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8 - 고통의 구조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8 - 고통의 구조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28 - 고통의 구조
15,03,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어떤 결과가 지혜를 지혜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고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위에서 '즐기기'만을 위해서 성급하게 소유하려고 할 때, 그것이 지혜답지 못한 겁니다.
◈ 지혜에는, 하나님의 수고가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지혜는 하나님의 수고가 개입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고통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저주하심으로서, 아담과 하와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 저주의 구조망 속으로, 즉 하나님 본인도 그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누구든 간에 고통에서 벗어나서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고통을 만드셨기에, 하나님 자신은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마저도 고통스럽다고 하면, 인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 고통을 면제받고 싶은 인간들, 왜?
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고통이 사라지고 면제된 상황을 자꾸만 상상하는데, 그것을 두고 저는 '비현실' 이라고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고통 속으로 들어오셨는데, 감히 피조물인 인간인 주제에, 고통이 없는 상태가 자기의 본래 상태라고 상상한다는 것은, 그것은 배후에 수상한 세력이 작용했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통이 멀쩡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데, 그 멀쩡함을 상실했을 때 고통이 오는데, 그러니 고통은 항상 미흡함을 두게 되어있고, 그 미흡함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그것이 마저 채워지기는 고대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런 고대함마저도 하나의 고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그런 결론을 내렸는데, 우리가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뭔가 희망한다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럽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희망마저도 없다면 더 고통스러우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절망으로 인해서 말이다.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절망인데, 못살아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계획대로 진행이 되어야하는데, 갑자기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인간은 순간적으로 인생을 거기서 끝내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부모가 싫어하는 쪽으로 갈 때, "더 이상 내가 살면 뭐하겠노?" 라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식을 불러놓고, "니가 그렇게 나오면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같이 죽자" 라고 하는데, 그런 극한 발언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식이 뭐라고 하겠는가?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살면 되는데, 왜 나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는데? 키워준 것은 나중에 돈을 벌어서 갚을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엄마 : 더 이상 내가 살면 뭐하겠노?
* 자식 : 또 왜 그래?
* 엄마 : 니가 그렇게 나오면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 같이 죽자.
* 자식 :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살면 되지, 왜 나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는데?
* 엄마 : 방금 뭐라고 했노?
* 자식 : 키워준 것은 고마운데, 나중에 돈을 벌어서 갚을게.
* 엄마 : 나는 너만 바라보고 산다.
* 자식 : 제발 좀 그만해. 나도 내 인생을 살 거야.
* 엄마 : 그래도 나는 너만 바라본다.
* 자식 : 왜 나만 바라보는데?
* 엄마 : 니가 나의 희망이거든.
* 자식 : 엄마, 이제는 희망을 제발 바꿔.
* 엄마 : 니가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더욱 더 절망스럽지.
* 자식 : 엄마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꿈을 펼치지 못하잖아.
* 엄마 : 내가 언제 니 꿈을 막았노?
* 자식 : 이제 부담을 그만 줘.
* 엄마 : 엄마에게 그게 자식이 할 소리냐?
* 자식 : 어쩔 수 없어. 나는 이제 이 여자와 새 인생을 살 거야.
◈ 알튀세르 - '나는 인천에서 돈까스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방금 제가 이렇게 상상의 나레이터를 했는데, 이것을 두고 '관계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 라는 학자는 이것을 두고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주체가 있기 이전에 관계망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할지, 그것이 자신의 자아됨, 즉 주체가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얽히고 얽힌 것들 중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것은, 그 속에 자기 것은 없고, 자식에 대한 기대, 남편에 대한 기대 등등, 그런 온갖 남의 것들이 자기 주체의 내용을 채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안은 그야말로 시장통과 같은데, 들었던 것, 드라마를 봤던 것, 심지어 드라마의 주인공이 꿈속까지 들어오고 말이다.
사람이 잠을 자면 하루에도 여러 개의 꿈을 꾼다고 하는데, 제일 마지막 꿈만이 기억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 꿈을 분석해보면, 그 꿈에는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얽힌 것들이, 그래서 만나지 않던 친구들도 나타나고,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꿈은 그야말로 시장통이고, 또한 관계망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관계망에, 갇혀있는 인생 !!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도,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은, 그런 것은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살아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른다는 것을 성경에서는 '갇혀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갇혀서 순환을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저기로 가고, 또 저기서 여기로 가고, 그렇게 서울, 대전, 부산, 찍고 광주로 간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가봐도, 자기 자신이 그 나라로 가기 때문에, 그것은 한국과 똑같다는 말이다. 하루에 세 끼를 먹고, 죽으라고 일하고, 가끔 여유가 생기면 경치나 구경하고 말이다. 이것은 어디를 가더라도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삶의 질은 돈이 결정하는데, 돈만 있으면 돈 값을 하고, 없으면 지지리 궁상이란 말이다. 돈만 있으면 굳이 미국에 가지 않아도 미국에서 사는 것 이상으로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반면에 돈이 없으면 미국에 가도 거지꼴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갇혀있는 입장에서는 자유가 없는데, 그 자체에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맨 땅 헤딩 !!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은, 예수님은 죄를 씻으려고, 그렇게 죄 때문에 오셨다고 하는데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유가 없는 자에게 예수님이 합류하셔서, 진정 우리가 어디에 갇혀있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그렇게 보면 된다는 말이다.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 주님이 빠져나가신 마지막 구멍이 있는데, 주님은 어디로 가시는고 하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그런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봐야, 그것은 마치 차를 타고 절벽에 그냥 들이박는 것과도 같은데, 매우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다.
오직 주님만이 자신을 죽음 앞에 던지실 수가 있는데,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어리석은 짓이지만 말이다. 인간들은 그런 주님을 보고 "출입구도 보이지 않은데 왜 자기 머리를 거기에 박지?"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은 강도가 얼마나 대단한 믿음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당시에 십자가에 달린 두 명의 강도와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을 하고 있는데, 죽으면 끝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죽음이 끝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예수님과 그 강도는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가? "죽으면 끝이지? - 아닙니다. - 아니라고? - 예, 저를 기억해주옵소서. - 그래,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 강도도 옆에 있었지만 말이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그러면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를 하나 내겠는데,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다. 문제가 좀 어려워서 보기를 드리겠는데, "1번, 죽음 뒤에 있다. 2번, 예수님의 죽음 뒤에 있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인가? 여기서 2번인데, 낙원이 예수님의 죽음 뒤에 있다는 것이 무진장 어렵다는 것이다. 자기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 뒤에 말이다.
그러니 베드로는 아무리 죽어도 맨 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은데,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죽어서도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지만, 하지만 그런 베드로의 죽음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님의 죽음 안에만 영생이 있기에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자리를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계망 속에서 "나는 나답다" 라고, 즉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 말인데, 그게 주체가 맞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말이 맞는데, 하지만 그게 해답일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생산했다 !!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이미 해답은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해답이 나오는 질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점이 그것인데, 즉 자기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주체가 이렇게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예수님으로 바꾸는데, 즉 예수님의 죽음 뒤에 봉지가 있다고 하면, 여기에 영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생산했다" 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자리는 없는 자리이니 그게 자기의 자리가 되는데, 즉 주체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체는 어디서 만들어졌다고 했는가? 관계망 속에서 만들어졌는데,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이미 있는 것이란 말이다.
아까 엄마와 아들 이야기도 했지만, 엄마는 "나는 너만 바라보고 산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아들은 자기가 성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게 귀찮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은 기존의 것을 거부하고 싶은데, '나' 라는 것으로 새로 시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다. 자기 있음으로, 그런 새로운 자기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왜 우는가?
저는 어릴 때 교과서를 배우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에서 하나가 '청개구리 이야기' 라는 것이다. 왜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고 하니까, 청개구리가 그야말로 말을 듣지 않는데, 엄마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정신을 차리는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 무덤을 물가에 만들었는데, 그 무덤이 비가 오면 떠내려갈까 싶어서 걱정이 되어서 계속해서 개골개골 운다고 하는데 말이다.
왜 제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는고 하니, 아니 무덤이 떠내려간다고 해도, 그것이 도대체 어떠하냐는 것이다. 벌초도 하지 않고 오히려 좋지 싶은데 말이다. 사실 벌초가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닌데, 심지어 형제들끼리 싸움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형제가 없으면, 아예 포기하고 혼자서 열심히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형제들이 많을 경우에는, 서로가 전화를 하면서 왜 벌초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화기를 들고, "형은 뭐하고 누나는 뭐하노? 나만 자식인가? 산소와 거리가 가깝다고 맨 날 나만 벌초하라는 법이 어디에 있노?"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모를 모실 때는 "자식은 나밖에 없구나" 라고 생각해야지, 형이나 누나를 염두에 두면 실컷 일을 하고도 욕을 얻어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없다고 여기면 되는데, 물론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고이 물에 떠내려보내면 되는데, 그런데 울기는 왜 우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ㅋㅋ), 어떻게 그것이 자기가 개과천선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느냐는 말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식은 부모 말을 듣지 않더라도 자식 안의 내용물에는, 그 안에는 관계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엄마가 없는 자식은 없다는 것인데, 그러니 말을 듣지 않더라도 엄마가 있어줌으로서 자식이라는 티가 나게 되어있고, 주체의 자리가 규정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마저도 없다고 하면,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존재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는, 그런 의도로 그 동화를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억지로라도 해석을 해보는데,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개과천선을 하는 도구가 홍수가 나서 무덤이 떠내려가는 것이라고 하면, 그러면 부모의 묘 자리를 잘 쓰라는 이야기인지 말이다.
◈ '나' 라는 것은, 기존의 것이 늘어난 것 !!
아무튼 인간 속에 관계망이 들어있고, 그것은 기존의 있는 것인데, 그러니 '나' 라는 것은 기존의 이미 있는 것이 쭈욱 늘어난 것이란 말이다. 왜 옛날에 초등학교 입학식에 보면 다들 수건을 가슴에 하나씩 달고 있는데, 그것은 콧물을 닦으라는 것이다. 요즘은 없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위생적인 문제로 인해서 콧물을 일으키는 바이스러가 많았는데, 그렇게 콧물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콧물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당연히 자기 몸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자식은 어디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부모의 인생이 늘어진 것이 곧 자식이고, 아무리 자식이 커서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도 부모는 그 콧물을 떼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늘 주시하고 관찰하고, 도와주려고 애를 쓰고 말이다.
◈ 예찬아, 나는 너 때문에 산다 !!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 바로 부모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어디서 태어났으며, 왜 살며, 그리고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고, 그것을 자식이 물어보면 엄마가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답은 간단한데,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벌어서 쓰지도 않고 적금을 들고 하는 것이 바로 자식 때문이라는 말이다.
제가 답답한 것이 바로 그런 점인데, 과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냐는 것이다. 그게 진짜 인생이냐는 말이다. 어느 부모라도 "야야, 나는 너희 할아버지 때문에 산다" 라고 하는 경우는 없는데, 사랑은 반드시 내리사랑인데, 사랑이 위로 치고 올라가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던 자식이, 자기도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어떻게 하는가? "자식을 낳으면 부모의 심정을 이해한다" 라고 말들은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자식을 낳으면 역시 자기 자식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내리사랑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이 참으로 답답한데, 어떻게 인생이 자기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소망이 되고 전부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우리가 모르면 몰라도, 성경에는 분명히 "처나 자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식을 사랑하다가는 지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러니 우리에게는 자식이 최고인데,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소망이 우리의 자식에 대한 소망보다도 더 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세기는 뭐가 더 세단 말인가? 교회에 가도 자식 생각밖에 나지 않는데, 도대체 주님이 무엇을 주셨다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인간의 소망은, 고통에 대한 면제책 !!
바로 거기에 대해서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사람에게 있어서 소망은 고통에 대한 면제책인데, 즉 현재 주어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고통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거기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고 소망과 희망과 꿈과 같은 것을 다듬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물론 부모가 살아오면서 많이 힘이 들었는데, 아프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고 아픈 것보다 더욱 아픈 것이 바로 외로움인데, 특히 혼자인 경우에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도 부부가 다 살아있으면 괜찮은데, 누구 하나 먼저 떠나고 나면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온 국민들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그렇게 자기 혼자서 건너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홀로 남은 할머니는 매일같이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고 또 다시 간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게 바로 고통이고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같이 있을 때는 돈이 없는 것이 고통이고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었는데, 그런데 혼자가 되니 밥이 있어도 넘어가지 않고, 돈이 있어도 좋은 줄을 모르고, 어디를 놀러가도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급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그게 맛있는 줄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있을 때 잘하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없어봐야 있음의 존재를 아니 말이다. 사람이 그렇다는 말이다. 있으면 그 결핍의 자리를 모르는데, 있는 자리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한계인데, "있을 때 잘해라" 라고 아무리 교훈을 받아도 그런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일이 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살아갑니다 !!
오늘 강의내용이 좀 어려운데, 예수님과 관련을 지으려고 하니 어렵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냥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아닌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무튼 고통을 면제하려는 쪽으로 계속해서 비어있는 빈자리를 자기가 원하는 눈에 보이는 자리로 채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채워봐야 전혀 해결책이 될 수 없는데, 채워봐야 그때뿐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목이 마를 때마다 우물에 와서 물을 떠서 가는데, 그것이 과연 해결책인가?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여인이여, 그렇게 목이 마를 때마다 와서 물을 떠가는 것이 해결책인가?" 라고 하면, 그 여인이 뭐라고 하겠는가? "이게 해결책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다 이렇게 살아갑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있어서 해답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모든 사람들' 이라고 하는 범위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냥 살아온 방식대로, 남들이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자기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나?" 라고 하면서, 그게 해답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 관계망 속에 뛰어드신 예수님 !!
그렇다면 이제 진짜 해답을 제시해드리겠는데, 이런 관계망 속에 예수님이 뛰어드셨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 파동이 일어나는데,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일어나듯이 말이다. 바로 그 파동이 우리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오는 것을 두고 '새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옛언약은 왜 안 됩니까?" 라고 하신다면, 물론 옛언약도 파동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옛언약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 옛언약은 그 파동이 일어날 때, 그것은 기존의 육신이 관계망 속에서 갖추어진 마음이기 때문에 사수를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치 '나' 라고 하는 주체의 성에 갇혀서, 그 성 바깥에는 오는 모든 변화는 일단 적으로 간주해서 밀어낸다는 것이다.
옛언약은 율법인데, 그냥 쉽게 한 마디로 '십계명' 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 십계명이 오게 되면 우리 마음은 어떠한가? 거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5계명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하는데, 그리고 6계명에는 "살인하지 말라"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파동이 오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그 6계명이 오게 되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한 것이 마중을 나가는데, 즉 "나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바이바이!" 라고 말이다.
◈ 예수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
다시 말해서, "말씀과 교훈과 잔소리를 참 고마운데, 하지만 저는 지금 이대로 살겠습니다. 그런 것은 이미 지켰습니다. 저는 살인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라고 하면서 문을 닫고 돌려보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율법은 이렇게 현재 자기 것을 지키는데 있어서 잔소리로, 혹은 흠짐을 내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강력한 철판을 깔아버린다는 것이다. 이게 인간의 본성인데, 즉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하면, "나중에 나이가 들면 나가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 것을 지켜야하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곧 길이다" 라고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예수 당신이 길인 것을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득하고 증명해보세요" 라고, 그렇게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옛언약을 가지고 오셔서, 새언약으로 완성해버리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옛언약으로 이 땅에 뛰어들게 될 때, 기존의 관계망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는가? 환영했는가? 아니면 조롱하고 천대했는가? 예수님을 무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내 나름대로의 관계망을 외부인으로부터 흠집이 나는 것을 거부하겠다" 라는 것이다.
◈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면 !!
저를 비롯해서 여러분들이 일가친척들에게 얼마나 많이 복음을 전했는가? 그들이 받아들이던가? 자식이나 며느리라도 전혀 가당치 않은데, "그냥 살던 대로 살랍니다. 아직까지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지금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아이는 학원에도 가야합니다" 라고 나오는데, 그렇게 바쁘고 또한 힘이 든다는 것이다.
왜 힘드는가?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주체를, 그런 고통에서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만들어내야 하니 말이다. 즉 지금은 힘이 들지만 나중에 돈을 벌어서 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돈을 번다는 희망 때문에 지금 힘드는 것도 감수하면서 살아가기에 분주한데, 거기에 예수님 이야기가 들어올 틈이 없다는 것이다.
내리사랑이라고, 자기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투자하는데, 자기 부모가 그렇게 했듯이, 자기는 자기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투자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해결책인데, 그런 거기에 예수님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는 말이다. 즉 "지금 어머니가 심심하고 별로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예수 이야기는 앞으로 하지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싸늘하게 예수님을 그만 발길로 차버리고 마는데, 하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고 하니,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 그냥 폭격을 해버리세요. 그게 주님의 자존심이 합당한 조치입니다" 라고 하고 싶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다니, 당장에 불바다를 만들어도 저는 박수를 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박수를 치면서 좋아할 문제만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 안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자기 자식이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오히려 "주님이여, 제발 3년만 참아주소서" 라고 하면서 주님을 달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ㅋㅋ).
◈ 이런 들켰구나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가까운 일가친척이, 즉 자기에게 많은 혜택을 빼앗아 간 대상자가, 자기가 복음이란 아주 작은(?) 것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만 싸늘하게 발길로 차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온전한 믿음이 아닌, 아직도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이 많다는 것을, 또한 그런 미련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온전한 소망이 아닌, 여전히 소망거리를 이 세상에서 찾고 있음이 그만 들통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는데, 말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아직도 이 세상에서 못다 찾은, 그런 한과 같은 것이 여전히 맺혀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 우리의 살과 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꿔라' !!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예수님이 무슨 마트를 차린 줄 알고, 말씀을 지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다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고 하니, '바꿔라' 라는 것이다. 관계망을 말이다.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시게 되면 우리는 퉁기게 되는데, 그런데 예수님의 새언약은 이것을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우리의 살과 피를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꾼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로 말이다.
그렇게 살과 피를 바꾼다는 것은, 이제 자기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인데, 입고 있는 이 옷, 이 손톱, 이 피부, 그리고 이마의 주름까지도,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이것이 언제부터 자기 것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나' 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육신이 있으니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까?" 라고 해서, 그게 '나' 라는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체가 먼저이고 '나' 라는 것은 그 뒤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태어난 지 6개월 안의 아이들의 심리를 조사하면 그렇다고 하는데, 그 갓난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신체가 있는데, 하지만 정작 자기는 신체가 자기 신체가 아닌데, 엄마 뱃속에서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도 자기는 엄마의 신체와 결합되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아예 '나' 라는 생각조차도 없는데, 그렇게 '나' 라는 생각이 들려고 하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울상' 이라고 하는데, 즉 거울을 보면 뭔가가 비치는데, 그래서 "저게 왜 있지? 저게 나인가?" 라고 하면서, 거기서 자아상이 발생되면서, 그것과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 !!
'라캉' 이란 정신분석학자는 이것을 두고 '상상계' 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 상상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유사성' 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일치성이 아니고 비슷무리한 것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와 일치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일종의 착각인데 말이다.
청소년들이 공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유명 연예인들에게 푸는데, 주로 남학생은 여자 연예인에게, 그리고 여학생들은 남자 연예인에게 말이다. 그래서 국민 여동생이 어떻고 하는데, 그러면서 "나는 저 연예인처럼 예쁠 수 있어" 라고 상상을 하는데, 그런 상상 속에서 "내가 저 연예인처럼 되면 참 좋고 기쁘겠다" 라는 것이다. 즉 공부와 학원이라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나름대로 설정해놓는다는 말이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러한데, 물론 저도 그때 그런 생각을 했고 말이다. 정작 공부는 열심히 하기 싫고. 그러면서도 "나는 돈을 잘 버는 의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자기 이름이 동네에 붙는 상상도 해보고 말이다. 그러면 많이 사람들이 칭찬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 못생긴 것은 용서할 수 없어 !!
그리고 여학생의 경우에는, 사실 여학생은 공부를 못하는 것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자기 용모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힘드는데, 그런데 더 힘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하면 되는데 말이다. 부모가 못생겼는데 자기가 어떻게 잘 생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ㅋㅋ).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못생겼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잘생긴 남자를 만나서, 자기 자식만큼은 예쁘게 낳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예쁜 자식의 엄마가 되는, 그런 방법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남자도 예뻐야 하는데, 그것이 스펙이 되고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는 키가 작으면 미치는데, 그러니 키 크고 잘생겨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은 그게 고통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이놈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라고 하면, "어머니, 예수님을 믿으면 제가 원하는 것을 채워줍니까?" 라고 나오는데, 즉 자기 자신은 꼼짝도 하지 않는데, 완전히 철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이다. 완전히 철옹성인데 말이다.
◈ '만신창', 혹은 '만신창이' !!
주님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즉 이러한 상상을 어떻게 깰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유사성인데, 즉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릴 때의 상상이 죽을 때까지 가는데, 그러면서도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또 바뀐다는 것이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세 개의 글자면 해결이 되는데, 즉 '만신창', 혹은 '만신창이' 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심리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데, 특히 남자들은 여자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참으로 힘든데 말이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으면 편지를 쓰는데, 그런데 부치지 않는 편지가 더 많다는 것이다. 편지를 쓰면 당연히 부쳐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부치는 편지 따로, 부치지 않는 편지 따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자기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을 너머섰다는 것인데,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편지를 부치느니 자기 마음을 부치겠다고 하면서 직접 찾아가는데, 그러면 남자들은 착각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몸을 바치면 다 바친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데, 말로 안 되는 것을 몸으로 했다고 하지만, 하지만 몸을 주어도 안 되는 것이 또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을 늘 짐으로 짊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관계망'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 관계망이 우리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 관계망에 시달리는 인간들 !!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식에게 전화를 해서 "너희들, 잘 있지? 그래, 알았어. 나도 잘 있어" 라고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했는데, 그런데 끊은 지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전화가 온다는 것이다. "엄마, 아이가 아파요"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일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전화를 해서 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찜찜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 우리는 잘 있어요" 라고 해도, 이 관계망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 자체가 우리가 손에 쥐고 다룰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LA에 지진이 나면 국제통화가 얼마나 늘어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날에 전화로 엄마와 아무리 크게 싸웠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전화를 해서 딸이 잘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전화기를 놓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싸운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우리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수억 톤의 쇳덩어리가 눌리고 있어서, 그것이 언제 우리 인간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쇳덩어리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 내가 아는 고통은 빙산의 일각 !!
여기서 일단 정리하면, 자기가 아는 고통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앞으로 어떤 고통이 다가올지, 어떤 외로움이 닥칠지, 그것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넉넉하게 준비를 해서 우리 옆에서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약속의 땅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암몬, 모압, 블레셋과 같은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만신창이'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고통이라고 여기고 그래서 극복하기 위해서 또 다시 나름대로의 고통에 대한 해소책을 내려고 하지 말고, 지금 하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동행하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만신창이라는 것이 필수적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여기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우리가 만신창이가 되지 않으면 처자 자식을 계속해서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니, 주님께서는 말씀을 던져놓고, 물론 말씀을 던져도 소용이 없는데, 우리는 철옹성이니 말이다. 우리는 지키지 않는데, 그것도 역시 대단한 고집이라는 것이다.
◈ 질질 끌려가는 구원받은 인생 !!
따라서 주님께서 그렇게 안 되는 사람을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먼저 이 땅을 한 번 밟으시고, 그 밟은 인생을 성령을 통해서 되풀이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성령에 이끌려서 똑같이 가게 하시는 작업을 하신다면,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곧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은 자기의 조치로 받는다고 여겼는데, 즉 "나는 지금부터 예수님을 믿어야지" 라고 결단해서 구원을 받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질질 끌고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광야로 만들어서 질질 끌고 말이다.
여기서 어려운 것을 하나 해보겠는데, 파리채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사람들이 다 아는데, 앞에 손바닥처럼 생긴 것이 달린 길다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채인데, 그런데 그것은 파리가 없으면 사용하면 되겠는가? 안 되는데, 그런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무엇으로 때리는가? 물론 효자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름에는 주로 파리채라는 것이다.
◈ 샤르트르 - '본질은 변한다' !!
그것을 두고 '샤르트르' 라는 철학자는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본질은 변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파리채의 본질은 파리를 잡는 것인데, 그런데 그 본질이 변할 때 어떻게 변하는고 하니,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본질을 집어넣으면 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하는데, 즉 "기존의 관계망에 얽매이지를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인데, 거기에 여러분도 동의하지요?"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샤르트르가 말이다. 샤르트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세계1차대전 이후인데, 1차대전 이전에는 지금의 선진국들이 잘 살 때인데, 그러니 젊은이들은 자기도 잘 살기 위해서는 기성 세대의 말을 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차대전으로 인해서 민간인을 비롯해서 1500만명이나 죽고 말았는데, 지옥도 그런 생지옥이 없다는 것이다. 생화학무기까지 개발되고 했는데, 그러니 젊은이들은 기존의 이 세상에 대해서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자기들이 지금까지 만든 것을 폭탄을 가지고 다 없애버리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왜 사랑하는 형제들을 전쟁터에 보내서 모두 다 죽게 만들고 하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을 향해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 질문들을 하게 되었는데, "당신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새로운 본질을 자기가 만들면 되는데, 그런데 기존의 본질에 너무 끌려간 것이 큰 문제입니다" 라고 한 것이 실존주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샤르트르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말이다.
그가 아주 큰 인기를 얻었는데, 그때부터 젊은이들의 인간성을 다 버려놓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IS' 라는 테러집단으로 간다고 하면서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떠나버리고 말이다. 거기서 총을 들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하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 돈이 있는, 새로운 피조물 !!
그리고 이런 실존주의 철학이 자본주의의 팽창과 연결이 되는데, 즉 "돈이 진리구나. 돈이 있어야만 사람으로 대우를 받고, 돈이 없으면 인간도 아니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에서 묻는 것은 "너희 집은 얼마나 잘 살지? 너는 무엇을 해서 돈을 벌 것인가?" 라고, 그런 것만을 자꾸 물으니, 즉 돈만 있으면 자기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밟아야 하는데, 돈은 가만히 있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말이다. 돈은 마치 일식집의 접시에 담긴 초밥처럼 돌고 도는데, 그렇게 돌 때 얼른 주워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담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가버린다는 말이다.
그런 대표적인 것이 '관피아' 라는 것인데, 어떤 정보를 남들이 알기 전에 먼저 알아서, 그것을 이용해서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혜택을 보고, 그런 정보에서 제외 된 사람들은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빌빌거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과 실존주의 얼마나 짝이 잘 맞는지 모르는데, 젊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
민주주의가 유럽에서 150년 이상이 걸렸는데, 그런데 동양에서는 불과 30년밖에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무엇이 빠졌는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동양에서는 자본주의가 먼저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이다. 중국이 그런 대표적인 경우인데 말이다.
민주주의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자본주의가 먼저 들어오니, 그러니 인간성은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돈만 알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돈만 된다면 인간성이고 의리고 뭐고 간에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개판이 되고 말았는데, 민주주의의 취지고 뭐고 간에, 그런 것은 다 날아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샤르트르의 주장이 복음적으로 보면 맞는 말인데, 물론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본질은 없다고 하면서 본질은 누가 채운다고 했는고 하니, 자기가 선택하면 그게 본질이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맞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부모가 육신을 통해서 자식을 낳기 때문에, 육신의 요소가 자식에게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의 정신 속에는 무엇이 그대로 전달이 되겠는가? 부모의 욕심과 탐욕과 소망이 고스란히 그대로 전수가 된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 !!
예를 들어서, 아브람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인데, 하지만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아브라함의 육신이 강제로 끊어져야 하는데, 즉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임신을 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하나님에게 모두 거부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만신창이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이삭을 낳더라도, 그 이삭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어떻게 하게 하시는가? 죽이라고 하시는데, 즉 "이삭은 너의 자식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삭이 먼저이고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나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깨달음인데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소망을 한다고 해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망할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마련해놓고, 그쪽으로 우리 자신을 유도해나가신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기대한 소망이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그게 광야인데 말이다. 그러한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심으로서, 그 만나가 내리는 세계가 바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세계라는 것을, 그것을 주님께서 계속해서 유도해주신다는 것이다.
◈ '팔복'의 경우에 !!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흔히 말하는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무튼 그 복의 내용을 보라는 것이다. "천국에는 TV도 있고, 가스레인지도 있다" 라고 하는 내용이었는가? 천국에 있는 아파트의 평수가 어떻게 되고, 가구는 무슨 가구이고, 그런 물질이 팔복이 나오는가? 비싼 소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삼겹살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팔복의 내용인가?
이 고통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흔히 소망하는 것들이, 즉 우리가 이 세상의 고통을 나름대로 해소하기 위해서 대처하는 방법들이, 그런 이 땅에 있는 풍성한 재물과 자기를 알아주는, 즉 자기의 외로움을 들어줄 수 있는 것들이, 그런 친한 친구나 몰입할 수 있는 취미생활과 같은 것으이 과연 팔복에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우리가 살펴보게 되면, 주님은 그런 복을 제시했는데, 그런데 제자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은 그게 왜 복인지를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5장을 보겠는데, 이것을 보고 나서 노아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심령이 가난한 것 자체가 곧 '복' !!
여기에 3절 말씀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것 자체가 곧 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심령이 가난하게 될 때, 손톱이 자기 손톱이 아닌 주님의 손톱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셨는데, 그런데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만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자아의 상상력을 자극하다가보니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자기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감사가 아닌 불만투성이고 짜증이라는 것이다.
왜 배우자가 함께 있을 때가 덜 외로운고 하니, 자기 짜증을 퍼부을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배우자가 죽고 나면 누구에게 스트레스를 풀겠느냐는 것이다. 자식에게 그렇게 하다가는 쫓겨나는데 말이다. 그러니 만만한 것이 배우자라는 말이다.
◈ 강아지와 해우소 !!
그래서 집에 강아지를 키우는데, 만만한 것이 강아지이고, 또한 성질이 나면 풀 수가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비해서 인형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데, 아무리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해도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아지는 화를 내면 어떻게 하는가? 꼬리를 내리고 숨으려고 도망을 가는데, 그런 것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식이 없는 집에 가면 강아지가 5마리가 되고 고양이도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동물농장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기 고통을 해결할 길이 없다는 말이다. 진리는 화장실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 화장실이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자기 분풀이를 할 수 있는 배출구가 또 하나 마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자식이 결혼을 하고 나면 그 빈자리를 고양이나 개를 키우면서 메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식 대용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빈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견딜 수가 없는데, 얽히고 얽힌 관계망으로 되어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개판인데, 즉 "내 마음 나도 몰라!" 라는 것이다. 최백호만 노래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ㅋㅋ).
◈ 정작 천국을 누가 가로막고 있는가?
아무튼 여기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을 때, 우리가 천국을 주님이 주지 않아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주어도 우리가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심령이 교만하니, 천국을 백날 주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마음은 천국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천국은 언제 왔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게 11절에 나오는데, 즉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천국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고 했는데, 그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서 뭐라고 했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천국을 몰고 오신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예수님 뒤에 비닐봉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 안에 영생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러니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 뒤에 죽음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손톱만큼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겨자씨의 믿음이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마음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할 마음은 태산과도 같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마음은, 즉 자기의 모든 것을 주님에게 넘겨줄 용의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존 육신이, 즉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이, 죄가 그것을 온 몸으로 거부하기에 말이다.
◈ '누룩' 설교의 경우에 !!
언제가 제가 '누룩' 이라는 설교를 했는데, 사실 그게 몇 주 째나 계속해서 되는데 말이다. 그 설교가 왜 어려운고 하니, "나는 야기에 있고, 누룩은 저기에 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누룩은 자기 안에서, 자기 속에서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속에 있는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요소를 처리할 수 없으니, 그런 설교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까 샤르트르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자기가 선택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누룩은 자기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고 말고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속에서 차고 올라오는데 어떻게 처리를 하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은, 자기의 소망과 희망을 취소해야 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기에 말이다.
진짜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는데(ㅋㅋ),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드는데,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런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멋들어진 희망사항을 늘어놓고 자랑하는데, 즉 "이번에 손자가 사법고시에 합격했어" 라고 말이다.
물론 그런 것이 현재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줄 수는 있는데, 그런데 그 뒤에 그 손자가 그만 뇌물을 받아서 판사도 되지 못하고 잘렸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또 하나의 고통이 된다는 것이다. 그게 소위 '벤츠검사' 사건이라고 말이다(ㅋㅋ).
◈ 차라리 심령이 가난하면 어떠하겠는가?
그러니 이 세상은 도대체 자기가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또 일어날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차라리 심령이 가난하면 어떠하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심령이 가난할 수 있는 동기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예수님은 "내가 왔잖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즉 "나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다면, 너는 이미 구원을 받았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니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는 대상에 합류가 되었어" 라는 것이다.
고함을 지르다보니 벌써 배가 다 고픈데(ㅋㅋ), 지금 예수님의 제안이 우리에게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있는데, 그것이 완전히 철옹성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나로 인해서 즐거워하겠습니다. 주님은 나중에 뵙시다" 라는 식이란 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꾼 꿈이 있는데, 그것을 상상계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나답다" 라는 것인데, 그런 상상계가 우리 속에 주인공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시큰둥하게 여기는데, 그것을 평생 가지고 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팔복을 주셔도 제자들은 결국 주님을 떠나고 말았는데, 팔복을 준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마귀가 자물쇠에 아예 삼중사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았기에, 우리는 결단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비자유의 원인이 되는데, 즉 "나는 나의 욕심과 탐욕으로부터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게 곧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천국에 가있고, 모세와 엘리야는 어떻게 변화산에 나타나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여기서 창세기 9장을 보겠는데, 20절부터 살펴보자.
(창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창 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 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포도주에 취한 노아 !!
거기에 노아 이야기가 나오는데, 20절에 보면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라고 되어있는데, 즉 노아가 포도농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는데, 그러면 노아가 왜 포도주를 마셨느냐는 것이다. 물론 맛이 있는데, 그러면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면 취한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는데,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취하게 되면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술을 마셔본 사람은 아는데, 기분이 좋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술을 입에 댄 적도 없는 사람은 술이 왜 나쁜 것인지도 모르는데, 말을 하고 나니 좀 이상한데, 마치 술을 마시라는 소리처럼 들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ㅋㅋ).
만약에 "술을 마시고 나서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을 알아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경우도 그렇게 해야하는가?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튼 노아서 포도농사를 지어서 포도주를 마셨는데, 아마 모르기는 해도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는데 고통이 있었을 것인데, 그래서 얼른 질이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마심으로서 지금의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도 부모로부터 스스로 자기를 방어하는 육신의 죄성을 그대로 품고 있기에 말이다.
마치 아담이 자기 수치를 자기 힘으로 숨기기 위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하체를 가리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고통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가 인간의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21절에 보면,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라고 되어있다는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저의 논리가 좀 어렵기 때문에 물어보겠는데, 즉 "이게 복인가? 복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들어 누운 게 말이다.
이것은 보기를 드려도 어렵지 싶은데, "1번, 복이다. 2번, 복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이번에는 답이 앞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복이 아니라고 여긴 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바로 노아의 자식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