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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성전과 절기 150513우리교회에스겔

성전과 절기 150513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성전과 절기(에스겔 45:21-25)

이근호

15-05-13 21:26

성전과 절기

2015년 5월 13일 본문 말씀: 에스겔 45:21-25

(45:21) 정월 십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 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45:22) 그 날에 왕은 자기와 이 땅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45:23) 또 절기 칠 일 동안에는 그가 나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를 갖추되 곧 칠 일 동안에 매일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이며 또 매일 수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며

(45:24)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45:25) 칠월 십오일 절기 칠 일 동안에도 이대로 행하여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절기나 제사를 요구하신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해하는 신은 그저 인간의 성의와 정성만 극진하다면 통할 것 같다는 생각들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인간이 지어낸 추상적 이미지로 채워진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어른 모시듯이 신도 그런 식으로 모시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 섬기기에는 ‘약속’이라는 것이 빠져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사람들하고 약속하는 그런 내용을 담아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드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내세우는 그런 약속은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바는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그 약속의 내용만 받으십니다. 인간이 지어낸 약속은 거부하시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약속은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수긍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하나님과 이런 사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고 해서 성경대로 제사 드린다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와 성전은 약속을 받아 쥔 인간들의 반복되는 실패와 오해와 범죄를 통해서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은 일체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그것도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 피가 곧 약속입니다.이 약속 속에서 인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을 수긍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 속에서는 ‘인간이 원하는 구원은 다 거짓이다’는 사실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요청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천국이란 하나님만이 제시할 수 있는 그 약속이 하나님만이 성취할 수 있는 능력으로 달성된 상태를 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기대한 그런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접했던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홍해를 건너왔는데 그 홍해건넘의 요건은 바로 ‘어린양의 피’를 출입구에 발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약속이 절기 안에서 정착이 되면 매년 반복됩니다. 유월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절기는 유월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맥추절도 있고 수장절, 곧 초막절도 있습니다. 이 절기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효력이 수확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드린 절기로 인하여 약속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 담고 있는 본질에 의해서 준비된 복을 받는 민족입니다.

약속의 땅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약속, 그 자체가 담고 있는 내용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 드러난 기능이 절기를 통해서 1년 내내 순환됩니다. 곧 순환되는 시간이 약속의 땅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환되는 시간의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집니까?

그것이 바로 절기입니다. 절기의 주된 활동은 제사입니다. 곧 집단적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통해서 생명을 본질을 보여주시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 이스라엘이 이 죽음에 합세해야 합니다. 죽음에 합세한다는 말은 본인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행함이 부정당한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제사 드림’으로 복 받거나, ‘절기 지킴’으로 복 받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제사드림과 절기 지킴의 수행자가 스스로 자신의 기능을 제한된 공간 내에서 반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절기에는 ‘제물의 죽음’이 주된 내용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어라’가 아니라 ‘죽은 자는 더 이상 살거나 구원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죽음을 확실히하는 식으로 제사는 진행됩니다. 이는 약속 달성에 있어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견이나 의사를 반영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스케줄에 따라 정기적으로 절기를 지키기만 하면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절기를 통해서 약속과 구원의 능력을 내놓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하나님의 계명과 제사법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계명은 인간의 위반을 유도하고 제사법은 ‘흠없는 피’를 생산해냅니다. 그래서 죄+피=약속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절기란 장차 오실 구원자의 메시야적 기능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곧 메시야의 발자국이며 그 발자국에 의해서 ‘약속의 땅’이라는 공간이 조성되는 겁니다.

이 약속의 땅에서 인간들이 이미 메시야의 죽음에 합류되어 있기에 자신의 공로나 노동의 가치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해하는 공간이나 시간은 제거되고 어떤 인물의 해내신 일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곧 이 세상이 죄로 인하여 당연히 썩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생명이란 바로 이 흠없는 죽음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썩어짐을 조성하는 그 힘의 저촉을 받고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나의 생명의 연장으로서 영생이 아닌 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원히 사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다시 사신 죽음의 생명의 힘으로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시작도 끝이 없습니다. 그저 공간만 있을 뿐입니다. 약속된 공간입니다. 기존의 성전은 우상으로 인하여 댐이 터지듯이 터져버리고 그 외곽을 포진된 진짜 성전이 구약의 성전을 모형으로 돌려세우고 나타납니다. 바로 이 성전이 썩어짐과 생명을 같이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따라서 이런 성도가 절기를 지켜서는 아니되는 이유는 복음을 헛되이 하기 때문입니다.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라디아서 4:10-1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이는 작업마저 생명의 힘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5-15 07:16

138강-에스겔 45장 21-25절(성전과 절기)1505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5장 21절-25절입니다. 구약성경 122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5:21-25

“정월 십 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그 날에 왕은 자기와 이 땅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또 절기 칠일 동안에는 그가 나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를 갖추되 곧 칠일 동안에 매일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이며 또 매일 수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칠월 십 오일 절기 칠일 동안에도 이대로 행하여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찌니라.”

하나님 앞에서 왕이 주도해서 제사를 드리는 그곳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것들을 원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제사 같은 것을 원하시는가? 제사날도 정월 14일로 정해져 있고, 그 기간도 7일로 정해져 있고, 25절에 보면 7월 15일 절기에도 7일 동안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계시는 그 곳이 약속된 장소입니다. 약속된 장소라 하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고 있는 그 세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약속을 자기 쪽에서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힘드니까 자기가 영원토록 편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세계를 자꾸 그리워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계는 뭐가 빠져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빠져버렸어요. 약속이 빠져버리고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는? 내가 영원토록 호강하는 것, 영원토록 내가 편하게 사는 그런 것이 주 내용이 되어서 사람들은 그걸 천국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나라’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인간이 상상한 나라이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거기에 담겨 있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죽어서 가는 그 세계는 천국이 아니란 말인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이 아니면 뭐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 그려 넣은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풍선이 부풀면, 거기에 그려 넣은 그림도 같이 커지잖아요. 자기의 욕망이 커지는 것이 흔히들 말하는 천국, 극락, 하나님 나라, 좋은 명칭은 거기에 다 가져다 붙인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정리합시다. 천국은 우리가 기대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을 제시하고 그 약속을 하나님의 공로로, 순수하게 그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한 세계가 바로 약속된 나라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잔뜩 기대하는,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 죽어서 좋은데 가야겠는데.’라는 그 기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가?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추방시키고 추방해서 나왔던 그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지금 점잖게 앉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조상부터 추방이 된 거예요. 추방될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추방될 만한 그 이유를 아담과 하와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후손대대로 전수가 되는 겁니다.

스스로 보기에 사람 괜찮아 보이지만 하나님 보기에는 마땅히 하나님나라에서, 생명나무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성질과 속성을 지니고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게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 취지를 듬뿍 안고 앉아 있으면서 이 땅에 평생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니 우리의 간절한 희망을 하나님께 아뢰지요. “하나님이여,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 죽어서는 좋은데 가게 해 주세요.” 심지어 “남들은 안 가도 저는 꼭 들어가게 해주세요.”라는 특혜를 요구하게 되지요.

아담도 추방된 입장, 같이 추방된 입장에서 우리가 뭘 근거로 해서 다시 원대복귀하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근거가 뭐가 있는가? 우리는 이렇게 하지요. “고생 되게 했잖아요. 고생 심하게 했잖아요.”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고생하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마땅히 해야 해요. 마땅히 해야 됩니다. 애가 공부를 못해서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네가 공부를 못했으니 맞아라.” 하니까 애가 자기 공부 못하는 것은 인정안하고 맞는 것이 당장 아프니까 “엄마! 때리지 마세요.” 그렇게 나온 거예요.

엄마는 때릴 만 해서 때리는데 애는 아픈 것이 문제지 공부 못한 것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가?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이나? 왜 이렇게 나는 아프냐?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한가?’ 자꾸 그것만 하나님 앞에 닦달 내면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보상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원상회복이 되겠습니까?” 이것만 자꾸 하지 왜 내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야 되는지,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전혀 관심도 없고 마음에 거기에 쏠리지를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왜 고생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 아들마저 이 땅에 고생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남이 가기 싫어하는 저주, 부끄러운 곳, 십자가에 죽기 까지 갔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거기를 혼자 갔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죄인이 되었거든요.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고 난 뒤에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은 당연하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게 죄인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너희들은 당연한 것을 인정할 생각은 안하고 힘드니까 자꾸 죽어서 보상받겠다고 하나님께 아부하고 ‘뭘 열심히 어떻게 해드리면 다시 좋은데 가겠습니까?’라고 자기구원문제에 대해서 신경 쓰는데 왜 구원이 안 되는가를 먼저 따지는 것이 순서상 옳은 것”이 아닐까요? 왜 구원이 안 되느냐는 말이지요.

그리고 구원이라는 말의 뉘앙스 자체가 나쁜 곳 어디선가 건져내야 된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구출, 구원, 건져냄.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험한 곳에 태어나게 했는가? 그 취지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봐야 되잖아요. 그저 힘드니까 건져달라고 요청할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이것이 왜 하나님의 조치에 합당한 일인가? 내가 어떤 존재이기에 이마에 땀 흘리면서 일하다가 죽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당해야 하고 사탄에게 시달려야 하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그렇게 문제가 되기에 그런 힘든 생을 살아야 되는가?’

바로 그 사실, ‘어떻게 구원 받아서 천국가나?’ 그 내용 말고, 우리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야 되고 저주 받아야 되고 결국 죽어야 된다는 그 내용까지 약속이라는 내용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에 포함된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약속을 가져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우리를 가지고, 약속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우리를 뽑아서……, 약속이 그만큼 능력이 있습니다, 약속, 말씀의 완성을 약속이라 합니다, 말씀을 완성하게 되면 능력이 나오고 그 나온 능력이 하나님의 원하는 자들을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데려다가 약속의 나라에 도착하게 되면 그곳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으니 책임져라.” 이런 식으로 윽박지르지 마시고요.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그 약속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를 봐야 되지요. 이 약속은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우리보다 먼저 선배들한테 줬습니다. 그 선배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줬습니다. 물론 그 전에 노아 때 줬고 아브라함 때 줬고, 이삭 때 줬고, 야곱 때 주었는데 집단적으로 준 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처음으로 약속이란 것을 줬어요.

그 약속을 헤쳐 보니 두 가지가 들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십계명이 들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희생제물의 피 흘림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 약속, 그 약속이 함께 들어 있는 그것을 언약상자, 언약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그걸 절기라 하는데요, 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절기를 지키는데 7월 10일, 대 제사장이 유일하게 그날만 어디에 들어가느냐? 대제사장이 언약궤 있는 곳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뭘 하느냐? 잘 있는가 하고 그냥 구경 차 들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들어 있고 그 십계명 위에다 제단에서 잡은 그 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송아지, 염소 피를 들고 가는데 들고 가서 그 상자위에 피를 뿌립니다. 피를 뿌리면 바깥에서 그 제사장 하는 일이 마감되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상관없이 다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게 바로 약속이 약속대로 실현되었을 때 주어지는 효과입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는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선배들 보고 이야기를 했지요. 그 선배들이 이스라엘이라고 했지요. 대한민국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시내산 밑에서 약속을 받았는데 그러한 약속을 받을 만 했던 사람들이 어떤 조건을 갖추었는가? 그들이 광야에 오기 전에 홍해를 건너왔던 사람이어야 하는데 홍해를 건너야 될 조건이 뭐냐 하면, 그에 앞서서 어린양을 잡아서 자기출입구, 문설주와 문지방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 어린양은 흠이 있는 양이 아니에요. 흠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죽을 이유가 없어요. 죽을 이유도 없는데 피를 흘리고 백성들은 문지방과 문설주에 그 피를 발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피를 바르면서 생각했겠지요. ‘그 집에 있는 양 한 마리 잡아서 피 흘려서 그 피를 출입구에 바른다고 해서 이게 하나님한테, 그리고 우리한테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피 냄새는 나는데 그게 무슨 효과가 있겠어요? 집에 가서 한 번 해볼래요? 여러분이 닭이나 개를 잡아서 한 번 발라보세요. 무슨 효과가 있겠어요? 파리나 끓고 온 동네에 냄새나 나겠지요. 동네에서 냄새난다고 민원 들어올 거예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잡아서 그 피를 발라보든지. 그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효과를 결정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어린양 잡아서 피 발랐더니 그 어린양의 피가 없는 집과 피가 발린 집을 구별하시는데 그렇게 차등하시는 그 차등과 구별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살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결정하는가? 하나님이 결정한 거예요. 하나님이 피 없는 곳은 그냥 죽이고 피 있는 쪽은 그냥 넘어간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정리해야 될 것이 있어요. 뭐냐? 내가 만들어 낸, 내가 끄집어낸 약속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것 분명히 해야 돼요. 이것은 평생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이것은 절대로 유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이만한 헌금이라면 받으시겠습니까? 이만한 교회 열심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찬양을 1절만 하는데 나는 4절까지 다 불렀으니 영광이 되겠지요? 이만큼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 영광 받으시겠지요?” 이런 식으로 내가 납득이 되는, 내가 이해되는, 내가 행할 수 있는 약속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아이디어는 인간들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인간의 아이디어는 그냥 집의 어른이나 옆 사람에게 하듯이 ‘성의를 표시하면 받겠지.’ 하는 식의 아이디어인데 그런 성의표시는 전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오늘날도 양 잡아서 피 바르면 되겠네요?” 양 잡아봐야 피 냄새만 난다니까요? 냄새나고 파리 끓는다고 동네 민원 들어와요.

그 때는 그 때였습니다. 약속은 그대로 스톱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점점 더 형태가 달라져요. 점점 달라진다는 말은 어떻게 달라진다는 말인가? 구체적으로 달라져요. ‘이 양이 아니야. 이 양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야.’ 그 양이 구체적으로 바뀌는데 구체적으로 바뀔 때 여기서 사건이 하나씩 툭툭 불거지고 터져 나오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점점 더 전진해 나갑니다. 구체적으로 전진해 나갈 때 등장하는 사태가 뭐냐?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었던 죄가 되는 겁니다.

십계명과 제사법을 줬는데 십계명은 뭐하라고 줬느냐? 이 십계명에 기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를 계속 발굴하는 취지가 있습니다. 십계명으로 죄를 발굴하고 발굴된 죄는 제사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리고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또 십계명이 작용하니까 또 죄가……, 아담의 죄는 죄가 무한대거든요. 아담의 죄, 나도 미처 몰랐던 죄가 세월가면서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것은 제사법에 의한 제물로 바치는 그 피로 말미암아 또 용서 받고. 대 속죄일은 7월 10일, 7월 15일부터 하는 것은 초막절이거든요. 장막절, 7일 동안 텐트치고 생활하는 거예요.

그 장막절, 초막절 동안에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는 지금 여기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이방민족이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된 자에게만 특혜로 넣어주는 그 약속의 땅에 시범조로 살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상상해도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나 편하라고 내가 만들어낸 천국이거든요. 세상의 이방인들, 다른 민족들의 신전이라 하는 것은 자연을 닮았어요. 그리고 신전은 누굴 닮았는가? 신전은 인간의 신체의 구조를 닮았어요. 늑골, 갈빗대, 이런 구조로 신전을 만들어요. 왜냐하면 거룩하다는 것을 어디서 가져왔는가? 인간의 눈에 띄는 거룩한 것들의 요소를 자연 속에서 뽑아서 성전을 세우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약속의 성전은 그런 식의 구조로 되어 있지를 않아요. 이스라엘의 성전구조는 제물을 잡는 부분과 그 잡은 제물의 피를 뿌리는 부분,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둘로 나눠진 그 공통점이 뭐냐?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마감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생명의 실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나 이방민족의 영생 얻기, 이방민족의 하나님 섬김은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그럴싸한, 멋지고,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살아 있는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그런 행위를 집대성해서 살아 있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으로 섬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으라는 거예요. “아니, 살아서 드리겠습니다.” “아니, 죽으라.” 하는 겁니다. “양을 드리겠습니다.” “양 드리는 것? 성전에서 스톱, 들어오지 마.” 네가 바친 양, 그걸로 너는 끝나요. 그리고 양과 결별하세요. 양을 바쳤다고 해서 그 양을 바친 사람의 공로가 그 양과 합쳐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받은 양을 제사장이 안수해 버려요. 안수한 순간 그 양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양을 바친 자를 죽이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죽이는 겁니다. 왜? 살아 있는 것들은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으로 자꾸 상상을 해요. 그런데 그 상상속의 주인공이 누구냐? 상상속의 그대, 그 주인공이 누구냐? 바로 본인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 내가 복 받는 것, 내가 영원토록 천국에서 복 누리는 이것이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누구의 세계냐 하면, 자기를 주인공으로 삼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다 허상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드라마에 그런 내용이 있지요. 사랑하는 여자를 붙들기 위해서 남자가 이야기하지요. 그 남자 이름이 원빈인가 그런데 “얼마면 돼? 얼마면 돼?” 그게 이런 겁니다. “신이시여, 날 구원하는데 내가 얼마나 봉사하고 얼마나 세월 바쳐 교회 나오고 얼마나 충성하고, 얼마면 되겠어요, 하나님? 값을 정해보세요. 내가 드릴 테니.”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죽어라. 그렇게 입을 나불대는 네가 죽어야 돼. 너는 눈을 감아야 그 나불대는 소리가 쑥 들어갈 거야.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 나불대는 소리가.” 입만 떼면 그거예요. “날 구원할거요, 말거요?” 이거에요. 입만 떼면. 온 천지가 구원론밖에 몰라요. 구원론, 자기 구원론밖에 몰라요.

천국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납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선택한 자에게만 주입시키는 거예요. 그래놓고 알아서 오라는 말이 아니에요. 오직 택한 백성이 아니면 못 알아듣는 내용만을 약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죽어 마땅함이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교회 나오면서 ‘살아야지.’ 하고 나오지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 죽는 이유를 오늘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렇게 죽으려고 교회 나오지를 않거든요.

하지만 오늘 본문 보면서 “그래도 목사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켰잖아요. 지켜서 영광 돌렸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절기 지키면 하나님께서 구원시켜주겠지요?”라는 기대 같은 것이 얼핏 들어올 가능성이 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항상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리를 구원해요. 우리의 자리. 우리가 쟁반위에 있다면 그 쟁반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겁니다. 우리 밑에 낯선 자리가 끼어들고 그 자리가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자리니까 그게 공간이에요. ‘그렇다면 그 자리에 올라타면 되겠네.’ 아닙니다. 그 공간은 없어요. 없는데 어떻게 그 없는 자리가 우리를 데려갑니까? 그 없는 공간을 뭐가 만드느냐 하면 시간이 만들어요. 그 시간의 내용이 들어가는 그것이 공간이 되는데 그 시간의 내용은 뭘 로 채우는가? 절기로 채우는 겁니다. 이스라엘에는 3대절기가 있어요. 유월절, 그 다음에 오순절, 그 다음에 여기 나오는 초막절, 이게 3대 절기에요. 출애굽기 34장 23절에,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라고 되어 있어요. 절기를 더 나누면 더 되는데 중요한 것은 세 개에요.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 여기서 오순절이란 유월절 지나고 50일 지난 기간에 놓인 절기고 오순절이 지나고 그 다음에 7월 달에 초막절인데 초막절, 수장절, 장막절이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절기를 지키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말이니까 쉽게 해 봅시다. 북한에서는 4월 15일이 최고의 명절입니다. 김일성 생일이에요. 북한의 김일성 생일을 왜 그렇게 잘 외우고 있는가? 제 딸 생일하고 똑같아서 그래요. 김일성이 북한에서는 신이거든요. 북한의 사고방식은 일 년 중 김일성 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북한은 죽은 귀신이 통치합니다. 죽은 김일성이가 통치해요. 김일성 생일을 지켜주면 일 년은 은혜로 그냥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어떤 인물이 일 년의 축복을 결정해요. 달력의 어떤 절기를 지키는 게 아니고 절기를 제대로 지킬 경우에만 일 년을 보장받아요. 제대로 못 지키면 언제 하나님의 벌을 받아서 이 이스라엘이 멸망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절기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예배거든요. “하나님께서 일 년을 연장시켜 주시면 우리는 또 ‘고맙습니다.’하고 일 년을 삽니다.” 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절차로 절기를 주셨는데 그 절기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발자국이죠. “내 발자국, 내 발자국, 내 발자국, 디딤돌 빨리 깔아라.” “예, 예!” 이렇게 주께서 일 년을 지나치면서 깔아놓은 발자국이 절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시간은 누가 만드는가? 주님께서 시간을 만들고 그 만드는 시간이 다음에 다시 돌아오거든요.

절기가 순회된다는 말은 그 순회하는 절기가 뭐냐? 그게 공간입니다. 공간. 여성분들은 축구를 잘 모르지요. 전반 45분 뛰고 15분 쉰 뒤에 후반전 45분 뜁니다. 축구는 시간이 지나면 끝나는 게임이에요. 여성분들 바둑도 잘 모르지요? 바둑은 시간게임이 아니고 공간게임이에요. 공간에서 바둑을 두면 바둑판에서 새로운 무늬가 창출됩니다. 생산되는 겁니다. 절기는 시간게임이 아니에요. 시간놀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간놀이입니다. “나,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으면서 지금도 너희들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절기 지킨다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약속의 땅에 가둬놓는 내가 힘들고 내가 노동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하고 바둑이나 장기 두고 있으면 거기가 천국 되겠네?’ 아닙니다. 그 절기의 모든 내용은 죽음이에요. 끊임없이 제물이 죽음으로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가지고 생명을 만들어내기에 그렇습니다. 죽음을 가지고 생명을 만들어내요. 살아 있는 내가 안 죽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내가 안 죽으면 그것은 생명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저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죽지를 않아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아! 네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생명나무를 같이 먹어버리면 너는 선악과를 따먹은 영원한 죽음, 다시 말해서 저주가 영원토록 지속된다.”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이 이미 창세기 3장에 나와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영원히 천국에서 누리고 있는 생명나무의 그림자, 생명나무의 효과와 비교하기 위해서, 천국이 영원하기 때문에 지옥도 같이 영원한 거예요. 영원히 복 누릴 사람 때문에 영원히 저주받을 사람이 쌍으로 짝이 맞춰져야 돼요.

지옥이 왜 있는가? 천국과 차이나기 위해서 지옥이 있고 지옥과 차이나기 위해서 천국이 있는 거예요. 천국 간 사람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준비된 자비다. 그냥 베풀어주는 불쌍히 여김이다.” 저쪽, 지옥 간 사람은 나쁜 짓을 해서 간 것이 아니고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왜? 모든 인간은 아담의 속성 때문에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전부 다 죄만 지으니까, 다 나쁜 짓만 하니까. 선한 것은 없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지금까지 한 것을 결론내리면 이렇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약속의 땅에는 누가 갑니까? 약속의 땅에는 하나님이 손수 일해서 넣어주는 사람이 가는 겁니다. 그럼 내가 손들면? “손 내려.” 합니다. 이것은 손 들 문제가 아니에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마땅히 죄인이기 때문에 마땅히 저주받는 똑같은 입장이거든요. 밤 되면 모든 소가 다 검잖아요. 누렁이도 검고 흰 소도 검고, 밤이 되면 햇빛이 없어서 다 검잖아요. 죄 아래서 모든 인간이 다 저주받아요. 거기서 도토리 키 재기하지 마세요.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다 늙어 죽어요. 왜 죽습니까? 죽는 것은 죄 값입니다.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요. 마트에 가 봤지요. 마트에 들어갈 때는 그냥 들어가지만 나올 때는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나오잖아요. 마트의 계산원이 계산대에서 뭐합니까? “카드로 하시겠습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왜? 극렬히 아무것도 안합니다. 카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계산원이 하는 말이 “5만 2천원입니다.” 그렇듯이 인생 다 살고, 유엔사무총장을 했든지, 대통령을 했든지 간에, 국무총리든 뭐든 다 죽음입니다.

“라면 다섯 봉지에다 이것은 1+1 세일하는 거고, 샴푸에다 다 계산해서 총계, 죽음입니다.” 죄 값은, 인생 값은 사망입니다, 똑같은 거예요. 그 끝의 값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치를 내 값을 예수님 십자가 피 앞에서 발견한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발견한 겁니다. 저 피가 바로 내 값이고 그리고 동시에 값을 치렀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가.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어낸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카드, 약속입니다. “이 카드 긁어라. 천국이다.”하고 피 묻은 카드를 주신 거예요.

그 피는 죽음이죠. 나의 죽음이 아닙니다. 날 대신한 분의 죽음이죠. 그 죽음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그 죽은 자가 곧 생명을 품고 죽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폐쇄된 공간에서 시간이 뺑뺑 도는, 유월절 – 오순절 – 초막절 – 유월절 – 오순절 – 초막절……, 뺑뺑이 돌던 이 성전, 이 성전이 댐이 터지듯이 그 성전이 깨지니까 그 성전은 진짜 성전을 보여주는 모형이고 그림자라는 사실을 히브리서, 신약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절기 지키지 마.”(갈 4:10,11) 골로새서 2장에도 나오지요. “절기 지키지 마.”(골 2:16) 절기를 지킨다는 것, 이미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는데 너희들이 절기를 지킨다는 말은, 살아 있는 인간이 살아 있는 절기를 지키겠다는 것은 죽으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대치가 되는 겁니다. 복음이 아닙니다. 사탄의 생각, 사탄의 아이디어입니다. 십자가를 헛되게 하기 위해서 사탄이 그 짓 하는 거예요. “유월절을 지키라.” 지금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안 상홍 집단이잖아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 모든 절기는 우리 죄를 위해서 죽어야 되실 분의 발자국이에요. 그렇다면 그 분은 누굽니까? 바로 옛날 성전 안이나 새 성전 안에서 발자국을 남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이래야 돼요. “저는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유월절은 어떻고, 오순절은 어떻고, 맥추절은 어떻다, 할 때 그것은 출애굽기 34장에서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는 것이고, 맥추절이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밀의 첫 수확할 때 하는 것입니다. 맥추, 여기서 보리가 아니고 밀이에요. 보리는 무교절에서 보리가 나오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초막절, 모든 곡식을 추수할 때 하거든요. 이것은 공간에 대해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 생산물을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얻게 되었다는 그 공간에 관한 문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의 그 지역의 이야기입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결부시키면 안 돼요. 예수님은 죽음만 계속 순환돼요, 죽음만. 십자가만 순환된다고요.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숨겨놓은 천국이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왔고 그리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것이 그 십자가커튼 바로 뒤에 이미 천국이 장만되어 있거든요. 우리교회 이 커튼 젖히면 바로 뒤에 팔공산이 보이는데 그 커튼을 젖히는 그것이 재림이에요.

이 말은 뭐냐? 우리는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어디 가는 게 아니에요. 시간 맞춰서 가는 게 아닙니다. 성령 안에 있으면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된 것처럼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거예요.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처소를 함께 한다고 했으니까. 성부와 성령과 함께 우리가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는데 그 함께 있는 그 모습이 로마서 8장에 보면 썩어짐과 생명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있으니까 우리가 성전 되는 겁니다. 이 썩어가는 장막, 우리의 몸과 그리고 “네 몸은 죄 때문에 썩어야 해.” 그걸 매일같이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알려주시면서 옆에 계시는 주님, 생명 되시는 주님,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주님과 함께 있는 새로운 공간이지요.

옛날처럼 성전 짓고, 제사 드리고, 양 잡고, 피내는 성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서 더 이상 그런 것은 필요가 없어요. 부활절이니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지요. 사도바울이 ‘절기 지키면 내가 전한 복음을 헛되게 한다.’는 거예요. 복음을 모르니까 절기, 절기, 하고 있는 거예요. 복음을 알게 되면 구약을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볼 수 있어야 돼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옛날 성전이 있었는데 그 성전이 폭파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전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폭파, 댐이 무너지니까 댐 안에 있었던 진짜 성전이 쏟아져 들어오니까 에스겔 45장의 새 성전의 오실 왕, 임금님이 이 제사를 주관해서 드리는 거예요.

아직 예수님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모든 용어와 치수와 측량들은 옛날 솔로몬 성전, 그리고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맞춰서 했습니다만 그 내용은 히브리서에 보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는 시간이 없어요. 멈춰져 있는 거예요. 시작과 끝이 없어요. 순환이라는 말은 뺑뺑이를 도니까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그 시작과 끝이 없어요. 절기는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없는 그것이 시간을 유발하고 만들어내요.

절기가 시간의 내용을 채우고 그러면 그 절기 따라 새로운 시간이 용납이 되고 그 용납되는 공간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되고, 이 모든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오게 되면 십자가 안에서는 영원토록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는 천국가도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가 천국 가도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 가게 되면 시작과 끝이 없어요. 그 안에서 영원한 복락을 “내 희생, 내 공로 때문에 이런 복을 누리는 줄 알아라. 알겠느냐?” “알지요, 알지요.” 이러면서 영원토록 사는 겁니다.

그리고 저 밑에 보면 지옥에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구더기에 소금 치듯이 계속해서 영원토록 “진작 주님 섬길 것을… .” 하고 거기서도 주님을 인정해요. 주님 인정하면서 그러고 있고. 그런데 그들이 뭔가 실수를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고 반면 천국은 주님께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천국 오는 거예요. 이것이 내 중심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내 중심을 포기를 하도록 성령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네 아이디어를 포기하고 주님께서 주신 효과를 그냥 덮쳐버리면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이었구나. 구원이 내 숙제가 아니고 주님의 숙제를 이룬 그것이 나의 구원으로 이어졌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성전 절기에 대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만든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은근히 효과를 기대하고 은근히 희망해서, 내 뜻대로 만들어볼까 싶어서 우리가 멋들어지게 세운 그런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세울 자격도 없이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웬 은혜인지 주님이 생각한 약속을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으니 천국이 나의 세계가 아니고 주님의 세계인 것을, 주님의 은혜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을, 은혜 받은 자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인 것을 알게 하오니 이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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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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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