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총9강) - 재재정리
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총9강) - 재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창세기) - 셋날 오전(끝)
(강의 : 이근호 목사) (정리 : 서경수 목사)
이제 마지막 시간인데, 먼저 창세기 24장을 보겠습니다.
(창 24:52)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리어 여호와께 절하고
(창 24:53)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창 24:54) 이에 그들 곧 종과 종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가로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창 24:55) 리브가의 오라비와 그 어미가 가로되 소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창 24:56)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창 24:57)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창 24: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창 24: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을 보내며
(창 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
여기 60절에 보면,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고 하는데, 여기 나오는 '천만인의 어미' 라든지, 혹은 '원수의 성문' 이라든지, 그리고 지난 시간에 했던 '잉태치 못한 여인', '할례', '피의 제사' 등등, 그런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그리고 창세기 48장에 가면, 야곱이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손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어긋맞게' 라는 것은, 축복이 저주가 되고, 또한 저주는 축복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죠. 팔을 곧 바로 해서 축복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는 겁니다.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창 48: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창 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핵심적 단어들이 창세기에 분명히 있는데, 우리는 자꾸 놓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관점에서 성경을 보기에 말이죠. 그래서 이런 단어들을 하나로 모아보자는 것인데, '잉태치 못한 여인', '할례', '피 제사', '여자의 후손' 등을 말이죠.
'차단성'을 가족의 몸에 새겨라 !!
여기서 "할례를 행한다" 라는 것은, 여자로 하여금 남편이 없는 여자로 만드는 것이죠. 사라에게 분명 남편이 있는데, 즉 아브라함이 있죠. 그런데 사라를 남편이 없는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는 겁니다. 할례는 차단성인데, 즉 "생명나무로 갈 수 없다" 라는 차단성을 가족에다가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모세를 보고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바탕과 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인데, 즉 "이 땅에서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할 존재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구원받을 생각은, 그런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죠.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그러면 성경은 왜 있습니까? 자기 누이동생이 결혼을 하는데, 라반이 "네가 원수의 성문을 얻으리라" 라고 나오면, 그게 과연 결혼을 하려는 누이동생에게 할 말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전쟁용어인데, 자기 동생이 무슨 잔다르크도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왜 '원수의 성문' 이라고 하는 험악한 말을 사용하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전체의 의미가, 그것이 뭔가 우리로 인해서 가려져 있다는 겁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면, 성경 본래의 의미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본다고 하면, 성경을 천독을 하든 만독을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마치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면 그 카메라에는 자기 얼굴만이 보이듯이,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들이미니까, 자기만 보이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 잘난 것을 보고 있는데, 그러니 성경에서 그 잘난 낯짝을 치워야 한다는 말입니다(ㅋㅋ).
물 없는 정원의 '돌' !!
이것을 쉽게 설명해드리면, 20세기초에 일본에서 '물 없는 정원' 이라는 것이 나와요. '여백의 미' 라고, 자연을 통해서 참선을 하는 것인데, 즉 정원에 물은 없고 대신 모래가 있고, 돌이 몇 개 놓여있다는 말이죠. 자연을 통한 여백의 미가 나온다는 겁니다. 마치 독도처럼, 그렇게 돌만 덩그러니 놓여있어요. 일본의 이러한 요소와 민화 등이 20세기 유럽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반 고호 등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물 없는 정원에 놓인 돌을 우리 자신이라고 하면, 자기밖에 모르는 말이죠. 바로 이러한 돌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그 뒤처리를 해주시는, 그 일을 잉태치 못한 자의 후손인 메시아가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성경을 볼 때, '나' 라는 존재를 카메라에 갖다대니, 돌 사이를 누비고 다니시는 이분의 흔적은 전부 제거되고 말았죠. 그래서 성경을 천독해도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 정원에 놓은 돌들이 바로 이삭, 야곱, 12 아들 등등, 이런 자들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를 보면, 에서든 야곱이든 간에 자기 살 길을 찾아서,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몸부림치고 있어요. "누가 장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을 것인가? 누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가? 그놈을 죽이자" 라고 하면서, 10명의 아들이 합세해서 그만 요셉을 죽여버렸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산 제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피 제물인데 말이죠.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을 잡아죽이는 사건을 주었는데, 그것이 언약의 요소거든요.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이 역시 언약의 요소인 것처럼 말이죠. 노아가 물 심판을 대비해서 방주를 만든 것처럼,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아브라함의 구원근거를 마련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왈(曰),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산다' !!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후애 나오는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죽는다는 이야기가 똑같이 나와요.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째로 이야기가 바로 '산 제물' 인데,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즉 "살아있는데, 이것이 제물이 된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아브라함 언약의 초반부에서는 3년 된 암소를 제물로 해서 죽였잖아요. 그렇게 해서 죽인 것은 짐승의 제물인데, 그런데 제물을 죽여서 쪼개고 난 뒤에 그 가운데를 누가 통과했습니까? 하나님이 통과하셨는데, 즉 하나님 자신이 죽는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내가 죽어야 너희가 산다" 라는 겁니다.
그 짐승의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이삭으로 대체해 버렸는데, 알다시피 이삭은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죠. 그것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여자를 따르는 후손, 즉 이삭이 있음으로서 사라가 여자가 되는 식으로, 그렇게 거꾸로 규정을 받는다는 겁니다. 즉 이삭을 봄으로서 비로소 사라가 여자였음을 안다는 말이죠.
돌멩이 사이를 누비시는 잉태치 못한 자의 후손으로 인해서 !!
아까 쉬는 시간에 장로님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후손이, 즉 아들 요소가 하늘에서 투입되는데, 그러면 이 자리는 멀쩡한 육신이 결합된 이유 때문에 하늘로 바뀐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말이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우리 사이를 잉태치 못한 자의 후손이 누비심으로서, 우리를 품에 앉으셔서 구원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늘로부터 새로운 것이 투입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도 무엇입니까? 그것도 역시 베드로의 능력이 아닌 투입된, 즉 도저히 태어날 수 없는 분에 의한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같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죠.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왜 합니까? 즉 "카메라에 너의 얼굴을 들이밀지 말고 치워라" 라는 겁니다. 자꾸 카메라에 얼굴을 자기 들이밀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무엇을 하면 복을 받습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런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런 일을 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그렇게 했던 자가 야곱이었고, 또 그렇게 맞서서 했던 자가 에서였다는 겁니다. 창세기 25장에 그 이야기가 있는데, 29절에서 3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창 25: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1)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창 25:32)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 25: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형님, 맛있는 팥죽을 드세요 !!
지금 배가 고파서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나는 형에게 동생 야곱이 맛있는 팥죽을 쑤어와서는 꼬드기죠. 요즘 카페에서는 파는 팥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그야말로 제대로 만든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동생 야곱이 제시한 조건인, 즉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상 형인 에서가 보기에는 야곱의 이야기는 너무나 부질없다는 겁니다. "형의 자리를 나에게 양보해라. 그러면 이제 내가 형이 되고 형은 동생이 된다" 라는 말인데, 이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해서 형과 동생의 서열이 바뀌겠느냐는 말이죠. 한 번 생각해보세요. 동생이 나이가 많아지면 형도 역시 많아지는데, 나이가 다같이 더해진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에서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가 찼겠습니까? "이게 장난치나? 이게 바보인가?" 라고 했을 겁니다. 그래서 에서는 "알았다. 니 마음대로 해라" 라고 해서, 동생의 제안을 수용하고 팥죽을 얻어먹었다는 말이죠. 아마 여러분이라도 모두 먹었을 겁니다. 특별히 팥죽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그런데 그만 놀랍게도 서열이 바뀌었는데, 이게 바로 시간의 역전이라는 겁니다. 에서는 수평적으로 생각해서 도저히 바뀔 수 없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인데, 그런데 그만 수직적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속였든 말든 간에 아무튼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는 말이죠.
이렇게 야곱은 복을 따내기 위해서 자기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야곱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엇입니까? '빼앗는 자', 즉 '속이는 자' 라는 것이죠. 자기 이름대로 말이죠, 그런데 그런 야곱이 나중에 누구를 잃게 됩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을 잃어버린다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산 제물을 바치라고 했을 때, 이것은 죽은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제물이 점점 더 인격화되면서, 나중에는 하나님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경우에만 천국에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이미 창세기부터 미리 알려주신다는 말입니다.
제물의 인격화와, 개떡같은 야곱 !!
그렇다면 제물이 인격화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인격이 고상하고 착한 인격입니까? 물론 이삭의 경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인격이기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이 야곱으로 넘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고상한 것이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개떡같은 인격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는 야곱의 아들인 요셉을 억울하게 죽게 만들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은 없는 자식이죠. 짐승에게 물려 이미 죽었는데, 심증만 아니라 물증까지 있다는 겁니다. 특별히 사랑해서 입혀준 요셉의 비싼 옷에 피가 묻은 것을 보았기에, 죽은 것이 명백했다는 말이죠. 요즘 같으면 과학수사대가 DNA 조사를 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그게 없었기에 요셉은 그냥 죽었다는 겁니다. 즉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계속 죽은 자식이란 말이죠.
그래도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자기 이들인 이삭이 죽었다가 깨어난 시간이 짧았지만, 하지만 야곱은 아들인 요셉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시간이 길어도 너무나 길었어요. 아니 아예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아들은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죠.
첫째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
우리는 "산 제물을 바친다" 라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라고 하면서 되돌아서고 말아요.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이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라고, 그렇게 야곱 언약으로 진행되면, 우리의 남은 일생이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잃어버리는 체험하는, 그런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말이죠.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죽은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아하, 주님 때문에 살았군요" 라고, 그렇게 잃었다가 되찾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죄뿐이고, 그 긴긴 시간이 우리의 시간인 줄로 알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주님의 시간이었음이 밝혀지게 될 때, 우리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산 제물' 이라는 것 자체를, 그것을 이제는 "어떤 인간이 죽었다" 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인생 자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라는 것을,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야곱을 대신해서 요셉이 죽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에 있어서, 야곱과 우리는 여자로서 가담하게 된다는 말이죠.
둘째로, 죽음을 유발시키는 환경이 !!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러한 언약이 야곱에게 죽음을 유발시키는 환경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이삭이나 요셉 이야기에서, 이렇게 섬들이 각각 있는데, 이런 섬 사이를 주님이 누비고 다니십니다. 왜 모텔이나 호텔에 아침이 되면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와서 일을 하잖아요. 투숙객들이 남겼던 모든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하게 처리한다는 말이죠.
이처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섬들 사이를 누비면서 인간들이 내뱉은 모든 더러운 것을 거두어 처리해주는 일을 하시는데, 인간들이 싸놓은 저주를 말이죠. 이것이 보여야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변을 누비면서 우리가 흘려놓은 더러운 것을 처리해주시는데, 이런 게 없으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카메라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는 것은 전혀 신앙생활 아닌데, 하지만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본성상 말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이 보이는 환경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보이는 환경으로 우리가 일방적으로 왜곡시킨다는 말이죠.
어떤 '인물'이 등장해서 섬들 사이를 !!
지금 중요한 대목이니 잘 들어보세요. 여기에 섬들은 실선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어떤 인물이 등장해서 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분은 점선이라는 겁니다. 즉 점선으로 된 인물이 와서, 점선으로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세월이 가면 실선으로 보이던 우리가 점점 점선으로 바뀌면서 사라질 지경이고, 동시에 그와 병행해서 점선으로 보였던, 즉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던 그분이 이제는 뚜렷하게 우리 마음에 실선으로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분이 주님인데 말이죠. 그러면 그 실선인 주님만이 존재가 되고, 존재라고 여겼던 우리는 사라질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제가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죠. 우리는 성경책 속에서는 존재가 되지만, 밖으로 나오면 사건이 된다고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도, 막상 현실에 나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실선이고, 그래서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자기를 키우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더 거룩하고, 성화가 되고, 착하고, 고상하게 만들어서 뽐낼 수 있는 시간이라고 착각들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착각으로 살아가니까, 교회의 목사들이게 돈이나 마구 갈취를 당하죠. 우리 주변을 다니면서 우리가 흘린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처리하시는 주님의 손길은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만이 강력한 실선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에게 사기를 당해도 당연하다는 말이죠.
부모님, 우리 형제가 원수의 성문을 열겠습니다 !!
멀리 강원도 강릉에서 오신 이상진 집사님 부부와 3명의 자녀인 찬희, 대희, 환희가 뒤에 앉아 있는데, 부모의 눈에 자녀가 실선으로 보일 때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찬희는 MIT, 대희는 예일 대학교, 그리고 환희는 프린스톤 대학교에 보내서, 남들에게 자식을 잘 키웠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잖아요. 물론 아이들이 천만 명은 아니고 3명밖에 되지 않지만 말이죠(ㅋㅋ).
그렇게 명문대학을 나온 아이들로 키우고 싶은데, 그런데 어느 날 아이들이 와서는 "어머니, 아버지, 우리 형제가 힘을 합해서 원수의 성문을 열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부모의 반응이 어떻겠어요? "너희들이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가? 어디 음식이라도 잘못 먹었나?"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원수의 성문, 할례, 피,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그야말로 야곱인데, 즉 우리 자신이 가진 힘을 더욱 키우는 삶을 살아갈 뿐이라는 말이죠.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스펙을 계속해서 쌓아 가는 것, 그것이 우리 자신의 할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역시 필요한 것은, 생활의 지혜 !!
이게 강의 마지막 시간인데, 결국 강의가 끝난 후에 이곳을 떠나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된다는 말이죠. 실선이기 때문에 말이죠. 여자의 후손, 잉태치 못한 자, 할례, 원수의 성문 등등, 이런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생활의 지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고등어를 구울 때는 커피가루를 뿌리면 냄새가 제거된다. 싱크대의 찌든 때는 미지근한 물에 식초를 타서 씻으면 깨끗해진다. 가스레인지에 묻은 때는 레몬껍질로 잘 문지르면 된다. 냉장고 속의 냄새는 소주병 뚜껑을 열어놓으면 사라진다" 등등, 그런 것을 알아야지, 여자의 후손을 안다고 해서 생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ㅋㅋ).
구원이란, '어긋맞겨 얹었더라' !!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손자들에게 축복을 해주는데,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도 야곱이 축복을 하면서, 조부인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거론하는데, 물론 그들은 다 천국에 계시는 분들입니다. 다들 자기밖에 모르던 인간인데, 그런데도 천국에 가있다는 겁니다.
(창 48:14)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
왜 그렇습니까? 섬 사이를 누비면서 뒤처리를 해주는 조선족 아줌마들이 있었기 때문에 말이죠. 바로 그분이 성경의 주인공입니다. 분명히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러니 우리 자신은 당연히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여하튼 야곱이 손자들을 앞에 놓고서 안수를 했는데, 팔을 어긋맞게 얹었어요. 그래도 오른 손에 둘째에게 가고, 왼손에 첫째에게 가게 되었는데, 그때 아들인 요셉이 아버지의 어긋맞게 한 손을 바로 하려고 했는데, 자기 아버지의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하는 줄로 알고 말이죠. 하지만 야곱은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어긋맞게 안수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즉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게 구원의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손을 어긋맞게 하는 이 과정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죠. 손을 어긋맞게 해서 바뀌는 그 과정이 말이죠.
(창 48:17)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창 48:18)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창 48:19)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창 48: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이 너로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너로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리라 하여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창 48: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창 48: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거꾸로' !!
그러니 자기 자신이 바뀌지 아니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나'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높은 자리가 아닌 제일로 낮은 자리에, 즉 십자가에 오신,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리에 몸소 오신, 바로 그분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는데, 그 관계가 곧 '성령의 열매' 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용서를 알 때 비로소 죄를 아는데, 즉 용서가 먼저고 죄는 나중이라는 겁니다. 구원이 먼저고 잉태가 나중이라는 겁니다. 상처가 먼저고 존재는 나중이라는 말이죠. 이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지만 말이죠. 그러면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거꾸로 바꾸면 정답이라는 겁니다.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하는 게 주님의 의의 작용이고,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곧 헌금이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곧 예배참석이고, 밥을 먹는 것이 곧 금식이고, 또한 잠자는 것이 곧 철야라는 말이죠. 거지 나사로가 몇 명이나 전도했고, 또한 노아가 몇 명을 전도했어요? 거지 나사로는 아무도 없었고, 그리고 노아도 자기 식구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라캉이 말하는 '남자와 여자' !!
지난 시간에 라캉이 밝혀낸 것을 잠시 언급했는데, 여자의 자리는 여자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마련해줘야만 여자의 자리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모든 것이 사무적이기 때문에 사랑을 모르는데, 여자가 사랑을 내밀 때 비로소 사랑을 안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자가 "이것은 당신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보지 못한 척을 합니까?" 라고 할 때에 남자는 정신이 번쩍 드는데, 즉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합니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그러니 여자에게 있어서 "나는 무엇이 될까?" 라는 것은, 그것은 남자가 챙겨줘야지, 여자 본인이 챙기면 안 되는 겁니다. 여자는 남자 곁에 붙어있기를 원하니 말이죠.
여보, 나도 가도 되는 거야?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는데, "태국에 가고 싶다" 라고 하는데, 갑자기 남자가 "여보, 태국으로 발령이 났어" 라고 할 때, 그때 여자는 자기를 데리고 갈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러면 나도 가도 되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는 "물론이지, 내 아내니까!" 라고 하죠. 그것을 경상도 말로 번역하면, "또 쓸데없는 소리!" 라고 하는데(ㅋㅋ), 데리고 가면서도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게 여자는 "여보, 나도 가도 되는 거야?" 라고 하는, 그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물론 남편이 미국에 갈 때도 "나도 가도 되는 거야?" 라는 말을 역시 하고 싶어하고 말이죠. 바로 그럴 때, 여자는 여자로서 행복하다는 겁니다.
남자는 흙, 여자는 생명 !!
그러니까 '여자의 후손' 이라고 할 때 남자는 없는데, 예수님께서 그만 우리를 여자로 만들어버렸어요. 보통 남자는 자기로 인하여 살고 싶은데, 그래서 남자의 이름은 '흙' 인데, 달리 말하면 '먼지', 혹은 '허무' 라는 겁니다. 즉 그냥 죽는다는 말이죠.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만 잘났다고 떠들다가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남자로 보지 않고, 남자를 없애버리고 남자 자리에 여자로 만들어버리니까, 여자는 자기 자리를 자기가 만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시는 자리를 감사해야 하는데, 그것도 소급해서 말이죠. 그래서 "내가 살았던 모든 인생이, 주님을 증거하라고 일찌감치 마련해준 자리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지 맙시다 !!
그러니 자기를 위한 신앙은 개에게나 줘버리세요. 그야말로 쓸데없는 짓인데,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지 맙시다. 이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래도 신앙을 회수해서 버리세요. 그래야 비로소 신앙이 보인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신앙은 우상숭배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다고 하는데, 그것이 야곱 언약에서 나온 겁니다. 창세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죠.
'도레미'송을 부를 때, '솔'은 바느질하는 바늘이라고 했는데, 그 다음의 '라'를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면, '솔' 다음의 건반이라고 했어요. 즉 '솔'이 있어야 '라'가 된다는 겁니다. 즉 베이스캠프가 없으면 정상정복도 없다는 겁니다. 왜 포스코 CF에 보면, "우리는 베이스가 되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본래 자리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안정감이라는 겁니다. 정죄함이 없는 자리가 곧 우리 자리인데, 그런데 우리는 그 자리를 외면하고서 생활의 지혜만 찾아다니고, "현미를 몇 프로나 섞으면 다이어트에 좋습니까?" 라고 하는, 왜 그런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지 모르겠어요.
창세기는, 제물의 죽음의 시간을 연장해서 !!
창세기의 흐름은 간단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제물이 된 것이고, 그러면 이삭 이후에 야곱과 요셉 이야기는 왜 튀어나오는고 하니, 제물이 그냥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죽음의 시간을 연장해서 죽음을 쫙 펼쳐놓는다는 겁니다. 그 죽음을 시간에 따라서 문질러보면, "왜 죽어야만 마땅한가?" 라는 것이 나와요.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진면모가 보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지독하게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하나님도 자기 것을 건드리면 가만히 있지 않아요. 야곱은 자기의 아내와 종들이 경쟁적으로 사랑해서 12아들을 낳았는데, 르우벤, 시므온, 레위 등등, 그런 자식들이 있어야만 축복이고, 그리고 재산의 형성과정에 있어서도 부당하게 외삼촌의 것을 횡령했다는 겁니다. 자기의 것 이상으로 취했다는 말이죠.
누구보다도 죄에 근접해서 사는 모습을 !!
그런데 그런 일을 함에 있어서 누가 도움을 준 줄 아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셨어요. 놀랍게도 말이죠. 하나님이 범죄의 동조자였다는 겁니다. "너의 본성은 속이는 거야. - 죄송합니다. - 죄송할 것도 없어. 마음껏 속여봐- 예, 알겠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도와주신 것이죠. 거룩한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태어난 야곱의 삶이 그랬다는 말입니다.
계시에 의해서 태어난 자는 고상하게 살아갈 것 같지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계시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죄에 근접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줄 임무가 주어졌던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 세상에서 잉태해서 태어난 모든 자식은 절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서 "잉태치 못하는 자가 너희를 구원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데, 도저히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주께서 벌이셨다는 말이죠.
왜 주님은 꼭 우리를 구원하셔야만 했습니까?
이제 우리가 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데 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라는 것에 대해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은 십자가 마을에서나 가능한 질문인데, 다른 마을에서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질문이 나와요.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자체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질문이 아니라, "왜 주님은 우리를 꼭 구원하셔야만 했습니까?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하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은 버려도 괜찮은데, 왜 기어이 건져내십니까?" 라는 질문과, 그 정답을 우리가 창세기에서 찾아봐야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야만 했습니까? 안 해도 되는데 왜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질문을 기억하면서, 창세기 25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
여기에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 하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리고 난 다음에 두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데, 즉 에서와 야곱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태어난 아기가 "하나님이여, 왜 저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야야,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란다" 라고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하지를 말고, 바로 이 창세기 25장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는 말씀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너는 태어났고, 너를 건지셨다" 라고, 그렇게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아하, 그렇구나 !!
그런데 성경이 창세기가 25장으로 끝난 것이 아닌데, 분명히 요한계시록까지 있어요. 그러니 창세기를 보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의문점이 커지도록 유도해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아하, 그렇구나" 라고, 그렇게 깨닫는 지점까지 연결시켜준다는 겁니다.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되는고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기 위한 보조장치로서 우리 몸을 주님께서 앞당겨 깔아놓으신 겁니다. 마치 왕이 지나가는 길에 카펫을 깔듯이 말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뿐히(?) 밟고 지나가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던지셨고, 그래서 이삭에게 두 아들을 주셨다는 말이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과 싸움 !!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이 육신은 어떤 육신인고 하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과 싸운다는 겁니다. 즉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이죠. "원수의 성문을 열게 하리라" 라고, 난데없이 결혼할 누이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 물론 누이동생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이렇게 육신과 싸움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을 동원해서 싸우게 하시죠. 그러면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또 오해를 하는데, "내가 전사가 되어서 싸워야겠구나" 라고 말이죠. 하지만 싸우지 마세요. 우리는 이기주의자들로서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자들인데, 그러니 그런 식으로 싸우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것밖에는 되지 않아요. 우리는 돌아서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이죠.
우리 몸이 '프라다'를 기억해요 !!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보수적인 교단에서 성장해서 50년이 넘게 기도와 절제로 순결하게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인데 말이죠. 그런데 그분이 '프라다' 명품가방을 선물로 받고는 그만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몸이 명품을 기억한다는 말이죠(ㅋㅋ).
백 날을 기도해도, 우리 몸의 복음은 "프라다, 페라가모, 루이비통, 샤넬 등등", 이런 것들이란 말이죠. 물론 그동안은 미처 몰랐는데, 명품이 자기 눈앞에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말이죠. 우리는 그동안 이런 것을 초월했다고 여겼는데, 그러니 그런 몸으로 무슨 전쟁을 한다는 말입니까? 영적 전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죄만 지으면 'OK' !!
영적 전쟁에서 마귀가 돈을 흔들어대면 우리는 모두 돈을 따라갈 자들입니다. 암에 걸려서 기도해서 나았다고 하면, 당연히 암 전도사가 되어서 여기저기 설치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어디 제대로 전쟁이 되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전쟁에 투입되는 방식은 죄만 지으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잉? 그러니 이 세상을 살면서 원 없이 죄를 지으면 됩니다. 우리는 원 없이 죄를 짓고, 그리고 그 죄에서 쏟아지는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바라보면서, "나 같은 망나니도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끌고 다니면서 자랑하시는데, "이런 놈도 구원을 받았지" 라고, 그렇게 원수의 성문에서 자랑을 하신다는 말이죠.
"거기 성 안에 있는 왕초는 이리 나와" 라고 하면, 골리앗이 나오겠죠. 그러면 "너희들이 자랑할 것이 있어?" 라고 하면서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프라다, 페라가모, 루이비통, 샤넬 등이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구찌'도 있는데, 어떤 분은 이 구찌가 일제라고 우기는데, 제가 조사해보니까 이태리 제품이라는 말이죠(ㅋㅋ).
창기 있어? 세리 있어? 탕자 있어?
그들이 애굽이 말과 병거와 칼을 자랑할 때, 이게 시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푸하하' 하고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창기가 있어? 세리가 있어? 또 집구석을 말아먹은 탕자가 있어?"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스코리아에 나가고 사기를 당한 여자도 있어" 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TV 드라마인 '왕가네' 이야기인데 말이죠(ㅋㅋ).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내세우면서, "이런 자들도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곧 영적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는 "음메, 기죽어. 우리가 졌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바로 그런 싸움이라는 겁니다. 그게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동안 성경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도대체 교회에 다니면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김 집사님은 올해도 전도를 15명이나 해서 1등을 했습니다. 상품은 삼성 냉장고입니다. 성경을 제일 많이 읽으신 분에게는 상품이 성경책입니다" 라고 하는, 그런 마귀에게 걸려서 사기나 실컷 당하고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병거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이름을 !!
분명히 시편 20편에 나오는데, "그들은 병거나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라고 말이죠. 이런 말씀에 왜 눈에 띄지 않았을까요? 카메라에 돼지와도 같은 커다란 자기 얼굴만 갖다대니까, 자기 얼굴 외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겁니다(ㅋㅋ).
(시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시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자기가 실선인 줄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남들은 성경을 백 독이나 하는데, 나는 한 구절도 제대로 외우지도 못한다" 라는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을 백 독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당연히 우리도 해야하는데, 과연 그러하냐는 겁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선교단체에서도 그 따위 소리를 해대는데, 심지어 네비게이토와 같은 곳에서는 매년 그런 것을 시험까지 친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해요. 자기 가치가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을 말이죠. 그런 보람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남은 인생이 앞으로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죄를 지읍시다. 그것도 열심히 말이죠. 물론 우리는 구태여 죄를 지으려고 하지 않아도 항상 죄를 짓는데, 그런 스펙을 쌓는 죄를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도 남들이 망하는 재미로 살아가는데, 그래서 이웃집의 딸이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자기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미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언제나 이 세상에서 자기가 실선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물론 자유도 자기를 위한 자유이고 말이죠. 결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총정리를 하면, '존재가 아닌 사건' !!
총정리를 하는 입장에서 첫째 시간에 언급한 내용을 다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정답을 미리 말씀드린다고 분명히 했는데 말이죠. 그렇지요? 즉 성경책 속에 있는 우리가 바깥으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줄줄이 사건으로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건으로 연결되어서, '나' 자신이 하나의 사건이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강도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그것은 주님의 사건이지 강도 개인이 만든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어릴 때부터 강도라고 해도, 그는 강도가 되기 이전부터 이미 주님의 사건을 위해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의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었다는 말이죠. 즉 여자의 후손을 낳기 위한 여자로서, 그런 주님의 시간에 따라 움직였다는 겁니다. 물론 본인은 전혀 몰랐겠지만, 자기 존재를 위한 시간인 줄 알았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보니까, 그 모든 것이 자기의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였고, 그러니 진정한 존재는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첫 시간부터 제가 '존재' 라는 말을 해서 여러분이 굉장히 낯설어했는데, 그러면 마지막 시간이지만 이것을 쉽게 바꿉시다. '있음'으로 말이죠. 서로 똑같은 말인가요? (ㅋㅋ)
사라질 '있음'에는 존재가 합당하지 않아 !!
책상 있음, 마이크 있음, 이게 '있음' 이거든요. 하지만 그 모든 있음은 사라질 있음이에요. 지난 수련회에서 이야기했는데,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라고 말이죠. 헛된 모든 것은 사라지지요. 그렇게 사라질 것들에게 '존재' 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있다가도 없어지기 때문에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영원한 존재로부터 우리는 잠시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존재'는 영원토록 계시는 예수님에게만 붙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죠.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말이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너도 걸려들었구나. 나도 걸려들었어 !!
이제는 여러분들이 성경이 보일 겁니다. 그동안 카메라에 그 커다란 자기 얼굴을 갖다대니까 완전히 가려졌는데, 조금만 비켜나서 자기를 사라질 존재로 보고, 주님이 실선이 되어서 모든 시간이 주님의 시간으로, 마치 낚시줄을 당기듯이 당길 때, 거기에 걸려든 고기가 곧 저와 여러분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것이 153마리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주님에게 걸려든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걸려들었다. 너도 걸려들었구나. 나도 걸려들었어. 지화자!"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지화가' 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ㅋㅋ)
아까 주차문제를 예로 들었을 때, 그것을 오해하신 분이 있어서 다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양보하지 맙시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서로 양보하지 않아야 상대방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배려를 해주게 되잖아요. "세상에 믿을 놈은 없구나. 나는 예수만 믿어야지" 라는,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자는 겁니다.
배려는 하지만, 양보가 없는 멋진 사회 !!
그러니 배려는 하지만 양보가 없는 멋진 사회, 그것이 곧 십자가 마을이라는 겁니다(ㅋㅋ). 어디 믿을 놈을 믿으라는 말이죠. 그게 진정한 자유이라는 겁니다. 그동안 누가 속박했는고 하니까, 자기 잘남이 자기를 속박했고, 물론 그 배후에 악마가 있었지요. 그 악마는 이미 독립선언을 했는데, 물론 자신이 멸망을 당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고 말이죠.
그래서 악마는 누구를 유혹해서 자기와 같이 멸망을 당할지, 그렇게 호시탐탐 노리다가 아담을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와서는 "너도 독립선언을 해. 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독립할 수 있어" 라고 꼬드겼다는 말이죠.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우리 몸이 독립을 기억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건이지만 돌아서면 존재가 되는데, 마귀가 그렇게 만들죠. 그때 다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어떻게 하십니까? 성령께서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책망을 받는 순간 우리는, "내가 존재가 아니라, 존재는 따로 있고 그분에 의해서 살아간다" 라는 사실이 느껴지는데, 물론 그런 느낌은 잠시 뿐이지만 말이죠.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용서 - '소급해서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
그렇게 해서 용서를 알게 되면, 왜냐하면 용서를 알아야 모든 것이 소급해서 감사가 되니까 말이죠.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무슨 말인고 하니, 용서가 되면 어떤 특정한 일에 국한해서 감사가 되는 게 아니고, 소급해서 모든 것이 감사가 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말이죠. 즉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경우에, 그가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였을 때, 그 사건만이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라고 소급해서 알게 되는데, 바로 그 전체를 용서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그 여자와 남편을 개입시켰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51편 이야기인데, 시편 51편을 그렇게 봐야한다는 말이죠.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성신이여, 저를 떠나지 마옵소서 !!
그것이 바로 "성신이여, 저를 떠나지 마옵소서" 라는 것인데, 즉 육체인줄 알고 오셨고, 하나님의 신은 육체와 함께 있지는 아니하지만, 모세가 쓴 수건, 즉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는 '함께 있기'가 성사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죄인으로 사셨기 때문에, 즉 죄인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시 27: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구원이란, 주님의 작업에 참여시키는 것 !!
지금까지 창세기를 통해서 성경 전체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구원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작업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인데, 그러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래서 구세주가 되시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죄인의 입장에 들어설 때 우리는 의인이고, 만약에 주님께 부름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선악적인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의인으로 우기는, 그러한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죄인이라는 것이 반복되는 반면에, 저쪽에서는 "그래도 나는 잘났어" 라는 것이 반복될 때, 여기에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갈라지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미 창세 전에 !!
그러면 에서와 야곱은 언제부터 갈라졌습니까? 우리의 시간이 아닌 주님의 시간을 따라가서 보니까, 그들이 태어나가도 이전에, 아니 이미 창세 전에 갈라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미 된 것을 가지고서,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괜히 쫄았지요. 이미 합격을 했는데 말이죠. 우리의 시간이 아닌 주님의 시간을 따라가야 그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대학시험을 친 이후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까지 얼마나 초조했는지 몰라요. 그 당시는 시험을 친 학교까지 직접 가야만 합격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전화로 알려주는 것도 없고 말이죠. 그래서 학교로 가는 길에 온갖 상상을 다 했어요. "재수를 한다고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주겠나?" 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합격자 명단에는 이미 제 이름이 붙어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니까, 즉 인식의 한계 때문에 계속 염려하면서 초조해했다는 겁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말이죠. 그러면 우리의 남은 인생은 무엇입니까?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해가면서 살아가는 인생, 바로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음이 확인해주기 위해서, 때로는 초조하고, 때로는 이렇게 해서 되겠느냐는 근심도 생기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도 같고, 또한 지옥에 갈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낯설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십자가를 외치시고, 피 흘림을 알려주셔서, 그것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이미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실 때, 잠시나마 주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2,12 재정리함 - 녹취 '구'
2015,3,16 재재정리함 - 녹취 '구'
주님은 창세 전부터 한 순간도 쉰 적이 없었는데,
이놈의 몸은 쉬는 것 밖에 모르네요.
이제 겨우 부러진 백인데,
세상 사람들은 '내 나이가 어때서?' 라고 하면서 난리인데,
이게 무슨 조울증도 아니고,
복음을 대할 때는 기뻤다가,
손님을 대할 때는 슬펐다가,
돈까스를 만드는 것이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
첨부파일 : 14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창세기세척하기(1,12~14)(총9강)(강의정리)--재재정리.zip (918.1K), Down: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