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강-에스겔 44장 20-27절(제사장의 조건)150408-이 근호목사
133강-에스겔 44장 20-27절(제사장의 조건)150408-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41)
133강-에스겔 44장 20-27절(제사장의 조건)1504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4장 20절-27절입니다. 구약성경 122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4:20-27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아무 제사장이든지 안 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족속의 처녀나 혹시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케 하며 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가지 아니한 자매를 위하여는 더럽힐 수 있으며 이런 자는 스스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낼 것이요 성소에 수종 들려하여 안 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속죄제를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제사장의 이야기입니다. 성전이 만들어져 있다면 거기에 일하는 책임자가 있는데 그 책임자가 제사장입니다. 이 제사장의 활동에 따라서 성전은 유지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보통 사람과는 구별되고 차이나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본문 23절에 나와 있습니다만 속된 것과 깨끗한 것,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기에 그렇습니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 있다는 말은 제사장이 있는 이 이스라엘이 원래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더러웠는데 그것이 장차 오실 메시아,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는 메시아에 의하여 깨끗한 백성이 될 거예요.
천국이라는 것은 죄 있는 자는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죄가 있는 이 몸을 죄가 없는 몸으로 바꾸어주는데 그 바꾸는 과정에 종사하는 자들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제사장에게는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서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으로 전이되는, 바뀌는 양상을 온 몸으로 감당을 해야 하고, 받아내야 하고, 또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을 누가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이 법을 제사장이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법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께서 특정 사람을 자기 나라에 넣어주겠다고 이 법을 제시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것은 뭐가 되는가? 하나의 정답이 되겠지요. 진리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진리, 또는 정답. 하나님께서 진리, 정답을 이렇게 줬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이 정답을 아는 너희들은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기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기죽고 사는 이유가 다른 것 아니에요. 세상 정답을 찾지를 못해서 기죽고 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독재자의 무릎이 그렇게 크게 보이는 것은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어요.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니까 크게 보이지요. 그런데 위에서 보게 되면 독재자의 무릎도 보통 사람의 무릎하고 똑같이 보이겠지요. 엎드려서 보니까 임금님의 무릎은 그렇게 크게 보이는 겁니다. 이제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엎드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야 돼요. 일어서서 정답을 아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 모습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는 거예요. 정답이라는 것은 뭐냐? 다시 하겠습니다. 빨리 지나가면 이해가 안 된다고들 하시니까. 정답은 뭐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사이에서 어떻게 해서 더러운 것이 깨끗함으로 바뀌는가, 그 과정을 아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정답을 아는 사람은 정답에게 매여 살아야 되지 정답을 내가 소유하면 안돼요. 정답이 나를 소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정답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소유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자랑 질을 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졸지에 깨끗한 축에 들기 때문에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더러운 것과 깨끗함 사이의 그 중간 전이과정이 누락되고 마는 겁니다. 표정들 보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들이신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피자집 셰프가 피자를 만들지요. 그 사람의 직업이 피자 만드는 직업이에요. 그 사람이 한 10 년 동안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일주일의 휴가를 얻었습니다.
휴가를 얻었는데 자기가 일하고 있는 피자집에 들러서 “주인장! 피자 한 판 주세요.” 하게 되면 그 순간 그 사람은 피자 만들 필요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사람은 휴가 기간 동안에는 그 피자집의 셰프가 아니라 손님이에요. 제가 군에 있을 때 일입니다. 어떤 병사가 휴가를 어디로 왔느냐? 친구도 별로 없다고 하면서 그냥 군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깥에 나가니까 재미도 없다면서 휴가기간인데도 군에서 지낸 거예요. 피자 요리사가 휴가를 받아서 평소에 일했던 자기 집에 가서 “피자 한 판 주세요.”라고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피자를 소유하는 사람이 되고 피자를 맛있게 먹는 사람이 되지 밀가루에서 어떻게 피자가 되었는지의 그 중간과정을 보여주지는 못해요, 그 순간에는. 그 사람이 그 피자를 먹고 있을 동안에는. 당연하지요. 먹기 바쁘지 만들지는 않잖아요.
제사장이 해야 될 일은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소유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정답을 소유하면 안돼요. 그러면 자기 잘난 체를 해서 안돼요. 우리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나의 일꾼이기 때문에 주님이 주방장이라면 우리도 보조주방장으로 같이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에스겔 45장에 보면 제사지내는 방법이 죽 나와 있어요. 일종의 셰프, 요리사라고 보면 돼요. 성전에서 제물 잡는 전문기술자로 보면 된다는 말이지요. 요리사는 요리사복장을 하잖아요. 제사장도 복장을 갖춰 입습니다. 어떻게 해서 더러운 것이 깨끗하게 되었는가?
이게 정답입니다. 이 정답의 일에 관여하고 참여된 사람은 이미 정답에 의해서 뒤집어 씌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한테 조금도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연봉이 십억이니, 그런 것에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천국 가는데 연봉 십억이 필요하다면 악착같이 십억 벌어서 천국 가야 됩니다. 그러나 천국은 십억 벌어서 돈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의 기능인으로서, 셰프로서 가는 거예요. 성전에서 일하는 일꾼으로 가는 겁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애들 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돈으로도 못 간다고 노래하는 그 교회에서 애들보고 돈 내라고 가르치지요. 이상하잖아요.
돈 없어도, 돈 있어도 못가는 나라. 돈으로도 못 간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돈 있어도 못가는 나라. 돈이 없다고 해도 못가는 나라. 돈 없는 것을 자랑하면 안돼요. 교회에서 가난한 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교회에서 부자 됨을 자랑하지 말고 뭘 자랑해야 되느냐 하면, 나는 그런 것에 기죽지 않는 것을 자랑해야 돼요. 돈 있고 없고 간에. 이런 이야기가 정답인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이야기가 슬프게 들리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다 사는 게 어렵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슬프게 들립니다. 억지 위로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억지 위로, 강제 위로.
그럴 때마다 우리가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와 사도들이 갔던 길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그렇게 고난 받은 것은 죄에서 의를 바꾸는 중간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가 뭐냐? 부정한 것이 뭐냐? 더러운 것이 뭐냐? 깨끗한 것은 무엇이냐? 깨끗한 것이 무엇인지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드릴게요. 왜냐하면, 더러운 것 아닌 것이 깨끗한 것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뭐냐? “더러운 것은 우리가 죄 짓는 거잖아요.”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성경을 오해한 거예요. 우리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를 가지고 놀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말을 해버리면 죄 짓고 안 짓는 것을 내 선택이나 결정으로 임의로 할 수 있다는 것 밖에 안 되거든요.
그것은 비현실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에요. 우리 입장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어요.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고 이미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어떤 제물이나 제사나 예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 했거든요. 돈 바치는 예배가 아니라 상한 심령을 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에서 제물 드리라는 말은 뭐냐? 제물을 드리면서 제물 드린 것에 대한 반대급부를 생각하는 그 모습 자체가 나도 미처 몰랐던, 헌금하기 전에는 몰랐던 상한 심령의 일부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헌금을 드려야 되지요.
생전 헌금을 안 하니까 돈 귀한 줄 몰랐는데 막상 헌금을 하려니 내가 돈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렬한지, 극렬한 지를 헌금 하면서 들키는 거예요. 헌금봉투를 든 손을 내미니까 재정 보는 집사님이 받으려고 손을 내 밀었어요. 준다고 해놓고 내 민 손을 뒤로 잡아 빼니 봉투가 찢어지지요. 내는 건지 마는 건지. 팁 주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그런 마음이 듭니다. 십일조를 하라고 하니 이게 본봉의 십일조인지 수당까지 포함한 액수의 십일조인지를 따진다는 자체, 그걸 계산한다는 자체가 주기 아깝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지배하는 폐쇄된 지경에 그냥 갇혀 있는 겁니다. 목욕탕에 가게 되면 원치 않아도 습기에 다 젖게 되어 있잖아요. 목욕탕 자체가 습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게 그거예요. 그냥 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뭘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데 먼지 정도가 아니에요. 먼지정도라면 말을 안 합니다. 이미 스펀지 같아요. 스펀지 같아서 죄를 아예 품고 살아갑니다. 죄를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 앞에 나올 때는 이 스펀지를 짜면 돼요. 짜면 물이 나오잖아요. “주여, 이렇게 제가 이런 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고 짜는 그것이 예배입니다. 주께서 상한 심령을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젊은이들은 꿈을 품고 살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합니다. 죄를 품고 살라고.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고 십계명을 지킨 것이라면 제사라는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출애굽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고 이어서 주시는 것이 뭐냐 하면, 그 십계명을 위반했을 때 죄를 씻는 방법을 주시면서 그것을 언약의 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쉽게 해서 언약의 피를 먼저 주고 뒤에 십계명을 줬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십계명 줘 봐야 안 지킨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
십계명을 주게 되면 그들이 어떤 죄를 짓느냐 하면, “십계명 지켰나이다.” 하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 뻔합니다. 뭔가 지시가 오고 명령이 오게 되면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을 지켜서 내가 얼마나 선한 인간인가를, 거룩하고 성숙하고 성화된 인간인가를 하나님 보란 듯이 내보이겠다.’ 하는 식으로 나오는데 그렇게 하는 순간 피는 날라 가버렸습니다. 고귀한 피는 없어요. 이게 세트에요. 십계명과 제사법이 세트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보면 잔소리가 왜 그렇게 많은지. 조금 움직였다 하면 잔소리에요.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 22:5)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찌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찌며.”(레 19: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찌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찌니라.(출 23:19)
주님께서 할일이 없으신지 세세한 것에까지 신경을 다 써요. 오징어 먹지 말고 돼지고기 먹지 말고 …….(레 11장) 먹지 말라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요. 번데기는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전에 안식교인인 의사가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해서 우리나라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한 적이 있어요. 몸에 해롭다고 성경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이어트 하라고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너희들은 애굽에서 구별된 백성”이라는 겁니다. 애굽에서 살던 때와 다른 요소가 너희들 속에 들어온 거예요.
그 다른 요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을 못해요. 왜? 살던 그 몸 자체가 너무나 속물적인데 그 속물적인 몸에 천국의 삶이 들어오니 이게 감당을 못하지요.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억지로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본래의 법과 원칙과 취지가 있는데 그대로 하면 못 지키니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지켰다고 생색내는 쪽으로 법을 변경시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안식일을 어기면 돌로 치라고 하잖아요. 안식을 어긴 자가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은이 같으면 보란 듯이 “네가 안식일을 어겼어?” 하고 돌로 칠 것인데 만약에 안식일을 어긴 그 사람이 자기 딸이라면 어떻게 하렵니까? 결혼을 한 주 앞둔 사랑하는 자기 새신랑이라면 어떻게 하렵니까? 돌로 칠 수가 없지요. 자기와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법이라는 것을 지킬 때 인간은 항상 자기 잘난 체 하려고 이 법을 사실은 이용하는 거예요. 자기가 지킬만한 자신감이 있는 것만 지키고 다른 것은 미뤄버리는 겁니다. 그럴 줄 알고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준비해 놓았지요. 하나님이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모든 법을 다 지켜도 하나만 어기면 다 무효라는 거지요.(약 2:10) 왜냐하면 다른 법이나 이 법을 주신 분이 동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치 몸통과 같아요. 얼굴을 바늘로 찌르면 아프지요. 얼굴과 멀리 떨어진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찌르면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같이 아프지요. 왜? 같은 몸이기 때문에.
율법은 율법 전체가 한 몸통이기 때문에 자기가 지킬 것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을 건드려도 주님은 아야, 합니다. 주님이 아프다고 하시는 거예요. 갈라디아서에서는 거기서 한 술 더 뜹니다. 율법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거기에 시간요소를 집어넣어요. “항상”이라는 시간요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항상 지키지 않으면 안돼요. 오전 11시 20분에 온유했다고 오후 2시 47분에 화를 내면 아침에 온유한 것은 날라 가버렸어요. 항상 지키지 않는다면.
왜 이런 법을 주시는가? 주께서는 인간을 알기 때문에. 인간의 무엇을 아느냐? 인간의 선악과 가지고는 인간의 죄의 지배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무기는 선악과밖에 없거든요. 소위 양심밖에 없어요. 양심상 할 때는 자기한테 유리한 경우이고 자기가 필요할 때는 양심조차도 다 변경시켜 버려요. ‘양심 너 조용히 해. 이게 다 살자고 하는 짓이야. 가만있어! 양심 잠시만 눈 감아. 사람이 우선 살고 봐야지 양심이 밥 먹여 주나?’
그런 사태들이 자꾸 일어나요. 소위 착하다, 성화되었다 하는 사람에게 위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점점 더 줍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말이 뭐냐?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폼 잡는 제사장, 장가가는 것도 일반인하고 똑같이 하면 안 되고 복장도 거룩한 복장을 하는 이 사람들은 구원에 성공했습니까?” 정답, 제사장들은 실패했습니다. 제사장이 실패했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다 실패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제사장을 두셨는가? 실패하라고 주신 겁니다. 왜 목사 되게 했을까요? 목사로서 실패하라고. 목사로서 성공해서 목사가 구원해준 인간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장로 맡아서 장로 값 하는 사람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집사로서 구원된 사람들 있어요. 왜 구원되었느냐 하면, 내가 집사 값도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구원된 겁니다. 목사로서 구원받는 것은 목사 짓을 제대로 못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목사 짓 이 자체가 주님을 훼방하는 짓거리로서 목사 짓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게 바로 중간과정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제사장이 있다는 것은 정답입니다. 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아요. 왜? 정답을 알기 때문에. 문제는 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소유하지 말라고 했지요. 소유하면 구원 못 받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제사장이 덮쳐져야 돼요. 제사장 제도에 의해서 덮쳐져 버리면 우리는 제사장 역할에 빨려 들어갑니다. 빨려 들어가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죄에서 어떻게 의로 변화되느냐의 그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참여하면서 우리가 늘 느끼는 것이 있어요. 그 참여하는 일에 내가 참여했기 때문에 구원 받을 것이라는 오해와 색다른 죄를 또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참여하는 기능과 역할을 했기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실패하게 하신 그 분에 의해서, 그 분의 용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거예요. 용서로 말미암아. 이제 에스겔에 제사장은 이렇게 하라고 하는 법을 주신 이유를 알겠지요? 법 자체를 수행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 그걸 미리 아시고 이 법을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님! 제사장 법은 뭡니까?” 제사장 법은 죄에서 의로 바뀌는 그 기능을 하라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 기능에 참여한 사람은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구원 받습니까? 수행하면서 구원 받기는 받는데 수행을 제대로 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안다는 조건하에 구원 받습니다. 말로 설명하려니 참 어렵지요.
우리교회에서 돌아가면서 점심식사준비를 하는데 교인들이 다 한 성화씩 하시기 때문에 음식 해 놓으면 칭찬이 늘어져요. “맛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신 나간 어떤 사람이 있다가 “이거 누가 했나? 이것도 반찬이라고 했어? 이게 대체 뭐야?” 물론 지금까지는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식사 준비한 사람 앞치마 풀어버립니다. 오후예배도 참석 안하고 집에 가버립니다. “내가 더러워서! 내가 이거 한다고…….” 툴툴대면서 가버립니다.
자, 왜 하나님께서 식사준비를 하게 했을까요? 칭찬받으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남에게 이렇게 비아냥거림을 받아도 그걸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사람 되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왜 시키느냐는 말이지요. 왜 시키느냐 그 말입니다. 제사장 일을 왜 시키느냐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시킨 것을 해내면 구원 받기에 시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법을 이해한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 당시 제사장들이었어요.
아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이걸 하라고 하는 대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걸 함을 통해서 얼마나 내가 잘난 체 하느냐 하는 기회를 찾는 거예요. 평소에 내가 내 잘난 체를 하고 싶어서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런 법이 오니까 ‘야! 이것은 되겠다. 교회 점심준비 하는 이것은 내가 성의 있게 하면 되겠다.’라고 하는 순간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가? “이것도 반찬이라고?” 하는 순간 “내가 천당 안가면 안 갔지 이 교회 안 나온다.” 대번에 자기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 순간이 바로 다윗이 고백했던 상한심령입니다. 주께서 주신 법은 우리 성질을 건드려요. “성격이 워낙 좋아서 성질을 안 건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기어이 성질을 건드리게 합니다. “그래도 참으면요?” 도저히 못 참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게 해요.
자, 그러면 이 제사장의 이렇게 하는 그 기능이 처음에 어디서 나왔는가? 창세기 14장의 멜기세덱입니다. 이 멜기세덱 이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히브리서에서는 처음 나온 사람은 이해가 안 되고 좀 오래 배운 사람이 이해한다고 할 정도로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는 어렵습니다. 최초로 등장하는 제사장이에요. 멜기세덱이 뭐가 어려운가? 그 어려운 점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하는 그 기능이 어떤 일을 행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니고 그 분의 계심, 그 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모든 존재를 전부 다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부정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멜기세덱은 시간을 회수한다. 물건을 회수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지만 시간을 회수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셨지요. “시간 가져와. 다 가져와.” 시간을 회수해 버려요. 시간을 회수하게 되면 그 회수된 시간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했던 것들, 밥 먹고, 잠자고, 교회가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이게 전부 다 있겠지요. 전부 다 회수하는 거예요. 4월 달에 입산할 때는 라이터를 다 회수하잖아요. “나중에 내려갈 때 찾아가세요.” 하고 회수하지요. “라이터 다 여기 내놓으세요.” 멜기세덱의 역할이 뭐냐? 우리가 이 땅에서 했던 것, 근사해 보이는 것, 또 반대로 우리가 죄 지었다는 것, 이런 것을 전부 다 회수를 합니다.
회수를 해서 그 분 책임 하에 그 모든 것을 의로 바꿔버려요. 그게 멜기세덱, 최초의 제사장입니다. 인간제사장이 왜 실패하는가 하면, 회수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실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멜기세덱은 모든 것을 회수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제사장은 몇 명 필요합니까? 처음부터 몇 명이 필요했지요? 단 한 명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줄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인간의 이름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제사장이 자꾸 죽는 이유가 ‘너는 아니야.’ 하는 거예요. 같은 기능이지만 그 기능을 통해서 죄에 참여한 거예요.
본문 27절에 보면, “성소에 수종 들려하여 안 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속죄제를 드릴찌니라.” 이미 속죄제가 뭡니까? 이미 너는 죄인의 자격으로서 거기 들어가는 거예요. 속죄제를 품고 이미 내가 더럽다는 것을 인정한 채 제사장 노릇을 하라, 그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보고 하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죄를 취소하는 것이 아니에요. 죄를 잊는 게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죄를 품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내 속에 어떤 죄가 있는가를 발췌당해야 되는 겁니다. 왜? 우리는 회수당하는 그 선반 위에, 그 노정에, 그 경로에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컨베이어 벨트는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지요. 그 위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가만있어도 자꾸 어디로 끌려가잖아요. 완제품 될 때까지 끌려가잖아요. 우리는 벨트에 의해서 구원 받는 겁니다. 내가 거기서 설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벨트역할이 멜기세덱부터 미리 와서 깔려 있는 거예요. 구원의 노정위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멜기세덱 이야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멜기세덱을 이해를 못해요. 못하면서 내가 멜기세덱을 흉내 내려고 하고 모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움직이는 벨트가 아니고 고정된 거예요. 고정된 채 있어서는 구원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목사님, 제가 뭘 하면 구원 받습니까?”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끌려가세요.”라고 답변하는 겁니다. 어디로 끌려갈까요? 이미 모든 것을 다 죄로 규정하고 그 규정된 것을 다 의로 바꾸시는 벨트가, 컨베이어벨트가 이미 우리 안에 깔려 들어왔다는 겁니다. ‘깔리기는 뭐가 깔려? 발밑에 뭐가 있는데?’ 그게 멜기세덱으로부터 온 거예요. 멜기세덱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이해합니다. 왜? 죄가 있어야 의가 생산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재료로 해서 멜기세덱은 자신의 의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 뭐냐? 그 멜기세덱이 과거의 인물이거든요. 분명히 과거의 인물인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그 인물이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참 어려워요.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구분하는데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은 그 분이 과거, 헌재, 미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현재로 만들어버리는 예수님이 바로 멜기세덱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고 두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 한 분이라는 겁니다. 한 분 예수님.
성전 있고 제사장이 있고, 에스겔 44장에서 그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무슨 역할 한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며, 그걸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에요. 다른 백성들은 몰라요. 또 제사장이 유일하게 아는 것이 뭐냐? 어떻게 죄에서 의로 바꾸어지는가, 그 중간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22절에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들지 말”라고 하는데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가는 자체가 죄악에 갇혀 있는 모습이거든요. 정 하고 싶거든 “오직 이스라엘 족속의 처녀나 혹시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과부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죄로 말미암아 저질러놓은 그것을 그대로 제사장은 가져오지 말고 그 가운데서 “그게 아니야.”라는 면면을 보여주는, 그 과도기적인 중간과정의 모습을, 제사장만이 유일하게 구별되어 그 품새를, 그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사장 보고 “아, 우리하고 다르구나.” 우리는 완전히 속물인데 저 분은 덜 속물 같고 뭔가 다른 곳을 가리키는 것 같은, 지향하는 듯한, 방향이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라고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삶을 제사장이 말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답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요? 안 보이지요. 천사가 어디 있느냐고요? 안 보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꿈으로? 아니에요. 그러면 어떤 기적으로?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으로 정답을 보여줍니까? 바로 십자가지요. 제사장. “십자가 그게 뭔데? 정치범 죽이는 형틀인데.” “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알아야지.” “그 예수라는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잖아. 그 사람이 누군데?” “그 분이 바로 영원한 멜기세덱으로 오신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분을 본받아야 돼?” “아니. 그분께서 이미 일을 처리했다는 것을,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는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를 알게 되는 삶을 사는 거지요.”
이미 구원 받은 입장에서, 이미 컨베이어시스템에 올라간 입장에서 ‘왜 자꾸 내 인생은 이상하게 이질적인 곳으로 가는 거야?’라고 다시 한 번 느끼는 겁니다. ‘대체 내 인생을 누가 당기는 거지? 어?’ 주님께서 우리를 바꿔주려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산 사람 만들어주려고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게 신문에 날 이야기입니까? 9시 뉴스에 나올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9시 뉴스에 “물에 빠져죽었던 아이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이런 것 나오는 것 봤습니까?
죽을 몸도 살렸다는 것은 교회에서만 이야기하고, 복음에서만 이야기하고, 성경에서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 살았다고 하지 마세요. 누구 덕분이냐고 물으세요. 그게 우리의 기능입니다. 내가 살았다, 가 아니라 “주님이 죽을 나를, 주님이 살렸다.” 그리스도가 에스겔에 나오는 이 제사장의 법을 완성하신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것이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답을 이제 알았습니다. 중간과정을 통해서 주의 뜻도 알았습니다. 희한한 것으로 주의 뜻 알게 하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는, 그것으로 인해서 이미 구원된 상태에서 구원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33강-에스겔 44장 20-27절(제사장의 조건)150408-이 근호목사.hwp (31.5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