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기능 150410
마귀의 기능 150410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김창길(IP:180.♡.194.146)
15-04-18 00:00
서울 의존교회150410a (마귀의 기능)―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6장 13절부터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곳은 예수님이 살았던 세계와 똑같은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그냥 낚싯대로 사람을 건져 올리신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방문했죠.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왔다는 것부터 우리는 거기에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어떤 위기이냐 하면 하나님이 다녀가신 이유를 알아야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다녀가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하나님이 다녀갔다, 왜 다녀갔을까? 다녀가신 뒤에도 악은 그대로 있고 하나님이 다녀가시고 난 뒤에도 세상은 살기 빡빡하고 예수님이 다녀가신 뒤에 뭐 주가가 오르고 전쟁이 거치고 평화가 있습니까?
다녀가도 효과가 없네요? 다녀가셨다 해 놓고 뭐 얻은 게 없잖아요. 저는 어릴 때 우리 할아버지 집에 살았는데 할아버지 친구 분들이 다녀가게 되면 뭔가 얻은 게 있어요. 사과를 얻던지 귤을 얻던지 손님들이 할아버지가 동네 유지라고 선물을 들고 오게 되면 부스러기는 우리 가족이나 손자들이 나눠 먹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다녀가고 난 뒤에 우리는 얼마나 맛있는 사과를 먹고 귤을 먹었습니까? 뭐 얻는 게 없잖아요. 예수님이 다녀가시면서 나는 하나님이 다녀간다. 너희들과 평화의 악수를 하고 우리 서로 서로 좋게 지내자! 이렇게 다녀가기를 사람들은 고대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심심하거든 가끔 땅에 내려와서 방문하셔서 우리가 산다고 애쓴다고 경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원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뭐라 하느냐,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어느 교회를 방문했는데 교회의 교인들이 그 예수님의 방문을 기념해서 예수님께서 종종 방문해서 우리를 축복도 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부흥되도록 협조해 주시면 우리도 성의를 표하겠습니다.
이러고 싶은데 주께서 그 교회를 다녀가고 난 뒤에 너희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이런 조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교회도 가만있지 않죠. 당신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당신이 정말 메시야라면 우리가 기대한 대로 맞춰서 오셔야 되지요. 우리의 환영을 받으시고 우리의 찬송을 받으셔야 되는데 우리가 하는 이 모든 것을 정죄하고 질타하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아무리 당신이 메시야라고 우겨도 당신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라고 이제 둘이 헤어지게 된 거예요.
헤어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죽었다고 했던 그분이 되살아났어요? 몇 몇 사람들이 되살아난 주님을 만났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러면 이 말의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도 위기이지만 이제는 더 큰 위기가 들어 닥친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그분에 무슨 짓을 했습니까? 당신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에 대해서 당신은 아무런 보탬이나 도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은 메시야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가정에 주님이 다녀갔다, 다녀간 뒤에 갑자기 집안에 금덩어리가 생긴다던지 졸지에 허름한 집이 깔끔한 멋진 호화 아파트로 바뀌어야 되는데 다녀가고 난 뒤에 아무런 변화가 없잖아요.
이게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부분에 들어섰습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님이 오시고 변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변화는 무슨 변화를 원했느냐 하면 우리는 삶의 환경이 달라질 것을 원했죠.
이 지지리 궁상을 언제 모면하나?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특별한 배려를 해 주시리라 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인이 수천 명이 되고 수만 명이 되는 교회 말이죠. 수십 명 되고 마찬가지고 열 명 되도 마찬가지인데 그 교회에 오면서 하나님이여, 내 인간 바꿔달라, 지금 환경 바꿔 주지 마시고 나라는 인간 자체를 딴 인간으로 바꿔주세요! 라고 교회 오는 사람이 몇 명되겠습니까?
거의 없어요. 이 지지리 궁상 같은 정말 처절한 이 삶에서 언제 벗어나게 해 주실래요? 라고 오잖아요. 못 살고 못 살고 너무나 힘들고 힘든 이 가족 관계, 지금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부간의 갈등, 자식이 말 안 듣고 가출하고 이 모든 것, 심지어 거기다 돈 많으면 뭐합니까? 몸 아프면 그만이죠. 몸 아픈 거, 쉽게 갑시다. 나는 문제가 없는데 외부환경이 좋지가 않아서 내가 죽을 지경이니까 숨이 막힐 지경이니까 메시야라는 그분을 내가 믿어줄 테니까 오셔서 믿는 값으로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는 조로 교회에 찾아 드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오는 거예요. 그 전제가 뭐냐, 나는 문제가 없는데 나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상황이 빡빡해서 내가 자주 교회에 못 나오고 자주 하나님께 감사 못합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이지 저는 문제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우리가 문제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임금이죠.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그리스도 임금이죠. 임금인데 몸으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몸으로 오실 때 양손에 세일한다고 마트 가서 선물 보따리 양손에 들고 오십니까?
주님의 양손에는 못 자국밖에 없어요. 거기에 선물 보따리 없어요. 어느 교회 교인이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저 못 자국이야! 이렇게 이것을 반기는 교인이 이 교회 빼놓고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이 교회에 빼는 것도 뭐 아무것도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 내가 원했던 것은 저 못 자국이야! 저 창 자국이야! 라고 반기고 싶어요? 아니면 양쪽에 돈과 재물을 주시는 그런 메시야를 원해요? 어느 쪽입니까? 선물보따리 들고 오는 메시야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복과 주님의 선물은 손에 들고 온 재물이 아니라 온 몸으로 보여줬어요.
온 몸에 싸인이 있고 그 표정이 있고 그 징표가 예수님 몸 안에 있어요. 어떤 몸입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나처럼 살리라! 죽어도 살리라! 쉽게 말해서 야야, 죽자! 살면 되잖아! 네가 나를 안 믿고 죽게 되면 네가 지옥에서 살아나지만 나를 믿고 죽으면 천국에서 살아나는데 너, 어느 쪽 원하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강의처음부터 다시 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나는 문제없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못된 인간도 있고 나는 문제없는데 식구들이 여러 명이고 나는 문제가 없는데 이 세상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내가 힘들어 죽겠습니다.
숨통이나 좀 트여지게 주께서 어떤 숨이나 쉬게 어떤 조치를 해 주십사 제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도 할 테니까 헌금 할 테니까 예배드릴 테니까 예쁘게 보셔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뭔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라도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나는 문제없는데 라고 하는데 주님이 오셔서 주님께서는 못 자국 창 자국으로 네가 바로 문제야! 네 몸이 문제라는 거예요.
몸이 문제이고 그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꺼리 말썽꺼리기 때문에 그런 나는 문제가 없다고 그런 식으로 잘못된 생각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디모데를 하고 있는데요. 이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제시한 것은 뭐였습니까?
여기 16절을 봅시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환경 바뀌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해 버리면 주님 좋겠네! 주님 혼자 빛에 거하시고 영광 중에 거하시고 혼자 좋으시네! 그러면 우리는 뭐에요? 혼자 좋으시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안 주시고 약 올리나요?
‘주님은 빛에 거하시고’ 좋겠다! 혼자 빛에 거하시니? 그럼 나는 뭐고? 나는 어디에 속하는데? 나는 쓰레기더미에 거하시고 이런 꼴보고 아주 즐겁습니까? 뭔가 살 단도리 정도를 해 주셔야 주님이 존경과 찬양을 받으시지 혼자 즐기시고 우리는 죽든 말든 남겨두면 거기서 무슨 찬양과 감사가 나오겠습니까?
찬양과 감사드릴 꺼리를 일단 주시고 받고 난 뒤에는 찬양 감사를 아낌없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우리 원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라고 나올 것이 뻔 하거든요.
그러면 디모데전서 봐도 소용이 없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100독을 해도 소용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문제없고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전능하시는 하나님이 쳐줄 수 있다는 사고방식으로 교회 온다던지 디모데전서를 100독을 해도 그것은 100독한 것이지 전혀 말씀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겁니다.
여기 디모데하고 바울하고 짝짜꿍해서 사업했습니까? 그래서 뭐 재벌 됐어요?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그렇게 증거한다고 열심이었고 그들이 뭘 증거한다고 자기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까?
16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거잖아요.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나머지는 뭐가 있다? 저주와 죽음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그러니까 성도들아, 주 믿고 그냥 죽는 게 속 편하다 그 말이에요.
그것을 위로랍시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한테 위로라고 내 놓은 겁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말을 하면서 이렇게 해도 이것은 주께서 너희에게 과분한 은혜라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이미 망하게 되어 버렸는데 그 망가진 인간을 주께서 살려주신다는 것이 그게 어디냐 이 말입니다.
세상에 망가진 인간, 받을 자격도 안 되는 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나누어 준다는 것이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이며 고마운 일이냐 이 말이에요.
그 고마움에는 우리의 목숨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단순히 우리를 질책하고 또 우리를 위로하려고 이 말씀 주신 게 아니에요.
어떤 원리가 있어요. 어떤 원리이냐 하면 왜 너희들은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문제인지 알지를 못하느냐! 그런 내용까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냥 예수 믿고 죽어라가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왜 우리는 문제가 있으면서도 자꾸 달라고만 이야기를 하고 나는 문제없다고 여기는 그러한 인식을 갖는 이유가 뭐고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그런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그 소개가 13절에 봅시다.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이것을 지금부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우리 몸이 문제입니까? 환경이 문제입니까? 사실은 둘 다 문제이죠. 둘 다 문제인데 우리는 내 몸은 괜찮은데 힘들게 사는 것은 나 빼놓고 나머지 둘러싸인 환경이 문제다. 다 남 탓이요, 네 탓이요, 세상 탓이요 이렇게 보겠지요.
그러면 본디오 빌라도가 문제였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문제였어요?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사형시키라고 요구를 해도 본디오 빌라도가 그 당시에 권력자기 때문에 ‘아, 안 돼! 내 아내가 어제 꿈을 꿨는데 꿈이 너무 번잡스러워서 나, 이분 예수님을 건드리면 우리 저주 받을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선언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풀어주노라!’ 이렇게 안 했잖아요.
그렇게 안 했는데 뭐라 했습니까? 에이 나 몰라,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해서 나름대로 술책을 쓴다는 것이 예수님 옆에 두고 그 다음에 흉악범 옆에 둬서 둘 중에 한 사람만 살고 한 사람만 죽는다는 제안을 한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일어나는 일이 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요 이런 일들이 성경에 기록됐다는 것은 그 안에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의 모습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설득을 강요했습니다. 이 바라바라는 강도이냐 예수님이냐? 라고 법정에 내 세웠을 때에 그의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이 현실, 이 세상에서 본디오 빌라도를 중간에 놓고 그 밑에 바나바와 예수님과 그리고 그 앞에 있던 사람들이 대중들, 민중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에 두었죠.
물론 여기에 제사장들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제안 했다는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자기 자리를 강화 했습니까? 아니면 포기 한 거예요? 얼른 보면 자기의 권한을 포기 한 게 되지요. 왜? 내가 결정하지 않고 당신들에게 넘기겠습니다. 하는 것을 봐서 뭔가 권력을 많이 양보한 느낌이 들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서 어떤 결과를 내더라도 이 책임을 본인이 지지 않고 결정한 너희들에게 미뤄 버린 거예요. 왜냐 하면 본인은 어떤 결정을 해도 그게 진리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고대 사회의 특징입니다. 지배자, 또는 왕은 그의 행동, 그의 생각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이 사람들, 예수님이나 바나바, 이 사람들의 결정은 뭡니까? 그것은 진리를 진리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 점을 우리가 꼭 알아야 될 이유가 흔히 성경에서 인간은 마귀의 종 되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눈의 보이지 않는 분에 종이 되었다고 하니까 그것도 별로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에이 뭐 우리가 마음대로 했는데 누구의 종? 나는 마귀도 몰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서 나가는 거야! 흔히 수월하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옷을 살까? 이 옷을 살까? 그것은 내가 결정을 하는 거지! 그런데 그것을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누가 이야기하겠어? 없죠. 왜냐, 마귀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본디오 빌라도를 제시했잖아요. 본디오 빌라도가 역사적 인물이에요? 아니에요? 추상적이고 귀신입니까? 귀신 아니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가 이 강의를 하면서 정말 늘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마귀는 영이니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말서 마치 마귀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처럼 오해들을 하세요.
마귀가 구체적으로 모든 것을 다 깔아 놨는데 사람들이 그 구체성을 체험하지를 못한 겁니다. 그러면 마귀의 구체성을 목사님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요.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이 있죠. 제가 지금 설명을 계속할 건데요. 어떤 쪽으로 설명하느냐 하면 왕이라는 것이 하루 네 끼 먹고 다섯 끼 먹고 하늘을 날아다닙니까? 왕은 밥을 안 먹고도 사는 그런 인간 입니까?
왕은 특별한 인간입니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에요? 신체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왕이 되고 나는 왜 왕이 안 되죠? 이거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똑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왕이 되고 지금 민주 사회 말고 대통령제 말고 왕 이야기입니다.
국민이 뽑는 그거 말고 국민이 뽑아서 대통령되는 거 말고 왕 이야기하는 거예요. 왕이라 하는 은 모든 국가에 있는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똑똑하고 신하들이 아이큐가 높아도 늘 어수룩한 바보 같은 왕의 결정에 대해서 꼼짝도 못하고 왜 벌벌 떠는 겁니까?
여러분 신기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왕이라고 해서 키가 180되고 200되고 그렇지 않죠? 왕이라고 해 봐야 일반성과 동일하다 이 말입니다. 도대체 일반 왕이라는 인간이라는 그 일반성 속에서 왕이라는 특수성이 도대체 어디를 근거해서 그 특수성이 나왔느냐 하는 겁니다.
왕이 왕다워서 왕입니까? 아니면 왕이라고 불러줬기 때문에 왕입니까?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 주세요. 어느 쪽입니까? 왕이 날개가 있어서 하늘을 날아서 아 왕 되라! 이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면 나는 당신을 왕이라고 불러줌으로서 이제부터 나의 왕이 되세요! 라고 해서 왕이 되는 거예요?
전자에요? 후자에요? 후자입니다. 이름을 불러 줌으로서 왕이 되는 거예요. 임금이라 하는 순간 그 사람은 왕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경 예후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주니까 갑자기가 왕이 된 것으로 여겨서 기존의 왕을 죽여 버렸어요. 왜? 뭘 받았기 때문에? 기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이 한 병에 얼마 합니까? 한 병에 한 2만원합니까? 그러면 나도 기름을 부으면 내가 왕 되겠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게 아무나 붓는 게 아니에요. 기름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부어주느냐가 문제입니다. 누가 부어줬습니까?
그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고 나 이제 할 일 끝났습니다. 아니, 아직 할 일 남았어! 기름 부어라! 열왕기하 9장 보면 엘리야가 이제 내 일 끝났습니다. 뭐 사람들 전부 다 하나님 버리고 나만 남았고 나도 이제 호렙산에 가서 40일 동안 걸어서 도망쳐옵니다. 호렙산이 어디 있느냐 하면 네게버 사막 지나서 이스라엘 북쪽에서 제일 남쪽에 호렙산이 있어요.
왕상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선지자가 기름을 부어줄 때 왕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예를 들어서 아도니아가 왕이 되고자 다 짜놓았는데 그 아도니아가 다윗의 세 번째 왕자입니다. 네 번째 왕자가 누구이냐 하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그 전에 밧세바하고 다윗하고 이미 이야기되기를 솔로몬이 임금 되기로 다 했는데 다윗이 늙어서 가물가물하니까 갑자기 아도니아가 서열상 자기가 임금 돼야 된다고 해서 임금이라고 선포했어요.
밧세바가 다윗에게 찾아가서 임금님, 분명히 솔로몬 밀어준다고 했는데 지금 아도니아가 임금 됐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하니까 제사장이 와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는 순간 갑자기 저쪽 아도니아 쪽이 우리는 큰일 났다! 도망치기 바빠요. 왜 그런 일이 생기죠? 왜 같이 한바탕 붙어보자! 하지 않고 왜 그런 일이 생기죠?
이게 뭐냐 하면 권위문제거든요. 그래서 제가 묻는 겁니다. 임금 되라고 준 권위는 누가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줬다고요? 그 하나님 자체가 인간이 상상한 하나님이 아닐까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이 했다고 지어내면 되겠네? 나도 하나님의 기름 부었다고 기름 죽부어서 나, 임금이다! 하면 되겠네요? 청와대 찾아가면 되겠네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테마가 뭐냐 하면 마귀가 마귀의 세상을 마귀의 나라라 하는데 실제로 마귀는 눈에 안 보인다 이 말이죠. 눈에 안 보이면서 사람들은 뭔가 미지의 엑스한테 쫓김을 받고 뭔가 도망치는 부들부들 떠는 그런 양상이 모든 인간 속에 사적으로 다 스며들어 있어요.
만약에 제가 예수님 당시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다고 칩시다. 본디오 빌라도가 하는 말이 바나바냐 아니면 예수님이냐? 너희들이 선택하라고 하면 내가 손들고 있다가 네가 뭔데 선택을 해? 그 자리에서 너는 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위사람들이 저놈 당장 처치하라! 이렇게 나오죠. 저보고요.
아니 왜 의견도 말을 못해요? 민주주의사회인데 그런데 그게 왜 처치감이 되는 겁니까?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날 보고 저놈 처치하라고? 어디 임금한테 대들어? 이렇게 될 때, 총독이니까 빌라도한테 대들어? 될 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내가 보기에 뭔가 미지의 엑스라는 권력에 지금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기대면서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인 권력에 기대면서 그것을 경유해서 자신이 자신됨을 자아의 주체를 그런 식으로 정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사람들은 자기 안에 아버지가 살아있어요. 그래서 나중에 성공하고 나면 아버지 무덤에 가서 아버지, 아버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성공, 제가 여기에 드디어 성공해서 왔습니다.
진작 성공해야 될 것을 이렇게 늦게 성공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거기서 쓰는 편지를 아버지 전상서, 불효자는 웁니다.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시는 얼마나 좋아 했을까? 뭐해요? 아버지 돌아 가셨는데 혼자 독백하고 있어요. 자기가 잘되는데 혼자 잘되면 되는데 그것을 달려가는 사람이 있어요. 홈런치고 난 뒤에 관객석에 있는 아버지한테 아버지, 나 한 골 넣고 난 뒤에 아버지 나 한 골 넣었어요. 보세요!
자기 안에 아버지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어요. 이삭은 아버지가 없어요. 다윗이 아버지가 이새잖아요. 그 이새가 다윗을 다윗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다윗 속에서 이새라는 그 아버지의 것의 이새가 떨어져 나가야 돼요.
모든 이새는 다 마찬가지에요. 왜?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할례입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는 자만이 아버지가 지배하는 이 어둠의 세계에서 출애굽 된 사람이에요.
악마의 지배는 어디서 오는가? 아버지 이름으로 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아버지 없어요. 성전에서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으니까 뭐라 했습니까? 퉁명스럽게 제가 아버지 집에 있는데 왜 아버지는 왜 저를 찾으십니까?
야야, 얼마나 찾았는데! 왜, 성전에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데 거기서 찾지 왜 나를 찾는다고 그렇게 헛된 수고를 하셨습니까? 이 땅에서 주님께서 성도에게 이 땅에서 우리가 길들여진 알 수 없는 공포와 알 수 없는 위협을 주는 그 아버지의 이름을 후벼 파 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아버지가 없는 자가 되지요. 아버지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러면 누가 만들었겠어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곧 내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있으려면 뭐부터 먼저 있어야 돼요?
아버지가 먼저 있고 난 뒤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 아버지를 하나님께서 기존의 아버지를 할례라는 언약을 통해서 없애 버린 거예요. 그 할례 언약이 완성된 것이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나와요.
할례의 완성은 십자가거든요.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다? 할례 언약이 완성되어 있다. 그러면 십자가에 능력이 임했다는 것은 우리를 할례 받은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를 빼 버리면 우리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죠.
그 아버지 없는 빈자리에 다른 분이 그 자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약속의 자녀가 돼요.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약속의 자녀의 특징은 뭐냐? 아버지가 바꿔진 특징이 뭐냐? 기존의 아버지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거기서 탈출이 성사 되었어요. 그것을 구원, 구출, 또는 그것을 진리가 너를 자유, 자유라고 합니다.
탈출이 감행된 상태에서 그 탈출이 성사된 분이 우리의 아버지로 삽입해 들어보면 우리는 어느 쪽에 저촉을 받느냐 하면 세상 사람의 저촉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무사히 영생을 확보한 그 분에 의해서 우리는 그분의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과 삶은 의미와 목적이 그쪽으로 맞춰지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것을 초점으로 살아가는가를 설명해야 제 말이 납득이 될 거예요.
우리는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사느냐 하면 나를 나 되게 하는, 나를 나 되게 규정시켜 주는 나보다 월등한 초월적인 미지의 권력, 힘을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본디오 빌라도에요.
그게 국가권력이에요. 임금의 권력입니다. 임금은 임금이 있어서 임금이 아니고 누가 요청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청을 한 겁니다. 처자가 결혼하고 싶은 이유가 뭐냐, 처자가 결혼하고 싶은 것은 어릴 때에 내가 공주라는 상상에 안 빠진 여자가 없어요.
어릴 때는 다 공주에요. 백설 공주, 신데렐라 하던지 전부 다 공주에요. 공주를 상상해요 돼요. 거기서 나온 것을 자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에는 자아가 아니고 주체가 있어요.
자아라는 것은 상상해서 그것을 동일시라고 하는데 공주처럼 사는 것이 나라는 것을 동화를 보면서 그것을 익혀왔습니다. 그런데 이 동일시 된 자아가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 자아를 확장시켜 줄 세상의 환경마저도 내가 원했던 공주에 맞는 환경일 때 우리는 “그래, 나는 공주였었어! 공주 될 수밖에 없는 거야!” 라고 확정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상상한 것은 자아에 그치지만 주변에서, 그것을 타인, 타자라 하죠. 남들이 나를 공주라고 할 때 진짜 나는 남을 경유해서 진짜 공주 맞는 겁니다. 나를 공주라고 인정해 줄 누구를? 미지의 엑스를 찾으면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을 경유해서 나는 공주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만약에 남편이라면 나를 공주 같이 떠받을, 당신이 나와 결혼해 준다면 나는 당신을 공주로 떠받들겠습니다. 라는 조건하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남자는 나에게 뭐가 되느냐 하면 나를 나 되게 주체로 확정시키는 아버지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 색시가 어디 가서 콩콜에서 상을 탔다면 제일 먼저 누구한테 영광 돌리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한테 영광 돌리죠. 주현미가 상 받고 그 이야기했잖아요. 이 기쁨을 제일 먼저 누구한테 돌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제 남편과 같이 하겠습니다.
그 때 그 주현미의 아버지 이름은 뭐냐 하면 바로 남편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꼭 아버지의 이름이 꼭 남자일 필요는 없어요. 내가 안심 푹 놓고 나는 그래 이런 사람이야! 라고 확정 지을 수 있기 위해서는 외부 환경이 어릴 때 아버지 역할 했던 그런 역할이 외부에 있어 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본인이 외부를 요청하기 때문에 거기서 탈출이 됩니까? 안 됩니까? 탈출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식사를 해도 혼자 식사하면 맛있습니까? 고급 음식이라고 맛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미운 사람하고 식사하면 맛있습니까? 맛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좋아 하는 사람하고 먹게 되면 맛있죠. 음식에다 뭐 다른 것을 넣었습니까? 고급 조미료를 썼습니까? 그런 것 전혀 없어요. 똑같은 음식이지만 내가 누구와 마주하고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완전히 변하죠.
그 누구가 누구입니까? 나를 나 되도록 만든 미지의 아버지의 이름이죠. 나는 평생을 밥을 먹던지 뭘 하던지 간에 항상 그 쪽을 의식하면서 그쪽이 나를 응시하게 되고 응시한 그 쪽을 나는 보란 듯이 보여 주기 위한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인간은 정체성, 주체가 바로 성사가 되는 겁니다.
주체는 그렇게 마련해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애를 먹인다?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연애할 때는 남편이 만났다 하면 소주하고 맥주를 마셨는데 결혼하고 난 뒤에 남편이 갑자기 뭔가 바람에 날리는 전도지를 보고 난 뒤에 교회 가기 시작해서 교회 가서 술을 끊었다, 그러면 누가 불안합니까?
아내가 불안한 거예요. 왜? 남편의 술 먹는 모습에 너무 낭만적이어서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교회를 가고 술을 끊고 난 뒤에는 남편의 문제가 아니고 남편의 문제가 결국은 나의 주체성을 허물게 된 하나의 원인 제공자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럴 때 그 여자가 이렇게 이야기하죠. ‘한 10년 살았는데 요새 부부 생활 재미하나도 없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죠. 남편하고 사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제가 강의 제일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내 주체성은 나에게 정당한데 그 정당한 조건은 뭡니까? 없어요. 나는 나이기 때문에 정당해야 돼요. 이것은 이유를 따지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너, 왜 정당하지? 그것은 나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정당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날마다 어떤 무서운 힘에 쫓기며 불안불안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간들간들 자기 주체를 정립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종속입니다.
미지의 권력에 대한 종속, 그것이 방금 가까운 사이에서는 남편이라고 했죠. 남편이라 하지 말고 점점 더 그 범위를 넓혀봅시다. 넓혀보면 최종적인 것이 바로 왕입니다. 권력을 쥔 사람이에요. 그 권력은 그 사람이 힘이 세서 하늘을 날아서 권력이 셉니까? 아니면 누가 양도한 권력입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의 권력을 일부로 그 사람에게 양도해서 그 양도한 권력 때문에 내가 자발적으로 내가 준 권력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내가 준 권력이 있어줘야 내가 누구인지 확정이 되기 때문에 나는 아낌없이 그 권력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만약에 내가 서태지라는 가수가 있는데 내가 가수를 좋아하는데 남들이 그 서태지 가수를 욕한다면 누가 참지를 못해요? 내가 참지를 못해요. 어떤 정당한 소리를 해도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욕하면 안돼요. 왜? 서태지 좋아하는 그게 내 주차로서 정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은 곧 나를 욕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뭐라 합니까? 네가 밖에 나가 행동 똑바로 해라! 네가 행동을 잘못하게 되면 이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거예요. 이미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시켜 온 겁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아버지가 안 계셔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항상 행동을 반듯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마귀에 걸려든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출애굽 되지 못한 모든 인간의 일반성이에요.
제가 지금 까지 강의 한 것을 간단히 추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홀로 있어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립을 못하는 것, 그러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겁니다.
반드시 자기 보다 더 세고 자기를 뭐라고 지적질 하는 자를 불러서 그분 앞에 아낌없이 고개를 숙임으로서 비로소 자기가 안정감을 얻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이 제사를 누구한테 했습니까? 하나님께 했죠. 하나님께 왜 제사를 했습니까? 하나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기 자신이 곧 본래의 자기 자신이라고 자기를 그렇게 정립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죠. 그럴 때 갑자기 누가 화를 냅니까? 우리 같으면 제사 안 받으면 뭐 제사 안 받는구나! 하나님, 다음에 잘 할게요. 이러면 될 텐데 왜 화를 내죠? 그것은 바로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았기 때문에 화를 내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정립하고 싶은 것은 인정받다 못하고 동생은 인정받았으니까 그러면 그 다음 절차는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가인이 가인으로서 정립이 되려만 정립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해야 되겠죠.
그 제거하는 방법이 뭡니까? 바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아벨을 자기 눈앞에서 없애 버리는 거예요. 없애버리면 동생을 없앤다는 말은 동생이 형 옷을 입고 나가서 그래서 죽이는 게 아니에요. 동생이 형의 나이키 신발 신고 나가서 죽이는 게 아니고 동생을 없앰으로서 자기는 다시 전에처럼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잖아요.
그 짓을 할 때 악이, 악마가 문에 엎드려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인을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의 모습은 영이니까 안 보이지만 악마의 행동은 역사적이고 구체적이잖아요. 지금 제가 우리가 보자는 것은 그거에요.
마귀가 안 보인다. 마귀가 없다. 이렇게 나오지 마시고 마귀가 저지른 짓들이 꽉 깔려있는데 그것을 놓치면 안 되잖아요.
마귀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이었습니까? 너의 주체정립에 방해되거든 아낌없이 다 없애 버려라! 그것이 가장 너 다운 것이다. 마귀가 하는 일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귀가 무슨 일을 하느냐, 마귀가 하는 일은 나다운 나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해요.
어릴 때 우리는 그것을 아버지한테 양육 받았기 때문에 또는 어머니한테 양육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아버지 이름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여전히 아버지의 종으로서 살아갑니다.
아니, 인간은 누구의 종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종이 한 번도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불안합니다. 왜? 왜 불안하죠? 인간은 어디에 쫓깁니까? 내가 나로 정립하는 것이 그 체제가 와해 될 때 인간은 어쩔 줄 모릅니다.
내가 나로 정립하는 것이 그 체제가 와해 될 때 인간은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게 불안불안해요. 걱정스러워요. 경남기업의 회장이 하루 세끼를 못 먹습니까? 집에 쌀이 없습니까? 노숙자입니까? 주머니에 돈이 없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북한산에서 죽었죠. 왜 죽었습니까? 뭐가 안 되었기 때문에 죽었습니까?
나는 누구였다? 나는 남자다? 아니죠. 나는 키가 170이었다. 그게 아니에요. 나는 대학 나왔다. 그게 아니죠. 그것 때문에 죽은 아니죠. 대학 나와서 죽은 게 아니잖아요. 뭐 때문에 죽었어요? 나는 경남기업의 회장이고 전 국회의원이다. 그것이 무너졌잖아요. 그 인지도가 무너졌잖아요.
가룟유다가 왜 죽었죠? 가룟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가룟유다가 농사짓던 사람이었어요? 아니면 골짜기에서 감자 캐는 사람이었습니까? 뭐 했던 사람입니까? 가룟유다는 어디에 편입된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사람이죠. 제자였기 때문에 자살한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자신의 무엇을 형성했습니까? 주체를 형성한 거예요. 그런데 자기 손으로 누구를 죽였어요? 스승을 팔아넘겼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제자 값을 못하죠. 제자 값을 못하니까 자기의 주체 정립이 안 되잖아요.
나가 없어졌어요. 없어지니까 더 이상 살 이유도 가치도 없어 진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누가 그렇게 시켰다 했습니까? 마귀가 가룟유다 속에 들어가니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결국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죽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룟유다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내가 나다워야 된다는 것이 여전하게 남아 있었던 겁니다.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본디오 빌라도를 통한 마귀의 기능입니다.
오늘 제목은 마귀의 기능으로 하겠습니다. 마귀의 기능은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해서 한국이 이겼다면 태극기 올라갈 때 눈물이 주르륵 흐르죠. 왜? 우리의 주체성은 일본사람이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을 이미 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세월호에 가서 애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이 땅에서 더러워 못 살겠다고 캐나다에 어떤 사람이 이민을 갔다면 캐나다에 가서 한국하고 캐나다하고 축구해서 한국이 졌다면 눈물 흘립니까? 아이고 고소하다, 나의 자식을 죽인 나라는 한번 당해도 싸! 이렇게 되죠.
이미 자기다움이 정립이 되어 있죠. 그러니까 마귀에게 인간이 꼼짝 못하는 이유는 마귀가 너는 너다운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정립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마귀를 벗어날 수가 없는 정도도 아니고 우리는 본인이 요청을 해요.
본인이 그러한 내가 복종할 권세자를 본인이 철회하지를 않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요구를 해요. 왜? 그런 것이 있어줘야 내가 되기 때문에, 나다운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10분 쉬고 그게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 의존교회150410b (마귀의 기능)―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없는데 세상 환경이 악해서 내가 살기 힘듭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본디오 빌라도 앞에 오셨잖아요. 그 본디오 빌라도 앞에 재판을 누가 받습니까? 예수님이냐 바나바냐 선택하죠.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가 그런 권력한 것에 대해서 왜 이의를 걸지 않느냐 이 말이죠. 네가 뭔데 예수냐 바나바냐 네가 결정을 하는데? 왜 나서는 인물이 없었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요.
그것을 나서게 되면 그 사람들은 뭐 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뭐 경찰 있기 때문에 우리를 체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경찰 있고 체포하고 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러면 아예 왕도 없고 본디오 빌라도도 없고 권력자도 없고 각종 자기 식대로 그냥 살기를 원하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뭐냐? 왕의 자리에 누가 나를 지배할 자리를 우리가 요구했고 그 요구한 자리에 지금 본디오 빌라도가 어떤 세상적인 상황 속에서 왔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본디오 빌라도가 여기 본문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어요. 그런데 사도행전 마지막에 가면 예수님이 어디에 서느냐 하면 가이사 앞에 서요.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 아들이 아구스티누스라는 황제가 또 있어요. 최초로 동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가이사이고 아버지 본받아서 아들도 아구스티누스도 동전에 이름을 새겨요. 그렇게 새길 때 네가 뭔데 네 얼굴을 새기냐? 내 얼굴도 새기자! 라고 왜 나서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나서면 매 맞잖아요? 아니에요. 그러게 아니고 내가 주장하는 것은 나서고 싶지만 거기서 군대가 와서 이게 어디서 왕에게 대들어? 죽어라! 삼족을 멸하리라! 이래서 안 나서는 게 아니고 우리가 왕을 요청한다니까요.
왜 요청을 하느냐, 어릴 때부터 우리는 어떤 아버지 이름으로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내가 나라는 주체를 확고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는 그런 대상, 타인을 우리는 요청을 하는 거예요.
물론 그 타인은 나보다 더 월등하죠. 초라한 나보다 더 대단해야 돼요. 그 대단한 자에 의해서 내가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가 형성되는 겁니다.
그 형성된 예를 가인의 예로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께 제사 드립니까? 하나님한테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그렇잖아요. 제사를 하든 말든 하나님 당신이 내 제사를 받든 말든 나는 그냥 드립니다. 이래서 드린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화를 낼 이유가 없어요.
추석인데 아버지, 이렇게 용돈 드립니다. 받던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용돈 안 드려요. 그런데 아버지가 노망을 하셨는지 네 돈은 싫다 해 놓고 뒤 늦게 2시간 뒤에 동생이 와서 봉투에 담아 아버지, 맛있는 거 사 잡수세요. 그리고 다단계 그런 데 빠지지 마시고 엉뚱한 거 사지 마시고 그냥 맛있는 거 사세요.
그러니까 야야, 네가 돈도 없는데 뭐 나한테 줄 돈이 어디 있나? 하면서 받았을 때에 그 동생은 죽었습니다. 동생이 이제 형한테 밉상 보여서 이제 동생 학비 없으면 학비 안 대줍니다.
동생이 애 하나 더 낳아도 형이 이제 관심 없어요. 애 하나 더 낳아 다섯 명 되도 우유 값 안줍니다.
왜 그런 거예요? 왜 형이 삐지는 겁니까? 뭐 안 삐진다고요? 그런 인간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이면 안 삐져요. 그런데 꼭 상대방, 동생이냐 다른 형제가 와서 반갑게 맞이하면 삐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비교하면 삐지게 되어 있습니다. 비교 안하면 삐질 일도 없어요. 왜 그런 겁니까?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은 거예요? 분명히 그 창세기 3장에서 마귀의 자손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런데 마귀의 자손이라 했는데 구체적이지 않아요. 너무 관념적이고 너무 허황된 말이에요.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데? 뿔났는가? 얼굴은 녹색 얼굴인가? 피를 많이 먹어 이빨에 피 기름 끼가 더꼈는가?
마귀 어떻게 생겼지? 마귀는 인간이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마귀를 요청하지는 않아요. 그게 마귀든 부처든 관계없어요. 제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누가 인정해 주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인정해 줘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종교적 문제도 아니고 교리적인 문제도 아니고 일반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서 마귀는 지금도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종교적도 아니고 교리적이지도 아니라고 하는 말은 진짜 하나님은 종교적이지도 않고 교리적이지도 않아요. 전혀 종교적 경건한 모습도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요. 그냥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냥 살아가는데 마귀에 속한 사람이고 그런 겁니다.
그러면 첫 번째 시간에는 방금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인간에게는 왕을 요청하고 요새 같으면 왕 대신 뭡니까? 국가정책성이죠. 국가를 요청하고 그런 것을 요청하는 것을 봐서 인간자체는 마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게 확정 됐잖아요.
이제 두 번째 시간인데 두 번째 시간은 뭐냐 하면 여기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냐 하면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를 했죠.
그러면 본디오 빌라도 앞에 또는 사도바울 같으면 사도행전 마지막에 가이사 앞에 서게 되어 있으니까 구체적인 권력자 앞에 섰다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또 뭐로 보느냐하면 하나님의 앞에 섰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죠.
아버지가 없다면 그럼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살았습니까?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위해 살았습니다.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아버지, 그렇다면 그 아버지는 누구의 아버지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이죠.
예수님의 아버지이니까 누구의 아버지는 아니에요? 우리의 아버지는 여기서 탈락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에요. 아버지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라는 말은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에 폐쇄적이냐 하면 아들에게만 갇혀있고 아들이 아닌 자에게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제가 너무 쉬운 이야기하면서도 어렵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잖아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뭐로 나타났습니까? 아들로 나타나 버렸어요. 예수님이 아들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예수님 외에는 아들이에요? 아들 아니에요? 아들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들이 아니라면 예수님 외에 사람들은 어디서 태어났습니까? 어디서 만들어 졌습니까? 진짜 어려운 이야기합니다.
어디서 만들어 졌습니까? 물으면 그거야 아버지와 어머니에서 만들어 졌죠. 하잖아요. 제가 묻는 것은 그 실체가 어디서 만들어진 게 아니고 주체가 어디서 만들어 졌습니까? 입니다.
드라마 이야기 한번 해 볼 까요? 여러분, 낳아준 엄마가 중요합니까? 길러준 엄마가 중요합니까? 어느 쪽이 중요합니까? 낳아준 엄마는 실체를 줬지만 키워준 엄마는 주체를 만들어 줘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이름으로 주체를 형성시킵니다.
너는 행동을 똑바로 해! 네가 행동이 바르지 못하면 우리 집안에 망신이야! 이것이 그 사람을 주체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 어디가도 정신 똑바로 살아야 돼! 왜?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를 기대에 걸고 나를 응시하고 나에게 모든 꿈으로 쳐다보는 분이 계셔! 그분을 실망시키면 안 돼! 비록 그 분이 안 계시고 돌아 가셨더라도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면 안 돼!
그게 없으면 정신병자입니다. 그게 없는 인간은 없어요. 모든 인간은 그게 다 있어요. 사람은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있는 권력의 일부가 소급적으로 우리가 되는 거예요. 그 일부에서 우리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자리는 이미 성좌, 그 별의 자리, 이 세상의 현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온갖 것의 의미들이 교차가 되게 되어 있어요.
전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남자하고 결혼을 하고 집에 가보니까 어떤 젊은 남자가 형수님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본인은 형수가 되기 위해서 결혼 안 했거든요. 왜 갑자기 저 남자가 나보고 형수라고 했을까? 왜 형수라고 했을까요?
시동생이니까 형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형수 되기 위해서 결혼한 게 아니고 그 남자와 부부 되기 위해서 결혼을 했지 형수소리 듣고 싶어서 결혼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막상 그 남자와 결혼을 하니까 자동적으로 뭐가 따라 옵니까? 시동생한테 형수가 되죠. 그게 뭡니까? 우리는 그 남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 남자가 속해 있는 그 권력의 망 속에 내가 그 자리에 뛰어 들어서 거기에서 나의 주체의 자리를 배분 받은 거예요. 한 자리를 차지한 겁니다.
세상에 시어머니 보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보고 결혼했죠. 그런데 시어머니가 치매 걸렸는데 왜 내가 봉양해야 되죠? 이런 논리가 다 있습니까? 시어머니가 남편 어머니지 내 어머니가 아니잖아요. 내 어머니 아닌데 왜 봉양을 하는 겁니까?
노인이 불쌍해서요? 불쌍하면 동네에 불쌍한 노인네가 한 둘이 아닌데 왜 그것도 다 건사하지 왜 내 남편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왜 그것을 해야 됩니까?
이미 남편이 장악하고 있는 그 의미의 망, 의미의 사슬과 고리에 거기서 내가 며느리라는 주체를 나는 내 것으로 양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며느리라는 주체는 내가 완벽합니까? 미흡합니까? 항상 삐긋 거려요. 삐끗거릴 때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바로 마귀가 심어준 불안감이 생깁니다. 내가 며느리다워야 하는데 내가 어머니를 제대로 봉양 못했으니까 남들이 며느리라면서 그것도 못해 주나? 라고 욕하게 되면 나는 내 주체가 와해되죠.
그럴 때 나는 불안 불안합니다. 또 어디 가서 무슨 행동을 잘못하게 또 잘못했다고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요.
제가 어제 밤에 기흥에 있는 젊은 부부인데, 어떤 성도님 집에서 신세를 져서 하룻밤 지냈거든요. 서로 목사님 좋고 훌륭하십니다. 좋게 지냈어요. 훌륭하십니다. 해서 분위기가 좋았는데 분위기 괜찮아요. 괜찮다가 오늘 아침에 나오면서 어린이 집에 가는 아이를, 애 낳은 지가 오래돼서 애가 턱 넘어졌어요.
너무나 좋은 관계인데 그 귀한 아들을 제가 넘어뜨린 샘이 됐어요. 의도 한 게 아니지만 넘어뜨렸어요. 그럴 때 엄마 표정을 제가 보지를 못하겠어요. 차마 보지를 못하겠어요. 손님보다 더 귀한 게 자기 자식이잖아요.
그 때 상투적인 위로 말 있잖아요. 아이고, 야 많이 안 다쳤나? 해도 그게 그 기쁨이 없어지겠죠. 네가 뭔데 내 자식을 넘어뜨렸어? 이런 소리가 제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나는 그래도 그 가정에서 사랑받는 목사인데 목사의 주체성이 나의 어설픈 행동으로 말미암아 애를 키운 지가 너무 오래 된 몸의 부작용 때문에 넘어뜨려버렸어요.
내 주체가 흔들리기 시작한 거예요. 불안한 거예요. 그 불안은 누가 줍니까? 마귀가 준 겁니다. 마귀는 어디에 있다고요? 모든 곳에 마귀가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래 가지고 제대로 된 목사냐? 사랑은 베풀지 않고 애를 자빠뜨려? 이렇게 막 귀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동안 고이고이 유지했던 나의 괜찮은 목사의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면 관악산에 올라가야 됩니까? 요새 새로운 용어, 목맴사 해야 합니까? 나는 집사님의 귀한 애를 그것도 대접했던 애를 넘어뜨린 나쁜 인간입니다. 가족아, 미안하다 이래가지고 죽어야 돼요?
죽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불안했다는 그것이 이미 문제가 되죠. 불안했다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다 쓰잘데기 없는 헛짓이라는 겁니다. 이미 나는 너를 아는데 네가 행색 깨나하고 네가 반듯한 짓을 깨나한다는 것이 얼마나 그것이 평소에 니 주체를 위해서 본디오 빌라도 앞에 행했던 행동을 네가 지금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거예요.
반듯하게 살아요? 세상에 그것은 최고의 사기입니다. 반듯할 것 같으면 십자가에 죽지를 않았습니다. 오늘 13절의 말씀에 뭐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섰던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그분이 왜 하나님 앞에만 서면되지 왜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섭니까? 출애굽을 시도 하는 거예요. 우리 주체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주체를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섰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선거예요.
그냥 중보자가 아닙니다. 죄를 의로 전이 시키는 기능을 하는 분이 중보자에요. 죄는 전부 다 가져 오세요.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으니까 고물, 고물, 고물 다 가져와야 돼요.
고물을 고치지 말고 다 가져와야 돼요. 고물일수록 좋아요. 그것이 바로 천국은 죄의 조합들이 만드는 것이 천국입니다.
어느 날 방송을 보니까 중국에서 플라스틱 폐품을 버린다는 거예요. 폐품을 버리면 플라스틱이 깨지겠죠. 그러면 아주 세밀한 플라스틱 조각으로 갈라지면 그것을 플랑크톤이 먹죠. 프랑크톤이 먹으면 프랑크톤을 먹이로 하는 작은 고기가 먹을 것이고 그 작은 고기를 큰 고기가 먹을 것이고 그러면 큰 고기를 누가 먹느냐 하면 인천에서 잡아서 부산에서 잡아서 우리나라 식탁에서 어른들이 먹을 거죠.
그러면 플라스틱이 어디에 저장이 되느냐 하면 우리의 체내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고질병인 암의 유발 요인이 될 수 있겠죠.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천국이 없는 거예요. 천국이 있기 위해서 우리가 뭐 해야 됩니까?
플라스틱 조각, 죄의 조각조각들이 돼야 돼요. 의가 있으면 안돼요. 의가 섞여버리면 안돼요. 의인은 일방적으로 한 쪽에서 준비해요. 우리가 의를 준비하면 안돼요.
우리는 죄만 준비하면 돼요. 그것도 못합니까? 죄 준비하는 그것도 못해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이죠.
그냥 그대로 가져와요. 그것 가지고 자살하지 말고 좋았어! 건수 좋아! 야 이것은 한 5키로 나가겠네! 내가 쳐줄게! 괜찮아! 그것 그대로 가져와서 주님의 성전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성전 안에는 모든 장치와 그 구조는 무슨 구조이냐 하면 죄를 의로 바꾸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 구조가 확대된 것이 천국의 구조입니다.
천국이 보고 싶어요? 궁금해요? 성전의 구조가 천국의 구조입니다. 이미 시내 산에서 모세가 성전의 구조를 봤어요. 그것을 그대로 모형을 따서 지상에서 성막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성막의 구조가 뭡니까?
성막의 구조가 처음에 동쪽 입구에는 뭐가 들어온다? 죄를 뒤집어 쓴 양이 들어오죠. 그 양을 잡고 그 중간에서 피를 내잖아요. 그 피가 뭐가 만납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만나죠. 영생 주기로 한 약속과 만나서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그 피를 흘림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효과를 양을 바친 죄인이라고 속죄제를 바친 자에게 뭐가 주어집니까? 시작한 것이 주님이기에 그 결과가 우리에게로 효과로 되돌아오도록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만 구원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 본인의 구원이 주께서 채택시킨 죄인이라는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구원의 영생의 효과가 도달할 때까지 주의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죄가 뭡니까? 이러죠. 죄가 뭡니까? 한 시간 동안 계속 이야기했는데요. 죄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나답게 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센 쪽을 요청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결과물이에요. 이 세상에서 마귀가 의미를 쥐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생산된 것이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겁니다.
아까 송재원 성도가 빵을 들고 왔습니다. 하나의 예니까 섭섭해 하지 마시고 나는 촛불 키는 케이크를 먹고 싶은데 그런데 그 쟁반에는 그 케이크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크림빵 먹을 때 단팥빵 먹을까? 그것은 주어진 곳에서 내가고를 뿐이죠.
이게 그 의미를 고를 때 그것이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 겁니다. 김춘수의 시가 나와요. 이미 확정된 의미, 확정된 지금, 또는 확정된 인품, 이것 중에서 네가 어떤 것을 할래? 골라잡아라!
아버지! 왜? 어느 것 골라잡을까요? 너는 우리 가문을 위해서 너는 의사가 돼야 돼! 그 후부터 의사가 되도 미안스럽고 안 되면 더욱더 미안스럽고 합니다. 참,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해서 내가 의사가 돼야 되는데 내가 의사 안 되고 김밥 집에서 이게 뭐냐?
무덤에 가서 아버지, 죄송합니다. 의사 하려고 소원했는데 저는 김밥집 장사한다고 이렇게 왔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내 아들만큼은 의사를 꼭 시키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말이죠.
왜 그런 식으로 나옵니까? 이미 세뇌 받은 거예요. 세뇌 받은 게 단팥빵 할래? 크림빵 할래? 쉽게 말해서 인간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를 우리는 내가 사전에 의논한적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어진 가운데 상황에 밀어붙여서 내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을 가지고 회고적 존재라고 합니다.
이미 되고 난 뒤에 그것을 뒤늦게 그래, 이게 나야! 라고 회고하듯이 자기의 주체라고 확정짓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모든 게 다 그래요. 인간은 환상에서 자기 세상을 꾸미는 기존 의미망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 벗어나는 훈련을 그 누구로부터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행복이지 이 땅 말고 다른 세계를 쳐다보는 것은 그런 식으로 누구로부터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뭡니까? 이는 기존에 단팥빵이나 크림빵 중에 하나에요. 이것은 우상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선택을 강요당했어요.
기독교 가정에 기독교 예수 믿고 불교 가정에서 부처 믿는 거예요. 이것은 강요당한 겁니다. 에이 목사님, 불교신자 가운데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잖아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부처님도 부처 아닌 부처 같은 예수든지 아니면 진짜 예수님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대부분 부처 같은 예수에요. 진짜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신은 신이 아니거든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지만 진짜 아버지 하나님은 누가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이라고 이미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정했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끝났어요. 백날 성공해야 소용없습니다. 예수님만 아는데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자꾸 모방하죠.
모방하지만 그 모방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주체를 위해서 불안 불안하죠. 내가 예수를 믿을까? 부처를 믿을까? 어느 것이 나한테 유리 할까? 이것은 나는 무조건 천국 가야 하는 그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써보는 것에 불과해요.
일치되지는 않아요. 5년 전에 믿은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