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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08강, 109강) 특수성과 보편성, 결과와 복음 150409강의고린도후서

유튜브(108강, 109강) 특수성과 보편성, 결과와 복음 150409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108강

109강

이미아(IP:180.♡.90.76)

15-04-17 18:53

108강-YouTube강의(특수성과 보편성)150409-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08강, 제목은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좀 어려운 제목을 정해봤습니다. 여기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제목을 정하게 된 것은, 우리가 흔히 천국가려면 고난을 받아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선지자, 스데반집사, 그리고 예수님, 사도바울, 한결같이 그 분들은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고난 없는 생애가 아니고 고난과 더불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도 천국가려면 고난도 있었다고 이야기했고, 빌립보서 1장 끝에도 믿음과 더불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구원이 나오니까, 아, 구원받기 위해서는 고난이 같이 있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정하는 증거로써 고난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 있으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너무 고난이 없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그런 불안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자기가 사도냐 아니냐를 결정하면서 가짜사도, 마귀에 속한 가짜사도들은 고난이 없는 반면에, 자기는 사도이면서 고난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우리 귀에 들릴 때는, ‘그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필히, 반드시 고난이 있어야 돼.’ 그렇다면 고난을 의도적으로 유발하려는 성향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제목을 ‘특수성과 보편성’이라고 이렇게 정한 이유는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경향이 굉장히 농후해요. 물론 우리뿐만 아니고 실제로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 보면 베드로가 한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 하였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또는 구원받기 위해서, 또는 영생의 날을 위해서 제가 옥에 갇히는 것도 각오했고 심지어 죽는 데도 저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 이만하면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됐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죠.” 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베드로야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자, 베드로와 같은 자기 각오와 강한 결심, 왜 그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호응하지 아니하시고 그걸 동조하지 아니하시는 걸까요? 왜 그것을 격려하지 않으시는가요? 그것은 바로 천국이라는 게, 영생이라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천국가려면 주님도 고난 받고, 스데반 집사도 고난 받고, 선지자도 고난 받았으니까 우리가 천국가려면 마음 단단히 먹고 이제는 죽기 살기로, 어떠한 이 세상에서의 수모와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래, 고난아 와라! 고생아 와라! 내가 그걸 이겨내서 기어이 천국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리라”는 마음의 결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근데 그렇게 결심하는 그것이 우리가 하기 전에 이미 베드로가 이야기했고, 그것이 가짜로 판명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고난으로 구원받으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어설픈 구원론이고, 그것은 자칫 잘못하게 되면 힘들어도 교회에 충성해야 되는 교회 영업용 멘트로 이용당할 수가 있습니다. “힘들수록, 경제가 어려울수록 헌금 더 해야 되고, 여러분이 바쁠수록 오히려 시간을 짬을 내서 교회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데 하나님의 일에 기여하는 바가 됩니다.” 라는 쪽이 되고. 그렇게 지시가 왔을 때 그걸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심지어 자학적인 것, 자기를 때려가면서 어떤 쾌감 같은 것을 느껴가면서 충성 봉사하는 것, 그것이 과연 자신을 구원하는 고난이라고,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할 때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결심과 단호함과 대단한 그러한 각오를 왜 물리치십니까? 상당히 순수해 보이고, 순진해 보이는 그 각오와 결심도 천국 가는 방법과 상관없는 것으로 주께서는 물리치십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그 천국 가는 고난, 영생 얻는 고난, 구원받는 고난은 어떤 고난이냐 하면, 인간이 시작하는 고난, 또는 고생이라는 것은 구원을 위하여, 또는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이라는 것은, ‘복음에 의해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고난이어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기여했다는 티를 내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자학적인 것, 자기를 때려가면서 하는 고난은 가짜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고난"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특수한 고난"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보편적인 고난은 고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수한 고난입니다. 이 특수한 고난은 내가 구원받는 것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일에 보탬이 되고자 설치면 설칠수록 특수한 고난과는 전혀 거리가 먼 보편적 고난이 되고 맙니다.

특히 보편적 고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고자 시도하는 보편적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걸 마귀한테 넘겨버려요. 마귀한테 넘겨버리면 인간은 제풀에 자기가 지쳐버립니다. ‘이 고난도 구원받는데 도움이 될 거야. 이 고난도 나중에는 하나의 보상으로 주어질 거야.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실 거야.’ 이렇게 힘들게 하다가 나중에 제풀에 자기가 지쳐가지고, ‘더 이상 못합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더 이상은 못합니다.’ 하고 제 풀에 나자빠지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 고난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특수한 고난으로 만들었느냐 하면, 고난이라고 하면서 먼저 그 전제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복으로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복을 받은 자만이", "복을 받게 된 자만이"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을 제가 읽어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핍박을 받으라가 아닙니다. 핍박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고난이 주어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왜? 바로 그것이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의 시작을 우리 쪽에서 시작해서 우리가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시작은 하나님 쪽에서 천국을 시작하게 되고, 그 시작이 우리한테는 고난이라고 느껴지지만 시작은 복의 이름으로 옵니다. 복이 넘실거리면 우리한테 고난으로 닥치는데, 그 고난이 내가 생각하는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신바람이 나는 거죠.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은 찡그려야 된다, 울어야 된다, 아파야 된다, 이렇게 서글픈 상황을 가지고 고난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이라는 것은 내가 시작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신바람 불고 신나는 경우를 말합니다. 11절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너희는 복이 있나니”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예수, 나를 위하여 너희들이 욕 얻어먹을 때 너희들은 신나지 않았느냐? 참 기쁘지? 즐거웠지?” 라고 언급을 하시는 거예요. 찡그려가면서, 억지를 쓰면서, 분수에 넘치는 헌금을 해가면서, 투자를 하고, 교회 충성봉사해가면서, “주여, 이렇게 주를 위해서 헌신봉사하고 있으니까 하나님 제가 구원받은 사람 맞지요? 영생 주는 것 맞지요? 저에게 구원 주는 것 맞지요?” 이런 식으로 악을, 악을 써가면서 하는 것은 그건 자학적인 거예요. 이거는 몸부림치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니가 니 스스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데.....,” 그런 구원과 그런 영생을 하나님께서는 주신 적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은 예수 이름으로 욕 얻어먹고 핍박받는 것과 더불어 오는데, 막상 성도 당사자는 그게 그렇게 신이 나고, 고맙고, 감사해지는 겁니다. 이게 예상도 못한 특수한 고난이에요.

고생을, 나를 위한 고난이라고 잘못 해석하지 마세요.

이미아(IP:180.♡.90.76)

15-04-17 18:54

109강-YouTube강의(결과와 복음)150409-이 근호 목사

109강, 제목은 ‘결과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라고 말을 할 때에는 예수님이 홀로 행하셔가지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데 그 결과가 복음이고, 그 주님의 행하심의 연장선에서, 그 능력이 덮침으로써, 우리는 영생과 구원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복음으로 시작해서 복음으로 모든 구원이 마감이 되는데, 결과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인간이 만났을 때, 인간이 곱게 이해하면서 받아들이지 않게 되어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인간 내부에, 복음에 저항하고 반발하는 요소가 인간 내부에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왔어도 순하게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복음과는 다른 요소들이 들추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게 들추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오히려 들추어지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도리어 구원받은 사람 맞다고 확정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이게 앞뒤가 잘 안 맞는 것 같지요? 복음에 대해서 순하게 받아들이면 그게 성도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성도는 그것이 아니고 복음이 왔을 때 강력하게 저항하는 요소가 그게 도출될 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성도 본인이 ‘야, 내가 복음오기 전에는 이토록 죄인인 줄 몰랐는데 복음이 오고 난 뒤에는 이만큼 죄인이구나! 그런데 이 죄인마저 주께서는 이미 처리했다는 것이 오직 주 앞에 감사할 것 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주님만 영광 돌리는 그런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복음을 순하게 받아들이면 복음이 하나의 자기 구원받는 용도로 활용될 뿐이죠. 그건 복음을 이용하는 것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는 하나님이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이 구약에서 유명하게 된 이유는 그가 죽을 때가 되었음에도 울면서 기도해서 사흘 만에 15년 동안 더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기적을 입은 사람이어서 그렇게 유명합니다. 이 말은,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더 수명이 연장되었다는 그 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뉘앙스를 안겨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결정한, 운명적인 모든 것이 결정 났다 할지라도 이게 유도리-ゆとり(여유)가 있다는 거죠.

우리가 기도하면 어떤 나름대로의 결정된 것도 뒤엎을 수 있는 융통성, 여유를 하나님께서 여유의 자리를 허용했다는 희망 같은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히스기야가 15년 살았다는 그 내용을 통해서 사람들은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말씀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어떤 요소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나의 기도가 결정된 사항도 뒤엎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내 선택에 의해서 성사가 될 수 있다는 나의 가치 희망성.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아! 말씀 세계가 다가 아니구나! 내가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내 운명도 바뀔 수가 있구나! 내 기도에 따라서 내 운명도 결정될 여지를 하나님께서 허용했구나! 히스기야를 봐라. 분명히 죽어야 되는데 15년 연장했으니까. 따라서 내 구원과 내 복 받는 거, 내가 잘 되는 거, 내가 건강하고 수명 연장하는 거, 그거 내 손에 달렸다.’ 라는 여지를 남기게 되죠. 근데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왜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죽기 싫어서 더 살고 싶다는 욕심, 히스기야의 탐욕, 그게 욕심이거든요.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바울은 빨리 죽고 싶다고 했어요. 근데 히스기야는 더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거는 분명히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욕심에 불과합니다. 근데 그 욕심을 일으킬 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욕심을, 히스기야가 15년 연장되면서 더 추가된 인생 가운데서 히스기야가 한 짓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15년 살았다는 것이 그냥 맨탕(부질없이)으로 15년 세월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15년 살았기 때문에 저질러야 할 죄가 나옵니다. 그 죄는 그냥 사적인 죄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과 관련된, 유다 나라의 멸망과 관련된 죄를 짓게 됩니다. 왜? 히스기야는 왕이기 때문에. 왕 개인의 사적인 죄는 유다 나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것도 모르고 자기기 15년 더 살면 굉장히 신나는 줄로 알고 있었어요. 내가 15년 더 산 것이 내가 속해 있는 유다 나라에 어떤 해악을 끼친다는 것을 생각할 그러한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죠. 살고 싶으니까. 죽음 앞에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따라서 히스기야를 15년 살게 했다는 것은, 이거는 모든 보편적인 인간들의 그 속성을 히스기야가 그냥 솔직하게 대변해주는 겁니다. 울면서 기도했죠. 얼마나 탐욕이 강했으면 울면서 기도하겠습니까? 반드시 이거는 이루어주십사 하고 강력하게 요청하거든요. 그 강력하게 요청하는 그 마음을 가진 히스기야 본인은 무슨 마음으로 했는지를 본인은 몰랐죠. 이제 히스기야가 15년 더 살겠다고 버틴 그 마음이 남긴 결과가, 오늘 제목이 결과와 복음이니까, 그 결과가 복음에 위반하는, 복음의 내용에 정면으로 배치가 되고, 복음에 대해서 반 복음적인 요소를, 15년 동안 완전히 그것을 토해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더 연장했는데, 연장전에 들어갔던 그 내용으로 인하여 유다 나라가 멸망의 징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래도 더 살고 싶습니까? 흔히 심방 가서 어떤 연세 많은 장로님이나 집사님에게 뭐라고 합니까? “장로님, 집사님 더 살아야 됩니다. 의인은 간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응답받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제가 간절히 기도해서 반드시 집사님은 나을 거라는 그 희망이 집사님, 장로님을 더 살게 해주실 겁니다. 믿읍시다.” 이렇게 심방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죠. 기존 목회자들이 그런 기도를 하죠.

저는 세상을 잊으라고 합니다. 그 가고 싶은 천국에 남보다 먼저 가게 되니 정말 하나님께 고맙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저는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정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도 죄의 일종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히스기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뭘 보여주려고 했는가.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그 본능이 남긴 그 더러운 모습이 뭐냐, 열왕기하 20장 12절부터 나옵니다. 바벨론 왕이, 바벨론은 유다 나라 히스기야를 멸망시킬 그 왕입니다. 바벨론 왕 부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의 사자가 왔을 때 히스기야 왕이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께 혜택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았는지, 그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창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 보물고에 각양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바벨론 사자한테 다 보여준 거예요.

히스기야가 이걸 보여준 의도는 그렇게 간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유다 나라와 함께 있으니까 건드리지 마라는 그러한 모양새를, 자기 과시를 바벨론 대국한테 감히 하고 싶었던 거죠. “하나님께서 나를 15년 동안 살게 했으니까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잖아? 우리보고 초라하다고 얕보지 말고 우리와 함께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해서라도 함부로 우리나라를 넘봐서는 안 된다.”는 이런 정치적인 전략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게 바로 비 복음적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자기 딴에 하나님을 높인다고 높이는 그 방법이 욕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유다 나라가 착해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가 착해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해주는 것은 성도가 못났기 때문에 구원하는 겁니다. 못났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님을 보고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요새 말로 하면 자기가 잘났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더 살아봐야 나올 수밖에 없는 자기 자랑거리, 자기 자랑질, 그게 자기도 모르는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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