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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34강-에스겔 44장 28-31절(제사장의 조건)150415-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에스겔

134강-에스겔 44장 28-31절(제사장의 조건)150415-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41)

134강-에스겔 44장 28-31절(제사장의 조건)1504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4장 28절-31절입니다. 구약성경 122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4:28-31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나는 그 산업이 됨이니라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찌니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하여 드리는 물건을 다 그들에게 돌리며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보통 인간세계에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상대방을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그것을 신앙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제사장의 존재에 대해서, 그 의미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깨끗하게 사는가, 그것이 신앙이 아니고 ‘제사장이 왜 있을까? 중보자가 왜 있을까? 예수님이 왜 있을까? 내가 여기 살아 있고 내가 뭐든지 잘 할 것 같은데 왜 나 말고 따로 중보자라는 분이 계셔야 되는가?’ 그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느껴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신앙의 내용을 정할 때 얼마나 야무진가, 빡세게 붙드는가, 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그 일처럼 하나님께서 나 말고 나 외의 다른 분에게 나의 운명과 팔자, 나의 장래를 다 일임했으며 그분의 이름이 중보자 주 예수님이시며 그 분의 중보자 됨을 위하여, 그 분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겁니다. 내가 그분을 이용해서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 하다 보면 어느새 예수님과 영원히 사는 사람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란 뭐냐고 누가 물으면 나를 안 믿는 겁니다.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게 믿음이에요. 내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께서 다 해주셨다는데 왜 우리가 걱정합니까? 우리가 걱정할 것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일반에서의 믿음, “믿습니다. 의지합니다.” 그것, 그것은 하나의 오기이고 야무짐, 다부짐, 마음 결심이지요. 그것은 각오나 신념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신념과 다부짐과 결심이 다 헛짓이고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에요. 야무지게 믿는 그것이 야무지게 믿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는데. 중보자가 괜히 있겠어요? 우리 곁에 중보자가 왜 있겠습니까? 우리가 야무지게 할 것 같으면 이 땅에 중보자를 왜 주셨겠어요? 안되니까 주셨잖아요.

그 안 된다는 그 점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가볍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신앙이라 하는 것이 중보자의 하신 일에 초점을 맞춰야 되는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또 문 열고 밖에 나기기만 하면 내가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서 ‘야무지게 했으니까 주께서 복 주시겠지.’라고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자기일기, 자기역사, 자기드라마를 또 쓰고 있어요. 그래서 에스겔 오늘 본문의 제사장이라 하는 것이 마지막 끝까지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에서, 에스겔에 나오는 이 성전이 천국인데 그 천국에서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고 제사장, 이 중보자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 중보자, 제사장이 마지막까지 주인공이 된다면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미리 당겨서 이 시간 이 시점부터 중보자가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는 그 중보자가 유발하고 만들어낸 여분의 것, 결과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중보자가 등장했을 때 그 중보자를 우리가 믿으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중보자를 믿는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왜 그런가? 중보자라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준다면 우리는 중보자를 넙죽 받지요. 중보자 마다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힘이 없어서 얻지 못하는 것을 중보자가 해준다면 우리가 그 능력 있는 중보자, 그 영웅적인 중보자를 왜 떠나겠습니까?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중보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고 하니까 우리는 중보자를 향하여 뭔가를 달라고 합니다. “나는 ……을 주세요. 나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중보자는 이렇게 합니다. “네가 나한테 달라고 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라. 너는 내가 사는 것은 안보이고 너 사는 것을 고집하면서 중보자가 왔다고 하니 그 중보자의 힘을 빌려서 네가 사는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키우려고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네 인생과 네 코 앞에 등장한 중보자의 삶이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발견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중보자의 생각이고 하나님이 생각입니다.

차이가 나는 거예요. 동일한 것에 대해서 중보자는 잘되고 우리는 못되었다 할 때 우리는 그 힘을 빌릴 수가 있지만 완전히 바탕 자체가 다릅니다. 우리가 얻고자, 우리가 키우고자 하는 그것은 중보자에게는 없어요. 없으면서도 중보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새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새것을 주겠다고. 그렇게 하니까 우리가 그걸 또 오해를 해서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다 중고이고 고물밖에 없는데 이것을 새것으로 갈아치워 주겠다는 뜻이구나.’라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중보자 자체를 주시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중보자가 채워주는 식이 아니고 내가 뭐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고, 아예 치워버리고 중보자 그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그때부터 인수인계단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중보자가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내 것 자체가 중보자의 것으로 바꿔치기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내 것, 내가 그동안 애썼던 이 모든 것은 걸레 같은 것, 거지같은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이 보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네 인생 말고 나 중보자의 인생, 그렇게 되는 겁니다. 네 인생 말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서 너무 근사하게, 괜찮게 보고 있어요. 이만큼 커오는데 얼마나 애썼고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습니까? 지금까지 이만큼 남보란 듯이 번듯하게 살아오는데 참 고민 많이 했거든요. 고생 참 많았고.

그런데 여러분, 강도가 강도되기 위해서 고생 얼마나 했는지 알아요? 가스관 타고 올라 다니면서 힘깨나 쓰고 고생 깨나 했을 겁니다. 창녀가 창녀 생활하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고생 되게 했어요. 고생 안한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직업을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어부냐, 농부냐를 묻지를 않고 중보자의 직업으로 바뀌게 되면 구원입니다. 중보자의 직업으로.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8절에,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여기서 그들은 중보자에요. 제사장이죠. 기업이라 하는 것은 산업, 기업, 같은 뜻인데 “그들에게 어떤 일거리를 주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 내가 줬다는 말이에요. 제사장에게 일거리를 주지 말라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제사장 외의 사람들이 어떤 직업이 있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체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경남기업? 일체 가치를 부여하지 않아요. 그 기업의 대표가 장로님이라고요? 아니요, 일체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일체 거부합니다. “저에게는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만 계시면 됩니다.” 그분이 이런 마음만 먹고 살았으면 아무 일도 없잖아요. “저는 경북이고 경남이고 그런 기업 필요 없습니다. 그냥 예수님만 있으면 그게 바로 내 직업입니다.” 이렇게 살았으면 되는데 그 사람은 예수를 믿되 채우려고 한 거예요. 그 경남기업을 세우려고 한 겁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이게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만 되겠어요? 아니에요. 오늘날 모든 교회나 성도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제사장은 자기 산업이 없다. 기업은 하나님 자체가 기업이다. 그러니까 중보자를 줘도 사람들은 이 중보자 자체를 믿을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 믿었던 것, 뭐, 내가 나를 위해서 키워왔던 산업체, 기업체, 하나님께서 그걸 좀 도와달라고, 내가 하는 일에서 좀 더 성과를 내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또는 중보자이신 예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교회 나오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에스겔 44장 28절에서 31절까지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보자 믿으면 되는데 교회를 믿으려고 해요. 교회가 자기 자존심이에요.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그것은 장사하는 사람이에요. 교회 이름을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이지 신앙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중보자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출발점을 어디서 잡아야 되는가? 중보자가 없던 시절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누굴 믿어야 됩니까, 가 아예 없을 때를 생각해 보자는 말이지요. 믿어야 될 사람을 하나님이 중보자, 제사장으로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인간에게 믿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 하는 생존에 관한 것을 믿었고 이 생존이 위태로울 때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그 당시에 제사장이 없었어요.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야 생기거든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제사장입니다. 그 전에 그들은 어떤 입장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느냐 하는 말이지요. 애굽에 있으면서 힘들게 살 때 그들은 여호와를 찾았어요. 그것은 생존문제에요. 믿을만한 제사장이나 중보자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살기 힘들면 기도하고 살기 편하면 안 믿고 대충 살고 그랬지요.

모세가 언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려고 했을 때 모세가 믿었던 것은 모세의 누나하고, 모세 엄마하고, 가까운 히브리인들과 함께 영차, 영차, 했어요. 촛불집회라도 하면 탈출이라도 될 것처럼. 서울광장에서 시위해서 정권이 바뀔 것처럼, 안 중근 의사처럼 비밀스럽게 권총 들고 설치는 식으로 해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인줄 알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그게 실패로 끝났을 때 입니다. 실패로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찾아왔고 모세는 내가 기존에 했던 방식이 하나님이 원하는 구출방식이 아닌 것을 혼자서 알았어요. 왜? 본인은 실패해 봤으니까. 진리라는 것은 실패가운데서 진리가 나오기 때문에 우리 다 같이 실패합시다. 실패한 가운데서 예상 못한 진리가 숨겨놓은 보물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요. 사람이 실패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은 자기 자신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성공하려고 하는 일에 도와주시면 더욱 더 성공이 될 텐데.” 실패란 내 사전에 없다, 고 단언하는 그런 것, ‘나에게 실패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헛된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교인들이 기도를 잘 못해요? 실패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신다면 제사장은 최악의,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가장 최악의 실패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먼저 맛을 봐요. 가장 최악의 실패를.

최악의 실패를 맛보면서 거기서 제사장이 알게 된 것은 최악의 실패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막다른 골목, 이젠 끝났어. 이젠 죽는 것 밖에 없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지점에 누구보다 먼저 가게 되는데 막상 거기 가보니 생각도 못한 구원의 길이 바로 그 장소에 있는 것을 먼저 알았던 자들이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존방식에만 몰두하면서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존방식에만 몰두해서 살았던 그들에게 제사장을 줬다는 말은 전에는 양식이 없어서 죽었는데 이제는 “제사장이 없으면 너는 죽어.”라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겁니다.

제가 광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나올 때 홍해를 건너왔잖아요. 여러분, 홍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살아 있는 채로는 못가는 곳이 홍해입니다. 그런 뜻입니다. 산 사람은 그 홍해를 건너갈 수가 없어요. 살았다고 여기는 애굽군사들이 다 죽었잖아요. 홍해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산 사람으로는 못가고 죽은 사람으로 간주될 때만 갈 수가 있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 이미 죽은 사람으로, 물에 빠져죽은 사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확정되었기에 그 다음부터는 살아 있는 시체로서 광야에 들어서게 된 겁니다. 본인들은 그걸 몰랐지요. 물도 안 적시고 말짱하니까. 애굽에 살던 식으로 지금도 살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 말은 “산 사람아!” 또는 “살고 싶은 사람아!” 또는 “생존하고 싶어서 교회 나온 사람아! 천국 오지 마라.” 그런 뜻이에요. 홍해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홍해라 하는 것은 “네 식대로 사는 사람아! 도로 돌아가거라. 그것은 하나님이 기다리는 세계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적당하지도 않다.” 그래서 얻을 게 없는 거예요. 홍해를 넘고, 요단강을 넘고, 주께서 깔아놓은 장애물경기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홍해를 건너온 히브리인들이 펄펄 살았어요. 펄펄 살았으니 이것은 도저히 안 되지요. 하나님이 죽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죽이는 방법이 뭐냐? 원망을 유발시켜서 죽여 버렸습니다. 물이 뻔히 있는데 물 없는 곳으로 몰고 가요. 당연히 물 없다고 원망하지요. 양식이 있는데도 양식 없는 곳으로 몰고 가면 양식 없다고 원망하지요. “양식이 없어서 원망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뭘 빼는가? 물이 없었다, 양식이 없었다, 이걸 빼버리고 원망했다는 것만 놓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다 죽여 버렸습니다.

우리가 어딜 간다고요? 우리가 천국을 가요? 이 꼴로요? 성경을 모르면 모를까 아는 이상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려면 교회오지 말고 차라리 갓 바위로 가세요. 팔공산에 비는 곳이 있습니다. 천국을 간다고요? 허들 선수입니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가게요? 갈 수 없는 곳이 마중 나오는 방법으로 주께서 주신 것이 제사장입니다. 너희들이 제사장같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최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최악, 제사장이 경험한 최악이 뭐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얼쩡거리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에요.

민수기 18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이울찌니라.” 여러분, 속으로 답해 보세요. 포항제철의 뜨거운 용광로에 가까이 가보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까, 아니면 아예 그 용광로 옆에서 하루 12시간 작업하는 그것이 무섭고 위험한 일입니까? 작업하는 그 사람이 더 무섭고 위험한 거죠. 할 일 없는 사람이 아무 보호 장비도 없이 용광로 가까이에 오면 어떻게 합니까? “할아버지!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불똥 튀면 위험합니다.”

저도 얼마 되지 않지만 그 현장에서 근무를 해봐서 좀 압니다. 그 용광로 근처에서 근무하는데 실온도가 55도에요. 불똥이 튄다고요. 그 불똥에 맞으면 화상 입어요. 뭐가 있는가 싶어서 가끔 놀러가는 사람이 위험합니까, 아니면 매일 같이 출근해서 거기서 사는 사람이 위험합니까? 사는 사람이 위험한 거예요. 그 사람이 제사장이에요. 그런데 그 위험한 일, 사람으로 접근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 없으면 우리가 천국을 못가요. 그걸 믿자는, 그걸, 그걸 믿어야 돼요. “갈 수 없는 나인데 나대신 위험한 일을 하신 분을, 그 분이 내가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을 다 감당해서 시원한 천국의 바람을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구멍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기업’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무슨 기업체, 산업체, 부도났다느니 구조조정을 한다느니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최악, 극단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제사장이라면 기업체 날라 가는 그 정도로는 아직 멀었어요. 기업체가 날라 가도 몸은 멀쩡하잖아요. 중보자중의 중보자가 예수님이십니다.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 예수님이 부도났습니까? 암 걸렸어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최악의,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우리 대신 다 담당했습니다.

다 담당했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다 담당했어요. 우리가 좀 아프다고 하는 것은 근처도 안간 거예요. 다 담당했어요. 안 아파도 구원받아요. 난 그게 너무 좋아. 암 안 걸려도 구원 받아요. 그게 너무 좋아요. 기업체 그냥 유지해도 구원받아요. 왜? 뭘 믿기 때문에? 이 기업체를 안 믿기 때문에, 암 안 걸린 건강한 몸을 안 믿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다 가져갔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는 오히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 내 자랑 안한다는 그것이 속 시원한 일이에요. “넌 뭐 자랑하나?” “난 내 자랑할 것이 없어.” 이게 오히려 자랑스러워야 돼요. 자랑할게 없는 게 자랑스러워야 돼요.

그 제사장, 택함 받아서 위험한 곳에 홀로 들어가서 홀로 일했던 그 제사장. 사람들은 왜 제사장 안 믿는지, 내가 얼마를 헌금하고 얼마나 노력하고 기도 많이 해서 효과를 얻는다는 그 자기 행함을 믿는 갓 바위 같은 교회가 왜 번창을 하는지. 그게 이 세상에 믿음이 없다는 증거예요. 얻을 것 얻겠다는 거지요. 내가 시작한 일 하나님의 도움으로 마무리 잘 짓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장이 뭘 먹고 사느냐가 문제지요. 광야 때 이스라엘이 뭘 먹고 살았습니까? 만나 먹고 살았고, 메추라기 먹고 살았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고 살았지요. 참,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거지같은 생활을 한 거예요. 언젠가 그런 얘기 했잖아요.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땅에 뿌려지면 사람들은 아침에 나가서 그걸 주워 먹었다고. 거지가 따로 없어요. 땅에 뿌린 것을 주워 먹는 거예요. 주기도문에 딱 박혀 있습니다. “너희들은 거지 되어라. 날마다 뿌려줄 테니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그냥 거두는 식으로 겨우겨우 살아간다고 생각해라.”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본문에서 제사장은 자기가 노동한 대가가 일체 금지됩니다. 금지되는 대신 누가 줘야 되느냐?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 줘야 돼요. 여기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백성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제사장은 토지가 없어도 밥 먹고 삽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해, ‘제사장은 백성들에 의해서 살아간다.’라는 잘못된 견해에 도달하면 안돼요. 29절에,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찌니.” 이 제물은 누가 줘요? 이것은 다 백성들이 준거거든요. 이것은 현상적으로 백성들이 갖다 준 것을 제사장들끼리 나눠먹는 셈이 되니까 백성들은 “우리 아니면 너희는 굶어죽지롱. 너희 제사장도 우리 손에 있어.”라고 오해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여기 거제제물이 나와요. 거제제물이라는 것은 ‘경유’를 의미하는 겁니다. 일단 하나님을 경유해서 도로 받는 식으로 드리는 제물이 거제제물이에요. ‘거제’라는 것은 경유, 거친다는 표시를 하는 겁니다. 경로, 이 경과가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거든요. 백성들이 줬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역전이 돼요. “백성들아! 너희들이 나한테 준 것은 이미 우리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있었던 그 위험한 일의 결과로서 너희에게 소산물이 나오도록 했다. 그래서 그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성전에 나오도록 한 그 모든 바탕, 토대, 근거가 우리 제사장에게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가 하면 제사장이 그들을 먹여 살리는 거예요.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돌려드리는 것이 십일조에요. 내 것 주는 게 아니에요. 뭐했다고 자기 것을 줘요? 하나님이 주신 거지요. 그래서 일반백성들은 제사장이 살아가는 그것을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아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 내가 지금 농토가 있는데 소출이 없다고,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다고 할지라도 저는 괜찮아요.”라는 것을 제사장 모습을 통해서 본받아야 되는 겁니다. 물론 다 제사장이 될 수가 없어요. 지파가 다 다른데 이것은 레위지파만이 할 수 있으니까. 다른 지파는 다른 지파의 역할이 있어요. 그것은 거지같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제사장이 제사 드린 효과를 주워 먹는 거지처럼 살아가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겁니다.

왜 그런 역할을 하느냐 하면, “소산물이 있네? 무화과 열매가 있네?” 무화과로, 포도로, 외양간의 소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 덕분에 살아간다는 것을 소고기 먹어가면서, 포도농사 지어서 포도 먹어가면서도 포도와 소고기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제사장을 통해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이 소를 믿지 않습니다. 이 포도나무를 믿지 않습니다. 이 포도나무 제가 키웠습니까? 제사장이 키웠지요.”라는 마음, 그게 바로 모든 일거수일투족, 모든 일상에서 제사장의 의미, 개념을 다 집어넣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서 하라는.

소프라노가 노래해서 밥 먹고 산다?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이미 제사장 안에서, 이미 예수님 안에서 산 사람이 소프라노를 통해서, 나는 소프라노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소프라노를 통해서 증거 하라고 하는 거예요. “목사님, 그건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어렵지요. 어려우니까 그들은 홍해를 건너오지 못한 애굽사람이 되는 거예요.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불가능하지요. 그 불가능한 홍해와 광야는 바로 그 소프라노 안에 늘 살아 있어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야 때 그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얻었던 농사법이 있더라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농사기술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다 잊어야 해요. 그들은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이것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왜? 스스로 ‘나는 내가 나를 살려야겠다.’ 하는 사람들을 40년 동안 돌아다니게 하는 동안 다 죽여 버렸어요. 다 죽었어요. “네가 너를 살려? 홍해의 의미도 모르는구먼. 어린양의 의미도 몰랐구먼. 네가 네 힘으로 살 것 같으면 약속의 땅에는 왜 들어와? 애굽에서 그냥 살지.”

완전히 천국은 딴 세계입니다. 세상 자체가 상상도 못한 세계에요. 상상 그 이상이 아니고 상상도 못할 세계에요. 그러면 무슨 세계입니까? 중보자의 세계지요. 좀 상세히 말씀드리면 제사장의 세계입니다. 제사장의 세계는 어떤데요? 위험한 곳에, 하나님 곁에 붙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생존했던 사람들, 어렵게 말해서 언약대로 시행해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 언약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 함축해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너무 어려우면 하나님의 죽음에 참여한 덕분에 산 사람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 덕분에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제사장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모든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신약 때 자신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가진 직업이나 학력이나 지능지수나 재산 같은 것을 가지고 자기의 주체, 정체성, “나는 이런 사람이오.”라고 하는 것이 세상생활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보면요, “저는 주님 앞에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베드로전서 2장에 합당한, 그 성경말씀에 합당한 조치에요. “저, 제사장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저는 주님으로 살지 제 노력한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하는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줬던 제물들, 이걸 백성들이 안주면 어떻게 하는가? 백성들이 그걸 안주게 되면 제사장 제도는 무너지지요. 왜? 먹을 것이 없는데 살 수가 있습니까? 먹을 것 자체가 없는데. 마땅히 내야 될 십일조를 그들은 입 닦아 버리고 “내 것은 내 것이 제사장 너 먹을 것은 네가 알아서 해 먹어라.”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제사장이 먹을 것이 없어서 직업을 바꿨어요. 가정집에 가서 “참 잘 될 겁니다.” 복을 빌어주면서 연봉계약해서 살았습니다. 그걸 두고 커미션 받아 챙긴다고 저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기도대로 응답된다면 그걸 갈라먹기 하자는 거예요. 10퍼센트 갈라먹기. “여러분이 잘 된다면 그 결과물의 10퍼센트는 나에게 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살았어요. 왜? 십일조를 내지를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어요. “목사님, 그들이 그 당시에 왜 십일조를 안냈습니까?” 미쳤습니까? 자기 것을 왜 남 주는데? 그걸 묻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본인이 십일조 내보니 즐겁던가요? 안 즐겁지요. 똑같아요. 여러분,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 오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오는 것이고 옛날에는 문자인데 그게 우리 마음 앞에서 스톱이 돼요. 형식적으로 당겨보지요. 하지만 그것은 당겨봐야 형식이에요. 그러면 제사장 제도가 뭉개지고 붕괴되는 겁니다. 백성도 잘못이고, 제사장도 잘못이고 다 잘못이에요.

그러면 주님의 작업,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깨졌는가? 실패했는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 실패한 그 장소에서 “우리는 제사장으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는 고백을 매일같이 쏟아낼 때 그게 신앙인 입니다. 왜? 내가 제사장 노릇을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거든요. 내가 제사장 노릇 하도록 남들이 나에게 꼬박꼬박 십일조 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까짓 거 하지요, 뭐. 내가 제사장 노릇 하면 남들이 꼬박꼬박 십일조 주면 괜찮은데 안주거든요. 왜 안줍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목사, 너는 예수 믿어야지 교인 믿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들어보니 쉽지요? 들어보면 신앙이라는 게 굉장히 쉬운 거예요. 예수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게 신앙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 가는 그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 위선적인 믿음, 그것이 들춰지고 노출되고 들통 나는 그 작업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하십니다. 왜? 진짜로 예수님만 믿도록. 진짜로 주님만 믿도록.

그럴 때 그 믿음은 내 솜씨가 아니고 진짜 주님이 선물로 준 믿음입니다. 안되니까 선물까지 주신 거예요. 내 믿음 유지가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옛날 제사장? 그만뒀습니다. 왜?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은 믿은 것이 아니고 자기한테 십일조 갖다 주는 교인들을 믿은 거지요. 백성들을 믿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돈을 믿은 겁니다. 자기의 생계수단을 믿은 겁니다. 광야 말고 애굽 때 돈이 있어야 산다는 그 시절의 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한 겁니다.

다 망하고 다 실패할 때 주님께서는 그 실패의 흔적을 지니시고……, 우리가 실패했다는 그 흔적을 늘 우리 곁에 둬야 돼요. 주일날 이야기했다시피 주님은 우리가 실패를 늘 곁에 두도록 그걸 현실화시키면서, 반복시킵니다. “주여, 진짜 주의 피와 살이 아니면 저는 구원될 수 없었군요. 이 믿음까지도 주님이 주신 믿음이지 제가 야무지게 결심한 제 마음 아닙니다.”라는 고백, 그것이 바로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 믿는다 하면서도 믿음의 실패와 실패를 연속해야 되고 반복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가짜 믿음으로 들통 나고 회개했다는 것이 또 다시 회개꺼리가 되는 저희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은 그 일을 조성하신 분이 우리 주님인 것을 믿게 하시니 이 믿음조차 주의 선물입니다. 이 믿음이 주의 선물인 것을 감사하는 성도된 것을 늘 매일같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34강-에스겔 44장 28-31절(제사장의 조건)150415-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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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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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