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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땅과 성소 150422우리교회에스겔

땅과 성소 150422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땅과 성소(에스겔 45:1-4)

이근호

15-04-22 21:07

땅과 성소

2015년 4월 22일 본문 말씀: 에스겔 45:1-3

(45: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장은 이만 오천 척 이요 광은 일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45:2)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장이 오백 척이요 광이 오백 척이니 네모 반듯하며 그 외에 사면 오십 척으로 뜰이 되게 하되

(45:3) 이 척량한 중에서 장 이만 오천 척과 광 일만 척을 척량하고 그 가운데 성소를 둘지니 지극히 거룩한 곳이요

(45:4) 그 땅의 거룩한 구역이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서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에게 돌려 그 집을 위하여 있는 곳이 되게 하며 성소를 위하여 있는 거룩한 곳이 되게 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소를 두실 지역이 공개되었습니다. 에스겔 48:22에 보면, “그런즉 왕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다 지역과 베냐민 지역 사이에 성도가 설치된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크기도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동서로 약 11.25km입니다. 그리고 전혀 지정된 구역은 남북으로도 약 11.25km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 세 구역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제일 북쪽이 레위인들의 지역으로서 동서로는 11.25km이지만 세로로는 약 4.5km가 됩니다. 그 다음 지역이 오늘 본문에 소개된 지역, 곧 거룩한 지역입니다.

동서로는 11.25km이요 세로로는 약 4.5km가 됩니다. 바로 이 구역 간에 성소가 놓이게 되는데 그 성도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약 225m가 됩니다. 마지막 남은 구역은 ‘성읍의 기지(基址)’라는 곳으로서 나머지 12지파가 공동으로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며 성(城)도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특정 지역에 놓일 성전에 소개했다면, 이제 구원받을 자가 그곳에 찾아가서 합류하면 구원이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활용하는 기호와 언어를 사용하여 지역을 알려주신 것은 바로 인간들로 하여금 오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기호와 언어는 이미 인간의 머리 안에 먼저 그림 이미지로서 형상화된 것을 밖으로 표현하면서 쓰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머리 속에 그려내는 그 그림 안에는 필히 자신이 주인공으로 자리잡게 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어떤 식으로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이는 누가 가르쳐줄 필요도 없이 모든 인간들이 태생이 이러합니다. 데살로니가 4:16-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성경의 언어를 대하면서 인간의 머리에는 나름대로 상상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림 안에는 반드시 본인이 지상에서 하늘로 쳐다보는 내용을 집어넣게 됩니다. 즉 인간이 그려내고 상상하는 모든 그림 안에는 반드시 본인이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과연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구원될 자격이 있는 것처럼 독단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바로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자기 구원을 기정 사실하고 있다는 그 생각으로 인해 구원에 실패하는 조치로서 성경을 주신 겁니다. 성경은 실은 예수님을 향하여 돌려져야 될 책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그 내용을 다 수행하셔야 될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책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서는, 이 성경이 구원받을 자격이 당연히 있는 본인이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라고 오해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책 내용상, 자신이 노력하면 구원이 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의식으로 성경의 말씀의 환경으로 설치하고, 공부와 기도로 천국에 입성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고서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특정 지역에 거룩한 성소가 세워진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예언하셨기에 인간들은 그 장소를 찾아내어 열심히 찾아가면 하나님과 합류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은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참된 성소는 인간의 눈 앞에서 사라지고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3:32-3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낯선 시간과 공간이 나옵니다. ‘낯선 시간’이란 1일과 2일과 3일 째를 말합니다. ‘낯선 공간’이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눈에는 1일과 2일과 3일째는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긴 시간 중에 그저 일부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낯선 공간’에 대해서 마찬가지 느낌일 것입니다.

하지만 3일째와 예루살렘은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주어진 시간과 공간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에 편입될 그런 성질의 시간과 공간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인간들의 시간과 공간은 헤롯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의미 심장있게 하신 ‘제 3일’과 ‘예루살렘’의 의미도 모릅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우리들도 같은 처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은 어디까지나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그런 시간과 공간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누가복음 23:20-23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공간은 곧 십자가 안에 들어 있습니다. 기존의 인간의 시간론과 공간론으로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공간입니다. 어떤 자만 발견되느냐 하며는, 바로 나 중심의 시간과 공간의식으로 인해 가차없이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 목박아라”고 소리는 동기로 작용함을 인정하는 사람에게입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인간이 고대하는 천국도 같이 날아가버렸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구원될 자격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박힘으로서 확실해졌습니다. 모든 인간의 구원욕구는 십자가 앞에서 멈춰야했습니다. 인간이 못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에스겔 45장을 담으시고 오직 성도에게만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서 구원될 권리가 없음을 알게 된 그 성도에게만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구원될 자격이 있다고 우기므로서 우리가 죄의 중심에서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동시에 그 자리가 십자가 사건이 적용되는 자리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4-24 08:33

135강-에스겔 45장 1-4절(땅과 성소)1504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5장 1절-4절입니다. 구약성경 122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5:1-4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장이 오백척이요 광이 오백척이니 네모반듯하며 그 외에 사면 오십 척으로 뜰이 되게 하되 이 척량한 중에서 장 이만 오천 척과 광 일만 척을 척량하고 그 가운데 성소를 둘찌니 지극히 거룩한 곳이요 그 땅의 거룩한 구역이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서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에게 돌려 그 집을 위하여 있는 곳이 되게 하며 성소를 위하여 있는 거룩한 곳이 되게 하고.”

성경에서 특별한 구역을 정해놓고 그것을 거룩하다고 언급을 하시는 이유는 창세기부터 죽 이어서 보면 인간은 본래의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기회를 이미 박탈당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곳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 거룩한 곳이라는 게 너무 추상적이에요. 너무 모호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보다 월등하게 깨끗하다는 이런 쪽으로만 이해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상상해서 고안해 낸 잘못된 거룩입니다.

이 거룩을 보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곳으로 찾아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추방된 존재기 때문에. 추방된 입장이기에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찾아가기 보다는 찾아가는 그 와중에 우리는 늙어서 흙이 되고 맙니다. 흙이 되고 말면 찾아가는 것도 중지가 돼요. 멈춰야 됩니다. 백년 살고 혹 2백년을 살아도, 어떤 이는 천년 가까이 살았는데 거룩을 못 찾았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막연하게 거룩을 생각하지만 그 거룩은 막연한 것이고 실재하는 거룩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성경에는 우리가 거룩을 어떻게 찾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우리 안에서 우리가 사는 땅에 거룩한 곳을 만들어 내는 하나님의 자기방식에 대해서 성경은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사실은 성경을 우리 책이라고 보면 안돼요. 이 책을 거꾸로 돌려야 돼요. 우리 쪽에서 보지 말고 주님 쪽으로 봐야 돼요. “여기 쓰인 모든 일은 주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고 주님 쪽에서 봐야 돼요. 주께서 이렇게 보시고 일을 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이 책을 보고 있도록 아직까지 목숨이 부지되고 있고, 그런 겁니다.

주께서 손대는 책을 우리가 손대면 안돼요. 손대지 말고 돌려드려야 되지요. 돌려드리면 주께서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의 실천은 주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에요. 이것과 꼭 반대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종교는 불교도 있고 이슬람교도 있고 여러 가지, 유교도 있고 또는 무종교, 종교 없는 종교도 있고 사주팔자 보는 종교도 있는데 이런 종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찾아가는 거예요. 내쪽에서 찾아가는 겁니다.

내가 찾아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찾아가는 나는 항상 정당해요. 찾아가는 나를 누가 손대면 기분 나빠요. 그리고 신을 찾아가고, 거룩을 찾아가고, 영생을 찾아가는 그 나를 누가 부정해 버리면 기분 나빠요. 만약에 내가 주를 찾아가는데 손가락을 대면서 이의를 제기하면 그 손가락을 깨물고 싶어요. 그 깨물린 손가락이 예수님의 손가락입니다. 이 책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이걸 실천에 옮겨가지고 주님 찾아가겠다는 그 시도는 옛날에 유대인들이 했고 지금은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고요, 특히 문제 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자격자라도 되는 것처럼 오인하는 겁니다. 이것은 타고난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의 본성이 그래요. ‘나는 신을 찾아가서 신과 영원히 살리라.’ 그럴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본인한테 있다고 여기는 그것, 마귀가 그런 마음을 줬습니다.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런 마음을 벌써 줬어요. 하나님의 거룩은 어디 있는가? ‘어떤 특정지역에 있으면 참 좋겠다.’ 오늘 본문에 보면 특정 지역에 있잖아요. “왜 특정 지역에 하나님의 거룩이 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찾아가면 되니까.”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 타고 가시렵니까? 땅콩 먹어가면서 타고 갈래요?

특정지역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 지역에 찾아갈 수 있는 그러한 안목과 능력이 하나님이여, 저에게 있습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대교적 사고방식입니다. 특정지역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감람산에 두 발 딛기만 한다면 찾아가겠다는 것, 남은 안 찾아가도 나만은 열심 내서 찾아가겠다는 것.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인가?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뭘 근거해서? 뭘 근거해서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것이 있어요? ‘신을 찾아서 구원 얻겠네.’ 그럴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특히 교회를 보면 꼭 박상철이 노래 같아요.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되고 나는 무조건 구원 받아야 돼. “거룩한 장소가 있다면 찾아가겠습니다.” 비행기 타고 물 넘고 산 넘고 바다 건너서 찾아간다는 거예요. 에스겔에서 장소를 언급한 것은 보여줘서 속아 넘어가도록 보여준 겁니다. 속아 넘어가라고. ‘아, 거기 딱 있네. 이제 끝났네. 감람산에 주님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면 되고, “성경은 문자 그대로 되니까 그거 지키면 되고.”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거룩한 장소가 나와 있으니까.

이 거룩한 장소, 지점이 어디인가 하면, 에스겔 48장에 보면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중간에 있어요. 그리고 이곳이 과연 어느 나라인가? 그것은 에스겔 40장에 처음 성전 측량할 때 보면 이스라엘을 찾아간다 했으니 이스라엘 동네입니다. 내비게이션 찍어보면 돼요. 이스라엘 동네 유다와 베냐민 사이, 딱 주소가 나오네요. 측정도 되어 있어요. 1절에 보면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장이라는 것은 동에서 서의 폭을 말합니다. 동에서 서까지 이만 오천 척. 한 척은 약 45센티에서 50센티나 52센티 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확치 않아요.

대략 계산해보면 장이 이만 오천척이니 11.25킬로미터입니다. 그 다음에 광이라는 것은 남북으로 측량하는 것인데 “광이 일만 척이라.” 일만 척은 4.5킬로미터쯤의 거리. 그런데 4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동서의 장이 이만 오천 척이고 남북으로 광이 이만 오천 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45장 1절에 보면 장(가로)은 이만 오천 척으로 되어 있는데 광(세로)가 일만으로 되어 있거든요. 왜 일만으로 되어 있는가 하면, 이만 오천을 일만, 일만, 오천,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눈 거예요.

케이크처럼 1층, 2층, 3층으로 나눠놓고 1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다음에 2층, 3층 이런 식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로 이만 오천, 세로 이만 오천, 정방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3등분으로 잘라서 제일 위에는 레위지파, 중간에는 제사장 지파가 사는 땅인 동시에 거룩한 성소가 배치되어 있는 땅, 그 밑의 5천척은 열두 지파가 공유하는 땅, 그것은 기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을 기지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세 등분으로 되어 있어요.

본문 에스겔 45장에서는 제일 먼저 중앙부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어떤 특정 위치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어디 있느냐? 어느 특정 위치에 있다는 거예요. ‘어떤 위치에 있으니까 추적하면 되겠네.’라고 할 때, 인간들이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역량이 남아 있다는 자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에스겔에 45장에 하나님의 성전 설계도가 나와 있단다. 거기 보면 옛 이스라엘 고국 땅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고 그 성소에 찾아가기만 하면, 성소 구조는 40부터 45장까지 죽 나와 있으니까 거기 찾아가게 되면 하나님과 만나서 영생을 누린다.’라는 마음으로 혹하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거기에 말려들게 하시는 겁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았어. 역시 유대나라를 버리지 않았어. 누구든지 말씀에 관심만 있다면 이 말씀대로 지켜서 찾아가게 되면 거기에 합류할 수 있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다.’라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내비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죄를 모르는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는가 하면, 지금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설교 시작부터 죽 한 이야기처럼 ‘우리는 구원받을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하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 주님이 하시는 방법을 생각 못하고 우리에게 율법을 줬고 말씀을 줬기 때문에 우리보고 찾아오라고 주신 지도책 역할이니까 찾아가면 된다고 하는 그 모든 행위가 정작 이 책을 반대방향으로 해서 홀로 이 말씀대로 완수해야 될 메시아를 공격하는 하나님의 원수의 앞잡이로서 활동하는 모양새가 지금까지 설명한 그 모양새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 하나님이여, 방법만 이야기해 주세요. 그 방법대로 따르겠나이다. 말씀 달달 외우겠나이다. 모든 것을 우리가 해석해 가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는 구원 받겠습니다.” 그런 마음가짐, 그런 마음가짐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데 있어서 인간이 안다는 이 언어, 상징, 기호, 이런 것들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인간의 언어가 진실을 가로막는 이유는요, 인간의 언어가 그림, 이미지에서 나왔거든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어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머리에 그림이 떠올라요. 그 그림을 말로서 표현한 겁니다.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속에 노림수가 있다는 뜻이에요. ‘나는 천국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성경 보니 딱 내 뜻대로 되네? ‘우리는 천국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자기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림을 그렸는데 성경에 보니까 그게 맞는것 같아요.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같은 경우에 보면, “구름타고 오시리라.” 하면 천사들이 나팔 불고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생각한다고 여기지요. 저는 그 말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 그걸 생각하고 있는 자기가 주인공으로 그려져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빼먹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재림장면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이 자꾸 놓치고 있는 게 뭐냐? 땅에서 그걸 쳐다보고 있는, 한 30대나 40대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거기 보인다니까요? 꿈이에요, 꿈. 그런데 성경에 보면 나, 내 이름 석 자가 거기 없어요.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 함자도 거기에 없어요. 우리 교인 이름도 없어요. 왜 거기다 자기를 넣느냐 하면, 책을 주님 쪽으로 돌리지 않고 내 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뉴저지 교회에서 강의를 할 때 했던 본문중의 하나가 로마서 9장의 본문이었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제가 그 대목을 왜 채택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알아요. 저도 알고 주님도 아실 거예요. 성경을 본다는 이 힘든 노동, 노림수가 없는 노동은 없거든요. 성경을 왜 보고 왜 기도합니까? 왜 열심히 기도합니까? 거기에 뭐가 게재되어 있어요? ‘나는 구원 받을 자격이 있어. 나는 구원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날 놓치면 하나님이 후회할거야. 나를 빼시면 안 됩니다.’ 본인이 의식하든 안하든 항상 무의식속에서도 그것이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일거에 처단하는 것이 뭐냐? 바로 로마서 9장이에요.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환장합니다. 이것은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나 지옥가고 남 좋은 일시키면 나에게는 무슨 유익이냐는 말이지요. 아까 그 기도제목이 뭐였던가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주여, 나한테 어떤 유익이 옵니까?”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변화는 주님이 주인공이고 주님 복음을 위해서 돌아가지 거기에 내가 왜 낍니까? 내가 끼고 싶은 것이 본성인 것은 이해하는데요, 끼어들 성경적 근거가 없다니까요.

죽을 끓일 때 밤도 넣고 깨도 넣잖아요. 죽이 약간 식은 상태에서 작대기로 휘저어 보게 되면 뿌려놓았던 밤이나 깨가 따라서 휘저어지게 되어 있어요. 언젠가 그런 설교 했잖아요. 태양이 도느냐 지구가 도느냐 할 때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돈다고 했잖아요. 그것은 잘 알면서도 왜 우리의 의식 상태는 변하지 않느냐는 말이지요. 주님이 도는데 따라서 나도 같이 돌게 되어 있다는 그 마음으로 왜 안 바뀌느냐는 말이지요. 왜 우리는 우리 중심이고 주님이 바깥에 도는 것처럼 왜 그렇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에베소서에 보세요. 교회 머리는 주님이지요. 주님은 고정되어 있고 바깥에서 돌게 되어 있어요. 주변이 주님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고요. 우리가 태어남은 주를 위하여,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도 주를 위하여. 뭐 문제 있습니까? 무슨 이의가 있어요? 에스겔 45장의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대하는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나 전부 다 “그래, 중심에 대한 힌트를 이렇게 줬으니 그 중심을 찾아가면 돼.”라고 하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 한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중심은 주님이고 바깥 주변에 우리가 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를 하지요. 동의하면 그 다음 문제가 뭐냐? “찾아가면 돼.”라는 말이 나오지요. 찾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까지의 제 설교는 그것이 분명히 잘못이라고 한 거거든요. 왜 잘못이냐 하면 휘젓는다는 그것을 빼버린 거예요. 주님께서 태풍의 눈처럼 휘젓는 것은 빼버리고 “주여, 휘젓지 마세요.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하는 이 차이가 엄청난 차이입니다.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저에게 대들면 누가복음 13장 33절의 말씀을 생각해 봐야 돼요. 누가복음 13장 32절부터 보면, “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이 나오고 삼일이라는 시간, 그냥 삼일이 아니고 과정을 보여주는 삼일이니 오늘 내일 삼일, 오늘 내일 모레, 이렇게 되지요. 그 삼일, 시간과 공간이 나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이 개입이 돼요. 이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고 거룩한 곳에 갈 수가 없고 중앙지점에 찾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따질 거예요. “목사님, 왜 못 찾아갑니까?” 헤롯은 우리를 대표합니다. 헤롯이 생각하는 중앙지점은, 그리고 헤롯이 생각하는 시간지점은 따로 있어요. 왜? 헤롯이라는 자기의 신체를 이 세상의 중앙으로 간주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조성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지금 제가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함축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강원도가 가물다는 거예요. 강원도가 가물어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강원도에 비 좀 내려주세요. 100년 만에 이런 가뭄은 처음이랍니다. 이렇게 가물수가!” 하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강원도에 폭우가 쏟아졌다 합시다. 그러면 모든 강원도 사람들이 다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그 비오는 날이 어느 할머니 딸이 하필 결혼식 날이라면? 그날은 비오면 안 되지요. 비오면 부조 들고 와야 할 손님들이 안 오는 수가 있어요.

우리 보기에는 강원도 지역에 비가 왔으면 좋겠지만 마침 비가 쏟아지는 그날 놀러가기로 되어 있는 춘천닭갈비집 하는 아줌마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회비도 돌려줘야 되고 골치 아파요.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본인이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본인 위주로 시간과 공간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본인이 중심이에요. 흔히 그런 말하잖아요. “내가 아들 보려고 미국에 비행기 타고 가려고 했는데 그 비행기가 폭발해서 다 죽을 줄이야.” “아버지 큰일 날 뻔 했습니다.” “큰일 날 뻔 했지.”

지는 살았으니 좋지요. 그런데 그 사연을 들어보게 되면 그 비행기 안 타려고 했는데 항공회사 실수로 억지로 탄 사람도 있을 것인데 그런 사람은 굉장히 재수 없는 사람이 되네요. 그 사주팔자라는 게 뭡니까?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에요? 본인 시공간 중심, 본인 팔자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사주팔자거든요. 아까 사주팔자 이야기를 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얼마나 마귀 적이에요? 헤롯이 그냥 헤롯이 아닙니다. 사탄의 앞잡이에요. 우리는 헤롯이 사탄의 앞잡이라고 미워하지만 그 헤롯의 시공간이나 내 시공간이나 똑같아요.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도 거룩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중심지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 장소를 찾아갈 수 없어요.

“에이, 예루살렘이잖아.” 아니에요. 그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가봤자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45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유다와 베냐민의 그 사이라면서요? 그 지역이 그 지역이 아니에요. 구약에 보면 유다와 베냐민 사이 예루살렘 그 지역인 것처럼 보이지요.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그렇게 보이지요. 문자적 해석이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 13장 33절에 보면,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날라 가버렸습니다. 문자적으로 감람산, 문자적으로 예루살렘을 찾는 그것,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블랙홀이 되어서 날라 가버렸어요.

문자적으로 찾아가는 사람들, 못가요. 갈 수가 없어요. 십자가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우리 중심의 시공간이, 그 차원이 들어 있어요. 그 차원이 죄로서 규정되는 순간과 더불어서 우리는 아무리 돌아다니고 찾아다니고 아무리 천년이 하루 같도록 천 년 만 년 기다려도 우리는 그곳에 못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갈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천국가고 엘리야는 어떻게 천국 가고 모세는 어떻게 천국 갔는가? 아담은 어떻게, 에녹은 어떻게 천국 갔는가? 그리고 노아는?

그들의 사적인 시공간에 덮쳐진 것이 있어요.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의 시공간이 그들을 덮쳤습니다. 노아는 방주 만들 때가 세상 끝인 줄 알았습니다. 메시아 올 때인 줄 알았어요. 에녹도 마찬가지에요. 그게 신약에 보면 나옵니다. 성도의 끝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게 돼요.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발견하게 돼요. 엘리야와 모세가 기다린 것은 구원이 안 되어서 기다린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몸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기다린 겁니다. 자신의 죄가 어디에 근거해서 씻어지는지, 그 근거를 지울 주님의 별세 때를 기다린 거예요.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걸 인간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인 시공간으로 해명이 됩니까? 어떻게 이게 문자적으로 해석이 돼요? 어떻게 이성적으로 이게 해석이 됩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기존의 시공간을 자기에게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찾아온 예수님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시공간을 대동해서 우리에게 찾아왔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공간에 의해서 저촉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책을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서 이 책대로 실시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공간은 어디 있느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속입니다. 신약에서는 아주 간단한 문제에요. 이 지역이 어디 입니까? 십자가 안이에요. 십자가 안이 좁아 보이지요. 들어가면 아주 넓어요. 굉장히 넓어요. 천국만큼 넓어요. 14만 4천이 다 들어가도 괜찮아요. 아주 넓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이 기호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은 기호나 언어 안에 자기의 이미지, 상상이 거기에 박혀 있고 그 박혀있는 상상을 자신에게 되비치도록 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자신이 믿는다고 할 때 그림을 그려놓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다시 자기 쪽으로 회수해서 믿어버려요. 이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고 자기 그림을 다시 되돌려 받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구멍이 나야 되고 찢어져야 돼요. 그 찢어지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십자가사건에 어떤 식으로 참여했는가? 누가복음 23장 21절에 보니까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지금 두 번 이야기 한 것으로 되어 있거든요. 빌라도가 바나바를 살릴 것인가, 예수님을 살릴 것인가, 민중들 선택에 맡긴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이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지요. ‘그래도 예수를 놓아줘야지. 너희들이 바라바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미워해서 하는 소리인줄 내가 뻔히 안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놓고자 한다.’ 해서 다시 물으니까 그들이 확정 날짜를 받듯이 확실하게 외칩니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 십자가속에 그들이 그렇게 가고 싶었던 천국이 있을 줄이야. 다시 말해서 “천국 갖다 버리소서. 천국 내다 버리소서.” 그 말과 똑같은 말이에요. 저는 천국이 싫어서 교회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천국이 싫어서. 왜? 내 천국대로 해 달라고.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버리고 내 천국대로 해 달라는 거예요. 내 천국은 뭐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잘 먹고 잘 사는 천국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뭐냐? 심령이 가난한 자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예수와 더불어 고난 받는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이 천국의 백성이다.”(마 5:11) 이게 천국이거든요. 천국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것이 천국의 입구니까 그 안에 천국이 들어 있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은 그것을 아는 순간 성도는요, 세상 유혹거리라는 것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유혹거리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유혹거리가 없으니까 그 다음에 무엇도 없느냐 하면, 협박받을 일도 없지요.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래, 알아라. 지난여름에 한 일이든 아침에 한 일이든 다 이야기해. 다 까발려버려. 언론에 공개해. 지금 중요한 것은 십자가 못 박혀 죽었다는 그것이 중요하지.” 내가 너희처럼 내가 잘되는 그것이 유혹거리라면 벌벌 떨면서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렇게 되겠는데 나의 이미지, 내가 주인공 되는 나의 이미지의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한 모든 그림들은 십자가에 못 박는 순간 다 같이 찢어져서 펑 하고 구멍 났어요. 다 펑크나버린 거예요. 구멍 난 풍선 가지고 뭐 하려고요? 터키 관광 간 사람들 헬륨 비행선 타고 풍경 좋다고 올라갔다가 펑, 하고 터져서 공중에서 떨어져서 죽었답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처럼, 하는데 뭐가 있어야 올라가지요.

주님의 나라가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주의 머리까지 올라갑니다. 머리까지 올라가면서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집착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집착하지 않으면, 집착만 없으면 협박받을 일도 없습니다. 공갈 받을 일이 없어요.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중한테 가서 멘토링 받고 그런 경우도 있답니다. 이게 아직도 자기가 집착할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집착할거리가 있으니까 온갖 마귀, 일곱 귀신이 다 달려드는 거예요.

목사가 목회하면서 ‘교회가 어떻게 자립을 하지?’라는 것이 집착이 돼버리면 그 교회 온갖 귀신 다 들어옵니다. 돈 많은 장로 들어올 것이고. 특히 인기 있는 것이 돈은 많은데 남편 없는 권사 올 것이고. 조건은 돈이에요. 돈은 많은데 자식까지 없으면 더 좋고, 양자마저 없으며 더 좋고. 또 어떤 유혹을 받느냐 하면, 로또 좋아하는 집사들 열 댓 명이 오면 좋고. 그 중에 하나는 아다리가 될 것이 아닙니까? 십 분의 9 지가 먹고 나머지 십일조 교회에 내면 교회가 자립할 수 있잖아요.

이게 모든 목사에게 다 있어요. ‘제발 우리교인 중에 사법고시 합격해서 플래카드 좀 걸었으면 좋겠다.’ “아무개 집사 아들 사법고시 합격” 이런 거요. “청년회 총무 사법고시 합격” 이런 거요. 망했다느니 그런 것 말고. 망한 사람 말고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 다 달려들어요.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것이 바로 성경을 우리 쪽으로 돌려댄 해석의 끝이었습니다. 내 이익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 안 믿겠다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래, 믿지 마라.” 주님이 배짱이에요. 설교는 믿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믿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믿겠다는 사람은 희한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쏙쏙 콩나물처럼 뽑아내서 그게 14만 4천이에요. 그런 사람이 성도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런 일이 없다는 거예요.

찾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찾아진 사람이에요. 그 성소, 동서로 11킬로미터, 남북으로 11킬로미터, 그 중앙에 성소가 있고 그 성소는 예루살렘인데 그냥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그 예루살렘이 확대되어서 이렇게 넓은 범위로 이스라엘을 차지했으니 그 이스라엘은 곧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의 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아시아나 항공 타고 가는 그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천국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니 이방인도 몰랐습니다. 그 누구도 몰랐어요. 성령을 받고 보니까 구약 해석은 바로 십자가로 해석해야 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이 에스겔 45장을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다시 45장을 가지고 우리한테 쳐들어와서 “네가 바로 중앙을 찾게 된 택한 백성중 하나야.”라고 우리에게 소개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우리 자신은 없어지고 주님이 이 전체를 우리한테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파악하게 되는 겁니다. 덮쳐진 거지요.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보이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 해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문자적으로 성급하게 덤벼듭니다. 그곳이 있다고 하니 찾아가면 되고 기다리면 되는데 기다린다는 우리의 시간의식이 잘못되었고 찾아간다는 공간의식도 죄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시간도 공간도 예수 안에서는 다 사라졌음을 알게 하옵소서. 어디든지 주와 함께 천국인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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