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12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20150512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이름 : 한윤범(IP:14.39.134.87)
20150512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헤겔입니다. 헤겔은 1770~1831까지 산 사람인데요 헤겔이란 사람이 철학뿐만 아니고 신학에서도 상당히 유명하지요. 왜 유명하냐 하면 설교에 나오는 용어들,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로 교회에서 무슨 마술적이고 신비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활용하니까 기독교 용어, 성경 용어,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전부 다 그것 말고 철학적인 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에 관한 용어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거기다가 부활, 십자가, 언약, 그러한 용어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순진한 교인들은 그 용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 가지만 알고 있는 우리는 천국 간다. 이렇게 쉽게 정리할 오류가 많이 있겠지요. 그렇잖아요. 기독교 용어를 쓰는 그걸로 마치 영적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착각한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했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냈고, 하나님과 아들, 이런 관계를 철학적 용어로 다 바꾸자는 겁니다. 바꾼다는 말은 기존에 알고 있던 부활, 창조 등 이런 용어를 버리면 헤겔이 알고 있는 철학적 용어로 바꾸면 그 바꾸어진 용어를 추가적으로 알아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생기겠지요.
예를 들어서 기기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난 뒤에 스마트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차이가 있잖아요. 스마트폰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해당되는 단어들이 나오잖아요. 기기 명칭들이 나오고. 그러면 기존에 휴대폰의 명칭들은 버리고 스마트폰에 있는 앱이라든지, 앱을 깔아라. 컴퓨터 모르는 할머니들에게 쓰레기통 이야기하면 쓰레기통 있는 줄 알고, 바이러스 하면 안에 벌레가 기어가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쓰레기통이란 용어를 기존의 쓰레기통에서 컴퓨터에 집어넣고, 바이러스라는 의학용어를 컴퓨터에 집어넣으니까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용어가 그 의미라고 오해한단 말이죠. 컴퓨터를 하다보면 쓰레기통이 두 개 돼버렸죠. 기존에 쓰레기 비우는 쓰레기통과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쓰레기통과 두 개 돼버렸잖아요.
헤겔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기독교용어 버리고 교회용어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또 새로운 용어를 배워야 되느냐는 것에 대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으로 신학을 대신하는 겁니다. 헤겔은 그걸 종교철학이라고 해요. 그 종교철학은 기존의 신학을 대체하자는 겁니다.
왜 대체해야 되는가? 일반교인들이 신학용어를 붙들고 있으면 마치 구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 뜻을 아는 것처럼 자꾸 우기니까 전부 이걸 제거하기 위해서 종교철학이라고 철학이란 단어를 붙인 겁니다. 종교철학이나 신학이나 똑같은 게 아니냐? 똑같은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종교철학이 되면 일상의 생활에서 나온 것이 철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반영이 되는 거죠. 그런데 신학이 돼버리면 일상 생활하다가 일요일에 교회 가서 영적 세계, 그 안에만 통용되죠. 이 안에만 통용되니까 오해 정도가 아니라 착각할 가능성이 많지요.
헤겔 생각에 하나님이란 교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교회만 하나님 뜻이 있다고 주장하니까 그게 참을 수 없는 거죠. 일상생활에 하나님 뜻 없습니까? 다 있잖아요. 그런데 교회 가면 일상생활 따로, 교회 생활 따로, 둘이 합치면 구원도 되고 다 챙길 수 있다고 하니까 헤겔로서는 화가 날 문제란 말이죠.
그래서 신학용어를 버리고 종교철학용어를 하게 되면 일상생활에 나오는 신의 원칙과 원리가 두루 퍼져있습니다. 그 근거는 여러분 다 알다시피 창조한 세계 속에 하나님 뜻이 다 들어있지요. 그러면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 뜻을 찾아낼 생각을 합니까? 안 하지요. 일상은 내 일상이니까. 남의 일상은 모르니까. 트럭 모는 걸 어떻게 압니까? 남의 일상은 모르고 내 것만 아니고. 그리고 그 외에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교회에서 알려주겠지. 그래서 교회에 가보니까 일상과 관계없이 성경용어로 짜깁기해서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복 받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완전히 일상 속의 하나님 뜻을 도회시한 결과를 낳은 거예요.
방금 창조란 말을 했는데 헤겔은 이것도 교회에 나온 용어라고 해서 없애버립니다. 헤겔은 창조를 생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조와 생성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여기 누가 컵을 만들었으니까 있을 것 아닙니까? 만들어져 있으니까 스톱 된 거예요. 창조란 의미는 만들어졌다, 끝. 이런 뉘앙스가 강하죠. 그런데 생성은 뭡니까? 만들어진 것으로 끝이 아니고 이게 변화가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가 강하잖아요. 어느 것이 일상적으로 더 의미가 풍부해요? 창조보다도 생성이 풍부하지요.
나는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끝. 그런데 하나님/신이 생성한다면, 나는 어떻게 신의 뜻을 알까? 매일같이 어떤 변화를 보여야 될까? 매일같이 얼마나 내가 많이 달라질까? 달라짐 조차도 하나님 손길 안에 있다. 이게 얼마나 풍부하냐 말이죠. 하나님의 현재성이. 그런데 그냥 창조라고 하니까 “만들어주신 것, 고맙습니다. 앞으로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그만큼 삭감이 되지요. 별로 좋지 않은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처럼 헤겔은 철학적으로 그동안 교회에서 독점적으로 자기만 안다는 신의 비밀은 독점적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철학으로 얼마든지 바꿔치기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헤겔은 철학뿐만 아니고 신학분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힌트와 참고 될 만한 이론들을 크게 내놨어요.
헤겔 다음에 포이에르 바하를 할 건데 그 이후에 마르크스가 나오지요. 이런 사람들이 헤겔 철학에서 배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헤겔이 이 세상에 대해서 신과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잘 정립했기 때문에 실재와 실제 움직이는 생성되는 현실에 대해서 헤겔의 이론을 도외시할 수 없는 처지란 말이죠. 도대체 헤겔이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했다고 그 후학들이 헤겔 범위에서 못 벗어나는가? 지금도 헤겔 범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뭘 그리 완벽하게 이야기했는가?
완벽한 이론을 하면서 헤겔이 뭘 공격했느냐 하면, 칸트를 공격했어요.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이 자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 인간이 들어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연을 바라본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틀린 이야기 아니죠.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연 전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한테 의미가 있느냐? 그 선에서 머물러야 된다는 겁니다. 상당히 겸손하지요. 우리가 원숭이의 심정을 압니까? 알 필요 없잖아요.
칸트는 이걸 주어진 모든 인상들이 그냥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것을 구성하는 경험 이전의 경험을 받아들이면서 구성하는 틀이 우리한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걸 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의식하면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조립해요. 조립해야 활용하고 자기한테 이익이냐, 불이익이냐, 따질 수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소나기가 오는데 소나기는 누가 만들었지, 어떻게 만들었지, 그걸 연구하는 게 아니고 소나기 오면 우산 찾으면 되는 거예요. 소나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그 연구는 따로 하면 되고 보통 사람들은 소나기 안 맞으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보다 크기 때문에. 그걸 생물학에서 적응이라 하는데 적응하면 되는 거예요. “소나기가 왔지만 나는 우산 썼다. 나는 다행이다.” 나는 행복하다는 말 아닙니까.
헤겔은 시비 겁니다. 너 혼자 행복하면 신의 뜻이냐고 물어요. 어떻습니까? 지금도 김정은은 혼자 행복한데. 김정은 시찰할 때 살이 쪄서 돌아다니고 그 앞에 군인들과 농민들은 야위어있고. 김정은 행복하지요. 지가 최고자니까. 칸트는 진짜 자연의 내막은 모른다. 칸트는 물자체는 모른다.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이성으론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채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겸손하게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헤겔은 그걸 모른다면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모른 것밖에 안 된다.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오호, 대단하지요. 칸트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헤겔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알 수 있느냐 하면, 유한자는 그냥 생긴 게 아니고 무한자에 의해서 유한자가 창조됐지요. 그러면 유한자 속에 무한자의 뜻이 있지요. 있는 걸 포기하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교회 가는 사람들이 일상생활하다 주의 말씀을 보게 되면 칸트적 의식으로 교회 온 셈이 되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했던 것은 내가 적응해서 필요한 진리만 진리라고 우기고, 오늘도 비 오는데 비 안 맞게 하시니 주의 뜻입니다. 이걸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주의 뜻이라고 간주하고 그 다음에 교회 가서는 전체적인 뜻을 이야기한다는데 이미 자기가 교회 오기 전에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뜻이라는 게 있잖아요. 비 오는데 우산 준비해서 다행스럽다. 이미 고수한 게 있지요. 플러스 교회 가서 하나님 뜻을 알아버리면 둘이 합쳐지잖아요. 칸트식인데 이런 식으로 일상의 것은 따로 챙기고, 교회 가서는 성경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따로 챙기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 뜻을 아는 것,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성경 계시의 힘을 빌려서 추가해서 결합하면 된다는 거죠.
칸트가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할 때 물론 칸트가 이렇게 분리한 건 아니에요. 일상생활 가운데서 성경 속에 있는 전체적인 것을 늘 삽입해야 된다는 것도 이야기했어요. 그게 도덕률이라는 겁니다. 지난번에 했는데 기억나십니까? 이유도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 내 이익을 위해서 살인하면 안 되고 살인하지 말라는 자체가 내 마음 속에 하나님 계시의 별처럼 양심이란 이름으로 있기에 도덕은 무조건 의무로써 주어져야 된다고 본 거예요.
헤겔은 그게 아니에요. 의무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안식일 법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을 위해서 안식일 법이 있다는 마태복음 12장처럼 헤겔은 인간을 위해서 의무가 있지 의무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의무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헤겔 당신 말대로라면 신의 뜻, 하나님 뜻 하다가 이기주의 아니냐? 지 필요한대로 의무를 행하거나 마음대로 하면 되겠네?
여기서부터 헤겔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는데 헤겔은 그런 뜻이 아니고 인간이란 의무를 행하기 전부터 무한의 원리원칙이 유한되는 인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인간 속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칸트는 들어와 있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예요.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신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것을 줘서 신에게 영광 돌리도록 했다는 게 칸트에요. 칸트 이야기 들어보니까 기존 교회와 똑같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왜 주셨는가? 바른 착한 일 해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줬다는 기존 교회와 똑같잖아요. 칸트식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상황에 유리하냐, 불리하냐, 따지지 말고 내 속에서 외치고 있는 신의 법을 우리가 이뤄줄 때만 신께 더욱 더 영광이 된다는 거죠. 복음에선 안 듣던 소리지만 기독교방송에서 많이 듣는 소리입니다. 전에는 성령이 없어서 말씀 못 지켰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자. 이게 바리새인이거든요. 예수님을 죽였던 자의 사상인데 마귀 사상이죠. 이건 개혁주의 이름으로 더 이상 하자가 없는 완벽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칸트에요.
그런데 헤겔은 말하기를 그런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하니까 감히 칸트에 대들다니 도대체 뭘 믿고 칸트의 완벽한 주장, 하나님의 법이 우리 안에 있고 양심대로 사는 것이 신의 뜻이고 영광이다. 이 완벽함을 네가 뭘 믿고 뒤엎어버리느냐? 헤겔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됐다는 거예요. 이거는 기독교 역사상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되었다는 것.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 되었다는 말은, 그 인간이 다시 하나님 되기 위한 중간 절차에 불과하잖아요. 삼위일체가 뭡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보냈다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승천하셔서 도로 하나님 영광을 차지했지요. 그게 삼위일체 기독교교리잖아요. 잠시 고생했다가 다시 영광 받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헤겔은 그걸 철폐해버린 겁니다. 하나님(무한자)이 유한자 된 거예요. 그 다음에 그 무한자를 하나님께서는 벗어버린 것이 아니고 유한자를 품음으로써 제대로 된 하나님 됐다는 겁니다. 진짜 이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기발한 이야기에요.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도 잘 못 들었을 거예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만드신 속에 하나님 옆에 성자 예수님, 아들 예수님 계신데 이 땅에 보내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 잠시 고생 좀 시키고 십자가 사흘 만에 부활 시켜서 도로 하나님 자리에 앉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인데 그렇게 돼버리면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 뜻과는 전혀 별개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누굴 보내서 사람 만들고 사람 된 아들을 회수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는 관람객, 구경꾼이 돼요. 그 취지가 지금 우리 속에 안 들어온 게 돼요.
하나의 예를 들면, 집이 있는데 밤 열두 시 쯤 되서 앞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싸워서 할아버지가 파자마 차림으로 나왔잖아요. 한 5분 뒤에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창문으로 보고 있는 우리한테 영향이 있습니까? 그 집 싸움이지요. 영향 없지요. 그게 지금까지의 기독교라는 거예요. 헤겔이.
그럼 헤겔의 뜻은 뭐냐? 파자마 바람으로 나왔던 영감이 맞은편에 있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몽둥이로 나를 개 패듯이 패서 기절시켜놓고 파자마를 나한테 입혀놨어요. 깨어보니까 영감이 옆에 있고 영감이 입던 파자마가 나한테 입혀져 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 뜻이에요. 헤겔이 말하는. 이게 바로 유한자 속에 있는 무한자 뜻이에요. 이게 바로 헤겔이 말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의미에요. 우리는 칸트처럼 십자가고 뭐고 근사한 하나님에 대해서 평소에 빼먹을 생각만 했어요. 이용할 생각만 했지요. 칸트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뭘 알아. 그저 하나님 주신 은혜대로 필요한 것만 챙기면 되지. 우린 늘 겸손해야 돼. 이게 칸트 생각이에요. 헤겔 보기에는 얍삽한 생각이에요.
헤겔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혼자 살면서 심심해서 개를 키웁니다. 내가 개를 키우고 싶다고 할 때 개가 대상이 되잖아요. 내가 개를 키우니까 개는 내 소유가 되잖아요. 이게 칸트적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개가 배고플 때는 누가 사료를 줍니까? 내가 줘야 되지요.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에요? 이게 헤겔의 유명한 주인과 노예 사상입니다.
이걸 적자라 하고 이걸 대자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내가 개가 없으면 외로워서 못 사는데? 내가 개에 종속 되었어. 개란 존재에 내가 개를 키우면서. 그동안 칸트는, 개는 무엇이냐? 개는 인간과 다른 어떤 포유류, 동물, 이렇게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니까 비현실적인데 헤겔은 그러지 말고 내가 개를 좋아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거예요. 이론이 아니고 욕망이에요. 이론은 내가 이론을 세우잖아요. 욕망은 이론 세우지 말라. 만남 자체가 욕망의 불꽃이 튀잖아요. 개는 나를 탐하고 나는 개를 탐하고.
어떤 여자가 굉장히 사랑스럽고 그 여자를 못 보면 미칠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그 여자는 나에게 뭡니까? 내 욕망의 대상이지요. 욕망의 대상 같으면 내가 1이고 그 여자가 두 번째가 돼야 될 텐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밤에 잠을 못 잔다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그 여자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 여자가 언제부턴가 갑이 되고 나는 그 여자를 못 보면 미칠 정도로 을이 된 거예요.
그 여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 여자를 사랑해서 미치고 환장한 게 아니고 길 가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데 그 여자를 잊지를 못했을 때 그걸 드라마틱하게 꾸민다면 그 여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반해버리니까 욕망이란 이성의 논리가 아닙니다. 이건 그냥 좋다는 것이지, 왜 좋은데 따지면 안 돼요. 그 여자가 왜 좋은데? 따지면 욕망이 아니죠. 그건 지가 이런 여자가 왔으면 좋겠다고 미리 계획한 건 이성이고 욕망은 따지는 걸 넘어선 일이라니까.
그 여자를 따라가 보니까 이미 결혼한 여자고 밤에 그 여자 남편이 퇴근했는데 보니까 자기 중학교 동창생. 드라마틱하게 본다면. 그 다음부터 어떤 욕망이 낫습니까? 저 동창생 죽어라. 과부 되라. 그러면 내 아내와 이혼하고 그 여자와 살겠다. 미쳤어.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이런 생각하면 안 돼. 안 된다는 건 칸트 이야기라니까. 욕망은 도덕이야기 아니에요. 헤겔에겐 도덕 자체가 악이에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재산을 탐내면 안 된다고 있지요. 십계명에 나온 말씀 아닙니까. 이웃의 재산이나 재물이나 여자를 탐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프루동이란 사람이 말했지요. 재산 자체가 도둑질이다. 19세기 사회주의자거든요. 재산 형성과정에서 도둑질이 안 들어가는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아까 목사님 이야기했지만 제일 힘든 게 뭐냐? 남의 호주머니에서 가져오는 게 제일 힘들다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