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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3. 27) 2강자유게시판로마서

광주 강의(2015. 3. 27) 2강

이름 : 서경수(IP:118.35.139.133)

광주 강의(2015. 3. 27) 13-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위상적 존재는 위아래로 순환구조가 있어요. 이미 죽은 자라고 규정하는 살아있는 세계와 아래가 예수님 몸 안에는 하나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위상이 하나의 혜택을 입는데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우리를 의로 인하여 살려내리라.’는 이것이 그리스도 몸 안에서 순환되면서 계속 혜택을 입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을 것이 죄밖에 없고, 나올 것은 의밖에 나오지 못하지요. 이것이 신앙인인데, 신앙인의 특징은 믿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이런 순환이 일어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이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아브람 때는 이스마엘이 생겼고, 아브라함 때는 이삭이 생겼죠. 이것은 본인이 원한 게 아니에요. 순환구조로 말미암아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현상은 ‘행함의 거부당함’입니다. 아브라함의 행함은 거부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특징을 말한다면 ‘아무 행한 것 없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행함이 없이 의롭게 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똑같은 순환구조로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성령을 주시면 똑같은 순환 구조의 제2, 제3의 아브라함이 주님 말씀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계속 내놓게 되어 있어요. ‘나는 나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의 죽음이 나를 죽게 하고, 주님이 사심으로 내가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 짧은 문장이지만 엄청난 내용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냥 말씀대로 살면 구원 받잖아!” 이런 소리를 해요. “당신은 왜 항상 죄만 거론하는가?”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죄를 아는 것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죄밖에 모르는 겁니다. 단독으로 있으면 선악과 따먹은 티를 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으면 죄밖에 모릅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시간에 저를 비난하면서 “이근호 목사는 죄밖에 몰라.”라고 고함을 치면서 화를 냈답니다. 이 소리 듣고 얼마나 감사한지.

4장 24절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이 있어요. 여기에서 ‘삼가라’는 말은 ‘너희는 불안정 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완전으로 향하라는 뜻이 아니라 불완전함이 완전의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완전한 것이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 혜택을 입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아직도 덜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는 네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고 아직도 네가 죄인인 것을 몰라.’ 이런 뜻입니다. 기쁘지 않습니까? “하나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꾸중하십니다. “그것도 죄야! 넌 아직 멀었어. 아직도 네게 의가 섞여 있어. 안 돼! 그 정도로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야. 더 불완전해야 돼.”

내가 불완전하다는 말은 구조상 아래쪽이 불완전할 때 점점 용서받은 사랑이 많이 나오잖아요. 아래쪽에 군불을 때야 방이 따뜻하지요. 불완전을 때야 완전이 피어올라요. 이렇게 해석하니까 주님 말씀이 어렵지 않지요? 위상적 존재 안에서 순환구조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고 했어요. 이 말은 하늘에 있는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라 땅에 있는 사람에게 한 말입니다.

땅에 있어도 순환구조 때문에 구름 위에서 아래를 보고 있습니다. 목이 긴 기린처럼. 아래는 서늘하고 위는 따뜻하고 매일 대류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육신에 속해서 죄를 짓지만 머리되시는 주님이 아랫쪽의 모든 죄를 해결하면서 온수가 아래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내려가면 우리는 감사하다가 또 자아가 등장해서 “역시 나는 믿음이 좋아.” 이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신앙이 좋다.’에 다시 자아를 가져다 붙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말씀을 주셔서 ‘삼가라’고 하시면, ‘아,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것이 또 확인되는 겁니다. 우리는 말씀의 이불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상적 구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하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거예요. 남녀가 연애를 할 때 여자는 남자를 멀찍이 띄워놓고 연애를 하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여자의 관심은 남자를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다.’는 보람을 위해 행동합니다.

남자는 소유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반면, 여자는 남자가 자기 쪽으로 끌려오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여자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반면 남자는 목적 달성이 중요합니다. 만약 캠핑을 간다면 여자는 출발부터 가는 길 내내 즐겁습니다. 가로수도 보고 꽃도 보면서 웃지요. 그런데 남자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랄뿐 과정을 즐길 줄 모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상대할 때 멀찍이 놓고 봐요. 주님과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있어서 나의 가치와 의미를 주님이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을 가까이서 바로 본다면 괴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을 빛으로 못 알아봅니다. 이건 본인이 문제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게 뭔가 하면, ‘네가 문제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데 주님이 괴물로 보인다는 것은 본인이 괴물이기에 그렇게 보입니다. 주님이 외계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소통이 안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화해했다고 하잖아요. 화해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죽어야 마땅함을 놓고 화해하는 겁니다. 인간들끼리의 화해는 서로의 가치와 자존심이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화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신 후에 화해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화해는 우리와 화해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화해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얻으심이죠.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고 다시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될 때 말씀이 완성되는데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위상적 존재로써 장착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거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겁니다.

어항 속에 보면 산소통이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산소방울이 오르락내리락하지요. 여기서의 산소방울 하나하나가 우리들입니다. 항상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 되었다가 다시 의인으로 인정받았다가 다시 죄를 짓고 또 용서하시고, 마치 폐수 처리장 같아요. 이런 식으로 우리 몸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발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존재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살면 주께서 죄짓게 하실 겁니다. 어떤 죄냐? 우리가 예상 못한 죄를 짓게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의를 행해야 기뻐하실 것 같은데 우리가 죄를 알 때 도리어 기뻐한다는 것은 시편 51편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잃음과 얻음이 교차되고 반복되는 현장이 천국이고 이스라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천국에도 여우, 소, 사자가 있습니까?” 묻는데, 인간 외에도 다른 피조물이 있을 것인데 이 땅에서처럼 그런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만물을 새롭게 한다고 하셨으니까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거예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봅시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은 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게 됩니다. ‘없는 자는 빼앗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여기에 뭔가 생략되었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생략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략이란 말은 앞에 무엇이 빠지고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있다는 것을 시작으로 보지 말고 결과로 보잔 말입니다.

있는 것을 있게 하신 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알잔 말이지요. “주여, 있으니 더 주세요.”라고 요청할 권리나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시작을 우리로부터 하면 안 돼요. ‘신앙이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요’ 이렇게 해석하고 싶은데, 이렇게 되면 이 신앙은 누구의 신앙입니까? 나의 신앙이 되지요. 그러면 결국 구원의 나의 구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잃음과 얻음의 순환구조 안에 있지 않고 그 바깥에서 자기 혼자 흉내 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첫째 시간에 인간은 ‘자아1’에서 ‘자아2’로 가면서 반성한다고 했지요. 반성은 더 나은 나를 만들려고 하는 모든 행동의 집결이잖아요. 그런데 그 반성 중 하나가 마가복음 4장의 말씀까지 반성 작용에 집어넣습니다. “야, 있는 사람은 더 받는데. 믿음 준비하자.” 이렇게 되면 이건 아니죠. 이런 모습은 어두움입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해서 천국 가겠다는 꼼수에 불과한 겁니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주께서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예상치 못한 일에 이끌려 가는 겁니다. 내가 죄를 알고 싶다고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예상치 못한 가운데 죄를 깨닫게 될 때 이 사람은 주님의 작업 속에 담겨 있는 자입니다. 만약 예상 된 일이라면 그것은 주님과 무관한 내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예상 못하는 것을 어떻게 기다립니까? 예상을 못하기에 기다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26-27절에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게 얼마나 이상한 말입니까? 씨를 뿌리는 사람이 뿌려놓고 잠을 자도 그 씨는 자란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알지 못한다고 해요. 하늘나라의 특징이 뭔가 하면, 항상 예상 밖의 일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속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이 주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74세 할머니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 20세로 변했어요. 그런데 자녀들도 엄마를 못 알아봅니다. 왜? 예상 밖이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성경을 덮으면 다른 사람과 똑같아요. 몇 년 생입니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미 우리는 죽었어요.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납니다. 사도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납니다.

예상 밖의 것이 왔다는 말은 우리 행동과 무관하게 주님이 주도적으로 나를 구원시키신다는 기쁨을 주는 겁니다. 우리는 계획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고 주님은 주님대로 자기 일을 하시는데 결과적으로는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26절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농부고 우리는 뿌려진 씨인데, 우리는 늘 계산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을 주께서 일으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이게 주님이 동행하시는 방식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데,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열립니다. 이렇게 북치고 장고치고 주님 혼자 다 하십니다.

주님 혼자 다 하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해서 제게 많이 물어요. “그럼 나는 뭐합니까?”라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하시면 예상 밖의 다른 노선이 와야 우리가 위상적 존재로써 위, 아래로 움직입니다. 잃고 얻음을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의 버릇은 내가 안 잃고 주님과 손잡고 뭔가 하려고 합니다. 이건 안 됩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이 제일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뭔가 하면, 주님과 자신이 동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교는 밤낮으로 씨 뿌리는 농부가 하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방해합니다. 이 소리 듣고 ‘그럼 방해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방해하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님 나라에 협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 당신 말대로 하면 죄를 더 지으면 더 큰 협조를 하는 것이잖아.”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죄 안 짓습니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 못하는 죄를 알게 하지요. 착한 행실, 바른 설교는 죄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이 다 죄인 것을 예상 밖에 깨닫게 하지요.

만약 설교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미리 알면 설교를 안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설교 안 하면 그 시간은 다른 것을 하겠지요. 그 시간이 바로 설교 안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순환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 타는 보일러입니다. 위에서 태우고 아래에서 또 태우고.

천국은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씨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농부가 다 알아서하는 겁니다.

28절을 다시 봅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땅은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하는 방식으로. 구원은 받았는데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주님이 알아서 다 하셨어요.

그럼 이것을 언제 아는가? 주의 뜻대로 우리가 죄를 알았을 때 비로소 눈치 채지요. 주의 뜻대로 우리가 죄를 알게 될 때 주님의 용서도 같이 오면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행실 나쁜 여자가 향수를 주님 발에 뿌렸지요. 그러면 그 여자가 향수 생길 때마다 쫓아와서 주님 발에 부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렇게 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히스테리라고 하지요. 이들은 내가 누군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미진한 것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버스를 탔는데 자리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서서 왔는데, 버스 손잡이에 세균이 1억 개 이상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집에 오자말자 손을 씻었는데 돌아서서 혹이 세균이 남아있지 않은가 의심이 되어 한 번 더 씻고 이런 자들이 히스테리 환자입니다. 늘 불안한 거예요. 이것과 반대로 강박증 환자가 있는데, 이들은 하나에 미친 듯이 매달립니다.

30절 봅시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제자들이 전혀 못 알아들으니까 주님 혼자 답답해하십니다.

31-32절에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 이해하겠습니까? 이건 앞의 구절보다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겨자씨 안에 하늘나라가 다 들어간다는 자체를 이해 못해요. 하늘나라는 우주보다 커야 됩니다. 왜냐? 우주는 만들어진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이 우주를 덮치고도 남아요.

그런데 이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안에 들어가야 된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면 겨자씨 안에 다 들어간다면 누구도 같이 빨려 들어가야 됩니까? 겨자씨라는 병에 깔대기를 꼽고 우주와 천사와 모든 것을 깔대기에 붓습니다. 이 때 우리 자신도 포함시켜서 넣습니다.

겨자씨가 관찰 대상이면 우리는 관찰자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겨자씨는 작고 우리는 겨자씨를 볼 수 있다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데, 보고 있는 우리를 겨자씨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한계를 알지 못합니다. 한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성장’을 이해 못합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내 눈이 관찰할 수 있어야 해요. 싹이 1cm 정도 되네. 3일 후에는 2cm쯤 되네. 이런 식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성장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교사를 오래 하다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임했던 아이가 5년 후에 만나면 키도 몸도 예전에 비해 훨씬 커져 있지요. “00야, 많이 컸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밖의 대상으로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제가 컸다고요? 아닌데. 원래 나는 이만했어요.” 라고 합니다. 왜냐? 자기는 늘 자기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자기 몸의 성장을 본다는 것은 밖의 특정 기구가 없는 이상은 자기가 못 느껴요.

사람들이 꿈을 꿀 때 현재의 자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가장 아름다웠을 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그 때를 원하는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꿈에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프로이드는 ‘꿈도 편집한다.’고 했어요. 인간은 항상 편집을 해요. 반칙이지요.

성장이란 하나의 관찰 대상이 있을 때 성립합니다. 그런데 나를 겨자씨 속에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되어 있지 성장을 모릅니다. 우주가 점점 커간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몰라요. 만날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천문학자들은 빛의 거리가 적색 편향을 띠면서 도플러 효과에 의해서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우주가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압니다.

천문학자들은 알지만 보통 사람들은 늘 그 별이 그 별입니다. 왜냐? 우리는 그 풍선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풍선 표면의 한 지점에 자신이 있는데 풍선이 부풀어 커져도 자신은 늘 같은 자리에 있기에 커진 것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초등학교 친구를 만나면 반갑습니까, 부담됩니까? 부담되지요. 평소에 전화라도 하고 서로 소식이라도 알았으면 덜한데, 한 번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찾아오면 왜 찾아왔는지 부담이 됩니다. 그러나 자주 전화를 해도 그것도 귀찮습니다.

겨자씨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겨자씨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면 겨자씨가 커졌다고 했을 때는 크게 한 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고 겨자씨라는 천국을 크게 하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가 성령 받고 난 뒤에 비로소 이 말씀이 이해되는 거예요. 내가 겨자씨를 판단하고 이해하면 선교한다고 설치게 돼요. “주여, 하늘나라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제가 확장하기 위해 떠나겠습니다.”

하늘나라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했을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철거되어야 합니다. 성장, 발전은 다 버려야 돼요.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나라로 많이 퍼져나가고 그 이방인들이 많이 예수님께 돌아올 때 하늘나라가 확장되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이런 생각은 철거해야 됩니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관찰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간다면, 크고 작고의 문제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미 자기 자리에서 선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밥 먹고 살고 있는 자체가 선교라고 믿는 자가 진짜 선교사입니다.

주의 나라는 말씀대로 확장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서서 확장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것은 선교단체가 되지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선교하러 갔습니까? 정답은, 선교하러 갔지요. 어떻게 갔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이 들통 나면서 가게 되었지요. 이게 바로 순환구조입니다. 위, 아래, 위, 아래.

본인은 그 안에 죄인으로 들어갔고 선교는 누가 했습니까? 선교하라고 주신 말씀이 선교했어요. 이것을 ‘언술 주체’라고 하는데, ‘언술 주체’와 ‘언표 주체’가 있어요. ‘언술 주체’란, 말을 풀어내는 주체를 말하고, 그 주체가 나라면 내가 말한 것이 녹음되어 녹취되어 있는 그것을 ‘언표 주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표 주체’는 아무리 분석해도 여기에서 ‘언술 주체’가 안 나온다는 말입니다. “나는 키가 170cm, 몸무게는 70kg이다.” 이 말 속에 정확한 내가 나올 수 없습니다. 170cm, 70kg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아무리 ‘언표 주체’를 모아놓아도 ‘언술 주체’가 안 나온다고 할 때 이 두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진 속의 나는 내가 아니란 말입니다. 유사성이 있지요. 하지만 사진 찍는 순간 이미 시간은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1분 뒤에는 그만큼 늙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밋밋해요. 그러나 직접 사람의 모습을 보면 입체적이고 냄새와 표정이 있고 교감이 되기에 사진과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생중계로 보는 것과 예배 장소에 참석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나 자신이 표현하는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철거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33-34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그러면 해석하면 제자들은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듣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너희가 기대하는 하늘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다.’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오면 내가 영접하겠다는 그런 하늘나라는 없고, 일방적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한 하늘나라는 포기해야 됩니다. 날마다 그것이 삭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내뱉은 ‘언술 주체’와 ‘언표 주체’는 안 되고, 예수님이 ‘언술 주체’가 될 경우에는 우리라는 ‘언표 주체’는 이해도 해석도 불가능합니다. 나타난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셔야 됩니다. 우리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적용시켜 주셔야 됩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포함된 체로 확인될 뿐이지요. ‘아,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내가 납득하고 이해했다’고 하면 안 되고, ‘납득 당했다. 이해 당했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 내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평소에 살면서 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를 폭로시킬 때 내가 주와 동행하고 있는 중인 줄 알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무리 살아도 나밖에 모르고 모든 것이 나로 귀결되는 이런 몸을 가졌는데 이런 나를 기어이 천국으로 이끌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소상히 알기를 원합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주님의 희생과 수고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4. 9. 09:1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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