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8월 23일 강의 교회를 넘어서 7, 새 언약 5
대구 8월 23일 강의 교회를 넘어서 7, 새 언약 5
이름 : 이근호(IP:)
013 200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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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040823교회를넘어서7새언약5
[04 대구강의 14] - 교회를 넘어서 7 - 새 언약(에스겔) 5
04,08,2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피’를 부르는 제사 !!
오늘은 교재 ‘교회를 넘어서’ 250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에 나오는 ‘제사’ 라는 것은 보면, 그것은 피를 내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피가 없는 제사는, 마치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 드린 제사와도 같은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피가 없는 제사를 왜 받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제사에 피가 없으면, 즉 자기 죽음으로 담보로 하지 않는다면 자기 공로가 그대로 제사 제물에 함유가 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그대로 제물을 바치게 되면, 즉 자기가 살아있으면, 자기의 행함에 대한 공적이 그대로 그 제물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잠시 ‘헌금’에 대해서 !!
만약에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의 살아있는 돈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자기가 내었다고 하는 공적이 그대로 담겨서 반드시 반대급부를, 즉 보상을 기대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제가 이 정도로 헌금을 했으니, 그 이상의 것을 돌려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헌금의 의미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돌린다고 하는, 그런 위치이동의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헌금을 하는 사람은 심부름꾼에 불과한데, 이쪽에 있는 돈을 저쪽으로 전달하는 말이다. 일종의 ‘트랜스포터(?)’ 라고 할까? 아무튼 그러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바치고 말고 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신약의 헌금정신은, 모든 헌금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속죄의 제물, 즉 속죄의 제사에서 파생된 것인데, 그러니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신다는 의미로 전환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헌금은 “제가 드립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미 받았습니다 !!
그러니 욥의 말처럼, “주신 이도 주님이시니, 거두어가도 그만입니다” 라는 것인데, 물론 주시는 것도 주님의 자유이고 말이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헌금이란 것이, “제가 바칩니다” 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받았습니다” 라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헌금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전혀 상식과 맞지 않는 말이다. 즉 육에 속한 사람은 도저히 흉내도 내지 못할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죄’ !!
설령 성경에 이러한 내용이 있음을 알고 있는 목사가 있더라도,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설교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육에 속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목회를 해야하니 그렇다는 말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 몇 명이 되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이 보상을 바라고 하는 그런 헌금조차도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러면 자기는 영락없이 굶어죽어야 않는가? 그래서 그러한 이야기를 감히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목사는 헌금이 그런 내용인 줄 상상도 못하고 말이다.
그러니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죄인데, 즉 예수님의 온전한 십자가를 흐릿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목회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십자가의 가리고 있는 짓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말이다.
일단 교재 250페이지를 살펴보자.
** 언약궤는 원래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씩 피를 뿌리는 장소이다. 그런데 언약궤가 없는 성전에서 피를 뿌리는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문지방이 된다. 이 문지방에는 문설주가 있는데, 이 문설주에 피를 바른다(겔 45:18-19, 43:18).
(겔 45: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
(겔 45:19)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랫층 네 모퉁이와 안 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또 문설주에 피를 !!
이렇게 “문설주에 피를 바른다” 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면서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아서 각자의 집의 문설주에다 피를 발랐다는 것이다. 물론 문지방에도 바르고 말이다.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가도록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문설주에 피를 바르는가? 그것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기 위함인데, 다른 말로 하자면, 거룩과 비거룩을 구별하기 위해서 말이다. 즉 거룩함과 더러움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거룩한 세계와 더러운 세계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이 문턱, 즉 문지방에 피를 바른다는 것이다. 즉 죽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고 이 문지방을 넘어온 놈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말이다.
짐승조차도 살아있는 그대로는 안 되는데, 그래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 점이 바로 이것이란 말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은 죽음의 세상이고 더러움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한 더러움은 우리에게 죽음을 초래했고, 그래서 그 죽음의 문턱을 우리가 죽지 않고 넘어가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경우에도 어떠한가?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음을 짊어지고서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성소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에 보면, 하늘에 있는 성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공부는 해태종합선물세트 ??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이러한 성경의 내용이 일반적인 학문과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상 학문은 유(有)에서 유(有)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하는지, 거기에 대한 기능과 기술과 합리적 사고방식인데 반해서, 하지만 성경말씀은 전혀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지, 그 은혜를 헤아리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여기도 은혜이고, 저기도 은혜이고 말이다.
제가 어릴 때는 명절 때에 ‘해태종합선물세트’ 라는 것이 참 인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과자가 다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껌도 있고 카라멜도 있고 말이다. 동생에게는 자기가 싫어하는 껌을 주고, 맛있는 초코볼은 자기가 먹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공부가 이러한 종합선물세트를 뜯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것도 들어있고, 저것도 들어있고 말이다.
이제 교재 251페이지를 보자.
**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마다 하나씩 총 6개가 있는데, 이런 방향 규정은 동쪽 문과 다른 여타의 문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왜 서쪽과 남쪽에도 문이 나와 있는가?
여기서 문이 세 방향마다 하나씩 있으면 3개인데, 그런데 왜 총 6개라고 하는고 하니까, 그 문이 이중구조가 되어서, 이렇게(?) 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 개라고 하면, 이렇게 이렇게(?) 두 개가 되니, 그렇게 되면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서쪽은 아예 처음부터 막혀있고, 남쪽과 서쪽은 뚫려있는데, 그리고 동쪽도 뚫려있고 말이다. 그렇게 세 방향으로 뚫려있는데, 그런데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은, 동쪽은 안 되고 남쪽문과 북쪽문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 성전에 있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왜 문이 그렇게 다시 만들어져 있는가? 그것은 바로 동쪽의 문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성막은 아예 남쪽과 북쪽에도 문이 없고 오로지 동쪽에만 있는데, 그 문으로 제사장만 들어간다는 것이다. 모세시대의 성막이 그러하고, 그것은 솔로몬 성전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에스겔의 새 성전에서는 남쪽과 서쪽에도 문이 뚫려있는데, 이렇게 새롭게 뚫려있다는 것은 동쪽 문을 무시하는 차원이 전혀 아니라, 오히려 동쪽 문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남쪽과 서쪽을 뚫어놓고, 그곳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자격과 대상을 규정을 지음으로서, 동쪽 문에다 더욱 더 시선이 모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즉 출애굽기에서의 성소의 문이나 솔로몬 성전의 문은 오직 동쪽 한 방향뿐이다. 그러나 새 성전에서는 세 방향으로 문이 나와 있다. 왜 두 개의 문을 더 설치해야 하는가? 그것은 동쪽 문의 의의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겔 44: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겔 44: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 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겔 44: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그런데 동쪽 문은 왜 닫혀있는가?
그런데 여기 1절에 보면, “그 문이 닫히었더라” 라고 되어있는데, 동향한, 즉 동쪽으로 향한 문을 만들어놓고는 왜 닫아버리는가? 그것은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즉 이제 사람들은 일절 이곳으로 드나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과거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에서는 제사장과 백성들이 들어왔었다. 그러나 이제 이 새 성전에서는 전혀 허용이 안 된다. 성전의 온전함을 인간들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너희들은 이제 그만 손 떼 !!
이제 여러분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싶은데, 과거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는 제사장과 백성들이 동쪽 문으로 들어왔지만, 그러나 이제 에스겔의 새 성전에서는 그것이 전혀 허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성전의 온전함을 이제 인간들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인간이 들어오는 문은 남쪽이나 북쪽 문에만 국한된다. 이 문들의 가치를 쥐고 있는 것은 동쪽 문이다. 이 문들은 동쪽 문에 종속된다. 동쪽 문의 ‘닫혀 있음’의 의미를 모른다고 하면, 열린 문으로 들어와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바깥뜰에 있는 동쪽 문만 닫혀있는 것이 아니다. 바깥뜰에서 안으로 통하는 동쪽 문도 닫혀있다.
** 그러면 늘 닫혀있게 되는가? 아니다. 안식일과 월삭에는 개방이 된다. 그리고 그 날에는 그 동쪽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마치 바깥뜰의 동쪽 문을 유일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의 역할을 왕 자신이 해내는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의 왕이 어떻게 동쪽 문을?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해도, 인간인 왕이 감히 건방지게도 하나님만이 다닐 수가 있는 문으로 다닌다고 하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는가? 안식일과 월삭에는 바람이나 귀신이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인간인 이스라엘의 왕이 출입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왕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누가 들어오는가?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러니 그것은 바로 “여호와가 현재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인 이스라엘의 왕이 동쪽 문을 통과하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왕이 먼저인가? 성전이 먼저인가?
그러니 왕이 없으면 성전이 유지되지 않는데, 그래서 여기서 좀 어려운 의미가 하나 더 추가되는데, 즉 “왕이 먼저인가? 성전이 먼저인가?” 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왕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라고 질문을 하게 되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왕이 우선인가? 성전이 우선인가?” 라는 것은, 그런 질문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왕과 성전이 하늘나라에서는 같이 있다는 것이다. 시편의 성전개념이 왜 어려운고 하니, 성전이 땅에, 즉 시온산에 있다고 해놓고는 그만 시온산이 하늘에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편에 의하면, 땅에 있는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있는 성전을 옹호하려다가 그만 하나님의 택하신 왕을 핍박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왕이 고난을 받는다는 대목이 시편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보면서 하늘을 제쳐두고 땅에서 일어나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인데, 그러니 그런 모든 것이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제 아무리 열심히 무엇을 해도 유대인들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데, 결코 그들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 행위를 부정하지 못하는 인간 !!
신앙을 위해서라면 자기 행함조차도 부정을 당해야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이상하게도 그런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전혀 부정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고집이 센지 모르는데, 어떤 경우라도 자기 행함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매일같이 하는 소리가 “잘하면 되지 않는가?” 라는 것인데, 즉 성화나 주장하고 말이다. 자기의 행함을 부정할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개판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으니 바르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그래, 앞으로 잘 해라” 라고 했는가? 그그것이 아니라 “니 죄를 알렸다”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짓은 아예 매일같이 주님의 매를 부르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얻어터지고 코피가 나곤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매도 성도에게만 주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인데, 때릴 가치도 없는 놈들은 그냥 내버려두겠지만 말이다.
왕의 임무가 성전을 유지함에 !!
아무튼 왕과 성전의 문제에서 있어서, 이 땅에서는 왕이 먼저 생기고 그 왕에 의해서 성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같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또 여기에서 나오는 질문은 무엇인고 하니, “이 왕은 하나님을 위한 왕인가? 아니면 성전을 위한 왕인가?” 라는 것인데, 즉 누구를 위한 왕이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왕을 통해서 성전을 만듦으로서, 하늘에 복속된 왕이 이제는 성전자체의 의의에 종속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임무가 바로 성전을 유지함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왕이 제대로 왕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성전이 그만 불에 타고 무너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누가 관리하는가?
바로 이러한 점이 매우 중요한데, 오늘날 성도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전’ 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성전관리를 누가 해야 하는가? 그러니 성전관리를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속에 있는 성령께서 성전이 된 성도들을 관리하신다는 말이다. 즉 “똑바로 하지 않으면 불태우고 허물어버린다” 라는 차원에서 관리를 해주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시하게 볼지 몰라도,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택한 백성을 결코 시시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기가 거할 집으로, 자기 아파트로 여겨서, 우리의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성령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간구하시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또한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데, 그러한 일을 하는데 성령께서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매일같이 변명하는 인간들 !!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적인 것은 항상 ‘유’에서 ‘유’로 나가기 때문에 행함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을 믿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평소의 우리 행색에 의하면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데, 매일같이 “잘할게요. 착했잖아요. 제가 책임을 다했잖아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매일같이 자기 변명에 바쁘지,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우리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놓았다가 잘 안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이다. 인생이 돌고 돌아서 몇 번씩이나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번뿐인데 말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겨놓았다가, 정말이지 인도(?)로 가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ㅋㅋ).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인도함을 받았는데 무엇이 없었는가? 그냥 인도함의 수준이 아니라 그야말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는데, 그런데 정작 물이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양식도 없고 말이다. 그럴 바에야 무슨 불꽃놀이(?)까지 하면서 인도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럴 정신이 있으면 물과 양식이나 주지 말이다. 무슨 그런 낭패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자기들이 그만 어긋난 길로 잘못 갔다고 한다면, 그래서 광야로 갔다고 한다면 “아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그렇구나”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기면 납득이라도 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 모든 분풀이를 식구들에게 하는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분풀이를 식구들에게 다 하는데, 목사는 교인들에게 하고 말이다. 교인들은 목사에게 하고 말이다. 그러니 ‘믿습니다’ 라는 것은 다 거짓말이고, 마치 줄에 달린 풍선을 가위로 자르듯이, 그렇게 하나님은 풍선이 되어서 줄만 자르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잘못되어도 자기 탓이 아니고, 상대방이 잘못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공격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그렇게 남발하던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 라고 하는 단어가 평소에 살아갈 때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데, 모든 것이 다 남의 탓이라는 것이다.
왕이 말씀대로 살면 백성들이 복을 받는데, 그런데?
아무튼 왕이 성전의 인도함을 받는데, 즉 하나님의 이름은 성전 안에 계시고, 그래서 왕은 그 성전이 시키는 대로 순종하면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이 시키는 대로 왕이 살고, 그렇게 왕이 말씀대로 살면 백성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원리원칙이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는데, 물론 가끔은 있었는데, 요시아 시대나 히스기야 때 말이다. 왕이 편지를 펴놓고 기도를 하고 말이다.
구약은 일시적이고 신약은 영원해 !!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구약은 일시적이고 신약은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성령이 임해도 영원히 임하고, 또 인도하심을 받아도 그것이 영원하고 말이다. 그러나 구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가 서로 대비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에, 즉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일시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보여주었다가 다시 잘랐다가 한다는 말이다.
사울의 경우에, 그는 분명히 성신을 받아서 예언도 하고 했지만 그러나 나중에 악신에 걸려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말이다. 사울은 다윗에게 뭐라고 하는가? “다윗아, 니가 진짜 이스라엘의 왕이 맞다. 내가 볼일을 보고 있을 때 니가 나의 옷자락을 잘랐는데, 그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 이제 나는 은퇴를 해야한다” 라고 해놓고, 그런데 돌아서서 또 다시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악신이 들려서 말이다.
근호씨, 당신을 믿어요 ??
그러므로 인간을 믿는다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데, 믿을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인간을 믿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여자들의 경우에, 자기 신랑을 하늘같이 믿다가 그만 탈이 나곤 하는데, 실수를 해도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그 누구라도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즉 “너도 못 믿고, 나도 못 믿으니, 그래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어야한다” 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떠한가?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조차도 믿지를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그냥 자기 혼자만 돗대가 되어서 마구 설치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 다윗언약에 의해서 왕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에서 연결되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아름답게 제대로 유지시키고 보존하는 책임자는 오로지 아들로서 왕뿐이다. 바깥뜰의 동쪽 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새 성전에 들어오셔야 하는 이유는, 전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의 죄악성을 지적하고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당부하시기를,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에 대해서 주의하라고 하셨다(겔 44:5). 그것은 이스라엘의 패역성으로 인해 출구가 재조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겔 44: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고
(겔 44:6) 너는 패역한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원래 성전의 동쪽 문으로 출입해야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율례와 법도에 맞게 순종하여 성전의 거룩을 유지해야 될 임무가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 동쪽 문은 패역한 이스라엘로 인하야 성전을 더럽히게 한 출입문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겔 44:7)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동쪽 문을, 이제는 인간들 손에 맡기지 않겠다 !!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동쪽 문으로 오시는 분은 어떤 책무를 지니는고 하니, 완벽히 율례와 법도를 다 지켜야하는 책무가 있는데, 그런데 이제 그 동쪽 문을 절대 인간 손에는 맡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제 아무리 동쪽 문으로 들어와서 제사를 지내고 무엇을 해도, 그들은 이미 실패를 했다는 말이다. 즉 인간들은 안 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북쪽 문과 남쪽 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 에스겔 44장 7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언약을 위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즉 누구 때문에 성전이 더럽혀지게 되었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이방인들 때문인데, 즉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목이 에스겔 44장 7절에 있으니, 결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대해서 등급을 높게 측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감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를 못하고 그리심 산에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구원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 온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것으로 그냥 끝이 아니라, 왜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와야 하는데, 그 이유를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 왜 이방인들은 아닌 유대인들에게서 오는가?
방금 제가 중요하고도 어려운 말을 했는데, 구원이 왜 이방인들에게는 오지를 않고 유대인들에게서 오는지, 그러한 이유를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이방인들은 에스겔 44장 7절에도 나오듯이, 주님의 성전을 더럽게 할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이 전제되고 난 다음에 “저는 개 같은 인간입니다” 라고 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그러한 성전을 더럽히는 인간이란 의식도 전혀 없으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저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잘남이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그 행위 속에 포함이 되어있으니,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그렇게 싫어했는가?
그러니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성경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그렇게 싫어했는가?” 라는 점을 말이다. 그야말로 개 같은 이방인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물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싫어하는데는 종교적인 이기주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런 성경의 내용들이 빌미가 되어서 그렇게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사도행전에까지 이어지는데, 거기에 보면 사도들이 회의를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팔레스타인에 계속해서 있었던 유대인들이 뭐라고 항의를 하는고 하니, 이방인들이 율법을 거치기 않고 곧 바로 구원이 되는 것은 자기들의 구약해석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율법에 위배를 하면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이방인들은, 자기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율법에 위배가 되느냐고 항의를 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어느 정도의 고통스러운 일인고 하니,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구더기나 곤충이나 벌레와 같은 것을 먹어야만 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과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는 음식을 먹는 것과도 동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와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대목을 보면서, “아니, 베드로가 왜 저래? 도대체 정신이 있나? 하나님이 믿게 하면 그냥 믿는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이방인들치고는 너무나도 당당하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감히 은하철도에 탑승을 ??
그래서 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설명할 때 주로 무슨 비유를 하는고 하니, 기관차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천국으로 가는 은하철도가 달려가고 있는데, 그런데 바로 여기에 지옥으로 가는 덜덜거리는 객차를 하나 꽁무니에 붙여준 것이 바로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붙여주었으면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원래 천당에 가는 차에는 그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빈칸이 하나 남아서 뒤에 달아주었다는 것이다. 전혀 달아주지 않아도 그만인데 말이다. 그렇게 해서 로마서 11장에 나오듯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저는 개 같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먹는 것조차도 너무나 황송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 같은 년이 언약백성에 합류가 되다니, 그것이 왠 은혜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시켜주셨다는 것이다.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그러므로 언약을 알아야 믿음을 !!
그러니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 믿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실컷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믿는지 모른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언약적인 체제 아래에 있으면서 구원을 받았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을 알려고 하면 반드시 언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언약’ 이라고 하면 다들 금시초문인데,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가? “아니, 이근호 당신은 한국교회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를 왜 하는가? 무슨 독불장군이야?” 라는 식인데, 하지만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약의 기본 - 그 어떤 인간이라도 지킬 수 없어 !!
아무튼 이 언약의 기본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인데, 언약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열심으로 지키는데, 그것을 히브리서 7장에서는 ‘맹세’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맹세는 맹세를 한 당사자가 “내가 이루겠다” 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히 7: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히 7: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잠시 산상설교에 대해서 !!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결코 맹세하지 말라. 너희들이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하고, 예루살렘을 두고서 맹세하는데, 너희들이 하늘을 알고 예루살렘을 알아?”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괜찮은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니 매일같이 변동이 되는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맹세를 하면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는 평생동안 맹세를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무엇을 하지 마라” 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금 그대로 하고 있지? 그렇지?”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비판을 하지 말라” 라는 것도, 지금 우리가 열심히 비판에 비판을 거듭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남들을 비판하는 있어서는 그야말로 타고난 도사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관대하고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중언부언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다 아신다” 라고 하는 것도 역시, 우리 인간들은 중언부언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달라고 매달리면 된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 말이다.
너희들이 곧 문둥병자 !!
그리고 “땅에 보물을 쌓지 말라” 라는 것도, 지금 우리가 열심히 땅에 보물을 쌓고 있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라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심령이 어떠하다는 말인가? 전혀 가난하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산상설교는 인간은 문둥병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바로 문둥병자를 고쳐주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문둥병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 8: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8: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그러니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라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항상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은, 그 누구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에스겔 44장 7절을 한번 보자.
(겔 44:7)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에게 포함될 수 있는가?
여기에 보면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방인이 왜 더러운가? 전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넣어주기는 준다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아모스에 보면, 나중에 다윗의 퇴락한 장막을 회복하는데 있어서 이방인이 에돔인이 개입한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을 유대인들은 합리적으로 계산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존재들인데, 그런데 왜 이 아모스에서는 성전을 회복하는데 이방인이 개입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에스겔 44장에 의하면, 이방인이라고 해도 만약에 할례를 받은 경우라고 하면 유대인에 편입을 시켜 언약백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방인들이라도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유대신학에 의하면 이방인들도 구원이 되는데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두 가지 조건인데, 첫째는 할례를 행해야 되고, 둘째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고 하니, 예레미야나 이사야서에 보면, 모든 율법은 소멸이 되어도 안식일의 계명은 영원하다고 했으니 말이다.
할례와 안식일 지킴을 통해서 !!
소위 말하는 안식교 교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까지 연결을 하는데, 즉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명이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할례를 받지 않아도 성령이 오셔서 !!
그런데 바로 이러한 것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회의를 하는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때의 종말의 영, 즉 구원의 영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구원의 영이 바로 성령인데, 즉 마지막 때에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결정시킨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서, 어떻게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성령이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이 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바울과 바나바도 합세해서 “우리도 보았다”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팔레스타인의 지도자인 야고보가 하는 말이 “그것 참 이상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셔서 계산을 해놓은 이 노선을 왜 하나님 스스로가 위반하느냐는 말이다.
사실은 하나님이 위반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몰라서 그렇지만 말이다. 즉 예수님을 제대로 몰라서 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아하, 우리가 미쳐 몰랐던 부분이 있었구나” 라고 겸손하게 나오면서, “그렇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이 된다” 라고 ‘땅, 땅, 땅’ 하고 결정을 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베드로가 누구에게 면박을 당하는데, 사도바울에게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베드로도 할례를 받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막상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들어오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아야만 교인이 될 수 있는 교회에 술고래가 들어오니 우르르 다 나가듯이 말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교회를 누가 관리하겠다는 것인가? 괜찮은 신앙을 가진 우리의 합리적인 거듭난 이성과 감정과 판단력으로, 그렇게 우리가 괜찮은 교회로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그런 의식이, 바람과 같이 부는 성령의 자유로운 은혜를 모독하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 의로움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바로 이것으로 시작해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하는가?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의롭다고 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소한(?) 일을 가지고 무지무지하게 중요한 ‘의로움’의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즉 “의로움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하는가? 할례를 받고자 하는 자는, 사실은 할례뿐만이 아니라 모든 의무를 다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자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아주 단호하게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갈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예수님의 행위는, 오직 ‘사랑’으로만 !!
이것은 비단 할례뿐만 아니라, 도덕법이고 시민법이고 간에, 율법에 있어서 모든 의무를 다 행하자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진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데, 할례라고 하는 율법의 주체자는 바로 인간이지만,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이미 그 주체자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행위의 주체자가 이미 죽어있는 입장에서, 그러니 그 안에는 행위자가 이제 따로 있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행위를 하신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율법완성은, 즉 예수님의 행위는 오늘날 오직 ‘사랑’으로만 나타난다는 말이다. 죄 있는 자를 용서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완성하고자 하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율법의 형태와, 진짜로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행위의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하고, 그러나 예수님의 행위는 오히려 죄인을 의인이 되게 함으로서 율법을 완성시키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증거해야 하는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서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 이 에스겔 44장 7절의 말씀을 보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들어있음을 알았을 것인데,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 신학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왕은 성전을 유지해야 되는데, 그런데 느헤미야와 에스라 이후에는 왕이 성전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과 선지자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제사장이 하는데, 그러한 제사장이 바로 사독 계열이고, 이 사독 계열에서 나온 자들을 두고서 ‘사두개인’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사, 즉 서기관 역할을 하는 자들을 두고서 ‘바리새인’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 바리새인들은 사회의 정결을, 즉 사회정화를 목적으로 말씀을 이 땅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운동을 벌렸다는 것이다. 이들이 등장한 것은 B.C 300, 400년경이지 싶은데, 마카비의 독립운동시절에 말이다. 왜 그들이 등장했는고 하니, 자기 나라가 망한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적용시키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 - 삶 속에서 말씀의 정화운동을 !!
그래서 그냥 말씀만 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그렇게 자기들의 삶과 말씀이 일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운동을 펼치게 되는데, 그렇게 해야 다시 나라가 회복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예수님도 인정을 해주었는데, 물론 그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말씀운동자체에 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20절에 보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자고 했던 자들 중에서 제일 앞장섰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사두개인들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바리새인들의 윤리와 도덕을 극복하지 않으면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새 성전의 동쪽 문은 누가 출입할 수 있는가?
아무튼 그런 그렇고, 새 성전의 동쪽 문은 누가 출입할 수 있는가? 온전하게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분만이 가능한데, 그러니 평소에 동쪽 문이 닫혀있을 때는 북쪽 문과 남쪽 문으로 다닐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쪽에서 들어온 하나님과 합류하게 되는데, 새 성전의 문이 이렇게 이중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동쪽 문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과 북쪽 문과 남쪽 문으로 들어온 자들과 이렇게 만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쪽 문은 어떤 문인가?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동쪽으로 난 문은 사람들이 출입할 수가 없는 문인데, 즉 에덴의 동쪽이란 말이다. 흔히 말하는 에덴의 동쪽은 가인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 제가 말하는 에덴의 동쪽은 생명나무의 과실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놓은 길, 그것이 바로 동쪽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동쪽이라는 것이 에스겔에도 나와있고, 또한 요한계시록에도 나와있고 말이다.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면 동쪽방향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의 죄악을 기정 사실화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이 진실로 인간에게 의와 거룩과 생명을 제공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방향성이다. 그렇다면 동쪽 안에 설치되어있는 모든 제사 시설물들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그것은 기존 인간의 생명을 죽이고 심판하기 위한 시설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254페이지를 보자.
** 제사장들이 분주하게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들이 범죄해서 망해버린 성전을(겔 44:10), 왕이 대표해서 다시 재건하는 것도 모두 온전히 죽어 없어져야만 될 속된 목숨들을 처리해야하는 시설들이다. 새 성전의 왕은 온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기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서야 되는 왕이다. 마치 에스겔이 인자로서, 즉 말씀이 뱃속에 넣어져 있는 선지자로서 백성의 죄 때문에 당해야 되는 수난을 맞이한 것처럼, 왕도 그런 심정으로 이 성전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잠시 ‘인자(人子)’에 대해서 !!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왕도 에스겔이 당해야 하는 그런 수난을 당하는데, 그런데 그 에스겔을 하나님이 뭐라고 부르시는가? ‘인자(人子)’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람의 아들’ 이란 의미이데 말이다. 그것을 굳이 풀이하면 “너는 사람의 아들이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즉 가장 사람다운 면모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철저히 사람이어야 한다는, 즉 속성이 “차라리 하나님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인데, 그런데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궁극적인 본성을 대변해 보이는 호칭이 바로 ‘인자’ 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들’ 이란 의미는, 원래 아들은 아버지 안에 중첩이 되어있는데, 그러니 아들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속성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물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 이라는 것은,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녹취자 - ‘인자’에 그런 의미까지 들어있나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인자’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인자는 고난을 받아서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운이 나빠서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자의 사명 중에서 하나가 바로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아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자의 또 다른 사명은 무슨 말인고 하니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인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을 말씀을 알아들었을 리가 만무하다는 것이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이 공자의 제자라고 한다면, 그냥 자기 스승의 이름인 ‘공자’처럼 생각했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맹자와 순자는? ㅋㅋ)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동쪽 현관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왕이 온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온전한 왕이 헌신으로 율례가 완성되었다는 증거로서, 그 동쪽 문지방에서 정결한 물이 흘러서 온 이스라엘 경내를 뒤덮는다.
드디어 물이 동쪽에서 흘러들기 시작하는데, 그러므로 이제는 탁 트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가 와서 완성을 할 때 그 메시야를 뒤따라서 구원의 영이고 종말의 영인 성령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의 내용이고 말이다.
야, 심봤다 !!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데, 그녀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는가? “메시야가 와야 성령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메시야가 바로 나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자가 그냥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야, 심봤다(?)” 라고 하면서 마을로 뛰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부끄러움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이렇게 성경말씀 구절 하나하나에 언약적인 내용이 모두 담겨있는데, 그런데 일반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만 행하려고 하는데, 물론 흉내만 내는 것이지만 말이다. 마치 남묘호랑게교에서 글귀를 외우듯이 그렇게 성경구절을 외우면 마치 효력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목걸이도 하고 말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 십자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배드민턴, 체조, 탁구, 역도 등등, 그야말로 십자가가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축구경기를 하다가도 자빠져도 기도를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목에 달고 있는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경우에는, 목에 건 십자가는 의미가 없음을 증거하면 된다는 말이다.
성도는 게임 밖의 인생을 !!
비트겐쉬타인이 말한 것처럼 인생은 어차피 게임인데, 그러니 게임은 게임 밖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던지 간에,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상식과 통념 속에서 자기가 얼마나 승리자인지, 그것을 측정하는 기구가 바로 게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관습과 규범을 무시하겠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실패자와 승리자의 기준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 오전 설교가 “누가 큰가?” 라는 것인데, 이렇게 누가 큰지, 그러한 것이 성립되지 않는 세계에 살아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누가 크고 작은지, 그런 것과 상관이 없는 세계에 놓여있어야, 그런 사람이 바로 천국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크고 작은 것은 어디까지나 저쪽의 게임이니 말이다.
당신, 바둑이 몇 급이야?
예를 들어서, 수영선수를 붙들고는 “니, 바둑을 둘 줄 아나? 지금 몇 급인데?” 라고 하면 되겠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50m를 얼마에 끊는가?” 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말이다. 그런 수영선수를 붙들고서 바둑을 두자고 해서 억지로 바둑을 두고 나서는, 자기가 이겼다고 해서 승리자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엉뚱한 동네에 가서 설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데, 그러면 하늘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기존 이 세상에서의 지옥에 가는 법칙에 전혀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살던 곳에 애굽이기 때문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매일같이 걱정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 ‘의’ 이고 말이다.
새 성전은 천국의 모형 !!
아무튼 이 새 성전은 천국의 모형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데 이 천국은 모든 인간을 다 죽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인간도 세속적인 기준을 가지고서 높낮이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왕도 죽고, 선지자도 죽고, 백성들도 죽고, 그리고 이방인들도 죽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옛 솔로몬 성전에 기초해서 죽인다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의 망함이 보여주는 것은?
사실은 이것도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 새 성전의 터가 바로 옛 솔로몬 성전의 터인데,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은 망했다는 것이다. 왜 망했는가? 죄 때문에 망했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무슨 죄인지를 지적할 수 있는 새로운 법칙, 즉 덮개의 법칙(?)이 여기에 몰려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쉬쉬하면서 지나갈 문제가 아닌데, 즉 “이제 망했다. 끝” 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왜 망했지? 아하, 이래서 이래서 우리가 망했구나” 라고 지적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덮개로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도 어떠한가? 십자가를 그냥 통과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라, “아하,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구나.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이구나” 라고 하면서 영원토록 십자가를 지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성화’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사실은 성화가 아니라 거룩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십자가로서 지적을 받는 과정이 바로 거룩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아하, 이래서 십자가뿐이로구나” 라고 말이다. 결코 행함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한 점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재 255페이지에 에스겔 44장 9절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보자.
(겔 44: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신약에서 말이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개 같은 이방인들이라고 여기는데,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의 주장이고 말이다. (지금 마시는 이 커피가 정말로 맛있는데, 오리지날 초이스인가?)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누구인가?
여기서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바로 모든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제외한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허물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아무도 성소에 들어가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는 집이고, 또한 성전 !!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무는 사건이 있는데, 그때 예수님은 기도하는 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기도하는 집이고 또한 성전이라고 했을 때, 그런데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괜찮은 성전이라고 하면 부서질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부서지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흘만에 부활하고 난 다음에 제자들은 “아하, 예수님이 자신을 성전이라고 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전은 구세주 혼자서 잘났다고 성전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더불어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백성들의 죄를 씻어주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부활이 될 때는 자기 백성의 의로움이 보장이 된 채로 부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 잘라서 혼자 죽고 혼자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이 됨으로 말미암아서, 그 부활의 세계 안에는 예수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자기 백성들도 다함께 있다는 것이다.
세례, 합일, 연합, 교회, 몸과 지체 !!
바로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 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합일’, 혹은 ‘연합’ 이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연합된 상태를 두고 ‘교회’ 라고 하고 말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몸과 지체’ 라고 하고 말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