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적인 것 150313
이질적인 것 150313
이름 : 이근호(IP:119.18.83.91)
김창길(IP:180.♡.194.146)
15-04-10 22:31
서울 의존교회150313a (이질적인 것)―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6장 11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은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이 말씀이 꼭 나보고 이야기했다는 그런 일반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마련이에요. 좋아 보이잖아요. 영생을 취하라! 이것을 놓치지 싫은 거예요.
영생을 갖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영생을 갖기 위해서 나를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우기고 그 다음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아가고 게다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으로서 그래서 영생을 나는 취할 수 있는 마땅한 자격자이고 나는 부르심을 입었다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누가 나한테 지시하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마귀가 이것을 지시 한다면 우리가 듣겠습니까? 마귀가 지시하는 것으로 들통 난다면 아, 큰일 날 뻔 했구나! 이것을 지키다가 정말 지옥 갈뻔 했구나! 아, 이게 거짓말인지 난 미처 몰랐지! 나중에 보니까 마귀가 이런 이야기를 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다고 하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옳다는 것을 무슨 수로 증명하죠? 성경에 이 말씀이 있는 것은 맞는데 이 성경에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나 영생 얻으라고 한 말씀이다. 나, 나를 영생 얻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그것을 증명하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졸업식 때 ‘자, 오늘 이 졸업식때 마지막 상은 최우수상입니다.’라고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를 할 때에 저 상은 나를 위해서 저 상이 있다고 학생들이 이야기할 때 옆에 있는 학생이 저 상이 어떻게 네가 최우수상으로 받을 자라는 것을 네가 증명해 보라고 하면 뭐라고 증명합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상이 있다고 이렇게 증명하죠. 저 최우수상은 학교에서 그렇게 만든 거야! ‘글쎄, 그것이 왜 합당한지 왜 옳은 것인지 그것을 증명해 보라니깐!’ 옆에 친구가 화가 나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옆에 친구가 화가 나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랬더니 뭐라 하느냐 하면 그게 내가 믿어진다니까 그게……. 그렇게 내가 믿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12절에 나오는 선한 싸움의 근거가 되어 버립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의 근거가 돼요. 자기는 열심히 믿죠.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선한 싸움 이냐? 누구의 믿음을 지기 위해서 그런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합니까?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되죠. 그게 엉터리죠. 어느 인간치고 자기를 신뢰안하는 사람 봤습니까? 나 쪼다요. 이것을 광고하면서 평생 살아가는 사람 봤습니까? 그런 사람 없어요. 종교를 떠나서 심지어 어린 아이라도 할지라도 나 예뻐, 나 잘났어! 여기에 평생을 투자를 전부 다 하는 겁니다.
비록 내가 이런 실수를 했지만 여전히 나의 양심은 고운거야! 라고 이런 자기 장점은 드러내고 약점은 가리면서 그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겁니까? 그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싸움이에요? 대한민국? 국가? 세계평화? 그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싸움이에요?
대한민국, 세계평화?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겁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있다고 칩시다. 안중근 의사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조국을 위해서 자기 한 몸을 받쳤잖아요.
그러면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 사람들도 조국을 위해서 과감하게 국가가 주는 유공자를 찢어버립니까? 어떻게 살죠? 안중근 의사의 후손은? 우리 할아버지께서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나는 후손이 돼가지고 국가에서 이러한 국가 유공자라는 이런 혜택을 줄 때 나는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면 양심이 부끄러워서 이런 것을 못 받습니다. 나도 과감하게 죽겠습니다.
이렇게 할까요? 아니면 아예 광고를 할까요? 나는 안중근 의사의 3대 손자인데 나라가 우리한테 적어도 이정도 혜택은 줘야지 우리 할아버지 때문에 이정도 나라가 안정됐으니까 그만한 이익은 우리 후손이 받아 챙겨야 마땅하지!
어느 쪽입니까?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팔아먹고 자기들은 그냥 아무 한 것도 없이 국가의 예산을 받아먹잖아요. 뉴질랜드나 호주에 마오리족 원주민들이 있다는 겁니다. 원주민들이 있는데 그 원주민들이 자기가 땅을 샀으니까 보상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마오리족 그 사람은 그것을 받아가지고 다시 자기의 원래 나라를 위해서 호주나 뉴질랜드를 위해서 봉사하면서 삽니까? 아니면 마약으로 삽니까? 마약하고 노래 부르고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주니까 그것 가지고 그냥 놀기나 하고 관광객 앞에서 기가 기가 기가 산다! 이것만 하고 삽니까?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뭘 지킨다고요? 자기 자존심 말고 지키는 게 있을까요? 없습니다. 여기 믿음 소망 사랑 하는데 뭔데요?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그 믿음을 지키고자 이것은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거예요.
성경은 그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할 때는 누가 누구 보고 이야기를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돼요. 성경은 나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그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그 전 단계가 있어요. 그 전 단계가 뭐냐 하면 나를 위한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고 우리는 인정하고 싶은 그런 본심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 말을 제가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는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의 후손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아담이 죄지어서 왕 노릇하기 때문에 동일한 죄가 우리에게 작용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했습니까? 자기를 생각했습니까? 어느 쪽이었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아이고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제 와 주시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자기 비겁한 변명들을 늘어놨습니까?
저가 벗었음으로 숨었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지금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관심사가 어디로 쏠립니까? 자기 자신한테 쏠린 거예요. 그 후손이 누구에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볼 때에 결국은 성경을 보는 그 의도와 그런 생각 그 모든 기대와 바람이 결국 어디로 귀환됩니까?
어디로 환원됩니까? 나 잘되는 쪽으로 환원되지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이단이죠. 그게 우상숭배죠. 뭐가 있겠어요? 제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만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다는 것에 대해서 선지서에 보면 그 망한 이유가 나와 있어요.
망한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 때문에 그랬어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구약 사람들은 참 바보 같아 그렇게 혜택을 줬는데도 왜 우상숭배하지?’ 그러면 이스라엘 선배들이 뭐라 하냐 하면 “너나 잘 하세요! 너는 안 그런 줄 알아?”
우상숭배가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청난 양의 율법을 하나님께서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바라보는 시선 그 전제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그 모든 말씀은 누구를 위하여 줬다? 나를 위해서 줬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안했죠.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라 했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말씀은 나를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메시야가 오는 것도 나 잘되기 위해서 내 인생이 실패한 것에 대한 보상책으로 그렇게 줬다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 그들이 들어갔을 때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를 본 사람들은 ‘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겠다!’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하나님이 공짜로 넣어 주시니까 그들은 땡잡았네!’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 생각 밑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는 일체 가뭄이나 기근이 없을 것이라 생각 하겠죠. 분명히 하나님께서 신명기 28장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 땅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는 필히 가뭄과 기근이 오고 적군에게 쫓겨나고 그게 다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게 왜 안 보일까요? 그게 왜 가슴으로 안 올까요?
자기는 잘났으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내가 소홀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나를 지키는데 얼마나 철저하데 내가 나한테 만큼은 철저하기 때문에 내가 손해 보는 짓을 내가 자진해서 나설 이유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이 말씀 주시는 족족이 그대로 지킬 것이고 따라서 말씀을 위반했을 때 오는 저주 사항, 벌칙조항 그것은 애초부터 나한테 해당되지 않고 나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 했겠죠.
그들이 바로 우리보다 하나님을 먼저 알았던 사람들의 태도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대표자였어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 한 짓을 어떻게 앞당겨서 미리 시범조교 보이듯이 그렇게 똑같이 하는지…….
한번 정리해 봅시다. 모든 말씀은 누구를 위한 것이다? 나를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이 굴레에서 왜 못 벗어나느냐 이 말이죠.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주께서 주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너를 부인하라고 주신 말씀인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것이 나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말씀으로 바뀌어서 그렇게 이해하는데 누가 그런 짓을 획책합니까?
누가 그런 짓을 경려하고 독려합니까?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배후에서 부추긴 영의 세계에서 그렇게 분명히 한 겁니다. 악마가 그렇게 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목사님 이 말씀은 누구를 위해서 줬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약성경 근거해서 말씀드립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신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누구한테 주신말씀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신말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머리되시고 붙어있는 지체들에게 주신말씀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11절에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조금 전까지 이야기했던 것과 제가 지금 정답이라고 내리면서 하는 말하고 그 차이점을 여러분들이 차이점을 느끼십니까? 처음에 이야기를 이것은 아니고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라고 언급했을 때는 하나님과 나 사이죠.
그런데 방금 제가 정답이라고 냈던 경우에는 나는 없죠. 나는 날아가 버렸어요. 날아가 버리고 이 말씀은 누구한테 주신말씀이라고요? 우리한테 주신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에게 주신 말씀이라 했죠. 구체적으로 말해서 뒤에 단어 하나 더 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게 줬다고 했고 그것을 다시 알아듣게 단어를 바꿔버렸어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한테 준 거다 이렇게 한 거죠. 그것으로 끝이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잖아요? 하고 나서게 되죠.
당신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성경에서 증명해 보세요! 그것은 자기 혼자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옛날 이스라엘이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자기 멋대로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이 있었다는 생각해 하지 마시고 망했다는 그 지점부터 거꾸로 소급해서 이스라엘을 보세요. 망할 나라가 주님의 손에 의해서 그것도 마귀의 손이 아니고 주님의 손에서 그들이 아버지라 부르고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주님의 손에 의해서 망해야 될 그 사람들이 홍해를 건넜고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성이 무너졌어요.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어요. 그때는 아주 신이 났어요. 특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는데 이것은 뭐 들어가기만 하면 하루 온종일 찬양으로 24시간 다 보낼 것 같죠. 그런데 그 땅에 기근과 적신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나오미 가정이 모압으로 이사를 가죠. 이사를 가면서 그들은 기쁨으로 갔다가 슬픔으로 오게 했죠. 기쁨 자기 긍정, 슬픔 자기 부정, 맞잖아요? 하나님 말씀 맞네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줄게 맞아요. 이스라엘은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거 틀린 말이에요. 맞는 말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줬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이에요. 똑같은 소리처럼 들리십니까?
글로 적으면 똑같은 소리에요. 맞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우리를 위해서 줬다. 맞죠? 그런데 제가 아는 정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줬다는 겁니다. 도찐개찐이죠. 똑같죠.
똑같은데 알아맞히어 보세요.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게 줬다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줬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어가 제가 말하는 정답은 예수님이 주어인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주어가 된 겁니다.
자기가 주어가 되어버리면 모든 말씀은 어디로 되돌아 가버리느냐 하면 내가 말씀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버려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가 된 겁니다.
설마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네가 뭔데 안 버려? 주님께서는 이것은 비밀인데 이스라엘 속에 예수님을 집어넣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끄집어내면서 주변의 이스라엘을 엉망진창 찢어버린겁니다.
택배 하나가 왔는데 중요한 게 택배 안에 상자가 들어 있잖아요. 성질 급한 사람은 저 같은 사람은 택배 다 찢고 그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꺼내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찢어야 그 안에 그리스도 들어있어요. 그냥 따라 오면 이스라엘을 주는 게 아니고 그 찢는 게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찢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찢긴 사람이 산산조각 나듯 다 찢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영생을 취한다고 하니까 신났어요.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는 아주 심오한 결단과 각오를 가지고 임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아!’ ‘아, 나보고 이야기하는 소리이네!’ ‘이것을 피하고’ ‘피하지 뭐 영생을 얻겠다는데 뭘 못 피해?’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며’ ‘쫓아가지 뭐’
그 사람이 말하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라 하는 것은 전부 다 결국 자기 자존심으로 되돌아와요. 씩씩거리면서 나 믿는 자야! 나 사랑하는 자야! 누구를 믿는 겁니까? 자기가 자신의 행위를 채택해서 그것을 믿는 자니까 그것을 가지고 구약에서 우상숭배라 합니다.
우상숭배라 할 때 앞에 반드시 조건이 붙어요. 우상숭배의 조건이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이게 붙어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십계명을 여러분 유심히 보세요. 제 2계명 보세요. 첫 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언급함으로서 이미 우리를 택배 상자처럼 찢기 시작합니다.
왜냐 하면 신이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 외에 다른 신,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눕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은 여호와 외에 속한 신이에요. 왜냐 하면 신이라고 하면 누가 만들어 내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만듭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신을 섬기는 것, 내가 잘되기 위해서 삼위일체 섬기고 나 잘되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 섬기는 것, 그게 바로 우상이거든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서 갈 자가 없다 했거든요. 이 말은 아버지에 대해서 인간들이 이미 몰라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말을 듣느냐 하면 마치 자기도 아버지를 아는 것인 양 들어요.
아, 하나님께서 아버지 외에 아들을 또 보내셨구나, 그러면 잘됐다! 아버지는 익히 아는 거고 그 다음에 덤으로 아들까지 챙겨버리면 우리는 영생 얻었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예수님을 아는 순간, 내가 알았던 그 하나님, 아들을 보냈다는 그 하나님은 내가 지어낸 나를 위한 내가 구원받기 위한 내가 창안해 내가 조작해 낸 그런 가짜 우상이었습니다.
마귀가 그렇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라고 자인하는 사람, 그 사람만이 바로 그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신을 믿으세요. 그래야 우리가 우상숭배자라는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신을 안 믿는다는 것은 거짓말이거든요. 반드시 인간은 초월자, 절대자를 어떤 식으로든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디모데전서 6장의 11절 12절 말씀은 여전히 이 말씀 자체가 율법적 기능을 발휘하면서 인간의 한계성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말씀의 성취하고는 상관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런 한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요. 성령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할 필요가 없다!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왜 질문합니까? 그것은 필요 없잖아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질문하지 않는다. 모르고 있는 것에는 질문을 끄집어낼 여지도 없다!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질문을 만들어 내겠어요.
따라서 진리에 도달할 길은 없다! 이랬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알고 있는 것은 더 알 필요 없고 알고 있으니까 모르고 있는 것은 이미 모르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질문이 형성되지 않죠.
형, 외계인을 만났다는데 외계인은 키가 몇 센티 돼? 그렇게 묻는다는 것은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질문이잖아요. 그런데 외계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질문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오죠.
모르고 있는 것은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질문 못하는 거고 따라서 진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리에 도달할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죠.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는 답답해서 계속 사람을 붙들고 묻는 거예요. 진리가 뭐냐고 묻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묻는 본인이 그 당시에 그리스 이야기에 보면 신탁의 신의 계시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자기의 한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소크라테스 밖에 없고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한계선상을 아는 자기의 인간을 가두는 철조망을 만지고 있는 최고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살았는데 소위 교회에 간 사람들은 전부 다 왜 그리 똑똑한지 자기 한계도 모르면서 우상숭배자로 어디에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우상숭배자로 그냥 예수 잘 믿는다는 칭찬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상숭배자가 우상숭배자 보고 칭찬해 주는 거예요. 아, 믿음 좋으네요! 소크라테스 말고 여기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그 이후에 철학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가를 단계별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이 칸트라는 사람인데 이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한번 적어볼께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키기고 죄를 저지르는 것은 1. 인간이 나약하기 때문이다. 의지가 약해서 하는 게 돼요.
말씀은 지키고 싶은데 의지가 약해서 쉭쉭 의지가 약해서 못 지킨다.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해서 못 지켰다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지키고 싶은데 이익타산, 손익타산을 해서 손해될까 싶어서 이익이 안되니기 때문에 말씀을 못 지키게 된다는 겁니다.
세 번째 단계가 왜 못 지키느냐 하면 내가 하는 것이 곧 선하기 때문에 안 지켜도 선한데 왜 지키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 피지 하세요! 하니까 내 담배 내가 피는데 네가 왜? 이거거든요. 이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네 번째는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에 조금 이따 보류하겠습니다. 첫 번째부터 봅시다. 칸트가 말하기를 사람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못 지키느냐 하면 나약하기 때문에, 나약하다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의지가 약한 것도 있지만 지식이 부족해서 그래요.
옛날 유교 가정교육 받은 사람이, 촌에서 할아버지한테 양육 받은 사람이 할아버지가 시장에서 차가와도 길을 보고 그냥 막 뛰어가거든요. 안보고 급하게 막 뛰어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손자가 그것을 봤잖아요. 보고 자기도 안보고 뛰어가는데 도시에 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거든요.
하니까 교통순경한테 걸리는 거예요. 범칙금 내게 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촌에서 내 다리 가지고 그냥 차와도 내가 알아서 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뭡니까? 인간이 살아온 환경 자체가 그것밖에 안돼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제한적이에요. 인도에서 밥을 먹을 때 손으로 먹는다는 거예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보고 아이고 더럽게 손으로 먹느냐!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욕 얻어먹어요. 인도의 문화이기 때문에 욕 얻어먹어요. 사람들이 전부를 알 수 없잖아요. 사람들이 속속들이 알 수 없잖아요.
이 한계 때문에 이게 인간의 나약성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말씀을 못 지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 하면 술 취하지 말라 했을 때는 혈중 알코올 농도 음주 측정해서 술취하지 말라 하니까 술 취할 그 직전까지만 먹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에베소서 5장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하고 그 뒤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술 취할 때까지 먹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어디에 취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에 취하라! 이렇게 되어 있죠.
성령은 안 취해 놓고 술 안 먹었다고 우기는 것은 그것은 그 말씀의 취지를 몰라서 그래요. 자기가 살아온 것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선인줄 알았기 때문에 성령에 취하라는 이 말은 들어 본적도 없죠. 그 사람이 옛날부터 교회를 안 나온 사람은 모르잖아요.
우리 집에는 교회는 안다니지만 술은 안 취해요.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뻔히 알아요. 이게 죄인 줄 압니다. 하지만 가정이 어렵다든지 애가 스마트폰 사달라고 하는데 마침 그 바이어가 와서 변압기 공사하는데 한전에 계시죠. 아이고, 이거 봉투인데 받으시고 우리 업소가 채택되도록 그렇게 압력 넣어주세요. 할 때 보니까 봉투가 두둑해요. 물론 천 원짜리로 불룩하게 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하여튼 무조건 두둑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 다니는 집사라면 교회 다닐 때 잠언 서에 보니까 뇌물은 사람을 망하게 한다. 그것을 알긴 알아요. 알지만 이 돈을 받으면 한 1년간 가정에서 아버지 값을 하고 남편 값을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거예요.
자기 이익 때문에 그것 때문에 못 지키는 거예요.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 죄를 졌고 두 번째는 알면서도 죄를 졌고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것저것 지키기는 자체가 귀찮은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아담과 하와라고 하고 여러분 동산 가운데 선악과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지나 갈 때 마다 선악과나무가 약을 올리듯이 입을 벌려 노래를 부른다고 칩시다.
나를 따먹으면 죽지! 나를 따먹으면 죽지! 하고 약을 올리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소설이니까 성경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1746년 6개월 동안 살았다고 칩시다.
그런데 늘 듣는 게 뭐냐 하면 날 따먹으면 죽는다를 늘 봤다고 합시다. 그러면 약이 오른 아담과 하와가 해결방법은 뭡니까? 방법은 1번, 이사 간다. 이사 갈 때가 없는데 에덴동산이 집인데 어디 이사 갑니까? 2번 아예 나뭇가지를 도끼를 찍던지 과일을 없애버렸다. 몇 번입니까? 2번이죠.
그 2번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본성 아닙니까? 목사가 뭐라 하면 교회 안 나가면 되지 않습니까? 성경이 이래 있으면 성경 이 부분을 째면 된다니까요. 성경 치워버리면 돼요.
과일을 따먹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 과일을 없애버렸어요. 따먹고 없애 버렸어요. 속이 시원하다! 젊은 사람에게 십계명 같은 경우, 나 잊어버렸어! 나 안 볼 거야!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나를 지적질 하는 것을 내가 외면해 버리면 그 다음부터 나는 위반자가 돼요? 안 돼요? 위반자가 안되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은 또 죄에 대해서 그렇지만 자기가 잘난 맛으로 살잖아요. 그러면 그 때는 성경을 보되 자기가 지켰다고 여기는 것만 골라서 줄을 그어 놓고 믿어버리면 자기는 성경을 통해서 지적질 받는 게 아니고 성경을 통해서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당화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 동원되는 게 오늘 읽었던 본문 말씀이에요. 칸트는 그것이 바로 죄라고 보는 겁니다. 골라잡아서 너 이익이 되는 거 네 명예와 네 이름이 빛나기 위해서 골라잡아서 지켰다고 우겨서 기어이 너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한테 최면 걸듯이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그러니까 영생은 따 먹을 수 있어!’ 라고 생각하는 것, 세상에 그런 식으로 말씀을 갖고 모독하라고 말씀을 준게 아니에요.
모든 성경 말씀의 바탕에 뭐가 있느냐? 죽음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말씀은 말씀 자체가 아니라 말씀을 지켜 가다보면 연결되어 있는 그 원천과 접촉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 모든 말씀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지키기 전에 이미 말씀을 다 지킨 분과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니까 우리는 새삼스럽게 아, 이 말씀을 지켜야 영생을 얻겠지! 이렇게 나오겠죠. 그게 하나의 미끼라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지켜야지! 쭉 가다보면 이미 우리가 지키기 전에 지킨 분이 있어요.
그리고 그 분이 이 말씀을 지킨 것과 우리가 지킨 모습이 달라요. 우리는 말씀을 지켜도 우리는 혈색 좋고 밥 잘 먹고 멀쩡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지켜 버리면 어떻게 돼요? 멀쩡한 거예요? 채찍을 맞고 창을 맞고 손바닥에 못이 박히고 피가 흐르는 그런 모습으로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진도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거룩한 사람으로 대단한 사람으로 삐까삐까 빛나는 사람이 돼요.
여러분 교회에서 나같이 말씀 잘 지키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것은 자랑꺼리가 돼 버려요. 게다가 목사는 또 칭찬이 늘어져요.
아이고, 김집사는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세상에 우리 서집사는 그렇게 그동안 애 먹이다가 이제는 신학교 가서 목사가 돼서 그동안 자기 아내를 구박하더니만 이제는 개가천선해서 목회까지 하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훌륭해요. 몸을 질질 끌고 목 조르고 하는 보도는 있지만 우리 서세원 목사님 얼마나 훌륭한지! 얼마나 칭찬을 많이 들었을 거예요.
성경 말씀은 네가 지켜서 영생 얻는 것이 아니고 너를 대신해서 지킨 분에 의해서 영생은 거저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 경로를 밝으라고 네가 너 밖에 모른다는 인간의 그 본색을 밝으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제가 처음에 강의 했잖아요. 이 모든 말씀을 보고 반응을 나타내야 된다고 그 반응이 뭐냐, 숨어있는 우상 숭배적 모든지 나 잘되라고 내 이익 되라고 말씀 지킨다는 숨겨진 악마적 본성이 우리에게 유출되고 노출 될 수 있도록 그러한 계기로 말씀을 주신거예요.
이게 율법적 기능이라는 겁니다. 목사님은 율법시대가 지났는데 뭐 아직도 율법적 기능입니까? 이렇게 비판한다면 십자가 자체가 율법의 완성이에요.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그 십자가 지신 말씀의 완성이 능력이 되어서 이 말씀이 밑에 깔리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 밑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깔려있어요. 말씀 따라 가다보면 물론 성령에 이끌리어 따라 가다보면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피를 만나요.
그 피를 보면서 내가 그동안 지켰다하는 모든 것은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굳히는 주님의 굳히기 작업이에요. 유도에서 굳이기 작업은 30초면 끝나는데 한 판입니다.
우리를 한판으로 죄인으로 한 판으로 엎어치기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 번째 뭐라 되어 있습니까? 나를 감히 지적질해? 안보면 되지 뭐! 여기 지난 시간에 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사업하는 사람보고 이런 소리를 하면 뭐라 하겠습니까?
그들의 변명은 뻔 하지만 뭐라 하겠습니까? 다 내가 잘돼라 하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 내서 교회 선교사 많이 보내기 위해서 합니다. 분명히 되지도 않는 비겁한 변명을 내 놓을 꺼라 말이죠.
선교사 보내는데 네 사업이 잘 돼야 되냐? 그러면 사업 망해서 보내면 안 되느냐? 내가 헌금 십일 조 하겠다는 것은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이런 뜻이에요.
나부터 살게 둔다면 다른 것도 보여 줄 혜택이 있다 이 말이죠. 옛날에 허장강이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이겠는가? 그 허장강 심보하고 똑같은 심보에요.
김마담 이번 일만 잘되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어? 허장강이가 만날 사기 쳐서 여자 등쳐먹고 나중에 다이아몬드도 안주고 내팽개치고 도망가고……. 허준호 아버지 말입니다.
그런 악역을 했다 말이죠. 그거랑 하나님이여! 이번 일만 잘되면 십일조가 문제겠습니까? 십의 2조 내겠습니다. 그거나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고 예수고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거예요. 그거에 대해서 주님은 답답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지금 살아야 될 근거를 대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근거가 뭐 있습니까? 살아있으니 살고자 하는 거죠. 그러면 주님이 말합니다. ‘너 왜 죽는데?’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사람은 도대체 상황 판단을 못합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고 내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군에서 야간 행군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여자 분들은 군에 안가니 모르죠. 야간행군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깜깜하잖아요. 앞에 있는 사람이 플래시를 들고 있어요. 그리고 산길을 가는데 그 사람은 한 길을 한두 번 가본게 아니라 도사가 돼서 길을 알아요.
나머지는 군사는 플래시 같은 게 없어요. 그냥 앞만 보고 가는 거예요. 이게 야간행군이에요. 그냥 밤새도록 걷는 거예요.
인간이란 그런 거예요. 앞에 선배만 보고 가는 거예요. 지금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이게 멸망의 길로 가는 건지 그것도 관심도 없어요. 그냥 지금 내가 여기 있다! 그것뿐 이에요. 내가 여기 있다가 중요하지 내가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무조건 사는데 유리하면 내가 무슨 짓도 다 하겠다 이런 각오로 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말씀은 너무 사치스러워요.
그야말로 진주를 개한테 던진 거나 똑같습니다. 개는 사료만 좋아하지 진주 보석 이런 거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개가 다이아몬드 보고 이것을 팔아서 사료를 한 포대를 사먹을까? 이렇게 계산하는 개가 없잖아요?
인간에게 사료는 뭐냐, 돈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거든요. 아, 천재 같은 개가 있는 모양이네요. 말씀 팔아가지고 돈으로 만들어서 내가 돈으로 살아야 돼! 이런 천재 같은 인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이냐 돈이냐 할 때는 인간은 말씀을 버리고 돈을 채택하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말씀을 지켜서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행함으로 영생 얻어 성공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제가 네 번째 이야기 아직 안했죠. 벌써 세 번째 할 때부터 네 번째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아요. 네 번째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한번 약을 올려봐? 이게 네 번째에요.
첫 째는 소극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어서 아예 내 앞에서 지적질한 것을 다 치워버려요. 말씀이고 뭐고 다 치워버려! 나 어릴 때 빵 얻어먹기 위해서 교회간적 있다. 내 죽을 때나 교회가지 지금 교회 이야기하지 마라! 이렇게 하는 것은 소극적이에요.
그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번 모독해봐? 주의 말씀을 한번 모독해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자기 생의 일종의 즐거움이 되고 취미 생활이 되는 그거!
그런 악질이 있어요. 칸트는 말합니다. 그런 악질한테 모든 인간이 다 종속되어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정망 예리한 판단입니다.
사람이 늘 수비만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공개할 때 아이고 바빠서 못 지킵니다. 내 다음에 교회 갈게요. 수비만 하는 게 아니에요. 어느 정도 돈좀 된다 싶으면 이제는 교회를 다니면서 거기서 자기를 교회에서 절대화시키는 작업에 나섭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곧 취미가 되는 식으로 남들이 나한테 굽실거리는 그 재미, 즐거움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제가 실수했습니다.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기도 좀 오래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기도 달인 되가지고 으스대고 헌금좀 하면 헌금 달인 돼서 으스대기 마련이에요.
반드시 인간의 행동은 본전 뽑고 가시지요? 그냥 가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하는 행동은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티를 안 내면 잠을 못 잘 정도로 그 정도로 최고의 기쁨은 마지막 라이벌을 꺾을 때 생기는 겁니다. 그 마지막 라이벌이 누구냐?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즐거움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어요. 왜냐, 하나님은 최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것을 가지고 사탄의 악이라 했어요. 네 번째가 사탄의 악이에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대드는 거예요.
다음은 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왜 인간은 신의 말씀을 못 지키는가? 인간 속에 근원적인 신에 대적 하는 요소가 능력으로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은 말씀을 못 지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칸트가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그러니까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늘 반성하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 이것을 지적 하는 이유가 뭐냐, 칸트가 도출한 결론은 뭐였습니까? 그래서 뭘 하자? 반성하자! 어떤 때는 이런 이유 때문에 나약하다는 핑계 때문에 어떤 때는 내 이익 때문에 순간 코앞에 이익 때문에 대세를 그르치는 그런 잘못, 세 번째는 귀찮아서 말씀 듣는 것이 짜증나서 못지키고 네 번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놀리고 싶은 이 모든 죄가 우리속에 있으니 우리는 구원받을 길은 이것을 어떻게 한다?
반성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국을 하나의 초월적 모든 선한 것이 다 모여 있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구원론입니다. 이게 맞습니까?
이게 틀리다면 기존교회에서 나와야 됩니다. 기존교회 다 이거 이야기하는데 칸트 이야기하는데 개혁주의 신학 이야기하는데요.
왜 잘못됐냐 하면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 내장되어 있다고 봅니까? 본인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 안에 반성할 능력이 있다는 말은 시간만 무한대로 주어진다면 결국은 인간은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좀 더 어렵게 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반성해서 새 사람 만들기 위해서 말씀을 줬다는 생각이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 생각이 옳은 생각입니까? 틀린 생각입니까?
이게 틀린 생각이라 했어요? 그러면 옳은 생각은 뭡니까? 제가 정답을 이야기하면 아, 그거 내가 아는 건데 이럴 겁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위해서 주신 겁니다. 나 구원하라고 준게 아니에요. 우리는 구원될 자격이 없습니다. 왜?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추방된 정도가 아니에요. 다시 돌아올까 싶어서 아예 에덴의 동쪽을 막아놨어요.
그 의지는 무슨 의지 입니까? 올 생각하지 마라입니다. 너 생명나무 따 먹을 생각하지 마라! 생각조차도 하지 마라! 마귀는 계속해서 너는 영생을 얻어라! 영생을 얻으라는 구절이 있잖아! 나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영생을 취하라 그러니까 네가 시도 해봐! 영생을 얻으라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주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분이니까 네가 지키면 너는 얻을 수 있어!
계속해서 우리의 잠재적 우리의 행함에다 우리의 능력에다가 호소를 해요. 그런데 실상은 뭡니까? 그게 누구의 실패작이었다고? 이스라엘의 실패작이었어요. 그렇게 하면 할수록 또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나밖에 최종적으로 나의 영광으로 귀환되는 악마적 본성을 들추어내는 하나의 덫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율법적 기능으로 말입니다.
율법적 기능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더욱더 죄인을 죄인 되게 하는 기능을 율법적 기능이라 한다말입니다.
제가 방금 뭐라 했습니까? 모든 성경은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증거 해 놓고 그 증거한 그것이 우리에게 혜택으로 주어지느냐? 그것은 주님의 마음대로이고 주님 다음대로 하시는 그 작업이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0313a (이질적인 것)―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사용하시되 택배 상자처럼 찢어서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끄집어낸다고 했죠.
그 방식이 이스라엘 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오늘날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바탕이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하여예요. 자기를 위하는데 여호와가 찾아오니까 여호와가 나를 위한다는 이것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긍정적으로 호응해 주는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 맞죠? 그 점에 대해서는 주님이나 나나 생각이 같은 거죠. 그렇다면 주님의 취지에 맞추어서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잘 협조해서 이스라엘을 제대로 해 봅시다. 라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속에다 뭔가 탄광처럼 파고 들어가요. 그 내부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내부에 대부분 사람이 이스라엘을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질적인 효소가 거기에 들어있어요.
이들이 누구이냐 하면 이들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하나가 엘리야인데 아합이라는 북쪽 임금이 엘리야들 만나 첫마디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엘리야 너는 우리가 지금 지키려고 하고 챙기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서 너는 전혀 협조적이지 않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가 뭐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아합, 이스라엘을 챙기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는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입니다. 라고 했어요.
자,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실체가 같아요? 달라요? 전혀 다르죠. 엘리야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친히 만들어 나갑니까?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 나간 것이고 요압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자기가 여기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쪽에서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중심으로 보이는 이 이스라엘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이 협조 좀 해 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관계에서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두 개의 이스라엘이 생겼으니까 이 둘은 어떻게 됩니까? 둘 중에서 하나가 티가 나야죠. 진짜 티가 나야죠. 그 티가 난 이벤트 행사가 뭐냐 하면 바로 갈멜산에 제단 만들어 놓고 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면 갈멜산에 제단을 해 놓고 850대 1, 바알선지자 450, 아세라 선지자 400 토탈 850명, 이쪽은 엘리야 혼자! 17대 1로 싸웠다는 그런 전설은 있습니다만 850대 1로 싸웠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요.
850대 1로 배틀 들어간 거예요. 들어갔는데 이 850명이 한 행동은 기존에 아합왕이 이스라엘을 규합하고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주는 이스라엘이 맞습니다. 라고 했을 때 거기에 규합했을 때 동원된 원리원칙이 거기 다, 제단 섬기는데 다 동원됐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찌르고 열심내고 자학하고 부르짖으면 주께서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흥분하면 주님도 같이 헌금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전도사가 앞에서 예배 전에 강대상을 치면 주님도 흥분해서 덜썩덜썩, 완전히 주님과 같은 노래방 시스템 됐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질적인 엘리야를 보내서 이질적인 장애요소가 와야 비로소 감추어진 자기의 본색이 드러나요. 이 방법을 여전히 지금도 사용해요.
우리는 다 보니까 다 괜찮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성령께서 십자가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순간 우리는 괜찮다는 것을 믿는 우상숭배자로 들통 나게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만하면 어때서? 이만하면 내가 신앙인답지 뭐! 라는 그것이 예수님 앞에 들통 나면 그게 바로 꼬깃꼬깃 숨겨 놓은 우상숭배의 잔재가 또 남아있어요.
열심히 제단에다 고기를 올려놓고 생고기죠. 가슴 찔러가면서 자학하면서 피 흘리니까 누가 흥분해요? 그것을 보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같이 흥분했어요.
같이 주여! 부르면서 저렇게 우리 제사장들이 희생하는데 신이시여 불을 내리지 않으면 정말 안 됩니다. 내리셔야 됩니다. 자기들끼리 흥분했어요.
주님께서는 아예 흥분을 가라앉히십니다. 불이 떨어져야 될 그 제단에다가 물을 갖다 부어요. 상극되는 물을 붑니다. 율법 통을 붇습니다. 다 갖다 부어요. 부었는데 물을 얼마나 부었는지 물이 제단을 축축 적신 정도가 아니고 흘러 넘쳐 아예 도랑에까지 넘쳤어요.
그러고 난 뒤에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는 하나님꺼잖아요. 딱 한 마디 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나라는 하나님꺼 맞죠? 딱 하니까 불이 떨어졌는데 그 불이 흘러 넘쳤던 물을 따라 가며 다 핥아서 증발시켜 버렸어요.
수증기로 만들어 버리고 물은 하나도 없이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뭐죠? 이게 뭐죠? 그래서 엘리야가 이겼습니까? 엘리야가 이긴 겁니까? 그래서 끝났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된다는 것은 원래 진짜 이스라엘이 우리가 덮쳐서 나를 보이지 않도록 완전히 나를 숨 막히도록 덮쳐버릴 때가 그 상태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상태에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 지시하게 되면 우리가 마중 나와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대화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것을 덮쳐버립니다.
이불 가지고 꼬마를 덮쳐보세요. 아이가 이불속에서 잠 안자고 먹겠다고 까까 먹을 때 엄마가 지금 잠 안자고 뭐해? 과자는 몸에 해롭단 말이야,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하고 빼앗는 것은 그 애를 인간으로 가치 있게 보고 애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아이의 동의하에 과자를 뺏아서 내일 아침에 준다는 이런 교류가 성립되잖아요.
그런데 성격 급한 엄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 소리 안 하고 두꺼운 겨울 이불 가져와 무게 있는 이불을 그 위에 눌러버린다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아이는 숨이 막혀 더 못 먹겠죠. 바로 이런 상태, 대화의 상대로 간주한다? 안한다? 일체 우리를 대화의 상대로 간주해 주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영생이고 이게 구원이에요. 꼼지락 꼼지락 우리가 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여! 해도 그런 것을 일체 주께서는 그것을 덮어버려요. 이불로 덮어 버려요.
구원 받은 사람은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구원 받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구원받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다만 내가 아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지 어떤 식으로 구원받았다는 방법에 대해서 나는 놓쳐버리고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나 모르게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것을 알아서 뭐 할 건데? 그것을 알면 안돼요. 알면 구원에 대해서 자기 값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자기 기여도를 찾아서 그것을 끄집어내서 자기 자랑꺼리로 삼을 수가 있어요.
일방적으로 덮쳐버리면 남들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자랑하죠. 나, 주님이 와서 완전히 인간 말 종으로 전락했어! 완전히 나를 짓밟아 버렸어! 지금 자랑하는 것인지 않으면 불평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진짜 주님 자랑이죠.
주님이 와서 나를 짓밟았다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 돈을 좋아해? 짓밟아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좋은 게 좋다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에요. 앞으로는 돈은 월 25만 원 이상은 쓰지 마시고 24만원 쓰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 25만원 이상 쓰면 돈 사랑하는 것, 이렇게 좋게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돈 일만 악의 뿌리라고 아까 디모데전서 6장에 나오잖아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해 놓고 여기에 액수가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액수가 안 나왔죠.
이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적습니다. “단절된 윤리”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여기 10절에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딱 보는 순간 사람들은 뭐라 생각하느냐, 생활비 빼고 욕심내는 것은 욕심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재벌회사의 생활비가 한 달에 2,500만원이에요. 그래서 2,499만원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게 되고 2천5백만10원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순간에서 자기 정당함이 자기 행동이 딱 턱걸이 할 수 있는 기준을 누가 만들었어요?
본인이 그렇게 정해 버린 거예요. 단발성이에요. 그런데 그 재벌이 하루아침에 망했습니다. 망하고 난 1년 뒤에 생각하기를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하루 소주 한 병 마시는 것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고 두병까지 마시게 되면 그것은 욕심으로 이렇게 바뀌었어요.
전에 2500만원하더니 왜 갑자기 소주 한 병으로 줄었어요. 남들 보기에 대단한 겸손이죠. 그런데 그것도 단발성이에요. 아까 기준 사례와 연결됩니까? 연결 안 됩니까? 이게 단절되어 있죠. 인간의 모든 윤리는 단절성이에요. 왜? 순간순간 자기 잘남을 기어이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아직도 나는 양심이 살아있고 아직도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네가 아직도 네 속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말씀을 준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왜? 누가 뭐래도 내 양심은 내 최후의 보류, 나의 의는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존재의 이유에요. 나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고 누구든지 나는 나 때문에 사는 거예요.
내가 없다면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더 이상 나는 나를 위해서 손을 놓을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게 아니고 누가 말씀을 대신 다 지키고 그 지킨 양상이 뭐라 했습니까? 십자가 죽으심이죠.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빈방을 만들어요. 빈구석, 빈 구멍을 만들어요. 제가 이것을 부산 피 강의 하면서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만약에 2014년 10월부터 예수님을 알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동행한다고 하잖아요.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나는 성화되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말씀대로 살게 되고 전에는 성령 없다고 핑계되고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는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점점 착함을 자기가 나타내는 거예요. 그런데 착함을 찾아내는 방법이 뭐라 했습니까? 이게 단발성 단절된 윤리로 찾아내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변명의 여지를 계속 자기가 만들어 내요.
단발성은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이거 안 되죠. 그럼 단발성 말고 반대말은 뭡니까? 단발성의 반대말은 지속성이라는 거예요. 지속적으로 말씀에 맞춰야 되지 않습니까? 그 지속적인 것은 누가 할 수 있느냐, 찾아오신 예수님이 할 수 있어요.
그럼 동행이 뭐냐? 동행은 이런 겁니다. 우리의 동행은 우리 옆에 주님이 같이 손을 잡고 같이 가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는 동행이라 하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죠. 부부가 같이 동행한다고 결혼을 동행이라 하는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부부가 한마음 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동행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실질적으로 아내 마음과 남편마음이 하나된 적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세요. 너하고 평생을 살아도 네 마음 모르겠다. 이게 솔직한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미투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살아도 몰라요. 심지어 내 속에서 나온 자식도 무슨 마음으로 사는지 모릅니다. 왜 저게 중학교 들어가서 왜 반항하지? 그 이유를 몰라요. 그런데 자식도 남편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죠. 그러면 본인은 본인 마음 압니까?
‘네가 나를 모르는데’ 그런 노래 있잖아요. 타타타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리요. 어떻게 자기 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압니까? 부부도 모르는데 주님의 마음을 안다고요? 몰라요. 동행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동행은 주께서 우리에게 광산 갱도를 만들어 파고들어요. 그래서 여기에 구멍을 냅니다. 어떻게 하느냐 이 모든 말씀은 우리 안에 분명히 핵이 있어요. 그 핵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결정이 되는 겁니다.
그 핵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입니다. “자녀들은 혈육” 혈육, 신체, 몸체입니다. 모든 인간은 몸체를 갖고 있죠. 그 안에 핵이 들어있어요.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인간의 모든 신체는 죽음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도망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게 죽음과 멀리 가는 태도인지 아니면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 죽음에 접근하는 태도인지를 구분해서 죽음과 멀리 달아나는 식이에요.
왜 돈을 좋아합니까? 왜, 인기를 좋아 하고 왜 명예를 좋아하고 왜 친구를 좋아하고 혼자서 왜 외롭습니까? 이게 다 어디서 온 거예요? 우리 안에 핵이 있어요. 핵이라는 말에 적당한 말이 얼마 전까지 저한테 티눈이 있었어요. 티눈이 있을 때 아파요.
티눈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바르는 약이 있고 액체가 있고 밴드처럼 붙이는 게 있어요. 이전에는 바르는 약을 발랐는데 이번에는 붙여봤어요. 10일 지나고 뗐어요. 떼니까 화산에 분화구처럼 시커멓게 구멍이 나버렸어요.
티눈이 있을 때 티눈 있는 그 주위가 살이 전부 다 누구의 살이냐, 누구의 힘줄이냐? 내꺼에요. 내건데 티눈을 제거하고 보니까 내꺼는 맞는데 떨어져 나가야돼요. 그럼 떨어져 나오는 구멍은 어떤 구멍이었냐?
전에 내거라고 착각했던 그것이 있던 현존의 자리였어요. 주께서 말씀으로 와가지고 뜯어내고 구멍을 만든 그 자리가 전에 우리가 마귀를 오야 봉으로 모시고 살던 오야 봉이 우리한테 해 준게 뮙니까?
너는 신이다. 너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 돼! 너 죽으면 끝나는 거야, 네가 어떤 방법과 수단으로든 너는 살아야 돼! 너 죽어서 나중에 지옥가면 안되잖아! 천국가야지!
이게 오야 봉이 우리보고 계속해서 행위를 동요한 거예요. 너는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야고보서 2장을 보지도 못했나? 그거 있데…….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행위가 있어버리면 믿음은 제거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아셔야 됩니다. 야고보서의 말은 믿음에 합당한 행위이지 행위가 믿음을 대체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행위가 믿음을 대체할 수 없어요.
믿음을 구체와 시키는 행위입니다. 그게 뭐냐,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쳤고 기생 라합은 거짓말한 거예요.