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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31강-에스겔 44장 10-14절(성전 일)150325-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에스겔

131강-에스겔 44장 10-14절(성전 일)150325-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41)

131강-에스겔 44장 10-14절(성전 일)15032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4장 10절-14절입니다. 구약성경 122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4:10-14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수종들어 전문을 맡을 것이며 전에서 수종들어 백성의 번제의 희생과 및 다른 희생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설교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제가 아주 쉽고 친절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 못한다, 하는 그 판정을 내 양심에 비추어서 판정내리시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 그르다는 것이 어떻게 판정이 되는가? 하나님이 주신 게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공한 게 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성전이고 오늘 본문에서 보면 레위지파에요. 누가 성전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 있습니까? 레위지파 보내달라고 우리가 기도한 적 있어요? 우리는 그냥 돈 버는데 바빠요. 우리는 그저 자기 성공하는데 바쁩니다.

그런데 뭔가 하나님 쪽에서 제공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그게 레위지파고 레위지파가 하는 제사고 성전입니다. 그래서 참 쉬운 게 뭐냐 하면, 내가 잘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한테 제공해 준 것에 대해서 내가 어떤 안목과 가치와 의미를 두느냐에 달린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놓고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그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윤리 도덕이지 천국 가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주 쉽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게 있는데 그 주신 것의 취지를 알아먹으면 그것은 잘한 것이 되고 주님의 주신 취지에 무관심하고 그걸 배척해 버리면 아무리 양심 바르게 살아도 그것은 지옥가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주신 게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나오거든요. 주신 것이 없다면 그것은 자기 행함과 자기 체험을 두루뭉술 묶어서 “하나님, 저 잘했지요?” 라고 내미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다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게 뭡니까? 주신 것이 오늘 본문에서 성전이라니까요? 제사제도라니까요? 그걸 가지고 레위언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주신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결혼할 때 사주단자라는 것이 와요. 양측 사돈 간에 누가 경우 바른가를 시합하듯이 이쪽이 주면 받고 받으면 다시 주고 또 받고 또 주고, 그런 것이 있어요.

거기 보면 패물도 있고 옷감도 있고 여러 가지 귀한 예물들이 있거든요. 그것을 제공받게 되면 그 상자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은 저쪽 사돈댁에서 일방적으로 준 겁니다. 내가 만든 것이 전혀 없어요. 성전을 줬다, 제사제도를 줬다, 레위 인을 줘서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주단자를 받은 겁니다. 내가 착실하고 성실해서 뭔가 거기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나는 이런 체험했습니다.’ 그거 집어넣고 또 ‘저런 체험했습니다.’ 그런 것을 집어넣으면 안돼요. 그걸 다 빼야 돼요.

내가 체험하지 않고, 내가 예상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대 밖의, 예상 밖의 것을 툭 주셨다. ‘뭐가 들었지?’ 살펴보니 거기에 있는 모든 일들이 주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주의 마음을 알아채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정말 쉬워요. 일방적으로 주신 것 때문에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은 다 버린다는 것, 얼마나 쉽습니까? 기도해서 무슨 성과를 얻었다든지 뭘 해서 뭘 얻었다, 그런 것은 다 빼는 거예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 속에 내가 예상 못한 것만 거기 가득 담겨 있어요. 내가 예상 못하고 기대하지 못한 것. ‘이렇게 하면 이렇게 얻겠지.’ 그런 것은 찾아보면 하나도 없어요.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나 말고 주님께서 행하셔서 우리에게 그냥 선물로 주신 것, 그것을 풀어헤치면 그 안에 우리가 구원되는 장치, 모든 시스템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성전과 제사제도, 레위지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가 나오겠지요. “왜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신이시여’ 하면서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예상 밖의 것을 왜 주시는가, 그 이유가 뭔가?” 그 질문이 우리한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이 이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받으라고 주신 사주단자 같은 귀한 선물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잃어버림과 얻음’이 들어 있어요. 눈치 빠른 사람은 아시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잃어버림과 얻음이 들어 있습니다.

상실 당하신 것, 하나님의 상실 당하심, 하나님의 아픔이 거기 들어 있는데 그 아픔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도 그 아픔을 근거로 해서 기쁨이 제공되는 것이 그 선물상자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렸다가 얻는 거예요. 우리는 조금이라도 잃어버리면 야단이 납니다. 이래서는 못산다고 하나님 앞에 시위를 해요. “이래서는 못삽니다. 내가 안 잃어버리려고 애를 쓰는데 이렇게 잃어버리면 내가 무슨 낙으로 삽니까? 내가 무슨 힘이 납니까? 하나님을 믿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하면서 우리는 아주 발작을 일으켜요.

그러니까 우리의 내 것 챙기겠다는 이런 것은 주님의 우리를 구원시키는 사주단자에는 포함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빠지게 되어 있지요. 주님 안에는 잃어버림과 얻으심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림과 얻으심이 뭐로 되어 있는가? 하나의 커튼처럼 무늬로 새겨져 있어요. 그 새겨진 무늬를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레위지파가 새겨져 있고 거기 제사제도도 새겨져 있고, 천을 커튼처럼 펼쳐보면 거기에 신구약 성경이 전부 다 하나의 삽화처럼 수놓아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구석에, 예수 믿는 우리 자신도 거기에 같이 레위지파 옆에 수놓아져 있으면서 이렇게 호칭하는 겁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여.”라고 베드로 전서 2장의 내용대로 우리가 주님의 잃어버림과 얻어짐에 의해서 있는 그 천 자락에 그 잃어버림과 얻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물로, 하나의 수놓아짐으로 참여되고 있습니다. 태극마크가 있지요.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립니다. 우리가 그 태극마크의 하나의 수놓아진 것이라면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는데 우리가 같이 휘날리지요. 주님과 함께 휘날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은 사실은 주께서 유발시킨 성령의 바람이라. 그래서 우리는 바람, 바람, 바람! 우리는 바람이에요. 우리는 성령의 바람에 의해서 휘날리고 있고 그 유발된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주단자에서 흘러나오는 능력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에요. 같은 편에 서서, 같은 천에 같이 수놓아져 있어서 같은 지평에서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내가 주님에게 주고 주님한테 얻어내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누가 먼저 줘서 그 준 대가를 주님에게 받아내겠느냐,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거예요. 내가 뭘 바쳤더니 “바쳤구나. 복 줄게.” 그런 하나님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5절에 나와 있어요.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받은 것이 없을 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지시, “뭘 해와! 그리고 뭘 바쳐!” 이렇게 지시하면 될 텐데 왜 지시하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아예 자기의 잃어버림과 얻으심의 구원에다가 우리를 수놓는 무늬로서 박아버리는가? 왜 그렇게 관여하고 참여케 하시는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만들고 난 뒤에 영적 세계에 부딪히게 되면 인간은 영적세계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겨낼 수가 없어요. 그 중에 최초로 일어난 사례가 바로 선악과 따먹은 일입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유혹했는데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그래요. 마귀가 시작했기 때문에 저주를 누가 받아야 되느냐 하면, 마귀만 받아야 돼요.

마귀만 받아야 되는데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일로 인하여 그 저주가 마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자와 남자, 모든 사람에게 다 저주가 임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해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살지 말고 나가라!” 하고 추방시켜버렸어요. 이 말은 선악과 따먹을 때 인간은 그저 악마의 희생물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관여를 했다는 뜻입니다. 어느 정도 관여가 되었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관여를 했느냐 하면, 저 너머 신의 세계가 궁금했던 거예요. ‘저 너머 신의 세계에는 뭐가 있을까?’ 이쪽까지는 인간이고 저쪽이 신의 세계라면 신의 세계에 뭐가 있을까, 하는 겁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궁금해 합니다. 교회 와서도 신의 세계를 궁금해 하고. 천국은 어떻게 생겨먹은 세계인지, 들어갈 만 한곳인지 아닌지, 천국이 좋으면 알아서 내가 예수 믿고 안 좋으면 안 믿고, 그런 식으로 신의 세계의 정보를 먼저 내가 입수해놓고 신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내가 알고 난 뒤에 판단은 내 쪽에서 하겠다는 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림들이 꽤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요. 인간이라는 피조물의 한계가 있습니다. 흔히 신학에서 인간의 한계를 뭐라고 하느냐? 인간은 하나님보다 전지전능하지 못하다. 그리고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하는 일에 육신적 제한이 있다. 이런 것으로 인간의 한계성을 규정을 해요. 여러분이 꿈속에서 절벽에서 떨어지게 되면 신난다, 시원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꿈에서 “악!” 하다가 꿈 깨보면 식은땀이 다 나지요. “휴! 큰일 날 뻔 했구나.” 그런 식으로. 절벽에서 떨어지면 왜 안 되는데요? 날지를 못하니까. 그게 한계지요. 누가 뒤에서 쫒아 오는데 달리지를 못해요. 왜? 빠르지를 못하니까. 치타보다 덜 빠르고, 새처럼 날지도 못하고, 냄새 맡는 것은 개 코보다 못하고, 덩치는 코끼리만 못하고, 미래에 관해서는 천사보다 못하고. 이런 것을 한계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고요, 인간의 한계는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그렇게 정한 게 아니에요. 인간은 못한다, 모른다, 그래서 한계가 아니고 인간의 한계는 따로 있습니다.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일반 회사에서 부장이 있고 막 입사한 미생의 신입사원이 있다고 합시다. 부장은 입사한지 30년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업무에서 전문가로 자처하고 처음 들어온 신입사원이 뭘 알겠느냐, 했다 칩시다. 그런데 부장이 어떤 일을 할 때 자꾸 막히는 거예요. ‘이럴 때는 어떡하면 좋지?’ 그런데 처음 들어온 신입사원, 남자도 아닌 여직원, 안영이가 “부장님, 외람되나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아하, 그런 수가 있었구나. 야, 진짜 좋은 아이디어네. 그런데 러시아 계약 건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있는데 또 여직원이 나서서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아하, 그런 수가 있었구나.’ 그 후에 또 “복사기가 왜 이렇게 안 되지? 복사기 고장 났나?” 하고 있는데 또 신입사원이 “복사기는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 그런 수가 있었네.’

멋지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게 되면 처음에는 그 신입사원이 고마워져요. “너 아니면 일이 되는 것이 없다. 점심 살게. 이번 일이 너무 잘됐어.” 그런데 자꾸 도움을 거듭 받으면 뭐가 바뀌느냐 하면,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뀔 때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면서 인간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저거 잘라야겠다. 저게 있으면 내가 부장 값을 못하겠다.’ 미안하다만 뭔가 일을 만들어서 억지로 추방시켜서 현재의 자기 자리를 고수하는 것,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혼자서 “신은 대단하고 인간은 못났다.” 하는 이것이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만만했고, 무시했고, 얕잡아봤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긴 쪽을 통해서 예상 밖의 자기 부끄러움이 노출될 때 그 상대를 살려둬서는 안 되는 상대라고 여기고 없애든지 죽이든지 쫓아내든지 눈앞에서 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제거대상으로 삼을 때 이게 인간의 한계, 갇혀 있는 인간의 범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악마와 더불어 공모했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거예요. 신의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한계를 지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이야기한 그것은 마귀의 말이 맞아요.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하나님처럼 된다는 그 말이 맞는 말인데 오히려 그 말이 인간의 한계를 결정지은 거예요.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확정지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 빼놓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확정지은 사건이 선악과 따먹은 거예요. 인간은 신이 되고자 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리고 그 한계성은 마귀의 영적세계에 인간이 이미 다루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빼도 박도 못합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마귀라는 커튼이 흔들리면 같이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한통속이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 자기밖에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영적세계에서 인간의 미약함과 유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이 성질을 하나님께서는 자리바꿈해서 마귀 자리에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예수님이 너를 구원함에 있어서 너도 거기에 관여한바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간주해주시는 겁니다. 무엇으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하는 겁니다. “내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죄인 되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것을 주님께서 구원하는데 있어서 참여할 수 있는 자리, 위치배정을 그렇게 해요. 너의 자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서 배정을 해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따로 할 것은 없어요. 우리 있는 자리를 주님께서는 훌치듯이 그냥 쓸어가는 겁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나는 나만 사랑한다. 내가 최고다. 나는 신이다.’ 이렇게 하고 있는데 누가 포크레인 가지고 흙 채로 푹 뜨는 것처럼, 내가 그런 소리 하고 있을 때 포크레인이 와서 내 자리를 푹 뜨니까 그 포크레인 안이 예수 안이 되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나 밖에 모른다.” 그런데 내가 나밖에 모른다는 이 소리를 전에는 마귀 안에서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예수 십자가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어? 주님은 왜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지파가 성전 안에서 제사를 드려야 될 그 이유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언약세계 안이에요. 포크레인의 삽 안에 같이 들어있는 겁니다. 레위지파가 해야 될 일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전을 경비하는 일을 해요. 아파트 경비하는 일도 있듯이, 또는 밤이 되면 학교 경비하는 일.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제사드릴 때 제사장을 도와서 제물을 잡는 일을 해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일반백성과 제사장 사이에서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양은 거기 놓으시고요. 염소는 그렇게 질질 끄는 게 아닙니다. 곱게 잡아주세요. 그 다음에 곡식은 저쪽으로 놓아주세요. 아,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구역입니다. 바깥에 계시고요.” 이렇게 안내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나 행사요원 같은 역할이에요. 앞에서는 제사장들이 다 하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직분이 얼마나 고귀한 직분이냐 이 말이지요. 이것이 주님과 같은 천에 수놓아진 하나의 무늬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레위인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총괄해서, 이 레위언약에 의해서 예수님은 공생애의 길을 가시거든요. 스스로 제물이 되시고, 스스로 제사장되시고, 스스로 백성들을 이끌어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되시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어떤 경로를 밟느냐? 여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그들은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는 그러한 경험을 해야 돼요.

그게 12절에 나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했다는 말이지요. 이경로가 예수님 공생애 안에 포함이 되어 있고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고 더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모든 성도가 이 코스를 밟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종교생활 없는 신앙생활 없습니다. 자기 딴엔 신앙생활이라고 하지만 성령 오기 전에는 전부 다 종교생활이에요.

우상을 섬기면서 용어는 다 바꿔놓았어요. 예수, 십자가, 성령, 삼위일체, 뭐든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다 집어넣었는데 내용 까보면 전부 다 우상이에요. 자기를 위해서 교회가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자기 잘남을 위해서 열심 냈고. 혹시 이거 내면 30배, 60배, 백배로 들어올까 싶어서. 교회는 카지노 아닙니다. 애들은 가라, 하면서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괜히 그런데 다니다가 협박이나 당하지 말고. 그런데 교회 오는 사람치고 이 ‘돈 놓고 돈 먹기’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어요. 자기를 유지하려고 오지 “하나님, 교회 왔으니까 저의 모든 것을 몽땅 잃게 하옵소서.” 이렇게 오는 사람이 없잖아요. 돈 잃어버리려고 카지노에 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다 하나님 생각 안 하고 예수 생각 안 해요. 자기만 생각하는 그 선악과 따먹은 성질 그대로 가지고 교회 오는 겁니다.

와 가지고 자기 딴엔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그 신앙생활이 사실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신앙생활로 하나님께서 규정을 봤지요. 왜냐하면 그 절차가 있어야 돼요. 그 절차가 있어야 예수님의 잃어버림에 동참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 교회 와서 “주님, 내 죄 때문에 주께서 목숨을 잃었군요. 너무나 고마우신 주님!” 이렇게 고백하거든요.

그러면 묻지요. “실례지만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러면 고민에 빠져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더라?’ 내가 지은 죄하고 예수님의 잃어버림하고 연결시킬만한 죄가 생각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알지. 성경에 다 나오잖아. 성경에 내 죄목이 다 있지.” 합니다. “그런데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예수님께서 더 이상 명령이 아니라, 십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의 피를 흘려야 당신이 구원받을 정도로 당신을 끝장내는, 당신의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죄가 어떤 죄입니까? 두 번 다시 나 자신이 잘났다, 하지 못할 정도로 지은 죄가 뭡니까?” 하게 되면 몰라요. 그런 죄지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압니까? “저는 그 정도로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모르겠다는 거예요.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도 똑같은 경우였습니다. 그들은 멸망당하면서도 멸망당하는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왜 그런지? 왜 모르는지 그 이유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죄라는 것은 죄를 지어서 주께서 죄를 씻어주는 게 아니고요. 죄를 씻는 것부터 먼저 만들어놓고 거기에 부합되도록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생각나게 하는 이것이 정답입니다. 제가 아주 쉽게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죄를 지어놓고 “이런 죄가 나쁘니까 주여, 용서하소서.” 할 때 “그렇다면 내 피로 용서한다.”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요 우리가 다음에 착한 일 해서 전부 다 상쇄하면 되는 죄들이에요. 예배시간에 십분 늦었잖아요. 그러면 다음에 20분 일찍 오면 다 상쇄돼요. 그까짓 거 그런 죄는요 착한 일을 보태면 다 없어지는 죄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지면 아무리 착한 일 해도 상쇄가 안 되는 죄를 이미 지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심층 밑바닥에 있거든요. 저 밑의 탄광처럼. 이미 용서받은 사람에게만 우리의 행함으로 용서 될 수 없는 죄를 구경시켜 줍니다. 어쩔 수가 없는 죄를. 아무리 착해도 씻을 수 없는 죄, 그 죄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귀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외부에서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했던 거예요.

이제는 그 기계와 끊어졌고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옛날 끊어진 것이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을 주께서 가위가지고 끊었다는 그 사실, 그 단절, 내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끊었는데 그 끊어진 내막을 보니까 그게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내가 신처럼 행세하려한 우상, 나 잘난 맛에 살아간 그 우상. 이것은 실수했다, 악하다, 그런 수준이 아니고 원래 나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하면, 탄생한 것만 기적이 아니라 죽는 것도 나에게 속하지 않은 주님이 하실 일인 것을 알고 내가 죽는 것도 복된 기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생일축하 합니다.” 그 노래만 매년 부르지 마시고 우리가 죽을 때도 “축하합니다.” 매일 같이 죽는 죽음에 대해서도 축하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사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죽는 것도 기적이고 태어난 것은 물론이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잃어버림, 나 때문에 잃어버림,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얻어짐의 그 사실에 같은 쪽에 서서 바람에 휘날리면서 주님의 잃어버림과 얻음을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인 평범한 삶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움직임 속에서 “나는 잃어버려도 되는데 주님 증거 하라고 이렇게 얻어져서 오늘도 움직입니다.”라는 고백,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레위 인이고 우리 자신이 성전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내 중심으로 봤던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했던, 우리 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죄였음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돌아서면 항상 내 중심, 나밖에 모르고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것은 나의 가치밖에 모르는 이것이 바로 마귀의 올무가 되었던 그 원인인 것을 예수님이 이미 구원하셔서 죄 용서해 주심으로써 파악케 해주시니 이제는 주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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