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150512
헤겔 150512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한윤범(IP:14.♡.134.87)
15-05-15 11:03
20150512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헤겔입니다. 헤겔은 1770~1831까지 산 사람인데요 헤겔이란 사람이 철학뿐만 아니고 신학에서도 상당히 유명하지요. 왜 유명하냐 하면 설교에 나오는 용어들,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로 교회에서 무슨 마술적이고 신비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것처럼 활용하니까 기독교 용어, 성경 용어,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전부 다 그것 말고 철학적인 용어로 정리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에 관한 용어들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거기다가 부활, 십자가, 언약, 그러한 용어들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순진한 교인들은 그 용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 가지만 알고 있는 우리는 천국 간다. 이렇게 쉽게 정리할 오류가 많이 있겠지요. 그렇잖아요. 기독교 용어를 쓰는 그걸로 마치 영적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착각한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했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냈고, 하나님과 아들, 이런 관계를 철학적 용어로 다 바꾸자는 겁니다. 바꾼다는 말은 기존에 알고 있던 부활, 창조 등 이런 용어를 버리면 헤겔이 알고 있는 철학적 용어로 바꾸면 그 바꾸어진 용어를 추가적으로 알아야 되느냐 하는 그런 문제가 생기겠지요.
예를 들어서 기기를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난 뒤에 스마트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차이가 있잖아요. 스마트폰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해당되는 단어들이 나오잖아요. 기기 명칭들이 나오고. 그러면 기존에 휴대폰의 명칭들은 버리고 스마트폰에 있는 앱이라든지, 앱을 깔아라. 컴퓨터 모르는 할머니들에게 쓰레기통 이야기하면 쓰레기통 있는 줄 알고, 바이러스 하면 안에 벌레가 기어가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쓰레기통이란 용어를 기존의 쓰레기통에서 컴퓨터에 집어넣고, 바이러스라는 의학용어를 컴퓨터에 집어넣으니까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용어가 그 의미라고 오해한단 말이죠. 컴퓨터를 하다보면 쓰레기통이 두 개 돼버렸죠. 기존에 쓰레기 비우는 쓰레기통과 컴퓨터 안에 들어있는 쓰레기통과 두 개 돼버렸잖아요.
헤겔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기독교용어 버리고 교회용어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또 새로운 용어를 배워야 되느냐는 것에 대해서 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으로 신학을 대신하는 겁니다. 헤겔은 그걸 종교철학이라고 해요. 그 종교철학은 기존의 신학을 대체하자는 겁니다.
왜 대체해야 되는가? 일반교인들이 신학용어를 붙들고 있으면 마치 구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 뜻을 아는 것처럼 자꾸 우기니까 전부 이걸 제거하기 위해서 종교철학이라고 철학이란 단어를 붙인 겁니다. 종교철학이나 신학이나 똑같은 게 아니냐? 똑같은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종교철학이 되면 일상의 생활에서 나온 것이 철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반영이 되는 거죠. 그런데 신학이 돼버리면 일상 생활하다가 일요일에 교회 가서 영적 세계, 그 안에만 통용되죠. 이 안에만 통용되니까 오해 정도가 아니라 착각할 가능성이 많지요.
헤겔 생각에 하나님이란 교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교회만 하나님 뜻이 있다고 주장하니까 그게 참을 수 없는 거죠. 일상생활에 하나님 뜻 없습니까? 다 있잖아요. 그런데 교회 가면 일상생활 따로, 교회 생활 따로, 둘이 합치면 구원도 되고 다 챙길 수 있다고 하니까 헤겔로서는 화가 날 문제란 말이죠.
그래서 신학용어를 버리고 종교철학용어를 하게 되면 일상생활에 나오는 신의 원칙과 원리가 두루 퍼져있습니다. 그 근거는 여러분 다 알다시피 창조한 세계 속에 하나님 뜻이 다 들어있지요. 그러면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 뜻을 찾아낼 생각을 합니까? 안 하지요. 일상은 내 일상이니까. 남의 일상은 모르니까. 트럭 모는 걸 어떻게 압니까? 남의 일상은 모르고 내 것만 아니고. 그리고 그 외에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교회에서 알려주겠지. 그래서 교회에 가보니까 일상과 관계없이 성경용어로 짜깁기해서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복 받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완전히 일상 속의 하나님 뜻을 도회시한 결과를 낳은 거예요.
방금 창조란 말을 했는데 헤겔은 이것도 교회에 나온 용어라고 해서 없애버립니다. 헤겔은 창조를 생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조와 생성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여기 누가 컵을 만들었으니까 있을 것 아닙니까? 만들어져 있으니까 스톱 된 거예요. 창조란 의미는 만들어졌다, 끝. 이런 뉘앙스가 강하죠. 그런데 생성은 뭡니까? 만들어진 것으로 끝이 아니고 이게 변화가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가 강하잖아요. 어느 것이 일상적으로 더 의미가 풍부해요? 창조보다도 생성이 풍부하지요.
나는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 끝. 그런데 하나님/신이 생성한다면, 나는 어떻게 신의 뜻을 알까? 매일같이 어떤 변화를 보여야 될까? 매일같이 얼마나 내가 많이 달라질까? 달라짐 조차도 하나님 손길 안에 있다. 이게 얼마나 풍부하냐 말이죠. 하나님의 현재성이. 그런데 그냥 창조라고 하니까 “만들어주신 것, 고맙습니다. 앞으로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그만큼 삭감이 되지요. 별로 좋지 않은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처럼 헤겔은 철학적으로 그동안 교회에서 독점적으로 자기만 안다는 신의 비밀은 독점적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철학으로 얼마든지 바꿔치기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헤겔은 철학뿐만 아니고 신학분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힌트와 참고 될 만한 이론들을 크게 내놨어요.
헤겔 다음에 포이에르 바하를 할 건데 그 이후에 마르크스가 나오지요. 이런 사람들이 헤겔 철학에서 배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헤겔이 이 세상에 대해서 신과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잘 정립했기 때문에 실재와 실제 움직이는 생성되는 현실에 대해서 헤겔의 이론을 도외시할 수 없는 처지란 말이죠. 도대체 헤겔이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를 했다고 그 후학들이 헤겔 범위에서 못 벗어나는가? 지금도 헤겔 범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뭘 그리 완벽하게 이야기했는가?
완벽한 이론을 하면서 헤겔이 뭘 공격했느냐 하면, 칸트를 공격했어요. 칸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이 자연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 인간이 들어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자연을 바라본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틀린 이야기 아니죠.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연 전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한테 의미가 있느냐? 그 선에서 머물러야 된다는 겁니다. 상당히 겸손하지요. 우리가 원숭이의 심정을 압니까? 알 필요 없잖아요.
칸트는 이걸 주어진 모든 인상들이 그냥 우리 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것을 구성하는 경험 이전의 경험을 받아들이면서 구성하는 틀이 우리한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걸 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의식하면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조립해요. 조립해야 활용하고 자기한테 이익이냐, 불이익이냐, 따질 수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소나기가 오는데 소나기는 누가 만들었지, 어떻게 만들었지, 그걸 연구하는 게 아니고 소나기 오면 우산 찾으면 되는 거예요. 소나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그 연구는 따로 하면 되고 보통 사람들은 소나기 안 맞으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보다 크기 때문에. 그걸 생물학에서 적응이라 하는데 적응하면 되는 거예요. “소나기가 왔지만 나는 우산 썼다. 나는 다행이다.” 나는 행복하다는 말 아닙니까.
헤겔은 시비 겁니다. 너 혼자 행복하면 신의 뜻이냐고 물어요. 어떻습니까? 지금도 김정은은 혼자 행복한데. 김정은 시찰할 때 살이 쪄서 돌아다니고 그 앞에 군인들과 농민들은 야위어있고. 김정은 행복하지요. 지가 최고자니까. 칸트는 진짜 자연의 내막은 모른다. 칸트는 물자체는 모른다.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이성으론 미치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채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겸손하게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헤겔은 그걸 모른다면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모른 것밖에 안 된다.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오호, 대단하지요. 칸트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헤겔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알 수 있느냐 하면, 유한자는 그냥 생긴 게 아니고 무한자에 의해서 유한자가 창조됐지요. 그러면 유한자 속에 무한자의 뜻이 있지요. 있는 걸 포기하면 되느냐 이 말입니다.
교회 가는 사람들이 일상생활하다 주의 말씀을 보게 되면 칸트적 의식으로 교회 온 셈이 되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했던 것은 내가 적응해서 필요한 진리만 진리라고 우기고, 오늘도 비 오는데 비 안 맞게 하시니 주의 뜻입니다. 이걸 자기에게 이익 되는 것, 자기한테 필요한 것만 주의 뜻이라고 간주하고 그 다음에 교회 가서는 전체적인 뜻을 이야기한다는데 이미 자기가 교회 오기 전에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뜻이라는 게 있잖아요. 비 오는데 우산 준비해서 다행스럽다. 이미 고수한 게 있지요. 플러스 교회 가서 하나님 뜻을 알아버리면 둘이 합쳐지잖아요. 칸트식인데 이런 식으로 일상의 것은 따로 챙기고, 교회 가서는 성경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따로 챙기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 뜻을 아는 것,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성경 계시의 힘을 빌려서 추가해서 결합하면 된다는 거죠.
칸트가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할 때 물론 칸트가 이렇게 분리한 건 아니에요. 일상생활 가운데서 성경 속에 있는 전체적인 것을 늘 삽입해야 된다는 것도 이야기했어요. 그게 도덕률이라는 겁니다. 지난번에 했는데 기억나십니까? 이유도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 내 이익을 위해서 살인하면 안 되고 살인하지 말라는 자체가 내 마음 속에 하나님 계시의 별처럼 양심이란 이름으로 있기에 도덕은 무조건 의무로써 주어져야 된다고 본 거예요.
헤겔은 그게 아니에요. 의무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안식일 법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을 위해서 안식일 법이 있다는 마태복음 12장처럼 헤겔은 인간을 위해서 의무가 있지 의무를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의무에 종속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헤겔 당신 말대로라면 신의 뜻, 하나님 뜻 하다가 이기주의 아니냐? 지 필요한대로 의무를 행하거나 마음대로 하면 되겠네?
여기서부터 헤겔에 대해서 오해할 수 있는데 헤겔은 그런 뜻이 아니고 인간이란 의무를 행하기 전부터 무한의 원리원칙이 유한되는 인간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인간 속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칸트는 들어와 있는 이유를 모른다는 거예요.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신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것을 줘서 신에게 영광 돌리도록 했다는 게 칸트에요. 칸트 이야기 들어보니까 기존 교회와 똑같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왜 주셨는가? 바른 착한 일 해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줬다는 기존 교회와 똑같잖아요. 칸트식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내 상황에 유리하냐, 불리하냐, 따지지 말고 내 속에서 외치고 있는 신의 법을 우리가 이뤄줄 때만 신께 더욱 더 영광이 된다는 거죠. 복음에선 안 듣던 소리지만 기독교방송에서 많이 듣는 소리입니다. 전에는 성령이 없어서 말씀 못 지켰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본격적으로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자. 이게 바리새인이거든요. 예수님을 죽였던 자의 사상인데 마귀 사상이죠. 이건 개혁주의 이름으로 더 이상 하자가 없는 완벽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칸트에요.
그런데 헤겔은 말하기를 그런 의무가 인간에게 있다고 하니까 감히 칸트에 대들다니 도대체 뭘 믿고 칸트의 완벽한 주장, 하나님의 법이 우리 안에 있고 양심대로 사는 것이 신의 뜻이고 영광이다. 이 완벽함을 네가 뭘 믿고 뒤엎어버리느냐? 헤겔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됐다는 거예요. 이거는 기독교 역사상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되었다는 것.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 되었다는 말은, 그 인간이 다시 하나님 되기 위한 중간 절차에 불과하잖아요. 삼위일체가 뭡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보냈다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됐습니까? 승천하셔서 도로 하나님 영광을 차지했지요. 그게 삼위일체 기독교교리잖아요. 잠시 고생했다가 다시 영광 받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헤겔은 그걸 철폐해버린 겁니다. 하나님(무한자)이 유한자 된 거예요. 그 다음에 그 무한자를 하나님께서는 벗어버린 것이 아니고 유한자를 품음으로써 제대로 된 하나님 됐다는 겁니다. 진짜 이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기발한 이야기에요.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도 잘 못 들었을 거예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 만드신 속에 하나님 옆에 성자 예수님, 아들 예수님 계신데 이 땅에 보내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 잠시 고생 좀 시키고 십자가 사흘 만에 부활 시켜서 도로 하나님 자리에 앉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인데 그렇게 돼버리면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고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 뜻과는 전혀 별개라는 것이 헤겔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누굴 보내서 사람 만들고 사람 된 아들을 회수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는 관람객, 구경꾼이 돼요. 그 취지가 지금 우리 속에 안 들어온 게 돼요.
하나의 예를 들면, 집이 있는데 밤 열두 시 쯤 되서 앞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싸워서 할아버지가 파자마 차림으로 나왔잖아요. 한 5분 뒤에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게 창문으로 보고 있는 우리한테 영향이 있습니까? 그 집 싸움이지요. 영향 없지요. 그게 지금까지의 기독교라는 거예요. 헤겔이.
그럼 헤겔의 뜻은 뭐냐? 파자마 바람으로 나왔던 영감이 맞은편에 있는 우리 집에 들어와서 몽둥이로 나를 개 패듯이 패서 기절시켜놓고 파자마를 나한테 입혀놨어요. 깨어보니까 영감이 옆에 있고 영감이 입던 파자마가 나한테 입혀져 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 뜻이에요. 헤겔이 말하는. 이게 바로 유한자 속에 있는 무한자 뜻이에요. 이게 바로 헤겔이 말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의미에요. 우리는 칸트처럼 십자가고 뭐고 근사한 하나님에 대해서 평소에 빼먹을 생각만 했어요. 이용할 생각만 했지요. 칸트는, 내가 세상에 대해서 뭘 알아. 그저 하나님 주신 은혜대로 필요한 것만 챙기면 되지. 우린 늘 겸손해야 돼. 이게 칸트 생각이에요. 헤겔 보기에는 얍삽한 생각이에요.
헤겔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혼자 살면서 심심해서 개를 키웁니다. 내가 개를 키우고 싶다고 할 때 개가 대상이 되잖아요. 내가 개를 키우니까 개는 내 소유가 되잖아요. 이게 칸트적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개가 배고플 때는 누가 사료를 줍니까? 내가 줘야 되지요.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에요? 이게 헤겔의 유명한 주인과 노예 사상입니다.
이걸 적자라 하고 이걸 대자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내가 개가 없으면 외로워서 못 사는데? 내가 개에 종속 되었어. 개란 존재에 내가 개를 키우면서. 그동안 칸트는, 개는 무엇이냐? 개는 인간과 다른 어떤 포유류, 동물, 이렇게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니까 비현실적인데 헤겔은 그러지 말고 내가 개를 좋아하는 것은 욕망이라는 거예요. 이론이 아니고 욕망이에요. 이론은 내가 이론을 세우잖아요. 욕망은 이론 세우지 말라. 만남 자체가 욕망의 불꽃이 튀잖아요. 개는 나를 탐하고 나는 개를 탐하고.
어떤 여자가 굉장히 사랑스럽고 그 여자를 못 보면 미칠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칩시다. 그럼 그 여자는 나에게 뭡니까? 내 욕망의 대상이지요. 욕망의 대상 같으면 내가 1이고 그 여자가 두 번째가 돼야 될 텐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밤에 잠을 못 잔다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입니까? 그 여자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 여자가 언제부턴가 갑이 되고 나는 그 여자를 못 보면 미칠 정도로 을이 된 거예요.
그 여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그 여자를 사랑해서 미치고 환장한 게 아니고 길 가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데 그 여자를 잊지를 못했을 때 그걸 드라마틱하게 꾸민다면 그 여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반해버리니까 욕망이란 이성의 논리가 아닙니다. 이건 그냥 좋다는 것이지, 왜 좋은데 따지면 안 돼요. 그 여자가 왜 좋은데? 따지면 욕망이 아니죠. 그건 지가 이런 여자가 왔으면 좋겠다고 미리 계획한 건 이성이고 욕망은 따지는 걸 넘어선 일이라니까.
그 여자를 따라가 보니까 이미 결혼한 여자고 밤에 그 여자 남편이 퇴근했는데 보니까 자기 중학교 동창생. 드라마틱하게 본다면. 그 다음부터 어떤 욕망이 낫습니까? 저 동창생 죽어라. 과부 되라. 그러면 내 아내와 이혼하고 그 여자와 살겠다. 미쳤어. 나쁜 생각, 나쁜 생각. 이런 생각하면 안 돼. 안 된다는 건 칸트 이야기라니까. 욕망은 도덕이야기 아니에요. 헤겔에겐 도덕 자체가 악이에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재산을 탐내면 안 된다고 있지요. 십계명에 나온 말씀 아닙니까. 이웃의 재산이나 재물이나 여자를 탐내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프루동이란 사람이 말했지요. 재산 자체가 도둑질이다. 19세기 사회주의자거든요. 재산 형성과정에서 도둑질이 안 들어가는 경우가 없다는 겁니다. 아까 목사님 이야기했지만 제일 힘든 게 뭐냐? 남의 호주머니에서 가져오는 게 제일 힘들다고 했지요. 왜 가져와야 되는데요? 가져오는 목적이 뭡니까? 나 살기 위해서 그렇지요. 보세요. 이게 도둑질이잖아요. 이게 탐심이라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탐심에서 내가 산다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배제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움직이잖아요. 보세요. 얼마나 우상숭배, 나 위주입니까? 재산 있다는 자체가 도둑질한 거예요. 그래서 프루동이란 사람은 모든 재산을 다 없애버리라고 했어요. 그게 최초의 사회주의입니다. 사회주의공동체의 외침이에요. 마르크스가 비슷하게 닮아서 한 소리했어요. 공산주의사회는 사유재산이 없다. 이게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성령이 임하면 서로 나눠주고. 참, 공동체 주장해서 커미션 받아먹는 인간이 한둘이 아닙니다.
헤겔은 말하기를 칸트 당신은 이성적 논리로 따져서 이웃을 생각하고 상대를 이용하는데 일상의 여러 가지 사례를 생각하는데 내 속에 내가 다룰 수 없는 욕망이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느냐? 그 욕망은 내가 자진해서 노예가 되고 싶은 그것도 즐겨, 감사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노예 되고 싶게 하는 그게 욕망이다. 따라서 그 욕망으로 인하여 내가 모든 것은 내 소유화시킬 때 나는 주인공이 돼요. 제가 용어를 쉽게 갑니다. 원래 주체라 하는데.
내가 주인공이니까 텅텅 비어있는 주인공은 없잖아요. 주인공은 주인공답게 차도, 아파트도, 아내도 있어야 되고 자식도 있어도 되고 이럴 때 욕망이 만족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얘 있는데 혼자 얘 없으면 얼마나 욕망 허하겠습니까? 남들 다 군에 가는데 자기는 군에 못 가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사실 기분 별로 안 좋아요.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고. “자네, 군에 갔다 왔나?” “간이 안 좋아서 못 갔습니다.” “그런 결격으로는 내 딸을 가질 수 없네.” 장인어른 될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욕망이란 같은 인간들끼리 형성된 거거든요. 거기에 결격사유가 있으면 욕망에 미흡함이 있고 채우기 위해서 남 뒤따라가야 된다고 헉헉거리고 있다고요. 지금 우리가.
나라는 것은 그냥 있은 게 아니고 소유물로 채워있을 때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소유물이 채워도 욕망은 만족하지 않으니까 새로운 소유를 원하는데 어떤 소유를 가진 내가 어떤 새로운 소유 앞에 완전히 저쪽 소유의 욕망이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박장. 도박장에 뛰어든 주부들이 평소에 시장에서 콩나물 살 때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를 씁니다. 오백 원만 깎아달라고 해서 아낀 돈을 어디에 퍼붓습니까? 도박장에서 한 판에 오백만 원, 천만 원짜리 도박합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있어요? 왜 합니까?
남자가 평생에 열심히 공부해서 방송국 피디해서 드라마 잘 나가는데 정말 자기가 반했던 어떤 여자를 만나고 난 뒤에 속초 바다에 죽으려고 했잖아요. 그 여자가 속초 바다에 죽었다고. 이게 <압구정 백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남들 다 부러워하는 그렇게 잘 나가는 피디가 왜 속초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습니까? 자기 욕망의 대상이 거기 있기 때문에. 바보 아니에요? 야야가 재수가 옴 붙은 여자가 되어 이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스위스로 유학 보냈는데 그래야 아들이 사니까. 그러다 여자가 자살을 위장해서 여승이 됐으니까 환장한 거예요. 나중에 살아있으니까 아낌없이 결혼하라고 부추기잖아요. 왜? 자기 손자, 자기 아들 살리려고.
그래놓고 교회 와서 주여, 주여. 헤겔 보기에는 같잖지도 않은 거예요.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은 발견치 못하고 교회 와서 주여, 주여 하고. 이 땅에서 온갖 재산 도둑질 다 하고. 그게 무슨 신의 뜻이에요.
새로운 욕망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자기됨을 우기려 하다가 새로운 욕망 앞에 내 것 빼앗긴다는 것, 사랑하는 여자 앞에, 도박판 앞에, 콩나물 값 아낀 것도 아낌없이 퍼붓고 언젠가 한 판 딸 것이라는 그 생각, 그걸 헤겔은 분열, 자기가 쪼개지고 갈라지는 거예요. 쪼개지고 갈라지게 하신 그 상황을 헤겔은 신이 조성하신 유한의 세계, 곧 자연의 세계라고 본 겁니다. 칸트와 많이 다르지요.
칸트는 어떻습니까? 자연의 세계란, 내가 멀쩡히 있고 자연도 멀쩡하게 있고 자연에 대해선 우리가 다 알면 안 돼. 우리가 지극히 큰 세계를 어떻게 알아. 우리는 그냥 작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만 자연이 준 은혜의 혜택 몇 개로 살기만 하면 돼. 그리고 그 속의 신의 뜻, 도덕법이 왔기 때문에 우리의 도덕적으로 한계 내에서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되 항상 완벽하게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늘 회개하고 반성하는 이게 신의 뜻이다.
그러면 헤겔은 뭡니까? 어디서 위선적이야. 네 욕망을 봐라. 이게 헤겔이잖아요. 그 욕망을 통해서 가졌다는 것이 깨어질 때 하나님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봅시다. 깨어졌습니다. “내가 미쳤지. 남편 월급으로 도박하다니. 앞으론 내가 끊어야지. 이제는 자식이나 키우면서 살아야지.”라고 한다면 그 아줌마는 제대로 된 거예요? 새로운 욕망을 접수하게 됩니다. 이만큼 했으면 겸손했다고 우기는데 그 겸손도 내 욕망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게 더 깨어져야 되겠지요. 분열되고, 또 분열되고, 또 분열되고, 어디까지? 십자가 죽기까지.
그걸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화시킨다. 무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나만? 아니요. 모두를. 어떤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를 만남을 통해서. 만남은 우연이 아니에요. 헤겔의 만남은 필연이에요. 서로 만나서 이 정도면 겸손하지, 했는데 자기보다 더 겸손한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또 깨지는 거예요. 반대로 내가 이 정도면 좀 산다고 했는데 만나고 보니까 서울 강남에 아파트 두 채 있어. 해운대 아파트 있어. 나는 그 앞에 사는 것도 아니야. 또 욕망이 발동을 시작하네. 나이 사십에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차라리 술이나 퍼 마시자. 아껴봐야 승진도 못하고. 스스로 자기 붕괴지요. 파괴되는 거예요. 무화, 무로 변하는 겁니다. 이게 신의 뜻이에요. 흙이 될 때까지.
헤겔은 기존에 우리가 공부했던 철학과 다르지요. 기존의 철학은 항상 존재였잖아요. 내 존재가 신 앞에 얼마나 합당하게 바르게 사느냐? 그 존재였지요. 그 존재를 없애버린다니까요. 왜 없애느냐고 헤겔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왜 자꾸 피조물을 없애려고 하느냐, 그게 신의 뜻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다른 사람이 임시적으로 사람이잖아. 임시적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되지 않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가장 절정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람 됐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칸트가 이야기한 시발점을 헤겔은 정(thesis)이라고 해요. 이 정은 반드시 욕망에 의해서 antithesis(반), 정과 반이 나와요. 그리고 이것이 깨어지면서 화해가 돼요. 이걸 합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synthesis. syn은 합친다, 결합한다. 합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헤겔에 의하면 내가 깨어지는 것이 화해가 되죠.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야곱이 에서 자리를 탐했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세요. 결국 누가 이삭의 장자입니까? 야곱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야곱을 장자 되지 않게 한 이유가 뭡니까? 반을 통해서 합으로 가게 하는. 그게 합이 아니고 화해에요. 아까 신학용어가 철학용어로 바뀌잖아요.
야곱이 두 번째 됨으로써 야곱의 욕망은 형의 자리를 노리게 되죠. 에서가 배고플 때 야곱은 팥죽을 준비해요. 에서가 제일 좋아하는 팥죽을 준비한다는 것은,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든지 바꿔치기 하자는 겁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데 장자가 문제입니까. 그래서 에서가 팥죽을 먹고 네 마음대로 장자해라. 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 아니죠. 백날 해봐야 이미 태어난 것 지 마음대로 못 바꾸잖아요. 바보 같아. 형인데 바꾸자고 한다고 바꿔집니까? 아버지, 엄마 인정하지 않지요.
그 다음에 또 속이죠. 계속 속여야 돼요. 욕망이 있으니까. 엄마가 합세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야곱이 낚아채고 도망칩니다. 형은 죽으라고 따라오고. 그런데 결국 야곱이 형 자리를 가데 되는데 야곱이 형 자리를 차지했습니까, 야곱 아닌 자가 형 자리를 차지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차지했지요. 이스라엘 속에 야곱의 죽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났던 장소가 브니엘이에요. 내가 죽어야 되는데 주님 때문에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자리를 차지하는데 야곱이란 껍데기를 사용하지요. 야곱 속에 예수님 들어있다는 말과 예수님 속에 야곱 들어있다는 말이 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야곱 속에 예수님 들어있으니 예수님 속에 야곱 들어있으나 항상 야곱은 예수님 앞에서 깨어져야 될 파괴되어야 될 무화되어야 될 존재다 이 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날 살려줬으니까 이제 내가 당당하게 형 노릇해야지.”라고 했으면 야곱이 뒤에 형을 만나지요. 그때 야곱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야곱이 정식으로 자기가 장자 되었다고 합니까? 누가 누구에게 절합니까? 야곱이 에서한테 일곱 번 절하죠. 그동안 내가 헛짓했습니다. 저 자리가 예수님 자리인데 착각해서 나라는 자아의 자리인 줄 알았지요. 나를 죽이시는 자리인데 형이나 야곱이나 둘 다 오해한 거예요. 그 자리는 우리의 만남을 통해서 숨어있던 주님이 표출되는 자리,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칸트는 어떻다고요? 내가 말씀 못 지켜서 주께 영광 못 드리는 것 이제는 성령 소유해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말씀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면 상급도 받고 구원도 받고 이게 바로 개혁주의고 이게 바로 주님 만나기 전의 야곱적 사고방식이에요. 다시 말해서 사탄적 야곱이죠. 악마적 야곱입니다. 그게 한국교회에 다 퍼져있습니다. 전 세계에 교회란 이름으로 다 퍼져있습니다. 전혀 복음 아니잖아요. 놀라운 사실은 헤겔은 그걸 지적, 물론 헤겔이 옳은 건 아닙니다. 옳은 않다는 것은 다음 시간에 할 거예요.
헤겔이 보는 눈을 보세요. 제대로 보란 말이야. 왜 칸트, 당신은 우리 속의 욕망을 제거하고 보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자, 우리는 유한자, 겸손하자. 그게 겸손이에요? 그게 위선이지 겸손입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나는 부족하고. 주여, 부족합니다. 이게 겸손이에요? 위장이지. 전혀 겸손하지 않아요.
정에서 반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합이 되지요. 그래서 정을 T₁이라 합시다. 안티니까 A₁이라 합시다. T₁과 A₁이 만나서 합이니까 S₁이라 합시다. 이걸 동그라미 치게 되면 이 전체가 정이 되지요. 이게 T₂가 돼요. T₂가 A₂를 만나서 S₂가 되겠지요. 이 전체가 T₃가 돼요. 이걸 변증법이라 합니다. 계속 쪼개고, 쪼개고, 쪼개는 거예요.
갈수록 우리 죄는 점점 더 늘어나는 겁니다.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죄가 잠복돼있었어요. 누가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이 사람 되시면서 그냥 사람 되신 게 아니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취급했잖아요. 그 죄인으로 취급한 하나님 자체 내에서 발생된 그 죄가 우리 안에 이미 잠복돼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면서 잠복된 죄가 점점 더 현실화 되도록 발현되는 겁니다.
이십 년 예수 믿었다고요? 삼십 년 됐다고요? 장로라고요? 목사 됐다고요? 진짜 성령 받아보세요. 뭐가 됩니까? 죄인 되라고 목사 되고, 죄인 되라고 장로 됐다는 이런 고백밖에 안 나와요. 우리가 산만큼 남한테 피해주고 산만큼 그 만큼 죄가 증가했다는 것. 접혀진 죄가 펼쳐지면서 부채를 모았다가 펼쳐지잖아요. 모았던 죄가 펼쳐지면서 사도 바울의 고백,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몰랐어요.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 만날 때 이름을 불렀거든요. 사울아, 사울아.
이름이란 자기 아버지가 지어줬고 그것을 아버지가 속해 있던 기성세대가 부를 때 나는 사울이라고 뒤늦게 수용해야 될 환경이거든요. 내가 내 이름 지은 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기성세대에 포함돼있단 말이죠. 이미 T 안에 포함이 돼있어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언어의 세계, 욕망의 세계, 기성세계, 유한의 세계에 놓여있는 거예요. 거기서 우리는 착하다고 본 거예요. 아니에요. T₁전체가 이미 T₂된 거예요. 이 전체가 뭐냐?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세계, 성육신 안의 세계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87)
15-05-15 11:04
201505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3-헤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서 화해라는 것에 대해서 기존의 생각과 완전히 정반대로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화해라고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고생 뒤에 낙이 온다고 이것 견디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걸 주실 거야. 왜? 하나님은 화해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사이가 틀어져서 안 좋은데도 예수님 중간에 오셔서 원수 된 자를 의롭다고 해줄게. 드디어 하나님 앞에 예쁨 받는 사랑받는 사람 되었어. 이걸 화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헤겔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에요. 만약에 그걸 화해라고 한다면, 화해가 돼야 될 그 대상이 특수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메시아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메시아가 너무 많잖아요. 하나님이 내 편들면 사회구조상 반드시 다른 사람 편을 들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다른 것 없이 축구시합, 야구시합 보지요. 한쪽이 승리자 되면 한쪽은 패자가 되죠. 승자 혼자 화해가 되면 패자는 화해가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은 전체 화해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전체 다 죽여 버려야 돼요.
특수자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여기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다면 서로가 만나서 나의 변증법, 아까 정반합이 아니고 나의 발전이나 완성, 화해가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변증법이 되는 거예요. 네가 있음에 내가 깨어지고 내가 있음에 네가 깨어지고. 내가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의 낮아지심에 합류할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여기에 집어넣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서로가.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널 이용해서 내가 잘 되겠다는 칸트적인 것밖에 안 돼요.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용해서 자기 잘 되는 것만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혼자서는 신 앞에서 멋지게 복 받았는데 이쪽에선 울고 있잖아요.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그래서 A와 B란 사람이 이걸 상호승인 또는 상호인정이라 하는데 인간세상은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투쟁을 벌인다. 호네트란 사람이 헤겔 제자인데 그 사람이 지은 책에 [인정투쟁]이란 게 있는데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것, 그게 이 세상의 본성이란 겁니다. 적당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타인이 없으면, 만약에 부산바닥에 아무도 없고 나 혼자만 있으면 옷을 잘 차려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벗고 다녀도 괜찮지요. 옷을 왜 입는데? 미쳤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미쳤다고 누가 이야기하는데? 상대가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옷을 입은 만큼 덥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하지만 참아야 되지요. 상호화해를 위해서. 그만큼 나한테 손해지요. 내 욕망이 제한되잖아요. 그럼 이것은 일종에 나의 파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욕망의 파괴.
여기서부터 헤겔은 신을 찾기 시작합니다. 신을 어떻게 찾느냐? 아까 이야기한 객체와 주체. 주체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주인공이라 했지요. 출발을 여기서부터 해보자 말이죠. 정이니까. 나는 결국 누굴 위해 살아요? 남한테 인정받든 뭘 하든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죠. 나에게 귀환되죠.
그런데 헤겔은 그 방식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본성을 마지막에 자기만 사랑하라고 누가 가르쳐줬어요? 가르치긴 누가 가르쳐 내 본성이지. 그러니까 그 본성을 누가 집어넣어줬어요? 하나님이 집어넣었지.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로부터 자기로 말미암아 자기로 돌아오죠. 마치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처럼.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걸 그대로 우리가 닮은 거예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간다는 것을 신의 존재성으로 본 거예요. 존재성이 왜 봤느냐 하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나란 존재가 나로 말미암아 결국은 나의 영광으로 돌리니까 마지막 남는 것은 나, 여기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죄를 짓든 의를 행하든 치매 걸려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온통 스물네 시간 생각이 내 생각밖에 없어요. 자식이 괴로운지 고민하는지 그건 관심도 없어요. 그냥 지 몸 편하면 그만이어요.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지금 그것 따라가고 있잖아요. 같이 늙어가고 있으니까. 은근히 숨기고 있지요. 하지만 인간의 육신이 숨긴다고 같이 숨겨지는 건 아니잖아요. 숨긴 것은 우리의 교양과 그동안 학습된 훈련과 상식 때문에 억지로 억압하고 있지만 억압한 게 나중에 꿈속이나 평소에 터뜨리면 역시 나는 나밖에 몰라요. 교회 가서 은혜 받았다고 하잖아요. 집에 가면, “아이고 힘들 어라. 교회 좀 가까웠으면 좋겠다.” 은혜+가까웠으면 좋겠다는 자기의 결핍된 것에 대한 보충, 반드시 노리게 돼있습니다. 나는 나에게로 돌아온다. 존재로 해서 문제에요. 존재로 하지 말고 생성으로 바꾸자. 생성의 정반합의 변증법이 개입되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인간이란 객체가 외부에 있지만 객체로 말미암아 변증법이 이뤄지는 것은 내 내부에서 이뤄진다. 내부의 과정이 내 존재보다 우선돼야 된다는 것이 헤겔의 철학입니다. 뭔 뜻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내 내부에 내가 손대지 못하는 나를 능가하는 내 존재는, 항상 인간은 죽더라도 어느 순간에도 내가 어때서, 내가 어때서, 나밖에 모르는데 뭘 빠뜨렸어요?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과정을 완전히 묵살하고 내 존재로 끝나버렸잖아요.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러면 정말 중요한 것이 날아가 버렸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정반합인데.
그렇다면 간단해요. 인간이 주인공이 되니까 내가 내 주인공, 주체에서 주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자존재, 그러니까 객체를 거쳐서 돌아오게 돼있습니다. 집구석에 혼자 있어봐야 안 되지요. 그런데 자꾸 내가 있으면서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의 여행을 하면서 결국은 나로 돌아오잖아요. 상상의 여행을 할 때 나타나는 자들이 누굽니까? 바로 내가 아니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 내가 봤던 것, 경험했던 것, 감각되었던 것. 백화점 갔다 왔는데 얼핏 봤는데 괜찮더라. 벌써 객체잖아요.
사람이 맨날 자기만 봅니까? 아니잖아요. 뭘 보잖아요. 제가 말하는 게 신기한 일이 아니고 일상의 일입니다. 내가 보면서 항상 내가 객체를 요구하잖아요. 욕망이 가만있지 않으니까. 나도 가졌으면, 하고 다시 주체로 돌아오잖아요. 주체에서 객체를 통해서 주체로 돌아올 때 객체, 주체 전부 없애버리고 거기서 신의 뜻을 끄집어내는 걸 헤겔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단어조차도 이렇게 단어 의미를 추가하는 것도 기존 철학과 달라요. 기존 철학은, 이게 우롱차인데 개념을 부여한 것은 나란 주체가 이걸 객체 삼아서 부여하잖아요. 그런데 헤겔은 그게 아니고 주체와 객체, 정반합이 완성된 걸 개념으로 보는 거예요. 개념이 주체, 객체보다 더 세다는 겁니다. 더 우선적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는데? 개념에 의미가 있거든요. 우롱차의 용도는 목마를 때 마시는 거다. 의미가 있잖아요.
개념을 헤겔은 신의 작용으로 봅니다. 헤겔이 왜 자꾸 이런 이야기 하느냐 하면, 어쨌든 유한적인 것은 무한적 것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연결하는 방법은,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에요. 객체가 하나님이다. 너는 인간이고 객체는 하나님이라고 돼버리면 하나님 믿는 주체로 돌아오죠. 결국 내가 나를 믿는 셈이 되죠. 마치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이것과 똑같은 소리란 말이죠. 예수 믿는 나를 계속 유지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걸 지금 헤겔은 피하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이걸 피하려고 하는 겁니다. 믿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은 구세주다. 이게 개념이란 말이죠. 예수님이 구세주란 걸 믿으면 내가 믿는 것 맞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개념이 주체, 객체, 객체라는 건 목사님, 옆에 있는 장로님. 어떤 장로님이, “예수님이 구세주로 믿으면 구원받는데.” “그래요? 장로님, 믿겠습니다.” 그래서 믿어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면 객체는 장로가 되고 믿는 주체는 내가 되지요.
내가 예수는 구제주란 개념을 가져오면 그게 답니까? 아니잖아요. 며칠 뒤에 보니까 예수님이 구세주란 개념이 바뀌지요. 시간 따라 바뀌게 돼있어요. 예수님이 구세주란 것에 이런 뜻이 있었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처럼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점점 더 늘어나잖아요. 늘어나고, 늘어나고 어디까지 늘어나겠어요? 진짜 하나님께서 주신 개념이 합치할 때까지 늘어나겠지요. 그러니까 개념을 통해서 신과 결합시키겠다는 말입니다. 헤겔의 작전이.
예수님, 내가 아는데? 아니요. 그때만 알지요. 시간이 가미돼요. 시간이 가미되고 세월이 흘러가면 전에 알던 예수와 지금 예수가 다르지요. 그러면 우리가 개념에 종속돼야 되지 내가 예수 믿는다는 내가 나한테 종속되면 돼요, 안 돼요? 이건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시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철두철미하게 따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뭔가 의식할 때 의식의 대상이 개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개념보다 더 높은 개념, 새로운 개념, 더 깊이 있는 개념이 있을 것이고 그 개념이 마지막 만나는 개념의 윗자리를 ‘이념’이라고 해요. 그럼 개념 끝이라고 하지 않고 이념이란 용어를 또 사용하느냐? 개념은 인간의 주체, 객체와 관련돼있지만 이념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게 육체가 되던, 신체가 되던, 키, 몸무게와 관계없이 이념은 그 사람의 정신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래서 개념보다 높은 것이 이념이 되는 겁니다. 이념이 끝이냐? 아니에요. 이념 다음에 마지막 끝이 나와요. ‘절대정신’이 나와요.
그래서 정반합이란 절대정신이 스스로 정이 되고 반이 되고 합이 되어서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내막을 절대정신이 표현한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그 세계가 어디 있느냐고 할 때 기존의 철학은 인간 세계에 따로 있어요. 그런데 헤겔은 그걸 철폐하고 그 절대정신의 세계가 너라는 겁니다.
이게 컵이잖아요. 기존의 철학에서는 이 컵이 그냥 컵이죠. 컵은 정신에 속합니까, 물체에 속합니까? 물체에 속하지요. 그러나 헤겔에게 이 컵은 정신에 속합니다. 컵이 깨지면 정신이 깨지는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여기서 헤겔은 성육신의 비밀을 봅니다. 하나님은 신체가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육신이 되었지요. 그러면 그 육신은 인간이고 육신 속의 정신만 하나님입니까? 육신, 정신 다 합해서 하나님이죠. 그 하나님의 뜻을 인간은 왜 안 받아드리느냐? 왜 인간들은 물질 따로, 정신 따로 나누느냐? 나누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질이 곧 정신이라는 겁니다.
물질와 정신으로 나누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뭐냐 하면, 사람이 숨을 거둘 때 육신은 놔두고 영혼은 떠난다는 말을 하지요. 보세요. 평소에 정신 따로, 육신 따로 대충 임시적으로 결합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숨이 끊어지니까 정신은 정신대로, 육신은 육신대로 흩어진다는 겁니다. 헤겔은 말하기를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주님께서 성육신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기존의 신들은 어떤 추상적인 신을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헤겔의 신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고 성육신한 신,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헤겔이 기존의 신학과 다른 점은, 기존 신학은 성육신 하나님이 따로 있고 또 하나님이 있는데 두 번째 위(치), 성자를 성육신이라 하는데 헤겔은 그렇게 보지 않고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만약에 다른 하나님을 상정하게 되면 인간은 인간 자신에 대해서 허무주의로 일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허무주의를 여러분 아시잖아요. 이 땅에 육신으로 죄만 짓는 것 무슨 소용 있나. 빨리 이 몸 떠나서 하늘나라 가야지. 그렇게 돼버리면 지금 주어진 컵도 정신이라 했는데 이 정신에 대해서 소홀해지잖아요. 대충 살아. 죽으면 그만이고. 내 영혼만 천국 합격하면 끝나는 것이지. 그게 헤겔 보기에 올바른 신앙생활이겠어요? 안 그러면 태만이겠습니까? 자기 인생에 대한 불충성이죠.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아까 칸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도덕적 의무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헤겔은 반대로 뒤집었다고 했지요. 의무가 인간을 위해서 있다고 했지요. 의무가 인간을 위해서 있다면 인간을 이러서는 되지 않지요. 의무고 뭐고 이 땅에서 내 몸 하나 힘들어 죽겠다. 주여, 빨리 떠나서 내 영혼 천국 가게 하소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의무를 스스로 내팽개친 게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자기 몸 편하게 하기 위한 용도로 이용을 해버리면 인간 자체가 주체를 위해서 신을 이용한 것밖에 안 되지요.
절대정신이라 할 때 헤겔은 이런 게 없어요. 칸트는 초월 주체 또는 초주체, 인간의 개개인을 떠나서 보편적인 주체가 따로 있다. 또는 집단주체. 가정과 가정이 모여서 국가가 되잖아요. 국가는 개인들, 가정들이 모여서 국가가 되었으니까 집단을 대표한 주체다.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우리는 일리 있고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헤겔에서는 초월주체나 집단주체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인간의 신체성을 떠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념이라 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이미 개념이고 개념 위에 이념이 있고, 이념 위에 절대정신이죠. 그러면 내 신체가 있는 일상적인 소소한 일, 보통 일이 바로 절대정신의 일부로 가담이 돼있고 포함이 돼있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성경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께 영광을 돌리라는 그 말이 맞잖아요. 6일 동안 일상적인 일하고 제7일에는 교회 가서 주의 일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일상적인 일 따로 있고 주의 일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게 헤겔의 주장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죄만 짓는 일이고, 죄만 지으면 안 되겠지. 주의 일로 영광 돌려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짓는 죄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주이 일이 된 거예요.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신체를 떠나서 따로 추상적인 일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추상이란 게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현실적인 일이지. 이게 헤겔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린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인생이 늘 실패하지 않느냐? 실패와 영광 돌리는 성공이 따로 있어야지. 헤겔은 실패하는 그게 영광이라는 겁니다. 실패가 성공이라는데. 왜 실패해야 되지요? 그것은 하나님도 실패했기 때문에. 이것을 헤겔은 하나님의 자기 슬픔이라고 했어요. 또는 하나님 자기 울음, 자기 비극. 이건 뭘 의미하는 겁니까? 바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기 통곡과 자기 슬픔과 자기 아픔을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픔에서 벗어날 때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아픔을 품어야 신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있어야 되지 십자가 고난을 벗어나 버리고 하나님과 화해나 합일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아픔과 함께 있을 때 그게 하나님 화해고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까 주인과 노예 있지요. 여러분 노예 되고 싶어요, 주인 되고 싶어요? 아까 상호변증법이라 했지요. 주인은 노예를 만나야 되고 노예는 주인을 만나야 돼요. 노예가 주인을 만나야 노예라는 개념이 나오고, 주인이 노예를 만나야 내가 주인이라는 개념을 만나는데 노예가 없으면 주인이란 개념이 안 생기지요. 그렇게 만나게 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에요. 주인은 노예를 만남으로써 노예 없이는 못 사는 주인이 되는 거죠. 그러면 주인이 아니고 졸지에 내가 노예에 질질 끌려 다니는 노예가 되는 겁니다. 상호변증법이니까.
이 말은 이런 거예요. 잘 산다고 까불지 마라. 잘 산다는 것은 누굴 전제로 해서 잘 사는 거예요? 못 사는 사람을 전제로 해서 잘 사는 거잖아요. 한국에서 돈 없어도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되면 기초생활비용을 누가 대줍니까? 국가에서 대주지요.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한테 대줍니까? 안 대주잖아요. 기초수급자가 아프리카 사람보다 잘 사는 것 맞지요. 그런데 왜 실패했다고 해요? 아직까지 더 큰 변증법을 못 만나서 그래요. 자기ㅏ 대한민국 개념으로 스톱하니까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겁니다. 정작 아프리카 가게 되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산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러면 아프리카가 끝이에요? 미국 가 보세요. 미국보다 못 살잖아요.
그렇게 따지다 보면 어디까지 가야 돼요? 성육신 앞에 설 때 모든 개념, 진리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겔은 생명이라 했어요. 생명, 진리, 이념, 개념, 절대정신은 다 신을 다양하게 표현해요. 생명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너희 육신 자신이 곧 진리요,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생명은 오래 영광스럽게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그 생명은 날마다 쪼개지고 분열되고 깨지는 생명, 그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겁니다.
지금 강의 흐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헤겔의 입장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 개념 작용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존에서 실패했는데 예를 들어서 마르크스 같은 경우에 혁명에 실패했는데 노동자여, 궐기하라, 해서 혁명에 성공한 계기가 와서 드디어 한 편이 되어 공산사회가 유지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이게 헤겔의 철학이 아니에요. 여기서 화해된다, 정반합이 된다는 말은, 인간은 당연히 실패해야 되고 실패한 것을 성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은 애초부터 늘 성공을 해온 거죠. 논리가.
그렇다면 헤겔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에 들어갑니다. 그게 시간 개념입니다. 시간 뒤에 붙는 게 있어요.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은 멈출 수가 없다. 헤겔은 이걸 개념으로 보지요. 그러면 최고 개념은 고정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념이 되니까. 이념 위에 절대정신이 있지요. 그럼 시간은 그 자체가 영원한 겁니다. 여기서 헤겔의 어려운 말이 뭐냐 하면, 시간이 영원하다는 말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은 아니라고 했거든요. 지속되기 때문에 시간은 영원하다는 뜻이 아니고 시간 자체가 그냥 영원한 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이, 방금 제가 말했잖아요. 지속이 아니고 그냥 시간은 영원합니다. 이걸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요. 왜냐하면 시간이란 것은 그냥 흘러가고 날마다 바뀌는 의식을 두고 이야기하잖아요. 만약에 달라지지 않는다면 시간은 측정이 없지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는데 거기서 오랫동안 있었던 여자 분이 나중에 구출된 뒤에 자기는 이틀 지났는지 알았는데 16일 지났어요. 이상하잖아요. 16일인데 왜 이틀로 생각할까요? 주위에 변화가 없으니까 고정된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고모가 있는데 어릴 때 조카를 봤어요. 고모의 주체 안에서는 어릴 때 본 조카 얼굴이 그대로 박혀있겠지요. 그런데 16년 지나서 조카를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요. “너, 왜 그렇게 늙었나?” “고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상호변증법이에요. 뭔 뜻입니까? 내 시간은 천천히 흘렀는데 네 시간은 왜 그렇게 빨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요. 물론 아인슈타인은 개념 대신 빛의 일정한 속도를 집어넣고 그걸 밝혀냈지요.
왜 조카를 늙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동안 자기가 장착하고 있던 정, 자기 주체 안에서 조카의 시간은 정지가 된 거죠. 이 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조카 빼놓고 자기가 평소에 만난 사람은 자기 따라 같이 흘러가니까 시간은 정상대로 흘러가는 줄 알았지요. 상대적으로 조카는 빨리 가고.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가 나중에 천국 갔을 때 기존의 시간적인 경험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처음이요 나중이죠. 마태복음 10장에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잖아요. 모세가 기원전 1440년, 엘리야가 900년이면 대략 600년 차이 난다고 봅시다. 600년 차이 날 때 모세가 엘리야에게 늙었다는 소리 안 하지요. 왜냐하면 천국은 영생이 있잖아요. 시간 개념이 영생에 자리 잡으면 흘렀다, 말았다가 이미 없어요. 바로 옆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바로 옆에 같이 있는 거예요. 왜 그렇게 늙었냐고 하면 말이 안 되지요. 늘 같이 있었던 거예요.
히브리서 12장 봅시다.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증인들이 뭡니까?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경주했던 선인들이죠. 올림픽에서 마라톤 끝날 때 주경기장으로 도로 돌아오잖아요. 주경기장에 누가 있습니까? 먼저 뛴 사람, 달릴 때 구경했던 관람객들, 중계 카메라도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노아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달렸지요. 누굴 보고 달렸습니까? 예수님 보고 달렸지요.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달렸지요. 더 나은 본향이 있으니까 예수님 바라보고 달렸잖아요.
그런데 이미 아브라함이 달릴 때 누가 있었습니까? 허다한 증인들이 힘내라, 힘. 보통 노아부터 시작해서 노아, 아벨, 구원받은 아담, 힘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 12장은 시간이 지상의 관점이 아니고 천국의 안목으로 바라볼 때 같은 경기장 트랙을 달리고 있는 거예요. 시간은 1초도 흐르지 않는 겁니다.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고 있고 그 증인 중에 우리 주님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7장 적용시켜 봅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잖아요. 그때 갑자기 예수님 영광이 사라지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나서 너희는 예수님의 말 들으라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 안 갔잖아요. 옆에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지요. 조금 전에 본 것은 뭡니까? 예수님이 해 같이 빛났잖아요. 빛나니까 하나님이고 안 빛나면 육신이고 인간이고 그렇습니까? 빛나지 않은 주님도 하나님 맞지요. 지금 헤겔이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신으로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아닌 게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교회에서 나오는 모든 용어를 헤겔은 철학적 용어로 다 바꿨다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하는가? 교회 가는 사람들이 일상 따로 교회 가서 은혜 받겠다고 따로 노니까 이것은 일상에 있는 하나님 뜻을 그들이 파악을 못하고 자기 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헤겔은 철학 작업을 하면서 네 일이 하나님 일 정도가 아니고 네가 바로 하나님에 속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거예요. 제가 지금 헤겔 철학의 막바지를 이야기합니다.
헤겔은 어디까지 나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아니 생성했다. 따라서 뭘 거부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거부해요. 왜? 자연이 곧 신이기 때문에. 이건 스피노자 이론과 똑같아요. 그리고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신 안에서 양태, 모양새에 불과한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헤겔은 말하기를 이미 하나님이 자연과 화해를 했다는 거예요. 자연과 화해했다는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연에 속하는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그걸로 끝. 이미 하나님은 자연과 화해했어요.
하나님은 유가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고 자연 자체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가장 하나님 됨은 자연세계와 더불어 있고 여기에 양태가 있는 겁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원리를 거기다 퍼뜨리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닌가, 라고 따지겠지요. 하나님은 네 인격 속에 살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