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110강, 111강) 일거리, 이웃사랑 150423
유튜브 (110강, 111강) 일거리, 이웃사랑 150423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110강
111강
이미아(IP:180.♡.90.76)
15-04-25 20:57
110강-YouTube강의(일거리)150423-이 근호 목사
제 110강, 제목은 ‘일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에게 일거리를 주십니다. 그 주신 일거리를 성경에서는 ‘은사를 주신다.’ 라고 되어 있죠. 은사라는 것은 은혜와 같은 말인데, 일을 하기 위한 용도로써 은혜를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일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근데, 그 은혜는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머리가 일하게 되면 지체는, 노는 지체는 없습니다. 머리가 일하게 되면, 그 머리되신, 일하시는 머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지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그렇게 되게 돼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일한다고 했는데, 막상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보게 되면, 백퍼센트 자기 밥 먹고 살기 위한,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스물 네 시간 거기다 매진한다는 느낌을 받을 겁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성경에서는 성도에게 성령으로 그 은사가 오고, 그 은사는 주님이 주신 일이고, 그 주의 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게 돼있다고 되어 있지만, 성도 본인이 아침에 눈만 뜨면 나오는 것이 주를 위해서 일한다는 느낌보다도, ‘그래 살아야 돼!’ 라는 그런 아주 단순한 생각밖에 들지 않을 때, 내가 잘못됐는지 아니면 성경이 잘못됐는지 상당히 혼선이 올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는 주께서 맡겨 준 일이 실제적으로 주님을 위한 일이 되는지, 우리가 그 경로를 탐색을 해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일이라고 수용했던 일들이 성경에 여러 군데가 나옵니다. 분명히 주님 앞에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은 그 시작부터, 중간과정 마지막까지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계획했고 자기가 마음을 작심을 해서 주 앞에 드린 일인데, 주님께서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 하면, 그 모든 일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에둘러서 그렇게 해석을 해버려요.
참 감사한 일이죠. 고마운 일이고. 분명히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의미가 반드시 나에게로 환수하기 위해서 일을 하거든요. 어떤 일을 벌려 놓고는 그 일은 내가 생각했고 내가 추진했고 그래서 내가 했다는 그 자부심을 회수하는 식으로 일을 하기 마련인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자기의 이기주의적인 의식을 아시면서 그것을 “그래, 나를 위해서 그 일을 했구나.” 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거기다가 의미를 덮치게 하시죠.
그러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주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던 그것이 머쓱해지고, 미안스럽고,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그 대목이 바로 마태복음 26장 6절에서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렇게 나와 있어요. 예수님이 시킨 게 아닙니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이거는 여자가 결정한 본인 일이지, 주님이 맡기신 일이 아니라고 누가 봐도 그거는 단정 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제자들도 함께 식사했는데, 식사하는 가운데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어요. 옛날에는 향수가 많이 비쌌던 모양이죠. “저 비싼 향수를 일거에, 무의미하게 허비해버리면 안 되잖아. 저 비싼 것은 팔아서 이렇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일 텐데.” 라고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 여자의 행동이 경솔하다는 겁니다. 그 비싼 그것을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도움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께 두고두고 영광을 돌리는, 예수님의 전도에 효과가 있을 건데, 그것을 직접 예수님 머리에 갖다 부었으니까 그거는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있겠죠.
이 점이 중요합니다. 여자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주님 앞에 향수를 다 부었고, 그 행위, 그 일한 것을, 같은 인간인 주변에 있는 제자들은 그것이 주의 일이 아니고 자기 빛내기 위한, 주의 일에 들어설 수 없는 잘못된 일이고 주님의 일로써는 가치가 없다고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왜냐하면 12절에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 장례를 위함이라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해석을 내려버렸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 손에서 그 일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발생되어야 돼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장례를 위해서 이걸 부었습니다.” 라고 해서 “그렇지. 니 생각이 내 생각이야.” 라고 수용을 하지를 않아요.
여자가 어떤 일을 했던 간에, 주님 입에서 그 일에 대해서 주님 나름대로의 새로운 의미가 새롭게 창출되어서, 도로 그 의미가 주어질 때 비로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고 봉사한다고 해서 주의 일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충성을 빙자한 나의 일이 돼요. 주의 일이 안 됩니다. “결국은 내가 일을 했습니다.” 라는 자기 주인공 됨을, 인간은 포기할 줄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그런 이기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그 일을 주님께서는 손에 쥐시고, 주님만이 아시는 의미, 주님만 챙기고 있는 그 의미를 경우하면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로 공표가 됩니다. “저 여자가 나한테 향수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가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여자는 나에게 향수 붓는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 라고 이렇게 해석을 해버리죠.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어리둥절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사실은 당사자도, 향수를 뿌린 여자 본인도 어리둥절하다는 사실이에요. “나는 그런 뜻으로 부은 게 아닌데.....,주님께서는 왜 그것을 좋게 해석을 해버릴까?” 왜 그렇게 우리가 무심코 한 일을, 어떤 의미에서 내 생존을 위해서, 나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이기적인 성향과 의도를 가지고, 이거는 뭐 어떻게 한 일 조차도, 주님께서 그것을 받아서 주님을 경유해보니까, 전부 다 그것은 나의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주님께 헌신한 일로, 의미를 전환시키는 권한은 예수님한테 있었습니다.
그 권한을 예수님한테 인정할 때, 그것이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일이 뭐냐, 요한복음 6장에 나온 말씀처럼 주의 일은 예수님이 하는 일을 믿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따라서 평소에 우리가 너무나 이거는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고, 나는 욕망에 넘쳐가지고 일을 하는 거라고 일방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미안스러워 해도, 그것이 주님 손에서 경유하게 되면 그 모든 게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우리에게 돌려받게 되는 겁니다.
시작할 때는 우리가 시작했지만, 그 의미가 우리한테 다시 도착이 될 때는 주를 위한 헌신의 일로, 참 낯 뜨겁게도 그렇게 의미가 바뀐 채로 우리한테 주어지니, 그 의미를 받은 당사자는 모든 공로와 영광을 오직 주님께만 돌릴 수밖에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 새로운 무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무대에 이게 다시 집합이 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시 배당을 주시는 거예요. “니가 이런 식으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일했구나.” 라고 배당을 받고 “너는 또 이런 식으로 나의 영광을 위해서 했구나.” 이렇게 할 때, 로마서에서 하신 말씀처럼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로, 그것을 우리에게 의미로 돌려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운데서 비로소 자신의 죄성을 다시 깨닫게 되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은혜의 능력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주신 주님의 일거리로, 우리가 한 일거리가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일을 하라고 일어난 일거리의 과정입니다.
이미아(IP:180.♡.90.76)
15-04-25 20:58
111강-YouTube강의(이웃사랑)150423-이 근호 목사
제 111강, 제목은 ‘이웃사랑’입니다. 기독교 내에서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굉장히 많이 언급되고 있어요. 왜냐 하면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자기 교회의 교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외적으로, 사회적으로 교회는 착한 일을 도모하는 단체다. 따라서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 존재하는 이유는 주변에 선한 일,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그 착한 일의 혜택을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교회에 집합해가지고 그 교회가 커지는 정도에 따라서 하늘나라의 면적이 같이 커지는 것으로, 그렇게 눈에 증거를 확보하는 것으로, “역시 우리 교회는 주님이 살아있어.” 그걸 믿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웃사랑을 해야 될 이유가 과연 이 교회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느냐, 그리고 그 교회에 다니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 있는 사람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확보용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자고 그렇게 외치게 됩니다. 또 그런 행사를 많이 벌리죠. 바자회 같은 그런 행사를.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는 교인들은 이참에 자기가 믿음 있는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싶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 그것을 증빙하고 싶어서 선한 일을 도모하게 돼요. 이웃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할 때, 대외적으로 보는 시선과, 자기를 쳐다보는 타인들의 평가들이 있으니까 열심히 이웃사랑을 하게 되고, 그 이웃사랑의 최종평가를, 교회 당국에서 평가를 내리게 되면, 나는 이웃사랑 한 사람이 되고, 내가 이웃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에 다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한 일을 많이 해놓게 되면 어떤 또 보상이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살아가면서 내가 살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또는 의도적으로 남에게 약간의 나쁜 짓을 많이 해도, 워낙 착한 일을 많이 해놨기 때문에, 이웃사랑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쉽게 나에게서 축복을 뺏어가거나 나에게 벌 내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그렇게 다짐을 하죠.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입니다.
성경에서 이웃사랑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은 어떤 죄를 지었느냐 하면 이웃사랑이란 죄를 더욱더, 의인 줄 알고, 그게 착한 건 줄 알고, 아는 그 죄.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사랑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마치 죄가 아닌 것처럼, 착한 일 많이 한 것처럼, 그렇게 위장하는 죄를 추가적으로 거기다가 또 죄를 짓게 되어 있죠.
이웃사랑을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웃사랑은 누구 몫이냐 하면 예수님의 몫이에요.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 쪽으로 땡기는데 사실은 성경은 주님 쪽으로 땡겨져야 해요. 주님이 실천할 책이지, 우리가 땡겨서 실천할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 실천을 위해서 주신 책입니다.
근데, 인간은 이것을 자기 쪽으로 땡겨서 내가 실천함으로써 내가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다짐에 다짐을 하고 싶은, 확연한 증거를 남기고 싶은 책으로 이것이 왜곡되게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은 어떤 말씀이냐? 왜 줬느냐? 실패하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이웃사랑을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집단으로 애쓴 단체가 바로 이스라엘이었고 그리고 유대 나라였습니다.
그들의 이웃사랑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필히 처단해야 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들의 이웃사랑의 기준에 의한다면. 그들의 이웃사랑에 의할 것 같으면, 그러니까 남에게 사랑을 해야 될 목적 때문에 그 방법과 모든 수단이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도 정당화 되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정당화되는 모순이, 인간들이 지어낸 이웃사랑 안에 이게 포함이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교회에서 심방 가서 하나님께 그 사람이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들이 더 오래 살고 싶은 그 욕망을 자기들이 원했던 거니까, 분명히 저 침대에 누워 있는 말기 암 환자도 살고 싶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왜곡되게 자기 기준을 적용시킨 거예요. 그 말은 평소에 멀쩡한 자기 자신이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하나님이여! 저 살려주세요.’
그들이 말한 이웃사랑은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 이것이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근데, 남들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모르죠. 모르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저 사람도 원할 것이라고 아마 일방적으로 그렇게 매도시켜 놓고, 내가 이 땅에 더 살고 싶으니까 왜? 애들도 크지 않았고 아직도 결혼도 안 했으니까 무조건 자식을 위해서 자기는 안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살고 싶다.’ ‘내가 살고 싶다’가 평소에 깔려 있는데, ‘그러니까 저 환자도 아마 살고 싶을걸.’ 일방적으로 생각해가지고 “참, 이 권사님 더 살게 해주시고.....,”이렇게 나오는데, 지금 권사님은 진짜 복음이 들어 있기 때문에, 권사님은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고린도후서의 말씀처럼 소원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처럼 빨리 죽고 싶은 게 소원이에요. 죽고 싶은 게 소원인데, 차라리 심방 와 가지고 “주여, 저 권사님 빨리 주님 만나게 해달라.” 이런 기도만 했더라면 그 권사님은 너무 기분이 좋아가지고 그 목사님께 아마 감사헌금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주 짜증이 나는 거예요. 본인은 주님 만나는 것이 소원인데, 목사가 와서 기도한다는 것이 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니까 이거는 웬수가 다녀간 거예요. 웬수가. 이웃사랑이 안 되는 이유는 사람은 남을 볼 때에 자기 생각을 확대시켜서 일방적으로 남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딴에는 사랑을 베푸는데 저쪽에서는 부담이 되고 짐이 돼요.
만약에 김장을 담그는데 누가 와서, 교인이 와서 김장을 도와줬다고 칩시다. 고맙다고 이야기하지만 부담돼요. 혹시 그 교회에다 헌금이나 하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부담 돼요. 이웃사랑을 할 때는 본인한테 물어보고, “사랑을 베풀어도 좋습니까?” 하고 물어보고 해야 돼요. 에를 들어서 “제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데 전도하기 위해서, 천국가게 하기 위해서 복음 전해도 됩니까?” 하고 물어보고 해야 돼요. 물어보고 하지 않은 전도가 뭐냐, 지하철에 새벽에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는 그런 거예요.
커피를 나눠주고 화장지를 나눠줄 때 물어보고 해야 해요. “이 화장지 드릴 테니까 받겠습니까?” 또 받는 사람이 “무슨 의도로 줍니까? 전도하려고 준다면 그럼 안 받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래 되어야죠. 근데, 모든 인간의 행동은 본인의 자기증명이거든요. 자기가 잘남을, 자기가 우수함을, 자기가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웃사랑이라는 핑계로 자기 힘을 그쪽으로 쏟아서, 자기 힘을 받은 사람을 내 사람으로 끌어 땡기고자 하는 욕망이 작용합니다.
교회에서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은 그 사람을 내 편 만들기 위한 하나의 힘이, 정복력이 작용해요. 만약에 전도했는데 그 사람이 다른 교회에 가면 화가 나죠. 이런 모든 것이 주께서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경유해서 이웃사랑을 외칩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이웃사랑이라는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고, 능력도 없고, 그런 입장도 안 된다는 것을 까발리면서 우리에게 이웃사랑이라는 것을 요구를 하신 겁니다.
그러면 로마서 13장에 보면 이웃사랑은 뭐냐, 사랑하면 그것이 이웃사랑을 완성했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 로마서 13장 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이 이웃사랑은 신약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전달되었습니다.
근데 그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 없습니다.”가 들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나는 이웃을 사랑한 적도 없습니다.”가 들어 있어요. 바로 그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거예요. “집사님! 나는 집사님을 사랑한 적 없고,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고, 자식아! 나는 너를 사랑 한 적 없고, 이토록 나는 나 밖에 몰라.” 그게 이웃사랑이에요. 그게 바로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겁니다.
우리 교인들 다 옆에 교회 가도 “주여! 당연한 조치입니다.” 이게 이웃사랑이에요. 교인 다 빼앗기고 우리는 주님의 이웃사랑 보여주고. 주님께서 누굴 기뻐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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