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강-에스겔 45장 7-8절(왕의 땅)150429-이 근호목사
136강-에스겔 45장 7-8절(왕의 땅)150429-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41)
136강-에스겔 45장 7-8절(왕의 땅)1504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5장 7절-9절입니다. 구약성경 122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5:7-8
“드린바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바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편으로 향하여 서편 국경까지와 동편으로 향하여 동편 국경까지니 그 장이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찌니라 이 땅으로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중에 기업을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나눠줄 찌니라.”
장차 성전이 생기고 성전이 생기고 난 뒤의 결과중의 하나가 왕들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왕들에게 특정한 지역을 배정을 해주는데 그 지역은 성전에 의해서 혜택을 입는 지역의 동과 서, 국경선 전부를 장악합니다. 북과 남 아닙니다. 동과 서 입니다. 그 장악하는 왕의 땅의 간격이 나와 있어요. 장이 이만오천 척, 곧 남북 길이가 이만오천 척, 약 11. 25킬로미터 정도인데 그것을 양쪽으로 쫙 잡아당기면 서쪽과 동쪽의 국경인 요단강에서 지중해까지가 됩니다. 양쪽으로 잡아당기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 면적은 아닙니다. 그 폭만큼 동서는 꽉 차지만 전체가 꽉 차지는 않습니다. 그 간격만큼만 차지하지요.
그런데 이 왕의 땅을 배정받는다는 것이 너무 왕에게 특혜를 준 것 같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전이 이스라엘 땅에서 완공되기 전까지는 전 이스라엘 땅이 왕의 땅이거든요. 사실은 왕의 땅이 아닌데 왕의 땅인 것처럼 그렇게 행세들을 했지요. 그것은 이방나라를 그대로 모방해서 그렇습니다. 이방나라왕은 나라전체를 자기 소유인 듯 행세를 했습니다. 에스겔 46장 18절에 보면, “왕은 백성의 기업을 취하여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찌니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백성으로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동안 왕에게 백성들이 얼마나 부동산을 빼앗겼으면 왕 때문에 못살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에요. 지난날의 과오, 왕이라고 왕 행세를 하면서 티를 내고 전제주의적인 압제를 행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새 성전 시절에서는 특정 땅만 왕이 차지하고, ‘이제는 왕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의 땅을 손대지 말라.’는 조치를 해주신 겁니다. 이러한 조치를 누가 해주는가? 에스겔 45장에서는 성전이 먼저 자리를 잡고 난 뒤에 왕의 기업인 땅이 배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전의 주인공이 왕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왕들’이라 해서 왕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명이거든요. ‘왕들’ 8절에 보면 ‘왕들’인데 왕들이 세습적으로 왕 자리를 자기 아들에게 줄 때에 그들이 아무리 왕이라고 하지만 그 왕이 왕답게 땅을 배정을 했던 권한을 허용했던 지역이 따로 있어요. 그 지역이 뭐냐, 바로 이스라엘의 중앙에 자리 잡은 성소입니다. 성소가 갑이고 왕은 을이에요. 왕은 일종의 백성의 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왕보다 더 높은 곳이 성소이고 성소에서 활동하는 자는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이 왕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 배후에는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겁니다. 이것은 지난날 유대 땅 이스라엘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왕 되심을 보여줘야 할 책임 있는 왕들이 도리어 이방나라 왕처럼 행세했다는 그것을 회상해서 그 죄책을 항상 염두에 깔고 들어가는 겁니다. 지난 화요일에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할 때 어떤 식으로 용서하는가? 마치 수몰지역에 옛날 거기 살던 사람의 마을, 회관도 거기 있고, 집도 있듯이, 용서라는 이름의 물을 거기에 담아버리면 죄는 그대로 있고 그 폭만큼 그 수면위로 용서가 가득 차 있지요.
그래서 성도로 하여금 이미 용서받은 성도로 하여금 그 지역에 찾아가 보면, 이런 죄 저런 죄가 용서와 긍휼로서 덧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는 뭐냐? 그런 내 죄가 남아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내 죄를 없애달라는 식으로 원하고 있어요. 왜? 없애주면 또 자기 잘난 체를 하려고. ‘죄 없다.’ 그 때부터 잘난 체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것은 수몰이 아니지요. 사람은 누구한테 수몰, 덮쳐지는 것을 싫어해요. 단독으로, 일대일로 상대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삼위일체, 나와!” 이걸 원하지, 누구한테 점령당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겁니다.
점령당하는 것을 예속이라고 보고 이것은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자유개념은 뭐냐? 마귀에게 전에는 속했다가 이제는 주님으로 주인이 바뀌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자유라 하는 것은 전에 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예요. ‘전에 너는 마귀에게 속했잖아.’ 지금은 그 마귀한테 안 속했다는 의미에서 탈출 또는 자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자유라 하는 옛날 우리의 처지를 주께서는 영원히 박제합니다.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고 사라지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성전 중심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실패한 것을 다시 한 번 성전 안에 담아버려요. 그래서 그들로 입이 백 개 있어도 말 못하고 만들고 그 잘못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배정에 들어갑니다. 왕과 제사장 백성들을 새롭게 성전중심으로 배치가 되지요. 그것을 누가 하시는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성경은요, 우리가 구원받으라고 주신 책이 아니에요.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책입니다. 누가? 주님이. 주님이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성경이지, 이것보고 네가 알아서 구원받으라는 책이 아니에요.
그런데 거의 모든 교회가 구원받으라는 식으로 성경본문을 인용하고 있어요. 이것은 사탄이 짓이에요.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짓이 그 짓이에요. 어디까지 왔나, 하는 그 게임 있잖아요. “어디까지 구원 받았나?” 애들 그런 게임 있거든요. 날마다 자기 자신을 측정해요. ‘내 구원이 지금 어디까지 왔나?’ 하고 측정하면서 자기 대단함을 보고 즐거워하는 거지요. 자기가 자기로 인하여 즐거움을 만끽하는 오락의 일종으로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로 잠수부처럼 해서 옛날 수몰 지구를 찾아가게 만드는데.
“이렇게 더러웠습니까?” 이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데 ‘어디까지 왔나?’ 하고 물 위에 수면보다 목을 더 많이 내놓았어요. 성전중심으로 이러한 배정이 되는 것은 왕이라는 것조차도 제사장이 먼저 있고 왕이 그 다음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한테 왕이 필요하고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왕과 제사장이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말입니까?”라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주께서는 “너희들이 구원 받는데 왕도 필요 없고 제사장도 필요 없”어요. 필요 없기에 ‘왕이 무엇이며 제사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성전 안에 계시는 분의 기능을 가지고 바깥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우상이 뭐냐 하면, 내 내부에 있는 신을 외부에 끄집어내는 것이 우상이거든요. 그러면 우상이 아닌 것은 뭐냐? ‘하나님의 내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바깥으로 내놓는 것’이 우상이 아니에요. 유일하게 우상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이 내부에 뭐가 있는가? 성전이 있어요. 성전이 있고 안에 있는 성전이 바깥으로 나오면 왕과 제사장 기능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는 왕과 제사장이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받을 수가 없고 구원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간이나 쓸개나 내장을 내놓듯이 속에 있는 성전을 설계도 담아서 바깥으로 내놓는 겁니다.
내놓게 되면, 그들이 ‘그래 저거야’ 하고 달려드는 순간 그것은 하나님이 내놓은 취지에 반대가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돌판 깨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 돌 판을 가지고 언약 판, 또는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언약이지요. 모세입장은 그거예요. 하나님의 돌 판이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하늘나라 가는데 있어서 장벽에 불과한 겁니다. 인간은 언약 때문에 천국 하나님 계신 곳에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정해서 보여주는 것이 돌 판이고 언약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 돌판 언약을 뭐로 생각하느냐하면, 하나의 통로로 생각하는 겁니다. ‘야, 저거 지키면 구원받겠다.’ 모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너희들이 구원 받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너 같은 것들은 돌 판이 필요 없어.” 하고 깨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속에 있는 가짜 신이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그걸 현실이라 하면서 그런 의미를 자꾸 제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를. “하나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하면 구원 받습니까? 내가 어떤 모습으로 교회를 꾸미면 됩니까? 예배순서를 어떻게 짜고, 모일 때는 어떻게 모이고, 옷은 어떻게 입고, 어느 날짜에 예배드리고, 어느 날짜에 헌금하고, 전도는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이 모든 아이디어가 인간 속에 내부적으로 다 들어 있던 겁니다. 사실은 마귀생각이에요.
그 마귀생각이 성경개념과 언어를 사용해서 그럴싸하게 조작해 내는 겁니다. 그 실패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 온 거예요. 분명히 갈라디아서에서 절기를 지키지 말라(갈 4:10,11)고 했거든요. 분명히 절기를 지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지킵니까, 절기를? 왜 초막절 거론하고 유월절을 왜 거론하는 거예요? 안식을 왜 거론하고 주일은 왜 거론하고 크리스마스니 부활절이니 맥추절은 왜 거론 하는 겁니까? 이게 마귀 적이에요. 속에 있는 마귀가 참을 수 없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거 왜 지키는가?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뭐냐? 내가 원하는 천국을 내가 가고자해서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는 겁니다, 주제파악이. 이 성경책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본인이 맞장구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말하는 나팔절, 맥추절, 봄의 절기가 유월절과 초실절과 맥추절과 오순절이거든요. 오순절을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고 하고 가을에 있는 것이 7월 1일의 나팔절, 그 다음에 7월 10일 속죄일, 그 다음에 7월 15일부터 하는 수장절, 또는 초막절이라는 텐트 생활하는 그것. 그 절기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이유는 인간들이 맘속에 이런 것들이 통로로 해서 발판으로 해서 기어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속내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끄집어내신 거예요. 의도적이지요. 지킬 만하거든요, 그게. 그리고 지켰다, 안 지켰다, 하는 것이 본인이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거예요.
십계명은 어떻습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그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성전을 만들라고 하니까 만들었잖아요. 만들 만해서 만든 거예요. 만들고 보니 하나님영광이 나타났거든요. ‘셰키나(shekhīnāh)’의 영광이 하여튼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그 영광이 자기들을 심판하는 영광인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같은 성전을 놓고 이걸 통해서 너를 심판하겠다고 주께서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이걸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완전히 오해한 거예요.
하나님은 창세기 3장의 취지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저주했던 취지를 하나님께서 양보한 적도 없어요. 보여줬는데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것은 사실은 없음의 커튼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내가 바깥으로 나오면 바깥으로 나왔으니까 눈에 띄거든요. 눈에 띄는 그것이 도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저쪽 커튼 뒤쪽으로 사라져버려요. 사라져버리니까 따라가려다가 정면으로 걸림돌에 부딪히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걸림돌에 부딪혀서 면상 다 깨는 거예요. “어딜 따라와? 어딜 따라와? 천국이 어디라고! 따라와?” 천국은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인간은 구원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서 가고자 했던 그 시도 자체, 그 발상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이 있고 난 뒤에 성전을 만들었을 때에 성전이 영원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성전의 모든 관리 제사장을 세우니까 제사장이 일 하면 되는 줄 알았지요.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성전 일은 누가 하느냐? 보이지 않는 존재가 합니다. 그게 누구냐? 천사가 해요. 그게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7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정확하잖아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전부 다 성전에서 나와요. 누가 나오나? 천사가 나와요. “인간은 손 떼라, 손 떼! 너희들이 지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달달 외워서 시키는 대로 주의할 것 주의하고, 666 바코드 칩 안 받고, 조심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천사가 성전에서 나오는데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불을 다스리는 천사, 성전 안에 불이 있는데 그 제단 불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냐 하면 천사에요. “목사님, 구약에는 제사장이 했잖아요.” 글쎄 나타난 제사장은 눈에 보이는 제사장이라니까요
제사장이 일하니까 사람들은 오해하는 거예요. ‘같은 인간인 제사장이 저 안에서 살 수 있구나. 그렇다면 우리도 저 인간처럼, 저 제사장처럼 구원받을 수 있겠네.’ 하지만 제사장 다 망했습니다. 보여주고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보여주고 ‘제사장을 통해서 구원받겠구나.’ 하고 딱 잡으면 진짜 제사장은 사라져버려요. 말씀의 커튼 뒤로.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그 있음이 다시 회귀가 되거든요. 그런데 인간들 생각은,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구원 받거든요. 지금 여기 있으니까 구원받거든요.
애가 둘 밖에 없는데 “세 째 애 구원 받아야 되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거든요. 세 째 애가 없는데 뭘 구원 받아요? “있으니까 있는 우리를 구원시킨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있음은 반드시 있음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없음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없는 분입니다. 없는 분이 나타날 때 계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른 손이거든요. 모든 일은 오른손이 해요. 출애굽기 15장에서 홍해를 건너올 때 하나님께서 오른손의 능력으로 했다고 합니다.
오른손에 능력이 있다는 말은 너희들 눈에는 오른손, 나타난 것은 오른손만 나타나고 하나님의 몸체는 안 나타나는 겁니다. 나중에 예수님만 나타나는 거예요. 구약 때는 그 오른손이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에게 소유되거나 잡히는 것이 아니고 도로 쑥,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귀환, 사라져 버려요.
사라질 것 왜 등장했는가? 이게 중요한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느 악한 영적 존재에 속했는지를 몰라요. 유일하게 아는 것은 오른편에 계신 주께서 나타나셔서 활동을 할 때, 비로소 숨어 있던 악마가 도저히 못 참아가지고 영적인 전쟁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예수님 때문에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가 포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전에 광야에 나타났어요. 사람 만나기 전에 광야에서 뭐 했는가 성령에 의해서 사탄을 만났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럴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사탄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뭘 만나요? 만난다고 일이 해결 안 됩니다.
인간은 왜 안 되느냐 하면, 있는 존재기 때문에 있는 존재가 없어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발 그것만큼은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구원은 애초부터 안 됩니다. “제발 쉿!” 그 소리만큼은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인간이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 인간은 구원 안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되었는데.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구원 안 됩니다. 그러면 구원은 누가 됩니까? 하나님의 아들만 구원됩니다. 누가 됩니까? 예수님이 아들만 구원돼요.
예수님만 구원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기에 합류했고. 그런데 우리가 그 몸에 합류했으니 우리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천만의 말씀. 우리가 주의 몸에 합류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냥 합류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스도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 부활과 함께 살아난다.’고 로마서 6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 죽을 때 뭐도 죽겠어요? 바로 ‘구원 받아야 돼. 구원 받아야 돼. 구원 받고 싶어라! 뭐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거 해서 구원 받을까?’라는 모든 논리적인 것, 신학적인 것, 성경공부, 예배, 전부 다 무효로 삭제되어 버립니다. 그런 것은 다 날라 가버려요. 그것은 바로 사탄이 배후에서 하는 짓거리가 그거였습니다.
신학교를 다녔네, 목사가 되었네, 어쩌고저쩌고,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을 때 그것도 함께 날라 가버려요. 남는 것은 뭐냐?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행위로 구원받았습니다. 나의 행위로는 어떤 구원의 효과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나는 나대기만 했습니다. 불안했고 염려했습니다. 염려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염려했을 뿐입니다. 구원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주께서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너의 역할이었느니라. 너의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역할이었느니라.”
그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한 사람이 누구냐? 욥이에요. 욥은 아주 연기력이 뛰어났어요. 연기의 몰입을 ‘매쏘드’라 합니다. 몰입하는 연기. 얼마나 뛰어났는지 애 열 명 다 죽였어요. 태풍 불어 집 무너져서 다 죽었어요. 떼강도 만나서 재산 다 날렸어요. 너무나 실제 같아서 욥은 하나님께 달려들었지요. 나중에 보니 연기, 그것이 하나의 무대역할 드라마 역할인 것을. “연기 잘 했나? 너는 연기 아닌 줄 알았지? 실제인 줄 알았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쏘드’, 몰입연기에 빠져 있는 겁니다. 왜 연기란 게 뭐예요? 나의 주장을 가위표로 없애는 것이 연기에요.
나는 역할 때문에, 연기 때문에 있어야 하고 그 역할 속에서 나 자신은 사라지라고 역할을 맡겨준 겁니다. 나는 내 이름으로 살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연기였고 진짜는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왜 우리이름으로 사는 그것이 죄가 되는지를, 내 구원받고자 열심 내는 그것이 왜 죄가 되는지를 십자가 앞에서 보여주는 연기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충실하기를! “주여 뭘 하면 복 받습니까?” 해놓고 이렇게 뒤에 붙여야 돼요. “기도와 말씀 외에는 거룩함이 없다고 했는데 기도와 말씀을 몇 시간을 해야 되고 성경은 하루에 몇 장 봐야 구원 됩니까?” 해놓고 이렇게 뒤에 단서를 붙이세요. “제 연기 어떻습니까? 이미 구원 받아놓고 또 구원받고자 하는 제 어설픈 연기가 어떻습니까?” “어떻기는? 죄인이지 뭐. 그게 사탄의 모습인데.”
“있음을 포기하지 말라.” 사탄의 음성입니다. “계속해서 있음을 포기하지 말라. 다른 사람은 죽어도 너는 살아남아야 해. 너는 살아남아야 해.” 그것이 나에게 오게 되면 “나는 살아남아야 해.” 내가 질문하고 나에게 대답이 회수되는 식입니다. 그래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를 하나의 멋있어 보이는 노래로 바꾼다면 ‘You raise me up’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신께서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나의 동일성, 동질성을 붙들고 싶었으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노래가 눈물 쏟아낼 만큼 감동적이겠습니까? 또 인순이가 부른 ‘거위의 꿈’, “그래요.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그런 노래.
우리는 스스로 자기한테 위로 못해서 환장한 사람들이에요. 스스로 위로를 못해서. 어떤 식으로 위로하는지 알아요? “착하게 산다고 고생 많이 했지 이제 나쁜 짓 좀 해라. 괜찮다. 봐준다. 그동안 착한 일 많이 했는데.” 이런 식으로 위로해요. 선악적인 조치로서. 우리의 아이디어는 선과 악 그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결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천사가 와서 이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게 바로 왕 왕의 기능입니다. 왕의 기능과 제사장의 기능은 커튼 뒤에 이미 하늘나라에 있는 성전에서부터 주님의 내부가 이 바깥의 외부로 퍼져버리면 주님 안에는 성전이고 바깥에는 이 일상의 현실입니다. 일상의 현실.
천사가 타작하는 것, 왕적인 권위로서 타작하고 택한 백성에게는 제사장 기능으로서 천사가 그들을 지키고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받게 하는 기능, 이미 천사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보면, 그러한 역할을 맡은 무리가 나옵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하는데, 우리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 역할 또는 배역을 맡아서 할 때 과연 우리가 성도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우리가 이 복음 안에서 삶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리스도에게만 느껴지던 그 사탄의 영, 사탄의 역사가 성도에게도 체감되는 혜택을 입습니다.
‘아, 이 세상에서 사탄이 이렇게 작용하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혜택을 입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왕과 제사장으로 오시면서 진짜 예수님이 메시아라 하는 것을 누가 아느냐? 이것은 귀신들이 알아요. 나가면서 알아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맞지요? “쉿! 그 입 다물라. 십자가 지기 전에 아무소리 말아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 왜 오해하느냐? 그 당시 유대나라에는 귀신 들렸다, 악마에 들렸다는 것을 반대로 생각하는 개념들이 유행하고 있었거든요. 유대인 퇴마사들도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요.
그런데 그것은 사탄에 의해서 사탄이 나가는 것이거든요. 악마에 의해서 귀신이 나간다는 그 말이지요. 예수님하고 다른데 다른 사람은 같이 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같은 레벨인줄 알고 추종하니까 그렇게 못하도록 사탄보고 입을 다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저 사람은 어떻고, 이 사람은 어떻고?’가 아니라 ‘저 마귀는 어떻고, 이 마귀는 어떻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마귀들의 특징은 뭐냐? 한마디로 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착해서 구원 받는 거예요. 성경공부해서 구원 받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행함으로. 어떤 사람은 “고난 받아서 구원 받는다.” 어떤 사람은 “죄를 회개함으로 구원받는다.” 어떤 모양새든 인간의 뭔가가 가미된 것으로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그걸 총괄해서 말하면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외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가는가? 주님이 구원 받을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내요. 새로운 피조물로. 그 말이나 이 말이나 같은 말이잖아? 같은 말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어떤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지 않지만 내가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새로 만들어준 우리가 구원 받아요. 그렇다면 우리는 통과할 수 없는 것을 통과하는 그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람만 구원 받습니다. 그 능력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내가 있음에 나는 마귀 짓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살려볼까? 구원해볼까? 영생 얻어 볼까?’ 하는 마귀 짓을 한 나를 주께서 이렇게 구원했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생깁니까? 그냥 마귀일 하도록 내버려두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십자가 은혜로 구원해놓으시니 이제 그저 내가 할 것은 ‘아, 저렇게 내가 마귀 짓을 했구나.’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 성경은 주께서 구원하시는 책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책이 아니고 주께서 이런 식으로 구원을 시켜주시는 책이에요.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천사가 와서 이 땅에서 왕과 제사장의 권세를 행사하는데 거기서 나타난 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세상의 임금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하는 말이 나와요.(벧전 2:13,14) 또 유명한 말씀 로마서 13장에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이게 뭐냐? 제대로 통치하는 권세는 사실은 그 사람의 권세가 아니고 바로 천사의 권세 주님의 권세가 역사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쁜 짓 하면 매 맞는 것이 당연하고, 세금 내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일에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쁜 짓하면 감옥소에 가는 것이 당연해요. 왜? 그것은 왕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굴복하듯이. 이렇게 해서 이 세상 모든 권세나 구원도 나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도는 비로소 알지요. 세상 구석구석, 모든 것, 심지어 개미 한 마리 기어가는 것도 전부 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세계, 그 속성이 외부로 드러나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이미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천국은 어디 있는가? 천국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곳에 있어요. 천국은 알 수 없는 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이 나타나게 되면,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은 주와 함께 있음을 자신의 사탄적인 환경을 겸하여 느끼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왕 주셨고, 또 제사장은 주님 자체가 제사장이니까, “성전의 위력이 오늘날 저를 이렇게 구원해 주셨군요.” 하는 고백 이것이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넓게 보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을 통해서 세상 어느 구석구석 주님이 활동하지 않는 영역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일에 주님의 분주함을 알아서 우리가 맡은 역할 잘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36강-에스겔 45장 7-8절(왕의 땅)150429-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