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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이방인의 처지 150318우리교회에스겔

이방인의 처지 150318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이방인의 처지(에스겔 44:6-9)

이근호

15-03-18 21:21

이방인의 처지

2015년 3월 18일 본문 말씀: 에스겔 44:6-9

(44:6) 너는 패역한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44:7)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44:8)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44: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뭐든지 흉내내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거룩함마저 정복하려고 덤빕니다. 솔로몬이 성전이 짓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통해 영광 중에 임재하셨습니다. 성전의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겠다는 그 마음을 보시고 임재해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추진하는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통고해주시는 취지로 임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반응을 나타내고 자극을 받기도 하면서 거룩을 자기네 손으로 제작해서 소유하려 듭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내시는 ‘거룩한 언약 백성’의 본질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구미에 맞는 신을 창작하게 된 이유는, 이미 선악과 따 먹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형과 다른 인간형으로 갖추어진 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범죄한 인간형이란 곧 ‘금지의 취지’를 거부하고 반항하는 인간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금지조항을 두신 이유는, 이 세상이 결코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대자연이 사람 사는데 적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들이 범죄한 이후이기에 이 대자연이 이런 식으로 운용되는 이유를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금지가 꼭 삽일되어야 될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삽입’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중심이요 핵심입니다. 즉 이 우주는 ‘죽음’을 모시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최종적 목표상황이 아니라 중도에 한시적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듯 겪어야 될 예외적 상황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대자연은 ‘죽음’을 최종 목표점으로 세우기위해 만들어지고 줄기차게 달려온 것입니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는 동산 정중앙에서 짝이 되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한쪽을 건드리면 다른 한쪽이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그 죽음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 대해 인간이 참여하는 길이 바로 ‘벌칙 형식’이었습니다. 인간이 범죄인이 되는 일입니다. 아담의 범죄마저 예수님의 죽음을 부각하는데 일조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범죄하고 난 뒤, 눈에 뜨여졌습니다. 눈이 밝아졌습니다. 계몽된 겁니다. 이게 사단난 겁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변해버린 겁니다. 천지창조에 대한 취지마저 인간 중심으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천지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왜곡되게 해석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이미 예루살렘에 있던 솔로몬 성전이 불탄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는 실감 나듯이, 이미 이 땅에서 ‘인간 중심 사상’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죽음에 넘겨진 분에게만 이 세상이 결코 사람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죽음 중심인 것을 압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기 중심이란 곧 ‘살아 있는 존재’로서 자신을 상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살아 있는 나’와 예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계심을 엮어보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범죄한 이후의 아담의 속성입니다. 이 범죄한 속성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존재와 운명을 가지고 그 일치됨을 알려주십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금지조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도 그 취지를 유지시키십니다.

즉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들은 나의 성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금지조치입니다. 금지조치가 핵으로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는 말은 결코 이 세상이 사람들의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달리 말해서, 사람들이 자기 존재를 위해서 이리저리 하나님과의 관계와 말씀을 준수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살아있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합니다. 따라서 죽은 인간이 자기 인생과 운명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죽으심의 흔적을 남기신 백성들을 따로 만드셨는데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할례’라는 일종의 뱃지(badge)를 달게 하셨습니다. 할례란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들어설 수 없는 ‘죽음 저 건너편에서 출생된 자’에 대한 흔적입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방성향의 이스라엘은 할례를 흉내내고 모방하면서 그 행위가 마치 구원의 능력이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나 방식이나 수단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죽음에 참여하라고 죄짓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는게 인간의 목적이 아니라 저주받는게 존재의 이유입니다. 인간의 모든 일상적인 일이란 그것이 자신을 저주받아야 될 존재를 증명해주는 ‘저주의 조건’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죽으심의 의의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중보자로서 중보자적 기능이란 모든 인간은 예수님 죽음 앞에서 과연 저주받은 자임을 확정케 하는 기능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할 자격자가 일체 없음을 분명히 하는 기능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런 요구를 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만이 죽음 저편에서 나온 능력으로 탄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7:14에 보면,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담은 징조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는 인간 세계에 까지 파급되었습니다. 이사야 9:6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처럼, 인간이 감히 건너갈 수 없는 ‘죽음 저 편’에서 제공된 능력으로 이 세상에 출생한 자들만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경우가 발생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부모의 육신에 의해서 출생된 자들입니다. 그 육신에 아무리 할례자국을 남겨봤자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일 뿐입니다.

참된 할례는 바로 십자가 피 능력, 곧 예수님의 죽으신 능력에 같이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산 자들 뿐입니다. (골로새서 2:11-12) 그들만이 마음 속에 영적 할례가 새겨져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있는 나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게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3-19 12:51

130강-에스겔 44장 6-9절(이방인의 처지)1503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4장 6절-9절입니다. 구약성경 122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4:6-9

“너는 패역한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들어온다, 못 들어온다, 이것이 성립하려면 특별한 장소가 마련되어야 하고 그 장소는 오늘 본문에서는 성소라고 정해져 있습니다. 성소가 중요하고 성소에 들어오는 사람이 중요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를 중요하게 보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중요하게 보지 않고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성소가 우선입니다. 성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간추려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취급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해주지요. 알려주는 겁니다. 성전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어요. ‘성전을 만들라고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말씀을 잘못 알아듣게 돼요. 성전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통보해 주기 위한 거예요. 열왕기상 6장, 7장 보게 되면 솔로몬이 성전 세우는 대목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성전 세울 때 성전 다 세우고 난 뒤에 열왕기상 8장에 보면, 구름이 전에 가득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그 성전 치수대로 정확하게 했기에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했는가? 아니면 성전은 어떻게 만들었는가와 상관없이 임재하게 되어 있었는가, 가 중요한 문제에요. 성전이 치수대로 정확했느냐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성전이 어떻게 지어졌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십니다. 그것은 뭐냐? 성전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고 성전을 통해서 뭔가 나타내려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이 성전 짓는 그 마음이 내가 이 땅에 성전 짓는 마음과 일치된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임재하신 거예요.

그걸 보고 ‘솔로몬이 만들기는 참 잘 만들었어.’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오해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다시 말합니다만 성전은 우리보고 만들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뭐든지 근사하고 신기하게 되면 그것을 그대로 만들어내려고 해요. 만들어진 것은 내 소유가 되기 때문에 갑 질을 하고 내가 주인노릇을 하게 됩니다. 간증을 하게 되면 간증을 들으면서 집회가 끝나고 난 뒤에 교회 문 나서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똑같은 것을 내가 만들게 되면 내가 복 받을 것이 아닌가?’ 하는 드라마작가 같은 발상들이 막 떠올라요. ‘나도 암 안 걸리나? 암 걸린 뒤에 기도해서 3일 만에 나아서 멋있게 신앙 좋다는 티를 좀 냈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 막 떠오르는 거예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든지 만들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뜻을 거기에 담아서 통보해 주는 겁니다. 얼마나 정확한 치수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성전의 취지에 대해서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전은 무엇을 통보해주려고 하는가? 성전을 통해서 금지사항을 통보해 주십니다. 어떤 금지인가? 9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어요.

성소가 무엇을 통보하는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없다.’라는 점을 통보해 주는 겁니다. 이것은 두 자로 이야기해서 ‘금지’에요. 금지. 우리는 최초의 금지를 어디서 만나는가? 에덴동산에서부터 이미 금지가 주어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 금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금지와 조를 이루어서 처벌이 있어요. “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것만 없었으면 그 금지와 처벌조항만 없었으면 깔끔하게 정말 파라다이스인데. 정말 파라다이스잖아요.

요새 애 키우는 것 보면 난리도 아니에요. 아이 방을 무슨 유원지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요. 미끄럼틀에다 온갖 장난감이 쌓여 있고. 애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비싼 놀이기구, 내가 보기에 수백만 원 넘어 보이는 기구를 해 놓고 “마음껏 뛰어놀아라.” 하면서 “한 가운데 있는 그것은 만지면 안 돼.” 이러면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모순이 되지요. 마음껏 뛰어놀라는 것을 저지해버리면 마음껏 뛰어노는 그것에 흠집이 생기는 겁니다. 마음껏 뛰어놀라고 해놓고 뭔가는 만지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앞뒤가 안 맞지요. 그것까지 빼야 ‘마음껏’이 제대로 ‘마음껏’이 되는 거니까.

하나님의 이 금지와 처벌조항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점차로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면서 마지막 때에 그 뜻의 합당한 이유, 그 해답을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죽음 없는 창조는 없었다.’는 겁니다. 더 간추려서 ‘모든 천지창조는 죽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 죽음은 뭐냐?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 죽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천지창조가 되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아담은 상상도 못했어요. 세상이 자기세상인줄 알았어요.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세상인줄 알았어요.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니 자기 성질대로 다 다스리고 정복하면 되는 줄로 알았어요. 금지조항, 처벌조항이 왜 있는지를 몰랐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신뢰했으면 다 맡기지? 다 맡기면 될 것을 뭔가 금지조항과 처벌조항을 포함해서 인간에게 뭔가 일임했다는 것은 이 우주가 너를 위해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예요. ‘너를 위한 세상이 아니다. 너 좋으라고 만든 세상이 아니야.’라는 거예요.

그 말은 ‘너 말고 다른 분 좋으라고 만든 세상’이라는 겁니다. 글쎄요. 이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아, 정말 찾아보기 힘들어요. 기독교서점의 그 많은 책들을 보세요. 이걸 전부 다 빠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가?’ 전부 이런 내용들이에요. 성경은 구원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이야기에요. “너는 왜 죽지 못하고 살아서 주님의 죽으심을 살아 있는 네 몸체가 가리고 있느냐?”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라니까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주의 말씀으로 살아라.” 이걸 요구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잃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여, 어떻게 살면 됩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이 안돼요. “주님이여, 어떻게 삽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네 조상 아담이 죽었기에 그것을 이어받아서 너도 죽게 된다.” 그러면 그 다음 나오는 답변은 뻔한 거예요. “최초의 인간 아담을 안 죽게 할 수는 없었습니까?”라고 손가락질을 주님 보고 할 참이에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근원적인 문제는 인간이 사는 해답과 이유를 자기 쪽에서 발굴하거나 찾아낼 수 있는 자격자체가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살면 되느냐?’라는 질문 자체를 허용 받지 않는 것이 우리 존재에요.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데 잘 산다는 그런 내용이 성경에 없습니다. 제대로 죽으라는 내용밖에 없어요. 하나님도 죽었는데 네가 뭔데 살려고 하느냐고 성경은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의 금지조항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 에스겔 44장의 마지막 때의 성전에서는 이방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내 성소에 들여놓지 말라는 금지조항입니다.

7절에 보면,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너희들이 완전히 무시한 거예요.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점.

전에 있던 솔로몬 성전이 불타버렸거든요. 예루살렘의 그 성전이 불타버린 이유가 7절에 나와 있는 겁니다. 항상 말씀을 해석할 때는 이런 경우를 이미 당하고 난 뒤에 그걸 이미 벗어난 사람이 이 본문을 다시 봐야 해석이 가능해요. 이것을 경험하고 혼이 나고 난 뒤에 다시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아!’ 하고 그 뜻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 상황을 벗어난 사람에 의해서만 해석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성전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은 생각해요. ‘그게 뭐가 어째서? 할례라는 것이 뭐 길래? 그게 아무것도 아닌데. 그저 포경수술인데. 그 포경수술하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 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망해봐야 ‘아, 관계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그리고 7절 끝에서 8절을 보게 되면,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성물의 직분이라는 것은 레위지파를 두고 하는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성소의 제사는 레위지파가 담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레위지파 속에 물론 제사장이 포함되어 있고요. 그런데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그걸 맡겼던 모양이에요. 그것 때문에 성전이 불탔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게 뭐 어때서? 아무나 하면 되지 뭐. 그게 뭐가 문젠데?” 다시 말해서 그들은 레위지파의 중요성을 몰라요. 7절 끝에 보면,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위반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약속 좀 위반 하면 어떠냐? 인간은 천사가 아니니까 인간은 위반하게 되어 있고 위반하게 되면 ‘약속을 어겼나? 그러면 내가 용서해줄게.’ 해서 지킬만한 다른 언약을 주면 되지 않나?” 합니다.

지금 성전이 중요한데 그 성전에 종사하는 자기 백성들이 미흡하고 모든 게 서툴잖아요. 양식집에 간 손님이 서툴러서 주문할 내용도 잘 몰라요. 서툴면 가르치면 되지요. 차분하게 앉혀놓고 “다음에는 이러지 말라.” 달래면 되잖아요. 그러면 되는데 왜 이 귀한 성전을 지으라고 해놓고 그것을 왜 불태우는가 하는 거예요. 뭐 그리 중요한 것이 있어서 그걸 불태우는가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의 백성이거든요. 언약에 의해서 탄생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얼마나 대단한 신분인지를 그들조차도 무시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그리 중요한 직분이냐? 이방인을 내어쫒으라고 했거든요. 이방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중요한 사람들인지 알 필요가 있겠지요. 이방인,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 이방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이방인들은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의 특징은 눈이 뜨인 사람이에요.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일어난 현상중의 하나가 눈이 열린 거예요. 눈이 열려서 뭔가 깨달았으니까 그 때부터는 모든 것이 모방하고 흉내 내기로 버티는 겁니다.

하나님 흉내 내기를 시작한 거예요. 수치가 드러나면 자기 수치를 스스로 가릴 줄 알고, 성전 지으라고 성전 만들 줄 알고, 율법 지키라고 하면 율법을 지키면 되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이방인적 성격을 갖고 있어요. 이방인의 속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면 되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율법은 처벌을 위한 율법이거든요. 심판받게 하기 위해서 준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속성은 뭐냐 하면, 처벌을 위한 것을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잡아당길 정도로 그들은 스스로 눈이 뜨였다, 열렸다, 계몽되었다, 깨달았다, 이렇게 주장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믿는 신들은 전부 다 거룩하고, 고상하고, 점잖고, 착하고, 순수하고, 그런 거예요.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순수한 고요를 말합니다. 고요함. 순수한 적막감.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현재 죽지 않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생각해서 세상은 번잡스럽잖아요. 복잡하잖아요. 골치 아프잖아요. 사는 게 번잡한데 이것이 끊어지게 되면 순수한 고요함속에서 안식을 얻을 것이라,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죽음은 처벌이라는 사실. 더 요란스럽다는 사실, 더 시끄럽고 더 우당탕한다는 사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복잡하고 한시도 가만두지 않는, 사람을 계속 시달리게 만드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랐어요. 복잡함이 순수임을 모르고 순수함이 고요의 극단인 줄 알았어요. 그 이방인의 속성을 누가 갖고 있는가? 바로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에서 일했다, 들어왔다는 말은 누가 불렀다는 겁니까? 자기들이 자진해서 왔겠습니까? “괜찮아. 들어와, 들어와!” 이렇게 이스라엘이 불러서 하나가 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하나가 되어서 이스라엘 나라를 평화롭게 만들려고 한 거예요.

그들의 이러한 말씀에 대한 오해는 신약에서도 똑같은 현상으로 일어납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보고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는 때가 되면 그것이 곧 천국이 임한 증거라고 본 거예요. 이런 아이디어는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하나가 되어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롭게, 자기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했던 이방인적 속성발휘와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뭔가 율법을 조종하게 되면 원수라도 하나가 된다고 본 거예요. 이 에베소서 2장의 말씀을 가지고, 전에는 이방인과 서로 싸웠지만 이제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로 얼싸안고 화평을 이루면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만족스러운 평화로운 교회,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오해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뭘 몰랐느냐?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해서 ‘할례’의 의미를 몰라서 그래요. 할례는 뭐냐고 물으신다면 할례는 죽음의 흔적입니다. 할례는 문신이에요. 육은 죽었습니다, 하는 뜻이 할례에요. 할례, 인간이 자식을 생산하는 기관인 생식기의 끝을 자른다는 말은 그 기관이 자식을 낳는 대표적인 기관인 생식기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기관을 자른다는 말은 기존에 내가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과 내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모든 육신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그들은 죽음 저편에 건너가서 그 쪽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낳음, 아들 낳듯이 출생된 자들의 집합이 이스라엘이에요. 죽음 건너편, 죽음 너머로 간 거예요. 죽기 전에 알아서 화평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넘어가버린 거예요. 죽음을 넘어가서 건너편에서 어떤 자식을 생산하게 되면 그 생산된 자식이 도로 이쪽으로 왔을 때 그쪽에서 낳아진 집단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죽음 건너편에서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육신에서 오지 않았다. 약속의 완성된 쪽에서 왔다.’고 해서 할례를 하나의 문신처럼 흔적으로 갖고 있었던 겁니다. 죽음 건너편.

거기가 여기서 몇 킬로 됩니까? 여기서 몇 번 버스를 타면 가지요? 401번 타면 죽음 건너편에 갑니까? 한국기독교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신학이 나온다는 거예요. 성경 보면서 교회 운영 방법이 자기가 살아 있는 채로 나온다는 거예요. 할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것은 멸망해야 될 이방인에 속하는 사고방식이에요. 이방인들이에요, 사실은. 흉내 내고 모방하고 상상하는 겁니다. 보다 완벽한 신의 세계, 완벽한 하늘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화평하고 온유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 정결하게 사는 것, 그런 것들을 다 모은 거예요.

저는 그걸 쓰레기통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사실은 개꿈을 꾸기 위한 자료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열심히 살아봤자 오늘 밤에 주무시면 꾸게 되는 하나의 꿈 재료로서 잠시 사용하다 끝나요. 주께서 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습니다. 살아 있으면서 한 것은 하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인정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 건너편에서 온 거예요. “할례가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할례는 어떤 능력이 없어요. 할례는 문신이고 표적이고 어떤 능력이 없어요. 할례를 백군데 표시해 봐도 소용도 없어요. 할례는 아무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할례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흔적이라니까요.

그러면 누가 할례를 시키느냐가 중요해요, 누가? 누가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 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그분이 백성들에게 할례를 시킨 거예요. 그러면 그분은 어디서 출현하느냐? 그분이 어디서 출현하는지 제가 그 근거를 대겠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교회 좀 다녀본 사람들 들은 대목일 거예요. 제가 이야기 하면 ‘아, 그 대목.’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많이 들어봤지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아들을 낳을 것이요.”

부모가 죽음 건너편에 있는 거예요. 죽음 건너편에 있는 부모가 이 땅에 어떤 아들을 낳은 거예요. 이사야 9장에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아들이 왜 왔겠습니까? 그 아들처럼 이 땅에 출현하는 자만이 그것이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 해당돼요. 그 아들처럼 출현해야. 이 예수님, 그리고 이 예수님에 속해있던 백성들은 세상에 있는 부모로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근거, 출생지가 죽음 저 건너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 건너편에 있다는 것이 어떻게 확인됩니까? 할례를 가지고 한다니까요. 할례. 할례 할까요? 할례는 ‘할까요?’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 시행하는 것, 제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것은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뭐든지 그걸 흉내 내고 만들고 상상해서 유사품을 만들어놔요. 자꾸 시킨 대로 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통보, 뭔가 알려주는 역할을 해요. 그 할례가 뭐냐?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이 십자가를 가지고 마지막 때의 할례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너를 낳았다. 이겁니다. 십자가로 너를 낳았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너를 낳았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낳았다는 말은 십자가를 계획했던 분이 죽음 저편에 계시는데 저편에 계신 분이 자기나라를 채울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의 능력으로 여기 있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할례 행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쪽으로 합류를 시켰는데 그 합류로 나타난 것이 뭐냐,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전에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금지입니다. 끝까지 주님은 금지 없는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래야 됩니까? 이 세상이 사람들 좋으라고 마음 놓고 뛰놀게 하는 자연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한 세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끝으로, 그러면 그런 식으로 누가 해석할 수 있는가? 전에 성전이 이미 불타버린 사람에게 ‘네가 성전에 이방인 들여서 망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이해가 되는 것처럼 “너는 이방인이고 모든 하는 것이 우상 숭배적으로 너 자신을 위해서 신의 말씀을 지키고 어떻게 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상이다. 그러니까 너 같은 것은 할례가 없는 거야. 할례 없는 것은 저주야. 너는 마땅히 심판이야.” 라는 것을 익히 아는 자에게 십자가라는 게 무슨 뜻으로, 왜 이 십자가가 사랑이 되고 긍휼이 되고 용서가 되고 자비가 되는지, 그런 사람에게만 이 에스겔과 신구약이 다 해석이 되는 겁니다.

‘아,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구나. 이 세상은 다른 분을 위해서 있는 거구나.’ 그러면 그 다른 분이 뭐냐? 중재자, 또는 중보자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중보자가 이 땅에 나타나서 보여준 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이름의 할례의 완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해놓고 에베소서 2장을 다시 보게 되면 이제 이해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로 가까웠다는 그 말은 인간들끼리 화합하고 화목하자는 말이 아니고 죽음 그 건너편에 가게 되면 이방인도 없고 유대인도 없고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죽었다가 살림 받는 사람만 거기에 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교회라는 겁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이것이 다 뭡니까? 취직하고, 교회 다니고, 예배드리고, 이게 다 뭐예요?” 그거 알려드릴까요? 저주의 조건입니다. 사람 사는 게 저주의 조건이에요. “너는 왜 저주를 받아야 되는가를 네가 살아가면서 다시 느껴라.” 왜 저주를 받아야 됩니까? 주님이 죽었거든요. 네가 잘못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이 죽었음, 그 핵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조건입니다. 창조된 조건이에요.

이걸 아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다 알아버렸어요. 모든 것을 다 알아버렸어요. 자, 이제 내일부터 일터에 나갑시다. 저주받기 위해서. 간단한 문제에요. 저주받기 위해서, 저주의 조건을 알기 위해서 아침 일찍 나가면 되는 거예요. “하나 더 팔아 주이소.” 왜? 저주받기 위해서. 그거 팔면 돈 생기겠지요. 돈 생기면 맛있는 거 먹겠지요.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 좋겠지요. 그게 바로 저주받은 거예요. 그 기분 좋은 거. 왜? 눈을 떴으니까. 선악과는 치우고 생명나무 치우고 나만 잘되면 되니까, 이 세상은 나만 행복하면 되니까.

그게 바로 주께서 고대하고 고대했던 저주, 그것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할례나 이런 것은 전혀 관심 없이, 죽음 저편은 죽어봐야 아는 것이고 그냥 살아 있는, 눈에 띄는, 그냥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만 살면 그만이라는 그것, 그것을 위해서 모방도 하고 흉내 내고 상상력도 발휘하는 겁니다. “주여, 이렇게 경건하면 주의 백성 맞지요?” 이렇게 상상하는 거예요. 죽음 저편에서 태어나야 이스라엘인데, 마음의 할례, 영적인 할례를 받아야 이스라엘인데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종교적인 형식을 끌어 모아서 자기를 신자라고 자꾸 우기는 것, 그게 바로 저주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점점 더 자기의 저주를 끌어 모으게 되지요. 안 끌어 모은다고 해서 저주 안 받는 것도 아니고.

어찌되었든 간에 “내가 어떻게 하면 잘됩니까?” 하는 질문은 하지 마세요. 이미 예수님이 죽었고 주님의 죽으심의 능력으로 살려주면 살고 안 살려주면 지옥가고 끝! 이게 끝이에요. 영어로 THE END!

성전 있다고 하니 좋~다고 했지요. 성전자체가 중보자요 중재자요 매개자입니다. 성전 자체가 뭐가 들어 있나 보니까 거기에 금지가 있네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들어오지 말라. 끝까지 주님께서는 이 금지조항, 벌칙조항을 양보한 적이 없고 철회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마지막 끝은 천국과 지옥, 지옥과 천국으로 구분됩니다. 그게 성전의 설립취지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살기 위해서 우선시 하고 하나님을 기도하고 기대보는 모든 모습이 하나님의 취지에 어긋나는 이방인들의 짓이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았사오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십자가를 증거 하는, 십자가와 비교하면서 우리 자신의 못남과 우리 자신의 용서받음을 더욱 더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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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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