문제에요. 존재로 하지 말고 생성으로 바꾸자. 생성의 정반합의 변증법이 개입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이란 객체가 외부에 있지만 객체로 말미암아 변증법이 이뤄지는 것은 내 내부에서 이뤄진다. 내부의 과정이 내 존재보다 우선돼야 된다는 것이 헤겔의 철학입니다. 뭔 뜻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내 내부에 내가 손대지 못하는 나를 능가하는 내 존재는, 항상 인간은 죽더라도 어느 순간에도 내가 어때서, 내가 어때서, 나밖에 모르는데 뭘 빠뜨렸어요?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완전히 묵살하고 내 존재로 끝나버렸잖아요.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러면 정말 중요한 것이 날아가 버렸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정반합인데.

그렇다면 간단해요. 인간이 주인공이 되니까 내가 내 주인공, 주체에서 주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자존재, 그러니까 객체를 거쳐서 돌아오게 돼있습니다. 집구석에 혼자 있어봐야 안 되지요. 그런데 자꾸 내가 있으면서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의 여행을 하면서 결국은 나로 돌아오잖아요. 상상의 여행을 할 때 나타나는 자들이 누굽니까? 바로 내가 아니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 내가 봤던 것, 경험했던 것, 감각되었던 것. 백화점 갔다 왔는데 얼핏 봤는데 괜찮더라. 벌써 객체잖아요.

사람이 맨날 자기만 봅니까? 아니잖아요. 뭘 보잖아요. 제가 말하는 게 신기한 일이 아니고 일상의 일입니다. 내가 보면서 항상 내가 객체를 요구하잖아요. 욕망이 가만있지 않으니까. 나도 가졌으면, 하고 다시 주체로 돌아오잖아요. 주체에서 객체를 통해서 주체로 돌아올 때 객체, 주체 전부 없애버리고 거기서 신의 뜻을 끄집어내는 걸 헤겔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단어조차도 이렇게 단어 의미를 추가하는 것도 기존 철학과 달라요. 기존 철학은, 이게 우롱차인데 개념을 부여한 것은 나란 주체가 이걸 객체 삼아서 부여하잖아요. 그런데 헤겔은 그게 아니고 주체와 객체, 정반합이 완성된 걸 개념으로 보는 거예요. 개념이 주체, 객체보다 더 세다는 겁니다. 더 우선적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는데? 개념에 의미가 있거든요. 우롱차의 용도는 목마를 때 마시는 거다. 의미가 있잖아요.

개념을 헤겔은 신의 작용으로 봅니다. 헤겔이 왜 자꾸 이런 이야기 하느냐 하면, 어쨌든 유한적인 것은 무한적 것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연결하는 방법은,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에요. 객체가 하나님이다. 너는 인간이고 객체는 하나님이라고 돼버리면 하나님 믿는 주체로 돌아오죠. 결국 내가 나를 믿는 셈이 되죠. 마치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이것과 똑같은 소리란 말이죠. 예수 믿는 나를 계속 유지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지금 헤겔은 피하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이걸 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믿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은 구세주다. 이게 개념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구세주란 걸 믿으면 내가 믿는 것 맞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개념이 주체, 객체, 객체라는 건 목사님, 옆에 있는 장로님. 어떤 장로님이, “예수님이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받는데.” “그래요? 장로님, 믿겠습니다.” 그래서 믿어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면 객체는 장로가 되고 믿는 주체는 내가 되지요.

내가 예수는 구제주란 개념을 가져오면 그게 답니까? 아니잖아요. 며칠 뒤에 보니까 예수님이 구세주란 개념이 바뀌지요. 시간 따라 바뀌게 돼있어요. 예수님이 구세주란 것에 이런 뜻이 있었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처럼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점점 더 늘어나잖아요. 늘어나고, 늘어나고 어디까지 늘어나겠어요? 진짜 하나님께서 주신 개념이 합치할 때까지 늘어나겠지요. 그러니까 개념을 통해서 신과 결합시키겠다는 말입니다. 헤겔의 작전이.

예수님, 내가 아는데? 아니요. 그때만 알지요. 시간이 가미돼요. 시간이 가미되고 세월이 흘러가면 전에 알던 예수와 지금 예수가 다르지요. 그러면 우리가 개념에 종속돼야 되지 내가 예수 믿는다는 내가 나한테 종속되면 돼요, 안 돼요? 이건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시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철두철미하게 따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뭔가 의식할 때 의식의 대상이 개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개념보다 더 높은 개념, 새로운 개념, 더 깊이 있는 개념이 있을 것이고 그 개념이 마지막 만나는 개념의 윗자리를 ‘이념’이라고 해요. 그럼 개념 끝이라고 하지 않고 이념이란 용어를 또 사용하느냐? 개념은 인간의 주체, 객체와 관련돼있지만 이념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게 육체가 되던, 신체가 되던, 키, 몸무게와 관계없이 이념은 그 사람의 정신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래서 개념보다 높은 것이 이념이 되는 겁니다. 이념이 끝이냐? 아니에요. 이념 다음에 마지막 끝이 나와요. ‘절대정신’이 나와요.

그래서 정반합이란 절대정신이 스스로 정이 되고 반이 되고 합이 되어서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내막을 절대정신이 표현한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그 세계가 어디 있느냐고 할 때 기존의 철학은 인간 세계에 따로 있어요. 그런데 헤겔은 그걸 철폐하고 그 절대정신의 세계가 너라는 겁니다.

이게 컵이잖아요. 기존의 철학에서는 이 컵이 그냥 컵이죠. 컵은 정신에 속합니까, 물체에 속합니까? 물체에 속하지요. 그러나 헤겔에게 이 컵은 정신에 속합니다. 컵이 깨지면 정신이 깨지는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여기서 헤겔은 성육신의 비밀을 봅니다. 하나님은 신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육신이 되었지요. 그러면 그 육신은 인간이고 육신 속의 정신만 하나님입니까? 육신, 정신 다 합해서 하나님이죠. 그 하나님의 뜻을 인간은 왜 안 받아드리느냐? 왜 인간들은 물질 따로, 정신 따로 나누느냐? 나누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질이 곧 정신이라는 겁니다.

물질와 정신으로 나누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뭐냐 하면, 사람이 숨을 거둘 때 육신은 놔두고 영혼은 떠난다는 말을 하지요. 보세요. 평소에 정신 따로, 육신 따로 대충 임시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숨이 끊어지니까 정신은 정신대로, 육신은 육신대로 흩어진다는 겁니다. 헤겔은 말하기를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주님께서 성육신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기존의 신들은 어떤 추상적인 신을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헤겔의 신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고 성육신한 신,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헤겔이 기존의 신학과 다른 점은, 기존 신학은 성육신 하나님이 따로 있고 또 하나님이 있는데 두 번째 위(치), 성자를 성육신이라 하는데 헤겔은 그렇게 보지 않고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만약에 다른 하나님을 상정하게 되면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해서 허무주의로 일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허무주의를 여러분 아시잖아요. 이 땅에 육신으로 죄만 짓는 것 무슨 소용 있나. 빨리 이 몸 떠나서 하늘나라 가야지. 그렇게 돼버리면 지금 주어진 컵도 정신이라 했는데 이 정신에 대해서 소홀해지잖아요. 대충 살아. 죽으면 그만이고. 내 영혼만 천국 합격하면 끝나는 것이지. 그게 헤겔 보기에 올바른 신앙생활이겠어요? 안 그러면 태만이겠습니까? 자기 인생에 대한 불충성이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아까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도덕적 의무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헤겔은 반대로 뒤집었다고 했지요. 의무가 인간을 위해서 있다고 했지요. 의무가 인간을 위해서 있다면 인간을 이러서는 되지 않지요. 의무고 뭐고 이 땅에서 내 몸 하나 힘들어 죽겠다. 주여, 빨리 떠나서 내 영혼 천국 가게 하소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의무를 스스로 내팽개친 게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자기 몸 편하게 하기 위한 용도로 이용을 해버리면 인간 자체가 주체를 위해서 신을 이용한 것밖에 안 되지요.

절대정신이라 할 때 헤겔은 이런 게 없어요. 칸트는 초월 주체 또는 초주체, 인간의 개개인을 떠나서 보편적인 주체가 따로 있다. 또는 집단주체.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국가가 되잖아요. 국가는 개인들, 가정들이 모여서 국가가 되었으니까 집단을 대표한 주체다.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우리는 일리 있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헤겔에서는 초월주체나 집단주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인간의 신체성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념이라 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개념이고 개념 위에 이념이 있고, 이념 위에 절대정신이죠. 그러면 내 신체가 있는 일상적인 소소한 일, 보통 일이 바로 절대정신의 일부로 가담이 돼있고 포함이 돼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성경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께 영광을 돌리라는 그 말이 맞잖아요. 6일 동안 일상적인 일하고 제7일에는 교회 가서 주의 일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일상적인 일 따로 있고 주의 일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게 헤겔의 주장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죄만 짓는 일이고, 죄만 지으면 안 되겠지. 주의 일로 영광 돌려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짓는 죄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주이 일이 된 거예요.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신체를 떠나서 따로 추상적인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추상이란 게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현실적인 일이지. 이게 헤겔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린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인생이 늘 실패하지 않느냐? 실패와 영광 돌리는 성공이 따로 있어야지. 헤겔은 실패하는 그게 영광이라는 겁니다. 실패가 성공이라는데. 왜 실패해야 되지요? 그것은 하나님도 실패했기 때문에. 이것을 헤겔은 하나님의 자기 슬픔이라고 했어요. 또는 하나님 자기 울음, 자기 비극. 이건 뭘 의미하는 겁니까? 바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기 통곡과 자기 슬픔과 자기 아픔을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픔에서 벗어날 때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아픔을 품어야 신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있어야 되지 십자가 고난을 벗어나 버리고 하나님과 화해나 합일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아픔과 함께 있을 때 그게 하나님 화해고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주인과 노예 있지요. 여러분 노예 되고 싶어요, 주인 되고 싶어요? 아까 상호변증법이라 했지요. 주인은 노예를 만나야 되고 노예는 주인을 만나야 돼요. 노예가 주인을 만나야 노예라는 개념이 나오고, 주인이 노예를 만나야 내가 주인이라는 개념을 만나는데 노예가 없으면 주인이란 개념이 안 생기지요. 그렇게 만나게 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주인은 노예를 만남으로써 노예 없이는 못 사는 주인이 되는 거죠. 그러면 주인이 아니고 졸지에 내가 노예에 질질 끌려 다니는 노예가 되는 겁니다. 상호변증법이니까.

이 말은 이런 거예요. 잘 산다고 까불지 마라. 잘 산다는 것은 누굴 전제로 해서 잘 사는 거예요? 못 사는 사람을 전제로 해서 잘 사는 거잖아요. 한국에서 돈 없어도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되면 기초생활비용을 누가 대줍니까? 국가에서 대주지요.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한테 대줍니까? 안 대주잖아요. 기초수급자가 아프리카 사람보다 잘 사는 것 맞지요. 그런데 왜 실패했다고 해요? 아직까지 더 큰 변증법을 못 만나서 그래요. 자기ㅏ 대한민국 개념으로 스톱하니까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겁니다. 정작 아프리카 가게 되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산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러면 아프리카가 끝이에요? 미국 가 보세요. 미국보다 못 살잖아요.

그렇게 따지다 보면 어디까지 가야 돼요? 성육신 앞에 설 때 모든 개념, 진리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겔은 생명이라 했어요. 생명, 진리, 이념, 개념, 절대정신은 다 신을 다양하게 표현해요. 생명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너희 육신 자신이 곧 진리요,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생명은 오래 영광스럽게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 생명은 날마다 쪼개지고 분열되고 깨지는 생명, 그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겁니다.

지금 강의 흐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헤겔의 입장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 개념 작용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존에서 실패했는데 예를 들어서 마르크스 같은 경우에 혁명에 실패했는데 노동자여, 궐기하라, 해서 혁명에 성공한 계기가 와서 드디어 한 편이 되어 공산사회가 유지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헤겔의 철학이 아니에요. 여기서 화해된다, 정반합이 된다는 말은, 인간은 당연히 실패해야 되고 실패한 것을 성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애초부터 늘 성공을 해온 거죠. 논리가.

그렇다면 헤겔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에 들어갑니다. 그게 시간 개념입니다. 시간 뒤에 붙는 게 있어요.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은 멈출 수가 없다. 헤겔은 이걸 개념으로 보지요. 그러면 최고 개념은 고정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념이 되니까. 이념 위에 절대정신이 있지요. 그럼 시간은 그 자체가 영원한 겁니다. 여기서 헤겔의 어려운 말이 뭐냐 하면, 시간이 영원하다는 말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은 아니라고 했거든요. 지속되기 때문에 시간은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고 시간 자체가 그냥 영원한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이, 방금 제가 말했잖아요. 지속이 아니고 그냥 시간은 영원합니다. 이걸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왜냐하면 시간이란 것은 그냥 흘러가고 날마다 바뀌는 의식을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만약에 달라지지 않는다면 시간은 측정이 없지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는데 거기서 오랫동안 있었던 여자 분이 나중에 구출된 뒤에 자기는 이틀 지났는지 알았는데 16일 지났어요. 이상하잖아요. 16일인데 왜 이틀로 생각할까요? 주위에 변화가 없으니까 고정된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고모가 있는데 어릴 때 조카를 봤어요. 고모의 주체 안에서는 어릴 때 본 조카 얼굴이 그대로 박혀있겠지요. 그런데 16년 지나서 조카를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요. “너, 왜 그렇게 늙었나?” “고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상호변증법이에요. 뭔 뜻입니까? 내 시간은 천천히 흘렀는데 네 시간은 왜 그렇게 빨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요. 물론 아인슈타인은 개념 대신 빛의 일정한 속도를 집어넣고 그걸 밝혀냈지요.

왜 조카를 늙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동안 자기가 장착하고 있던 정, 자기 주체 안에서 조카의 시간은 정지가 된 거죠. 이 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조카 빼놓고 자기가 평소에 만난 사람은 자기 따라 같이 흘러가니까 시간은 정상대로 흘러가는 줄 알았지요. 상대적으로 조카는 빨리 가고.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나중에 천국 갔을 때 기존의 시간적인 경험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처음이요 나중이죠. 마태복음 10장에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잖아요. 모세가 기원전 1440년, 엘리야가 900년이면 대략 600년 차이 난다고 봅시다. 600년 차이 날 때 모세가 엘리야에게 늙었다는 소리 안 하지요. 왜냐하면 천국은 영생이 있잖아요. 시간 개념이 영생에 자리 잡으면 흘렀다, 말았다가 이미 없어요. 바로 옆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바로 옆에 같이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늙었냐고 하면 말이 안 되지요. 늘 같이 있었던 거예요.

히브리서 12장 봅시다.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증인들이 뭡니까?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경주했던 선인들이죠. 올림픽에서 마라톤 끝날 때 주경기장으로 도로 돌아오잖아요. 주경기장에 누가 있습니까? 먼저 뛴 사람, 달릴 때 구경했던 관람객들, 중계 카메라도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노아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달렸지요. 누굴 보고 달렸습니까? 예수님 보고 달렸지요.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달렸지요. 더 나은 본향이 있으니까 예수님 바라보고 달렸잖아요.

그런데 이미 아브라함이 달릴 때 누가 있었습니까? 허다한 증인들이 힘내라, 힘. 보통 노아부터 시작해서 노아, 아벨, 구원받은 아담, 힘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 12장은 시간이 지상의 관점이 아니고 천국의 안목으로 바라볼 때 같은 경기장 트랙을 달리고 있는 거예요. 시간은 1초도 흐르지 않는 겁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고 있고 그 증인 중에 우리 주님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7장 적용시켜 봅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잖아요. 그때 갑자기 예수님 영광이 사라지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서 너희는 예수님의 말 들으라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 안 갔잖아요. 옆에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지요. 조금 전에 본 것은 뭡니까? 예수님이 해 같이 빛났잖아요. 빛나니까 하나님이고 안 빛나면 육신이고 인간이고 그렇습니까? 빛나지 않은 주님도 하나님 맞지요. 지금 헤겔이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신으로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아닌 게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교회에서 나오는 모든 용어를 헤겔은 철학적 용어로 다 바꿨다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하는가? 교회 가는 사람들이 일상 따로 교회 가서 은혜 받겠다고 따로 노니까 이것은 일상에 있는 하나님 뜻을 그들이 파악을 못하고 자기 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헤겔은 철학 작업을 하면서 네 일이 하나님 일 정도가 아니고 네가 바로 하나님에 속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거예요. 제가 지금 헤겔 철학의 막바지를 이야기합니다.

헤겔은 어디까지 나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아니 생성했다. 따라서 뭘 거부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거부해요. 왜? 자연이 곧 신이기 때문에. 이건 스피노자 이론과 똑같아요. 그리고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신 안에서 양태, 모양새에 불과한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헤겔은 말하기를 이미 하나님이 자연과 화해를 했다는 거예요. 자연과 화해했다는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연에 속하는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그걸로 끝. 이미 하나님은 자연과 화해했어요.

하나님은 유가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고 자연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가장 하나님 됨은 자연세계와 더불어 있고 여기에 양태가 있는 겁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원리를 거기다 퍼뜨리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닌가, 라고 따지겠지요. 하나님은 네 인격 속에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이야기하면 끝나지요. 우리가 인격이 있잖아요. 우리 인격 안에 하나님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격적인 것 맞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 교회에서 말하는 인격적이라는 것 다 되잖아요.

이게 바로 헤겔 철학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자연도 하나님 세계고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양태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증거는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자, 이렇게 해서 헤겔의 종교철학, 종교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진짜 철학이죠. 그것 말고 헤겔의 국가철학도 있는데 뭐냐? 신의 개념 문제를 키워나가는 것. 그래서 역사는 늘 실패하는데 실패 자체가 절대정신의 성공이다. 그게 화해라는 사실. 역사로 그렇게 설명하고 신 앞에서 모든 걸 설명이 가능한 거죠. 웅대한 헤겔 철학이 그렇게 정리되는 겁니다.

남은 게 있어요. 문제점? 복음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언급해야 되겠지요. 문제점을 이야기해보세요. 이렇게 될 때 뭔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게 아니고 창조해버리면 피조세계와 창조세계가 따로 구분되니까 그건 헤겔로서는 용납 못하겠다는 겁니다. 피조세계 자체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 세계 정도가 아니고 아예 하나님이다. 스피노자와 같이.

뭐가 문제입니까? 들었으니까 복음적으로 문제점을 집어내야지요. 헤겔 철학에 뭐가 문제지요? 헤겔이 언약을 몰라요. 늘 강의할 때마다 마지막 문제점할 때 여러분 감 못 잡는 것 같은데, 헤겔이 언약을 모릅니다. 여호와는 어떤 분입니까? 약속을 앞장세우죠. 그 약속이 뭐로 구성돼있어요? 창세기 3장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돼있지요. 그러면 헤겔은 아담에 속하지요. 맞지요? 아담은 이미 범죄한 아담이죠. 범죄한 아담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뱀의 후손부터 출발하잖아요.

이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세례 받을 때 이미 사탄이 지배하고 있고 세상 권세자가 지배하고 있지요. 에베소서 2장 2절, 에베소서 끝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요 공중 권세 잡은 자라고 했지요.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4절, 하나님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세상 신이 못 믿게 만들었다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전부가 짐승 속에 있다고 했지요. 세상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마귀에 종노릇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지요. 특히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우리가 그때는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나오지요.

지금 출발점이 어딥니까?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뱀의 후손에 예속돼 있잖아요. 후손이란 말이 끝에 나온다는 말인데 사실은 헤겔에 의하면 하늘나라 안목으로는 처음부터 있었던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이미 헤겔은 아담에 속했습니다. 그러면 헤겔은 아담의 일부지요. 로마서 5장에 의해서. 그러면 헤겔의 모든 생각은 사탄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헤겔은 뭘 모르느냐? 사탄이란 존재를 배제하고 시작한 거예요. 전부 다.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제가 늘 묻는 게 있어요. 죄인을 부른다고 할 때 그 죄를 우리가 안다 했어요, 모른다 했어요? 몰라요.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써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율법을 가르칠 때 본인은 죄를 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다윗이 죄를 안 순간은 성신이 임해서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을 때 비로소 죄를 알지요. 죄라는 것은 성신이 임해야 죄를 알지요. 우리가 죄를 아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알지요. 성령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이 와야 죄를 아는 거예요. 본인이 아는 죄는 선악과 체제에서 아는 죄기 때문에 죄를 모르는 겁니다.

지금 헤겔의 모든 철학은 우리는 실패해야 된다. 말은 맞지요. 그러나 실패 자체가 성공이 라는 말을 했지만 뭘 몰라요? 헤겔도 지젝도 라캉도 마찬가지지만 본인이 하는 그 이야기가 사탄의 이야기고 죄인인 것을 본인이 인정할 수 없는 겁니다. 물론 모든 신학도 죄에요. 뭘 알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헤겔이 셸링을 비판하면서, 셸링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술적인 기질로 자연을 신을 직접 알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그럴 때 헤겔이 이런 소리했어요. 밤 되면 모든 소가 검다고 했습니다. 또 헤겔이 어느 정도 뛰어나냐 하면, 진리는 마지막 때 온다. 미네르바 부엉이는 저녁에 난다는 말이 있어요. 하나님을 모르면 모든 것이 똑같은 의미라는 말이었어요.

그러나 헤겔이 그 말을 하면서도 우리가 출발을 사탄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걸 몰랐어요. 십자가를 알게 되면 성육신 말고, 하나님이 육신 된 것 말고 십자가 사건 안에서 우리는 죄인이어야 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야 돼요. 그래서 정말 헤겔이 성령을 받으면 뭐라고 해야 되느냐 하면, 내 철학도 아무것도 아니고 죄고, 오직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와야 돼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죽은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그게 나와야 돼요.

신이 나오면 안 돼요. 성부, 성자, 성령이 나오면 안 되고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제 말은. 삼위일체가 복음입니까? 아니지요. 십자가가 복음이지 삼위일체가 복음이 아닙니다. 지금 헤겔은 가장 복음적으로 보이는 삼위일체를 언급한 거예요. 결국은. 십자가 능력이 아니고.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능력을 위해서 십자가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헤겔 책을 같이 공부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어디까지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같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아이디어가 우리 속에 있음을 우리가 자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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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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