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4중국 문등 - 레위기 강의(제9강) -- 재재재정리자유게시판레위기

14중국 문등 - 레위기 강의(제9강) -- 재재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4중국 문등 - 레위기 강의(제9강)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정석훈 목사)

------------------------------------------
목사님, 레위기가 무엇입니까?
목사님, 왜 레위지파가 대표자입니까?
목사님, 생존과 생명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그러면 생명은 어떻게 공급을 받습니까?
목사님, 속죄제물을 드리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목사님, 죄를 지은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목사님, 내가 죄인이라고 여기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 떠난다고 하면 도대체 어디로 떠나면 됩니까?
목사님, 할례가 있는 땅은 도대체 어떤 땅입니까?
목사님, 그러면 그 땅은 언제 떠나면 됩니까?
------------------------------------------

퀴즈 앤 앤설 !!

주님께서 "첫 사랑을 잊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그런 마음으로 마지막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강의를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렇게 지금이 첫 시간이라고 하면 여러분이 "목사님, 레위기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던지지 싶은데, 그러면 저의 답변이 나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13개 지파 중에서 한 지파를 대표자로 세웠는데, 그 지파가 곧 레위지파입니다" 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이 "목사님, 왜 하필이면 레위지파가 대표자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이 레위지파는 여느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그들은 생존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다른 지파들의 대표자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생존이 아닌, 생명의 일을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면 "생존을 위해서 하는 일과, 생명을 위해서 하는 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존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가 노동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이마에 땀을 흘려서 땅의 소산을 먹는 일, 그게 생존에 관한 것이죠. 반면에 생명의 일은 무엇인고 하니, 장차 오셔서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피 흘리시는 그분의 모형으로서, 그 사랑과 심판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생명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열심히 땅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그 결실로 해서 밥을 해먹고, 또 고기도 먹고, 가끔 과일도 먹으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70조의 세포가 에너지를 공급받아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생존은 그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생명은 어떻게 공급을 받습니까?" 라고 한다면, 생명은 속죄제물로 제사를 드림으로서 공급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또 질문하기를, "그렇게 속죄제물을 드린다면,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속죄제물이 의미가 있게 피어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정작 그런 죄를 지은 기억이 없다는 겁니다. 물론 생존하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그리고 남을 위해서 가끔 밥을 퍼주기는 했지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죄를 지은 의식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고 하니, 무지막지한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주신 율법에 우리가 해당되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잘났다고 하는, 즉 "내가 내 위주의 테두리 안에서 잘난 척을 했고, 주님을 목숨 바쳐서 사랑하거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나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렇게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라고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내가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여기는 나 자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 '우리' 속에는 자기 자신이 들어있어서 역시나 가짜 '우리'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구원을 받는 '우리' 라는 집단은 이 땅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기에, 그래서 이 땅을 떠나야만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땅을 떠나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떠나면 됩니까? 땅이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설령 간다고 해도 우리끼리 모여있으면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거기에 대한 저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데, 즉 할례가 없는 쪽에서 할례가 있는 쪽으로 떠나면 된다는 겁니다. 할례가 있는 곳으로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이 땅의 공간개념이 아니라, 할례가 없는 쪽에서 할례가 있는 쪽으로 떠나는 것인데, 그렇다면 "할례가 있는 땅은 어떤 땅입니까?" 라고 한다면, 할례가 있는 땅은 안식한 땅이고 평안한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안식케 하는 사건으로 인해서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답변을 드릴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질문하기를, "그 땅은 언제 떠나면 됩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 안식의 땅으로 떠나는 시점은, 그것은 우리가 알아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건을 일으키실 때, 그래서 우리가 정들었던 땅이 모두 다 불바다가 될 때, 그러면 이미 미리 준비가 된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의 땅은 우리의 피와 우리의 거룩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피로 안식케 하는 땅이라는 겁니다. 생존의 피가 아니라 생명의 피로 안식케 하는 땅이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이죠. 이미 그 땅이 마련되었기에, 우리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이여, 정말 기다렸습니다.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멘 !!)

생존과 생명, 고생과 고난 !!

방금 생존과 생명을 언급했는데, 이런 생존과 생명을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보면, 고생과 고난으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밥을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고생입니다. 반면에 고난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는 고생하기 싫은데 주님께서 허락하신 고생을 두고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음 중에서 고생과 고난을 가려보세요. 이것은 신앙문제가 아닌 그냥 기초적 응용문제입니다. 첫째는 백 평짜리 아파트를 3채 소유한 것이고, 둘째는 15만평의 부동산을 상속받은 것이고, 그리고 셋째는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인데, 이 중에서 어떤 게 고생이며 또 어떤 게 고난입니까? 미리 말씀을 드리면, 첫째와 둘째는 고난이고 셋째가 고생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시험 가운데 주어지기에 말이죠.

그게 신명기 8장에 나오는데, 장사가 잘되어서 수입이 많아지고 큰집을 짓고 살아갈 때가 제일 위험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는 언약을, 즉 대속물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잘나서 복을 받았다고 우길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신 8:13)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신 8:14)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신 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반면에,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때, "내가 얼마나 죄인이었으면,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것을 주십니까?" 라고 하면서, "생명은 이런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노선으로 주셨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좁을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이죠.

이 놈의 백 평짜리 아파트를 팔든지 해야지 !!

백 평짜리 아파트를 청소하는데 얼마나 힘들고, 또한 많은 유산을 관리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생명의 노선이 따로 있음을 믿기가 얼마나 힘들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은, 그게 고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생입니다. 왜냐하면, 빨리 다른 교회로 가서 자신의 자리를 점유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에 말이죠.

지금 여러분은 응용문제에 말려들었는데, 그러니 아무런 일도 없고 평안할 때, 사실은 그때가 위험하다는 겁니다. 뭔가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그만 '훅' 갑니다. "나는 이만큼 잘났고 복을 받은 존재이다" 라고 할 때, 지옥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됩니다. 많은 재물을 주시더라도 그것은 생존노선이며, 생명노선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욥처럼, 솔로몬처럼 아무리 부자가 되더라도, 그것은 헛되고 헛된 요소 중의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휴, 너무 무거워요 !!

그렇다면 여기서 방금 제가 한 질문 가운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레위기를 공부한다든지 읽을 때, 1장 2장 3장을 보다가 그만 덮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것은 달리 말하면 "법이 너무나 많다" 라는 것인데, 즉 "법이 내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쌓여서 짓누르고 있다" 라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하셨는데, 이 교회는 왜 이렇게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지우느냐는 겁니다. 목사님, 제 말이 맞아요? 전혀 아니라는 표정인데(ㅋㅋ),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말씀을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의 몸에 맞지요. 그러니 우리는 레위기를 읽으면 그 무게에 그만 주저앉고 마는데,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주저앉으라고 레위기를 주셨다는 겁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다시 말해서, "내 생존에 이렇게 바쁜데 레위기를 어떻게 지킵니까? 지킬 능력도 안 되고, 또한 지킬 마음도 없습니다" 라는, 그 자리가 곧 안식의 자리인데, 왜 그렇습니까? "니가 분명 지키지 못한다고 했지? - 예, 했습니다" 라고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안식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은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일단 억지로라도 헌금을 해봐 !!

헌금을 예로 들면, 헌금을 하기 이전까지는 교회헌금에 대해서 자기는 초월했다고 생각했지만, 헌금을 하는 순간 다시 "이 헌금을 꼭 해야하는가? 라는 생각이 동반해서 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니까 드려야지" 라고 하면서 하는 것은 온전한 헌금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지로 드리는 헌금이란 말이죠.

그런데 성경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그렇게 억지로 드리게 하기 위해서 기쁘게 드리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냥 헌금을 하면, 우리는 억지로 드리는 것을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너, 잘났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셨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왜 나 스스로는 구원되지 않는가?" 라는 것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래서 헌금을 억지로 내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여기서 요한복음 12장 31절에서 33절을 보겠습니다.

(요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12: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

지금 제가 마지막 시간이라서 쉽게 가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여기 32절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이라고 하는데, 이 땅은 누가 살고 있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살고, 예수님께서 사셨던 땅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땅에서 들리면 어떻게 됩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 들리는 것이 우리 소원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자 하는 주님은 이 땅에서 사시는 분이 아니라, 땅에서 그만 들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은 어떻게 됩니까? 이 땅은 불로서 심판을 받아서 사라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두 사람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어떻게 됩니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만 남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시고 다른 한 사람은 역시 남겨두게 된다는 겁니다.

(마 24: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 24: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땅을 심판하시는 주님 !!

그러니 주님께서 이 땅에서 들림으로 말미암아서, "왜 나를 죽였는가?" 라고 하면서 우리 인간들에게 화를 내고 닦달을 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땅 자체를 상대로 해서 전쟁을 해오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에는 그만 불로서 이 땅을 심판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땅아, 나를 유혹하지? 그래서 내가 너희 땅의 속성대로 이 땅에서 죽어주었다. 하지만 땅아, 이제는 그만 헤어지자. 나는 이 땅에서 들려야 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땅을 상대로 전쟁을 하셨지요. 땅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을 밝혀내시고, 땅에서 들림으로서 땅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 땅을 세상이라고 하는데, 또한 세상이 곧 땅이고 말이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기쁜 소식을 주는고 하니, 이게 여덟 번째 기쁜 소식이지 싶은데, 아무튼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에게는 책임을 일체 묻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잘못을 하던지, 잘못을 하지 않던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의 계획에는 전혀 차질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대단한 탕자의 믿음 !!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에 보면, 소위 '탕자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탕자의 안목이 대단합니다. 알다시피 그는 자신의 분깃을 받아서 허랑방탕하게 놀다가 모두 다 허비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돼지보다도 더 못하게 살아갈 때,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믿음이 대단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눅 15: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여기서 욥기 35장 6절에서 8절을 보겠습니다.

(욥 35: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욥 35: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욥 35: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뿐이니라

그냥 '그러려니' 하시는 주님 !!

이것은 엘리후가 한 말인데, "인간이 죄를 지은들, 그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그리 영향이 있는가? 라는 겁니다. 즉 피조물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에 그만 차질이 생겨버리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죠. 전혀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제대로 된 믿음인데, 우리에게는 왜 그런 믿음이 없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실패한 것이 하나님의 일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죠.

오늘은 날씨가 참 맑았다. '그러려니' !!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일기를 씁니다. 그래서 "오늘은 날씨가 참 맑았다" 라고 하면, 그 뒤에 반드시 '그러려니' 라고 써넣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가 왔다. 그러려니" 라고 쓰고, 또 "오늘은 현숙 씨를 만났다. 그러려니" 라고 쓰라는 것이죠. 그만 그만한 인간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렇게 80년을 살다가 죽어도, 역시 '그러려니'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인생은 누가 뭐라고 해도 안개이니까 말이죠. 즉 죽어야 했기에 죽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런 잔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이 아니면 너는 믿을 구석이 없다" 라고,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땅의 사람으로 양육을 시켜놓았어요.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최면을 걸고 세뇌를 시켰는데, 즉 "이 땅에서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지옥에 가는 거야. 알겠지?" 라고, 그렇게 세뇌를 시켜놓았다는 말입니다.

어느 단체나 모임에 가도 모두가 그런 식입니다. 낚시 동우회, 당구 동우회, 골프 동우회, 교회 등등, 그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에는 다들 각각의 도사들이 있는데,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모임에서 나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래도 두 개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양보하면서, 그렇게 고개를 숙이면서 우리의 몸을 굴려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하면 할수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점점 더 쌓여가고, 더구나 거기에 레위기까지 읽게 되니까, 이 세상이 주는 법칙은 법칙도 아닌데, 짐이 너무나 무거워지는 겁니다. 마치 남대문 시장에서 음식을 머리에 잔뜩 이고 배달하는 아줌마와도 같지요. 완전히 묘기 대행진인데, 그처럼 우리의 머리와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이 가득 가득 올려져있다는 것이죠.

교회에서는 교회법을 지켜야 하고, 국가의 법도 지켜야 하고, 가정에서는 아버지로서 아버지의 법도 지켜야 하는데, 물론 아내의 잔소리도 만만치가 않아요. "당신은 이제 사랑이 식었어. 그렇지?" 라고 나오고, 운전을 해도 옆에서 "운전을 그렇게 밖에 못해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핸들을 옆으로 그냥 꺾고 싶지요(ㅋㅋ). 온갖 짐들을 너무 많이 져서 쓰러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만 자살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내가 어쩌라고?

그러면 주님은 "그래서 내가 어쩌라고?"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인간들은 "주님이 레위기에서 그런 잔소리를 했잖아요. 지키라고 말이죠.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제사를 드릴 때는 어떻게 하고, 또 모종을 할 때도 다른 씨는 뿌리지 말고 어쩌고 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아하, 나는 또 뭐라고.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너희들을 할례를 받는 과정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죠.

주님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주어야만, 그곳에서 잠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는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애굽에서처럼 기존의 알고 있던 생존이 아닌 다른 생명의 방식으로, 즉 생명나무의 방식으로 깔끔하게 바꿔치기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애굽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도 역시 주님의 은혜로 돌아오게 되는데, 마치 컨베어벨트에 실리듯이 주님의 피에 실려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명처럼, 또한 24장로들처럼 말이죠. 그러니 피만 발리면 된다는 것이죠.

(계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주님은 그것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데, 들어갈 때도 언약 안에서 애굽에서 종노릇을 했고, 또한 나올 때도 언약 안에서 빠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지금은 바벨론이 도대체 어디입니까? 우리가 거기에 모여야 빠져 나오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신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곧 바벨론이고 애굽인데, 이 애굽에서 나오는 법칙은 하나밖에 없어요.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한다는 겁니다.

(출 12: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너희들은 어린양의 피만 발라라 !!

그 출애굽의 법칙이 요한계시록에서 그대로 실현이 되는데, 즉 "너희들의 그 어떤 행위도 기대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어린양의 피만 발라라" 라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그래도 들었는데, 그런데 그 방식이 너무나 유치해요. 그래서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이니 누구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그런 유치한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즉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십자가를 믿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데, 만약에 다른 사람이 자꾸 자기를 보고 신앙심이 없다고 하면,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는지 믿지 않는지, 그동안은 목사님이 믿는다고 해서 믿는 줄로 확정을 했는데, 그런데 목사님도 타인이라고 하면, 그러면 내가 믿는 것을 어떤 근거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자기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해지고 미워지고 싫어지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고 수술을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째고 수술해서 꿰매고, 또 째고 수술해서 꿰매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평생 동안 주님께 까불다가 수술을 받은, 그런 수술자국들만이 가득히 남게 된다는 겁니다. 명품 아파트를 샀다고 까불다가 수도관이 터져서 망신을 당하고, 또한 명품가방을 샀다고 까불다가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이죠. 그런 자국들만 가득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시작해서 200명 정도가 되었을 때, "이만하면 되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교인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면 "주여, 어떻게 저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오게 되는데, 주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만나게 해주시는 겁니다.

지금부터는 "땅에서 들린다" 라고 하는 의미를 레위기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는데, 레위기 25장입니다. 6절에서 10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레 25:6)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레 25:7)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
(레 25: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레 25: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레 25:10)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레위기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땅에서 들리는가?

여기 6절에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라고 하면서, 안식년에 관련된 것들이 나오는데, 하지만 이 말씀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키지도 못하면서 지키려고 하면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진행하신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진행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참여하게 되었고, 그 참여된 것에 대해서 그들은 감사해야 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왜냐하면, 이 방식이 유치하기 때문에 말이죠. 그 당시에 6년 동안 땅을 갈고 1년을 쉬었다고 해도, 그렇게 안식년을 지켰다고 해서 믿음이 있고 없다는 것을 분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신약시대의 믿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발각되는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가 곧 믿음이 있는 자라는 겁니다. 주님은 늘 우리의 뜻과 다르게 일하시고, 우리의 일을 보장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위태롭게 만들어서, 교회에 오기 싫은 마음을 주시는, 그렇게 갈등을 조장하시는 주님이 곧 살아계신 주님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두 발을 떼도록 하시는데, 즉 미련을 두지 말고, 집착을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은 이 땅에서 들렸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곳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이 몸에 맞춘 옷처럼 그야말로 우리에게는 딱 맞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혼자서 가시고, 저는 이 땅에서 더 살다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레위기에 왜 희년(禧年)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유치한 방법이 가득한 레위기로 돌아가서 다시 살펴보아야만 됩니다. 레위기에 보면 '희년(禧年)' 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50년째인 이 희년은 말 그대로 즐거운 해인데, 즉 포로들과 노예들이 해방이 되는 해라는 겁니다.

(레 25: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레 25: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레 25: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레 25:13)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기업으로 돌아갈지라

그렇다면 희년은 누구에게 즐거운 해입니까? 그리고 누구에게 짜증나는 해입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무런 자기 공로도 없이, 수고도 없이, 공짜로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을 다시 되찾았을 때, 이들만큼은 하나님께 희년이라는 제도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죠.

반면에 누가 희년을 싫어하겠습니까? 종을 소유했던 사람이나, 토지를 본래 소유한 것보다도 더 많이 가졌던 사람들은 싫어하는데, 그러니 여기에서 분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마치 남탕에 가서 "1234번 차주가 계십니까?" 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데, 그것은 분리를 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일어나서 그 목욕탕에서 나와야하니 말이죠. 즉 "혹시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통해서 분리시키는 것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거지꼴로 들어와라 !!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먼저 마련하신 후에, 아담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천국을 먼저 마련하신 이후에, 천국백성을 그곳에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위주가 아니라 땅 위주라는 말이죠. 인간들이 명품 아파트에 살고 싶어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아파트를 마련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씀이 완성된 자리를 만드신 이후에, 우리를 자기 자리에 그야말로 거지꼴로 만들어서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날리게 한 다음에,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다음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드신 곳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앞에서 말한 백 평짜리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나, 땅 15만평을 유산으로 받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말이 앞뒤가 틀리지 않습니까?" 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그게 자기 소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구청에서 조사가 나오면 자기 소유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땅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소유의식 때문에, 이 땅의 거물망 때문에 그러한데, 그것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몰라 !!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본디오 빌라도의 경우에, 자신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데, 즉 자기가 적용한 법을 자기도 모른다는 겁니다. 로마중앙정부를 의식할 뿐인데, 그러니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해주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냥 주면 되는데, 그러니 그것과 구원은 전혀 상관이 없는데, 물론 레위기와도 상관이 없고 말이죠.

성도에게는 자기의 소유가 없는데, 즉 임대인인데, 아니 임차인이죠. 모든 것이 은혜이고,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을, 조상들이 살았던 땅을 축복된 땅이라고 여기고 손에 넣으려고 하니, 그들은 할 수 없이 그 당시의 권력과 타협했다는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마카비 전쟁을 했고, 그것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타난 이유가 된다는 말이죠.

(요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요 11:48)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요 11:49)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요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요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짐승의 나라, 곧 유다나라 !!

말라기 이후에 계시가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끊어짐의 틈 속에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이루기 위해서, 가짜로 사독지파와 가짜로 유다지파를 통해서 왕을 옹립했던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을 보장했다" 라고, 그렇게 예레미야 이후에 엉터리로 주장하고 싶어했다는 겁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이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곧 짐승의 나라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짐승의 나라인 유다나라에 붙잡혀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계시의 역사와 정통성을 자랑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거리인데, 그래서 "이것만은 버리지 못하겠다" 라고 하면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희년이 등장함으로서 !!

그런데 희년은 무엇인고 하니까, 아파트 열 채가 있어도, 요구르트인지 요트인지 그런 것이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 볼 때나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앞에서는, 주님이 자기 대신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레위인이고 제사장인데, 그러니 자기가 사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3초의 은혜를 누릴 수 있어야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런 의식이 불과 3초나 4초밖에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당장 나옵니다. "목사님, 그렇게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불과 3초나 4초밖에 가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그 이후에는 불신앙으로 전락하고 맙니까? 조금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라고 말이죠. 그런 질문이 강의를 마치고 나면 항상 나오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ㅋㅋ).

인간은 몸은, 유발한 의식흐름에 놓여있기에 !!

우리의 몸은 수시로 외부의 반응과 교류하게 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지금 녹음이 얼마나 되었을까?" 라고 하면서 MP3 녹음기를 확인하는 도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리면 어떻게 됩니까? 녹음시간에 주목하던 것이 그만 문을 두드리는 것에 주목하게 되는데, 즉 그 노크소리가 난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루에 3초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더라만, 다른 것이 밀려오면 어떻게 됩니까? 곧장 그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몸은 이렇게 유발한 의식의 흐름에 놓여있는데,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말이죠. 자기 몸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새벽에 기도를 하다가보면 그런 경험이 생기는데, 기도를 하다가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가끔 있어요.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잠꼬대를 하기도 하지요. 어떤 목사님은 새벽예배시간에 설교도 그렇게 잠꼬대로 했다고 하는데,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말이죠(ㅋㅋ).

아무튼 기도를 하려면 집중을 해야하는데, 새벽이라서 집중하지 못하고 가사상태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꿈에서 나는 소리가 바깥으로 줄줄 흘러나옵니다. 그때 옆에서 "집사님, 지금 뭐하세요?" 라고 하면서 깨우면, 놀라면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몸을 믿지 않아 !!

이것은 바로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집중으로는 관리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 몸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주제에, 우리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유지하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15시간을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15시간 동안이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할 수가 있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휴대폰을 끄고 기도하는 것은 반칙인데, 스스로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죠.

먹물을 질질 흘리면서 !!

하나님께서는 먼저 땅을 만드시고, 애굽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탈출시켰습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이 출애굽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결코 그들은 출애굽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다른 민족들은 약속의 땅과 접촉한 적이 없었는데,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국의 서산이라는 곳에서 매년 축제를 하는데, 요즘은 그런 곳이 않은데 말이죠. 한 번은 제가 거기에 놀러를 갔어요. 가니까 어떤 서예가가 자기보다 더 큰 붓을 들고 먹물을 흠뻑 적셔서, 자기의 자유연상대로, 즉 무의식적으로 몸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게 진짜로 무의식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와 같이 주님께서는 언약이라는 붓을 들고,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먹물을 흠뻑 적셔서 질질 끌고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시는 겁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온 동네로 끌고 다니실 때 먹물이, 즉 애굽적인 요소가 여전히 줄줄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물론 애굽 백성들은 자기들끼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한 혜택을 누리게 되어서, 참된 거룩과 더러운 인간이 마주치는 코스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쉴 새 없이 먹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이럴 것 같으면 왜 애굽에서 구원을 했습니까?" 라고 하는 원망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도록, 주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본질적으로 애굽사람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 !!

지금 저기 예배당에 뒤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풍선과 종이로 잘 만들어놓으셨는데,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늘나라의 네비게이션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까, 물이 먹고 싶으면 물이 없는 곳으로, 또한 양식이 먹고 싶으면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장서서 그렇게 인도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이렇게 기본적인 밥벌이도 안 되고 생존도 전혀 안 되는 상황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분명히 탈출을 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애굽사람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애굽은 분명히 자신들이 탈출했던 땅인데, 그런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몸뚱아리가 약속의 땅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 딱 적합한 몸뚱아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애굽전용이라는 겁니다.

물이 없어야 약속이 보인다 !!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딱 마주치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물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니 물을 주옵소서" 라는 것은 애굽 사람들의 사고방식인데, 오늘 우리들의 상식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물이 없어야 약속이 보인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하나님이 그 반석에 물이 있어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는가?" 라는 겁니다. "1번, 그렇다. 2번, 그게 아니다" 라는 것 중에서 몇 번입니까? 이미 감을 잡았지 싶은데, 문제는 몰라도 보기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답은 뒤에 나오는데, 물론 가끔은 아니지만 말이죠(ㅋㅋ).

(출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출 17: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출 17:3)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출 17: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출 17:6)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바위는 바위일 뿐 !!

반석 안에는 물이 전혀 없는데, 하지만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반석 안에 없다고 하면, 반석 밑에라도 물이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식의 생각이 곧 애굽적인 논리구조이고 사고방식인데, 즉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석 안에나 반석 아래에 틀림없이 물이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물은 분명히 없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주셨다는 겁니다. 즉 "처음부터 바위는 바위일 뿐인데, 그런데 주께서 물을 주셨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이것은 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주님은 수자원공사의 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니 물을 마시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살아있는 것으로, 즉 생명나무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족하게 여겨라.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없는데서 있게 하신 것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또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먹을 물을 주셨다" 라고 하는데, 만약에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애굽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물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애굽에 급수차를 왕창 보내서 홍수가 나도록 해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도록 말이죠.

(고전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철저하게 애굽의 티가 나야 !!

그렇게 주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하게 애굽의 티를 내도록 하셨죠. 그래서 출애굽을 할 때, 그들이 홍해바다 앞에 서도록 하셨는데, 그때 어느 누가 홍해가 갈라질 줄 알았겠습니까? 그들은 홍해를 가르는 방법조차도 전혀 몰랐는데, 그래서 바다에 빠져죽지 않기 위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몸이 애굽에 그야말로 맞춤이기 때문에 말이죠.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정신은 애굽적인 몸에서 나온 이미지인데, 즉 몸이 먼저 있고, 거기서 이미지가 나오고, 그것이 곧 자아, 즉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애굽에 맞추어져 있고 말이죠. 그것이 그 당시의 출애굽을 했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그러니 출애굽을 했어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몸이 가뿐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상냥하게 대합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용. 니 하마" 라고 하면서(ㅋㅋ), 그런데 자기 몸에서 나는 열이 40도 정도가 되면, 이웃사랑이나 화평과 양선 등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게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성깔대로 살아갈 뿐 !!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제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의 몸이 어떻게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하늘나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성깔대로 삽시다. 사실은 "성깔대로 삽시다" 라는 게 아니라, 사실상 우리는 성깔대로 살아갈 뿐이라는 말이죠.

홍해는 바다이기에 그들이 건너갈 길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앞장세워서 일부러 홍해가 있는 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아갔는데, 길이 막힌 쪽으로 말이죠. 전혀 자기들이 알아서 간 것이 아닌데, 그러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출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 !!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너희들 자신의 땅이 있는가? 없는가? 홍해를 건너가는가? 건너가지 못하는가?" 라는 것을 걱정할 처지가 전혀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선 자신이 추진하시는 일에 대해서, "너희는 그 입을 다물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을 출애굽기 14장 14절에서는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자폐증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런 아이들은 오히려 설치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인데 말이죠. 그러니 주님께서 "가만히 있어라" 라고 하시는 것은, 진짜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마음껏 설침으로 말미암아서, 그 어느 한 구석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지킬 몸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깨닫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가기는 어디를 간다는 말입니까? 애굽에 적합한 몸을 가진 자들인데 말이죠. 하지만 주님은 그런 자들을 질질 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시는데,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도록, 그게 바로 주님의 일하시는 모습이란 말이죠.

(출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
(출 16:2)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출 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만나는 양식이 아닌, 말씀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하지만 만나는 백성들이 생각한 양식이 아닌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명기 8장 3절에 나오는데, 즉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게 만나라는 겁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다른 방식으로 시험하는 마귀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마귀가 눈치를 채고는 "그렇지. 사람은 말씀대로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다른 방식으로 시험하는 겁니다. 그게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데, 여기서 마귀는 시편 91편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예수님이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했으니, 말씀으로 시험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띄도록 일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피하면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완벽하게 다 되어있다는 겁니다.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신 6:16)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미리 준비된, 전혀 엉뚱한 '만나' !!

어제 우리가 강의를 들을 때, 우리는 너무 강의에 집중하다가보니 점심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반찬이 올라오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가보니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즉 맛있는 뷔페가 차려져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만나인데, 우리가 애굽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이죠.

주님은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 몸은 세상을 거쳐서 한 번은 죽는데, 그리고 죽은 이후에 예상하는 그 예상마저도 꺾어버리고 전혀 낯선 몸으로, 즉 하늘에 속한 영광의 몸으로 다시 만들어 주시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와 의논을 하거나 전혀 협상도 없이, 일방적으로 이미 모두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이죠.

만약에 오늘 점심이 만두라고 하면, "집사님, 참 고생하셨습니다" 라고 하지 마시고, "집사님은 만두를 준비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라고, 우리도 그렇게 해보자는 겁니다. 그런 자만이 십자가를 경유한 자라는 겁니다. 같은 만두라도, "주님의 오묘한 솜씨가 집사님을 통해서 이렇게 맛있는 만두를 만들었습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죠. 물론 자기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죠(ㅋㅋ).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바라볼 때,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자기 중심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다는 말이죠. 이 세상이 돌아가는데 무엇이 중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당연히 이혼하세요 !!

제가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니, 어떤 사람이 "남편과 이혼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고 상담을 해왔어요.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답변을 하겠습니까? "주께서 이혼하라는 생각을 주신 것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그 주님의 몸이 힘들기에 주님께서는 이혼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이혼을 하세요" 라고 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혼을 하지 않고 참겠다고 하는 심보는 무엇입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고 말았는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존심과 결부되어있다는 겁니다. 즉 "이혼을 하면 아이는 누가 키우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라고 하는, 그런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목사님은 이혼을 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냥 남편과 살래요"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바인데, 즉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 밖에는 모른다는 겁니다. 즉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도움만 얻으려 했구나.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내 몸이 원하지 않았구나" 라는 것을, 그것을 남편도 아닌 엉터리 남편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참 잘했습니다" 라는 것은 없는데,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주님만이 잘하셨지 우리는 결코 잘한 것이 없어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하는 광야 길을 가면서, 약속의 땅으로 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우리는 애굽의 몸과 새 몸의 차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말이죠.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눈에는 애굽의 몸 밖에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새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지금 많이 힘들지 싶은데, 여러분이 견딜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거기 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자도 들려야 한다" 라고 하시는데, 무슨 뜻입니까? "더러운 이 세상이 좋아서 있는 인간들아, 잘 있어라. 빠이빠이!" 라는 겁니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32절에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며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즉 주님께서 들린 상태에서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이 계신 곳으로 뽑아 올리시겠다는 것인데,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말이죠. 성령의 거미줄을 쏘아서 당겨서 올리겠다는 겁니다.

(요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그렇게 우리가 뽑혀서 올려질 때, 자기 눈앞만 보이든 것이 높이 올라갈수록 이 세상이 더 넓게 보인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자기 자식과 자기 집구석 밖에 모르든 것이, 점점 더 올라가니 어떻게 됩니까? "나는 옆집은 행복한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라고 하면서, 이 세상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점점 더 커진다는 겁니다. 단 여기는 조건이 있는데, 우리의 발이 이 세상과 멀어질 경우에 말이죠.

낮아지는 것이 곧 올라가는 것 !!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 우리는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발을 떼고 하늘로 올라갑니까?" 라고 하신다면,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하늘로 들리실 때, 먼저 무슨 절차를 밟으셨는고 하니, 주님은 그냥 들리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는데, 먼저 그렇게 낮아지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넓게 보는 '조망권' 이란 것은, 이 세상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낮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에는 자기의 원수라고 여기든 것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보낸 하나님이 종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이전에는 신경질이 나던 일들이, 사실은 자기에게 꼭 필요했던 환난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만하면 안 되고 낮아져야 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마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몽땅 다 나가주세요 !!

레위기의 마지막은 몽땅 다 쫓아내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 살아갈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을 했다고 여겼지만, 실상 우리의 몸은 여전히 애굽의 몸이었습니다" 라고 말이죠. 물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기도 하고 말이죠.

예수님이 어린양이라는 것은?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유치한 방식인 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인데, 그렇게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서 과거의 애굽 땅과 약속의 땅이 세트가 되는데, 즉 이 세상과 주님께서 만드신 약속의 땅이 하나의 세트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이 세상에서, 즉 애굽에서 벗어나는데 합당한 몸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8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