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6장31(의미있는 영생)150319a-이 근호 목사
가락-요한복음6장31(의미있는 영생)150319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6장31(의미있는 영생)1503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6장 31절 하겠습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표현에서 만나를 먹어버리니까 만나는 어디 속에 들어가 있어요? 사람 속에 들어가겠죠. 그러면 만나는 속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질 것이고, 나타난 것은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 그렇게 돼 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흐른다 하는 것이 깨어져 버리고 굳어지죠. 굳어짐으로 흐름에서 굳어짐으로 바뀌었습니다. 만나를 주는 것은 만나를 계속해서 주고, 주고, 주고 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서서히 유도하는 기능이 있는데 만나는 매일 오잖아요. 매일 오니까 이 전체가 하나의 흐름이죠. 어제와 오늘이 이어지고 오늘과 내일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인데, 인간은 흐름을 생각 못하고 자기 몸만 생각하잖아요.
‘오늘도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를 쏙 집어넣었습니다. 만나 없습니다. 또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사료는 개한테 사료줄 때 사료를 위함입니까? 개를 위함입니까? 개를 위함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만나를 사료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만나는 나를 하나님께서 먹이는 하나의 사료다.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만나가 그리스도에요. 인간들이 정말 주객이 바뀌었다 볼 수밖에 없어요. 나를 위해서 만나를 준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나를 먹었나이다.’ 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만나에 이끌렸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좋아요? 같은 상황이라도. 만나가 이끄는 대로 가겠습니다. 왜 가다보면 약속의 땅에 도착하니까.
만나의 의미를 위해서 만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그 증인으로서 미리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고요. 우리에게 만나를 줬기 때문에 그만큼 우리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은 만나가 더 중요한데 자기가 중요하다 하니까 이게 바뀌었으니까 예수님이 그들 곁에 와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뭐 해줄 거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기가 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데리고 자기 나라에 넣어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굳어지면 안 되고, 우리는 주님의 흐름에 따라가 줘야 돼요. 따라가게 되면 굳어짐이 해체가 되겠죠. 흐물흐물하게 되겠죠. 흐물흐물해도 괜찮아요. 왜냐 하면 그 흐름 안에 그리스도가 점점 굳어져 있으니까 내가 굳어져서 좋아서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만나 안에 그리스도가 굳어져 있는 거예요. 굳어진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그걸 증거 하라고 우리 자신의 인생은 요리사들이 도마에다 파든지 자를 때 아주 타다다닥 잘라버리죠. 완전히 해체시켜버리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매일같이 잘라버리는 겁니다. 자르게 되면 그 토막 난 사이사이에 뭐가 들어갑니까? ‘주님 없이는 못 삽니다.’라는 게 들어가겠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루치 밖에 주지 않는 거예요. 왜, 하루 살았으면 많이 사는 거예요. 그 다음은 우리 소관 아닙니다. 내일 눈 뜰지 안 뜰지는 내가 걱정할 바가 안 돼요. 왜냐 하면 우리는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사료니까. 자리를 바꿔야 돼요. 우리가 사료고, 우리가 사료가 되어서 우리를 먹으시고 주님 몸집이 커지면서 굳어지겠죠. 이걸 바꾸어 생각하니까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뭐냐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문제죠.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는데 우리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사고방식을 어떤 식으로 바꿔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바꾸느냐 그것은 주님께 맡겨진 일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제 요한복음 6장31절 이후를 계속 보시면서 같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보기 전에 창세기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 제 다섯 째 날이 뭐냐 하면 바다에는 고기 있고 공중에는 새가 있죠. 여섯 째 날에는 땅에는 짐승들이 있고 사람 만들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맞을 건데, “하늘에는 새가 날고 그리고 물에는 고기가 있고” 자, 거기서 제가 한번 물어볼게요. 새와 물고기와 사람들의 그 환경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죠. 같지 않은 상이한 환경을 갖고 있죠. 사람하고 새나 물고기하고 다르죠.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꾸느냐, 바꾸는 문제거든요. 날 위한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우리를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환경을 바꾸어서 인간은 환경에 의존해서 바꾸어지는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요한복음 6장에서의 모든 환경은 사람들이 곡해하기를 이걸 누굴 위한 환경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신이 우리 자신을 생존하기 위해서 주신 환경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사실 이거는 창세기 3장하고 틀리죠. 하나님께서 아담보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은 아담을 살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죽이는 조건으로 던져준 거예요. 그래서 어제 수요설교에서 그걸 저주의 조건이라 했잖아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저주 받는 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어진 조건이 바로 이 삶의 조건인 겁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환경은 우리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환경. 그런데 인간은 사단에 의해서 잘못된, 엉터리 같은 인간이 돼서 내가 기어이 독자적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고집하는 그런 정신. 그러니까 주어진 환경과 거기서 살려고 버티는 우리와 이게 안 맞죠. 안 맞으니까 자연적으로 우리 사는 게 힘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생로병사가 어떠니, 해탈이 어떠니, 이런 되도 않는 아이디어가 자꾸 나오는 것은 별로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뜻 이예요. 힘들다는 뜻입니다. 많이 가져도 문제고.
그래서 저는 오늘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이 환경이란 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걸로 바꾸겠습니다. 세트장이라고. 세트장! 어제 후딱 지나가면서 드라마를 이렇게 봤는데 배우가 아주 통곡을 하면서 옆에 세트로 돼 있는 커텐을 잡아당겨서 찢어놨어요. 드라마에. 너무 분통이 터져서, 뭣 때문에 분통이 났느냐 하면 잘 나가는 화가인 아들이 자기가 맘에 드는 색시 감하고 결혼하는 게 아니고 애 하나 있는 과부하고 결혼하니까 그게 속상해서 거기 있는 엄마가 속이 상해서 커텐을 뜯는 그 장면을 후딱 봤어요. 그러니 우리가 보통 집에서는 커텐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런데 그 세트에서는 그걸 뜯어내라고 세트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환경이 있다는 것은 환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걸 알려주는 그런 암시조로 현재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하나의 세트장처럼 돌아가서 내가 세트장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우리가 주변에 있는 것은 ‘너에게 문제 있는 거야.’라고 일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은 그런 세트장 같은 기능을 하라고 환경을 우리가 갖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는 따먹었죠. 그러니까 자기는 잘났죠. 눈을 떴죠. 그러니까 자기가 실제로 눈 떴으니까 설치게 되는데 신처럼 행세하려는 아담에게 그러한 환경들, 저주스런 환경을 준 것은 바로 그러한 자세가 그게 원래 네 모습이 아니고 문제가 크다. 이미 네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환경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환경, 같이 파괴되는 환경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걸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저주의 조건이라 한 거예요. 우리의 주어진 삶이라 하는 것은 저주의 조건입니다. 저주 받으라고 준 환경입니다. 거기서 어떻게 행복할까? 하는 것은 그건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되니까 그런 소리 나온 거예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 문제가 해결됩니까?’라는 그런 질문 같은 것도 해서는 안 될 질문 이예요. ‘그 입 다물라. 쉿’ 해야 될 질문 이예요.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답이 뭐냐를 찾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되고, 왜 이런 답이 나왔는지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이 돼야 돼요. 왜 내가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답인가를 이제부터 거기에 합치된 문제를 우리가 찾아내야 돼요. 그 문제 찾는 건 쉬워요. 내가 죄 지었기에 이만한 것도 과분하고 오감타. 그럼 그게 해답이 되는 거죠. 그게 질문이 되는 거예요. ‘주여 저한테는 이런 것도 과분합니다.’ ‘그래,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환경을 집어넣어준 거야.’ 그러면 질문하고 답이 딱 들어맞잖아요.
그저 교회 가서 베껴서 답만 냅다 외웠는데 그 답 외워서 천국에서 불합격자죠. ‘어떻게 해서 이런 답이 나왔지?’ 하면 ‘모르겠습니다.’ 이러면 되겠어요? ‘예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큰 소리 쳤는데 주님께서 “예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고? 그런데 메시야가 왜 피를 흘려야 되지?‘ ’그건 처음 들어봅니다. 그냥 피만 찍어 바르라 해서 찍어 바르고 왔는데 그 질문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어디서 있는 척 해?“ 하면 대번 추방시킬 거예요. ”네가 피를 모독한 자다.” 이렇게 될 겁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이미 흘렀으니 이게 복음이요, 답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생활, 네 자, 신앙생활과 같다는 거예요.
왜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가? 그 질문 찾아내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정답 모르겠다. 하잖아요. 정답은 이미 챙겼어요. 정답을 꽉 쥐고 하루하루 살면서 ‘이게 정답 맞구나.‘ 예수님의 피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희생 이예요. 예수님이 희생해야만 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문제성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 깊이 있게 더 넓게 우리가 알아가는 그때 우리는 주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한복음 6장 31절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먹었나이다.” 하는 자체가 문제성이 있다 했죠? 만나를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만나한테 먹혀야 되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서 만나를 준 게 아니고 만나를 위해서 거기 있었다는 사실, 만나의 가치를 위해서.
만나가 누구냐? 그 뒤에 나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인데 우리는 마치 만나를 사료로 보고 우리, 자기를 개로 봐서 개한테 사료 주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주시옵소서.’ 하지 마시고 질문을 바꾸세요. ‘왜 주셔야 됩니까?’라고 바꾸세요. ‘살려주세요.’라고 하지 마시고 ‘왜 꼭 내가 살아야 됩니까?’ 그렇게 하세요. 질문을 그렇게 바꿔야 돼요. ‘유학 간 애 때문에 살아야 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좀 살아야 애도 공부시키고‘ 이러면 안 돼요. 왜, 무엇을 본받기 위해서? 희생이니까. ’이미 다 가졌느냐?‘ ’예‘ ’그러면 나눠줘도 괜찮겠네.‘ 이렇게 나옵니다. 이미 죄 용서 받았으면 그 사랑 나눠줘도 괜찮아. 이렇게 하는 거예요.
32절에 보면 이제 슬슬 내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어렵게 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데요. 3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자, 여기에 뭐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목사님은 왜 어렵다 합니까? 라고 했을 때 저는 이렇게 합니다. 이게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 빈 공간이 있다고 치면 빈 공간은 아무 의미 없죠. 바다에 비가 온다. 뭐 무슨 의미 있겠어요? 황무지에 비 내린다. 뭐 의미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황무지에 내가 들어가서 집을 짓고 산다. 이러면 그 황무지가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의미라 하는 것은 나와 관련 있을 때만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게 돼 있습니다. 나한테 관련 있을 때만. 나한테 관련 없을 때는 아무 의미 없어요. 내가 너를 꽃이라고 이름을 붙여줬을 때 비로소 꽃은 나에게 들어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고 하나의 몸짓이 되는 겁니다. 이게 김춘수가 그런 시를 할 때 몸짓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몸짓이라 하는 것은 뭐냐, 상대역, 연극에서 상대, 나와 상대하는 거예요. 상대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나는 너에게 의미를 주는 동시에 너는 나에게 내 소유가 되는 겁니다.
요러한 것은 아담이 곧잘 했어요.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이름을 붙여주는 동시에 그 이름 붙여준 그것은 아담의 통솔 에 들어가는 갑니다. 다스리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항목으로 들어가게 돼 있어요.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이여, 하나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하나님이 이름을 안 가르쳐 준 거예요. 이름을 만약에 부르게 되면 그 모세의 하나님이 모세가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이 돼 버려요. 그렇게 되면 이거는 모세는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구원이란 자기의 자리를 부정해 버리고 자기도 모르는 자리로 이동하는 게 구원인데, 그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초청해 버리면 그 자리는 꿈쩍도 안 하잖아요. 그러면 구출이란 것이 성립이 안 돼 버려요.
교회 와서 뭐 달라, 달라 하는 것은 지금 ‘나 구원 안 받겠습니다.’와 똑같은 소리에요. ‘저를 이렇게 기도하게 하지 마시고 아예 딴 데로 보내주소서’ 이렇게 나와야죠. ‘주여 내가 있는 자리 말고 주님 있는 곳에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돼요. 그렇게 하려면 주님이 이 땅에서 겪었던 것을 같이 겪어야 되는데 그 말은 뭐냐, 그건 ‘밉상 받고 죽어도 좋습니다.‘ 하는 소리거든요. 우리가 주님과 할 때 우리가 죽어야 되듯이 주님을 부를 때 그냥 못 불러요. 주님도 또 죽어서 또 죽음을 거쳐서 또 와야 되니까 주님은 두 번 죽을 수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를 죽여서 주님과 합류하는 방법밖에 없죠. 어떻게 주님을 또 죽입니까? 십자가에서 단번에 끝났는데. 왜 또 죽이십니까? 어디 주님 부르는 걸 대리 운전사 부르듯이 막 불러대요. 술만 먹으면 무조건 불러.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날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 위한 내가 되려면 환경 자체가 주인이 바뀌어야 되고, 주인 바뀌면 의미가 바뀌는 겁니다. 여기서 빈 공간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있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큰 오산 이예요. 빈 공간에 이스라엘이 들어와 버리면 이 빈 공간은 이스라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 이렇게 돼 있거든요. 여기 32절에. 모세가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 이랬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빈 공간의 의미는 너희들의 눈에 보이는 모세와 너희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이 빈 공간에 만나라는 형식의 모세가 만나를 주는 게 아니고 모세는 만나가 온다고 이야기했지, 만나가 내리는 것은 모세 권한 밖의 문제입니다. 모세가 새벽 4시부터 나가서 모세가 한 자루 만나를 자고 있을 때 뿌린 게 아니에요. 모세는 만나의 권한 밖에 있는 겁니다. 모세는 자기도 만나 먹어야 살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보이는 것들은 환경에다 의미를 주고 이름을 붙이지만 만약에 그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분이 있어서 그분에 의해서 이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이 공간의 명칭은 누가 붙여야 돼요? 보이지 않는 그분이 붙여야 되겠죠. 그러면 그 공간의 의미가 붙여진다면 이 공간에 대해서 보이진 않지만 이미 이 공간을 지배하는 존재자가 누가 있다. 이 말이잖아요. 그 존재자가 여기 하나님이라 돼 있고 더 나아가면 예수님 자신을 가지고 만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나라는 것을 뭔 뜻이냐 하면 이 공간은 너희들이 활용하거나 너희들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 광야란 이름의 공간, 지금 광야에서 만나 이야기하잖아요. 이 광야라는 이 공간이 오늘날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의미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니까. 우리는 이미 어린양과 함께 죽은 자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있는 이 서울이라는 거, 어제는 비 약간 왔고, 그리고 오늘 날씨가 덥다는 이 모든 의미는 예수님에게 속한 문제지,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고 예수님이 하신 일에 의미가 있지, 내가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그러한 대 자연의 혜택은 아닙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내가 좋으라고 움직이고 운영하는 게 아니에요.
그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는데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우리는 흐름이 어떻게? 굳히면 된다 했죠. 그들이 만나를 먹은 순간 만나는 그들 뱃속에서 소화되어서 사라져 버리죠. 그럼 나타나는 건 뭡니까? 자기들 존재만 그대로 굳어져 있죠. 이러면 이 자리가 곧 고정된 자리가 되고 말아요. 왜냐 하면 광야라 하는 것은 지금 빨리 흘러가야 되는데 사람들은 자꾸 고정된 거, 자기 자신에게 집착과 미련을 계속 갖고 있는 거예요. 그 흐름에 따라줘야 되는데 흐름에 따르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또 뭐 주시렵니까? 아이쿠, 만나만 줘요? 아이, 지겹다. 이제 고기 좀 주세요.’ 맨날 자기 굳힘에다 몰두하고 집착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것은 만나는 며칠 치입니까? 보통 하루치잖아요. 그러면 이 굳힘이 하루를 통해서 이걸 완전히 잘라져야 된다. 하루, 하루치를. 오늘 염려는 오늘로 끝나버려요. 그냥 하루치만 생명을 부여받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치는 우리 살라고 하루치가 아니고, 만나가 하루,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에 만나에 맞춰서 우리는 하루만 살아야 돼요. 만나가 일회용이니까.
병원에 가니까 약을 주는데 일주일 분을 줬다.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일주일 살고 죽으세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니겠지만 하나님께서 만약 약을 주시면 그렇게 주시는 거예요. 일주일 줬다는 것은 일주일 살고 그 다음부터는 죽으라, 이 말 이예요. 만나를 하루치 줬다는 것은 너의 굳어짐을 내가 아주 하루를 단위로 해서 잘라버리겠다 이 말이죠. 그러면 잘라버리면, 그러면 하루 밖에 못 살면 하루살이냐? 그 하루살이가 일주일 살이로 바뀌어요. 그게 만나가 그 다음 한 주간 되게 되면 보너스를 주게 돼 있거든요. 사흘 치를 줘요. 토, 일, 월까지. 사흘 치를 주면서 이게 뭐가 바뀌느냐 하면 요 광야에 합당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날 위한 환경이 아니고, 다른 보이지 않는 분, 동행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일방적으로 그분을 위한 환경 속에 자기는 놓여있다면 이제는 그 의미가 날 위한 상황이 아닌 것을 변화가 일어나게 되겠죠.
지금까지 강의한 걸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만나줬는데 사람들은 그걸 자기가 주인공으로 여겨서 나를 먹여 살리려고 내가 개고 주님께서 사료 주듯이 개 먹여 살리려고 사료 주듯이 만나를 줬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만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주의 뜻이었다.
문제는 이게 바뀌어져야 되는데 어떻게 바뀌느냐? 그거는 환경을 가지고 바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환경을 바꾸느냐 하면 빈 공간은 그게 자기가 존재를 느끼면 그 들어선 존재 때문에 환경은 들어선 존재가 일방적으로 나한테 유효하다고 일방적으로 의미를 갖다 붙이니까 그 의미를 주님의 의미로 바꿔치기 하는 방법으로 이 공간의 주인공은 네가 아니고 너는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걸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서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해서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이 나오죠. 이 생명이란 말을 아까 김 중우 집사님이 잘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내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생명을 어디 있느냐? 생명은 죽음 안에만 들어있어요. 따라서 죽음이란 이 호수, 이 저수지, 여기에 뛰어 들어가야 되는데 안 들어가고 주변에 돌아다니면 거기에 생명이 없어요.
인간은 이 죽음에 뛰어들어서 생명을 건져야 되는데 죽음에 뛰어들 생각을 안 갖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죽음에 뛰어들면 죽음 속에서 건질 생명의 주인공이 사라져요. 왜, 뛰어든 순간 누가 사라지기 때문에? 뭔가 사람이 생명을 원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 생명이 내 소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생명이 중합니까?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중하죠. 나한테 도움 되는 생명이거든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처음에 아담에게 허락을 안 했어요. 생명나무 그 가는 길을 막아서 네가 먹지 말라 했다 말이죠. 먹지 말라 하면 안 먹으면 돼요. 그런데 인간은 지독하게 말을 안 들어요. 먹지 말라 한 그것에 기어이 그걸 고대하고 있어요. ‘아휴, 언제 생명나무 따먹노. 주여 주시옵소서. 생명나무’ 젊을 때는 90만 살면 많이 살았다 했는데 막상 90 되고 나니까 더 살고 싶은 거예요. ‘아이고, 내가 죽는다 생각하니까 기가 차요. 천년, 만년 살고 싶어.’
그러니까 인간에게 누락돼 있고 결핍된 게 뭐가 있느냐 하면 생명의 자리가 누락돼 있으니까 살아도 이게 산 게 아니에요. 그 누락이 너무 컸어요. 누락된 요소가 너무 강렬해서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이건 죽기 전부터 이미 팍 기죽어 있어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어있어요. 그게 괴로우니까 인간은 범죄하고 발악하고 그걸 프로이드는 죽음의 충동이라고 하는데, 살고 싶어서 죽음의 충동이 살고 싶어 하는 걸 죽음의 충동이라 해요. 누가 죽으라 하지도 않았는데 혹시나 더 살까 싶어서 돈을 훔치고, 왜, 돈이 있어야 사니까. 또 뭐도 하고 하죠.
심지어 드라마 같은데 보면 ‘내 새끼 건드리면 다 죽인다.’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건 폭풍의 여자, ‘내 새끼 건드리면 다 죽인다.’ 하거든요. 왜 그러한 악담을 합니까? 그만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성도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으면 죽지.’ 에스더는 그랬잖아요.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죽지. 그럼 그 소리 듣고 다른 사람은 뭐라 합니까? ‘죽으면 너만 손해야.’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왜 그렇게 너만 손해라고 생각을 하지?’ 그건 너라는 걸 제일 중요시하니까 너는 안 죽고 싶으니까 네가 죽는다는 말은 마치 자기한테 손해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왜 자꾸 너밖에 생각할 줄 모르냐. 진짜 머리 돌아가는 게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이러면 나한테 손해일까. 이러면 나한테 이익일까. 이익이면 행복하고 손해나면 내 인생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또 자책하고.
인간이 기대하는 생명이라는 것은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계속 오래 사는 것을 생명이라 하거든요. 그 생명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은 고칠 생각 안 하고 ‘그냥 그런 건 하나님 묻지도 마시고 그저 오래, 오래 살게 해주세요.’ 오래 살게 해달라고 신방 간다면 그건 욕이죠. 질을 바꿔야 되는데 질 바꿀 이야기를 안 하고 그냥 오래 살게 해달라고 하면 그건 노인 욕보이는 겁니다. 이 말 이예요. 지금 몇 년 복역했습니까? 80년 복역했습니다. 100년 복역하세요. 이 말과 똑같은 소리에요. 이게 뭐에요? 욕 돌리는 거지. ‘어이 군바리, 몇 개월 됐나?’ ‘예, 18개월 됐습니다.’ ‘말뚝 박아라.’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하는 게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선악과로 이미 질을 버려놨거든요. 본래 인간이 아니에요. 생명나무는 단독으로서 사는 생명은 없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 그게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했잖아요. 주님께서 분명히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덜렁 따먹은 인간이 ‘같이 살아줘요.’ 이렇게 나오면 같이 살 수가 없죠. 왜, 주님의 말씀은 ‘따먹지 말라‘인데 ’따먹으면 어때‘ 이런 행패 부리는 거와 같이 살 수가 있겠어요?
아내가 남편 보고 ‘술 처먹으려면 집에 들어오지 마. 나 술 먹으면 안살아.’ 이러는데 ‘같이 살아.’ 해서 벌겋게 술 취해 들어오면 같이 살겠어요? 못 살지. 조건이 뭡니까? 술 먹지 않은 상태에서 살겠다는데, 술 벌개서 한 사발 먹고 난 뒤에 ‘같이 살자.’ 이거는 여자들이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허용 안 해요. ‘술 깨거든 오너라.’ 이렇게 되겠죠. “너 선악과 따먹은 거 빼고 오너라.“ 뺄 수가 있습니까? 마귀가 집어넣었는데. 선악과 아는 그것에 눈 떴잖아요. 눈 뜬 상태를 마귀는 그게 ‘아이구, 잘 빠졌네.’ 고게 정상이라고 이미 다 온 세계를 그런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다 그렇게 유행시켜버렸어요. 오히려 그게 아닌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하죠. 눈 뜨고 이성적으로 똑똑한 그걸 정상적 인간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접수 안 합니다. 서류 접수부터 안 돼요. 바꿔서 오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아까 이야기한 성령님하고 세세토록 같이 사시면 되겠네요. 뭐 인간들은 다 타락하고 범죄 했으니까 다 지옥 보내고 하나님 자기들끼리만 살면 되겠네. 그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목적이 있어요. 성경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쓴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위하여 성경이 있는 게 아니고 주되심이에요.
예수님이 주되심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필히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주개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죄를 대신 씻어주는 역할이 포함돼 있어요. 그게 어디 있느냐,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피 흘림이 있어줘야 주님이 주가 돼요. 피 흘림이 없으면 그냥 하나님 되지, 주가 안 돼요. 어렵죠? 하나님이지만 주는 아니라니까.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 맞아요. 하지만 주는 아니에요. 주가 되려면 반드시 뭔가 경유를 해야 돼요. 이 땅에 와서 경유를 해야 되고, 그거 경유하는 환경을 위해서 ‘죽으리라’ 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계속 새끼, 자식을 낳게 한 겁니다. 인간을 계속 낳게 했죠. 그게 저주의 조건 이예요.
그래서 이걸 이렇게 정리해 봅시다. 빈 공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주셔서 아담이 빈 공간을 보면서 자기 세상이라 여기겠죠.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뭘 끌어당기느냐, 역사를 끌어당깁니다.
역사를 끌어당겨서 이 빈 공간을 아담의 역사로 전부 다 전환시켜 버립니다. 이 공간을 성경에서는 동그랗게 보지 않고 네모로 봐요. 네모로 보고 여기서 뭐냐 하면 동, 서, 남, 북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규격을 정했습니다. 에덴동산도 이렇게 동쪽 남쪽이 있어요. 동, 서, 남, 북으로 해놓고 스가랴에 보면 이 동쪽, 서쪽, 남쪽, 북쪽까지 누굴 보내느냐 하면 천사를 보냅니다. 뭘 가지고 보내느냐, 납을 가지고 보내요. 납이라 하는 것은 놋, 납, 같은 물질인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구석까지 빈틈없이 깨끗하게 심판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저주의 조건 이예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을 주님께서 계속 유지시켜 나가는 겁니다. 왜, 생명은 어디서 있느냐? 하늘에서 주는 게 아니고 바로 생명은 죽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 안에 있어요. 생명은 죽음 안에 있어요. 그래서 죽으면 생명을 얻겠네요. 소리를 하지 마세요. 죽는 순간 이제는 생명을 얻을 주인공 자체가 죽음 속에 같이 다 물에 물 탄 듯이 다 날라 가 버려요. 그래서 생명의 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는 따로 계세요. 그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생명을 포기하고 포기된 생명을 하나님 손으로 건져냄으로써 자기가 다시 회수를 하면서 뭘 거기다 얹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아들 예수님, 독생자를 주로 만드는 작업을 거기다 얻어내는 효과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회수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요, 하는 말을 아마 백성 같으면 다 오해할 거예요. 생명의 주가 뭐냐 하면 ‘내가 생명을 얻고 싶은데 주님 갖고 있지? 주세요.’ 이런 식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너를 지워버리는 것’ 없애면서 너의 자리를 뭐로 하느냐 하면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으로 바꿔놓고, 바꿔놓고 예수님에게만 생명을 부여하는 겁니다. 참 잘했다. 내 모든 말씀대로 잘 지켰으니까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거기에다가 모든 생명은 거기서 나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죽음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걸 잡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죽음은 베드로의 죽음이 아니고 누구냐, 예수님의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서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걸고 따라 가겠다 할 때 ‘오지 말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베드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이렇게 섞일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섞일 수 없다는 말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목숨 바쳐서 한다 해도 안 돼요. 죽도록 충성해봐야 생명 못 얻습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지, 내가 목숨 바친다고 그걸 대가로 생명 주시지는 않아요. 그렇게 되면 행함이 돼 버려요. 이걸 여러분들이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죠” 언젠가 지난번에 설명했는지 모르겠는데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 말을 행함이 믿음을 대체한다고 이해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대체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원하지, 행함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믿음답게 하는 행함은 우리가 믿음과 연결된 행함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행함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믿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집어넣었다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위에서 생명을 주셨잖아요. 오늘 하늘에서 주신다 했잖아요. ‘주신 행함이 이겁니다.‘ 내놓는 거, 그걸 내놓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행함, 그러니까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이 죽는 행함을 아브라함이 미리 땅겨서 자기 아들을 잡음으로써 미리 땅겨서 보여준 거예요. 그게 바로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행함 있는 믿음의 대표적 사례가 그거에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친 것.
또 그리고 사라가 임신을 못했는데 임신 한 것, 이게 행함 없는 믿음입니다. 임신도 행함 이예요. 누가 이렇게 일을 벌려 놨습니까? 하나님이 일을 벌렸잖아요. ‘하나님이 일을 벌렸습니다.‘라고 자랑할 때 그 행함을 가져오란 말이죠. ’값없이 주는 은혜가 이겁니다.’라고 내놓으란 말이죠.
그러면 그 행함이라 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몸 전체를 늘 주님 앞에 내놓고 맡기는 그것이 바로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따로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매사를 드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행함 없는 믿음하고 이거하고 비교해 보세요. 믿음 없는 믿음, 믿음 없는 믿음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불신자들 이예요.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믿음도 없으면서 믿음도 없는데 믿고는 싶고 이런 거예요. 안 믿어지는데 믿고는 싶은 거예요. 솔직하지를 못해요.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되는데, 안 믿으면서 믿는 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한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 이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반대로 믿음이 있는 믿음이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다 빼야 돼요. 예를 들어서 우연히 멋도 모르고 농약을 마셨는데 멀쩡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은혜죠. 그 다음에 ‘또 마셔볼까?’ 요 순간 고거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이 해줬으면 믿음으로 됐잖아요. 그런데 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해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확인하려고 또 한 번 시도하다 속 다 타 죽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베드로가 바다만 보고 호수만 보면 막 뛰어갔습니까? 혹시나 또 그럴 수 있는가 싶어서 막 했습니까? 두 번 다시 안 했죠. 베드로가 배 오른편에 던져서 고기가 많이 잡혔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 무조건 배 오른편에 던지면 고기 잡힙니까? 예수님 계실 때 물고기 벌리니까 성전 세 나왔죠. 그러면 제자들이 물고기 걸리기만 하면 전부 다 아가리 벌려서 혹시 있는가. 다 열어봅니까? 그게 바로 믿음 없는 행동 이예요.
대표적인 믿음 없는 행동이 방언이나 하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그걸 하려고 연습을 하겠어요? 그래. 그게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거든요. 그 말은 지금 주어진 환경이 우리가 죽음에 못 들어가요. 왜, 살고 싶은데 미쳤다고 죽어요? 안 죽고 싶은데 주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조건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생활이고, 요 모양 요 꼴의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 밀어 넣는 그 행동은 내 죽음으로 죽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에 참여해서, 그 주님의 죽음 안에 들어있는 생명을 우리가 참여되기 위해서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모든 것이 아니요, 가 아니고 다~ 잘 되라고 한 거예요. 모든 일이 아니요, 가 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오케이고, 전부 다 오케이 싸인 난 거예요. 카메라 감독 다 찍고 난 뒤에 ‘어떻습니까?’ ‘오케이’ 딱 나오잖아요.
이거는 여담입니다마는 폴 싸이먼과 가펑클이 불렀던 박스라는 노래 녹음할 때 그 녹음 제일 끝에 자세히 들어보면 ‘오케이’하는 게 나와요. 녹음 잘 됐다. 이 말이거든요. 이거는 여담입니다. 옛날 20대 때 다방에 앉아서 들었던 거예요. 지금도 보면 그게 나와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어합니까? 그것은 빈 공간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나의 역사를 거기다가 가꾸었고 거기 주변에 나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인 그 중에 대상자 하나가 예수님이 걸려든 거예요. ‘예수님, 저한테 뭘 해줬다고 큰소리칩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광야라 하는 곳은 바로 그런 인간들을 하루치로, 일회용으로 전부 다 조각, 조각내서 하루와 단절, 단절, 단절, 단절, 단절, 단절로 이어져 가는 겁니다. 돔배기를 너무 잘라서 단절할 때는 제발 너라는 인생으로 새로 역사를 이렇게 뭉텅이로 만들지 말라 말이죠. 이걸 가지고 야고보서 4장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는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나니 다만 우리는 안개에 불과하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항상 내일 것이 걱정이잖아요. 오늘 걱정 아니고 내일 걱정 이예요. 내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날에 족했다는 말을 한 걸 봐서 내일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지 말라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근심 안 하면 되는 겁니까? 뭐 해야 돼요?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돼요. 그 나라 의는 확정적입니다. 우리는 유동적이고 우리는 변화무쌍하고, 따라서 이 공간을 변화무쌍으로 하려면 네 중심으로 해라. 하지만 이 공간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그 나라 의로 이 공간이 꽉 채워져 있다는 것을 믿어라. 너는 그 속에서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는 그런 어항 속의 괜찮은 물고기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쉬겠습니다. 이 광야라는 공간은 뭐로 채웁니까? 이스라엘로 채워지는 게 아니고 만나로 채워지고, 나중에 만나가 광야가, 광야의 소임을 다할 때 뭐도 같이 날라 가죠? 더 이상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32절에 보면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그러면 제가 분명히 했어요. 모세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와 동행하는 누가 또 있단 말입니까? 그 모세가 함께 있을 때도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잖아요. 같은 기둥입니다마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했는데, 모세는 어디로 갈 지를 몰라요. 도대체 어느 길로 가야 될지. 모세가 자진해서 ‘40년 고생하겠습니다.‘ 이렇게 안 나왔거든요. 그냥 땡땡이 돈 것은 모세 뜻이 아니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렇게 유도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또 만나가 계속 왔고.
그러면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모세도 아무것도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도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떤 그냥 정체 모를 누구야? 이름을 밝혀? 이런 정체 모를 분이 지금 그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완전히 그 안에 가둬놓은 셈이 되죠. 바로 그런 환경에서 비로소 만나라는 것은 단순히 떡이 아니고, 생명 그 자체, 생명 그 자체에요.
우리가 애굽에서 어떻게 살 것 같으면 하루 가계부 쓸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치 않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하나님이 만들어진 광야에서는 우리가 어떤 계산기 두드리고 어떻게 가계부 쓴다고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살 수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그냥 막 사세요. 어차피 어떤 수단을 써도 우리를 살려내는 세상은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기도 안 한다고 해서 곧장 캭하고 죽는 세상도 아니에요. 어차피 다른 분의 어떤 기로 꽉 차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만 의식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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