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2-셸링
201504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2-셸링
이름 : 한윤범(IP:14.39.134.23)
201504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2-셸링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교재 봅시다.
첫 번째 끝의 이야기하면 하나님 내부에 균열이 있다는 거예요. 셸링은. 그것을 지젝은 무의식이라고 봤는데. 의식은 피히테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안다. 거기에 대해서 셸링은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셸링은 무의식이란 말을 안 했는데 지젝은 말하기를 최초로 무의식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무의식이란 말은 의식에서는 알 수 없는 거다. 알 수 없으면 없잖아. 알 수 없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잖아, 라고 할 때 알 수 있음의 세계가 균열되면서 비로소 내가 미처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부딪침이 올 때 그건 바로 무의식의 세계에 속했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꿈같은 것.
꿈을 꿈으로서 잠자고 있지 않은 것은 현실이고, 꿈은 현실이 아닌 것으로 보잖아요. 그게 바로 일반인들의 잘못된 생각이에요. 꿈의 세계가 현실이고, 꿈을 꾸게 만든 그것이 꿈의 세계에요. 반대가 돼야 된다고요. 우리가 점심 먹으러 갔다고 조용한 것, 이게 꿈이라니까. 일하는 사람이 밤에 잘 때 꿈꾸잖아요. 이게 현실이라니까요. 반대가 돼야 돼요. 왜냐? 이쪽에 있는 신은 인간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신이에요. 나 잘났지요. 이건 신을 섬기는 게 아니에요. 신에게 무조건 내 편 돼달라는 자기 섬김의 일종이에요. 신을 우회로 해서 자기 섬기는 거예요. 진짜 신은 그런 인간을 박살내는 신이에요. 그걸 찢어버리고 균열시키는 거예요. 네가 미처 이런 걸 몰랐지. 이게 신이에요.
하나님이 인간 되는 걸 누구와 사전에 의논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이 알아서 인간 됐지요. 그럼 누가 난처하고, 누가 당황스럽고, 누가 어리둥절합니까? 인간이 신을 찾아가야 되지요. 그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신과 만남인데 신이 인간이 돼버리면 뭐가 무산 돼버리느냐 하면, 인간이 찾아가는 모든 것이 다 헛짓이 되고 말잖아요. 그것을 지젝은 언급하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우상이다. 인간은 우상을 신이라고 함으로써 꿈을 현실로 바꾼 거예요.
그런데 우상이 아닌 진짜 현실, 그걸 실재계라고 하는데, 현실이 꿈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를 균열시킴으로 말미암아 전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전의식까지만 알고 무의식은 몰라요. 그런데 이것이 밑에서 마그마처럼 째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 토대 위에 있다고 확인되었어요.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무의식을 행동의 90%로 보고 의식은 10%로 봐요. 실증적으로 과학적으로 무의식이 90%고 의식이 10%에요.
어떤 행동을 하고 말을 할 때 의식된 게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온 것을 의식세계에서 약간의 편집을 하고 째고 자르고 남을 기분 안 나쁘도록 하는 겁니다. 이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 재미있지요. 상징계는 흔히 말하는 현실인데, 상징이 뭐예요? 실체가 아니란 말이에요. 태극기가 우리나라입니까? 아니잖아요. 하지만 태극기는 뭘 상징한다? 우리나라를 상징하지요. 태극기에 손 얹지는 것 안 해도 그 사람 대한민국 사람이에요. 독일에 광부로 파견하려는데 광부 한 경력이 없어서 주저하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심 고취라 해서 독일에 파견됩니다. <국제시장> 영화에 보면.
상징 세계란 누구의 상징이냐 하면, 내가 만든 상징이 아니고 이미 같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동료들이 조성해놓은 상징 중에서 내가 하나에 강제로 강요당한 거예요. 여기서 주체가 생겼는데 인간의 주체는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당한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 무의식 세계를 셸링으로부터 최초로 시작했다고 지젝이란 학자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셸링이 어떤 점에서 신의 세계의 분열을 언급하느냐? 그거는 도발적인 자연세계가 일어납니다. 도발적인 자연세계라는 것은, 화산은 어떻게 돼요? 폭발하지요. 태풍이 일면 파도는 움직이죠. 그것 사람한테 물어봤습니까? 갑자기 소나기 오고, 갑자기 산사태 나는 것, 이건 사람한테 안 물어보지요. 며칠 뒤에 산사태 올 테니까 피하라는 게 있습니까? 없지요. 이것은 자연의 폭력이에요. 곧 우리 보기에는 신의 폭력입니다. 물론 신의 폭력이란 말을 썼습니다만 좀더 구분해서 보면 신화의 폭력이라고 쓸 수 있는데 나중에 지젝이 구분하는데, 어쨌든 간에 대자연이 우리가 보기에 마치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격변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대자연을 뭐로 봤습니까? 질서체계로 봤잖아요. 질서체계에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질서법칙을 통해서 농사를 지었고 증기기관도 만들고 과학적 수학적 논리를 따져서 실제로 낙차를 통해서 수력발전도 일으키고 전기로 밤중에도 가로등을 밝히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만 있은 게 아니고 대자연은 스스로 움직일 때 이 대자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들었거든요. 신이 내부적인 어떤 횡포같이 보이고 무질서하게 보이고 인간의 손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난동을 부릴 때 처음부터 신의 내에 분열이 있다고 셸링은 보고 있습니다. 교재의 단어가 너무 압축이 돼있기 때문에 설명만 해드릴게요.
그러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이미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받았어요.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어떤 감정을 추스르고 다 할 수 있습니까? 인간 속에서 정숙하게 삽니까? 어떤 일에도 성질 안 내고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화나지요. 그게 바로 인간이 오히려 신을 닮았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셸링이. 그것 봐. 갑자기 성질나지. 갑자기 차 끼어들면 화나지. 그게 바로 신을 닮은 거야.
그동안 인간들은 악을 줄이고 선을 행함으로써 내가 하나님답다는 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 속에 악이 있다는 그것이 바로 네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의 절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적으로 예수님이 나타날 때 예수님이 일을 일으키고 사건을 일으킬 때 그 현장에 누가 나타나죠? 마귀죠. 내가 온 것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왔다고 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은 뭐의 시선을 능가합니까? 지금 인간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봐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인간으로 봐요. 네가 나한테 뭘 해주겠는가? 이걸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그것이 어디서 나왔다? 공동체 사상이죠. 인간 공동체.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우리끼리 해보자. 이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공동체를 찢어버리죠. 공동체를 능가해버리죠. 아버지께 인사하고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르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은 인간의 공동체 자체를 탈퇴하는 거죠.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언어적 개념과 언어적 용도조차도 찢으면서 빵꾸내면서 거기서 탈퇴하는 거예요.
아까 셸링 하면서 피히테는 매이지만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했지만 얻고 난 뒤에는 그것이 두 번 다시없으니까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게 좋았는데. 이게 무슨 자유냔 말이죠. 자유는 사유된 것에 매이지 않아야 자유다. 철학적 용어로. 사유한 자는 사유된 것에 매이지 않아야 된단 말이죠.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모든 인간은 사유한 자는 반드시 사유된 것을 남기고 남겨진 사유된 것에 대해서 스스로 매여진 겁니다.
자식은 누가 낳았습니까? 부모가 낳았지요. 사실은 누가 누굴 섬겨야 됩니까? 자식이 부모를 섬겨야 되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누가 누굴 섬겨요? 부모가 돈이고 뭐고 못 대줘서 난리야. 뭐 필요한 것 없나? 돈 필요하지. 김치 못 담그지. 김치 내가 담가줄게. 사우디 가서 고생하지. 맨날 전화. 전화를 누가 해야 됩니까? 자식이 해야 되는데 부모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일반인들은 매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는 보람으로 여기죠.
왜 그러냐? 그게 피히테에서 셸링으로 넘어오게 되면, 내가 자식 없이는 못 살겠다.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자식을 낳은 것도 자식 없을 때보다 더 세상을 자유를 깊이와 넓게 보라고 주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로서 자식을 이해한단 말이죠. 그러나 어쨌든 간에 자식에 매인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선 한 걸음 더 나가지요. 죽은 부모는 죽은 자가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한 걸음 더 나가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참 보통 어려운 말씀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모든 상황의 목적이 뭐냐 하면, 네 자신을 미워하라는 거예요. 일반적인 신학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겨라.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 십자가 앞에서는 뭐냐? 네 자신을 부인하랍니다. 신을 섬기라는 게 아닙니다. 네 자신을 미워하라는 거예요. “신이시여, 어디 계십니까? 섬기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그건 가인의 제사고. 아벨의 제사는 신이시여, 내 제사를 받으소서, 이게 아니고, “아벨아, 니 죽어야 된다.” 이게 아벨의 제사의 마감이에요. 더 마감은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알아야 마감이지만. 아벨 본인이 드린 제사로 말미암아 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그렇게 해서 좁은 길, 주님의 노선에 합치되는 것, 그게 아벨 제사의 마감이에요.
아브라함 믿음의 마감이 어딘 줄 알아요? 하나님 믿습니다, 약속을 믿습니다, 이게 마감이 아니고 세상에 주신 자식을 선물을 그것도 남이 아니고 우연히 강도 만난 것이 아니고 죽이는 주체가 누굽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아버지 됨을 날려 보내는 거예요. 찢어버리는 거예요. 누가 믿음이 아름답다 했는가~
그동안에 이런 나쁜 것을 마귀라고 본 거예요. 중세철학에서. 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마귀에게 속했다고 본 거예요. 셸링은 그게 아니고 그 악이 하나님의 내부에 있다고 본 겁니다. 왜 내부에 있는가? 신은 자신의 근거와 일치될 때 신이 통일된다고 본 거예요. 신의 완전함, 통일됨은 신이 자기와 대립되는 자리, 악과 만날 때 그것마저 통합될 때 비로소 신은 자기 근거를 가진다는 겁니다.
이게 셸링이 이야기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심이 그냥 이 땅에 사람이 되지 않고 육신이 되지 않고 가만있으면 주가 됐을까요? 주가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만 주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는 과정에서 뭘 해야 되거든요. 주님으로부터 오히려 주님이 버림받지요. 그리고 시편 110편 1절, 오늘 성경 처음 찾아보네. 여러분 다 아시지만 이 대목을 기억하기 위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주가 존재론적 주입니까, 가만있으면 주가 됩니까? 그 뒤에 나오지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시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다시 말해서 주님이 원수를 짓밟았던 그 역할과 기능을 완수할 때 비로소 내 우편에 있는 진짜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하나님 우편 자리가 주의 자리입니다. 그 주의 자리에 하나님 본인이 있습니까, 본인 말고 다른 분이 있습니까? 그 다른 분이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에요. 그 주님 되게 하는 그 작업을 우리가 모르게 되면 주님의 나라, 아들 나라에 못 갑니다.
하나님 안다고 못 가요. 하나님 아는 유대인들이 천국 못 갑니다. 쫓겨나요. 하나님의 일을 행하심을 알아야 천국 갑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이 일을 행하심이 주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자기 아들을 주로 승격시키는 그 일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에서 우리의 구원은 빠져요. 복음에서 우리의 구원론은 끼어들 자리는 없어요. 복음에서 왜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그 내용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관에서는 빠지게 돼있습니다.
잘 안 믿어지지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욥의 친구들 이야기했지요. 다시 복습해봅시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 일에 배제돼있습니까, 합류돼있어요? 빠져있지요.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욥한테 뭐라고 충고합니까? 하나님이 어떻고 하면서 충고하지요. 그게 쓸데없는 자기 구원론에서 나온 잘못된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그 무리와 하나님이 배제하지 않고 특별히 주가 주 되심의 작업에 참여시킨 따로 어떤 분이 있어요. 가인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이 생각한 그런 하나님 말고 가인이 생각도 못한 다른 인물이 있었지요? 누굽니까? 동생 아벨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욥의 친구들이 생각했던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주신 줄 욥도 몰랐지요. 욥의 하나님이 욥을 따로 챙겨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들었는데 그 하나님의 원칙이 뭐냐? 아들로 주 되게 하심입니다. 욥의 구원문제가 아니에요.
욥도 처음에는 자기 구원문제에 대해서 걱정했지요. “하나님이여, 이래서 구원 못 받습니다. 저 구원받는 사람인데 왜 어려움을 주십니까?” 몰랐는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욥이 자기 구원문제 때문에 참여시킨 게 아니고 자기를 통해서 장차올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욥을 하나님의 아들 작업에 욥을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은 게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구원은 나중 문제라니까요. 구원은 우리가 구원 얻겠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고, 구원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그 일에 참여하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끼어들어서 그래서 구원된 거예요. 우리가 구원을 달래서 구원된 게 아니고.
셸링은 이런 것 몰라요. 성경적으로 따지면 그렇고 셸링은 뭘 아느냐 하면, 악이란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포함됐다고 보는 겁니다. 악이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 근거를 찾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근거는 숨어있고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고. 나타난 하나님이 대자연이에요. 대자연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스피노자거든요. 스피노자와 셸링의 차이점은, 스피노자는 대자연 자체가 신이고, 셸링은 대자연 속에서 그걸 인격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셸링의 전기 철학을 동일성철학이라 하고, 두 번째 철학을 셸링의 계시철학이라 하는 겁니다. 계시란 신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동일성철학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주었는가 하는 문제에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렸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자유를 줬느냐 하면, 인간의 자유는 부딪침이라 했잖아요. 부딪침이에요. 내가 나를 피히테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고 이성적으로 따져서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이성이나 의식이나 그것과 상관없이 직접, 직관적으로 깨닫는 게 뭐냐 하면, 부딪침을 통해서 신은 있다. 부딪침인데 밀고 오는 거대한 빙산은 뭐냐? 대자연.
피히테는 대자연을 놓친 거예요. 대자연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피히테는 내가 뭘 알 수 있는가? 의식부터 출발한 거예요. 나의 경험부터 출발하니까 문제였다. 셸링은 경험을 따지지 마라. 경험 이전에 이미 너는 대자연 속에서 신의 자유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성이 되고, 악한 게 생각나고, 성질을 내고, 내 마음대로 조정을 못 하느냐? 그게 원래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한 요소가 그거였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 악이 필요했고 그 악의 속성이 그대로 전수되어서 너도 한 성질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아까 했잖아요. 폭풍이 일어나는 것, 화산 터지는 것, 욥기적으로 말하면,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가 뭡니까? 경작지가 아닌데 비를 왜 줍니까? 거기서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 마음대로다. 그런데 셸링에서는 내 마음대로 그렇게 기쁜 거예요. 왜 기쁘냐 하면, 셸링 이전에는 우리가 악한 것이 나오면, “주여, 죄송합니다. 내가 성도로서 성도답지 못하고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반성하지요. 회개하지요. 반성하고 회개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룩한 즉 너희도 거룩하라는 원칙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고 형제를 돌보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성취를 보여줄 때 하나님이 흐ANT하게 기뻐한다는 것이 기존의 신학이고 철학이란 말이죠. 개혁주의신학이 그렇잖아요.
그런데 셸링은 그게 아니고 터져 나오는 악은, 내가 악을 저지르고 싶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와 자유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와야 될 악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 자체가 악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과 선의 통일체가 하나님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다. 셸링에 의하면. 셸링이 이야기한 하나님은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다. 우리 인간들은 아프면 문제 있다, 아프면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셸링은 아픈 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네가 뭔데 안 아파야 되는데, 네가 뭔데 성공해야 되고 네가 뭔데 실패 없어야 되고, 네가 뭔데 남한테 칭찬받아야 되고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 안 되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래서 교재 805페이지 중간에 보면, [피히테의 주장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셸링은 이 행위를 자기의식에서 한정하지 않고 의식성에 선행하는 인간 존재의 실재적 존재에 위치시킨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 다음에 806페이지. 무의식은 어둡다고 돼있는데 무의식이 어둡다고 표현한 것은 어느 층이냐 하면, 무의식 층이 아니고 의식 층에서 무의식이 어두워 보이지요. 무의식이 어두운 것도 아니에요. 다만 의식이 스스로 밝다고 여기니까 무의식이 어둠으로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이 강의하면서 근본적으로 발상을 뭔가 재수정해야 돼요.
아까 제가 선과 악이 통일된다 했지요. 그런데 악이란 게 뭡니까? 누가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알고 있는 우리가 악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보기에는 폭풍이 일어나고 자연 질서가 깨지고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되고 충동이라고 돼있는데 여기에 광기, 충동이란 표현들이 긍정적 표현이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이건 부정적 표현이죠. 하지만 부정적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층이 어느 층이냐 하면, 우리가 아직도 건전한 걸 챙기고 있다는 의식 층에서나 할 이야기고, 막상 당사자는 하나님께서는 그건 의미가 없다니까요.
새가 짹짹거리잖아요. 새가 웁니까? 새한테 물어보세요. 지금 뭐가 슬퍼서 우느냐고 하면, 새가 뭐라고 합니까? 짹짹짹. 새가 웃는 거예요, 새가 노래하는 거예요? 그건 듣는 사람 지 기분이에요. 새한테는 웃는 것도 아니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에요. 노래하고 웃는다는 그 의미 층은 인간들이 상징적 질서에서 구성한 거예요.
배가 가는데 파도가 풍랑을 일으켰다. “신이시여,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너희들은 풍랑이라고 하는구나. 나는 물결을 흔든 건데 별로 안 좋게 생각하네.” “그럼요. 우릴 죽이려고 하는 거거든요.” “우릴 죽이려고 하다니, 무슨 말이냐? 나도 죽는데 너는 왜 안 죽어야 되지? 사고방식 봐라. 희한하다. 뭐 이런 건방진 인간이 다 있나.” 내가 배를 탔다. 배가 풍랑에 안 흔들렸다. 어디서 그런 건방진 논리가 다 있나.
학교에서 이런 일이 많이 있어요. “샘이여, 시험 출제범위 넘었네요.” 샘이 하는 말이, “내가 낸 게 출제범위야.” “선생님, 배운 데서 안 나왔는데요?” “배운 데서 안 나와도 문제 낸 것이 배운 데야. 내가 왜 너희 말 들어야 되는데? 그런 근거 있나?”
지금 셸링은 뭐냐? 그동안 인간 중심에서 근거를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근거를 보자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근거를 가지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뭘 가졌다 하면 거기에 매이게 돼있다니까. 물이든지 좋은 거라든지 매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유성을 내가 매여 있는 눈에 보이는 욕심에 의해서 놓치게 되고 이걸 누리질 못하게 돼요.
아무 이유 없이 일으킨 일에 대해서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흠- 이랬는데 우리는 폭풍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 입김을 불어넣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을 뿐인데 인간들은 육십 평생, 구십 평생 동안 이 입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온갖 짓거리들을 하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아직도 내 코에서 입김이 나오는군. 이 입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노력해야 돼.” 얼마나 살아보려고.
인간에게서 진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살아도 내가 사는 게 진리에요. 남이 살아선 진리가 아니에요. 내가 사는 게 진리에요. 그게 자기 몸에 묶여있는 불쌍한 존재된 겁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신이시여, 저를 괴롭게 하십니까?” 주님이, “내가 언제? 나는 너한테 감정 없어.” 셸링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그거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감정 있어요. 자기 내부적으로 분열돼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 악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만들어진 게 인간이에요.
[지킬과 하이드]라는 연극도 소설도 있지만 그 악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바깥에 있어요, 자기 내부에 있어요? 자기 내부에 있지요. 그래서 셸링의 철학을 표현하라면, 내부와 관련된 외부의 잉여. 여기 내부란 우리 마음 내부입니다. 잉여, 남아도는 것.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의 질서를 우리가 싸잡을 수 없고 다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할 때 잉여가 폭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싸잡아 올 때 우리는 이걸 악이라고 봤는데 그 악이 뭐냐 하면, 우리가 조정할 수 없는 잉여거든요. 잉여가 신의 요소였고, 신이 어떤 활동을 하느냐? 자기 내부와 결합하는 통일하려는 활동의 여파로 우리에게 이런 잉여가 찾아든 겁니다.
그러니까 셸링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거예요. 다 이 세상에 폭풍 치고 화산이 터지고 배가 뒤집어지고 화재가 일어나더라도 이것은 신의 자기 내부 갈등이에요. 신의 내부 갈등이 우리에게 일어났는데 따라서 손해라든지, 나는 실패라든지, 이것이 나쁜 짓이라든지, 그런 용어를 붙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하나님이 섭섭해. 그냥 마땅히 그래야만 했던 일이 그때 일어난 것뿐이라니까요.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성경 말고 대자연,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어떻게 신의 계시를 정립할 수 있느냐? 그게 철학자의 모습이라고 했지요. 계시 말고 성경 계시는 책이지만 그 책은 저자들이 있잖아요. 저자들이 전부라 하지 말고 아예 그 저자를 넓은 계시 안에 포함시키자. 그러면 계시가 성경에 국한되지 않고 성경을 포함한 성경 바깥에 있는 세상의 모든 변화와 변동도 큰 계시 안에 들어있단 말이죠. 이왕이면 넓은 계시, 큰 계시를 알아야지 성경이라는 제한된 저자가 이미 확정된 그것도 골라잡아 편집한 성경이 전부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건 올바르지 않은 진리관이라는 겁니다. 철학자들이.
이렇다면 끝 시간 다 됐는데 정리해봅시다. 그렇다면 성경 덮어버리고 바깥에서 신의 계시를 어떻게 찾는가? 그것은 바로 내부와 관련된 외부의 잉여거든요. 외부란 신도 되지만 대자연도 포함되지요. 자연이라고 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나 빼놓고 자연 아닙니다. 자연이 내 내부 속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꿈을 꿀 때 내가 꾸는 게 아니고 자연이 나에게 꿈이란 현상을 남긴 거예요. 장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고 나비가 장자 꿈을 꿨는지 장자가 나비 꿈을 꿨는지 판정할 수 있는 판정 기준이 없다고 했잖아요.
마그리트란 현대화가가 그린 <이건 파이프가 아닙니다>라는 그림이 나와요. 파이프 그려놓고 이건 파이프가 아닙니다. 어쩌라고? 파이프냐, 파이프 아닌 게 맞느냐? 아니면 그림 자체가 환상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가 환상이고 그림이 진실인가? 그 그림 속에서 네 가지 질문이 튀어나왔죠.
셸링이 그런 연구를 하는 이유를 물으면, 셸링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식세계로 축소시킨 그게 화가 난다는 거예요. 그게 잘못이란 겁니다. 철학이란 것이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하는 것만 해서는 철학이 아니다. 그게 진정한 인간에게 자유와 진리의 전부를 알려주는 게 아니다. 진리를 하려면 반드시 신에 대해서 언급을 해야 되고, 신에 대해서 언급을 하려면 인간과 신의 관련성을 따질 때 인간에서 출발해버리면, 경험에서 출발하면 결국 피히테 밖에 안 돼요. 하늘의 별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된단 말이죠.
그러면 인간의 경험이란 어디서 나왔다? 반성에서 나왔다. 어디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이러지 말자는 거예요.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지 말고 아예 무한이다. 아예 우리 자체가 신의 일부로서 스피노자같이 세상 모든 것이 신 자체니까, 무한에서 유한을 설명하면 된다는 겁니다.
806페이지 위에서 열다섯 번째. [쉽게 예를 들면 죄는 신앙의 이면이 아니라 내재적 구성성분이다. 죄 자체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죄의 완전한 지배 위협을 대항하여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이제 이 말 이해되겠습니까? 죄 빼고 괜찮은 것만 골라서 믿으면 안 되고 죄를 믿어야 제대로 신앙이 통일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 자체 안에 악이 들어있기 때문에.
악을 빼놓고 하나님 믿으면 하나님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 하나님 자체가 내부적으로 갈등과 균열을 일으키면서 하나님은 스스로 자체를 통일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성질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 내부에 의식적으로 나쁜 짓하기 싫어도 순간적으로 성질나면 화가 나면 때리고 싶고 죽이고 싶고 이것이 90% 무의식이 작동한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고.
우리가 눈감고 나는 몰라도 됩니다. 몰라도 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평생 동안 코앞에 있는 것, 자기 하는 것만 하면서 나는 최선을 다 했노라. 이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우리 강의하는데 아스팔트 공사하잖아요. 강의하니까 중지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안 되지요. 네가 뭔데? 그런데 제가 만약에 청와대에서 나왔다면 대번에 중지되지요. 나는 왜 안 되고 청와대는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 순간적으로 악으로 보이지요. 그 악도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자 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제거해버리면 신앙은 한계 없는 팽창 속에 흩어져버린다. 따라서 요점은 윤리적 영역은 덕과 죄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 아니라 그 자체는 죄의 도움을 통해서만 죄에 대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신은 충만하게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말 중요한. 신에게는 나라는 게 없다는 거예요. 우리도 없다는 겁니다.
나가 없으면 뭐냐? 깨어진 나, 갈라진 나만 있지요. 신이 갈라졌기 때문에 그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리도 갈라진 주체가 되는 겁니다. 갈라진 주체기 때문에 미흡하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오히려 갈라진 주체가 충만에 충만이 된다는 겁니다. 갈라진 주체가 뭐냐? 이것 먹고 싶었는데 내일은 못 먹는다. 참 그립다. 이게 갈라진 거죠. 이걸 구입해야겠어. 구입할 필요 없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역설적으로 영원히 신이 완전히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막는 것이 곧 자기성이란 불가한 중핵이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내가 나로 되돌아오는 것을 내가 원치 않는다. 누가? 신께서. 만약에 내가 나에게 되돌아오면, 신이 아니고 피히테 주장이 되거든요. 셸링은 거기서 벗어나서 신은 계속해서 분열되는데 자기가 아니고 자기성, 자기다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말하지만 참 어렵지요.
[셸링은 신의 실존과 모호하게 침투할 수 없는 실존의 기초, 곧 아직은 신이 아니지만 신속의 그것으로서 전 상징적 물을 구분한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신도 온전한 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근거를 찾아서 투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가 생기는가? 자기중심적인 축소, 자기에로의 퇴거, 자기적인 분노, 피괴적인 광기, 그리고 확장, 절대적인 긴장, 그리고 어두운 신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거죠. 우리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그대로 있을 때 이게 뭐냐 하면, 그걸 프랑스 말로 주이상스, 우리말로 향락이죠. 쾌락이에요.
정리해봅시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줬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도와줄 때 기분 좋습니까, 기분 나쁩니까? 기분 나빠서 하진 않을 거예요. 기분 좋아서 하죠. 그게 쾌락이에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기분 좋습니까, 기분 나쁩니까? 기분 좋지요. 그게 쾌락이에요. 그게 향락이에요.
우리는 그동안 향락이란 것을 해서는 안 되는 억눌러야 될 대상으로 봤잖아요. 그러나 셸링과 지젝은 이 세상 모든 나뭇잎사귀 움직임부터 파도 출렁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기 통일된 기쁨으로 보는 겁니다. 신의 기쁨으로 보는 거예요. 스피노자는 인격이 없기 때문에 그냥 대자연이에요. 스피노자 철학은 대자연이에요. 그러나 셸링은 인격이 있어요. 인격 전체가 자기 기쁨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모든 만사가 자기 기쁨으로.
비슷한 이야기가 에스겔에 나오지요. 유다나라 심판하면서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이제 내 속이 시원하다. 또 창세기 6장에 노아홍수 직전에 내가 싹쓸이함으로 말미암아 내 분을 달래겠다는 말씀 나오지요. 셸링도 마찬가지에요. 온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고 쾌락이고 향락이에요. 즐거움이란 말이죠. 즐거움인데 우리한테는 화산 폭발이고, 차 사고고, 비행기 사고고, 내 몸이 암에 걸리고. 그러니까 뭘 버려라?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성에 속해라. 신의 향락과 쾌락에 속하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게 뭐가 되느냐? 지젝에 의하면, 이런 적절한 표현을 했어요. 그걸 창조적 치료. 하나님은 즐거움을 위해서 스스로 아파하는 거예요. 즐거움의 반대가 아픔이죠. 아파하는 것을 스스로 치료해내면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부자 아버지한테 자식이 둘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한테 되바라진 이야기를 했지요. 아버지가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죽었다 치고 유산을 미리 당겨서 달라는 거예요. 탕자 앞에선 아버지 살아있는 건 귀찮아. 아버지 돈이 탐나니까. 어느 도시에 가서 허랑방탕하고 여자와 놀다가 돈을 다 날렸지. 다 날리고 돌아올 때 아버지가 그 탕자를 더 좋아하지요. 그게 얼마나 낯설고 희한하냔 말이죠.
맏이가 궁시렁거리며 하는 이야기가, 내가 지금까지 아버지 곁에 있었고 잘 섬겼고 나는 가출한 적도 없었고 아버지가 나한테 소도 잡아준 적 없었고 가락지 끼어준 적도 없었고 동네 사람 불러다 잔치한 적도 없었지요. 왜 없었어요? 성경대로 합니다. 너는 탕자가 아니기 때문에. 집을 가출한 적이 없어요.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잃어버렸다 얻은 게 얼마나 기쁘냐는 게 아버지 답변입니다. 이게 하나님 내부에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헤겔이 그걸 받아서 성육신으로 보는 거예요. 십자가로 보는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게 하나님의 향락, 하나님의 즐거움이라니까. 지젝은 그렇게 보고 있어요. 우울증, 미치광이 우리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죠.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에요. 그런데 그동안 엉터리 같은 철학 세계가 하나님의 광기, 어리석음, 우울증 이런 건 빼놓고 고상하고 전능하시고 자비, 윤리적 도덕적으로만 빼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구성하면 하나님조차 제대로 표현 못할뿐더러 실제로 인간의 내부에 솟아오르는 위선적인 치료가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실은 돈 주면 어어, 예쁜 처녀 있으면 거기에.
어떤 군목이 신이시여, 하다가 아가씨 안 본다고 마음속으로 간음 안 한다고 맨홀에 빠지는 만화처럼 뭔가 거룩한 척, 고상한 척하는 그것이 얼마나 현실과 괴리된 독단적인 자기만의 우상숭배적인 사고방식이냔 말입니다. 셸링이 지젝이 하는 이야기가. 물질을 안 좋아한다고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냔 말이죠. 그러다 돈 주면 다 좋아하면서. 왜 자꾸 자기의 어두운 구석, 자기에게 나쁜 구석을 자기의 일부라고 생각 안 하느냐 이 말입니다.
셸링이나 지젝이 화가 나는 것은 하나님도 악이 있는데 인간이 악이 없다고 우기느냐 말이죠. 악이 없다고 우기는 건 나쁘고 악이 있으면 뭐 한다고? “주여, 제가 잘못됐습니다.” 그러면 반성하면 악이 사라집니까? 회개하면 악이 사라져요? 회개하면 그 다음부터 나쁜 짓 안 합니까?
셸링의 문제점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 성경에 국한하지 않고 계시를 넓혔다는 그게 문제점이에요. 헤겔의 문제점도 그거에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셸링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 뭐가 문제냐? 여기 나오지요. 인간의 한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 한계를 찾았다는데 문제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피할 곳이 없다. 이걸 인간이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다는 그 점을 지젝이나 셸링은 모르고 있어요. 인간은 피할 곳이 없어요. 이미 십자가로 죽었잖아요. 모든 사람은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것은 그냥 목숨 끊어진 게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이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피할 장소가 없어요. 요한계시록에 보세요. 주님의 재림 때 피할 곳이 없잖아요.
피할 곳이 없을 때 해결책은 철학이 아닙니다. 뭡니까? 사도 바울이 제시한 건 뭐예요? 오직 나는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십자가가 외에는 피할 곳이 없어요. 복음이란 이미 나타나버렸어요.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이해하느냐? 그게 복음이 아니고, 복음은 나 말고 십자가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우리가 어떤 지혜를 발견해도 십자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끝-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간 것을 저희들이 제대로 몰랐습니다. 다시 한 번 세상 쪽에서나 인간 쪽에서나 또는 복음 십자가 쪽에서 여러 가지 보아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뿐인 것을 저희들이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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