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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셸링 150414강의[신학]

셸링 150414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한윤범(IP:14.♡.134.23)

15-04-17 10:34

201504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2-셸링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셸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셸링은 1775~1854년 독일이라고 돼있지요. 이 사람은 피히테와 그 뒤에 있는 헤겔 사이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입니다. 철학적으로 설명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이성적으로 설명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여러 번 강의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때는 성경 자체에서 이야기한 전통적인 해석을 배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 없으면 무슨 계시가 있느냐? 그 사람들은 성경을 계시로 인정해요. 그런데 그 성경은 좁은 성경이고 성경은 책이거든요.

그들이 말하는 성경은 이겁니다. 대자연입니다. 대자연 속에 일어나는 모든 변동사항, 변동, 변화. 이게 계시에요. 대자연 속에 인간도 포함되겠지요. 자기 자신도 포함되겠지요. 사람들이 가만있는 게 아니잖아요.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되는 겁니다. 온 천지가 하나님의 계시인데 왜 교회에서는 성경만을 계시라고 고집하느냐 말이죠. 이게 철학자들의 불만이죠. 사실은 철학자들의 불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교인들이 은근히 갖고 있는 불만일 수 있어요.

다시 할게요. 이 사람들이 성경을 무시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을 계시 아니라고 한 게 아니고 대자연 속에 포함돼있는 성경도 계시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성경을 썼던 저자들이 있잖아요. 인간이죠. 그럼 인간은 대자연에 속하잖아요. 대자연에 속한 인간이 어떤 저자들이 모여서 책을 썼다면, 이것만이 계시라고 한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성경만을 계시라고 한다면 성경 외에 다른 모든 변화나 변동, 대자연의 있음, 존재, 활동, 모든 것을 놓치게 되잖아요. 놓치게 되면 성경만 고집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겠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포함해서 다른 것까지 다 아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겠어요? 어느 쪽이겠어요.

이것이 셸링이라든지 피히테, 헤겔 이런 철학자들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일반 교인석에 앉아있는 교인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불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거기는 장로가 있지요. 성완종 장로도 거기에 있잖아요. 그 사람이 교회에서 성경공부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잖아요. 이 대자연 속에서 경남기업을 갖고 있으니까 자기는 대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단 말이죠.

그러면 목사가 교회에서 성경을 펴놓은 그건 네 할 일하란 말이죠. 그것만 있는 게 아니란 거예요. 자기가 경남기업을 하면서 알았던 모든 변동사항, 활동, 이것도 계시인 거예요. 홍준표에서 1억 주고 하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는 겁니다. 이것 주지 않으면 기업 활동이 안 된다는 사실을 목사는 모르지요. 목사는 성경만 아니까 생각하는 게 좁아서 그게 신의 계시인 줄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그런데 뇌물 주니까 모든 게 통하더라는 이것은 목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자연계시 속에,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자기가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장로로써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물론 자살로 끝났지만.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 성경만 계시라고 고집하는(요새는 그런 목사도 별로 없지만) 목사로서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성경보다 세상이 넓은 데 왜 좁은 것만 계시라 하고 나머지는 계시 아니라고 한다면 나머지 여기는 하나님이 안 계신단 말인가? 이렇게 반발 들어올 게 뻔하거든요.

더 나가서 뭐냐 하면, 두 가지에요. 하나는 모든 이가 목사 되어야 하는가? 목사가 되어야 옳은가? 두 번째는 성경만인가, 성경만 진리고 다른 데는 진리가 없는가? 두 번째 같은 경우에는 성경을 통해서 시계를 만들어내고, 컴퓨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들어냈어요? 자동차, 컴퓨터, 증기기관, 기차 어디서 만들었어요? 목사가 만들었어요? 목사가 성경 보니까 자동차 설계도 나와 있어요? 없잖아요? 그럼 이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대자연의 어떤 특정 질서가 있는 겁니다. 물론 질서가 있다는 이것을 오늘 공부할 셸링이 다 언급을 해요. 될 수 있는 대로 철학적 용어를 사용 안 하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금 대자연의 질서가 있어요. 목사는 성경 속에 그 질서가 나와 있느냐? 성경 속에는 아무리 봐도 질서가 안 나와 있단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으로 국한 될 수 없는 거예요. 성경 속에는 인간을 천국 보내는 그 질서는 있을지언정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서 날마다 생존을 보장받는데 필요한 질서, 계시. 질서란 말을 썼지만 사실은 질서를 하나님의 계시, 뜻.

하나님의 뜻은 대자연 속에 규칙적인 반복적인 어떤 법칙이 있고요. 그 법칙을 개발해서 자동차나 증기기관, 시계를 만들었잖아요. 만들어서 편리하게 써서 그걸로 인하여 65억 인구가 먹고 사니까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고 신의 뜻이라면 신의 뜻이 어떻게 성경 안에만 국한돼있다고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우격다짐을 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철학은 신학보다 더 넓게 포괄적으로 생각해줘야 된다는 겁니다. 셸링, 헤겔 다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 그게 옳으냐고 해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차를 살 때 차 값 말고 다른 비용 하는 것이 옳으냐고 하는 거예요. 성경 외에 이쪽에서는 옳으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획득할 수 있느냐고 물어요. 예를 들어서 콩나물을 파는데 “콩나물 얼마입니까?” “삼천 원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졌어요? 당신이 콩나물 파는 게 옳으냐? 그리고 내가 콩나물 사서 오늘 저녁에 콩나물국 먹는 것이 옳으냐는 그 문제가 빠졌지요. 왜 빠졌을까요? 콩나물국 먹는 게 죄입니까?

부산공부하면서 늘 느끼는 게 그거에요. 사회생활 많이 하는 목사가 돼서 그냥 성경 자체만 아니라 두루두루 많이 알고 계신 거예요.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것이 긍정될 수 있고 정당화 될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잖아요. 내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 책임 아니라는 쪽으로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저녁에 콩나물국 끓이는 것이 옳습니까? 이걸 성경적으로 판단해야 돼요. 이게 옳지 않거든요. 그러면 콩나물국 말고 쑥국 끊이면 옳습니까? 이건 제가 여러 번 강의했어요.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인간이 옳다, 그르다는 판정기준에서 인간은 이미 배제된 상태입니다.

한 가지 성경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욥기에 욥과 욥의 친구가 있는데 참 재미있는 것은 욥의 친구가 하나님과 욥의 관계에서 배제돼있지요. 빠져 있잖아요.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들은 계속 하나님이 어떻고, 하나님이 어떻고 하면서 하나님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 보기에 같잖지도 않지요. “너, 뭐야? 난 지금 욥과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개뿔도 하나님을 모르지만 욥의 친구들은 입만 열면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정당하다, 하나님은 거룩하다, 하나님은 온전하다, 하나님은 죄를 모른다, 욥아,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다. 이미 욥 보기에도 같잖지도 않고 하나님 보시에도 더더구나 마찬가지인데 욥의 친구들은 그걸 모르지요.

욥의 친구들은 옳다, 그르다는 기준에서 이미 배제당한 거예요. 배제 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래.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뭘 알아. 우리는 입만 다물고 있겠지.” 이렇게 이야기 안 하잖아요.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정하시고, 하나님은 어떻고, 하는 그것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에게서 배제된 인간이 입만 떼면 하나님 이야기라. 그러면 그 출처가 어디에요?

아까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름이 뭐라고 했어요? 이반 일리치. 바로 그 사람이 주장한 게 그겁니다. 모든 신은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공동체에서 나왔어요. 무슨 공동체? 인간 공동체. 인간의 사회에서 나왔거든요. 인간의 사회는 무엇의 일부냐? 잘 들으세요. 대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럼 뭐가 계시입니까? 대자연이 계시에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성경은 뭐냐?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대자연에 있는 모든 활동을 과연 제대로 활동했다고 정당화시키는 빌미로 제공된 것이 성경이라고 보는 겁니다.

첫 번째 계시는 대자연이고, 두 번째 계시가 성경인데 성경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닌 이유는, 현재 우리가 대자연 속에 살아가는 이것을 신의 계시라고 알고 있는 우리에게 성경적으로도 당연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성경이 활용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목사가 목회하는 것, 성경에 있습니까, 대자연 속에 있습니까? 빨리 이야기하세요. 대자연 속에 있지요. 대자연 속에 있으면서 목사는 성경으로 뭘 자꾸 거론하느냐 하면, 내가 목회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 당사자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욥의 친구들에게 너희는 나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그 소리 듣고 화가 더 나는 겁니다. 너도 밥 먹고 살고 나도 밥 먹고 살고, 너도 신을 알고 있고 나도 신을 알고 있고, 너도 신의 덕분으로 살고 나도 신의 덕분인데 너와 내가 뭐가 다른데? 다를 게 뭐가 있는데? 왜 우리는 모르고 너만 알아야 되는가? 결국 정답은 그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택함과 동시에 안과 밖을 욥을 통해서 경계선을 설정해놓은 거예요.

이번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지젝이란 사람이 셸링을 굉장히 유념하게 본 것은 바로 그 점이었어요. 일반적으론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셸링은 하나님 자체 내에서 둘로 구분했다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철학자로서는 생전 처음이에요. 그런 적이 없었어요. 하나님은 통일돼있지 하나님이 둘로 나눠져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이 생각을 그대로 이어서 나온 게 헤겔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 사상이에요. 헤겔의 주제는 성육신이라 했지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신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 속에 함축이 돼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지 그 외에 하나님은 인간이 된 하나님에 비해서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헤겔 다음에 포이에르 바하란 사람은 신을 인간의 투영이라 했지요. 투사, 투영하는 겁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다. 기투란 존재라고 했는데 포이에르 바하는 투영했다고 보는 겁니다.

모든 것은 신이 만들었고 하나님의 계시는 대자연에게 있으며 성경은 그 중에 일부고 성경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현재 이 대자연의 계시가 왜 정당한지 보존하기 위해서 이런 게 있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에서 적합하다고 언급한 것의 욥의 친구들의 사상을 예를 들었지요. 이제 그 연결고리를 아시겠습니까?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거론하고 하여튼 그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없이 못 사는 그들이 하나님한테 배제됐다는 생각을 감히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입만 떼면 하나님인데. 하나님 덕분으로 살고 하나님 은혜로 살았다고 그런 이야기하는 그쪽이 하나님에 의해서 배제됐다는 생각을 상상이나 하겠느냔 말이죠. 못하지요.

셸링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일단 성경에 대해서는 몰라요. 성경의 독특함은 모릅니다. 성경을 빼놔도 이 대자연이 하나님이 뜻이라는 가운데서도 충분히 신이라는 개념을 자체를 변경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그걸 파악하고 분석해나가는 겁니다. 어떻게 분석하느냐? 지금부터 저를 따라오시면 되겠습니다.

신이 대자연에 있다. 대자연 속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대자연 속의 흔들림, 움직임, 그리고 나의 흔들림. 이런 움직임 속에서도 신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셸링은 증명해내려고 해요. 인간 속에 아무리 환경이 바뀌고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인간 속에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고 본 겁니다. 첫 번째 논리로 그걸 셸링은 자유라고 했어요.

셸링은 자유를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만약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차를 얻었다고 칩시다. 내가 자유롭게 일해서 자유롭게 행동해서 또는 길 가다가 우연히 주웠다고 칩시다. 그리고 이것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거예요. 차가 참 맛있네, 향기 좋네. 이때 이 사람은 뭘 놓친 겁니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그것에 의해서 좋아하는 내가 종속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차가 좋잖아요. 이것보다 못한 차가 오게 되면 뭘 그리워하게 됩니까? 그걸 원하게 되었어요. 그게 맛있었는데. 천팔백 원짜리 명인 단팥빵이 좋았는데. 명인이 국산 밀가루로 만든 비싼 단팥빵을 살 수 없다면 그만큼 결핍이 생기잖아요. 그 결핍은 그놈의 천팔백 원짜리 빵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것 때문에 기존에 오백 원짜리, 이백오십 원짜리 단팥빵 먹을 때마다 그리워지는 거예요. 그게 종속이니까 일종에 매인 거예요. 그게 자유를 놓친 게 되는 겁니다.

이걸 정리하게 되면,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내가 생각되어진 것에 도달하게 되면 생각하는 나를 생각되어진 것에 얽매이기 때문에 나는 순수한 내 자유를 상실해버린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인간의 복잡한 삶은 한 마디로 끝내버렸어요. 불교의 복잡한 교리가 한 방으로 끝난다니까. 내가 원했다는 것은 기존에 생각하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데 그게 구입하기 여의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해외직구할 수도 없고, 그때부터 초조한 거예요. 그러니까 도대체 나의 완벽한 자유로움을 누가 빼앗아 간 거야? 한 평생 인간이 살면서 인간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는가를 이 짧은 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다 해버렸어요.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고 일반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오십 명 나오던 교인이 열 명 나오면 오십 명 때가 그리운 겁니다. 오십 명 때는 그리워할 줄 몰랐지요. 오십 명 때는 백 명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경제가 나빠져서 백 명은커녕 오십 명에서 열 명 됐을 때 갑자기 자기가 오십 명이냐, 열 명이냐 하는 숫자에 놀아나는 자기 자신이 불쌍해지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화가 나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이 내가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절대자고 자유롭지요. 셸링은 하나님의 자유가 우리 속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유로우면 우리가 완전한 자유인이어야 되겠지요. 지난 피히테 할 때 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잖아요. 성육신이 뭔데요? 하나님이 뭐 됐다? 하나님이 개 됐습니까, 거미 됐어요, 코끼리 됐습니까? 하나님이 사람 됐잖아요. 왜 그래야 돼야 되는가요? 철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유라는 말이에요. 신학에서도 그게 하나님의 자유라는 겁니다.

그러나 뉘앙스가 달라요.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에 의해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왜 만들었느냐?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없다는 그것이 신학 쪽에서 교회 쪽에서 목사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맞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모든 것은 주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불평하지 마라. 이쪽은 신학 쪽이라니까요.

그러나 철학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왜 코끼리 안 되고, 왜 우리를 거미로 안 만들고, 사자로 안 만들고, 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자유지요. 그럼 철학에서 잘 됐다고 보는 겁니다. 왜? 그 자유가 우릴 떠나서 갈 데 없지요. 그러면 나의 자유가 곧 신의 자유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뭘 할 것인지 교회 가서 목사한테 신학자한테 물을 필요가 없어요. 신의 자유가 있다면, 내가 계획하는 것, 앞으로 뭘 하고 어떤 직업을 갖고 돈벌이한다. 이것도 신의 뜻이기 때문에 이걸 긍정할 수 있는 겁니다. 신이 자유를 줬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자유로워라는 것이 철학이고, 신이 자유를 줬기 때문에 신에게 매이자는 것이 신학이라니까요. 같은 말인데 반대잖아요.

복음을 아는 사람은 어느 쪽입니까? 복음을 아는 사람은 둘 다 틀렸어요. 그 신이 우상이기 때문에. 둘 다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아요. 나는 하나님 믿기 잘했다. 하나님 뜻을 따르면 구원시켜 주겠지요. 둘 다 노림수가 있어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신학은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하나님이 구원시켜줄 거지요. 죽어서 천국 보내줄 거지요. 이건 신학이나 교회에서 하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 속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대로 하기를 사명으로 부여받은 거예요. 철학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 이해하시지요. 신학은, 제가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고 주의 뜻대로 똑바로 하게 되면 천국 보내줄 거지요. 둘 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요. 둘 다 자아절대성입니다.

다시 본 논리로 돌아오겠습니다. 셸링이 이야기했듯이 인간에게 있는 자유는 내 자유를 사용해서 얻을 수 있는 그걸로 아는 순간 나의 자유는 부딪친다는 겁니다. 셸링이 ‘부딪친다’는 말을 했어요. 왜 바보같이 내가 이걸 원했는데 원하는 순간 나는 왜 여기 얽매이느냐 말이죠.

우리나라 획기적인 여성소설이 [자유부인]이잖아요. 남편에게 매이지 말고 제목 그대로 자유를 찾아 나가라. 자유란 말을 사용할 때 뭘 전제로 합니까? 매여 있다는 거죠. 셸링은 말합니다. 어디서부터 자유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어디서부터 자유롭게 되면 자유롭게 되어도 항상 어디서부터라는 것이 늘 의식되잖아요.

쉽게 예를 듭니다. 내가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데 돈을 내니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착각해서 “아저씨, 돈 받았어요.” 그 소리 듣고 돈 낸 줄 알고, “그래요? 요새 정신이 없어서.” 그리고 한 65일 지나서 가만 생각해보니까 아르바이트 학생이 착각한 거예요. 돈도 안 주고 물건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물건 산 사람은 편의점에 가서 돈 줄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본인이 이미 받았다는데 돈을 왜 줍니까?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 편의점에는 안 가지요. 65일 지났는데. 그게 뭐냐 하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말이죠. 분명히 돈 안 주고 자유를 얻었는데 켕기기는 왜 켕기느냐 말이죠.

서른 살 먹은 청년한테 65세 된 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같은 65세 먹은 아버지 초등학교 동창생 아저씨가 있다면, 똑같은 마음이 듭니까, 다른 마음이 듭니까? 같은 65세 남자라도 한쪽은 아저씨고 한쪽은 아버지니까 동일한 감정이 아니지요. 왜 동일한 감정이 아니지요? 둘 다 타인인데 내 몸이 아닌데 왜 아니지요? 이미 과거에 얽히고설킨 게 있잖아요.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있잖아요. 그게 자유냐 이 말입니다.

신은 절대로 안 매이지요. 신의 자유가 우리 속에 왔잖아요. 우리는 이론상 안 매여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아버지 챙기고, 동생 챙기고, 흔히 며느리 하는 것처럼 시아버지 치매 걸리면 며느리 값 다하고(요샌 그런 며느리도 드물지만) 이게 어디에 매이는 거잖아요. 왜 매입니까? 매이는 게 무슨 자유입니까. 그래서 셸링은 말합니다. 어디서부터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나온다 할지라도 먼저 있었던 장소가 나한테 남아있는 이상 진정 절대적 자유는 아니다.

그게 피히테의 한계라는 겁니다. 피히테가 셸링의 선배거든요. 피히테가 뭐라고 했던가요? 인간의 모든 인식은 자아인식이다. 눈에 보이는 해와 별, 전부 다 자아인식에서 나온다. 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아인식이 스스로 부정하면서 대자연의 존재, 자기 반대편에 있으면서 그걸 반성하면서 반성을 통해서 신이 나온다. 이게 피히테가 이야기한 겁니다. 나중에 피히테의 셸링의 차이점을 물어볼 거예요.

피히테는 모든 생각은 자아에서 나오는데 그러면 신은 어디서 나오느냐? 자아는 유한자거든요. 한계가 있어요. 절대 무한, 확정, 뭐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음성 데이터만 무한이지 다른 건 아니라는. 인간은 유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반성을 통해서 절대 자아성을 회복한다는 게 피히테거든요.

그런데 셸링과 피히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은 인간의 인식에서 나온다는 건 맞는데 인간에게 반성을 통해서 절대자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반성이 뭡니까? 비춰보는 것. 저 사람은 왜 내가 아니지? 저 사람은 아버지고 나는 왜 아버지가 아니지?

이상이란 우리나라 모더니즘 작가 있잖아요. 한 아이가 무섭다고 그래요. 두 번째 아이가 무섭다고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이런 시가 다 있나. <오감도>란 시집에 보면 나오는데, 아이가 무섭다고 그래요. 남의 아이는 내가 아니잖아요. 남이면서도 무섭다고 그래요, 하는 그것에 대해서 내가 관심을 왜 가질까? 저 사람이 내가 아닌데 내가 아닌 것에 관심은 왜 가질까? 그것은 그 아이의 무서움에 대해서 현재 나는 어른이다. 나는 안 무섭다는 자기 자신을 정립시키는 겁니다.

오늘 기차 타고 보니까 어떤 아가씨 둘이 부산에 면접을 보는 모양이라. 깔끔하게 차려입고. “아빠, 주민등록증 안 가져왔으니까 서랍에서 꺼내서 찍어서 보내라.” 신분증 없는 사람은 면접 볼 수 없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라. 그 딸이 취직을 할 때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무엇을 의식하며 취직하겠습니까? 나는 우리 집에 있는 아버지께서 내 취직을 보고 기뻐할만한 자리에 취직해서 그 다음에 그걸 누구한테 자랑한다? 집에 있는 아버지한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은 그런 직종에 지금 면접 보러 가는 게 분명해요.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알리지요.

이건 뭐냐 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갈 때 왜 목사는 깡패 안 됩니까? 남들 욕할까봐. 그런 아버지에 나는 실망입니다. 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자유라며? 절대적 자유라며? 그런데 직업은 마음대로 안 합니까? 나를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지요. 그게 자유입니까? 그걸 피히테는 유한성이라고 했단 말이죠.

셸링이 피히테 후배거든요. 셸링이 보기에 피히테의 한계로 보는 겁니다. 맨날 반성해야 되고. 반성이란 잘못했다고 하는 게 아니고 자기와 아닌 것을 경유해야 내가 또 새롭게 정립되는 과정을 의미하거든요. 만약에 어제 내가 이런 인간이라고 여겼는데 오늘 갑자기 누구와 싸우면, “나한테 그런 나쁜 요소가 있었어.” 그러면 어제는 무효가 되고, “나는 이런 나쁜 짓이 있었다. 이런 일에 성질내는 인간이다.” 그걸 다시 집어넣은 오늘 새롭게 정립된 나라면 내일 되면 또 달라요. 그게 무슨 신이 만든 인간의 절대성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철학에서 신이 인간이 됐다는 말의 의미는 흔히 성경에 있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의미와 다릅니다. 자아의 절대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네 자신의 절대성을 하나님 쪽에서 원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에서는 오히려 절대성을 줬음에 불구하고 절대성을 도로 신에게 바치고 있으니까 문제라는 겁니다. 철학에서 보기에.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철학자들이 너무 교만하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목사는 혹시 모르겠습니다만 그 교회 교인들은 목사 말 편드는 것 같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어떻게 됩니까? 이런 철학자를 응원하고 철학자의 말에 동의하는 식으로 평소에 그런 식으로 생활합니다. “목사님,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내 일은 목사가 관여할 게 아닙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벌써 철학자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면 피히테가 그렇게 반성해서 자기를 아는 것이 실제라고 했는데 셸링은 그게 어째서 아닌가라고 한 거예요. 셸링이 보기에 피히테가 뭐가 잘못됐는가 하면, 피히테는 자아라고 할 때 경험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이걸 지난 시간에 피히테는 자아를 행동에서 나왔다. 같은 말이에요. 경험에서 나와요. 인간의 경험은 유한한 경험이에요. 신체적으로 유한하잖아요. 절벽에 가보세요. 벌벌 떨잖아요. 알 수 없는 공포가 오잖아요. 뾰족한 칼 앞에 두려움을 느끼죠. 왜 두렵습니까? 자기가 만약에 딱딱한 금속이라면 두려움 느끼겠어요? 찔러라. 칼만 나가버리죠. 인간은 왜 날카로움 앞에 벌벌 떱니까, 절벽 앞에 왜 떨어져요? 이게 신체적 유한성이에요.

두 번째는 현실적으로 유한한 게 뭐냐 하면, 인간은 현재 브라질 상파울루에 살고 있는 이층 집 아줌마가 뭘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르지요. 여기서 해운대 가로수에 파리 한 마리가 뭐하고 있는지 알아요? 모르지요. 지금부터 천 년 전 고려시대 때 고려 임금이 4월 이 날에 뭘 했는지 아십니까? 모르잖아요. 그런 것을 다 종합해서 알아야지. 도대체 진리를 우리가 안다는 것은 그런 일까지 다 종합해서 알아야지. 그것도 모르면서 알기는 개뿔 뭘 알아. 코앞에 있는 것도 모르는데.

그래서 피히테는 자아의 절대성이란 내가 나를 모르고 내가 유한하다는 그러한 것을 나 말고 다른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면서 비로소 반성하는 그 자체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신의 요소가 들어있다고 본 겁니다. 믿음 최고죠. 그렇잖아요. 내가 부족하며 내가 못났으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에게 맡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안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거냐. 이게 바로 피히테잖아요.

그런데 이걸 셸링이 지적한다고요. 우와, 똑똑하네. 네가 지금 경험을 문제시했다. 다시 말해서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냄새 맡는 것이 개보다 나아? 몰라요. 이런 못난 인간이. 네가 빠르기가 시라소니보다 빨라? 아닙니다. 이런 못난이. 네가 오백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생각한 걸 알아? 모릅니다. 이런 못난이. 하나님께서 그런 것으로 못난 걸 따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어디서 따지느냐 하면, 본인이 완벽하다고 경험적으로 부족하니까 부족한 것을 키우는 거예요. 나는 부족하다, 나는 미흡하다, 나는 완전치 않다. 그렇다면 완전치 않다는 말은 무슨 뜻이다? 완전한 것이 간격을 가지고 완전한 것은 따로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못난 것에서 출발해서 무한한 것에 도달할 때 무한 입장에서 나는 못났다. 그만큼은 못났을 것이라는 인식 자체가 인간의 경험의 한계 안에서만 나올 생각이란 말이죠.

그게 착각이라는 거예요. 셸링이 보기에 피히테가. 못났습니다, 부족합니다. 네가 보기엔 굉장히 겸손하지. 내가 보기엔 교만이야. 왜? 네가 못났다는 증거를 따로 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절벽에 가면 벌벌 떨 정도로 못났습니다. 그것도 증거냐? 그러면 5센티짜리에 벌벌 떠나? 안 떨지요. 개미도 안 떨겠다. 50센티면 개미는 떨 거예요. 떨어지면 다치니까. 그러니까 개미가 보는 세계와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정도에 따라서 벌벌 떨고 안 떠는 게 있다는 말은 확정된 진리의 가입하기가 뭔가 모자라요. 부족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셸링이 보기에 절대성은 뭐냐? 경험이 아니고 이걸 직접, 직관이라 해요. 네가 경험치 못했지만 이미 네 속에 절대적인 자유가 있다는 겁니다. 피히테는 신을 직감적으로 안다고 했는데 직감이 아니고 감각이 아니고 직관이에요. 인간이 신을 안다는 데에는 어떤 증명도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증명하게 되면 오히려 반칙이 돼요. 증명하려면 경험한 것까지 끌어내야 되는데 경험한 것을 배제하니까 직관한 거예요.

그럼 이건 반성이 필요 있다, 없다? 반성에 들어갔을 때 신을 알지 말고 반성 없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 자유를 줬다고 인간은 그 누구도 직업과 상관없이 어떤 지식과 상관없이 학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그걸 알게 돼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알게 되느냐? 피히테는 경험적 자아로부터 출발했지만 셸링은 인간보다 더 넓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절대적인 것이 포함돼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대자연에 자유가 있으니까 이 대자연 속에 인간이 일부니까 대자연 속에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없을 리가 없으니까 마찬가지로 인간도 절대 자유에 속하는 겁니다.

그걸 아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셸링에 의하면 부딪침이라는 거예요. 부딪침과 반성의 차이. 반성은 이게 아니라고 자기로부터 온전한 것을 찾기 위해서 나아갈 때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는 기준을 아니까 나오는 거잖아요. 그러나 부딪침은 뭡니까? 내가 돌에 부딪쳐야지. 이래서 부딪칩니까? 내가 가다가 맨홀에 빠져야지 해서 빠지는 게 아니잖아요. 난데없이 빠지지요. 그렇게 빠질 때 비로소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어요? 인간은 자기가 이미 아는 것에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고 했지요. 알기 때문에 천팔백 원짜리 앙금빵이 먹고 싶어서 매였는데 이건 꿀빵도 아니고 앙금빵도 아니고 이상한 빵인데 맛있어. 그건 반성이 아니고 부딪침이죠. 기존에 매여 있는 것은 종속된 것은 자유가 아닌데 뭔가 부딪칠 때 부딪쳤다는 자체가, 나는 이미 내가 예상한 범위보다 더 큰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마음에 듭니까? 어느 것이 절대 자유의 마음에 들어요? 맨날 피곤하게 반성하고 회개하고 벌벌 떨었는데 나는 저걸 원했는데, 어떤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에 그 남자가 너무 잘 되면 저 남자를 붙드는 건데.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그 남자와 결혼해야 되는데 못했다. 갑자기 그 남자가 사법고시 합격해서 판사로 임용됐다고 할 때 아무리 의사와 결혼해서 이미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어도 그 마음속에는 그 남자가 좋았다 하는 것. 실제로 그 남자 만나봐야 머리 빠지고 되도 않는데 지금 문제는 첫사랑의 남자를 잊지 못하는 그 아줌마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요.

그런데 현재 의사와 결혼했는데 우연히 생판 모르는 아저씨가 와서 사랑한다고 하면, “그래 나는 자유부인이야.” 갑자기 뭘 느낍니까? 부딪침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 거예요. 저 집사가 이번 주일에 꼭 참석해야 되는데 오지도 않아. 목사가 그 집사한테 매여 있어요. 주일 낮 설교에서 오른팔이 안 나오니까 목사가 앓아누웠다고 했지요. 그런데 생판 모르는 아저씨 둘이 왔다. 이러면 뭘 느낍니까? “그래 맞아. 나는 신의 종이야. 하나님의 사자 맞아.” 이렇게 자유를 느낀다니까요.

보세요. 셸링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입니까. 피히테에 대해 누구도 반박 못할 줄 알았는데 반박하잖아요. 절대적 자유. 이 절대적 자유를 분석해가는 거예요. 우리가 신을 믿어서 자유롭다? 아니. 우리가 신에게 복종해서 자유롭다? 아니. 신의 말씀을 따라서 자유? 아니. 그 문제는 내가 나한테 묻지 말고 신 자체 안에 뭐가 있느냐? 신 자체 안에 있던 그 무엇에 의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자유가 주어졌다고 보는 겁니다.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합시다.

한윤범(IP:14.♡.134.23)

15-04-17 10:35

20150414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2-셸링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교재 봅시다.

첫 번째 끝의 이야기하면 하나님 내부에 균열이 있다는 거예요. 셸링은. 그것을 지젝은 무의식이라고 봤는데. 의식은 피히테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안다. 거기에 대해서 셸링은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셸링은 무의식이란 말을 안 했는데 지젝은 말하기를 최초로 무의식에 대해서 언급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무의식이란 말은 의식에서는 알 수 없는 거다. 알 수 없으면 없잖아. 알 수 없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잖아, 라고 할 때 알 수 있음의 세계가 균열되면서 비로소 내가 미처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부딪침이 올 때 그건 바로 무의식의 세계에 속했다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꿈같은 것.

꿈을 꿈으로서 잠자고 있지 않은 것은 현실이고, 꿈은 현실이 아닌 것으로 보잖아요. 그게 바로 일반인들의 잘못된 생각이에요. 꿈의 세계가 현실이고, 꿈을 꾸게 만든 그것이 꿈의 세계에요. 반대가 돼야 된다고요. 우리가 점심 먹으러 갔다고 조용한 것, 이게 꿈이라니까. 일하는 사람이 밤에 잘 때 꿈꾸잖아요. 이게 현실이라니까요. 반대가 돼야 돼요. 왜냐? 이쪽에 있는 신은 인간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신이에요. 나 잘났지요. 이건 신을 섬기는 게 아니에요. 신에게 무조건 내 편 돼달라는 자기 섬김의 일종이에요. 신을 우회로 해서 자기 섬기는 거예요. 진짜 신은 그런 인간을 박살내는 신이에요. 그걸 찢어버리고 균열시키는 거예요. 네가 미처 이런 걸 몰랐지. 이게 신이에요.

하나님이 인간 되는 걸 누구와 사전에 의논한 적 있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이 알아서 인간 됐지요. 그럼 누가 난처하고, 누가 당황스럽고, 누가 어리둥절합니까? 인간이 신을 찾아가야 되지요. 그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신과 만남인데 신이 인간이 돼버리면 뭐가 무산 돼버리느냐 하면, 인간이 찾아가는 모든 것이 다 헛짓이 되고 말잖아요. 그것을 지젝은 언급하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신은 우상이다. 인간은 우상을 신이라고 함으로써 꿈을 현실로 바꾼 거예요.

그런데 우상이 아닌 진짜 현실, 그걸 실재계라고 하는데, 현실이 꿈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를 균열시킴으로 말미암아 전의식과 무의식이 있는데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전의식까지만 알고 무의식은 몰라요. 그런데 이것이 밑에서 마그마처럼 째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 토대 위에 있다고 확인되었어요.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무의식을 행동의 90%로 보고 의식은 10%로 봐요. 실증적으로 과학적으로 무의식이 90%고 의식이 10%에요.

어떤 행동을 하고 말을 할 때 의식된 게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온 것을 의식세계에서 약간의 편집을 하고 째고 자르고 남을 기분 안 나쁘도록 하는 겁니다. 이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징계, 재미있지요. 상징계는 흔히 말하는 현실인데, 상징이 뭐예요? 실체가 아니란 말이에요. 태극기가 우리나라입니까? 아니잖아요. 하지만 태극기는 뭘 상징한다? 우리나라를 상징하지요. 태극기에 손 얹지는 것 안 해도 그 사람 대한민국 사람이에요. 독일에 광부로 파견하려는데 광부 한 경력이 없어서 주저하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심 고취라 해서 독일에 파견됩니다. <국제시장> 영화에 보면.

상징 세계란 누구의 상징이냐 하면, 내가 만든 상징이 아니고 이미 같은 꿈속을 헤매고 있는 동료들이 조성해놓은 상징 중에서 내가 하나에 강제로 강요당한 거예요. 여기서 주체가 생겼는데 인간의 주체는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당한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 무의식 세계를 셸링으로부터 최초로 시작했다고 지젝이란 학자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셸링이 어떤 점에서 신의 세계의 분열을 언급하느냐? 그거는 도발적인 자연세계가 일어납니다. 도발적인 자연세계라는 것은, 화산은 어떻게 돼요? 폭발하지요. 태풍이 일면 파도는 움직이죠. 그것 사람한테 물어봤습니까? 갑자기 소나기 오고, 갑자기 산사태 나는 것, 이건 사람한테 안 물어보지요. 며칠 뒤에 산사태 올 테니까 피하라는 게 있습니까? 없지요. 이것은 자연의 폭력이에요. 곧 우리 보기에는 신의 폭력입니다. 물론 신의 폭력이란 말을 썼습니다만 좀더 구분해서 보면 신화의 폭력이라고 쓸 수 있는데 나중에 지젝이 구분하는데, 어쨌든 간에 대자연이 우리가 보기에 마치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격변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대자연을 뭐로 봤습니까? 질서체계로 봤잖아요. 질서체계에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질서법칙을 통해서 농사를 지었고 증기기관도 만들고 과학적 수학적 논리를 따져서 실제로 낙차를 통해서 수력발전도 일으키고 전기로 밤중에도 가로등을 밝히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만 있은 게 아니고 대자연은 스스로 움직일 때 이 대자연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신이 만들었거든요. 신이 내부적인 어떤 횡포같이 보이고 무질서하게 보이고 인간의 손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난동을 부릴 때 처음부터 신의 내에 분열이 있다고 셸링은 보고 있습니다. 교재의 단어가 너무 압축이 돼있기 때문에 설명만 해드릴게요.

그러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이미 절대적인 자유를 부여받았어요.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어떤 감정을 추스르고 다 할 수 있습니까? 인간 속에서 정숙하게 삽니까? 어떤 일에도 성질 안 내고 이런 게 있어요, 없어요? 화나지요. 그게 바로 인간이 오히려 신을 닮았다는 증거라는 겁니다. 셸링이. 그것 봐. 갑자기 성질나지. 갑자기 차 끼어들면 화나지. 그게 바로 신을 닮은 거야.

그동안 인간들은 악을 줄이고 선을 행함으로써 내가 하나님답다는 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했는데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 속에 악이 있다는 그것이 바로 네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의 절대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적으로 예수님이 나타날 때 예수님이 일을 일으키고 사건을 일으킬 때 그 현장에 누가 나타나죠? 마귀죠. 내가 온 것은 귀신을 쫓아내려고 왔다고 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활동은 뭐의 시선을 능가합니까? 지금 인간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봐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인간으로 봐요. 네가 나한테 뭘 해주겠는가? 이걸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그것이 어디서 나왔다? 공동체 사상이죠. 인간 공동체.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우리끼리 해보자. 이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공동체를 찢어버리죠. 공동체를 능가해버리죠. 아버지께 인사하고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르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것은 인간의 공동체 자체를 탈퇴하는 거죠.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언어적 개념과 언어적 용도조차도 찢으면서 빵꾸내면서 거기서 탈퇴하는 거예요.

아까 셸링 하면서 피히테는 매이지만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했지만 얻고 난 뒤에는 그것이 두 번 다시없으니까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게 좋았는데. 이게 무슨 자유냔 말이죠. 자유는 사유된 것에 매이지 않아야 자유다. 철학적 용어로. 사유한 자는 사유된 것에 매이지 않아야 된단 말이죠.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모든 인간은 사유한 자는 반드시 사유된 것을 남기고 남겨진 사유된 것에 대해서 스스로 매여진 겁니다.

자식은 누가 낳았습니까? 부모가 낳았지요. 사실은 누가 누굴 섬겨야 됩니까? 자식이 부모를 섬겨야 되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누가 누굴 섬겨요? 부모가 돈이고 뭐고 못 대줘서 난리야. 뭐 필요한 것 없나? 돈 필요하지. 김치 못 담그지. 김치 내가 담가줄게. 사우디 가서 고생하지. 맨날 전화. 전화를 누가 해야 됩니까? 자식이 해야 되는데 부모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일반인들은 매였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는 보람으로 여기죠.

왜 그러냐? 그게 피히테에서 셸링으로 넘어오게 되면, 내가 자식 없이는 못 살겠다.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자식을 낳은 것도 자식 없을 때보다 더 세상을 자유를 깊이와 넓게 보라고 주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로서 자식을 이해한단 말이죠. 그러나 어쨌든 간에 자식에 매인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선 한 걸음 더 나가지요. 죽은 부모는 죽은 자가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한 걸음 더 나가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참 보통 어려운 말씀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모든 상황의 목적이 뭐냐 하면, 네 자신을 미워하라는 거예요. 일반적인 신학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겨라.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 십자가 앞에서는 뭐냐? 네 자신을 부인하랍니다. 신을 섬기라는 게 아닙니다. 네 자신을 미워하라는 거예요. “신이시여, 어디 계십니까? 섬기겠습니다.” 그게 아니고. 그건 가인의 제사고. 아벨의 제사는 신이시여, 내 제사를 받으소서, 이게 아니고, “아벨아, 니 죽어야 된다.” 이게 아벨의 제사의 마감이에요. 더 마감은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알아야 마감이지만. 아벨 본인이 드린 제사로 말미암아 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그렇게 해서 좁은 길, 주님의 노선에 합치되는 것, 그게 아벨 제사의 마감이에요.

아브라함 믿음의 마감이 어딘 줄 알아요? 하나님 믿습니다, 약속을 믿습니다, 이게 마감이 아니고 세상에 주신 자식을 선물을 그것도 남이 아니고 우연히 강도 만난 것이 아니고 죽이는 주체가 누굽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아버지 됨을 날려 보내는 거예요. 찢어버리는 거예요. 누가 믿음이 아름답다 했는가~

그동안에 이런 나쁜 것을 마귀라고 본 거예요. 중세철학에서. 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마귀에게 속했다고 본 거예요. 셸링은 그게 아니고 그 악이 하나님의 내부에 있다고 본 겁니다. 왜 내부에 있는가? 신은 자신의 근거와 일치될 때 신이 통일된다고 본 거예요. 신의 완전함, 통일됨은 신이 자기와 대립되는 자리, 악과 만날 때 그것마저 통합될 때 비로소 신은 자기 근거를 가진다는 겁니다.

이게 셸링이 이야기했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심이 그냥 이 땅에 사람이 되지 않고 육신이 되지 않고 가만있으면 주가 됐을까요? 주가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만 주가 돼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가 되는 과정에서 뭘 해야 되거든요. 주님으로부터 오히려 주님이 버림받지요. 그리고 시편 110편 1절, 오늘 성경 처음 찾아보네. 여러분 다 아시지만 이 대목을 기억하기 위해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주가 존재론적 주입니까, 가만있으면 주가 됩니까? 그 뒤에 나오지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시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다시 말해서 주님이 원수를 짓밟았던 그 역할과 기능을 완수할 때 비로소 내 우편에 있는 진짜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하나님 우편 자리가 주의 자리입니다. 그 주의 자리에 하나님 본인이 있습니까, 본인 말고 다른 분이 있습니까? 그 다른 분이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에요. 그 주님 되게 하는 그 작업을 우리가 모르게 되면 주님의 나라, 아들 나라에 못 갑니다.

하나님 안다고 못 가요. 하나님 아는 유대인들이 천국 못 갑니다. 쫓겨나요. 하나님의 일을 행하심을 알아야 천국 갑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이 일을 행하심이 주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자기 아들을 주로 승격시키는 그 일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에서 우리의 구원은 빠져요. 복음에서 우리의 구원론은 끼어들 자리는 없어요. 복음에서 왜 우리가 끼어들면 안 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그 내용이,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관에서는 빠지게 돼있습니다.

잘 안 믿어지지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욥의 친구들 이야기했지요. 다시 복습해봅시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 일에 배제돼있습니까, 합류돼있어요? 빠져있지요.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욥한테 뭐라고 충고합니까? 하나님이 어떻고 하면서 충고하지요. 그게 쓸데없는 자기 구원론에서 나온 잘못된 하나님 뜻이에요.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그 무리와 하나님이 배제하지 않고 특별히 주가 주 되심의 작업에 참여시킨 따로 어떤 분이 있어요. 가인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이 생각한 그런 하나님 말고 가인이 생각도 못한 다른 인물이 있었지요? 누굽니까? 동생 아벨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욥의 친구들이 생각했던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주신 줄 욥도 몰랐지요. 욥의 하나님이 욥을 따로 챙겨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들었는데 그 하나님의 원칙이 뭐냐? 아들로 주 되게 하심입니다. 욥의 구원문제가 아니에요.

욥도 처음에는 자기 구원문제에 대해서 걱정했지요. “하나님이여, 이래서 구원 못 받습니다. 저 구원받는 사람인데 왜 어려움을 주십니까?” 몰랐는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욥이 자기 구원문제 때문에 참여시킨 게 아니고 자기를 통해서 장차올 메시아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욥을 하나님의 아들 작업에 욥을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은 게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구원은 나중 문제라니까요. 구원은 우리가 구원 얻겠다고 해서 받는 게 아니고, 구원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을 그 일에 참여하고 난 뒤에 알게 된 사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끼어들어서 그래서 구원된 거예요. 우리가 구원을 달래서 구원된 게 아니고.

셸링은 이런 것 몰라요. 성경적으로 따지면 그렇고 셸링은 뭘 아느냐 하면, 악이란 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포함됐다고 보는 겁니다. 악이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 근거를 찾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근거는 숨어있고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고. 나타난 하나님이 대자연이에요. 대자연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스피노자거든요. 스피노자와 셸링의 차이점은, 스피노자는 대자연 자체가 신이고, 셸링은 대자연 속에서 그걸 인격화시키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셸링의 전기 철학을 동일성철학이라 하고, 두 번째 철학을 셸링의 계시철학이라 하는 겁니다. 계시란 신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동일성철학은 하나님이 인간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주었는가 하는 문제에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렸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자유를 줬느냐 하면, 인간의 자유는 부딪침이라 했잖아요. 부딪침이에요. 내가 나를 피히테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고 이성적으로 따져서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이성이나 의식이나 그것과 상관없이 직접, 직관적으로 깨닫는 게 뭐냐 하면, 부딪침을 통해서 신은 있다. 부딪침인데 밀고 오는 거대한 빙산은 뭐냐? 대자연.

피히테는 대자연을 놓친 거예요. 대자연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피히테는 내가 뭘 알 수 있는가? 의식부터 출발한 거예요. 나의 경험부터 출발하니까 문제였다. 셸링은 경험을 따지지 마라. 경험 이전에 이미 너는 대자연 속에서 신의 자유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성이 되고, 악한 게 생각나고, 성질을 내고, 내 마음대로 조정을 못 하느냐? 그게 원래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한 요소가 그거였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 악이 필요했고 그 악의 속성이 그대로 전수되어서 너도 한 성질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아까 했잖아요. 폭풍이 일어나는 것, 화산 터지는 것, 욥기적으로 말하면,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가 뭡니까? 경작지가 아닌데 비를 왜 줍니까? 거기서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 마음대로다. 그런데 셸링에서는 내 마음대로 그렇게 기쁜 거예요. 왜 기쁘냐 하면, 셸링 이전에는 우리가 악한 것이 나오면, “주여, 죄송합니다. 내가 성도로서 성도답지 못하고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반성하지요. 회개하지요. 반성하고 회개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룩한 즉 너희도 거룩하라는 원칙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고 형제를 돌보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의 성취를 보여줄 때 하나님이 흐ANT하게 기뻐한다는 것이 기존의 신학이고 철학이란 말이죠. 개혁주의신학이 그렇잖아요.

그런데 셸링은 그게 아니고 터져 나오는 악은, 내가 악을 저지르고 싶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유와 자유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와야 될 악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 자체가 악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과 선의 통일체가 하나님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이다. 셸링에 의하면. 셸링이 이야기한 하나님은 아픔 가운데 하나님이다. 우리 인간들은 아프면 문제 있다, 아프면 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셸링은 아픈 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네가 뭔데 안 아파야 되는데, 네가 뭔데 성공해야 되고 네가 뭔데 실패 없어야 되고, 네가 뭔데 남한테 칭찬받아야 되고 남한테 욕 얻어먹으면 안 되고, 네가 뭔데, 네가 뭔데.

그래서 교재 805페이지 중간에 보면, [피히테의 주장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셸링은 이 행위를 자기의식에서 한정하지 않고 의식성에 선행하는 인간 존재의 실재적 존재에 위치시킨다.]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 다음에 806페이지. 무의식은 어둡다고 돼있는데 무의식이 어둡다고 표현한 것은 어느 층이냐 하면, 무의식 층이 아니고 의식 층에서 무의식이 어두워 보이지요. 무의식이 어두운 것도 아니에요. 다만 의식이 스스로 밝다고 여기니까 무의식이 어둠으로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이 강의하면서 근본적으로 발상을 뭔가 재수정해야 돼요.

아까 제가 선과 악이 통일된다 했지요. 그런데 악이란 게 뭡니까? 누가 악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알고 있는 우리가 악이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보기에는 폭풍이 일어나고 자연 질서가 깨지고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되고 충동이라고 돼있는데 여기에 광기, 충동이란 표현들이 긍정적 표현이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이건 부정적 표현이죠. 하지만 부정적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층이 어느 층이냐 하면, 우리가 아직도 건전한 걸 챙기고 있다는 의식 층에서나 할 이야기고, 막상 당사자는 하나님께서는 그건 의미가 없다니까요.

새가 짹짹거리잖아요. 새가 웁니까? 새한테 물어보세요. 지금 뭐가 슬퍼서 우느냐고 하면, 새가 뭐라고 합니까? 짹짹짹. 새가 웃는 거예요, 새가 노래하는 거예요? 그건 듣는 사람 지 기분이에요. 새한테는 웃는 것도 아니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에요. 노래하고 웃는다는 그 의미 층은 인간들이 상징적 질서에서 구성한 거예요.

배가 가는데 파도가 풍랑을 일으켰다. “신이시여,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너희들은 풍랑이라고 하는구나. 나는 물결을 흔든 건데 별로 안 좋게 생각하네.” “그럼요. 우릴 죽이려고 하는 거거든요.” “우릴 죽이려고 하다니, 무슨 말이냐? 나도 죽는데 너는 왜 안 죽어야 되지? 사고방식 봐라. 희한하다. 뭐 이런 건방진 인간이 다 있나.” 내가 배를 탔다. 배가 풍랑에 안 흔들렸다. 어디서 그런 건방진 논리가 다 있나.

학교에서 이런 일이 많이 있어요. “샘이여, 시험 출제범위 넘었네요.” 샘이 하는 말이, “내가 낸 게 출제범위야.” “선생님, 배운 데서 안 나왔는데요?” “배운 데서 안 나와도 문제 낸 것이 배운 데야. 내가 왜 너희 말 들어야 되는데? 그런 근거 있나?”

지금 셸링은 뭐냐? 그동안 인간 중심에서 근거를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근거를 보자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근거를 가지면 왜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뭘 가졌다 하면 거기에 매이게 돼있다니까. 물이든지 좋은 거라든지 매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유성을 내가 매여 있는 눈에 보이는 욕심에 의해서 놓치게 되고 이걸 누리질 못하게 돼요.

아무 이유 없이 일으킨 일에 대해서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흠- 이랬는데 우리는 폭풍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에 입김을 불어넣었잖아요.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넣을 뿐인데 인간들은 육십 평생, 구십 평생 동안 이 입김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온갖 짓거리들을 하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아직도 내 코에서 입김이 나오는군. 이 입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노력해야 돼.” 얼마나 살아보려고.

인간에게서 진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살아도 내가 사는 게 진리에요. 남이 살아선 진리가 아니에요. 내가 사는 게 진리에요. 그게 자기 몸에 묶여있는 불쌍한 존재된 겁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신이시여, 저를 괴롭게 하십니까?” 주님이, “내가 언제? 나는 너한테 감정 없어.” 셸링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그거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감정 있어요. 자기 내부적으로 분열돼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자기 악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만들어진 게 인간이에요.

[지킬과 하이드]라는 연극도 소설도 있지만 그 악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바깥에 있어요, 자기 내부에 있어요? 자기 내부에 있지요. 그래서 셸링의 철학을 표현하라면, 내부와 관련된 외부의 잉여. 여기 내부란 우리 마음 내부입니다. 잉여, 남아도는 것.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의 질서를 우리가 싸잡을 수 없고 다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할 때 잉여가 폭발할 때 우리는 우리가 제대로 싸잡아 올 때 우리는 이걸 악이라고 봤는데 그 악이 뭐냐 하면, 우리가 조정할 수 없는 잉여거든요. 잉여가 신의 요소였고, 신이 어떤 활동을 하느냐? 자기 내부와 결합하는 통일하려는 활동의 여파로 우리에게 이런 잉여가 찾아든 겁니다.

그러니까 셸링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거예요. 다 이 세상에 폭풍 치고 화산이 터지고 배가 뒤집어지고 화재가 일어나더라도 이것은 신의 자기 내부 갈등이에요. 신의 내부 갈등이 우리에게 일어났는데 따라서 손해라든지, 나는 실패라든지, 이것이 나쁜 짓이라든지, 그런 용어를 붙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하나님이 섭섭해. 그냥 마땅히 그래야만 했던 일이 그때 일어난 것뿐이라니까요.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성경 말고 대자연,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어떻게 신의 계시를 정립할 수 있느냐? 그게 철학자의 모습이라고 했지요. 계시 말고 성경 계시는 책이지만 그 책은 저자들이 있잖아요. 저자들이 전부라 하지 말고 아예 그 저자를 넓은 계시 안에 포함시키자. 그러면 계시가 성경에 국한되지 않고 성경을 포함한 성경 바깥에 있는 세상의 모든 변화와 변동도 큰 계시 안에 들어있단 말이죠. 이왕이면 넓은 계시, 큰 계시를 알아야지 성경이라는 제한된 저자가 이미 확정된 그것도 골라잡아 편집한 성경이 전부라고 우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건 올바르지 않은 진리관이라는 겁니다. 철학자들이.

이렇다면 끝 시간 다 됐는데 정리해봅시다. 그렇다면 성경 덮어버리고 바깥에서 신의 계시를 어떻게 찾는가? 그것은 바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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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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