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독 제사 150304
사독 제사 150304
이름 : 이근호(IP:119.18.83.69)
사독 제사(에스겔 44:15-19)
이근호
15-04-01 21:10
사독 제사
2015년 4월 1일 본문 말씀: 에스겔 44:15-19
(44: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44:16)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44:17)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이니
(44:18) 가는 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 베 바지를 입고 땀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44:19) 그들이 바깥 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지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케 할까 함이니라
사람들은 세상의 끝을 저 우주 끝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동질의 세계가 아무리 확장되어봤자 여전히 같은 세계의 일부일 뿐입니다. 세상의 끝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오늘 본문에 세상의 끝이 나옵니다. 그곳은 바로 사독 제사장에 의해서 영원히 드려지는 성전이 바로 그곳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과 닮아있지 않는 현실이라면 기피하고 비-현실인 것처럼 처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성전을 비켜간다든지 빼놓고서 달리 현실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 현실은 곧 자기네가 행복해지는 이상(理想)적인 현실을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현실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폭파해버리십니다.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의 차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입된 의미가 있느냐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의미에 의해서 등장된 현실이 아니라면 저주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밤, 애굽에 있는 모든 가정의 맏아들들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행사하시는 천사보고 맡긴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아들을 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어린양의 죽음의 의미’는 살리도록 하라는 겁니다. 하늘의 의미만 살려낸다면 사람은 아무리 죽여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세상 보시는 관심사는 인간들의 관심사와 다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몸 간수에 주력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주변에 이미 세상 끝의 증거가 와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성전은 세상의 한계, 세상의 끝을 말해줍니다. 성전에 안에서 제사장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과제와 업무들은 ‘기름과 피’를 하나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만 받겠다는 겁니다. 이 사실은 곧 인간들이 자기네들 끼리 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 관심두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성립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들은 현실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된 현실은 기름과 피를 생산하므로서 하나님께 의미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을 두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독 제사장직에다 하나님께서 의미를 실었습니다. 역대상 12:27-28에 보면, “아론의 집 족장 여호야다와 그와 함께한 자가 삼천칠백 명이요 또 젊은 용사 사독과 그 족속의 장관이 이십이 명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독 제사장의 등장은, 이스라엘 나라에 왕의 등장과 쇠락과 관련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은 사울이요 다음이 다윗이요 그 다음이 솔로몬입니다. 이런 왕의 교체 와중에서 제사장직은 점차 사독 계열과 굳어집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사독 계열의 제사장이 아닐까요? 사무엘 선지자가 등장하면서 엘리제사장 계열의 파멸이 예고됩니다. 사무엘상 2:31-33에 보면,
“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너의 사람이 네 눈을 쇠잔케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원래 레위지파에 속한 아론의 자손들로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제사장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해서 가문 통째로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취지를 제대로 알아먹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독과 더불어 다윗의 시대에 동고동락했던 제사장은 아비아달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엘리 가문 계열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제사장은 다윗의 차기 왕으로 솔로몬이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아도니야라는 다윗은 다른 아들을 차기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서 이 아비아달 제사장을 면직시켜 버립니다.
열왕기상 2:26-27에 보면,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로되 네가 내 부친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장소가 바로 실로입니다. 창세기 49:10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로는 지명이름이지만 이 예언에 의하면 이 장소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취급됩니다.
이는 유다 지파에 속한 어떤 분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이 등극의 와중에서 우선 필히 망해야 될 자들이 먼저 역사 속에 등장해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을 사용하시는 것은, ‘잃어버림’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아니하면 진정 ‘얻었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독 제사장이 아비아달보다 위해가 아니라, 실패의 바탕 위에 들어선 제사장이기에 사독 계열의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왕의 변천에 보조 맞추어서 제 자리를 갖추게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자를 잃는다 할지라도 유다지파의 왕이 들어서는 것이 예정된 뜻임을 간파하는 제사장만이 그를 통해서 영원한 왕의 의미를 드러납니다.
‘실패했지만 성공한다’가 아니라 ‘실패를 버리지 않고 계속 간직하는데 성공한 것이 성공이다.’입니다. 사독이 아비아달 제사장과는 달리 솔로몬 왕을 다윗의 차기 왕으로 인정한 것은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죄인이요 실패자로 드러났다는 바로 그 사실이 곧 영원한 약속의 실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를 버려야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서 의가 나오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성도가 곧 사독 제사장 역할을 합니다. 기름이란 초월적 인물이 피라는 죽음을 보여주므로서 이 인간들의 현실은 죽음과 저주가 떠돌아다니고 있는 붕괴될 현실, 가짜 현실음을 증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십자가 작용으로 우리가 주님의 아픈 희생의 은혜를 입고 있음을 과분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4-02 21:39
132강-에스겔 44장 15-19절(사독제사)1504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4장 15절-19절입니다. 구약성경 122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4:15-19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 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 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케 할까 함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린다는 것인데 우리가 보통 세상에서 끝을 보고 싶어 하잖아요.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를, 저 세상 끝에 딴 세상 있는지, 우주 끝에 가면 거기 또 무슨 세계가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데 이 세상 끝은 멀리 갈 필요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만들고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활동을 통해서 세상의 끝, 세상의 한계를 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전 안, 그 테두리 안에서의 현실이 사실은 진짜 현실이지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니 ‘그게 왜 필요할까? 공장 더 짓고, 농장 더 개간하고, 간척사업하고, 기술개발하고, 수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 가족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들이 인간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꿈꾸는 진짜 세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인간들이 꿈꾸는 세상, 인간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말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 세상 속에는 뭐가 빠져 있는가? 세상의 끝을 빼버리고 지금 상상하는 그것을 확장시켜서, 지금 내가 좋다는 것을 칼 국수할 때 밀가루반죽을 홍두깨로 밀듯이 죽죽 늘여서 그것이 이상적인 세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를 왜 드리는가?’ 특히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했는데 제물을 잡아서 기름과 피를 드려야 할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대가 없이는 못나간다는 뜻이거든요. 대가없이 하나님 앞에 못 나선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돈을 원할까? 금을 원할까? 은을 원할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기름과 피를 원하는 거지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겁니까? 돈, 금, 보석이라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참 좋은 거예요. 보기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것 가지면 뭐든지 다 구입할 수가 있으니까요. 내게 필요한 것, 내게 원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드려야 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이 원하는 현실과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 너무나 차이나기에 그렇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함께 있고 세상의 끝이 나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그 이스라엘 속에 새겨 넣겠다는 것, 그것이 성전이고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이 제사장이라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리 장래를 예견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기름과 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름과 피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 보면 너무나 처절한 거예요. 꼴 보기 싫은 거예요. 아름다운 꽃을, 장미를 드리면 되잖아요. 백합을 드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기름, 특히 피를 바친다는 이것은 너무 흉측하고 참혹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흉측하고 참혹한 요소, 바로 거기에 하나님 계시고 그곳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참혹하고 흉측한 것은 의도적으로 다 피했고 다 빼버렸어요. 십자가 꽂혀 있는 교회에 일요일에 출석부에 도장 찍듯이 얼굴 내비치고 난 뒤에는 후다닥 내뺐습니다. 아름다운 곳으로, 벚꽃 만개한 진해로. 우리는 그 피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하기 싫어해요. 기름, 피, 둘 다 제물을 쪼개야 나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대가없이 가지 못하는 천국에 왜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를 기름과 피, 피와 기름으로 요구를 하시는가?’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리고 더불어 ‘왜 우리는 이런 현실을 기피하는가? 왜 싫어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를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갔다. 그렇게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나라가 둘로 분리될 때에 하늘에서 투입된 분이 계셨어요. 애굽의 모든 맏이를 처단하는 직책을 가지고 이 땅에 온 천사입니다. 심판의 천사. 그 심판의 천사가 각 가정에 들어가서 애가 학급에서 몇 등을 하는지, 그런 것은 묻지도 않아요. 아이큐가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성품이 좋은지,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지,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허우대가 좋고, 신장이 얼마고, 평소에 착한 일을 많이 했는지를 일체 묻지 않아요. 다 죽여 버립니다. 다 죽여 버려요.
얼마나 참혹합니까? 그게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그게 이스라엘한테는 확실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현실이라는 것 자체가 가짜인 이유는, 인간이 현실이라고 우기는 이 모든 현실이 가짜인 이유는 바로 그런 처참한 요소를 빼고서 진짜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죽음의 천사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은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여도 괜찮다는 겁니다. 다 죽여도 괜찮다는 거예요. 특명입니다. “누가 죽어도 상관없다. 내가 건질 것만 건지겠다.” 뭡니까? 어린양의 죽음의 의미만 건진다면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의 운명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개입된 의미가 결정하는 것이지 내가 산다는 이 현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제가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어쩌라고!” “하나님, 내가 몸이 아픕니다.” “어쩌라고? 그게 뭐 어쨌다고?” 그 의미는 나에게서 나온 의미잖아요.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악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의미가 삽입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의미, 인간의 의미가 삽입되면 그것이 어떤 행동이든 다 악이 되는 겁니다. 도적질, 탐욕, 이런 것 전부 다 공통점이 있어요. “왜 도둑질을 합니까?” “내게 의미 있기 때문에.”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나한테 유리할까 싶어.” 전부 다 악이 되는 거예요.
나한테 필요하다. 그것을 철학에서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벤담의 공리주의. 진리가 무엇이냐? 유용한 것이 진리라고 하거든요. 공리주의에서 나중에 도구주의, 존듀이의 교육철학이 다 나오는데 그게 뭐냐? 진리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게 과학이에요. 과학이 곧 진리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유용한가,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그러면 진리고 나한테 손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겁니다. 이익 되는 것만 규합해서 나의 행복을 북돋는데 필요한 현실이라고 본 겁니다. 그 현실 속에는 기름도 없고 피도 없어요. 그 처참한 제사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투입된 죽음의, 심판의 천사도 거기에는 흔적조차 없어요. 새삼스럽게 손대지 않더라도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은, “모든 인간은 다 죽여도 좋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의미만 건진다면 그것은 성공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주목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고려시대, 조선시대, 우리는 이런 한국사를 주목하지 말고 중국사, 어느 역사를 주목하지 말고 이스라엘 역사를 주목해야 되지요.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아이스크림 광고에서 나온다는데 다 좋아요. 세종대왕이 어쩌고 왕자들이 몇 명이고 훈민정음을 만들고, 다 좋은데 그런 것은 실용주의, 하나님의 피와 기름을 배제한 채 나름대로 우리끼리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식이에요.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에 이 에스겔 44장의 말씀을 그대로 완성시켜서 예수님이 간직하고 있다가 성령을 통해서 구원될 사람에게 이 소식을 증거 해버리면 성령의 보증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 살아남은 온 이스라엘, 참다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 속에서는 피와 기름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냥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가장 구체적인 것,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의 가장 정확한, 제대로 가르치는 그 증거는 너무 구체적이라서 처절해요. 적극적이고 극렬하게 가르치는 것이 뭐냐? 기름과 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것이 가장, 아니 그것 외에는 없어요. 그것만이 주의 뜻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그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받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저주를 저주로 확대시키는 근거지가 되는 거예요. 저주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지? 십자가에서 나와요.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서 나오지?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예요. 구원도, 저주와 축복도 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겁니다. 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세상의 끝이고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현실 속에 그 현실이 박혀 있습니다. 오늘날은 어디 있느냐? 성도들, 하나님이 구원시킨 성도들 속에, 그들의 삶속에 박혀 있어요.
오늘 우리교회 어떤 분이 참 좋은 질문을 했어요. “공동체 운동을 하는데 가담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정말 누가 해줬으면 싶은 참 좋은 질문을 했어요. 제가 답변하기를 “우리 일상은 주님의 희생 위에서 살아가는 일상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신음소리 위에서 살아가고 있고 아픔 속에서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뭘 원하느냐? 신기한 것, 획기적인 것, 멋있는 것, 이런 것을 자꾸 기대하니 이것은 악의 유혹이고 사탄의 유혹이 되는 겁니다. 그걸 찾다보면 정작 주님의 신음소리는 없는 곳, 내가 뭔가 멋있어 보이고 내가 기대하는,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신앙공동체를 찾게 돼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이 되는 겁니다.
특히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하나의 권력체가 되고 결국 거기서 돈 많이 투자한 사람이 대장질을 하고 다른 사람은 그 노예가 되지요. 한 건수 해보겠다고 덤볐는데 투자금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투자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천대받게 되면 씩씩거리면서 그 공동체를 떠나게 되면서 그 집단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게 돼요. 기껏 자기도 거기 가담해놓고서. 대장질 하는 자리까지 올라가려 하다가 탈락하니까 탈락당한 분을 삭이지 못해서 그 단체가 이단이니 삼단이니, 그 단체의 교주가 어쩌고저쩌고 복수심에 비난을 할 뿐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것 하지 말고 차라리 지금 나는 누구의 신음, 주님의 아픔을 공짜로 받으면서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비판하는 것, 이거 문제 있어요. 한국교회 비판이 복음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가 복음이지 한국교회 비판이 복음이 아니에요. 비판하겠다는 것은 저 사람 데려다가 내 사람 만들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나도 마찬가지로 공동체 되잖아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으로 남겨진 것은 아주 처절한 거예요. 참혹한 거예요. 채찍 맞은 것이고 피 흘린 거예요. 그것뿐입니다. 없습니다.
이것은 제 뜻이 아니고 창세기 4장부터 나오는 겁니다. 가인이 제사드릴 때, 가인이 하나님의 뜻을 궁금해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제사를 드리든지 말든지 하지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제사를 드리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그 뜻대로 네가 해 봐라.” 그 해본 것이 뭐냐? 아벨을 죽이잖아요. 그게 뜻이에요. 장차 오실 예수님이 아벨처럼 죽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성전에다 기름과 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것을 꾸준히 진행형으로 하시는 이유는 떠도는 죽음, 유령같이 떠도는 죽음,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그 저주를 대표 격으로 성전 안에서 표면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네가 보기에는 이렇게 봄이 되어 꽃이 만개하니 놀러가는 것이 좋고 세상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 하지만 그 아름답다는 세상의 밑바닥을 보아라.” 그 말이지요. 그 아름다움은 쇠해야 될 아름다움이고 인간을 미혹하는 아름다움에 불과한 거예요. 정말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정말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예수님의 죽으심, 고통,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떠도는 죽음 안에 우리의 죽음도 같이 떠돌고 있어요. 떠도는 저주 안에 우리도 같이 떠돌고 있습니다. 택한 백성의 그 저주와 죽음을 한 단으로 묶어서 그것을 처리해 주는 겁니다. 성전에서. 신약에서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처리가 되었다고 우리에게 통보해주지요.
이 작업에 누가 나서는가? 오늘 본문 15절에,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 여기에 사독이 나옵니다. 사독. 별로 이름의 뉘앙스가 안 좋아 보이는데요. 원래 아론의 셋째 아들이 엘르아살인데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 드리다가 죽고 난 뒤에는 엘르아살이 아론의 차기 후계자로서 맏아들이 돼버려요.(민 3:4) 그 엘르아살 계통의 사람이 사독제사장입니다. 이 사독제사장은 처음부터 본문의 위상을 가진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다른 제사장이 이미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사독도 물론 아론의 자손으로서 레위지파지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리제사장이 있었어요. 사무엘상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시간적으로 보면 사무엘상의 이야기는 사사기와 함께 있다고 보면 돼요. 사무엘이 등장한 그 사사시대, 왕이 없던 시절에 이스라엘을 관장했던 엘리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에게 예언한 것이 있어요. 너의 집이 저주받는다는 예언을 합니다.(삼상 2:27-34)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는다는 예언, 그리고 35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라고 해서 그의 집은 견고하지만 너의 집은 완전히 저주받고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사독제사장은 영원한데요. 사독제사장이 영원한 것은 그냥 영원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잘난 그 자격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고 밑에 먼저 누가 망했던 대체역할로서 사독제사장이 영원해지는 겁니다. 제사장이 영원해요. 그런데 영원하다고 여겼던 그것이 도중에 영원하지도 않고 멸망을 당하고 ‘결국 제사장은 멸망해야 돼.’라는 것을 재료로, 기초로 해서 영원한 제사장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말하는 취지가 이렇습니다. “내가 똑똑한 제사장이고 너는 못난 제사장이니까 못난 제사장은 멸망하고 못난 제사장 대신해서 똑똑한 내가 제사장으로 영원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다 못났는데 어떤 다른 계기에 의해서, 어떤 사건에 의해서 졸지에 내가 간택, 못난 것 대신 영원한 제사장으로 간택이 되고 말았어요.
요한복음 4장이 이해가 쉽겠네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다섯 명 사귀고 다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여인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그 여인은 남자 다섯 명 사귀고 여섯 번째 남자를 사귀고 있는 그 자아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는 그 자아는 달라요. 하나의 실패가 있었기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거기에 누가 관여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관여한 거예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겁니다. 엘리제사장 시대에서 사독제사장의 영원함으로 바뀌는데 누가 관여했는가? 다윗이 관여한 거예요. 그 절차가 사무엘하부터 열왕기상까지 이어지는 겁니다. 사무엘하부터 열왕기상까지 왕이 겹치게 나오거든요. 사울 왕 다음에 다윗 왕, 그 다음에 솔로몬 왕입니다.
그렇게 겹치는 가운데 어떤 변동을 봐야 되는데 무슨 변동인가? 제사장 직이 어떻게 엘리 가문에서 사독가문으로 확정적인 영원한 지위로 바뀌는지를 봐야 되거든요. 열왕기상 2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여기에 중요한 게 나와요.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실로라 하는 것은 지명입니다. 지명인데 창세기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열두 지파를 축복할 때, 창세기 49장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여기 실로는 지명이 아니고 어떤 아저씨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지명이 인격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모든 이스라엘 지명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인다, 어떤 물체나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면서 거기서 사건들을 툭툭 불거져 내는 거예요. 좀 더러운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종기를 터뜨리면, 제가 예를 들면서도 참 죄송합니다, 터뜨리면 뭐가 터져 나오듯이 하나의 종기의 표면이 터지면서 거기서 메시아의 사건들이 나와요. 그 메시아의 사건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인간이 맡았던 모든 감투와 직위는 다 폐품처리하고 그 폐품처리를 근거로 해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겁니다.
새롭게 나온 사람은 믿음이 있다거나 착해서가 아니고 전에 망했던 사람보다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미 망했다는 그 내용을 함유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해져요. 이게 언약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남편이 있는 여자인 밧세바와 간통을 했는데 간통했기에 밧세바가 다윗의 영원한 아내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또 간통해서 천당 가려고 하지 마시고요. 이게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 안의 구원은 부활이 아니라는 거지요. 부활은 십자가를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본격화시킨 것이 부활이에요. 그래서 부활은 부활을 지명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명해요.
십자가는 뭐냐? ‘피’입니다. ‘기름’이란 것은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무슨 뜻이냐? 기름이란 초월자에요.(히 1:9) 이 세상 아담계통이 아닌 특이한 하늘의 기름부음, 하늘로부터 새로운 역할과 사명과 기능을 부여받은 그것을 표시할 때 기름이라고 해요. 그래서 아벨은 제사할 때 기름부위를 따로 분리한 겁니다.(창 4:4) “주여, 이 양은 그냥 양이 아니고 초월적 양입니다.” 장차 오실 세상 죄를 지고 갈 어린 양이라는 뜻이에요.(요 1:29 ; 히 11:4)
제가 지금까지 설교한 것은 한마디로 하면, 이 땅에서 직사하게 죽을 때까지 죄인 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죄 속에서 구원이 나와요. 죄 없애고 구원이나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는 죄 속에서 나와요. 바리새인은 죄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나 강도와 세리와 창기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죄를 더욱 확대시켰습니다. “죄인이 따로 없어. 네가 죄인이야.”라고 이야기하면서 네가 죄인이라고 지목한 그 주님에 의해서 용서가 되고, 그 사람 속에는 죄와 용서가 겸하여 있음으로서 하나님이 백성이 되고,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게 돼요. 주님은 이 땅에 죄인으로 왔다가 의인으로 인정받았잖아요. 그 기능이 계속해서 발휘되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상하 그리고 열왕기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사울 왕 – 다윗 왕 – 솔로몬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서 처음에 사독은 아히멜렉과 함께 하다가 그 다음에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과 함께 짝을 이루어서 있었어요. 그런데 아비아달은 솔로몬 이후에 아도니야라는 다윗의 다른 아들을 왕으로 밀어준 거예요. 그 사람이 왕이 되어야 된다고 밀었던 거예요(왕상 1:7-8). 그런데 다윗은 이미 솔로몬을 지목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안에는 다윗 본인의 죄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장성한 즉 영생을 낳는 셈이 되어버렸어요.
이 세상 저 너머에 초월적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초월적 세계는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평소에 아무 티도 나지 않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 안에 하나님의 영생이 담겨 있습니다. 너무나 평범해요. 신앙의 티가 안나요. ‘믿는 사람이 맞아?’ 전혀 신앙의 티가 안 나요. 요란스럽지가 않아요. 하지만 요란스럽지 않다는 그것, 고요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 왜, 사실은 요란스러워야 되거든요. 죄 지은 대가가 저주스러워야 되고 요란스러워야 되는데 또 내 안에 누가 계셔서 그 지은 죄를 때마다 적절하게 처리하고 회수해 주시니까, 죄 지어놓았는데 마치 죄 안 지은 사람처럼 대우를 해주시니까 이 얼마나 황공한지, 얼마나 과분한 은혜인지요. 죄인인 듯, 죄인 아닌, 죄인 같은 나?
장차 사독이 온다는 말입니까? 사독이 오는 게 아니에요. 에스겔서에 보면 다윗이 온다고 되어 있는데 다윗이 오는 게 아니에요. 옛날에 있었던 그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윗과 사울,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제는 구약성경이 완성된 상태에서 그러한 기능을 오늘날 성도에게 일방적으로 다 퍼부어줍니다. 성도가 옛날 사독이고 다윗이고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특히 사독은 항상 뭘 주시하느냐 하면, “다윗 때의 언약에 의하면 다 죽여도 좋습니다.” 하는 쪽으로 나가요.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의 사자와 같아요. 중요한 것은 죄인 다윗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용서가 중요하지 다른 사람이 몇 명 구원받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독의 의견입니다. 아비아달은 그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다수결로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어디를 쫓느냐로 가야 된다는 겁니다. 사독에게는 사람은 숫자에 불과하고 헛된 기호에 불과한 거예요. 그냥 매직으로 그어 놓은 선에 불과한 거예요. 이것은 아무 실체가 없어요. 숫자라는 것,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숫자거든요.
이미 다윗이 숫자 조사하다가 혼났잖아요.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엄청 죽어나갑니다.(삼하 24:15) 그걸 이미 경험한 다윗 입장에서는 진짜 주님께서 얻고자 하고 찾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99마리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품고 있는 그 ‘잃어버림’이라는 것, 잃어버렸기에 구원된 양이라는 그 하나님의 작업, 구원의 결실물, 열매를 중요시 여깁니다. 성도는 그냥 구원되지 않아요. 십자가의 열매로서 구원되어야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된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어있지 다른 것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거기서 나왔기 때문에. 교회 출석 잘해서거나 찬양을 많이 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전도나 선교를 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러면 십자가는 어디에 있느냐? 지금 내 안에 있다. 어떻게 있는데? 내가 못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 쯤에서 암이 걸려야 하는데 지금 수년째 왜 암이 안 걸리고 있지?’ 이런 식으로. ‘보험도 안 들었겠다. 이쯤에서 집에 불이 한 번 나야 하는데, 가스라도 폭발해야 되는데 가스폭발도 없고. 남들은 교통사고도 잘 나던데 우리 집은 교통사고도 안 나고. 날 뻔 한 적이 있지만 나지도 않고. 그렇게 차를 몰고 다니면 범칙금 나올 만도 한데 걸리지도 않고. 주여, 이것은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혜택을 주고 계시는군요.’ 주께서 “그러니까 더 주지.”
복음으로 사니까 더 주고 나의 의미, ‘나는 잘났다. 나는 그래서 믿음이 좋다.’ 할 때는 다 빼앗아가 버립니다. 잃어버림이 상실되면 은혜도 없어요. 은혜는 반드시 그 잃어버림, 기름과 피, 이 땅에 오신 초월자가 목숨 바쳤다는 그 사실에 근거해서, 그것만 티내기 위해서,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도 선교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성전 된 저희들, 이 세상의 새로운 현실 속에서, 초월적인 현실 속에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저희들이 제사장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