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강-에스겔 45장 9-12절(왕의 공정함)150506-이 근호목사
137강-에스겔 45장 9-12절(왕의 공정함)150506-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41)
137강-에스겔 45장 9-12절(왕의 공정함)1505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5장 9절-12절입니다. 구약성경 122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5:9-1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찌니 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히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호멜 십분지 일을 담게 하고 에바도 호멜 십분지 일을 담게 할 것이며 세겔은 이십 게라니 이십 세겔과 이십 오 세겔과 십 오 세겔로 너희 마네가 되게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에 대해서, 이스라엘 통치자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십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이 망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왕들에게 추궁을 했고 왕들은 백성들 눈치 볼 것 없이 하나님 눈치 보면서 하나님 뜻대로 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 나라가 아니거든요. 보통 왕은 자기 나라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내가 왕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왕은 어디 있느냐? 왕은 이스라엘 땅 주인이 왕이에요. 이스라엘 땅 주인이 누구냐? 하나님이시죠.
하나님께서 왕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이 아닌가? 맡기지 않았어요. 왜 맡기지 않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왕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면 왕이 통치할 때 왕의 사적인 견해가 거기에 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지 모세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모세는 그냥 운반한 것뿐입니다. 모세도 말씀대로 못살아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운반이죠. 그래서 “너는 잘났냐?” 하고 모세보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요. 자기한테 편지 전해주는 우편배달부를 붙들고 “너는 잘났어?” 한다는 것이 이상하잖아요.
모세 붙들 수 없고 왕도 붙들 수 없다면 백성들은 왕의 입장, 왕의 자리를 새롭게 생각해야 됩니다. ‘왕 믿고 그냥 살자.’ 라고 할 수 없어요. ‘모든 책임은 왕에게 일임하자 왕만 잘되면 우리도 잘 살겠지.’ 이렇게 편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왕을 통해서 나타나실 진짜 왕, 왕이 없는 게 아니고 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있는 왕을 통해서 숨어계신 왕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 곳,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왕이든 관리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다 같이 율법에 저촉을 받는 입장이라는 뜻에서 그들은 차이가 없습니다.
왕이 왜 필요한가, 하는 것은 ‘내가 말씀대로 안 살면 이렇게 얻어맞는 것, 그리고 이 나라가 이렇게 힘들게 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노릇 하고 왕의 자리를 준 겁니다. 왕의 입장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더 깊숙이 느끼고, 일반백성들이 느끼지 못한 것을 더 많이 느껴서, 왕이 정신 차리면서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백성들아! 우리가 이렇게 하지 말자.’라고 해야 될 책임자가 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왕에게 이야기했을 때 “왕, 너나 당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지적할 때에 그 지적하는 것이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지적하고 있음을 그들이 인정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것에 대해서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다 같은 책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왕이라는 것은 사적인 의견으로서 국가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그 말이지요. 반면에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한 모든 나라는 왕에 의해서, 왕의 결정에 의해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은, 왕이 왕답게 말씀을 지켜야 되는가? 말씀을 완벽하게 못 지키면 왕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도 같이 당한다는 그런 뜻인가? 간단하게 해서 그런 뜻만도 아니에요. 그러면 왕이 모범이 되어서 “내가 모범을 보일 테니 나를 따라 하세요.” 이러면 나라가 잘 되는가? 그것도 아니에요.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에 그런 오해를 하는 목사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주기철 목사가 뭘 잘못 생각했는가? ‘내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지켜주신다.’고 할고 순교를 했거든요. 자기가 순교했어도 교인들은 그냥 신사참배 했어요. 교회 망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 당시에 목사들이 크게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교회를 본인들이 책임져야 된다는 착각을 한 겁니다. 그러면 책임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예, 책임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목사는 왜 있는데요? 모범자, 시범자로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데 시범자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생각할 때 윤리, 도덕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 되는데 그런 시범자가 아니고 어떤 시범자인지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다시 읽겠습니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율법에서 읽었잖아, 율법에서 봤잖아, 그런 뜻이잖아요.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는 말이지요.
이 말이 굉장히 난해한 말씀이에요. 안식일을 어기지 말라고 했는데 그 이스라엘 가운데 유일하게 안식일을 어기는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는 장소가 딱 한 곳이 있어요. 그 장소가 어디냐? 성전 안입니다. 성전 안에서 일하시는, 그러니까 일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성전 안에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성전 안에서 누가 일하는가? 제사장들이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에 개인적인 일을 하지 말라는 그 전체에 위반되는 것 같은데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 곧 사적인 일을 해야만 하는 그것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게 돼요.
그러면 제사장의 일은 사적인 일이 아니고 공적인 일이고 안식일의 일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보통의 법의 이해로부터 예외가 되는, 해당되지 않는 치외법권적인 특별한 장소를 따로 만들어 놓고 율법이 그 바깥으로 전달되는 겁니다. 퍼지는 거예요. 이 말이 어려운데 왜 어려운가? 율법이 그냥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게 아닙니까? 그렇게 떨어지지 않아요. 율법이 폭포라면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단계 떨어지고 떨어진 것이 또 떨어지거든요. 율법이 먼저 떨어지는 그곳이 백성들이 보기에 제일 율법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새를 가지고 일차적으로 떨어지고 떨어진 그것이 2차적으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먼저 떨어진 그 장소는 아주 특별한 장소가 되어서 백성들 보기에 ‘저 사람들은 왜 나하고 똑같이 안 해? 저 사람들은 시범자인데 모범을 보여야지.’ 라고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특수한 자리에요. 이런 자리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중재자, 또는 매개자, 또는 중보자, 또는 중간자라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중보자, 중간자, 매개자, 그런 표현을 해요. 아까 우편배달부라고 표현했는데 사실은 조금 달라요.
우편배달부는 물건만 전달하면 되는데 이 왕, 제사장, 선지자, 기름부음 받은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고 양쪽 다 보이는 자리, 백성도 보이고 하나님도 보이는 특별한 자리에 그들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일반백성들과 다른 방식으로 관리대상이 돼요. 특별한 관리대상이 되는 겁니다. 백성에게 줘야 될 법이 있지만 왕에게 줘야 될 법, 선지자에게 줘야 될 법, 제사장에게 줘야 될 법이 다 따로 있어요.
폭포가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단계 걸쳐서 떨어지는데 그 걸쳐서 떨어지는 그곳, 그곳은 하나님과 백성이 양쪽 다 보이는 곳이에요. 다 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리를 이해를 해도 백성들은 이해를 하기가 곤란합니다. ‘왕인데 우리하고 막 먹자.’ 그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보이는 것과 하나님은 안 보이고 왕만 쳐다보이는 자리와 달라요.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이 속담은 참으로 잘못됐어요. ‘얼마나 무식했으면 낫을 놓고도 기역자를 모르는가?’ 이렇게 하는데 낫 놓고 기역자를 안다는 그 자체가 사실은 불가능해요.
왜냐 하면,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낫은 그냥 낫으로만 보이지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이런 것의 존재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낫에서 기역을 끄집어낸다는 이것은 기적이고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에요. 그러면 낫 놓고 기역자를 아는 이것은 뭐냐 하면, 양쪽을 다 알아요. 낫도 어떻게 생긴 줄 알고 기역, 니은, 디귿도 아니까, 기역자하고 낫하고 모양이 같으니까 ‘아이고, 낫 놓고도 기역자를 모르나?’ 하지만 본인은 양쪽 다를 보고 있거든요. 바로 그게 중보자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고.
그러니까 일반백성들은 왕을 이해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한다고요? 이해 못해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못하는 것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것과 똑같아요. 사람은 한쪽만 봐요. 이 세상만 본다고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 세상만 봐요. 성령을 받지 않고 목회하는 목사들, 그저 교회만 바라봅니다. 교인 수, 헌금액수, 자기가 얼마나 유명세를 떨고 있는지, 얼마나 자기의 노후대책이 되는지, 그런 것만 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그런 것만 봐요.
그러나 성령을 받은 목회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교인들이나 교회와 관계가 없어요. “주여, 뭘 할까요?”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낫 놓고도 낫을 안 보고 기역만 보는 거예요. “주님, 뭐 할까요? 어떻게 설교하면 될까요?” 주님 보고 물어요, 주님 보고. “여러분, 어떻게 설교해 드릴까요?” 이거 아닙니다. 어떤 부교역자가 고백하는 글을 잠깐 봤어요. 평소에 담임목사가 모든 설교를 다 해왔답니다. 그 사람이 신학생인 모양이에요. 페이스 북에 그런 글을 올렸는데 아마 신학생 같아요.
갑자기 당회장이 전화를 걸어와서 하는 말이 “전도사님! 이번 주일에 효도에 대해서, 부모공경에 대해서 설교하세요.”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평소에 설교를 안 맡았는데 갑자기 효도를 주제로 한 설교를 하라고 한 거예요. 그 사람이 혼자말로 페이스 북에 이야기하기를 ‘평소에 효도를 해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설교하지?’ 그걸 보고 제가 느낀 것이 있어요. 5월 8일이 대한민국의 어버이날입니다. 그래서 5월 3일이나 5월 10일 주일에 어버이 효도에 관해서 설교를 하라고 하는 그 목사라? 이 어버이날이 주님이 만든 겁니까? 어버이날 안 지키면 지옥 갑니까? 효도하면 천국 갑니까?
목사가 해야 될 설교가 뭐예요?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도록 설교하는 것이 목사의 할 일이잖아요. 하나님 나라 갈 수 있도록, 교인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괜찮아요. 자기식구밖에 없어도 괜찮아요. 노아가 자기 식구만 데려가도 손들고 벌 선 것이 아닙니다. “고작 여덟 명? 다른 식구들은 다 어떻게 했어?” 이렇게 꾸중들은 것이 아닙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다른 사람 올까봐 내가 조마조마했어. 참 잘했어.” 이렇게 칭찬이 늘어져요. 개척교회 교인이 두 명입니까? 참 잘했어요. 세 명이 될까봐, 하나님이 세 명이 될까봐서 걱정하고 있어요. 성도도 아닌 것이 그 교회 들어올까 주님이 걱정한다니까요.
목사는 사람을 보고 설교하면 안돼요. 주님을 바라보면서, 본문의 이 말씀을 어떻게 전할까, 그것만 생각해야 돼요. 가정의 달이라고 부모효도설교하고, 어린이설교하고, 추수철에 추수감사설교하고. 부모효도에 대해서 이야기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항상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야 됩니다. 어버이주일에 설교할 때는 내용이 딱 하나밖에 없어야 돼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그 설교만 하면 돼요. 그것보다 더 귀한 효도는 없습니다. 가정의 날 특별설교에요.
하나님이 왕에게 “왕아! 너희들은 공정해야 된다.” 하는 것은 새 성전 이전에 이미 왕들이 공정하지 못한 왕 짓을 해 왔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 성전 짓고 난 뒤에 왕들은 공정하게 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정함을 행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성경에서 ‘공정하게 공의를 베풀라.’ 하는 말은 그 전에 공의를 베풀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사례를 전제로 해서 공평과 공정과 공의를 언급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이 오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여러 사람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인간적인 믿음은 아니올시다.’를 충분히 보여주고 그들이 실패, 실패, 실패, 실패한 사례의 근거위에서 아브라함 믿어서도 안 되고, 이삭 믿어서도 안 되고, 오직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으니 오직 예수 이름이라는 것이 실패성 그 위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죽음 위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겁니다.
십자가가 그런 거예요. 십자가에 누구 하나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말은 우리는 다 죽었다는 뜻이에요. 십자가가 그렇게 간단한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은 우리는 살아도 죽은 존재라는 뜻이에요. 그걸 믿을 때 십자가를 믿는 것이 돼요. 십자가를 믿는데 헌금할까요, 선교회비 낼까요, 봉사할까요, 그게 왜 나옵니까? 십자가 믿는다면서. 죽은 인간이 죽을 짓 하는 것을 왜 믿어요? “주님 십자가 믿습니다. 믿는데 마트에 가서 물건을 얼마나 깎아야 됩니까?” 그런 이야기는 할 필요 없잖아요.
십자가 믿고 물건 값 잘 깎으면 구원 받습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교회생활 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생활이 십자가에 더 이상 보탤 필요도 없는, 오히려 십자가를 가리는 죄악된 것임을 아울러 믿을 때, 십자가와 더불어, 예수님이 죽으심과 우리 일상생활의 죄성과 아울러 껴안을 때 그게 십자가 믿는 겁니다.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어떻게 할까요, 기도는 어떻게 할까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십자가 증거 하면 되지. 그런 것은 다 죄거든요.
주님께서 그 전에 공평과 공의에 대해서, 이미 실패한 사례들을 죽 깔아놓고 새 성전과 더불어 “너는 공평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존의 왕들이 범죄 했다는데 그 범죄의 사례가 뭐냐? 범죄사례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북쪽과 남쪽의 두 왕국으로 나눠졌습니다. 북쪽 왕국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남쪽 왕국은 유다왕국이거든요. 나라가 둘로 쪼개진 그것이 바로 공의와 공평하지 못했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아까 처음에 설교 했듯이 왕의 자리가 백성만 보이는 자리라면 백성도 아담의 자손이고 왕도 아담의 자손이니 왕도 양심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공평하게 정치하겠습니다. 바르게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이것은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사람에게만 좋게 하는, 그들이 원하는 왕으로서만 살면, 그런 쪽에서 자기 맘대로 공평과 공의와 정의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대실수가 되고 대 실패가 되는 겁니다.
양심상의 공의와 공평, 인간들이 알고 있는 공의와 공평.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잖아요. 낫만 보고 낫이라고 하는 그러한 공평과 공의는 하나님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낫도 보고 기역자도 보고 양쪽을 다 보면서 ‘아하, 인간적인 양심상의 평등과 정의실현, 그게 바로 공평치 못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이걸 아셔야 됩니다. 흔히 기독교의 이름, 복음의 이름으로 정의사회구현을 부르짖는 사람들, 신학자나 목사들의 특징이 뭐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거예요.
가난한 자의 편에 선다느니, 사회정의, 경제정의, 평등이 어떻고,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언제 예수님께서 환경운동 했습니까? 주님이 오실 때 쓰레기봉투 들고 왔습니까? “베드로야! 이제부터 공무원연금 개혁해라. 국민연금 제대로 살리고!” 이런 이야기를 주님이 했습니까? 칼로 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지요. 내 나라는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너희들은 내(주님)의 나라를 몰라요.
그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백성들 편에 서서 백성들에게 공평, 평등,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다고요. 그래서 그들은 구제를 확대하고 십일조 모아서 어려운 사람에게 줬던 거예요. 그랬던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왕들의 특징이 있어요. 왕들의 특징은 하나의 국가 안에서 누구를 승자가 되게 하고 누구를 패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가 다 승자가 되도록 하는 조치를 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모든 왕들이 그것을 생각해요.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라를 둘로 쪼갠 거예요. 왜 쪼갰느냐? 불평등하기 때문에? 정의구현이 안되기 때문에?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 다윗의 언약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라가 둘로 갈라진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이 뭐냐?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것을 무시한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서 나라가 둘로 쪼개진 겁니다. 정말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이사야 1장 18절에 보면, 나라를 하나님께서 둘로 쪼갠 이유가 나와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갠 이유가 국가정책을 잘못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죄 문제에요, 죄. 그리고 그 죄 문제라는 것은 한쪽만 바라보는 백성들, 한쪽만 바라보는 백성들은 몰라요. 뭘 모르는가? 반드시 우상이 있어야 돼요. 우상숭배가 일어나야 됩니다. 나라가 왜 둘로 쪼개졌는가? 솔로몬이 우상숭배해서 쪼개졌어요. 르호보암과 북쪽 여로보암의 둘로 쪼개진 거예요.
성경에서는 죄라는 게 우상숭배, 죄라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약속이 아니고 인간이 알고 있는 자기의 이성과 감정과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생각으로 국가경영에 나섰던 왕들이 전부 다 결국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우상숭배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왜? 평등해야 되니까. 각자 국민들의 종교는 존중해야 되니까. 그걸 가지고 종교의 자유, 다른 말로 표현의 자유라고 합니다. 대한민국헌법 제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게 우상숭배에요. 그게 우상숭배라니까! 지금 나 혼자 웃고 있는데. “목사님, 학교에서 그걸 가르치는데요?” 배워야지요. 우리가 우상숭배의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학교 가니 진화론을 가르치는데요?” 진화론을 배워야지요. 배워야지, 배워야지. 왜? 우리가 진화론을 원하고 있으니까. 내 몸이. 우리 몸은 창조론을 원하지 않아요. 진화론을 원해요. 우리는 갖고 있는 이 양심과 이성의 가치를 빛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똑똑하니까. 따지면서 제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길로 가겠다는 거예요. 그게 우상숭배에요.
그 뒤에 남쪽의 왕, 남쪽의 유대나라. 북쪽은 아예 내놓은 자식들이고요, 망해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남쪽에 있는 왕들, ‘왜 나라가 둘로 쪼개졌는가? 다시 말해서 왜 그들은 죄도 뭔지를 모르는가? 왜 그들은 서서히 멸망해 가는가? 왜 그들은 유다나라를 다윗나라처럼 하지를 못하는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유다의 왕들이 죽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난 뒤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왕이 양심에 가책이 되거든요. ‘아, 아버지는 나라를 하나로 다스렸는데 자기시대에 둘로 되었구나. 그렇다. 내 힘으로 저 북쪽 나라를 공격해서 아버지의 시대처럼 다시 하나 된 나라로 만들어야지.’ 이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겁니다.
우상숭배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다윗의 약속을 버린 것을 우상숭배라고 하는 겁니다. 다윗의 약속은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서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스리고 다윗왕은 그냥 죄인으로 살면 돼요. 백성들 앞에서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아,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구나.’ 영어로 하면 ‘NOTHING’이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구나.’ 이런 식으로 자기를 낮추면서 폭포수처럼 한 단계 아래로 말씀만 내려 보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다윗이 잘못한 것은, 다윗 자신이 잘났다 하니까 잘난 자기가 말씀을 가로막은 거예요. 가로막고 백성들 앞에 선 거예요. “나는 이스라엘 왕이다. 까불지 마라.”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밧세바와 간통한 거예요. 그것으로 가슴에 구멍이 뚫린 거지요. 가슴에 구멍이 뚫리니까 말씀이 그대로 내려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율법과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다.” 이 다윗의 심령으로 이스라엘이 잘 되는 겁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자신이 구멍 나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그 모습만, 형식만 “옛날에는 나라가 하나로 좋았는데 둘로 되었으니 남북통일 해야지.” 하는데 선지자가 말렸지요. “가지 마세요. 그것이 주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율법을 가르치세요. 이미 북쪽은 내놓은 자식이고 율법을 가르치세요.” 율법을 가르치니 이상하게 나라가 잘되는 거예요. 잘되고 강성해지니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교만하더라. 강성하니까 교만하다는 말이 뭐냐?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뿐만이 아니고 서서히 부정적인 사례를 통해서 언약의 실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나중에 신약에 오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그것과 연결되어 있어요. 하늘나라 언약백성은 항상 강하면 교만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오히려 시삭이라는 군대가 와서 솔로몬의 부귀영화 다 빼앗아갔습니다.(왕상 14:25) 그래서 르호보암이 말년에 겸손해져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남겨뒀다고 되어 있습니다.(대하 12:12) 그 다음 왕이 아비야인데 아비야가 북쪽과 싸움을 하게 돼요. 무기도 별로 없으면서 나섰는데 작전이 실패했네. 북쪽 이스라엘이 복병을 숨겨놓은 줄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물려준 나라를 내가 차지하리라. 남북통일 하겠다.” 이렇게 하다가 복병에 걸린 거예요.
그때 아비야왕이 어떻게 했느냐?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살려주세요.” ‘뽀빠이, 살려주세요.’ 한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무기도 변변치도 않은데 그 때부터 이스라엘이 대패해서 유다가 승리했습니다. 그거 보여주는 게 아비야 왕이에요. 그 다음에 아사 왕인데 아사 왕 시대에 유명한 사건은 구스, 현재의 이집트인데 이집트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왔습니다.(대하 14:9) 백만 대군입니다. 그때 아사왕이 기도를 해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승을 하게 했어요. 뭐라고 기도했느냐? 이것은 아버지 아비야하고 똑같아요.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보세요. 왕이라는 자리가 양쪽을 다 보는 자리에요. 아주 특이한 자리에요. 낫놓고 기역자도 알고 낫도 알고 다 아는 자리라고요. 백성들은 모르지요. “주여!” 그러니까 백성들은 안봐요. “주여, 도울 자가 주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백만 대군을 오게 하신 것도 주가 오게 하셨지만 그를 처단하는 것도 주님밖에 없습니다.”라고 한 거지요.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했더니 백만 대군이 대패했습니다.
이게 언약의 위대한 힘입니다. 언약의 힘. 우리는 그 언약의 힘으로 지금 천국 가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힘을 우리는 외면해 버립니다. 살기 바빠서. 그럴 때마다 우리 힘으로 안 되는,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게 해서 다시 주께 부르짖게 하시는 방법,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케 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께 헌금케 하는 헌금이 있고 봉사케 하는 봉사가 있고 모든 신앙생활은 주께서 알아서 해주시는 그런 혜택을 입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렇게 백만 대군을 이겨놓고 그래서 강성해졌잖아요. 그래서 또 교만해요. 북쪽 나라 바아사 왕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니까 이번에는 아람군대에 돈을 주면서 도움을 청했어요.(대하 16:2) 그러니까 하나니라는 선견자가 “백만 대군을 물리칠 때 하나님이 하셨는데 왜 이제 와서 사람을 의지합니까?” 하니 왕이 “예끼! 내가 백만 대군을 이긴 왕인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사왕에게 발병 걸리게 해서 십리도 못 가게 만들어버렸어요. 발병 걸렸을 때 하나님 찾지 않고 의사를 찾으면서 그대로 죽었어요.
제가 아사까지 이야기했는데 그 뒤에 나오는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사밧이 율법을 가지고 지방마다 순행하면서 다 율법을 가르쳐줬습니다.(대하 17:9) 율법을 잘 가르치니 또 나라가 강성해졌어요. 하여튼 나라가 강성할 때 문제가 있어요. 나라가 강성해지니 자기 것인 줄 알고 “이 나라 내 겁니다. 여러분, 내가 공로자인 것 아시지요?” 이래서 북쪽 나라 아합 왕가와 혼인동맹관계에 들어가면서 “아람(길르앗라못)을 같이 치자.” 그렇게 나온 거예요. 아합 왕은 자기 살겠다고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섰는데 우연히 쏜 화살이 날아와서 아합왕이 죽고 여호사밧도 혼쭐나서 집에 돌아온 거예요. 그럴 때 예후 선지자가 하는 말이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그게 다윗언약이 아닙니다.” 하는 뜻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모압과 암몬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참 중요한 말을 해요. “이 전쟁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할 전쟁이지 우리 전쟁이 아닙니다.”(대하 20:5-19) 이렇게 이야기 하고 어떻게 이기는가? 찬양대로 찬송을 부르게 했더니 군대를 몰살시켜 이겼습니다. 찬양으로 이겼어요.(대하 20:21,22)
이쯤 했으면 정신 차릴 만도 한데 정신 안 차립니다. 찬양해서 이겼잖아요. 이겼으니 그 다음부터는 찬양해서 이긴 것이 자기의 공로가 되고 훈장이 되어버렸어요. “나, 이 정도야.” 이렇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 언약이 끊어진 나라 북쪽과 또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왕의 공평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실패한 것이 남의 실패가 아니고 나의 실패로 간주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실패가 내 안에 들어있고 그런 실패한 왕들의 모습이 내 안에 들어 있음을, 말씀이 헛 말씀이 아니고 다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인 것을, 가룟유다가 내 안에 들어 있는 이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거기에다가 십자가를 세우는 거예요.
케이크에 촛불 꽂을 때 케이크 중심에, 제일 위에 꽂잖아요. 십자가를 꽂기 위해서는 도톰한 모든 것은 나의 죄, 그리고 같은 아담에 속했기에 신구약에 나오는 모든 사탄적인 죄들이 바로 우리 안에 가득 들어 있는데 그것을 낫 놓고 기역자 알도록, 바로 나의 죄 속에서 비로소 십자가가 올라오고, 올라오고,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 십자가만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힘으로 애써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우리 기도덕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기도덕분에 살아가고 주님의 자비와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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