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6장47절(죄의 교환)150423b-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6장47절(죄의 교환)150423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6장47절(죄의 교환)150423b-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죄가 교환된다. 인간의 모든 선악과 윤리근성 자기에게 윤리를 가르치고 도덕을 가르치는 그 분을 의식하면서 “아빠, 나 잘 살았지?” “아빠, 나는 너무 나쁘지?” 항상 선과 악에 대해서 이미 익혀진, 우리한테 세뇌시킨 교육받은 그 교육범위 내에서 선과 악이 형성되어 있어요.
북한사람들의 죄는 뭐냐, 김일성을 찬양하지 않는 겁니다. “아빠, 나 김일성 찬양하니까 좋지?” “아빠, 나 김일성 찬양 안하니까 나 벌 받지? 맞지?” 이게 윤리 도덕으로 체계를 잡는 거예요. 참,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잖아요. 인도 사람들 보세요. 힌두교 안 믿으면 안 되잖아요. 중국 사람은 자기 조상 안 믿으면 안 되고.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은 기독교 안 믿으면 안 되고. 그러니 인간이 갖고 있는 같은 선악을 알고 있는 사람이 선악 아는 사람에게 전수하고 또 전수를 하다보니까 거기서 선악구조 안에서 매일 새끼 까듯이, 독 속에 있는 쥐 가둬놓고 계속 새끼 까듯이, 그 안에서 오골 오골 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거기서 탈출을 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공자도 마찬가지고, 석가모니도 마찬가지고,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고, 소크라테스야 솔직하지, 나 모르겠다고 하니까. 나는 무지한 사람이다. 무지한 사람이 아는 사람이지만. 솔직히 철학적으로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궁극적인 것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를 수밖에 없지요. 소크라테스가 나이 몇 살 먹었는데요? 인생을 몇 년 살았습니까? 인류 역사는 긴데, 지는 몇 살 안 되고. 그리고 살아도 돌아다닌 동네가 반경 몇 킬로에요? 당연히 모르지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욕심을 낸 게 문제지요.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을 찾아보고 싶다. 니하고 나하고 다 똑같은 입장인데 뭘 전체를 다 알아?
전체를 다 몰라도, 인간은 몰라도 살아가는 이유가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이 동물 이름이 뭔지를 몰라도, 이 식물이름이 뭔지를 몰라도, 선과 악을 가지고 인생에 그 토대를 잡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악의 죄는 제3의 인물, 어느 타인으로부터도 너라고 지목받지 않는, 오직 아버지에게만 아들로만 오시는 분이 제3자가 너와 나 사이에 개입해버리지요.
나오는 말씀에 대해서 너도 못 알아듣고, 나도 못 알아듣고, 다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리고 무조건 유보에요. 그래서 못 박아 죽이라고 했고, 그 분은 정말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놓고 사형을 당했잖아요. 사형을 당했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에서 무죄가 아니고 유죄가 돼요. 죄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성도도 반드시 이 세상에서 죄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어떤 관점에서? 선악적인 관점에서 따질 때, 반드시 죄인이 되어야 돼요. 죄인이.
왜냐 하면, 교환이 되려면 주님이 가신 경로를 그대로 따라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야 돼요. 내가 곧 길이요, 했잖아요. 주님이.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하나 드시고 갔다면 우리도 천국가면서 뭘 잡숴야 돼요? 햄버거 하나 사들고 가야 돼요. 왜? 고 길이 그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햄버거 잡순 건 아니지만. 십자기 지고 가기 때문에 니도 니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고 이렇게 했거든요.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이죠.
자, 그렇다면 두 번째 시간에 문제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한테 해주신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생명에 관한 겁니다. 생명.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오해하지 말아야 돼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 이 생명은 아니에요. 내가 있고 내가 생명 얻는 것은 이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냐 하면, 창세기3장에 있는 인간의 오류와 똑같아요. 뭐냐 하면, 오래 사는 겁니다. 주께서는 생명나무 못 따먹게 했습니다. 안돼요.
생명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 목숨이 오래 사는 질질 끄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만드신 주의 생명이에요. 주의 목숨이에요. 주의 목숨으로 교환, 교체가 되어야 돼요. 주의 목숨으로 교체가 될 때에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이 돼요. 예수님 자신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라는 거죠.
내가 곧 생명이 되게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라는 그 몸과 우리의 몸이 1:1대응이 안 됩니다. 1:1대응이 깨어져요. ‘나도 예수님의 목숨을 얻어야지.’ 라는 의미에서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게 생명이에요. 나도 참 말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목숨이 생명이라면, 나도 그 목숨 내가가지면 나도 생명 되겠네.’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몸도 한 몸이고 나도 한 몸이고 1:1로 대비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에요. 왜? 우리를 죽여 버리니까.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가 되어버려요. 몸의 지체가 돼요. 하나의 돌출부가 돼요. 돌출부. 떡이 있잖아요. 떡이 이렇게 둥글지만, 한 쪽을 누르면 한 쪽이 삐져나와 돌출되지요. 그 돌출된 게 우리에요. 돌출된 게 성도라니까요. 지체라는 것을 알지만, 사실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에 우리를 누가 대표하느냐, 그리스도의 이름이 대표하지 내 이름이 대표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앞에 붙은 게 있어요. 생명책 명단에 있어요. 생명책 명단은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그 명단에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 이름들이 들어가 있어요. 그 이름들이 바로 생명책의 명단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적혀있는 사람만 영생을 얻지요. 왜? 이미 한 통속이니까. 이미 한 통속이니까 얻지요.
“요 안에 들어있는 네모진 스티로폴 안에 들어있는 떡만 구원받습니다.” 하면 “저는요!” 라고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주님과 나, 1:1로 보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어디에 속해있나 보면 되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교회 올 때 “아휴, 주님하고 나하고 어떤 차이가 나지.” 주님하고 자꾸 견주려고 하는데 견줄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는 죽은 존재이고, 주님은 살은 존재인데, 어떻게 죽은 자하고 산 것과 무슨 상대가 돼요? 토끼가 빠릅니까? 피아노가 빠릅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피아노는 가만히 있는데 뭘 빠른 게 있어요? 말이 안 되지요.
죽었다는 말은 이미 고정돼있다는 뜻이고, 토끼는 까불, 까불거리면서 토끼야, 토끼야, 산토끼야 하면서 돌아다니고. 어떻게 달리기가 성립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 내가 너에게 너를 찾아가서 너를 살리리라. 가만히 있어라. 다리가 있어도 소용없어요. 우리가 팔이 있어도 소용없고 혀가 있어도 소용없어요. 우리의 기도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 다리가 열심히 달음박질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백날 해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하얀 스티로폴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의 이름에 속했다는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온 천지가 주의 이름이 박혀있는 몸을 갖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손톱도 주의 것이고 발톱도 주의 것이에요. 내 것 없어요. 내 거 아니고 주의 것이니까 주의 것이 자기 것을 데려가겠다는데 우리가 왜 구원이 안돼요? 지금 우리가 구원에 애쓰고 힘쓰고 하는 게 뭐냐 하면, 내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것이 있다고.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육신은 뭡니까? 아직도 선악체계에 있지요. 선악체제는 주인공이 누구지요? 선과 악을 지식을 아는 주인공은 누굽니까? 내가 주인공이잖아요. 왜? 남들이 나라고 불러주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 설명해야 되겠어요.
이거 요번 주일 설교인데, 당겨서 하게 되면 아담이 자식을 낳습니다. 아담이 자식을 낳게 되면, 자식하고 아담하고 차이나지요. 분명히 아담 몸 따로 있고 아담이 간지러우면 자식도 간지럽고 그렇습니까? 완전히 별개의 개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그걸 별개의 개체성이라고 언급하면서도 ‘아담 안’ 이라고 했거든요. 아담 안.
‘아담 안’이라고 했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아담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다 범죄 했다, 했지요. 이게 어떤 관계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뭔가 이 스티로폴이 물위에 떠있으니까 고 안에 있는 것도 같이 떠있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이 성립되겠지요. 그러니까 아담에게 뭐가 있다? 어떤 바탕이 있는데, 그게 아담 안이에요. 아담 안에서 아담도 있고 하와도 있고 우리도 있고 같이 있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아담 안에 묶는 것, 한 묶음으로 묶는 것, 이걸 가지고 뭐냐, 이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 언약 적 관점이거든요. 언약 적 관점.
지금 왜 갑자기 언약을 꺼내서 이야기를 또 복잡하게 만듭니까? 여러분이 한다면, 지금 영생이 무엇이냐 할 때에 나를 위한 영생, 내가 갖는 영생, 이런 영생은 없다는 자체를 지금 설명하는 겁니다. 이런 영생 없어요.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 있을 때는 내가 살기 위해서 영생을 내가 가져야 살아요. 생명나무 따먹어야 살아요. 이건 아담 때입니다. 따먹어야 사는데, 지금은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제가 이거 시간이 가더라도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앞에 분명히 뭐가 붙어요. 내가 선하냐, 내가 악하냐 이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선악과 자체가 이게 죄가 돼요.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인간이 죄 안에 있다, 말이죠. 인간이 죄 안에 있는 거예요. 그걸 아담 안에 있다고 본 겁니다. 인간이 죄 안에 있는 거거든요. 인간이 죄 안에 있다면 아무리 선해도 선도 죄가 되는 겁니다. 설교하는 것, 기도하는 것, 전부 다 목회하는 것, 강의하는 것, 다 죄가 되는 것 맞아요.
자꾸 여기서 착한 일 끄집어내려면 안돼요. 착한 일은 어디 있느냐, 이걸 악하다고 보는 그게 착한 거예요. 이게 선한 거예요. 이게 영생이에요. 그게 누구의 안목이냐, 주님의 안목이다, 말이죠. 주님의 안목. 주님의 안목에서 놀라운 것은 살인죄도 간음죄도 이게 의가 돼요. 그게 영생이 된다니까요. 살인죄, 간음죄, 강도 짓 이런 게.
“내가 살인했는데 선합니까?” 라고 물어서는 안돼요. ‘내가’ 하는 것은 선악 적으로 있을 때는 나라 부르지만 주님 안에 있을 때는 뭐냐 하면, 주께서 하게 하셨다면, 그게 선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간음하게 하셨다면 그게 선인데, 그걸 간음이라 말하지 않아요. 주께서 사랑을 베풀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에 이스라엘 스파이가 왔느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했어요? 여기 없다고 했지요. 거짓말했잖아요. 숨겨놓고 벌써 도망갔다고 했잖아요. 그게 의라니까요. 우리는 그걸 뭐로 봅니까? 그걸 거짓말로 보잖아요. 그런데 그게 의가 되는 거예요. 왜? 주께서 그걸 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그걸 시킨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께서 거짓말시켰다는 말입니까? 거짓말을 시킨 게 아니고 주께서 시킨 일이라면 거짓말 이라는 것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에요. 거기다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거짓말이라고 집어넣으려면 거짓말이 아닌 게 있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거짓말이 의미가 있으려면 거짓말 아닌 게 따로 있어야 돼요. 따로 있어버리면 그건 의가 되고 거짓말은 악이 되거든요. 그러면 어느 구조에 있어요? 역시 또 다시 선악구조로 되돌아 온 셈이 된다니까요. 선악구조로.
제가 지금 설명한 게 뭐냐 하면 성령이 왔을 때, 우리가 익히 아는 윤리, 도덕적 관념이 아니에요. 놀라운 것이 같이 섞여서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치열한 다툼과 경쟁이 발생돼요. 경쟁이. 나의 세상 관과 나의 사고방식과 나의 생활관이 어느 쪽을 따라야 되는가, 그 경쟁이 유발한다니까요. 우리가 그냥 편하게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착한 재미로 살아요. “주여, 나 왜 이리 착하지. 미치겠어. 너무 착해서.” 이런 재미로 사는데 진짜 생명나무를 따르면요, 어떤 재미로 사느냐 하면요, 나를 죄인 되게 한 재미로 살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말은 주님 앞에 저주받아 마땅하잖아요. 그럼 뭐냐,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아무 가치 없다.’ 이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라니까요.
여러분들이 세상 살면서 고민과 걱정이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나는 가치 있다, 때문에 생기거든요. 나는 아무 가치가 없다. 목사가 목회하는데 교인들 2명이 있다. 그래도 좋아~ 싱글 벙글. 이게 얼마나 편한 겁니까?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애가 또 전교에서 꼴찌 했다. 아휴, 원래 가치 없는 부모 밑에서 가치 없는 자식 나온 게 당연한 거지. 이게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입니까? “이놈 자식이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고?”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건 아버지의 가치를 자식에게 강요한 셈이 되니까 그 가정은 그 다음부터 불란 나고 난리 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지옥 되는 거예요. 애는 성질 나빠져 가지고 그날은 TV도 못보고 드라마도 못보고 분위기 다 싸늘해지는 겁니다.
남자들 군에 갔다 왔잖아요. 군에서 제일 기분 더러운 게 뭐냐 하면, 내 감정에 따라서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참이 어떤 분위기에 따라서 고참이 술 몇 잔 먹느냐에 따라서 그 내무반 분위기가 달라져요. 이것은 내가 원치 않는 환경에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이 기분 나쁨. 그걸34개월 견딘다고 해보세요. 폭파하고 싶어요.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져서 내 잘못 내가 하면 조금도 억울하지 않아요. 그런데 고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전라도 고참이 경상도 때리고, 경상도 고참이 술 먹고 들어와서 전라도 때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가 거기에 그냥 당하고 있다는 이게 나의 개체성, 독자성이 날아가 버린다니까요.
그런데 주님나라에서는 주님이 모든 죄를 담당해버렸거든요. 우리가 받을 모든 지옥 불을 누가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담당해버린 거예요. 왜? 우리는 왠지 모르죠. 그걸 알려주는 게 뭐냐, 니가 이 정도로 죄인이고 이 정도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미 구원시켜 놓고 평생 동안 죄를 교환시키는 겁니다. 선악적인 죄에서 주님이 죽어야 될 죄로 생명나무 차원에서 죄로 교환시켜 보면 그게 영생 안에서 같은 쟁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 스치로폴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주님이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살리겠는가, 그걸 늘 무가치한 가운데서 감격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또 다시 만끽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뭘 그렇게 닦달내십니까? 뭘 닦달 내느냐, 선악적인 체제를 보고 닦달 내는 거예요. 하나님 뜻은요, 한결같아요. 선악과 따먹지 마라, 그걸로 끝났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선악과 그것가지고 윤리, 도덕으로 성화했다고 거룩하다고 지금 니도 거룩하지, 나도 거룩하다. 그 말씀에다가 그걸 막 집어넣어가지고 우리는 착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있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이거하고 싸우는 거예요. 착하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이것, 내가 의로우면 복 받고 나중에 구원까지 받는다는 이것하고 싸우는 거예요. 우리는 내 가치를 높이기를 원하지 낮추는 것은 상상도 못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호락, 호락 주님의 그것에 우리는 고분, 고분하지 않습니다. 격렬하게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정말 격렬하게 하기 싫어요. 유해진이가 삼성카드 광고에 나오잖아요. 나,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우리는 내가 무가치한 것을 격렬하게 싫어해요. 왜? 선악체제에서는 누가 보는 눈이 있습니까? 타인의 시선, 응시, 나에게 기대 거는 부모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항상 주목하고 체크하시는 분들, 은근히 나를 떠난 여자 친구가 니 잘 먹고 잘사나 보자, 지금도 가끔 연줄, 연줄 소식들어가지고 니 버린 그 남자 망했단다. 이 소리 들을까싶어서 내가 또 인수인계해가지고 내가 또 상상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기를 생각하는 꿈꾸는 나의 망상. 아우라. 그걸 타인의 욕망이라 하는데.
그 타인의 욕망이 우굴 우굴 거리는 그 폐쇄적인 나의 현실, 이걸 우리는 현실로 보거든요. 내 의미 위주의 현실. 그 현실에서 나는 보란 듯이 살아보려는 그것이 내 삶의 동기요, 힘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상상하고, 멋있는 차도 몰고 다니면서 고속도로 달리는 그 모습 상상하면서 참아야 된다. 이걸 스스로 격려하고 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그걸 버리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고, 성령이 오게 되면, “주여, 이게 바로 제가 정말 주님보다도 나의 세계, 내가 신이 되는 세계를 더 좋아하는 이런 게 있기 때문에 나는 무가치한 사람 맞습니다.” 라고 인정하지요. “꿈만 꾸면 돈을 벌어가지고 저택에 가서 살고 차 서너 대 누리고 사는 그것을 나의 희망으로 삼는 이 정도로 나는 주님을 오늘도 힘들게 한 죄인 맞습니다.” 하고 기쁘게 자기가 한 현실을 즉각 망상으로 바꿔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영생 안에서만 가능해요. 그래서 영생은 받는 게 아니고 영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누리는 거예요.
영생이 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선악과가 죄라하는 사실을 내가 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일하시는 게 아니고 영생을 위해서 일해요. 우리는 하나의 빈 백지에 불과해요. 이 백지를 예수님의 자기가 짊어졌던 죄를 여기다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면 선악과가 점점 퍼지지요. 선악과 가득 찬 이것을 주께서는 구원해내잖아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목회를 했는데, 오천 명을 목회했다. 선교사로 해서 이만 명을 선교지에서 구원했다. 그 사람이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무가치함을 아는 사람 같으면 마지막 뭐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선교사로 아무리 20년 봉사하고 아무리 목회해도 나의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뿐입니다.” 할 때 그 순간 자기는 뭐가 돼요?
“나는 지금까지 선악적인 것 가지고 이만큼 목회하고 이만큼 선교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가, 이런 선악적인 나의 가치를 무가치로 보지 않고 나름대로의 가치 있다고 움켜쥐는 이 죄, 이죄로 인하여 내가 무가치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나의 구원은 내가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받습니다.” 고백하게 되겠지요.
그 작업이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영생 안에서 일어나요. 영생 바깥에서 들어오는 게 아니고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들이 나오지요. 사도바울이 몇 명 전도했습니까? 지금도 아바그룹의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지요. 지금도 비틀즈의 노래가 계속 나오지요. 비틀즈의 미망인들은 지금도 저작권 받지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지금도 믿지요. 그럼 저작권은 누가 받아요? 그럼 사도바울은 몇 명 전도한 거예요? 엄청나지요. 그럼 사도바울은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전도 많이 해서 구원받았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였잖아요. 이미 영생 안에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한 거죠. 주님이.
그러면 영생은 누구 이름으로? 사도바울 개인이 소지하는 게 아니고 영생의 일에 일환가운데 참여한 겁니다. 사도바울이 영생의 일에. 따라서 영생의 일에 우리가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주께서 영생의 일을. 그 이야기가 여기에 나온 거예요.
48절 봅시다. 여기 46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라고 하면서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했느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믿는 자는 무엇을 가졌고? 영생을 가졌지요. 지금 아버지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예수님의 입에서 영생의 이야기 나오지요. 그럼 이 작업을 누가합니까? 예수님이 하는 거예요. 이 영생이란 작업을.
내가 곧 뭡니까? 생명의 떡이다. 영생의 떡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자기 개체로 이해했지요.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숫자가 예수님이 1같으면 자기도 1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제로(0), 없어져야 되는데, 예수님이 하나 있으면 우리가 하나로 보는 거예요.
이리 되어버리면 영생을 가졌다, 이 말을 전부다 뭐합니까? 전부 다 곡해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주님은 영생 있단다. 영생 있단다. 야! 어떻게 뽑아내야지.” 이러면 이게 누구의 일이 돼요? 영생이 주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 됩니까? 그냥 주님은 영생을 딱 모아놓고 “골라! 골라! 골라!" 이리 되고 우리는 예수 믿고 영생이란 떡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오해, 이게 바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그런 오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저의 해석은 뭡니까? 영생 자체가 선악과 체제에서 나온 영생은 영생이라고 할 수 없다. 영생이라는 말은 선악과 체제에서 바깥으로 탈출했던 분만 갖고 있는 게 영생의 개념이에요. 그럼 우리가 선악과 체제로 영생 개념은 엉터리 개념이라는 말이죠. 그럼 뭐에서 일어난다? 이게 교환이 일어나야 돼요. 교환이 일어나야 되는데, 우리 같으면 “그래, 내 영생 버리고 주의 영생으로” 이렇게 교환 되는 게 아니고 선악체제 자체가 죄로 규정이 되는 작업을 통해서 교환이 되어야 돼요. 선악체제 자체가 죄라고 규정한다는 자체가 영생이라니까요. 이제 이해되시지요.
지금 문제가 나라는 개최, 나 잘되기 위해서 했던 이 버릇이 선악과 따먹고 아담도 그랬거든요. 아담이 왜 따먹었습니까? 지 잘되기 위해서 따먹었잖아요. 그러니 내 잘되기 위해서 한다는 이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우선 내 중심으로 했을 때, 성경해석은 이렇게 됩니다, 라고 하고 그것이 통째로 엉터리 해석입니다, 라는 설명을 또 거기다가 부여해서 붙여줘야 되고, 그리고 모든 일은 누가한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영생과 주의 영생은 이렇게 차이 납니다, 라는 것을 계속 설명을 해줘야 돼요.
자, 48절 봅시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 했지요. 처음에 광야에서 만나할 때, 위에서 뿌렸잖아요. 뿌려놓은 걸 누가 먹었습니까? 백성들이 새벽에 주워 먹었지요. 자, 제가 질문할게요. ①그들이 주워 먹을 때 새벽에 일어나는 수고를 했다. ②잠깨고 세수하고 옷 입고 만나있는 광야로 달려가는 수고까지 해서 먹었다. ③그냥 주워 먹었다. 그냥 ③번이지요. ‘에이, 그냥 주워 먹어? 그래도 옷은 입어야지.’ ‘그래도 아침에 알람해서 깨어나야 그걸 먹지. 오래 놔두면 그것도 썩는다 하니까.’ 왜 이런 생각들이 자꾸 끼어드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몸이요, 어쨌든 간에 내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주의 말씀을 이렇게 왜곡시키는, 생명의 떡이라 하니까 “에이, 내가 먹어줘야 생명의 떡이지.” 자꾸 이걸 집어넣는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살해당한 거예요. 왜 우리 쪽에서 실시하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삭제하느냐 이 말이죠. 기분 나쁘게.
침례교처럼 이리하면 돼요. 십자가는 졌다. 이제는 믿고 안 믿고는 너희 마음대로 알아서 해라. 이랬으면요, 예수님 안 죽었어요.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십자가 져도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이래서 죽은 거예요. 화가 나서. 그럼 누가 구원받습니까? 구원 받는 것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믿게 한다. 이러니까 화가 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노력은 필요 없다. 이러니까 더욱 더 죽여라! 이리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실을 자꾸 놓쳐요. 그걸 자꾸 이렇게 의식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와야, 복음이 와야, 이게 의식이 돼요. ‘아, 내가 이런 것 때문에 구원을 내가 나도 뭔가 협조가 됐다고 생각하고서 하는구나!’
재림이 뭐냐 하면, 재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명확한 개념이 없어요. 재림이란, 오늘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인간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이게 재림입니다. 재림할 때, 인간이 사다리 놓아드렸습니까? 아니면 이쪽에 오라고 해서 폭죽 터트렸습니까? 재림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요. 재림은 모든 것은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했지요. everything, 모든 것은 뭘 유발한다? nothing을 필히 유발하게 되어있어요. 재림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드러나지요. 재림 앞에서.
그 재림하실 분이 십자가지신 거예요. 재림을 내다보고 십자가지신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 믿을 위인이 있다? 없다? 아무도 없는 거예요. 재림을 염두에 두고 성령 주셔서 십자가주신 거예요. 십자가 믿게 하신 거예요. 재림은 우리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 그게 재림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재림은 시간이 카펫처럼 둘둘 말아버려요. 둘둘 말아버리면 시간이 제일 먼저 펴질 때가 언제입니까? 창세기1장이죠. 요한계시록은 창세기1장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은 겁니다. 창세기1장에는 예수님이 없지요. 예수 이름이란 자체가 신약에 오니까. 창세기에 예수님 없지요. 예수님 있는 창세기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라니까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nothing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낫싱이고 그리고 예수님만이 에브리싱, 모든 것,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께 돌아가는 거예요.
지옥은 주님의 속성입니다. 천국도 주님의 속성이에요. 자비의 그릇은 천국이고, 저주의 그릇은 지옥으로, 다 그것도 합쳐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거죠. 에베소서1장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그것을 십자가라는 선악과의 구조 내에서의 흔적을 남긴다 했지요. 아까 바깥에 있는 죽음을 안에 들어왔다 했지요. 선악에서 벗어난 다음에, 탈출한 다음에 들어올 수 있잖아요. 들어올 때, 바깥에서 있는 죽었느니라, 하는 것을 말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다가 어떤 상처를 낸다 했지요. 그 상처가 십자가라 했잖아요. 십자가가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 인간이 만든 망상 그 전부의 세계가 십자가세계입니다.
내가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잖아요. 십자가는 넓어가지고 십사만사천 다 들어간다고. 잠수함의 입구는 좁은데 들어가면 넓지요. 잠수함 넓지가 않다마는, 예가 적당하지 않다마는, 어쨌든 잠수함 입구는 좁지만, 들어가면 좀 넓지요. 동굴입구는 작은데 동굴 안은 더 넓어요.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폭삭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중에 응축이 돼요. 쭈그러져야 돼요. 이 세상은. 쭈그러지면 남는 게 뭡니까? 에브리싱(everything)모든 것. 전부 다가 있지요. 그건 누가 주인공입니까? 예수님이 주인공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몽상가에요. 몽상 바깥에는 몰라요. 사람들이 역사라는 이름으로 유구한 인류의 역사, 그 이름에 갇혀있어요.
성경에 보면 시편에 보면 우리의 인생은 그냥 한 뼘에 불과한데 우리는 마치 그게 전부인줄 알고 하는데, 사실은 nothing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걸 요번 대전수련회에서 0이라 했어요. 제로. 우리는 제로라니까요. 그걸 야고보서 같으면 우리는 그냥 안개가 아니고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냥 안개 같으면 촉촉한 느낌이 들잖아요. 그게 아니고 안개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었냐? 없다!” 이 말이죠. 완전히 마술하는 것 같아요. “자, 보이시죠. 애들은 가! 없어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나중에 늙어 죽으면 없어요. 전에 이 회사가 저쪽에 있었잖아요. 저쪽가보면 없어요. 잠깐 있다가 갑자기 없어졌어요. 이쪽으로 이사했지요.
모세와 엘리야가 주의 나라로 이사했듯이 우리도 이사를 합니다. 주께서 이사할 때 그냥 이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새로 만들어줘요. 천지창조 할 때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창조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창조의 마감은 우리를 집어넣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야 되느냐, 새로운 인간을 만들 때, 그 새로운 인간, 새로운 피조물 중심에서 새롭게 시간과 공간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 만들어져요.
썩어진 것은 썩어진 것에 부합되도록 옛 하늘이 있고 로마서8장에 보면, 썩어진 것은 썩어진 것과 함께 날아가고 새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면 거기에 하나님 아들의 맞춤, 예수님의 맞춤, 격에 맞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좋아하지 마시고 그게 누구의 격에 맞는가, 예수님을 좋아해야지 새 하늘 새 땅 좋아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신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합당한 드레스를 입는 겁니다.
그러한 교체가 되려면 반드시 교체되어야 될 근거를 우리가 확보해 있어야 돼요. 그것이 뭐냐, 선악과 바깥쪽에서 쏘아대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줘야 우리가 갇혀있다는 것, 내 망상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내 망상에 내가 갇혀 산다는 것을 내가 알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이것을 누가 알아듣습니까? 여기 성경에 보니까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했지요.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바보입니까? 바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생명 얻기 위해서 모세가 기다렸듯이 메시아를 기다렸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에요.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기다리게 되면 마찬가지로 똑같은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얻기 위해 되는 게 아니고 생명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 이미 그 자체가 생명이 된다고요.
주님이 우리를 활용해야지 우리가 주님을 이용하려고 자꾸 당기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여전히 내가 살아있으면 곤란해요. 그러면 십자가라는 게 선악과에 맞춘 십자가는, 선악과하고 생명나무하고 같이 있는 것은 에덴동산의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같이 있었던 뿐이고, 천국가면 무슨 나무밖에 없어요. 선악과나무가 없어요. 거기는 생명나무밖에 없어요. 완전히 가로수로 되어있다니까요.
이 말은 뭐냐, 선악과를 죽이지 아니하면 천국에 합류할 수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걸 미리 당겨서 지금 우리에게 선악과 요소를 없앱시다. 어떻게 없애는가, 안 없어지잖아요. 육신이 있는데 안 없어져요. 자아는 내 중심인데 나 잘되기 위함인데 안 없어지죠. 착한 거, 악한 거 다 알아요. 없어지지 않아요. 어떻게 하느냐, 나는 무가치하다는 것을, 왜 무가치한가, 무가치함을 위해서 선악과는 살아있어야 돼요. 선악과가 살아있어야, 이기주의가 되어야, 죄를 지어줘야, 그래야 우리가 생명나무 안목에서 무가치한 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면 우리가 계속 뭐 해야 돼요? 죄인으로 살아야 돼요. 죄인으로 살면 우리의 가치는 완전히 바닥을 치지요. 바닥을 쳐요. 우리가 어디까지 바닥을 쳐야 하는가 하면, “주여, 이제 그만 데려가 주이소. 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정도 바닥을 쳐야 되는데 그게 꼭 아플 때, 당뇨 걸리고 뭐 아프고 그 때 아닙니다. 회사가 너무 잘되고 거짓말 아니에요. 목사가 교인이 너무 몰릴 때, 목사 입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나옵니다. “주여, 이 교회는 잘되고 차 사준다, 집사준다 하는데 정말 내가 나쁜 놈 맞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도망가고 싶습니다. 빨리 죽여주시옵소서. 왜 갑자기 주식 사논 게 백발 오르는지 나 미치겠습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리 해가지고 시험 치는 게 공부하는 게 취미가 돼가지고 서로 오라 하네. IB에서, 유명대학에서. ‘주여, 이러다가 나 교만에 빠지겠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요. 집사님! 요새 또 그런 생각 드는 것 아닙니까? 일이 좀 잘 풀리는데.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데려가 주옵소서. 이래서 교만에 빠지겠습니다.”
잠언30장8절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왜? 부하게 되면 하나님을 잊을까봐. 왜? 잘사니까 잊을까 두렵고, 너무 가난하게 되면 죄를 지어서 도둑질해서 주의 이름을 명예를 훼손할까봐. 주여, 적당해 해주시옵소서. 적당히. 그런데 그 적당이가 한국에는 2,3만 불이고 아프리카에 가면 500불이고. 이게 또 환경 따라 달라져요. 그러니 인간이 말씀을 선악과 인식 가지고는 안 되고 그냥 예수님이 영생이라, 이게 끝이에요. 예수를 믿으면 영생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영생이고 그 안에 있던 게 믿어지게 되면 그게 영생으로 있는 거예요. 그냥.
자, 만나 다시 이야기합니다. 만나는 뿌렸다. 사람들은 뭐했다? 그 영생은 그냥 주워 먹은 거예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영생을 뿌렸다. 택한 백성은 “어? 영생! 영생!” 그냥 주워 먹은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그래도 주서 먹었잖아. 그러니까 내 공로로 구원받잖아.” 이리 나오면 그것은 옛날의 그 실패한 사람과 똑같잖아요. 영생을 뿌렸다는 말은 주워 먹었다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이 뭐가 된다? 그게 내가 무가치한 존재로 발각되는 순간이란 말이죠. 고맙다고 주워 먹은 게 아니고, 그래도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주워 먹었잖아. 이게 바로 내가 바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란 말이죠.
영생은 뭘 병행한다? 우리로 하여금 무가치한 죄인 만드는 작업과 병행해서 영생의 작업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직 십자가만 높이는 그 작업이 주께서 실시하는 영생의 작업이에요. 이렇게 보시고 그 다음부터 보게 되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51절 봅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또 이해를 못한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자, 떡을 우리가 먹어야지.” 이리 이해할 거예요.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래, 내가 주워 먹어야지.” 내가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주께서 이것을 먹게 하시는 작업을 하신다. 왜? 우리는 워낙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넣어주시는 거죠.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갑자기 살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피가 나오지요. 이게 뭡니까? 죽임을 당한 자에게 내가 생명을 준다. 이 원리입니다. 나를 죽였던 자를 도리어 내가 생명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생명의 떡이라고 먹는 살과 피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영생 얻는데 나는 아무것도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습니다, 를 고백하는 방식으로 오직 희생당하신 분의 희생의 은혜로만 내가 생명을 얻게 됐다는 고백을 그렇게 조치하시는 기준입니다. 그렇게 어렵던 이 말씀이 이제는 그냥 술술 풀리잖아요. 술~술~
54절 빨리 나갑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왜냐 하면, 아버지가 나한테 준 페이퍼이기 때문에. 종이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누굴 새겼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새긴 거예요. 그 페이퍼(종이)는 주님께 대들었고 대든 자에게 오직 살과 피를 줌으로서 교훈을 준 게 아니에요. 잔소리한 게 아니에요. 훌륭한 말씀을 안 게 아니고 살과 피를 줬다는 말은 니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걸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일은 내가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작업은 바로 뒤에 나오는 내 살과 내 피는 내 양식이고 음료란 말이죠.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 어디 나오느냐, 56절에 나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지금까지 생각한 스티로폴 이야기잖아요. 스티로폴 요 이야기. 같이 있어요. 같이. 쉽게 말해서 니는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생명은 없다. 그럼 함께 있으려면 선악과에서 빠져나와야 되는데. 왜? 주님은 빠져나왔는데 우리는 못 빠져나오잖아요. 못 빠져나올 때는 어떻게 합니까? 못 빠져 나올 때는 주님이 아예 우리 속에 들어오지요. 들어오면서 유일한 흔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라 했지요. 그러니까 살과 피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계속 살과 피, 십자가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것이 우리에게 흔적이 되고 아예 우리는 선악과 속에서 생명나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선악과 속에서.
57절에 봅시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를 잘 들었는지 복습하겠습니다.
사람은 왜 죽습니까? 선악과 때문에 죽었지요. 그러면 왜 삽니까? 생명나무로 살지요. 아시겠지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그 죄가 어디의 죄냐 말이죠. 선악과 자체가 죄고 그 다음에 그 죄답게 누가 찾아왔다? 주께서는 찾아오심으로서 하나가 됨으로서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생명나무를 알아서 영생이 아니고 선악이 죄라는 것을 아는 자체가 생명이 찾아왔다는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게 주와 함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없지요. 우리는 선악과 식으로 죄만 지으면 돼요. 윤리와 잘난 척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잘난척하는 것 어렵습니까? 늘 상 24시간 하는 일이 그것밖에 없는데. 뭐가 어려워요. 편한 거예요. 잘난 체 하세요. 중지하지 마세요. 하시는데 이것 때문에 주께서는 그냥 교훈이 아니고 살과 피를 흘려야 된다. 이것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거예요.
따라서 더욱 더 죄인 되면 죄인 될수록 나는 무가치하게 되지요. 무가치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주님의 영생에 가치 있는 존재로서 새롭게 달라지는데 그 고난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 고난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훌륭하다가 아니라 누가 훌륭하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훌륭하다는 권한을 주님께서 갖고 있습니다. 갖고 있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갖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뭘 부릅니까?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그 안에 말도 안 되는 나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지요.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것은 나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겁니다. 내 행함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60절 요게 중요한데요.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이 말씀은 그 다음에 뭡니까? 어렵도다. 솔직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제자들도 사실은 여기에 참여해야 됩니다. 제자들도. 이 제자들이 어떤 제자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12제자도 여기에 포함돼 있어야 돼요. 사실은 솔직하게. 결국 그들은 다 떠났잖아요. 어렵지요.
어렵다는 말은 앞의 48절부터 나는 생명의 떡이니 부터 이것을 그들은 아직까지 알아들어먹을 만한 그런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그들은 고민할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떡을 내가 무슨 수로 먹지? 잘 때 갑자기 내 다리 살을 뜯어내나? 그럼 내 다리 내놔라 할 건데 이러면 안 되는데. 전설의 고향되는데. 그럼 피는 어떻게 하지? 주께서 각혈할 때, 그때 받아가지고 갈라먹기 하나? 지금도 천주교에서 그러잖아요. 천주교에서의 성찬식. 예수님의 피고 예수님의 살이라. 바로 그게 뭐냐 하면, 바리새인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이 살과 이 피. 이걸 먹고 마시는 것. 성찬식을 해버리면 뭐가 돼요? 선악과 체제에서 착한 일이 되어버려요. 그냥 살면 죄인 되는데 성찬식을 하다 보니까 착한 일로 되어버리면 착한 일이 되는 동시에 뭐가 나를 떠나요? 진짜 살과 피가 가려져요.
“나는 성만찬할 때 눈물 나더라. 은혜 되더라.” 이리 되면 뭐가 워험한가 하면, 반복해야 돼요. 전에 은혜 받게 한 그 방식을 내가 놓지를 못해요. 부정하지를 못해요. 자기를 부인하라 했는데, 그 때, 주님의 성찬식을 1년에 두 번보고 은혜 받았으니까 또 해야지. 또 하게 되면 은혜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은혜를 조작해요. 또 지가 눈물을 짜네. 목사가 또 파이프 오르간으로 딩~ 낮은 음을 쳐서 유도해요. 그래서 스스로 연기를 해요.
교회가 예배시간이 연기하는 거예요. 위선 자 만드는 곳이에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나는 욕심밖에 모른다. 그게 은혜인데, 내 죄를 아는 게 은혜인데, 죄 플러스에다 회개한 나의 멋드러진 모습을 내가 다시 내 모습으로 나의 자랑거리로 끄집어내는 그 연극요소까지 끄집어내려하니까 이 예배가 바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돼.
은혜 받는 것은 자기가 무가치한 게 가장 은혜 받는 거예요. 무가치하면 그것보다 더 은혜가 없잖아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세상에 겁날 것 없잖아요. 어제 수요일 날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심 있는 사람은 남한테 협박받을 일이 없다고요. 주께서 이미 나를 죄인이라고 간주했는데 언론에 퍼뜨린다. 퍼뜨려라. 이미 주님이 다 퍼트려 놨는데. 하늘나라에 소문났거든요. 내가 죄인인 것을. 이미 예수님이 다 알려놨다고. 죄인인 것을.
다 알려놨는데 그걸 세상 언론에 퍼뜨리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세상이 두렵지 않으면 협박받을 일이 없습니다. 컴퓨터 하다가 이렇게 잘못되게 빠져가지고 음란물을 보여줬다. 돈까지 줄 필요가 없거든요. 왜 협박 공갈 당합니까? 아직도 내게 있기 때문에. 이걸 알면 부모님이 걱정하기 때문에. 그 부모는 내 부모고 내 가족, 내 가족이 나에게 아직까지 신경을 쓰고 기대하는 것, 니는 이렇게 살아야 돼! 이게 있고, 나는 그것에 본받아서 보란 듯이 찬란한 내 모습, 정말 당당하게 멋들어진 내 모습으로 그것을 내가 갖게 되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나의 종교성, 이것 때문에 벌벌벌 떨고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면 성령이 오게 되면 그걸 버리라고 하는 게 아니고 “얼레리 꼴레리 그래서 내가 죽었잖아.” “주여, 이래서 내가 무가치하군요.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영생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주어진 모든 환경이 어디에 갇혀있습니다. 누가, 누가 잘났나, 그 경쟁하는 경쟁 속에 신나게 빠져있습니다. 주여, 성령이 오게 하셔서 그렇게 빠지고 노닥거리는 우리가 천하에 무가치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6장47절(죄의 교환)150423b-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