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3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구상적 현실
20150403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구상적 현실
이름 : 한윤범(IP:14.39.134.30)
20150403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구상적 현실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돌 판을 깎아서 시내 산에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내 산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지요. 더 나아가서 시내 산 없는 하나님 있습니까? 그건 우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자리가 중심이거든요. 이걸 하나님께서 깨버리는 겁니다. 너는 중심이 아니라는 거죠. 너를 있게 한 중심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이상은 내가 나왔던 내가 출현했고 내가 시작했던 그 중심은 잃어버렸어요.
인간은 잃어버렸으니까 그 다음에 찾아가겠지요. 찾아가는 과정에서 원래 자기 자리를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찾아가면서 처음부터 인간이 삐딱하다는 사실이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겁니다. 엉뚱한 길로 계속 가는 거예요.
얘들 노는 자동차 바퀴가 빠져있으면 삐딱해서 갈수록 점점 멀어지잖아요. 처음에는 같이 출발했는데 나중에는 엉뚱한 길로 완전히 갈라지잖아요. 처음에 함께 있을 때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인생을 살면 살수록 자기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엉뚱한 길로 감으로써 나중엔 뭐가 원천지인지 드디어 상실해버리고 노출돼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돌 판을 네가 쓰지 말고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오라. 내가 다시 쓰겠다는 것은 중심에서 떨어져나간 쪽에다가 모세가 중보자의 기능을 하면서 그들과 다시 원천지, 하나님을 만났던 그것을 거기에 삽입시키는 겁니다. 그 방법을 이렇게 하면 돼요.
미래에서 당기기에요. 제가 표현한 것 가운에 많은 것이 어렵게 들려지지만 그 중에 하나 어려운 게 미래에서 둘둘 감아 당긴다는 이걸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 느끼기가 힘듭니다. 얘가 카펫에 앉아있을 때 오라고 하면 안 와요. 그땐 카펫을 둘둘 감으면 오잖아요. 얘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면 이불 채 잡아당기면 재미있어 해요. 이불 채로 당겨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따로 중심이 필요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회귀 본능이 있어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요.
하나 예를 들면, 우리가 옛날 어릴 놀던 때 그립잖아요. 시내에서 멱 감고 놀던 걸 회상하면 도대체 내가 1970년도인지 2015년인지 잠시 착각할 때 있습니다. 특히 꿈속에서 그런 게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깨보면 그 친구는 어디 가고 없고 자기만 덜렁 옛날 놀던 냇가에 서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 납니까? 안 나잖아요. 뻔히 과거로의 회귀가 실패하는 줄 알면서도 인간의 현재는 과거만 놓여있어요. 과거만 집합돼있기 때문에 항상 의미와 판단할 때 과거의 것을 동원해서 판단해버려요.
친구 만나면, “너, 옛날에 그랬잖아.” 제 말은 뭐냐 하면, 미래는 모른다는 거예요. 미래는 모르고 과거만 알기 때문에 자꾸 과거에 입각해서 현재를 채우는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미래를 향하여 인간을 잡아당겨버립니다. 인간은 과거만 알고 있고.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리의 예상대로 안 되는 이유에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의 시작은 곧 시간이 끝나는 지점이 시간의 시작 지점이에요. 알파요 오메가거든요.
시내 산부터 시작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시내 산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지 순례해야 되느냐? 아니죠. 시내 산에서 나왔던 게 있어요. 그게 십계명이었습니다. 친히 쓰신 말씀이거든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은 누굴 의미합니까? 예수님 곳에 가는 거예요.
지금 돌 판을 새로 만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네가 내용을 채우지 말고 네가 빈 돌 판만 만들고 글씨는 여기서 새기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중심은 시내 산이 중심이죠.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은 이 중심에서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팔자, 운명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중심이 되는 기준 밖으로 못 벗어나요. 여기에 입각해서 멸망당하기도 하고 뭐 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시내 산에 다시 찾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시내 산이 뭐냐 하면, 말씀을 적어주는 곳이거든요.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누가 있다? 말씀이, 예수님이 계시다 말이죠. 지금의 시내 산 가봐야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 계신 곳이 원래 첫 출발지고 마지막 종착점이 되는 겁니다. 공간적으로 그렇고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알파요 오메가니까.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 있는 곳을 못 찾아간다는 거예요. 몇 번 버스? 5001번 탈까요? 뭘 타고 주님한테 갈까요? 문제는 엘리야, 모세, 아브라함, 이삭, 이 사람들이 이미 갔다는 사실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천국 갔잖아요. 그들은 몇 번 버스 타고 갔지요? ktx 기차 타고 갔습니까? 비행기 아시아나 타고 갔습니까? 그럼 뭘 타고 갔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내린 것은 그들을 미래에서 잡아당겼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들 속에 장차오실 예수님의 영이 먼저 있어서 비록 그들은 과거밖에 몰라도 그들 속에 있는 예수님께서 이미 원래 자리로 끌고 가야 될 특수한 임무와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은 천국 가야만 하는 그래서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그러한 팔자가 된 겁니다.
이야기 들어보니까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지요. 우리도 미래에 만날 분이 먼저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미래에 주님 만날 그쪽으로 강제로 끌고 갔으면 좋겠지요. 사실은 성령이 오면 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이걸 인식론이라 하는데, 인식론이란 무엇이 있다는 존재론은 아니라는 거예요. 뭐가 여기 있으면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있는데 이것이 비타500인지 어떻게 알아 할 때 이걸 인식론이라 합니다.
꿈에 갑자기 자기 집이 넓은 아파트 사는 걸 봤다. 꿈 깨보니까 별로 넓지 않지요. 분명히 꿈에는 인식했는데 실제는 존재하지 않지요. 그런데 반대로 이 안에 매직을 넣어놨습니다. 보니까 책이에요. 매직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데 책을 펼치니까 매직이 나왔습니다. 그건 뭡니까? 몰랐는데 알았지요. 그러면 우리가 몰랐지만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들어있지요. 하지만 내가 매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들어있지요. 눈에 안 보이니까. 그러나 매직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소급해서 차후적으로 일이 다 진행되고 난 뒤에 처음부터 있었다고 뒤늦게 자백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 매직이 들어있었구나,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고 난 뒤에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돼있었네. 하는 것은 인식론입니다. 성경의 내용에 보면 택한 백성은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분명히 한글로 돼있어요. 한글성경이니까. 그런데 그걸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지요. 대부분 안 믿지요. 왜 안 믿습니까? 성령이 안 와서 인식론이 형성 안 됐어요. 주님이 주신 영으로 못 보기 때문에 인식론이 형성 안 되어있으니까 행함으로 착함으로 천당 가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만약에 인식론이 형성 돼버리면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내가 도대체 과거에 무슨 생활을 했었어, 라고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내가 어제 무슨 일을 했지? 우리 조금 전에 미스터피자 먹었잖아요. 그런데 성령 받으면 어떻게 돼요? 조금 전에 피자 먹은 죄를 졌잖아요. 왜? 창세전에 주께서는 피를 흘려야 됩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창세전부터 피 흘리기로 작정돼있습니다. 피를 흘려야 죄 사함을 받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것이 1장 3절에 보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일이 창세전부터 예정돼있다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창세전에 뭘 예정했다는 말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만 구원받는데 그 예수가 뭘 해야 된다? 피 흘려야 된다는 것이 창세전에 이미 예정돼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피를 흘려야 죄 사함 받는다면 우리는 뭘 해야 돼요? 우리가 착해서 죄 용서받는 일이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뭘 해도 그게 죄가 돼야 되죠. 그게 창세전에 확정돼있으니까.
문제는 아까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내가 안 것만 안다고 했어요. 미래는 모르고. 그렇다 보니까 과거에 피자 먹은 것이 죄가 됩니까, 안 됩니까? 배고픈데 밥 먹는 게 뭐가 나쁩니까? 노아 때 홍수 오기 전에 사람이 먹었잖아요. 왜 먹었습니까? 배고파서 먹었어요. 장가 왜 왔어요? 사랑하는 사람 있으니까 장가 간 거예요. 그게 뭐가 나빠요. 장사했습니다. 왜 장사했습니까? 놀면 뭐 합니까, 장사해서 먹고 살아야지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았지요. 그때 그들이 그걸 죄라고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 아니지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구원받고 보니까 그것마저 죄였습니다. 먹고 마시고 그게 죄가 됨으로 말미암아 어떤 짐이 벗어지느냐 하면, 내가 죄라고 여겼던 죄는 적극적 극렬하게 죄가 아니에요. 단호하게 죄가 아닙니다. 왜냐? 더 큰 죄 속에서 나온 것이지 그 자체를 단독적으로 떼어놓고 죄라고 하면 마치 그것만 죄고 나머지는 죄가 아니고 의로운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되는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몽땅 죄인이 되면 몽땅 죄기 때문에 따로 떼어서 특별한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없습니다. 우린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인식은 중요한 인식인데 왜냐하면 내가 뭔가 일이 잘못됐을 때 죄가 없기 때문에 죄 값을 치루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착해도 죽잖아요. 죄 값은 죽음이지 뜻대로 안 되는 걸 죄 값으로 해버리면 그건 저주의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지는 셈이 돼요. 내가 행동 잘못하니까 재주가 옴이 붙어서 뜻대로 안 된다. 이러면 큰 일 날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착한 일 많이 해서 빨리 보상하려고 하는 그런 마귀의 시험에 빠지게 돼요. 이중 삼중으로.
정말 출애굽기를 보면서 인식 전환이 와야 됩니다. 발상의 전환이 와야 돼요. 왜 자꾸 인식과 존재를 나누느냐 하면, 인식론이 잘못된 것을 마치 자기 존재가 지옥 가는 양 구원 못 받은 것처럼 걱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이 안 되는 걸 좀 더 살면 느끼는데 그걸 모르고 지옥 가면 어떻게 하죠?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받게 했습니다, 하면 그건 맞는데요. 내가 그게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그런 예를 들었지요. 어떤 사람이 자기가 곡식이라는 거예요. 사람이면서 곡식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서 열심히 치료해서 자기가 곡식이 아니고 사람인 걸 알았습니다. 알고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되돌아오는 거예요. 병원 앞에 닭이 한 마리 있는 거예요. 의사가 하는 말이, 이제 당신 사람이니까 괜찮잖아요, 하니까 나는 내가 사람인 줄 아는데 저 닭은 나를 아직도 나를 곡식으로 보면 나를 먹을 게 아니냐. 그래서 겁나서 들어왔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나는 예수 믿는 걸 내가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내가 예수 믿는 걸 믿음이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그 말이에요. 이거 히스테리입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는데 하나님이 그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고 나오면 내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무슨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대책, 해법을 내보세요. 우리가 다들 하는 고민이지만 전부 다 쉬쉬하고 있어요.
정답을 알려 드려요? 우리가 나는 곡식이다. 사람이 아니다. 나는 믿는다. 이런 건 어디서 나왔는가? 과거의 산물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과거에 있었던 편집된 내용이 내 기억 속에 저장돼있고 그 기억을 현재 용어로 재편집하다보니까 자르고 찢고 붙이고 하다보니까 과거가 뭉쳐진 과거의 산물이 현재의 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구원받는다? 카펫을 둘둘 감는 거예요. 카펫은 우리가 딛고 있는 자리입니다. 원천적 자리에요. 중심된 자리, 출발점이에요.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고 창세전에 예수님이 깔아놓은 예수 안이란 자리입니다.
산상설교 7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모래 위에 집을 짓지 말라고 했지요. 모래만 쌓으라고 한 게 아니에요. 집을 지어도 괜찮아요. 모래만 붙들고 있어라, 반석, 이게 아니고 집을 짓되 돌 위에 집을 지어야 되지 모래 위에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보기에는 똑같아요. 보기에 전혀 구분이 안 되는데 이게 언제 구분되느냐 하면, 홍수가 들이닥칠 때 모래 위의 집은 멸망하잖아요. 그런데 집은 왜 짓습니까?
인간은 인식론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가거든요. 과거를 통해서 미흡했던 것, 뭔가 모자랐던 것, 짜증났던 것, 그런 것을 미래에 가서 보상받겠다고 잔뜩 희망에 차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론은 과거에 이미 알고 있던 거예요. 성도가 됐으면 과거에 알고 있던 것이 전부 죄가 돼야지요. 그걸 죄라고 지적할 수 있는 기준이 함께 있다는 것인데 그게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먹고 마시고 뭘 해도 피 앞에서 나를 구원시키고 나를 영원하게 하는 요소가 아니에요. 피자를 먹든 칼국수를 먹든 칼국수 먹었다고 구원받고 천당 가는 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헌금했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선교사 됐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예배 참석하고 성경 공부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닌 것 맞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 공부 참석 안 한다고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니지요. 그러면 헌금 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면 구원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예배를 참석 안 했다, 또는 헌금을 안 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알아요? 과거에 헌금 안 한 것을 본인이 알잖아요. 인간은 과거 것만 알아요. 내가 지난번에 예배 참석 안 했어. 알고 있잖아요. 그러면 그것 알면 구원받습니까? 과거 알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사실은 여러분이 과거 다 알 수 있어요? 몰라요. 새순교회 교인들 계단 몇 개이지요? 분명히 밟았잖아요. 몸은 밟을 때마다 기억하는데 숫자는 모르지만. 몸은 기억해도 이성적으로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계단 밟는 것은 빠진 거예요. 왜냐하면 계단 밟을 때 아이고, 추워라. 다음엔 옷을 더 입고 올까. 이것 생각하느라고 몇 개 밟았지만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인간이란 자기의 몸 편한 쪽으로 모든 걸 현실을 구상합니다. 오늘 강의를 구상적 현실로 할게요. 구상할 때 편집을 한다니까요.
얘들이 지금 배고파서 밥 먹고 있는 가부장적 집안 같으면, “하늘같은 가장이 있는데 너희들끼리 밥을 먹어?”라고 나무라면 얘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빠가 있는지 몰랐어요. 왜 편집이 안 됐을까요? 배고픈 게 급해서 평소에는 “아빠, 식사하세요.”란 말을 했는데 너무 배고프면 안 나온다니까요.
인간의 행동은 죄인으로써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잘했다고 하면 안 돼요. 어쩔 수 없이 죄인 되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죄인 되는 겁니다. 거기다 어떤 가치와 의미를 두지 마세요.
구원의 자리는 십계명이 깔아 앉았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은 언약이고 언약은 새 언약을 예상해서 먼저 깔아놓았습니다. 그러면 언약 자체를 주신 분이 본인한테 적용시켜서 본인이 인간으로 오시면서 예수님의 몸 자체가 새 언약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십계명 지켜야 복 받는다고 하다가 신약에 오게 되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고 생명이 없느니라. 이렇게 바뀐 게 아니고 그렇게 실현되고 완성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자리는 어딥니까? 말로 하니까 어려워지는데 이걸 보세요. 돌 판에 뭐가 새깁니까? 말씀을 새기지요. 말씀은 어디서 새깁니까? 지상에서 새깁니까, 어디서 새깁니까? 시내 산. 시내 산에 하나님이 버티고 계시지요. 왜냐하면 이게 원천이고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중심이 아닙니다. 중심을 따로 거쳐 와야 돼요. 이 말씀이 요한복음 6장에서 살과 피가 되어 영생이 되지요. 예수님이 스스로 이야기했으니까. 구약에서는 말씀대로 지켜야 산다고 했잖아요. 신약에 오면 사는 방법이 말씀 지켜서 사는 게 아니고 피를 마셔야 산다고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돌 판에서 말씀을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한테 적용시켜서 완성시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인식론적으로 살과 피에서 우리에게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신약에서 성도가 되거든요. 주어지면서 어딜 경유하느냐? 바로 오는 게 아니고 살과 피의 말씀을 통해서 돌 판을 거쳐서 이렇게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게 아닙니다. 구약 성경이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복음화 된 율법으로서 복음을 보여주는 율법으로 우리에게 그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오해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했던 똑같은 오해를 해요. 저는 지금까지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그럼 뭐가 되지요? 바람피운 적 없으니까 하나님, 저 착하지요? 착한 만큼 복 내놔. 누가 이런 실수를 했습니까? 성령 오기 전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한 거예요. 우리는 그들을 아주 무시하면서 “이 사람들 참 무식하다. 그걸 모르나?” 이렇게 비아냥거리면서도 막상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법감정이라는 게 있어서 법감정에 의해서 우리는 날마다 의인되었다고 여기더라도 새로운 법이 오게 되면 죄인 돼버립니다.
평소에 던져놓은 주식이 갑자기 열배나 불어났다든지, 조그만 토지가 도시계획 잡혀서 열배나 보상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싱글벙글하지요. 아내한테 부자 되었다고 자랑하려고 하는데 바람이 불어서 뭔가 종이 하나 날아왔는데 보니까 마태복음 19장 부자 청년 돈 좋아하는 내용이 나오더란 말이죠. 우연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런 게 날아와 붙는다면, 우리는 율법이 오기 전에는 하나님 복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바람에 하박국 3장이 날아왔어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켰다, 복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디에 기준해서 그렇습니까? 우리 인식론은 과거에서 내가 은근히 노렸던 것, 부자 되고 싶었던 그것이 현실화 될 때 하나님 축복으로 간주했는데 이것을 미래에서 보면 뭡니까? 십자가만 복이고 그 앞에선 안개 같은 것이고 있으나 없으나 의미 없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도착해보면 아는 거예요. 그때 돈 벌었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건 십자가 앞에 주님 만날 때 참 내가 그런 헛된 야망과 꿈에 잠시잠깐 빠졌습니다. 그때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인식론 바꿔치기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작업을 하면서 나는 이미 십자가로 구원받았기에 인식론 바꿔치기 하는 효과를 그동안 평소에 늘 누리고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은 거예요. 그들에게 직접 예수님을 안 보내고 왜 돌 판에 쓰게 했습니까? 그들에게 율법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율법에 대한 그들의 오해와 그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를 통해서 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서 죄 속에서 예수님이 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정리해보면, 의인은 죄에서 나와요. 십자가 그 다음은 없다. 십자가 이후가 없어요. 왜? 결국 마지막은 십자가만 남기 때문에. 그것도 모르고 십자가 다음에 부활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부활이 뭐냐 하면, 십자가 마지막에 함께 참여시키는 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와 부활 사이는 시간적으로 더 이어지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정지된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죽었으니까. 사람이 살아있을 때나 시간이 흐르지 죽은 사람에게 무슨 시간이 흐릅니까.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의 작업은 도리어 우리의 과거로 돌아가요. 과거에 어디서 살았으면 무엇이 죄였으며 무엇이 율법이었으며 무엇이 마귀의 시험이었으며 이런 것을 되돌려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걸 사후적 또는 차후적으로 소급해서 우리 자신의 죄와 용서하심과 그걸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 날로 새로워지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돌 판 다시 깎아 만들라는 말은 어떤 인간도 시내 산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 신자든 불신자든 지옥 가든 마찬가지에요. 왜? 시내 산이 중심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럼 시내 산 찾아가면 되는데. 그 시내 산이 인격으로 바뀌었지요.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 바깥에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예수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길거리에서 찬양소리 나오지요. 그걸 예를 들면, 성가대가 찬양하잖아요. 듣는 사람들은 은혜롭고 기쁘고 합니다. 은혜롭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이미 과거에 믿음 괜찮았다는 것을 잠시 회상하는 순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성가대는 그런 것마저 없어요. 성가대는 노래하면 오늘 안 틀려야 되는데 소프라노 맞나? 딴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교인들이 찬송가 4절 부르면서 무슨 생각합니까? 찬송가를 1절만 하고 말지 4절까지 하고. 누가 4절까지 다 부르라는 법은 누가 정했어? 짜증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목사도 그걸 감안해서 피곤하다싶으면 짧은 것 찾고 될 수 있는 대로 3절만 있는 것 하고. 배려해준다고. 어차피 4절까지 가면 은혜고 뭐고 가사는 생각 안 나고 빨리 끝내고 딴 짓할 생각할 테니까. 굉장히 은혜로운데 막상 노래하는 사람은 몸이 피곤하니 아프니 딴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이라는 게 우리를 위한 환경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 환경을 내 것 만들려고 하지만 내 것 만들 수 없어요. 그냥 주어진 환경대로 사는 겁니다. 왜 사느냐? 인식 바뀌라고. 어떻게? 우리가 과거를 뗄 수 없어요. 과거와 성령에서 주신 미래와 내 안에서 만나라고. “주여, 이것밖에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구원시켜주셨습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예수 믿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를 믿다니요? 이건 예상 못한 건데요. 이걸 글로 쓰면 앞뒤가 안 맞는 글이에요. 저는 예수 잘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왜 내가 예수를 믿지요. 제가 뉘앙스를 달리 하니까 이해되시죠. 내가 예수 믿는 걸로 끝내야 되는데 그걸 폐기처분해버리고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는 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미래에서 왔지요. 아아, 내가 믿는 게 아니고 믿게 하시는구나. 믿게 하시려면 내가 믿어야 돼요. 그 믿어야 되는 것이 과거에 근거해서 믿어야 되고 그 믿은 것이 다 가짜로 엉터리로 우상숭배로 들통 나는 과정을 거쳐야 은혜로 믿게 한다는 것이 인식 되지요. 하여간 니 마음대로 믿으세요. 그리고 깨지세요.
예수 잘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예.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 잘 하셨습니다. 예수 잘 믿는데 이런 일이 생겼느냐는 말은, 예수 잘 믿으면 이런 일은 안 생긴다고 미리 당겨서 자기가 예수 믿기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멀찍이 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잘 할 테니까 잘 믿었다고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우상일 줄이야. 그게 바로 애굽의 황소 섬기는 거였어요. 주께서 그 자리를 예수의 피와 살로 메운 겁니다. 네가 한 것, 네가 피자 먹은 것도 내 희생 덕분에 피자가 나온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신음 소리에 근거한 겁니다. 예수님이 채찍 맞음에서 아픔을 겪는 그 위에 그 은혜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힘으로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살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열심히 나름대로 노력해서 이만큼 살았다고 우긴단 말이죠. 그런 것을 우린 평생 동안 겪어야 됩니다. 겪으면서 과거에서 올라온 잘못된 인식론과 미래에서 주신 새로운 주님의 뜻과 늘 충돌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주체는 파열되고 깨지는 겁니다.
우리는 깨질 때 나의 의미도 같이 깨지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의미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미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의미로 구원돼야 하기에 구원이 주어진 거예요.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의미가 찾아온 게 아니고 의미가 찾아온 동시에 그게 구원이 돼버린 거예요. 내가 손쓸 새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덮친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변화가 인식론적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9절에 봅시다.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은총을 입었기 때문에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목이 곧은 백성이란 고백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또 이 소리 듣고 주여, 전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그것 해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도 일종에 행함이죠. 이렇게 하게 되면 미래에 구원받겠다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는 내 시간적인 책략에 불과한 겁니다. 그 자체가 인정 못 받는다니까. 우리의 꼼수에 넘어가지 않아요. 우리가 미래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몸통 자체가 인생 자체가 출애굽기 34장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왜? 말씀의 완성자가 찾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이 성경에 보면 다 들어있어요. 그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말씀의 얼룩무늬가 돼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말씀에 위반해서 되는 일이 없습니다. 말씀에 합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죄와 용서가 만났지요. 죄와 용서가 만난 것을 10절에서 두 자로 이렇게 합니다. 죄와 용서가 만난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언약적 죄인입니다. 선악과적 죄인이 아니고 언약적 죄인입니다. 선악과적 죄인이든 언약적 죄인이든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전부 다 한계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 예수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예수 밖에는 정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어요. 정죄함이 있느냐, 없느냐는 경계선으로 결정돼요.
마음 같아서는 훌라후프를 운동할 때만 하지 말고 훌라후프에다 ‘예수 안’이라고 새겨서 걸치세요. 장 보러 가도 어디 가도 예수 안에 있다. 항상 예수 안에서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죄인 되는 겁니다. 죄인의 입장에서는 이걸 달라, 저것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없어요. 그럼 뭐냐? 모든 것이 그냥 은혜로 주어지는 겁니다. 날 위해서는 없어요. 예수 안에서는 예수님을 위해서 필요한 일들이 나한테 주어진 겁니다.
언젠가 엠비씨에서 차승원이 어떤 탑배우인데 공효진과 사랑하는 [최고의 사랑]이란 드라마가 있어요. 거기서 차승원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믿기 힘들었는데 ‘극복’한 게 나와요. 어려움을 스스로 이겼다는 이 말이거든요. 저는 이걸 바꿨어요. ‘감사’ 우리 힘으로 극복한 게 아니고 인식론, 미래에서 보니까 내가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주어진 것이 은혜가 되는 겁니다. 은혜가 언제 깨지느냐 하면 갑자기 과거로부터 추억이 들어오면서 깨져버려요.
내가 과거에 이런 걸 기대했는데 이게 뭐고. 얘가 전교에서 10등 기대했는데 전교에서 100등, 이게 뭐야. 그러면 쫓아가서 하나님이여,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지고. 미래로 가야 되는데 자꾸 과거로 가는 거예요. 과거의 추억으로 가는 거예요. 그때가 좋았지. 자기중심이 될 때 그때가 좋았지요. 한 번 살아보지 그때가 좋은지. 멸망당할 자를 건졌습니다. 우리는 그때 멸망당할 줄도 모르고 그냥 기분에 도취해서 살았지요.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내 중심이 내 과거의 출발 인식이 방해합니다. 자꾸 나를 스스로 단단히 싸매려고 애를 써요.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술과 담배잖아요. 마약, 도박. 술, 담배, 도박하면서 자기는 잠시 추억에 잠깁니다. 과거에 잘났던 것을 생각하지요. 술 안 잡사보니까 알 수가 있나. 그때 참 좋았지. 그게 자기를 단도리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 주신 은혜를 은혜가 아니고 극복! 지 잘난 맛으로 바꾸는 자기 드라마를 짜고 있는 중입니다.
10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언약을 세울 때 누가 필요합니까? 바로 죄인이 필요하지요. 그 죄인으로 동원된 자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바로 죄인으로 동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맨날 죄인이에요. 그게 언약 안,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그 언약 안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언약 안에서는 도시락에다 간식, 차비까지 전부 언약에서 제공합니다. 잠자리, 숙소, 먹을 것까지. 언약이 다 제공한다는 주께서 주신 환경이 뭐냐? 광야. 광야에서는 숙식 제공 다 됐습니다. 가끔 고기 줬지요. 매일 아침마다 만나 줬지요. 가끔 물 줬지요. 숙소는 텐트 생활했지요.
애굽은 과거잖아요. 과거에 살던 사람이 미치는 거예요. 그때는 마늘, 부추, 파, 심지어 수박도 있었고 하여튼 정력에 좋은 건 다 있는데 우리는 정력이 씨가 말랐다. 주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늘나라는 정력이 필요 없다. 하늘나라는 내가 준 것만 필요하지 니가 필요한 것은 전혀 없다. 왜? 니가 없거든. 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신이 되기 때문에 네가 필요한 것은 다 버려라.
논산훈련소 가는데 지가 알던 휴대폰, 사복, 모자, 손수건 다 소포로 보내버려요. 애굽으로 보내버리고 군에 필요한 것만 군에서 다 제공합니다. 막 탈영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한 것만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11절 봅시다.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뭐라고 했던가요? 이 현실이 누구 좋으라고 있는 현실이냐고 했지요.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나만 좋으면서 살아왔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로 나만 좋으면 좋은 거예요. 이 울산이 나한테 좋으면 울산은 좋은 동네고 나를 싫어하면 울산은 나쁜 동네에요.
그러나 출애굽기 34장에서 돌 판을 다시 만들라. 시내 산에 올라오너라.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말고 내가 준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말씀 중심, 언약, 돌 판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있는 거예요. 그걸 눈치 채면 인식론 있는 거고 성령 받은 거고 눈치 못 채면 그대로 아직 탈피 못한 거고 불신자지요.
여러분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은 좋겠다. 맨난 성경 보니까. 이러는데 목사가 성경 봐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왜 보는데? 성경 왜 보지요? 누구 좋으라고 보는데요? 자기 기도하는 것이 옆의 교회 부흥되라고 기도합니까? 성경 항상 보고 심방 한 번 더 가고 하면 혹시 교인 하나 그것도 돈 되는 교인 하나 올까 싶어서. 이상한 정신병자 오지 말고 제발 비리비리한 노인네도 오지 말라고 멀쩡한 사람, 좀 배운 그런 사람들, 교회에서 돈 빼가는 그런 사람들 말고.
도시에 약간 큰 교회에 거지들 참 많습니다. 정말 골치 아파요. 그들 성경 너무 잘 알아요. 돈 받고 예배 참석해서 지 필요한 것만 이웃사랑해라.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고, 다 알아요. 돈 달라고. 돈 주면 인간 버리는 겁니다. 돈 안 주면 욕을 해요. 그 교회 가지 말라고 욕하고 돌아다니고.
목사는 똑같아요.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과거에 내가 신학했으니까 이천 명 모아야지. 그 꿈을 아직 포기 못했습니다. 과거의 꿈을 위해서 하니까 여전히 과거에 매인 사람 돼요. 자기가 언약이라.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믿는 예수가 진짜 예수고 전부 다 그런 거예요.
그런데 진짜 구원받은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몰라요. 이미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주님이 된 통으로 자기 돌 판의 완성을 돌 판 모서리로 자기 머리를 때리니까 십자가가 뾰족하잖아요. 정신 차려라. 널 위해 사는 게 아니고 나를 증거하라고 살라고 성령 줬다고 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으로 우리의 죄를 다 고발시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죄 지음에도 불구하고 저주하지 않고 지금까지 끈질기게 우리를 계속 살려내기 위해서 예수 안의 능력과 그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드높이기 위해서 우리를 살려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 11절 말씀에 여부스 사람, 히위 사람,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게 뒤에 나옵니다. 그건 다음 시간에 하겠는데 그들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말은 이미 나는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너는 다른 여자를 다른 신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 내가 그냥 두지 않고 너희를 칠 때 분노로 치는 그것이 두 자로 하면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다시 크게 나타나도록 다가오도록 조치하신 것이 이게 얼마나 큰 기적인 것을 큰 사랑인 것을 사람 만들기 위해서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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