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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13강-YouTube강의(인생의 정답)150507-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

113강-YouTube강의(인생의 정답)150507-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80.231.90.76)

113강-YouTube강의(인생의 정답)150507-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113강, 제목은 ‘인생의 정답’입니다. 참, 정답을 미리 알고 있으면 기죽을 일이 없죠. 인생에서 제일 신나는 것이 처음과 끝을 다 알아버리면 그야말로 세상에 꿇릴 것이 없이 자유를 만끽할 것입니다. 그 정답이 어디 있느냐, 이 정답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제가 정답이 성경 안에 있다고 하니까 성경 어디에 있느냐? 합니다. 이렇게 찾아서 그걸 뽑아내려고 하는데, 뭐든지 정답이 있더라도 그걸 내 걸로 만들면 이미 정답은 사라져버립니다.

하늘에 있는 파랑새가 아름답지만 그 파랑새를 손에 쥔 순간 아주 썩은 냄새가 나는 시체가 되고 말죠. 따라서 정답은 소유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돼야 합니다. 우리가 정답 안에 포함이 되어서 먹든지 마시든지 뭘 하든지 정답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근데, 사람은 그것이 분에 차지를 않으니까 정답을 내 손에 쥐어가지고 이것을 어떤 영역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리되면 정답이 주인공이 아니고 정답을 쥔 본인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거는 오히려 정답을 질식시키는 현상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정답, 누굴 만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상황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죽지 않고 절망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는 그 정답은 성경에 어디 있느냐, 성경 전체에 녹아져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녹아져 있는 정답을 어떻게 뽑아낼 것인가. 이 뽑아내는 과정이 중요한데요. 뽑아내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현상이 뭐냐 하면, 기죽지 않고 거부하고 용감하게 거절하는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 예를 역대하 26장 16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건 웃시야 왕 때 있었던 일인데, 웃시야 왕은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고 남 왕국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왕입니다. 거기의 왕인데 웃시야 때 나라가 굉장히 강성해졌어요. 강성해지니까, 성경 자체가 정답이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는 겁니다. 강성해지니까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다음에 말이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정답 안에 들어 있어요. 근데 웃시야 왕은 본인이 강성해지고 행복해지고 본인 뜻대로 되는 것을 정답이라고 여기는 그 잠재성이 그가 강성해지기 이전부터 잠복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게 어디 남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웃시야 왕의 이야기만 되겠습니까? 우리이야기죠. 요,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는 정답을 원합니다. 정답이 없어서 못합니다. 정답만 있으면 남한테 기죽을 필요도 없고 남한테 굽실거릴 필요 없어요. 당당합니다. 그럼 정답을 얻고자 하겠죠.

근데, 정답을 얻고자 하는 그 정답을 얻고자 하면서 그 의도 안에 뭐가 이미 삽입되어 들어가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잠복되어 있는,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께 대드는 죄가 정답을 아는 시도 안에 이미 합류가 되고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러면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우리가 그 나쁜 죄를 빼고 정답만을 알고자 하면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정답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과정을 병행해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정답을 알게 되면 나는 멋있는 사람이 될 것 같지만, 그 멋있는 사람인 내가 오히려 정답을 아는 순간 멋있기는커녕 부끄러운 사람, 죄인으로 전락하면서 비로소 우리 눈앞에 정답은 전개됩니다. 반드시 그래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 정말 우리는 천국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 없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러한 속성이 우리 내부에 들어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회개 없는 천국은 없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에 간 사람이 있기는 있는데 그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바로 천국을 탐내는 자체가 천국에 어울리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욕심인 것을 고백하는, 회개의 형식으로 고백하는 방식을 통해서 천국은 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무엇 하나 순순히 들어가는 법이 없어요.

자, 그 다음에 그 웃시야 왕이 강성해졌거든요. 강성해졌다는 말은 사실은 정답을 얻으면 자동적으로 강성해진다는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는 뜻이죠. 근데, 우리는 "정답"과 "강성"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돼요. 정답을 얻었으면 남한테 짓밟힘 당해도 감사해야 되고, 남한테 짓밟힘 당한다는 것이 그렇게 싫고 짜증나거든 정답은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답은 어림도 없습니다. 웃시야 왕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는데, 범죄 했다고 누가 이야기할 사람 없습니다.

웃시야가 행동에 옮깁니다. 행동에 옮기는 것이 뭐냐, 16절,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을 분향하려 한지라” 17절,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 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절, “웃시야 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자, 여기서 제사장 아사랴가 대단히 용감하죠. 군사력을 누가 갖고 있는가? 경찰권을 누가 갖고 있는가? 웃시야 왕이 갖고 있습니다. 왕이 이 소리 듣고 기분 나빠서 경찰권이 없고 군사력이 없는 아사랴를 그 현장에서 즉사시킬 수 있고 살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사랴 제사장은 겁나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해버립니다. 왜요? 아사랴는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겁나지를 않아요. 죽는 것이 겁나지 않으니까 누구한테 의도적으로 굽실거리지 않죠.

남한테 굽실거린다는 것은 곧 뭘 뜻하느냐, 내가 굽실거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수명이 더 연장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때문에 굽실거리거든요. 물론 남을 배려해서, 모르는 사람을 배려해서 그들에게 기분 좋게 해서 어떤 정답을 알려주게 되는 그런 순간도 옵니다 만은 그건 사랑이고요. 대부분의 알랑거림, 굽실거림은 나를 더 사랑해서 그렇겠죠. 그것은 뭐냐, 죽기 싫어서,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겁니다.

그러나 사랑은 두려움과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서로 합치되지 않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말이고 두렵지 않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부부사이도, 가족끼리도, 자식 간에도 같이 통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사장 아사랴가 왜 이렇게 겁이 없죠? 왜 왕에게 지적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아사랴는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답이 뭐냐, “왕이여! 왕이나 내나 이 유다 나라에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 안에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개인적 사고를 하지 않은 거죠.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남한테 더욱더 도움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슨 짓을 해?’ 라는 사적인 견해를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뭉개버린 겁니다.

정답을 안다는 것은 사적인 기대나 희망은 정답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울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답을 이용해서 어떤 사적인, 개인적인 이득을 얻어 볼까? 하는 것은 정답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 설교해서가지고 교인 수를 더 늘려 볼까? 헌금을 좀 더 모아 볼까?’ 이거는 지금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겁니다. 거룩한 성경 말씀을 가지고.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는 ‘주님, 요걸로 내 인생 끝났군요!’ 라는 마음으로, 그것도 아쉬워서가 아니고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아! 이 설교 마치고 이제 주님 만나는구나!’ 하고 아주 들뜬 마음으로 설교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 설교하는 도중에 어느 교인들한테 양보하거나 굽실거리거나, 진리를 양보하거나 하는 그런 일은 없죠. 그것이 바로 진리와 정답을 아는 목회자의 태도입니다. 설교하다가 죽고 싶은 것이 본인의 여망인거예요. 또 주께서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일을 그렇게 시키시고. 주저할 필요가 없죠. 근데, 그 정답이 뭐냐, 그것은 주님의 언약 앞에서 우리는 다 같이 지배받고 있다는 겁니다.

니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나를 공격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공격하고 내가 공격받는 나도 내가 밉상 받아서 공격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공격 받으라는 뜻이 있어서 공격 받는다. 그러나 그 뜻이 나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현재 주로 살아계시고, 심판주로, 구원주로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증거 용도로 주께서는 이런 사태를 유발했다는 것.

그런 것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사람 앞에서 기죽지 않는 거죠. 오히려 주님을 늘 의식하면서, 의식하다보니까 사람한테 기죽을 필요 없는 것. 주님은 살아계신다. 이것이 인생의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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