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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6장15(기적과 표적)150305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6장15(기적과 표적)150305b-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요한복음6장15(기적과 표적)150305b-이 근호 목사

여기 12절에 보면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 그 다음에 뭐라고 돼 있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이 말은 너희 소비하라고 준 너희 양식이 아니다 말이죠. 나의 몸인데 너희들은 그것을 자기만 배만 부르면 ‘아이구, 뭐 감사합니다. 이제는 버려도 되죠?’ 자기 소비용으로 사용하는, 자기들이 원했던 걸 주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원한 걸 주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앞으로 해야 될 일을 가지고 그들을 함몰시키고, 그들을 덮쳐버린 거예요. 그들은 말려든 겁니다.

너희들은 표적을 모르고 그저 기적만 원하는 인간들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들한테 버림받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신과 메시야, 중보자, 성경 해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게 왜 그러느냐, 너희들은 영이 아니고 육이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 63절 한번 읽어보세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육과 영이라는 아주 독특한 개념이 나와 버렸어요. 이 육은 물론 인간의 신체를 포함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포함하는데 신체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란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황을 가지고 육이라고 이야기해요. 중보자와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또는 말씀, 언약과 끊어진 상태를 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서 뭐라고 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이걸 제가 봉합선 없는 구형 체라 한 거예요. 그냥 육으로 난 건 육이다. 돼 버리면 이렇게 하나의 평지가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구형 체, 이걸 둘둘 말은 거예요.

주일 낮 설교에 둥근 반죽이라 했는데 창조할 때 둥그런 반죽을 만들었어요. 둥그런 반죽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의가 저기 있느냐 할 때는 어떤 평지 같으면 우리가 여기 있으면 ‘이쪽에 문제 있구나. 이것이 여기가 오물이 있네. 여기 얼룩이 있네.’ 지우면 되지만 이 반죽이 돼 버리면 누룩이 커져 버리면 이건 내가 당사자가 되니까 누룩의 영향력의 결과물이 바로 나니까 누룩을 빼내려면 누굴 빼내요? 나를 빼내야 돼요. 나를 빼내야 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할 때 그걸 평지로 보세요. ‘쟤는요 나빠‘ 이러지 말고 이걸 누룩 차원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보자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누룩 차원으로 보는 게 아니고 어떤 평평해서 ‘나는 괜찮은데 저쪽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 있어. 근처도 안 가야지.’라고 어떤 거리감을 형성을 해요. 그러면 그것은 세상을 창조할 때 이렇게 누룩으로 본 게 아니고 어떤 주체 앞에 대상 가지고 네가 어떻게 조정만 잘하면 죄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오해가 돼버리는 겁니다.

사실은 기독교 역사 해석을 다 그렇게 했죠. ‘정신 바짝 차려라. 그러면 너는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요? 우리가 누구 자식인데 정신을 바짝 차려요? 누구 자식인데. 아담의 자식이 정신 바짝 차리면 차릴수록 점점 더 아담 되지, 괴물 되지 뭐 있어요? 차라리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게 낫지, 정신 바짝 차리면 점점 더 아담을 닮아 가는데.

왜 성경을 그냥 어떤 교훈적으로 보고, 명심보감 같이 그렇게 보기 때문에 들여다보고 지키고 이러면 되는 줄 알았어요. 이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옛날 이스라엘이 말씀을 그렇게 봤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이 전체가 누룩을 발췌하기 위해서 어린양이 개입한 그 세상입니다. 누룩이라는 것은 어린양이 개입하지 않으면 누룩이 밝혀지지 않아요. 누룩은 뭐냐,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밀치는 어떤 반항심, 이런 게 누룩 속에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 자존심을 건드리시면 저는 더 이상 주님과 함께 사귈 생각 없습니다. 이런 게 누룩이 되는 거예요. ‘주여 일처리를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할 때는 이만한 혜택은 주셔야죠’ 이게 누룩입니다. 그게 육이 되는 겁니다. 육.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육은 스스로 살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영으로 살리거든요. 그럼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살린다 하면 되는데 왜 영으로 살린다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살린다 해봐야 명료하게 예수님이 눈앞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나 같은 육이 나 같은 신체를 가진 분이 당신이다. 이렇게 돼 버리면 예수님과 자기 합해서 전체가 하나의 전체가 돼 버려요. 전체가 돼 버리면 예수님도 전체 일부가 되고 우리도 일부가 되기 때문에 둘 다 폐쇄된 공간에 함께 놓여있는 셈이 돼 버려요.

따라서 예수님을 영으로서 폐쇄된 공간을 벗어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봐도 예수님을 모르게 돼 있어야 그게 육의 제대로 된 육다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주께서는 그렇게 해서 육 됨을 들추어내죠. 그래서 주님께서 가니까 사람들이 쫓아옵니다. 쫓아오니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여기 25절 봅시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여기서 떡을 먹고 배부르다는 것은 두 자로 하면 기적이고 주님께서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기 때문에 우리 임금 삼으려고 여기까지 따라왔잖아요. 하니까 너희들은 지금 기적을 원하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라는 겁니다. 표적과 기적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차이점이 뭐냐 하면 기적이라는 것은 과거에서 익히 알던 것이 만족스럽게 달성될 때 기적이 되고, 표적이라는 것은 장차 때가 될 때 소급해서 ‘하하, 그랬었었어. 그런 경우였나. 그런 이야기구나. 물이 포도주 되는 그게 포도주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예수의 피를 포도주라고 하는구나, 아하, 46년 지어진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은 예수의 몸을 두고 이야기한 거네.’ 하고 주님의 때가 표적이 되어서 소급해서 그 해석이 다시 덮쳐질 때 그게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전체가 기적이 아니고 표적입니다. 살은 거 감사하자 말고 구원 받은 거 감사해야 돼요. 구원 받은 거 감사하면 표적이고, ‘아이구, 오늘도 밥 먹여줘서 감사합니다.’ 하면 이건 기적이고, 그래서 교회 가면 간증하다 보면 전부 다 기적 이야기하지 표적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제가 암 걸렸는데 기도하니까 나았습니다. 이건 원상회복 시켜줬다는 기적에 속한 것이고, 이걸 표적으로 간증하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저처럼 제발 암 걸려서 사람이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고 예수님만 중요합니다. 그거 아세요.’ 이러면 표적이 되는 것이고, 표적은 돈 안 되고 기적은 돈이 되고 그렇겠죠.

허 운석 선교사님이 기적 이야기하다가 표적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별 이익이 없었던 거예요. 아마존 선교하다 돌아가신 분인데. 은사주의로 나갔기 때문에 ‘기도하면 이런 결과가 주어집니다. 믿어주세요.‘ 하시다가 예수님 십자가만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능력만 구원받습니다. 로 마지막에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기적의 사람에서 표적의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 사람, 자기 잘 되는 사람에서 주님 안에 섞여 들어간, 주님 안에 그만 섞여서 본인이 사라져버린 사람 이예요. 그렇게 되는 거죠. 주께서 그렇게 하셨겠죠.

27절 봅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렇게 돼 있죠. 그러면 썩는 양식 왜 주셨는데? 이 오병이어를 안 주고 이런 이야기하면 이해가 되는데 본인이 줬잖아요. 설에 만두하고 떡하고 잡수라고 본인이 줬잖아요. 줘놓고 먹지 마라. 그 썩는 거 왜 먹습니까? 줘놓고 왜 먹지 말라하니. 그러면 주지 마시든지. ‘네가 이 땅에 출세하지 말고 네 시민권을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을 생각하라.‘ 그러면 이 땅에 태어나지 말게 하시든지. 그래야 앞뒤가 맞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따지죠. 그거 따질 때 뭐를 놓쳤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되느냐, 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모든 일은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내 사이에 중보자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잘못 이예요. 중보자는 뭐냐 하면 중보자는 중보자가 드러나고 그 다음에 중보자가 필요한 사람은 중보자가 따로 생산해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만들어내는 것과 기존의 인물과 이게 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어디를 가느냐 하면 66절에 봅시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그 다음에 뭡니까?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드디어 주께서 성공하신 거예요. 주께서 구원에 성공하신 겁니다. 왜냐 하면 주님의 자신의 구원됨에 성공하신 거예요. 주님의 구원됨에 성공을 해야 없던 새로운 성도가 생산됩니다. 우리는 안 받아주거든요. 안 되는 것을 구원해 달라 하지 마시고 주께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게 되면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이 거기서 주님이 성공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될 사람, 새로운 피조물 될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나타나게 돼 있어요.

따라서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예수의 피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데 그 안의 내용이 뭐냐 하면 피도 들어있고 언약도 들어있고 십자가도 들어있고 이런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랑도 들어있고. 믿음 소망 사랑이 다 들어있어요. 믿음 소망 사랑이 우리의 노력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고 이게 선물입니다. 은사에요.

아까 햄버거 봤죠? 소망, 샌드위치 봤죠. 이거 믿음, 이거 물 있죠. 이건 사랑, 전부 다 제공된 거예요. 그걸 요번에 민수기 수련회 하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대청마루가 있는데 경복궁인가 경회루인가 대청마루가 있는데 여기에 격자무늬에 햇빛 비추니까 그 대청마루에 얼룩덜룩 무늬가 있는데 격자무늬가 비취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대청마루고, 그 예수 그리스도 격자무늬는 이건 십자가에서 우리 몸을 얼룩덜룩하게 십자가로 완전히 디자인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주의 영광을 위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디자인이 그렇게 디자인 됐기 때문에 그런 무늬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힘든 명령이 뭐냐 하면 ‘문신아 떠나거라.’ 이런 명령이 제일 힘들어요. ‘타투야 떠나거라.’ 타투가 문신이거든요. 문신이 어떻게 떠납니까? 내 몸에 새겨진 건데. ‘나 예수 안 믿는다.’ 이게 어떻게 돼요? 내가 믿을 거 같으면 안 믿으면 되는데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어요. ‘열심히 믿습니다.’ 하면 그런 인간 다 떠나게 하기 위해서.

미국 뉴저지에서 강의했지만 첫 번째 강의가 뭐냐 하면 “내가 저주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끊어진다 할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로다.” 그 대목 가지고 1시간 동안 강의를 했어요. “내 동족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제가 원합니다.“ 할 때 어떤 사람은 그 이야기 나오기도 전에 성경을 보고 아멘, 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했어요. 진짜 아멘 하실 거예요? 동족을 위해서 나 지옥 가도 좋다. 그런 뜻입니까? 사도바울이 구원받고 안 받고가 내 결심으로 얼마나 빡세게, 얼마나 침해 안 걸리고 반드시 진짜 죽을 때까지 쥐느냐, 이걸로 구원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주께서 끝까지 하신다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이 믿음조차도 주께서 선물로 그냥 주신 거예요. 그게 자기 안에 내장돼 있으니까.

아니 주님도 버림받았는데 본인도 버림받으면 어때요? 주님도 뭐라 했습니까?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영원히 저주받아서 지옥 갔습니까? 사흘 만에 되살아났잖아요. ”아버지의 뜻이라면 맘껏 사용하시옵소서. 다 이 무대를 드리겠습니다. 이 무대에 뭘 장치하든지 뭘 배치하시든지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이번 주일 날 설교했던 거.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제가 그 설교하면서 거기서 하나의 포인트를 준 것은 뭐냐 하면 사울이란 사람은 주께서 찾아왔고 아담도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왔지만, 백부장은 뭡니까? 찾아온 사람도 없는데 본인이 이렇게 보지도 않고 믿어버렸어요. 그게 바로 말씀의 영향 때문에. 이 세상의 말씀의 그물망, 아주 촘촘한 말씀의 그물망에 의해서 구원될 자는 이방이라도 구원되는데, 말씀의 초점은 뭐냐,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그걸로 초점이 모이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이렇게 초반부를 시작하지만 전체를 우선 제가 훑어드릴 필요가 있어요. 왜냐 하면 자칫하면 하나를 보게 되면 전체를 놓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여기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이렇게 원 안에 원을 그려요. 어떤 정해진 구역을 그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이쪽이고 우리는 이쪽이다. 이렇게 평평하게 그려버리면 둘로 나누인 구역이 되지만 예수님은 전체를 살리고 전체 속에 또 낯선 전체가 들어와 버린다 말이죠. 요 들어온 이 전체를 가지고 어려운 말로 이걸 비-전체라 하는 겁니다. 아마 이게 인간 용어 중에 제일 어려운 용어에요. 비- 전체가.

그래서 이 비-전체를 약간 언급은 했죠. 민수기 할 때. 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해도 들어도 모르겠는데.ㅎ 비-전체를 설명할 때 손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남자와 여자를 설명할 때 여자를 비-전체에 속하고 남자를 전체에 속해 버리면 이것이 얼추 비슷하게 돼요. 남자는 전체를 항상 자기가 다 점령하고 다 가져야 돼요. 그래서 여자라 하는 것은 내가 구상한 이 세계에 여자는 돕는 자가 되어야 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돕는 자. 그래서 남자는 최종 기표가 되고 제일 대표적인 표시가 되고, 여자는 보조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있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어떠냐 하면 남자가 이 전체를 만들어 놓고 여자를 한 부분으로 하게 되면 여자는 뭐냐 하면 그 남자의 전체를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혼자 놀고 있네.’ 아무리 남자가 여자를 다 잡아먹고 점령해도 뭔가 남아있는 아우라 같은 게 있어요. 신비로운 게 있어요. 아무리 차지하고 고분고분해도 여전히 빠져나간 부분, 그게 여자에요. 그래서 비-전체에요.

보통 전체의 반대말이 뭡니까? 부분이잖아요. 남자는 여자에게 내 부분이 되기를 원하는데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 비-전체가 돼요. ‘나 네 말 안 들어.’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네가 구상한 그 질서에 대해서 나는 상관없어.’ 그러면 남자는 ‘그 너 나름대로의 질서를 내봐’ 이러잖아요. 여자는 나름대로 질서가 없어요. 여자의 질서는 뭐냐, 남자가 만들어 낸 질서에 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게 질서에요. 그래서 여자는 남자 없이는 안 돼요. 여자는 남자 없이는 안 되는데 남자한테 다 삼키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누가 애를 다느냐 하면 남자가 애를 달아요. 아무리 꼬시고 때려도 안 되고 뭘 해도 내 것이 안 돼요. 꼭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다 빠져나가지 않아요. 다 잡았는데 제일 중요한 게 내 손에 안 잡히네. 여자는 갈망의 대상 이예요. 남자의 갈망의 대상. 이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분명히 남자가 가장 이예요. 그러나 구원은 여자를 통해서 구원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구원하죠.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는데 무시당한 여자가 남자가 꿈도 못 꾼 구원의 통로가 돼 버립니다. 여자가! 그러면 여자는 대우받나? 천만에 대우 안 받아요. 계속해서 무시당해요. 대우 받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여자가 아니고 남성의 부분으로서 남성이 원했던 여인상으로서의 대우 받죠. 그게 남성들이 원했던 거예요. 존중해줄 테니까 내 말 잘 들어. 이렇게 돼요. 주고받는 거래 때문에. 이야기가 남자, 여자 이상하게 됐네. 정신 차려.

바로 이것이 여자의 후손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우리하고 관계됐습니다. ‘목사님, 주님하고 동행하면 되잖아요?’ 동행하면 되는데 동행할 때는 되는데 그 다음에 소유는 안 돼요. 우리가 주님을 소유할 수 없어요. 빠져나가 버려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이야기는 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아는 순간 예수님은 빠져나가고 없어요.

기도하면 들어준다고요? 들어주죠.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거. 우리가 원하지 않은 걸 주시죠. 뭘 그럼 채워주십니까? 그건 주기도문에 나와요. 주기도문의 핵심은 뭐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용서에 관한 겁니다. 우리가 용서 받지 않고서는, 의인 되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가요. 돈이 있고 뭐 건강하고 소용없습니다. 용서 받으면 다른 걸 다 잃어도 괜찮아요. 주기도문의 내용이 그거거든요. 용서해 주는 게. 주님께서 죽으신 것도, 주님께서 피 흘린 것도 바로 우리 죄와 관련돼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지 말고“ 이렇게 하신 이유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할 때 썩은 양식의 요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느냐? 나중에 다 떠나버릴 남자만 5천명들이 무슨 역할을 하도록? 썩은 양식이란 요 역할 하도록 위해서 이 영화의 엑스트라로, 보조 출연한 거예요. 이 사람들이. 와서 먹고 떠나라. 그리고 썩은 양식 잘 가라. 너희들이 있어줘야 썩은 양식 아닌 다른 양식이 있음을 너희를 통해서 반대급부로 다른데 주께서 소개할 수 있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썩은 양식을 원한다. 요걸로 정립되는 겁니다. 이제는 큰 과제가 남았습니다. 어떤 과제? 썩은 양식만 얻는 인간에게 무슨 수로 영생할 양식을 심어주느냐? 이 중차대한 이 작업이 남았어요.

인간들은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자기가 원했던 과거에 미흡한 것을 미래에 채우기 위해서 그것 때문에 메시야를 줄기차게, 악착같이 따라오거든요. 계속 추궁한다 이 말이죠. 그게 썩은 양식이거든요. 본인이 썩었기 때문에 썩은 양식, 썩은 양식 원하는 자에게 무슨 수로 그에게 영생을 줍니까? 이건 타협도 안 되고 협상도 안 되죠. ‘떡 내놔라’ 하는데 주께서 살과 피 내놔버리면 이게 무슨 대화가 돼요? 이게 안 되잖아요. ‘이 딴 거 왜 주십니까? 이 딴 거 말고 내가 원하는 거 달라니까’ 이렇게 나올 때 ‘그거 없다. 이거 먹어라.’ 하면 우리 대화 이걸로 끝. 하고 헤어질 건데 그러면 천국에 단 한 명도 못 갑니다. 갈사람 없어요. 몽땅 다 썩은 양식만 원하니까.

이 불가능한 과제를 주님께서 떠맡았어요. 주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이제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야 될 그 과정이 드디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이 이제 개시가 되죠. 그 과정을 담당할 전임자가 바로 예수님 본인이 그걸 합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잖아요. 믿음이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믿음마저도 선물로 줘야 돼요. 믿음 없는 인간 믿음 심어줘. 꼭 임플란트 같아. 임플란트 할 때 이빨에 바로 얹지 않죠? 뭔가 밑에 먼저 꽂는 거 꽂아 놓고 위에 몇 개를 얹고 하잖아요.

기초부터, 믿음부터 이렇게 다지고 난 뒤에 거기 믿음에 대한 ..를 얹듯이 썩어있는, 일종의 부산 같은 경우에 해변 가기 때문에 모래사장이잖아요. 그러면 아파트 질 때 어떻게 합니까? 온 데서 흙을 덤프트럭에 싣고 와서 다지고, 다지고 해줘야 80층, 90층짜리 아파트가 안 무너질 거 아닙니까?

그처럼 썩은 데에다 썩은 줄 알면서도 뭘 집어넣어요? 안 썩는 기초를 여기다 꽂아야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을 주께서 이제 해나가십니다. 오라 하는 데는 없지만 갈 일은 많다고 주께서는 바빠요. 여기 한번 봅시다.

여기 28절 봅시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일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의 일을 전담 받은 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거 하기 전에 아까 12절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그러면 양식을 먹는 것은 인간들 보기에는 자기 식사 시간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벌써 아버지 일이 시작된 거죠. 아버지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 일은 그냥 버리면 안 돼요. 여기 반드시 성취가 마무리 져야 돼요. 다 남기고 이걸 거둬야 돼요. 거둔 것이 몇 광주리 남았어요? 열 두 광주리죠. 열 두 광주리는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드는 식으로 영생 줄 자를 만들어내시는 방식을 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께서 영생 줄 자를 어떻게 만드는가? 구약부터 새로 다시! 구약부터 새로 합니다. 구약이 여기서 개입합니다. 처음부터 요한복음은 구약부터 시작하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의 그 말씀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공생애 안에 신, 구약 다 들어있다 했죠? 구약 말씀이 응축이 돼서 딱딱하게 응축이 됩니다. 콩을 갈아서 뭉쳐 놓으면 뭐가 되죠? 비지가 되죠. 비지 아시죠? 주님은 콩비지, 말씀이 뭉쳐진 거예요.

따라서 어떤 말씀, 마태복음 어떤 말씀이라도 하나 어기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 공로 아니면 구원 못 받죠. 왜냐 하면 예수님 자체가 콩비지이기 때문에. 콩비지를 짭니다. 짜면 뭐가 나와요? ‘다 이루었다’의 피가 나오죠. 그 피가 참기름 이예요. 이야기가 이상한데, 오늘 식품 회사 왔으니까. 콩비지 짜서 피가 나오면 그 피가 말미암아 피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모든 하나님의 의가 다 들어있어요. 말씀을 완성했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말은 죽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율법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예수의 죽으심을 아예 차라리 모독하려면 그런 짓 하라 말이죠.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잖아요. 이제 와서 율법을 거론하다니. 그러면 이 십자가 피 흘린 게 무슨 의미냐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안식일 지키고 뭐 십일조, 절기를 지켜? 너희들은 그거 지키다가 복음에서 떠날까 내가 염려함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갈라디아 4장에 보면. 그걸 왜 지킵니까? 그거 왜 지키느냐? 갈라디아서 보니까 왜 지키느냐 하면 자기 행함, 자기 사적인 잘남을 드러내거든요. 그렇게 잘났으면 네가 알아서 구원하지, 왜 십자가를 믿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 믿어주는 것도 자기가 잘났어. 십자가 믿어줘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믿는 게 결국 뭐가 됐어요? 율법이 되고 만 거예요. 율법이 신약에서 늘어나 버린 겁니다. 세상에! 이런 악의적인 해석이 어디 있어요? 어떤 목사는 구약에는 십분의 일만 했는데 신약이기 때문에 더 많이 해야 된다고 십 분의 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예배당을 얼마나 크게 지려고 그 짓하고 있어요.

십일조 있어요. 안식일 있습니다. 그런데 콩비지 속에 들어가서 그걸 짜보니까 피가 됐다니까요. 피 안에 뭐가? 예수님이 십일조고 예수님이 안식일 이예요. 그 피 안에 다 들어있어요. 피만 믿으면 그게 하나님의 의가 돼요. 피 나타난 걸 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게 돼요. 마지막 저주 받는 이 심판 받는 마지막 진노의 날에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그건 율법 말고,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그건 화목제물,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다한 의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신앙생활에서 신앙을 빼세요. 그럼 뭐 남아요? 그냥 살면 돼요. 누구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살려주는데? 주님이 주님 이미지를 디자인을 가지고 이거 창덕궁에다 격자처럼 얼룩덜룩한 주님의 은혜가 얼룩덜룩하게 묻히면서 드러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할 때 말씀 가지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죠. ‘아! 이 말씀이 지금 이 형편이구나.’ 생활비가 없었는데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아, 이제야 생각나네요. 아, 성경 말씀 내가 놓쳤는데 생활비가 떨어지니까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집에 아직 먹는 거 있으니까 설 선물로 온 만두가 아직 남아있으니까 이걸로 족하다. 왜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 있어요? 무슨 양식? 일용할 양식, 일용할 양식만 주면 되니까. 감질나죠. 일용할 양식만 주니까. 만나 안 끝났어요. 지금이 광야라는 겁니다. 주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너는 양속의 땅이고 천국이고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너희들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데 너희는 세상 보고 바뀌라고 자꾸 우기고 칼로 대사 찔러 죽이고 하는데 죽지는 않았는데, 네가 바뀌어야지. 네가. 사람 사는 게 억지, 모든 게 너무 억지니까 스트레스 받잖아요. 스트레스 받으니까 암 걸리고 하는데 왜 억지냐, 자기 시간을 자기가 만든 연출한 시간을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 자존심이 다 담겨 있고 체면과 위신과 가문의 영광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만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식구들에게 이걸 강요를 하게 돼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아느냐.’ 이렇게 강요를 하다 보니까 서로가 서로를 교육하고 서로가 제한시키고, ‘우리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니까 교회 나가라.’ 이것도 하나의 뭐에요? 주님 영광도 아니고 자기 영광이죠. 체면 유지죠.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만나가 되시고 살과 피가 되기 위해서는 마귀가 필요하고 육밖에 모르는 우리가 고맙게도 꼭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해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의 막 사는 것이 주의 일에 꼭 필요해요.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면 되느냐 하면 이 고백을 하면 됩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하던 모든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라고 동의하면 돼요. ‘제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목사 짓하고 하는 모든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라고 죄인의 괴수로서 본인을 재료로서 사용하게 되면 그걸 가지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일은 내 담당이다 해서 주의 일을 해버려요. 재료는 우리가 제공하고 일은 안 되는 일을 믿음도 없는 것을 믿음 되게 함으로써 모든 공로와 은혜를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 이예요. 죄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필요 안 해도 뻔히 살아가면 죄인 되지만.

이거 하면서 중간에 놓치기 쉬운 게 있어요. 뭐냐 하면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그 다음에 놓치는 게 있어요.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뭘? 도장, 도장이죠. 인 쳤다. 도장 찍은 분이다. 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이 당시 오병이어 사람들은 ‘메시야입니까?’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는 기적을 행할 때만 메시야라고 자기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규정을 일방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너희들이 너희 규정을 가지고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그것이 예수님의 인 치심을 드러내는 조건이 되고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 같으면 막 때리고 ‘똑바로 하란 말이야, 그렇게 밥을 많이 주고 떡을 많이 줘도 먹어도 진짜 모르지? 이래서 구원받겠어?’ 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꿇어 앉아.’ 이렇게 할 건데 너희들이 나를 오해한 그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나의 인치심이 제대로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라 하는 것은 죄 속에서 의가 나오게 돼 있어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안 나오게 돼 있습니다. 죄를 지어보세요. 의 나오지. 아무나 나오는 건 아니고. 성도에게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죄 속에서 의가 나옵니다. 따라서 그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해요. 어떤 방법으로? 말씀으로 해요. 말씀을 주게 되면 전에는 이게 옳다고 했다는 것도 말씀에 깊이 들어가 보니까 아니 그것마저 죄라면, 도대체 내가 그러면 의로운 게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가끔 짜증날 정도로 아주 바닥을 긁어. 그런데 그 바닥을 긁어봐야 소용없어요. 또 누룽지 또 생겨요. 꼭 발바닥 뒤 굳은 살 같아요. 굳은 살 생기면 긁어내면 또 생기듯이 자꾸만 어디서 나오는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지 자꾸만 이게 올라와요. 그런데 죄가 있어줘야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실 때에 즉결 재판을 하잖아요. 간이 재판. 그 자리에서 재판을 해버렸어요. 올 재판을. 너는 죄인이고 너는 의인이야‘라고 재판했습니다. 누가 죄인이냐 하면 바로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하고 구제하고 이런 바리새인은 지옥 가버리고, 누가 구원받았습니까? 세리죠. 그걸 수시 모집이라 해요. 저 뒤에서 고개도 못 들고 ’제가 죄인입니다.‘ 할 때 ’네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받아주잖아요.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성전에 죄인이라고 몰려드는 사람 많이 나올 거예요. 다 탈락입니다. 듀상이란 사람은 세계 최초로 욕조나 이런 거 파는 가게 있죠? 인테리어 파는데 가서 남자 소변기 하나 들고 와서 전시장 한복판에 거꾸로 해놓고 ‘샘’이라는 이름을 했습니다. 장소만 옮겨놓으니까 그게 세계 유명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장소가 가게 있느냐, 전시장에 있느냐, 달라져요.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꼭 우리 성도 같아요. 우리가 우리 손에 다루어지면 이건 자기 자랑만 나오고, 내 자랑만 나오는 요것이 주님이, 그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 하는데, 주님 손에 잡히니까 이것이 세상에 의가 나오네. 주님이 뽑아낼 것 다 뽑아내요.

말씀으로 죄인 되고 의로 건지시고 말씀으로 주시고 의로 건지시고. ‘주님 덕분에 제가 부자 되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 ‘네가 반석이 중요한 거야.’ 하시면서 다시 마태복음 7장을 다시 깨닫게 하는 거예요. ‘너는 껍데기만 좋아하지 말고 네 반석을 봐. 네가 모래 위에 집이 지었어.’ 이걸 새삼스럽게 새롭게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그저 이렇게 핍박을 받아서 억울해요.’ 하면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이런 거예요.

항상 말씀으로 뭔가 됐다 생각하면 말씀이 들어와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너를 다루어서 너를 작품 만들어서 네 힘으로 천국에 납품하는 게 아니고, 천국에서 이미 납품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께서 인간 바꾸는 작업을 주께서 해줘야 결국은 ’모든 공로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그 말씀처럼 요새는 교회가 거꾸로 돼 가고 있습니다. 방향이.

인 쳤다는 말이 어려운데 인 쳤다는 말은 구약 용어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인 쳤다는 말은 도장 받았다 이건데 도장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게 계시할 때 이게 감추어진, 이거는 전체 속에 포함되지 않은 비-전체란 뜻입니다. 이제 비-전체 이해하시겠죠? 인 쳤다는 말은 우리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만 특별난 사람이다. 특별난 사람인데 전혀 특별난 구석을 찾아봐도 너는 찾지 못할 정도로 특별난 사람, 왜,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너무나 평범하기 때문에! 평범하기 때문에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서 주께서 특별나다고 했을 때 우리는 졸지에 인 치심을 포위하고 있는 그런 입장과 예수님과 차이나는 사람이 돼 버려요.

일은 누가 한다? 인 치심 되신 메시야가 하고, 혜택은 누가 본다? 인 치심에 의해서 혜택 보는 사람은 그 주변에 모여들게 돼 있고 그래서 구원의 방법은 뭐냐, 예수님만 머리가 되고 우리는 지체가 되는 그 방식을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개시를 했다는 것이 ‘나는 인 쳤다. 너는 아니다.‘라고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자, 일 시작, 자, 일 해야지. 일 해야지, 이제.’ 이런 뜻 이예요. 어떻게 하느냐, 예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했죠. 예수님이 인 쳤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못 알아들어요. “저희가 묻되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돼 있어요.

자, 원을 봅시다. 여기 원을 치고 또 동그라미를 쳐봅시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바깥의 원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할 때 우리 큰 원에서 작은 원을 이해합니까? 이해 못 합니까? 이해 못하죠. 왜 육이니까. 영은 육을 살리고 육은 육일뿐이고, 육에서 영을 뚫을 수 없어요. 결국 이 사람들 다 떠나니까. 떠나도 이만큼 혜택주고 빵 주고 떡 주고 거기다 이만큼 이야기해주고 백날 해도 예수 안 믿죠.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데. 뚫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됩니까? 할 때 이게 비-전체거든요. 비-전체가 이 전체라고요. 전체에 포함돼 있는 흉터 같은 비-전체, 흉터, 안 좋은 거죠. 우리로서는 흉터는 안 좋잖아요. 빨리 봉합하든지 해야 되는데, 흉터, 흉터니까 찢어진 거죠. 이 비-전체에 의해서 이 전체가 다 하나님 일에 포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행합니까? 했을 때 어떻게 행합니까? 할 때 주님의 답변이 뭡니까? 이렇게 행하라고 하지 않고 뭐라 합니까? 믿으라고 이야기했죠. 믿으라 하는 것은 이쪽에는 비-전체가 흘러넘치는 거예요. 그릇이 넘쳐서 얼마 전에 칠레인가 페루에 화산이 터졌잖아요. 화산에 화산재가 넘치듯이 주님의 행함이 곧 믿음이 되게 그렇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네가 믿지 말고 주님의 행함으로 믿어지는 믿음과 네가 행해서 네가 믿고자 하는 믿음과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그 차이를 보라는 거예요.

내가 믿는 것과 나로 출발해서 ‘내가 믿씁니다. 믿씁니다.’ 나로 출발해서 믿어지는 그 내용과 주께서 믿어지게 하는 내용과 그게 차이가 육과 영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그 차이를 느낄 때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포섭된 사람이고, 포함된 사람이 돼 버려요. 그 예가 6장, 7장, 계속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예가 미리 이야기하면 9장에 소경 나오죠. 그 소경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불러 세우잖아요.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할 때 “자기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 거다“ 했는데 본인은 영광이 뭔지 몰라요. 그냥 본인은 신앙생활 않고 그냥 살아요. 소경 된 채 그냥 살았는데 주께서 이걸 다루었죠. 다루니까 결국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까지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체가 예수님의 행함으로 완전히 덮어씌워진 거예요. 석고로 2층에서 부은 것처럼 물 확 부은 것처럼 온 전체가 주님의 행함으로 넘칠 때 그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한다 말이죠. 주의 믿음.

그러면 그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또 자기 믿음을 내놓겠죠. 자기 행한 거. 그러면 그 차이를 보자 말이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명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제가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그 간음하던 여인이 용서받을 때까지 간음한 여인이 한 게 뭐가 있죠? 그냥 간음했죠. 그냥 용서가 덮쳤죠. 용서가 덮친 순간 그 사람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가 뭘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자유롭게 살란 말이 아니고 네가 뭘 해도 그게 자유의 영향력 안에서 이미 죄에서 빠져나왔다는 증거물로 다루어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뭘 해도 용서받았다는 방향으로 가게 돼 있어요. 모든 게 용서받았다는 티를 내게 돼 있어요.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한테 돌아왔잖아요. 그럼 탕자가 거기서 10년 살고 20년 살고 그 산 모든 삶이 뭐가 되었어요? 용서받은 삶이 되겠죠. 그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인 치셨기 때문에 인 쳤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 중심이라 했죠. 계시를 독점하고 있으니까 그 계시를 주께서 달걀이 있으면 달걀을 깨뜨려버리면 내용물이 퍼져 나오는 거예요. 퍼져 나오면 인 치심의 영향을 입게 되면 그 사람도 성령의 인 치심을 받게 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이 와서 전부 다 인치시고 주의 일에 합류시켜서 구원 마무리까지 구원 마지막에 영생 얻는 것까지 주께서 다 하게 하셨으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죠.

그런데 아까 꼼지락이란 말 했죠? 이걸 놓치면 안 돼요. 꼼지락! 그런데 그 일이 지금 같으면 믿어지는데 또 돌아서게 되면 집에 가서 잘 때 보면 또 남편 술 먹고 오면 한바탕 하다 보면 이 꼼지락이 나와요.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왜 아직까지 술 못 끊고 있느냐?’ 하고 또 자기 행함을 내세우고 ‘주여 이렇게 내가 남편을 위해서 했습니다. 남편도 개과천선해서 깨우침이 있어야죠.’ 하는 어떤 내 믿음이란 결과를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놓쳤던 육이 다시 육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육은 늘 있어줘야 돼요. 늘 생겨나야 돼요. 이게 장단이 맞아서 퉁퉁, 탕탕, 농악의 국거리에 장단이 있거든요. 길게 하면 길게 하고 끊을 때는 퉁탕, 장단이 맞아야 좋지, 우리는 죄 짓는 것을 치면 주께서 의로 맞받아치고 이게 있어줘야 동행이 된다니까요. 최 성수의 동행. 누가 나와 함께 가리요. 이렇게 돼야 돼요. 일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에게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했잖아요. 이게 뭡니까? 네가 지금 믿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원하는 길로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심지어 베드로도 그렇게 됐는데 우리는 가만 둡니까? 안 두죠.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의 싸움은 나의 구원의 싸움이 아니고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 싸움! 우리 대장 주님이 주님 대장만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졸개로서 대장의 요소를 품고서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겁니다.

뭐 반찬 뭐 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딴 건 다 좋은데 그 십자가 복음은 믿지 마라.’ 이런 식으로 공격이 오죠. ‘네 앞가림도 못하면서 돈도 못 벌면서 무슨 복음만 찾노.’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돈을 얼마나 벌어줘야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돈을 법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도대체 얼마나 잘나야 복음에 합당한 축복이 되겠어요? 그걸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야말로 병든 자, 저는 자, 이런 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현재 우리가 멀쩡해도 언제 우리가 병들지 모르고 언제 절름발이 될지 모르고 귀머거리 될지 몰라요. 하지만 주님의 디자인이라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이 이미 개시했답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따로 주의 일을 한다고 나섰지만 이제는 합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일이 곧 주의 일인 것을 이제는 행하지 말고 인정케 하여 주시옵소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6장15(기적과 표적)150305b-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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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7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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