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6장31절(의미있는 영생)150319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6장31절(의미있는 영생)150319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6장31절(의미있는 영생)150319b-이 근호 목사

6장34절에 봅시다.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아주 정신을 못 차렸어요. 자꾸 내가 먹는 게 아니고 니가 소멸되어야 되고 주님이 오히려 그들을 잡아먹는데 자꾸 저희들이 자기 것을 고정시키고 고정된 나를 유지시키려고 뭘 자꾸 달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이들이 다 떠나버립니다. 이런 주관적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주고받는 대화가운데 전혀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주님의 행동에 객체 대상이 되어야 되는데, 자꾸 주인공으로 행세하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해도 그게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 복음 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자기가 주인공인데 복음 전해도 못 알아듣지요.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보세요. 주님이여 주소서, 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이 오라, 너희들이 나에게 오라, 너희들이. 그런데 이 이야기할 동안에 누가 오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지금 코앞에 이야기하고 있는데 오고 자시고 할 게 없잖아요. 이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하고 같이 죽자는 뜻이에요. 내가 가는 그 쪽으로 니가 합류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합류 안했는데, 이들이 합류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생명을 줄 테니까 주께서 길 닦는 거예요. 내가 지금 길 닦고 가니까 너희는 니 길을 버리고 내 길 닦는 곳에 합류하게 되면 거기에 바로 생명이 있다. 아까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죽음 속에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이 죽음은 누구 죽음인가 하면, 주님의 죽음입니다. 이 주님의 죽음을 요한복음1장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했지요.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뭐냐 하면, 새 언약의 죽음이라, 언약 완성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거예요. 살아남이 완성이 아니고 죽음이 완성이에요. 그런 말이 참, 어렵다.

예수님의 살아남이 완성이 아닙니다. 약속의 완성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걸 몰라요. 부활이 완성이다. 부활이 완성 아닙니다. 죽으심이 완성이에요. 부활이 완성이 아니고 피가 완성이에요. 피. 피가 완성이라니까요. 부활로 살리는 게 아닙니다. 피로 살리지. 자꾸 부활로 살린다 하니까 사람들은 열매만 따먹으려 해요. “아이고, 좋겠다. 고 살게 한 능력 우리한테 주시옵소서.” 또 주시옵소서. 맨 날 주시옵소서. 하는 거예요.

죽어야 산다, 하니까 사람들은 죽는체하고 살려 해요. 죽어야 산다 하니까. 죽었다~ 살렸다~ 지가 알아서 해요. 그래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말은 소생이며, 소생은 죽은 당사자가 사는 걸 소생이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으로 그걸로 끝났어요. 지 드라마로 다 끝났어요. 지 소설은 끝나버리고 이제 사는 것은 예수님만이 살아요. 그 살려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내게 되면 고 생명은 죽기 전에 자기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난 그 생명의 본인이 능력을 받아서 합류하는 것이지, 옛날 살아있을 때 죽었다 살아난다, 그 부활이란 생명을 지가 짐작하고 예상한 생명을 부여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달란트 비유도 다시 생각해야 되고 모든 비유를 다시 해석해야 돼요. 전부 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미래에서 미래의 확정된 것에 합류하는 식이기 때문에 그 중간에서 내 것을 버려야 돼요. 내가 생각한 내 구원, 내 영생, 내 천국, 내 예수, 내가 아는 삼위일체, 다 버려야 돼요. 우리 전부 다 다 버려야 돼요. 왜냐, 거기에 누가 끼기 때문에? 내가 껴있거든요.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구원, 이거 다 버려야 돼요. 박영선 목사 설교는 처음부터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 구원은 내가 짐작하고 있는 구원이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의 구원은 짐작도 못한 구원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우리를 빼놓고, 우리를 배제시켜 놓고 오직 아들, 예수님하고 아버지만 아는 그 구원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나의 구원을 지독하게 기다린 거기에 낯선 구원이 침투해 버려요. 마태복음5장 한 번 봅시다. 설교시간에 했는데 대목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마태복음5장3절 보겠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면 천국 줍니까?” 이리 나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심령이 가난한 것도 내가 짐작하고 심령이 가난했다고 쳤을 때, 내게 주어질 수 있는 내가 원하는 천국을 내가 보장받을 수 있느냐,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것은 이 순재 보험입니다. 내가 돈을 달 달이 얼마나 넣잖아요. 나중에 암 걸린다든지 뭔가 이리 있으면 내가 준 그 돈을 받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한 그 천국을 주께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이미 천로 노선이 바뀌었어요. 그럼 뭐냐, 심령이 가난한 그 자체가 천국이에요. 그게 복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다, 이미 네가 천국에 영향권이 있기 때문에 니가 안 되는 심령 가난함이 나로 인하여 이미 되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제일 마지막 복은 나로 인하여 너희를 욕하거든 나를 인하여. 천국, 천국이야기 하다가 그 천국의 구체화가 누굽니까? 우리가 생각한 잘사는 동네가 아니고 나,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왔음이 이미 천국이 온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보고 자기가 생각한 천국은 따로 생각해 놓고 요 예수라는 이 작자를 이용해 가지고 내가 원하는 천국에 들어가려하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사기가 또 있겠어요? 이건 엄청난 사기입니다. 큰 낭패를 당할 사기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국 가겠다는 자체가 심령이 가난한 게 아니에요. 그건 욕심쟁이 우후~ 욕심쟁이에요. 욕심쟁이. 세상에 죄를 지어놓고 어디를 가요? 거기에 가면 또 거기서 자기 부서 만들어놓고 또 지 자랑할 건데. 그래서 산상설교는 아무도 못 지키는 겁니다. 복은 맞는데, 너희들이 생각한 그 복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36절 돌아와서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한테 이끌려간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답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44절에 나와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 했지요. 그럼 사람들은 “가면 되지.” 하잖아요. 갈 수는 없다는 겁니다. 갈 수가 없어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이렇게 되어있어요. 지금 길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이 어두우니까 사람들이 분간을 못했는데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서서 이렇게 내려다보고 이야기하고, 사방이 어둡다 치고 인간은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둡다 치니까 예수님이 위에 계시는데 사람들은 자기하고 마주보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내게 오라, 하니까 가면 되지, 하거든요. 가보세요. 거기에 예수 없는 곳이지. 그럼 위로 가면 되지. 위로 갈 수 없다니까요. 요한복음3장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이 아니면 위로 갈 수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요한복음3장에서 너희들은 다시 태어나도 올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지금 이 땅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너희들은 올 수 없다. 그래서 그걸 저주의 조건이에요. 너희들이 사는 이 상황은 광야고 너희들은 거기서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의 죽음을 그냥 너희만 죽도록 했다면 너희는 그걸로 끝났는데 너희의 죽음 속에 예수님이 합류가 되어있으니까 자신의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류된 자는 그리스도 죽음 안에서 생명을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요한복음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그 간음현장을 잡힌 게 복이에요. 왜냐 하면, 간음현장 걸렸다는 말은 곧 그 당시 율법에 의하면 돌에 쳐 죽임을 당하거든요. 들키면 곧 죽는 순간이에요. 죽는 순간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한테 끌려왔잖아요. 따라서 그 여자는 이미 죽은 자로서 끌려왔기 때문에 손해될 게 없지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그런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줘버리니까 자기는 멋도 모르고 영생을 얻어버렸네요. 이런 무슨 횡재가 다 있습니까.

보통 횡재가 아니지요. 로또도 이런 로또 없어요. 자기가 돈 주고 사서 기다린 것도 아니에요. 명동에 갔다가 두 바퀴 날리다가 얼굴에 딱 붙어서 보니까 누가 산 복권이 남아가지고 남아있는 복권이 날려가지고 이건 뭐야, 하고 보니까 로또다 말이지요.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토요일에 맞춰보니까 20억이다. 왜 그리 바람에 날리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게 성령의 바람이라는 거예요. 성령의 바람이 불어 얼굴에 턱 갔다대니까 영생 돼버렸어요.

그게 아버지께서 영생 주라고 했기 때문에 내가 너한테 영생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까요. 제주도에서 람보르기니 이태리스포츠카가 있는데 누가 그걸 범퍼를 박았는데, 범퍼 값이 1억4천 나왔답니다. 아이고, 그 박은 사람 참 재수 없다. 큰일 났다 싶었는데 저녁에 뉴스를 보니까 둘 다 짜고 치고 한 거예요. 보험사기 해먹으로고 둘 다 짜고 치고 한 거예요.

이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것을 그것에서 우리가 피조물 입장에서 섭섭해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전혀 섭섭해 하지 마세요. 마치 창세기 죄 짓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와 가지고. 둘이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OK입니다. 이렇게 되어야지. “저의 구원을 저한테 일임하지 않으시면 저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따지면 안돼요. 언젠가 그런 강의를 했지요.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기름과 몸체부분을 분리시킨 거예요. 아벨이. 이는 몸체 속에서 기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오라, 너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너 속에 우리가 집어넣어준 것을 도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구원받은 너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그걸 집어넣어준 죄 많은 너도 구원될 수 있는, 죄도 용서할 수 있는 그 요소를 끄집어내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쪽으로 이 자연세계는 창조된 겁니다.

그래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한테는 모든 게 기뻐하심이에요. 그것은 우리의 행동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이 집어넣은 것을 가지고 기뻐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아가야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 왕이 그 여자를 좋아하니까 그 여자는 또 오해한 거예요. 뭐라고 오해하는가 하면, 자기 좋아하는 줄 아는데. 자기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속에 집어넣은 사랑을 찾으려하는데, 여자는 자기가 예쁜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내거 돌려 달라. 내거. 내가 집어넣은 사랑을. 니가 죽어도 끄집어낼 거야. 사랑은 죽음보다 세니까. 이걸 향유 깬 마리아는 알잖아요.

그래서 남들이 뭐라고 흉보던 관계없어요. “자, 주님 거 여기 있습니다.” 하고 아낌없이 자기 걸 바칩니다. 내가 갖고 있는 향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용서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언급한 겁니다. 절대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 때문에 자기로 인하여 좌절하지 마세요. 마지막 적은 나입니다. 집안의 원수보다 더 적은 내가 바로 나의 원수가 돼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훼방 자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나를 두 개 놓지 마세요. 나라는 자리에다가 예수님이 나라고 하는 예수님을 넣어버려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지 말고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해야 돼요. 내 속에 바로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이 계시니까. 내 속을 보면서 그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은 바로 51절에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수님의 살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살려내는 살이 예수님의 살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 살점이지요. 우리 살점이지만, 우리 살점이라 되려면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가지고, 찾아오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우리의 살과 피 대신 흘려 놓고 그 다음에 죄 많은 우리를 자신의 살점으로 일방적으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가지고 가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폐기처분 업자에요. 쓰레기 처분하는 쓰레기처분업자에요. 쓰레기인데, 쓰레기 가져가고 영생 만들어 내는 거예요. 분명히 우리 살이지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게 니 살이 아니고 내 살이라. 값을 주고 산 내 살이라.” 이제부터. 내 머리카락, 내 손톱, 내 발톱, 다 내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져가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36절 봅시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보고 있기 때문에 믿음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 말입니다. 보고 있기 때문에. ‘아, 나는 주님이 안 보이시지만 잘 믿어야지.’ 그런데 그 안 보이던 주님이 등장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믿음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지요. 안 보일 때는 아, 좋은 관계하다가 막상 나타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안 믿어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런 게 있어요. 보고 싶은 사람 만나보고 싶어 해서 기다려요. 일주일만 기다리면 만난다, 만난다 하는데 막상 딱 보고 난 뒤에는 아무 말도 안 해. 그냥 안 본 체 해. 또 헤어지게 되면 또 보고 싶어서 말을 해야 될 긴데. 자식들 같으면 ‘지금 공부하랴 얼마나 애 먹겠노. 지금 애가 잠 올 시간인데. 지금 마지막 시간이 영어시간인데 공부 잘해야 될 긴데.’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서 보면 반갑다는 소리보다도 잔소리부터 늘어지는 수가 있어요. 운동화 씻었나? 양말 그리 거꾸로 벗으면 안 되지. 부터해서 그 다음부터는 잔소리 거리만 찾아내는 거예요. 살피면서.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한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것이 자기한테 의미가 있어서 그래요. 아무리 예수 믿는다 해도 나한테 의미를 갖고 있는 한 보고 있어도 안 믿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주님께서의 믿음이란, 너 중심이라는 것을 폐기처분된 상태를 믿음이라고 나만 간주하겠다, 이리 되는 겁니다. 니 중심 아닌 상태를 믿음이라고 하지, 니 중심으로 믿음 하는 것은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강한 의미로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내게 주시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내게 주신 자는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지금까지 강의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알아들어야 되는데 제가 또 친절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빈 공간에 자기가 있는 존재라는 순간 그 의미는 자기 의미가 돼버려요. 따라서 아버지가 주신 자는 없어요. 왜? 있더라도 이 의미가 이 현실을 보는 관점이 내가 나를 지키고, 내가 나를 구원해야 될 관점이기 때문에 내가 나를 신경 쓰고 내가 나를 귀하다는 관점에서 주님이 내가 원하는 내 구원을 주께서 이뤄줘 보세요,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고 내가 나를 아버지한테 갔다 붙인 나지, “주님, 참 좋으신 분이지요? 그럼 저를 부탁하겠습니다.” 이런 나지 아버지가 보낸 자는 아니에요.

아버지가 보낸 게 아니고 내가 내 운명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이미 관여된 상태의 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런 자를 끝까지 살리지를 않습니다. 그럼 이것과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예정론과 관련되어 있겠지요.

언젠가 제가 예정론을 한 게 기억나는데요. 다 잊어버렸지요? 성경에 나오는 예정론을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은 주님의 예정은 예수님만 예정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를 예정한 게 아니고 예수님만 예정했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할 때, 우리라는 그 이전에 반드시 예수 안에 있는 우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오. 예수 안에는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 우리가 우리잖아요. 그 우리가 우리라는 게 성경에는 없어요. 내가 그 안에 들어있다고 증명해줄 성경구절은 없어요.

예수님 안에 아브라함도 있고, 이삭도 있고, 야곱도 있고, 엘리야도 있고 구원 받은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그게 나라고 하는 인간이 거기에 끼었다고 보장해주는 성경구절은 없다니까요. 왜 그렇습니까? 물으신다면, 내가 있다가 아버지께서 보내서 예수 안에 들어가면 이 나는 없지요. 이 나는 없어지고 예수님 만든 우리 안에 합류가 되면서 나의 의미 자체가 지워져버린다니까요.

내가 생각한 우리의 의미가 내 중심에서 나온 의미기 때문에 이게 삭제가 돼버린다니까요. 그러면 이 땅에 오실 때 미리 삭제하면 안 되겠습니까? 미리 삭제하라고 성령이 오셨잖아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서 나의 몽땅 책임자는 예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미리 벌써 우리라는 것이 주님 책임 하에 우리지 내 책임 하에 내가 유지해야 될 우리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 자기 신앙을 자기가 책임지고 유지하겠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불신앙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 믿음을 믿겠다는 것이지 그건 예수를 믿겠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졌습니다. 이삭을 가질 때, 아브라함이 어떤 상태일 때 이삭을 가졌는가 하면 자기도 알아요. 아기 낳지 못한 아내가 임신했거든요. 그러면 그 때부터 약속이라는 게 뭐냐, 우리는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할 수 없었다. 그게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그럼 그걸 우리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나는 이 물 컵이 있어도 물이 없어서 못 먹었다.” 나는 뭘 하지 못했다. 나는 된 게 없다. 그런 식인 거예요. 그래서 심지어 극단적으로 나왔어요. 극단적인 말씀이 나오지만, 나는 내 머리카락을 한 자나 더, 내 키를 한 자 더 자라게 할 수 없다. 그리고 내 발걸음을 내 임의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내 머리카락이나 내 키나 내 발걸음이나 이런 것까지 숨 쉬는 것까지 내가 할 수 없다. 이게 평소에 하고 있는 자기 부인이에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이게 자기 삭제에요. 자기 의미 삭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요. 그걸 제가 사태라고 사건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이걸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사고가 일어나야 돼요. 사고가. 무슨 사고가 일어나야 우리는 한꺼번에 ‘아, 살아온 것이 내 뜻이 아니구나!’ 깨닫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여기에 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이 말씀은 나를 믿을 생각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니가 너 자신을 구원하고자 따라 온 이상은 여전히 너는 너에게 하나의 의미고 네가 최 마지막 의미가 너 자신밖에 안 된 입장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 해도 나는 아버지의 뜻을 너희들이 방해해서 못한다는 법은 없고 필히 반드시 내 아버지가 주신 자는 내가 반드시 살려내고야 말리라, 니가 안 믿는다 할지라도. 너희가 못 믿는다 할지라도 기어이 믿는 자는 내가 만들게 되어있고 반드시 그들만은 구원하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이걸 선교사나 목회자가 믿자, 이 말이죠. 여러분들도 같이 믿자, 말이죠. 이걸 믿어버리면 선교라든지 목회라든지 이게 그렇게 무거운 짐이 아니지요. 무슨 무거운 짐이 되겠습니까. 내 일이 아닌데요. 목회 이런 것이 중요하다마는 그게 목회에다 내 의미, 내 존재 의미를 가미해버리니까 목회 잘 해야 되는데, 선교지해야 되는데, 맨 날 선교지에서 흑인들 몇 명 건졌습니까? 그거 자꾸 장로님이 전화로 물어대지 선교 비는 타내야 되겠지, 아마존강 몇 명 더 전도했으니까..., 아이고, 그러면 그게 하나의 실적돼가지고 갑질한테 당하는 을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렇게 심적으로 부담되는 선교 전도가 어디 있어요? 그게. 그게 성령으로 되는 겁니까? 육으로 하는 거지.

목회도 마찬가지고. 목회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목회자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38절에 방금 한 것이 나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했지요. 누가요? 예수님이 단독으로 하지요.

그럼 우리는?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하지요. 아버지도 모르지요. 하나님도 모르지요. 아버지의 뜻도 모르지요.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몰라요. 왜 모르느냐 하면, 십계명해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뜻이 나오게 되면 그 듣는 순간 우리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우리가 그걸 보는 게 되지요. 그냥 우리는 보고도 못 믿는 의미체제 안에 우리가 만들고 있기 때문에 부모 공경하라는 말을 딴에는 지킨다고 지킨 그것이 바로 부모공경 아닌 게 작품으로 나와요. 어떤 말씀이던 간에. 성경에 눈 감고 아무 말씀도 다 마찬가지에요. 어떤 말씀이던지 간에 절대로 우리가 지켜서 지켜지는 말씀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미를 내가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하고 어긋나지요.

‘그러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내가 손해 아니겠습니까? 그럼 나만 지옥가면 손해잖아요?’ 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본인이 지옥 가는 게 왜 손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 자체가 벌써 수상하잖아요. 주님이 지옥 가는 게 뜻이라면 지옥 가드리는 것이 주님한테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뜻이 지옥 가는 거라면 흔쾌히 지옥 가겠나이다.” 이렇게 나와 줘야 되지요.

그러면 뭐가 바뀌었지요? 내 중심의 의미에서 주님의 중심의 의미로 바뀌었지요. 그걸 가지고 신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로마서9장에서 내가 주의 저주에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하고 자신만만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조차 주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시옵소서. 라고 맡길 수 있는 거예요. 왜? 자기는 이미 자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시는 주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대범한 자신감으로 살아갑시다.

내 뜻은 주의 뜻을 방해할 용도로 우리 뜻이 자꾸 나오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방해받는다고 해서 주께서 방해받을 분은 아니고 다만, 우리만 죄인이라고 지적받고 그 다음에 뜻은 우리하고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어내십니다. 좀 밀어주세요. 그 분은 갑이고 우리는 을이잖아요. 갑을 믿어야지 을을 믿어야 되겠어요? 우리 자신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나도 내 자신을 모르는데 뭘 믿어요.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자기는 믿을 게 없어요. 성경의 말씀대로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밀어붙입니다.

39절을 봅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되어있지요. 그러면 내 인생을 나한테 맡기면 잃어버리겠습니까? 안 잃어버리겠습니까? 100% 잃어버리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게 천국인데, 우리는 여기서 상상하고 있는 거예요. 상상하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백날 헤매봐야 40년 광야생활 뱅뱅이 도는 것밖에 안돼요. 뱅뱅 돌다 늙어죽는 거죠.

죽어가는 인간은 곧 죽어간다는 말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은 아무것도 애초부터 없었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성사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성사될 수 있으면 아예 안 죽이지요. 죽였다는 말은 니가 백날 해봐야 니가 애썼던 것 다 끌어 모으면 그것이 바로 니가 죽어 마땅함으로 마지막에 최종 회개처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실컷 살았어요? 고생했어요? 자식 잘 키웠어요? 교회 잘 다니고? 죽어라! 이리요.

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마트에서 물건 사고 난 뒤에 마지막에 계산한다고요. 마지막에 계산하듯이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살았던 이 세상의 총 가격의 합입니다. 결국 우리의 죽음으로 옵니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이것은 도중에 나쁜 게 온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죽도록 되어있어요. 그걸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은 이미 주인이 바뀌어서 그래요. 이걸 미리 당겨서 안다는 것은 나의 의미에서 주님의 의미로 바뀐 거예요.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주한테 가져가면 그게 영생으로 바뀌어요. 희한해요. 우리는 쓰레기지만, 그 쓰레기가 주님 품안에서는 보석이 나온다니까요. 보석이. 요한계시록22장보세요. 온 천지가 보석 덩어리에요. 번쩍 번쩍해요. 빛이 막 나오고 있어요. 황금 보석이 전부 다 사람이에요. 성도들이에요. 보석 같은 성도들이 전체가 하나의 예루살렘 성을 이룹니다. 그 전체가 마치 뭐와 같으냐, 신부가 드레스 입은 거 같아요.

이번에 김성령이라는 탤런트가 연기하면서 입은 드레스가 가격이 있는데, 가격을 먹일 수 없는 게 크리스탈을 삼천 개 박았다는 거예요. 새 수목드라마에서. 그런데 가격을 치를 수 없고 대여비가 소형차1대 값이라는 겁니다. 대여하는데. 그만큼 비싸지요. 그것보다 우리가 더 비쌉니다. 천국 가는 게 그것보다. 그런데 그 빛난 신부의 드레스와 합쳐서 신부가 되는 겁니다. 합쳐서 신부의 화려한 드레스가 되는데. 그 영광스럽게 드레스를 입는 신부들이 행한 건 뭡니까? 얼마치를 행했습니까? 요한계시록22장에 보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값없이 드레스입고. 이건 웬 수지 잡는 장사잖소. 이런 횡재 어디 있어요? 돈 한 푼 안 들이고 드레스입고.

그러니까 성경은 어렵다하지만, 사실은 아브라함 같은 마음만 가지면 쉬워요. 자식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생긴 그 자식이 자기를 살려버렸으니까. 예수님 오라고 언제 우리가 기도한 적 있어요? 예수 오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예수님이 알아서 왔고, 내 죄를 좀 해결해주세요, 하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고 따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 죄 대신 피를 흘려버렸고 그 피가 성령에 담겨서 우리에게 죽을 수밖에 없는 내부에 와버렸으니까 우리의 죽음은 주와 합세한 죽음이 되고 그 합세한 죽음 속에서 예수의 피의 효과로서 거기서 도저히 따먹을 수 없는 생명나무 그 생명을 얻었으니 우리는 매사에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신천지 따라가서 합숙훈련 할 필요 없어요. 아무 필요 없어요. 십일조 같은 거 필요 없다니까요. 주일성수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선교, 전도 필요 없어요. 사는 게 전도인데, 선교인데 그게 뭐가 필요 있겠어요.

주님께서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뜻은 내가 이룬다. 니는 손 떼라.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지가 하겠다고 나서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미래의 실적에다가 자기 행함을 여기다가 집어넣는 방식으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게 습관이 돼서 그래요. 미래의 어떤 결과에 대해서 내가 얼마쯤 기여했는가를 그 안에 자기 기여도가 조금이라도 있어줄 때 나는 미래까지 살 보람과 어떤 가치의 의미를 갖게 되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마귀가 그렇게 인간을 엉망진창 만들어놨지요. 마귀가.

니를 포기하지 마라. 니한테 니가 제일 중요하다. 니 아니면 니 보다 니를 사랑하는 사람 없다. 이걸 계속해서 우리한테 세뇌 교육시켜 온 거예요. 거기다가 예수님 오셔가지고 아무것도 아니 된다. 내가 할게. 하니까 기분 좋기도 하지만, 듣는 오빠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나는 뭐고?” “니는 쓰레기지.” “오, 나보고 쓰레기래. 나는 이제 안 믿어.” “그러니까 니는 내게 오신 자 속에 포함이 안 된 거야.” 또 이러니까 걱정이 돼가지고 포함시켜주세요, 이리 또 하는 거예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것이 있는데 가룟유다에요. 가룟유다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가룟유다가 탈락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탈락당한자하고 자기들하고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가룟유다가 탈락했잖아요. 우리도 탈락해야 돼요. 마땅히 탈락해야 됩니다. 왜? 같이 행동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차이가 없거든요. 차이가 없는데, 가룟유다가 탈락했다.

탈락했다는 말은 우리한테 무슨 소리입니까? 예를 들어서 입사시험을 치는데 점수를 알았어요. 요번에 100점 만점에 80점 이하 실패입니다. 하고 통보가 왔어요. 내 친구도 80점이고 나도 80점인데. 친구가 80점이라니까 죄송합니다. 다음 기회에... 하면서 회사에서 불합격해가지고 왔다, 말이죠. 그러면 우편배달부가 그 집에 갔다가 우리 집에 올 건데 전달할건데, 점수80점 다 아는 사실인데 불합격 당연한 거죠. “에이씨, 딴 데 내봐야지.” 하는데 합격했습니다! 하고 왔을 때 얼마나 놀랐겠어요. 점수가 똑같은데 왜 친구는 불합격이고 나는 합격입니까? 혹시 사무 착오 아닙니까? 전화해보지요.

“예, 인사부입니다.” “제가 수험번호26, 누구, 누구인데 주민번호입니다.” “합격입니다.” “아니, 점수는요?” “점수 80점인데요. 합격했습니다.” “그럼 내 친구는요?” “친구 분은 불합격입니다.” “그럼 나는 왜 합격시켜주고 친구는 왜 불합격시킵니까?” “예, 우리 회장님 마음대로입니다.” 오야 마음대로에요. 그럼 회장님이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회장님이지. 그러니까 주님이지요.

아까 했잖아요. 성경은 이 세상은 예수님을 뭐한다? 주님이 주되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사람을 탈락도 시키고 내가 원하는 사람을 뽑아내는 그런 인사권 정도 있어줘야 주가 주님이 되지요. 인사권도 없는 게 주님이 되겠어요? 바로 이런 이야기가 선악과 이미 따먹은 인간한테는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이게 먹혀들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은 눈 떠있고 선악을 아는데 분명히 하나님은 선하시다면 선은 많이 행한 쪽으로 합격이고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불합격이다. 이미 익히 아는 바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을 에서와 야곱이 선악을 행하지도 않은 것 관계없이 모든 것을 상관없이 불합격, 합격으로 내려버릴 경우에 도대체 우리 인간은 뭡니까? 하고 짜증내면 불합격이고, “감사합니다.” 하면 합격이고. 그런데 의외로 짜증내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자, 40절 다시 한 번 봅시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되어있는데, 여기서 ‘마지막 날’이라 하는 의미가 중요해요.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마지막 날이 어디 있느냐 할 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에게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일 권리가 있음이 드러났을 때, 마지막 날이에요.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 때.

그 때가 뭐냐, 주님이 주님으로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게 바로 십자가 죽고 부활했을 때, 또는 더 나아가서 부활, 승천 했을 때, 더 나아가서 재림했을 때, 전부 마지막 날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날이 마지막 날이다. 이게 정답이에요. 주가 되신다는 말은 내가 구원할 자, 구원 안 할 자, 임의대로 마음대로 정할 자격이 있음이 드러났을 때. 그 자격자가 있다는 것은 누구만 압니까?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만 “주님한테 그 자격이 온전하게 다 있습니다.” 라고 고마워하면서 믿게 되지요.

그런 믿는 자한테는 이 세상에 두렵거나 무섭거나 쫓기거나 벌벌 떨 일은 전혀 생겨나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회사가 부도났다. 이것도 살리는 방식 중에 하나에요. 마지막 날, 주님이 살리기 위해서 부도까지 내면서 살려내 주기 위해서 부도를 내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을, 만약에 주님을 믿는 척이나 했다면 “나, 이제 주님 안 믿어.” 이렇게 삐져가지고 “빨리 빨리 나가. 안 올 건 빨리 빨리 나가. 괜히 니 안 올 것이 자꾸 천당 간다고 착각하면 내가 혼란스러워. 구조 조정한다. 나가! 나가!” 내보내기 위해서 환란과 핍박을 줘버려요. 빨리 나가라고. 가짜가 얼쩡거리지 말라고. 그리고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도리어 감사하면서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그런 식으로 또 뽑아내는 방법이고.

그래서12제자가운데 11제자는 바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살리는 쪽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수난과 고난과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군소리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의 일을 다 했지요. 그들이 한 주의 일은 사실은 없어요. 다 주님의 일이지, 그들이 한 일은 없습니다.

문장 보세요. ‘그들이 한 주의 일’ 했잖아요. 주님이 주의 일, 뒤에 있는 게 주체잖아요. 주체가 그들을 사용한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걸을 때, 누가 했어요? 그들 속에 주님이 했지 그들이 한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하지 않고 주님이 했다고, 주님만 증거 하게 되지요. 왜, 마지막 날 살려낼 사람들이 그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이미 살림을 받았어요. 구원을 이미 영생을 받고 난 뒤에 배부른 상태에서 그들은 마음껏 고난의 길을 간 겁니다. 합격통지서 붙이고 난 뒤에 불합격 가는 길을 가는 거예요. 얼마나 신났겠어요. 왜? 불합격해도 합격이니까. 그래서 그들은 맨 날 실수하고 실패할 때마다 기분은 더욱 더 업 되지요. 왜, “아이고, 큰 일 날 뻔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게 되어있고 항상 뭐 조금만 일어나도 불평하게 되어있고 주님 사랑한다 하지만, 나 먼저 사랑하게 되어있지요. 그걸 소급해서 자꾸 “땠지.” 합격통지서 앞에서 그걸 자꾸 하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뭐하는가 하면, 남을 맨 날 속이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속이는 성도는 속이는 건 좋아요. 계속 속이세요. 하지만, 그걸 십자가 앞에서 속이세요. 그게 성도고. 남들은 남 앞에서 속이고. 그게 불신자 그렇죠.

끝으로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41절에 보면,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자, 이거 보세요.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했잖아요. 이것은 어디서 이야기했습니까? 떡이라 한 것이 35절에 나오지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했지요. 지금 보세요. 35절 초반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 하고 35절 후반 없고, 36절, 37절, 38절, 39절, 40절까지 몽땅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하늘의 떡이라고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이해가 되겠는데, 분명히 떡이라 해놓고 앞에 죽 설명을 했잖아요. 그런데 설명이 그들에게 먹혀들었어요? 안 먹혔어요? 이게 들으나 마나 하나도 안 먹혀들었어.

그 사람들에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니는 누구냐?” 가 필요한 거예요. 그들은 광야에서 모세가 우리에게 떡을 주듯이 당신도 우리에게 계속 떡 주면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떡 안 주면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어떻게 영생의 떡을 얻어먹고 사느냐에 관심 있지, 예수 당신은 누구냐 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관심을 뭐로 봅니까? “떡 줄게.”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 고 이야기해요. 내가 누구냐. 그들은 ‘나는 이러해야 된다.’ 자기 의미만 갖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맞받아쳐버렸습니다. 너희들은 너로부터 출발하는데 질문을 나는 내부터 출발할게. “나는 떡이다.” 하고 “나한테 뭐해줄래?” 하고 나가 두 개 되어버렸어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 들어도 뭐가 포기 안 되면 안 된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게 들어갈 자리가 여지가 전혀 없어요. 튕겨버립니다.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42,43절입니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자, 부모가 요셉이지요.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자기를 의미할 때, 우리 아버지는 누구십니다. 우리 아버지 존함은 박씨, 김씨 이렇게 하잖아요. 그들이 평소에 자기 세계, 자기 의미를 채우고 나는 아랫동네사는 김 첨지라 하옵니다. 할 때, 그 하는 방법을 그대로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이게 예수님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그럴 줄 알고 예수님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거예요. 하늘은 그런 족보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왔다고 이야기를 안 듣고 그냥 그들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치고 거기다가 하늘을 붙이니까 “무슨 땅의 사람인데, 하늘에서 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으로 왔다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그들이 믿음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왜? 보고도 못 믿으니까.

보고도 못 믿는데 안 보고야 더욱 더 안 믿지요. 이래나 저래나 믿는 사람들 아니에요. 믿는 사람들 아니면서 계속 율법 지키고 여호와 지키고 메시아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과 똑같아요. “예수님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은사 봤다는데. 키가 180Cm고 머리가 이만큼 되고 수염 기르고, 그러면 예수님 이발은 누가 해준데? 가룟유다가 해주는가? 도포 쓰고 하는데. 그렇게 꾸며서 본 것도 본거잖아요.

그런데 정작 구원은 뭐냐 하면, 내가 내 의미 갖는 이것이 저주 받을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말씀의 능력이 주님의 촉입니다. 주님의 촉각이에요.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내가 내 의미로 갔다는 것은 내가 망할 인간이라는 사실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겁니다.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해서 1등을 했다.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내 애가 어디 있어? 주께서 공부시켰는데.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아, 주께서 공부케 하시는구나!’ ‘나는 도와라고 하는구나!’ 다시 주님을 경유해서 말씀을 경유해서 애를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 내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의미로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다가가는 것. 이게 바로 성도지요. “내 자식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내면 교회만 돈 받아 좋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내 의미를 순간, 순간 사건이 일어나서 내 의미를 찢어버리고 니는 이미 죽은 자야. 내가 살려주니까 살았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떡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떡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의 양식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6장31절(의미 있는 영생)150319b-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4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6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