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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4. 24)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5. 4. 24) 1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9.133)

광주 강의(2015. 4. 24) 14-1

마가복음 4장 35-41절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큰 광풍이 일어났고, 배가 요동치며 물이 배에 들어와 배가 가라앉게 되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웠습니다. 그 때 잠에서 깨신 예수님을 바람을 꾸짖으시니 바람이 그쳐 잠잠하게 되었고, 그 후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런 꾸중을 듣지 않으려면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았다면 행동을 잘 못 했다는 뜻이고, 그러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잘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서워한 것에 대해 질책을 하십니다. 그리고 무서워한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제 3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실패를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칭찬이 아닌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해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 처했어도 제자들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실패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실패의 현장 속으로 끌어당겨서, 주님으로부터 믿음 없다는 판정을 받은 후에, 구원은 예수님 소관으로 넘어갑니다.

여러분들은 늘 실패를 하고 계시지요? 제자들의 실패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믿음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 자체가 우리의 실패를 유도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 말씀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 제자들이 믿게 되면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죄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믿음 속에 예수님의 행함만 들어가면 안 되고, 왜냐하면 예수님의 행함에는 어떤 대상이 있어요. 소유를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을 믿음 없음으로 드러내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 대상에 우리가 뛰어들어 ‘저도 믿음 없어요.’하고 손들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안 믿네. 나 같으면 믿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을 주께서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도외시하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했지요. 그러면 ‘반갑다 친구야!’하면서 얼른 그 실패 현장에 뛰어드세요.

실패 현장이 중요합니다. 왜? 그 실패는 본인이 알아서 실패한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조성된 실패의 장이기 때문에 그곳이 구원의 현장입니다. 그런 기회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백화점에서 명품을 싼 값에 파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광고 유심히 잘 봐야 돼요. 언제 할인 판매를 하는지.

우리가 알아서 실패를 반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성을 해도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의 특징이 뭔가 하면 ‘스스로 반성하면 신께서 귀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스스로 반성하면 그 반성한 존재가 괜찮은 존재, 즉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반성에 반성을 거듭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용서를 일흔 번의 일곱 번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실패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실패는 본인이 만든 실패가 아닌 주님이 의도적으로 실패자로 규정하시기 위해 일으킨 실패여야 합니다. 그 실패 현장이 구원의 현장입니다. 성경이 이런 말씀을 기록한 것은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의 상대자를 간택하십니다. 이 간택된 사람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본의 아니게 참여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세트가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이 세트(혹은 묶음)는 단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구원 받을 사람에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루었던 그 방식은 그대로 반복시킵니다.

이것이 일상이 되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제자들이 당했던 책망과 실패를 우리도 공감하면서 주님과 우리가 연결된 자라는 것을 느끼는 감격을 맛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실패 합시다. 믿음에 실패합시다. 이것이 첫 번째 관문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실패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여하간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주께서 다 주십니다. 아이들 키트 놀이하는 것 있지요? 문방구에서 사서 가위로 자르고 본드로 붙여서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로봇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어른들도 이런 일을 합니다. 조립식 가구나 택배로 물건을 구입한 경우 설명서를 보면서 꿰 맞추는 것을 해야 완제품이 됩니다. 그런데 맞추다가 짜증나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다 맞춘 것 같은데 부속이 하나 남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 조립한 것입니다. 제대로 조립하면 남는 것도 없고 설명서에 나온 대로 완전한 모양의 제품이 됩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만나면서 장차 제자들이 구원 받는데 꼭 필요한 부속품들이 다 구비되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도바울의 편지를 설명하면서 ‘그냥 보지 말고 공관복음서를 거쳐 봐야한다’고 말했지요. 왜냐하면 공관복음에는 예수님 곁에 12제자가 있어요. 그게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12제자에게 하신 일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십니다.

첫 번째로 믿음에 실패하세요. 내 믿음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가 뭔가 하면, 실패한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40-41절에 보면, 무서워하고 두려워했지요. 두 번째 세팅된 부속품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제자들이 주님보시기에 불합격한 이유가 무서워한 요소가 있어요. 왜 무서워했을까요?

배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풍랑이 일었어요. 즉 죽을까봐 무서워한 거예요. 그러면 왜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요?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겠습니다. 아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성적이 내려갔어요. 그래서 엄마가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회초리를 맞는 것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축구하다가 넘어져 무릎이 까지는 것이 더 아파요. 그러나 학교에서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요. 아픈 것보다 창피한 마음 때문에 아파도 참아요. 그런데 엄마한테 매를 맞을 때는 아픈 것 이전에 두려운 거예요. 이게 왜 그런가 하면, 애들은 엄마를 자기가 찾고 있는 사랑 덩어리로 봐요. 손바닥이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아픈 거예요. ‘엄마가 혹시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죽는 것이 무섭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살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터에 못 나가지요. 사람은 죽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에요. 나를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더 무서워해요. 그리고 외로운 것을 무서워해요. 날 예쁘다고 해줄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워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인간이 단순한 생물적인 존재라면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위험을 의미합니다. 버림받음. 천시. 이런 식으로 자기 죽음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치매 걸린 노인들이 제일 겁내는 것은 자기 몰래 자식들이 떠날까 두려워합니다. 어린아이 시절로 퇴행하는 겁니다.

아이들의 자아는 밥을 먹인다고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때 그것이 자아(나)입니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로부터 사랑받는 나에요. 이것을 관계성이라고 하는데, 아이들에게 “너 누구니?”라고 물으면 “나는 이 집 아들이에요.”라고 답해요. 요즘 딸 바보인 아빠들이 많은데, 딸이 자랑하기를 “우리 아버지 힘세다.” 이걸 친구들에게 자랑해요. 이게 자아상이에요.

‘우리 집은 잘 산다. 너희 집은 못 살지?’ 아이들 다툼이 이런 것입니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은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잣집 아이들의 특징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침착하고 여유롭고 사랑이 많아요.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인격적이에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까칠해요. 그리고 정서적으로 불안해요. 외부가 불안정하니까 안정을 찾지를 못해요. 인간은 원숭이나 코끼리와 달리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요. 사단에게 퍼붓는 하나님의 최고 형벌이 무엇인가 하면, 절대 죽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아파도 못 죽어요. 만약 여러분이 딸이 보는 앞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딸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문을 지속하지 말고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반드시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고 나의 가치를 상실할까 두렵습니다. 인간은 죽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사단을 죽이지 않습니다. 사단을 살려놓은 채 계속 저주를 퍼부어요. 사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벌을 사단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것을 그대로 인간에게 흘려버렸어요.

사단이 죽는다는 것으로 인간을 협박, 공갈할 때 인간은 죽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목격해요. 그러면서, 누가 나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라는 마음을 주었는지 그 배후를 몰라요. 물론 성경에는 나오지요.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사단이 그 배후 세력이라고 하지만, 인간들에게 개인적으로 질문하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사단과 붙여줘요.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사단과 한 편이 되게 하시고, 사단과 한 편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셔서, 그 현장에서 주님은 십자가 피로 구원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실컷 무서워하세요. 괜찮습니다. 왜? 그것이 구원 과정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풍랑 이는 바다로 몰고 가시지요? 그러면서 본인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모릅니다.

인간의 존재 의미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는가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무엇을 느끼는가 하면, 마치 아이가 엄마와 함께 있다고 여기고 예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복음 아는데 왜 자꾸 집안에 어려움이 생깁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복음을 알면 어려움이 안 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것과 같아요. 주님과 동행하는데 왜 풍랑이 일어나지요? 제자들은 그 이유를 지금 몰라요. 제 강의에 의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동행하고 있지만 인간 세계와 주님 세계가 분리되어 있어요. 인간 세계는 사단과 한 편입니다.

사람이 악한 자를 복수하고 싶지만 악한 자가 사형당하면 동정을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예수님 편에 서있지 않고 사단 편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데 주님이 그를 거절하시면 우리는 사단 편에 섭니다. 왜냐? 우리 마음이 사단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한 자를 동정함으로 우리는 순간적으로 천사가 되고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는 방식에 부합되는 것입니까? 틀렸습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고통 속에 놓여 있으면 동정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고통 속에 넣은 주님의 조치가 무색해지지요. 학창시절에 이런 경험을 많이 했지요. 친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아이가 있어요. 그래서 다들 그 친구를 미워했는데, 괴물 같은 선생님이 전근을 오셔서 그 아이를 개 패듯이 때려요.

교무실에 불러서 때리면 되는데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이 보는데서 때리니까, 처음에는 그 친구는 좀 맞아야한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때리니까 마음이 바뀌어서 그 학생보다 선생님이 더 싫어요. 그때부터 선생님 별명이 ‘김광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폭력에 대해서 아이들 모두 분노해요. 친구의 잘, 잘못을 떠나서 선생님이 너무 심하게 때린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갑자기 동정심이 발동해서 친구를 불쌍히 여깁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가 10개 팀이 있습니다. 그 중 KT는 올해 처음 생긴 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늘 져요. 많은 사람들이 신생 팀이 이기기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투수 장시환이 잘 던지라고 외칩니다. 왜 다른 팀에 비해서 너무 약하니까. 이 순간 우리에게 선악의 기재가 작동합니다.

우리는 왠지 선하고 싶어요. 사기치고 도둑질하는 사람도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과감하게 만원짜리 지폐를 줍니다. 이게 뭔가? “신이여, 내가 비록 사기 치며 살지만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는 기본 양심은 살아있으니 체포되지 않게 하옵소서.” 끝까지 인간들이 포기 못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

이게 다 사단의 전략이고 우리는 그 전략에 말려든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읽고 주님의 자비를 느끼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해도 너무 심하게 심판해요. 일곱 대접, 일곱 나팔, 일곱 인 이야기 기억납니까? 끔찍한 심판이 펼쳐지지요.

이 장면을 보면 은근히 심판받는 인간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지요. 인간들을 편들고 싶어요. 하나님의 너무 심하게 심판을 하시니까.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난리가 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사단을 응원하지 주님을 응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단은 우리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히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민수기에는 안식일을 어긴 사람을 돌로 치라고 되어 있지요. 미운 사람이면 안식일을 빙자해서 돌로 칠거예요. 그러나 내 딸이 다른 사람에게 돌로 맞는다면 극렬하게 하나님께 시위할 거예요. ‘하나님 너무합니다.’ 라고. 사실 우리는 늘 ‘너무합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제발 내 인생 망치지 마세요.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간섭하지 마시고.’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주님 원망하고, 비바람 불면 날씨가 왜 이런가 하고 불평하고. 여하간 늘 주님께 극렬히 저항하고 싶어요. 그 때마다 주님은 박수를 치십니다. ‘그래, 넌 불평해야 돼.’ 이처럼 신앙에 실패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너는 내 편이 아니고 애초부터 사단의 편이었다.”

주님은 주무시고 우리는 주님 덕분에 ‘고요히 바다를 건너게 하옵소서.’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지요?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마음입니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면 실패가 없게 되고, 실패가 없으면 구원을 못 받아요. 사람은 안 죽기를 원하지 죽음 이후에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우리의 신앙으로 통과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워요. 왜 무서운가? 우리의 보호자가 사단이기 때문에. 사단에게 우리는 이걸 배운 적이 없어요. 사단은 늘 죽으면 안 된다는 소리만 했지, 죽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죽음 속에 놓여 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사단의 세계가 죽음입니다.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세계가 생명입니다. 우리가 죽음과 생명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이유는 나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숨을 계속 쉬면 살아있고, 숨을 못 쉬면 죽었다고 여깁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제일 큰 오해가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죽음이 뭔지도 몰라요. 이 사람은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죽음도 생명도 모르는 거예요. 자기 고통이 끝나면 안식이 오는 줄 착각합니다.

지금 주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요. 예를 들면, 주와 함께 있어도 풍랑은 온다. 아니 특별히 풍랑이 심하게 온다. 왜? 그래야 그들의 믿음 없음이 노출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은 잘못 된 개념입니다. 죽음 개념이 바로 되면 두려움도 공연히 한 것이 됩니다.

뉴스에 보니, 노인들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에 속아서 돈을 주고 사 먹고 몸에 부작용이 생겨 소란이 일어났어요. 만병통치약은 없어요. 왜 노인들이 이 약을 먹었습니까? 죽음 개념이 잘못 되었기에 더 오래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병통치약을 먹어나 안 먹으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생명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지금 죽음 안에 있습니까, 생명 안에 있습니까? 생명 안에 있잖아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꾸중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생명인데 왜 무서워하느냐’ 이런 안목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만약 우리가 제자들 입장에 놓였다면 어떻게 했겠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은 기간이 몇 년입니까? 안 타먹은 기간이 1년이든 100년이든 의미 없어요. 왜냐? 따먹는 순간부터 시간은 거꾸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먹는 순간, 따먹었기에 그 이전 시간은 안 따먹은 것이 아니고 따먹기를 준비한 시간이 돼요.

5만원 지폐가 엘리베이트 안에 떨어져 있습니다. 운 좋게 나 혼자 봤으면 그냥 집어넣으면 되는데, 함께 탄 사람 5명이 같이 발견했을 때 어지간한 배짱이 아니면 그 돈을 즉각 줍지는 않습니다. 0.3초 정도는 참습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지요. 그러니까 선악과가 있고 아담이 있다면 아담이 선악과 따먹으려고 눈치 보는 시간이 얼마인가? 1년? 10년? 이건 의미 없어요. 어차피 따먹을 거니까.

따먹는 순간 선악과가 비로소 의미의 기지개를 폅니다. 선악과가 따먹히는 순간 선악과는 생명나무와 함께 먹을 수는 없는 나무로 등장합니다. 선악은 애초부터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선악과를 왜 두었는가? 사단을 심판하기 위한 기준으로 마련 된 거예요.

뱀이 유혹하기 전에 아담이 먼저 따먹었습니까, 뱀이 유혹한 후 따먹었습니까? 뱀의 유혹 후 따먹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적이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사단입니까? 사단이에요. 처음부터 사단을 의식하고 선악과를 심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제외되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구원에 대해 집착하지 마세요. 제가 수요일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성경책을 내 쪽으로 향하지 말고 주님 쪽으로 돌려놓으라고. 그래서 내가 말씀을 지키려 달려들지 않고, 주님이 이것을 하시려 하는구나. 이렇게 되지요.

첫 번째는 실패합시다.

두 번째로 두렵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사단과 한 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사단을 상대하기 위해 오셨어요. 여자의 후손이 노리는 것은 남자가 아니고 뱀의 후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사단과 한 편이라고 하니까 어떤 분은 “나는 사단 싫어합니다.”라고 하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살려고 하는 짓입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두려워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 이유는 살고 싶어서 깨운 거예요. 살고 싶다는 말은 죽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고, 죽는 것이 두렵다는 말은 죽음(사단의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했어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나를 믿으면 복권에 당첨된다.” 또는 “네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지 않고.

인간은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는 안 죽어야 된다.’는 것을 사단에게 배웠지만, 인간은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만나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끌고 어디론가 가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사단이 너를 달라고 하는데 내가 기도해서 너는 살았다.”

사단은 자기 수하에 있는 인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합니다. 계속 사로잡는 방법이 뭔가 하면, 제자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을 고수하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 개념으로 자아를 형성해 놓았습니다. 천국? 내가 알지. 죽어서 좋은데 가는 곳이잖아.

인간은 나를 살리는 의미 체계를 현실로 봅니다. 이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이 땅에서 너무 장사가 잘 된다면 이민을 갈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내가 하는 장사가 안 될 때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을 합니다. 왜냐? 나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존재밖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누가 인간을 이런 상태(자기 밖에 모르는)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인간을 조종하고 있는 실체에 대해 몰라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 실체를 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끌고 사단에게로 가서 “이 사단이 지금까지 너를 장악했기에 네가 이런 꼴로 살았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 받은 자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 말고 큰 아들을 옆에 두지요. 탕자는 가출했다가 집에 되돌아옵니다.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는, “네가 사단인 이유를 알겠어?”하고 돌아온 탕자에게 보냅니다. “동생은 떠났다가 돌아와서 내가 기쁜데 너는 내 기쁨에 왜 동참하지 못하니?”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사단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죽는 것을 그렇게 무서워합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면서, “어째서 너희들은 네 존재 의미밖에 모르는가?”라고 안타까워하십니다.

10분 쉽시다.

(2015. 5. 6. 09:2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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